《제23강》 율법에서 자유! (롬 7:1-13)
우리가 배운 6장은 우리 옛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서 자기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바로 깨닫는 사람이 매우 적습니다. 왜? 이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7장에서는 말을 바꾸어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을 따지고 보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까? 우리가 율법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의 성령이 깨닫게 하시면 큰 은혜가 될 줄을 믿습니다. /할/
오늘 본문은 지난번에 배운 6;4절의 구절을 다시 해석하는 구절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말은 그 당시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에게 매우 놀랍고도 혁명적인 표현이었습니다. 그 까닭은 모세를 통하여 준 율법을 하나님의 법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율법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율법아래 있을 때는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다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깨어진 그릇과 같이 되어 버린 존재입니다. 옛 생명은 우리의 죄악 된 정욕에 이끌리어 살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것 된 존재! 이 존재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소속은 하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것이 새로워졌고, 또 새로워 져야 합니다. 우리의 지식이 새로워지고, 사상이 새로워지고, 생활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설명을 하기 위하여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었습니다. 그것은 '부부관계, 결혼관계'를 들어서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 1-3절의 내용입니다. ◀제목소개!▶
▶1절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하나의 원리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 있을 동안만 그를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죽고 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엄한 법이라 할지라도 벌받을 사람이 살아 있어야 벌을 주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벌받을 사람이 죽어버렸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컨대 어떤 사람이 법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10년 동안 감옥살이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5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그만 병이 들어서 감옥 속에서 죽어버렸습니다. 그럼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아직도 5년이 더 남아 있으니까 죽은 시체라도 감옥살이를 시켜야 된다". 이렇게 주장할 사람은 없습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총에 맞아 암살을 당했습니다. 범인은 24살 난 '오스왈드'라는 젊은이였습니다. 엄청나게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대통령을 총으로 쏴 죽였으니까요. 그러면 이 '오스왈더'가 무슨 벌을 받았는가? 놀랍게도 전혀 벌을 받지 않았고, 법정에 선 일조차도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가? 제판을 받기도 전에 '오스왈드' 그 자신이 암살을 당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형제들아"라고 부르면서 율법의 원칙과 효력을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만 적용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모세의 율법과 세상적인 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사람으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대한민국 헌법에 의한 적용을 받습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죽어 장사지내고 사망신고를 하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한국의 헌법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2절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바울은 법의 원칙과 효력은 결혼제도, 즉 부부관계를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흔히 결혼은 인륜지 대사라고 합니다. 혼인예식 때, 남녀는 서로 서약을 합니다. 부부의 신의를 다하고 평생 정조를 지키며 백년해로하겠다는 서약을 합니다. 이 서약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결혼과 함께 서로 구속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서로 메이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부부는 평생 동고동락하는 멍에를 져야합니다. 그런데 결혼생활을 하다보면 아무리 이해심이 많은 부부라 할지라도 가끔 싸움이 일어납니다. 요즘은 여자한테 쥐어서 사는 남편이 많답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란" 여인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위치를 말합니다. 원어의 깊은 뜻은 '남편 아래 있는 여인'으로 해석합니다. 지금은 여권신장이나 여성상위시대라 하여 그렇지 않지만 당시 로마서를 집필하던 사회에서는 남성중심 적이었고, 아내는 남편에게 종속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남편에게 법적으로 메이게 된 인생을 살아야하며 남편이 죽으면 이 법적인 효력이 상실되어 남편에게 메인 바 된 상태에서 놓여나게 되는 것입니다.
2절하반절에 "벗어났느니라"의 깊은 뜻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법적 요구가 완전히 폐기된 것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남편의 죽음은 혼인법의 요구로부터 아내를 해방시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재혼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 사실을 들어서 율법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우리를 놓고 볼 때, 율법은 어떤 면에서 남편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항상 우리를 향해 "하라와 하지 말라!"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는 사정없이 우리를 정죄하고 다룹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고심합니다.
해결책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한쪽이 죽어야 합니다. 율법이 죽던지, 우리가 죽던지, 마치 불행하면서도 갈라설 수 없는 부부와 같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죽지 않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12절을 봅시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은 계명과 같습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절대 없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죽어야 합니까?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3절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혼인법의 비유로써 법적 효력이나 구속력은 죽은 자에게는 미치지 않으며 또한 상대방의 죽음으로 소멸됩니다. 이러한 원리는 율법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아까 잠시 말씀드렸지만 어느 한 쪽이 죽어야 그 법에서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봐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우리의 남편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옛 남편인 율법의 속박에 떨며 살아갈 필요가 없고,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신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뻐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4절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4절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본 절은 '율법에서 자유 함을 받은 우리가 이제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법에서 벗어남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잘라서 내게 무슨 힘이 있어서 율법의 사슬에서 벗어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율법의 사슬에서 벗어났으면 이제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마땅하지 않겠냐는 뜻입니다.
