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강》 성도의 내적 싸움! (롬 7:14-25)
빅토르 유고는 <오늘의 문제는 싸우는 것이요, 내일의 문제는 승리하는 것이요, 모든 날의 문제는 죽음의 문제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싸움을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자연(환경)과의 싸움! 인간과의 싸움! 자신과의 싸움!' 그것입니다. ◀제목소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깊은 고뇌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몸부림치며 기도하며 고뇌하신 것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써 피조물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질 것인가에 대한 고뇌이었고, 오늘 본문의 바울의 고뇌는 구원받은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선과 악의 싸움에 대한 고뇌입니다.
바울의 고뇌는 너무나 솔직합니다. 원문 그대로 보면 "원하는 선을 하지 않고, 원치 아니하는 죄를 짓노라, 죄가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나도 모른다. 나 외에 또 다른 내가 나를 지배하고 나를 죄로 끌어간다. 이것이 내 모양이다. 이것이 내 모습니다." 얼마나 솔직한 고백인가?
바울은 예수를 믿음으로 죄에 용서함을 받고 구원받은 것은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신앙 인으로써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주님 오시는 날까지 살아가기 원했는데 마음 한쪽에는 육신 적인 욕망이 도사리고 있어 자아를 자극하여 악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 도다." 바울은 자신 속에서 선과 악이 싸우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에는 영혼에 내적인 싸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있다고 해도 약간이었을 겁니다. 왜? 예수 밖에 있을 때는 부패한 육신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욕대로 살면서 죄의 열매를 맺어도 그 마음에 아무런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예수를 믿고 성령이 주시는 새 영을 받게 되면 새 생명과 육신의 소욕이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갈등이 시작됩니다. 주님의 은혜는 죄 사함을 받고 성령님을 모셔드렸지만 우리 몸에는 아직도 부패한 성품들이 남아 있습니다. 부패한 성품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러한 인간의 소욕을 꺾으려고 합니다.
'마틴 루터'는 "악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 죄를 생각하고, 계획하고, 행동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영혼이기 때문에 육은 아직도 끊임없이 죄 속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왜? 부패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렘17;9절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선과 악이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4절에서 탄식합니다.
▶14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바울의 고민은 육신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육신이란 말이 세 번 나오는데 이것은 살과 뼈가 있는 우리의 몸뚱이가 아니고, 우리 영혼 속에 남아 있는 옛사람, 옛 본성을 뜻하는 말니다. ▶14절(하)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7절(하)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3절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25절(하)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살과 뼈가 있는 육신은 도덕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죄 성이 없습니다. 이런 육신은 죄송한 말씀이지만 고기 덩어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선하면 선한 도구가 될 수 있고, 마음이 악하면 부패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육신은 죄의 속성이 우리 속에 있는 잔존 부패세력을 말합니다. 롬8;8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육신의 생각은 성령을 거슬리고,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 앞에 굴복치 지 아니 합니다.
육신이란 말은 바울은 엡4;22절에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육신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며 육의 지시에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죄악의 도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참지 못하고 옛날 애굽의 생활을 사모하고 고기를 그리워하고, 기름진 것을 그리워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그런 태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 사람, 육신의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율법은 신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신령한 것은 누구 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육신에 속하여" 육체의 부패성, 즉 죄성에 속하며 그 죄에 대하여 저항력이 없는 자를 말합니다. "죄 아래 팔렸도다" 죄의 종이 되어 죄의 주장을 받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롬6;18, 22절에서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 아래 팔렸도다"와 대조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 두 가지 신분을 동시에 지니고 사는 존재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5절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자신이 행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한 것은 지식으로써 그것을 알고 모름이 아니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만 행하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해야 될 텐데 선이