우리가 언제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도 죽었습니다. 한 여인이 한 남자에게 시집을 가면 평생토록 그 남편에게 구속되듯이 인간은 누구든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율법의 지배아래 들어갑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준 것은 죄와 심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친히 이 땅에 오사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아래서 죽으신 바 되셨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도 주님과 함께 옛사람이 죽어진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게 되었고, 우리는 이제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 함을 얻었습니다. /할/
이 자유 함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연결됩니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났다면 우리의 자유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주님이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율법에서 속량 받아 자유 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는" 중요합니다. 이 말은 우리를 율법에서 벗어나게 한 목적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접속사입니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나는 율법에서 벗어난 사람이야! 이제 계명을 안 지켜도 상관없어! 지켜도 안 지켜도 상관없이 난 구원받았어! 계명을 어기면 좀 어때! 이미 다 용서 받았는데…" 이런 식으로 율법 무용론과 폐기론을 들고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에서 벗어나게 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 목적을 4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 누구를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율법에서 벗어나서 부활하심으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죽은 다음에 부활하신 주님과 결혼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6장에서 말씀한 것같이 그리스도와 우리는 한 몸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주님이 우리의 신랑으로 우리는 신부로 묘사합니다. 결혼이란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연합, 세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한 몸을 이룬 결혼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왜 주님과 한 몸을 이루게 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을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매 맺는 삶은 무엇입니까? 성결한 삶을 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결하게 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또 롬12:1에서 말씀하신 것같이 우리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귀한 헌신은 뭐니, 뭐니 해도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드림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면 우리는 수지맞습니다. 왜? 우리의 소원을 다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열매 맺는 삶을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7;16-18절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20절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엡5;9절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갈5;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히13;15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전도! 찬양! 기도! 감사! /할/
▶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을 때에는 우리는 육신에 있었고 육신 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그랬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인고 하면, 율법이 오히려 우리의 욕망을 부채질하고 선동을 하고 충동질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이상한 심리가 있죠! 하지 말라고 하면 '하고 싶고' 또 하라 하면 '하기 싫은 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아담도 이런 심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담아 너는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이미로 다 따먹어도 괜찮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듯이 죽으리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하와를 유혹을 했습니다. "괜찮아 일없어 따먹어 이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되는 거야 괜찮으니까? 따먹어" 하와가 그 사탄의 소리를 듣고 나서 선악과를 바라보았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먹음직하게 보입니다. 먹기만 하면 지혜가 똑똑 떨어질 만큼 탐스럽게 보입니다. 따먹었습니다.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것을 보니까 따먹고 싶은 생각에 따먹고 말았습니다. 이게 바로 사람의 심리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밖에 있을 때에 율법이 하라 하지 말라 그랬으면 그 말씀대로 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것이 우리의 욕구를 충동질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즉 예수 믿기 전에, 예수 밖에 있을 때에는 죄와 정욕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열매를 맺었는데 그 열매는 사망의 열매입니다.
딛3;3절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습니다. 갈6;8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6절"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이제는" 이 말은 위대한 전환점, 결단을 촉구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는 율법을 말합니다. 언제? '예수 죽음! 내 죽음!' 이때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났습니다. /할/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관계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부부는 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정으로 산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 주님과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합니다.
▶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①영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요4: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마18;20절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②성령으로 교통하라는 것입니다. 롬8;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 충만이 예수 충만'입니다. /할/
③감사하며, 찬미하며, 기도로 교통하는 삶이 바로 본문이 말하는 영의 새로운 삶입니다.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 할지니라!" 영적인, 생명이 없는 외형적인 모든 종교의식과 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의식적으로 형식적으로는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기쁘게 사십 시요! /할/
▶어느 집사님이 낯선 도시에 출장을 갔는데, 마침 그 날이 주일이라 교회를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호텔 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막상 교회를 찾으려고 하니까 교회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마침 교통정리를 하고 있는 순경에게 "이 근처에 좋은 교회가 있으면 하나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하자, 그 순경이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저렇게 가면은 괜찮은 교회"가 있을 거라고 소개를 해 주었습니다.
집사님은 순경이 소개해 주는 교회를 찾아가서 예배를 잘 드렸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고 기쁨이 충만해서 호텔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그 순경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서 묻기를 "내가 그 교회를 찾아가는 도중에 보니까 여러 개의 교회가 그 중에 있던데 왜 그 교회들은 나에게 소개를 해주지 않고 하필이면 멀리 떨어진 교회를 내게 소개해 주었습니까?" 그 경찰관이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기 때문에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잘 알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교통정리를 하다 보니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데 그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가장 밝고 가장 기쁘고 행복하게 보여서" 내 생각에 그 교회가 가장 좋은 교회 같아서 소개 해 드렸다고 했습니다. ▶깨달음을 주는 그런 말입니다. /할/
▶7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주셨습니다.
12절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도 거룩하며, 율법 속에 기록된 모든 계명들도 거룩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이 허락하신 율법에 무슨 불의한 것이 섞여있을 수 있겠습니까? 율법은 의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율법은 선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주신 것이기에 그 안에는 반드시 선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까? 율법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율법은 죄의 척도가 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은 나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해줍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전연 죄가 되지 않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법에 비추어보면 죄로 판명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바울은 그 한 가지 실례를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십계명 가운데 마지막 열 번째에 해당하는 "탐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빌3;6절에 기록한 대로 그 자신을 가리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딤전1;15절에서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어떻게 그처럼 바뀌었는가?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그 모든 계명들을 철저하게 잘 지켜왔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인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 새롭게 와 닿기 시작했습니다. "탐내지 말라, 탐내지 말라." 바울은 이 계명을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아하! 겉으로 나타나는 것만이 죄가 아니라 마음으로 탐하는 것, 곧 탐심 자체가 죄이구나!" 바울은 이 사실을 비로소 깊이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살인하지 않았다고 큰 소리쳤지만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했었고, 간음하지 않았다고 장담했지만 마음으로는 음욕을 품었었고, 도적질하지 않았다고 자부했지만 마음으로는 욕심을 품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자신의 모습을 비로소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살인자요, 간음 자요, 도적질한 자요, 거기다가 겉으로만 거룩한 체했던 위선자였음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할 때 그 교만했던 바울, "나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큰소리치던 바울이 결국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철저하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우리의 죄를 지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교만을 깨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아울러서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아줍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죄냐?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7절 하반 절에서는 바울은 '탐심'을 죄의 대표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로 탐심이 죄의 근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탐심은 마음속에 있는 욕구를 충돌 질 합니다.
▶8절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죄가 내 속에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가장 큰 죄인 우상숭배의 경우도 그 근본은 탐심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잘못된 욕심이 생겨 그 욕심을 이루려고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범죄 뿐 아니라 살인까지도 탐심에서 오는 것입니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욕심에 살인을 하고 범죄를 합니다. 탐심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상을 섬기지 않으며, 이웃을 사랑하며, 나의 이익을 위하여 남에게 해를 주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바로 알아야 할 것은 은혜의 근본은 사랑이고 죄의 근본은 탐심이라는 것입니다. /할/
▶9-10절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법이 없을 때 '내가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 안에 살면서도 양심의 고통이나 괴로움이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제 계명이 들어오고 보니 양심의 가책을 받음으로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전에 율법을 모를 때는 죄가 사망으로 가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에 그냥 평화롭게 살았는데 이제 계명을 깨닫고 보니 그 죄가 바로 사망으로 가는 것(죄의 삯은 사망)을 알고 '나는 이제 죽었구나'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과 계명을 알 때만이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죽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님의 뜻을 준행하여 생명에 이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받은 사람들이 너무 약해서 그 계명들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살 수 있다는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법을 지킬만한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둑들이 도적질하는 것, 죄 인줄 압니다. 또 남을 폭행하는 것, 거짓말하는 것, 사기치는 것, 다 죄인 줄 압니다. 다만 그들에게 그런 것들을 지킬만한 힘과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0절에서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11절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에게 속았습니다. 죄가 어떻게 바울을 속였습니까? 계명을 이용해서 속였습니다. "그래. 너는 의로운 자야! 너는 살았어."
바울은 되지도 못하고 된 줄로 알았습니다. 자기는 살았고 구원을 얻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도 앞장섰습니다. 그뿐입니까? 다메섹에도 기독교인들이 많이 숨어산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들도 뿌리뽑겠다고 다메섹까지 달려갔습니다. 그래도 내버려두었더라면 바울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영원한 멸망의 자식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참모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죄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기는 살았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죽은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낸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기회를 타서" 계명을 준 기회를 타서 죄가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계명이 오니까 죄가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①계명이 없을 때는 죄를 짓고도 죄 인줄 몰랐으나 계명이 오므로 그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②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여 악하기 때문에 계명에 대한 반발심이 생겨서 더욱 많은 죄를 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를 속이고"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속에서 각양각색의 죄악이 발동하여 나오는 것을 가리킵니다. 인간 속에 있는 부패성을 부지중에 발동하여 일어납니다.
죄의 유혹은 언제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기에는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창3;5절에 뱀이 하와에게 "너희가 하나님같이 되리라" ▶결과는 저주받고, 버림받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죄는 우리를 죽입니다. 생활을 파괴시킵니다. 축복을 가로막습니다. 건강을 짤라 먹습니다. 이렇게 죄는 무섭습니다.
여러분! 죄에서 이기십시오.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믿음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요일5;4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12절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구약의 율법은 전체가 613가지입니다. 그 중 적극적인 것은 하라고 명령한 것이 365가지요, 소극적인 것,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248가지입니다.
십계명은 이 율법의 요약이요 강령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율법과 계명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말합니다. 왜, 율법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율법이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다주고 심판을 행한다 하더라도 그 율법 자체는 의로우며 선한 것입니다.
율법이 있기에 우리는 죄를 알고, 그 죄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있기에 우리는 영적인 교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있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욱 굳게 붙들 수 있습니다.
▶13절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선한 것'이란 앞 절에 있는 대로 율법과 계명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시기 위하여 율법을 주신 것입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막가파 일당이 법정에서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두목은 사형, 그 외에는 무기 징역을 비롯해서 모두에게 중형이 내려졌습니다. 그 순간 저들은 욕을 하면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이 잘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법을 어기고서 죄를 지은 사람이 잘못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과 계명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함이니라."
율법은 죄를 드러내줍니다. 죄로 심히 죄 되게 해줍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민감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자기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면서 살기를 좋아합니다. 문제는 나와 누구를 비교하는가에 있습니다.
예컨대 물질적인 면에서는 꼭 나보다 나은 사람들과 비교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돈이 10억을 가진 사람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주변에 20억이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20억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부자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주변에는 30억, 100억을 가진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대체로 물질적인 면에서는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늘 부족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의의 면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아래를 바라보면서 비교합니다. '그래도 내가 그 사람보다는 더 낫지. 더 의롭지!' 그러면서 되지도 못하고 된 줄로 알고서는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뽑으려고 합니다. 자기 눈에는 들보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제는 비교하는 기준이 서로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 적인 면에서는 물질적인 면에서는 아래를 바라보면서 기준을 좀 낮게 잡읍시다. 그래야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세상에는 저토록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데 저를 이렇게 까지나 축복해 주시다니요!"라는 마음이 절로 생깁니다. 반대로 의의 면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도토리 키재기를 하려고 하지 마십시다.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우고, 하나님 말씀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 프랜시스'가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되어서입니다. 길을 지나가는데 앞쪽에서 문둥이가 한 사람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불러 세우고 복음도 전하면서 기도라도 해주고 싶은데, 왠지 역한 냄새가 나는 것 같고 더러운 생각에 그럴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칩니다. 그런데 계속 마음이 편치를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저 문둥병자를 그냥 지나친 것이 잘못입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물으시기를 "왜 그냥 지나쳤는데?" "예! 더럽게 느껴져서 그랬습니다." "그래. 너는 그 문둥병자보다 나은 게 있었을 줄 아느냐? 너는 그 문둥병자보다 더 더럽고 추한 냄새나는 죄인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너를 그대로 받아주었고 사랑해 주었다"
그 순간 성 프랜시스는 즉시 그의 발걸음을 돌이켰습니다. 그 문둥병자에게로 뛰어가서는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예수님의 사랑을 그에게 전하면서 그를 위해 진정으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났습니다. 성 프랜시스가 어느 동굴 속에서 하루 온종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기도를 통해서 좀 배우고 싶은 기대를 가지고, 동굴 밖에서 그가 무엇이라고 기도를 하는지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성 프랜시스는 그 날 온종일 단 한 가지 말만 되풀이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아울러 제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게 해주옵소서."
여러분! 우리 모두 죄에 대해 더욱 민감해 집시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은 절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절로 달라질 것입니다. 겸손해 집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당부합니다.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 그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왕 노릇하게 하라"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전에는 우리를 죄가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그 죄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으로 우리는 은혜 속에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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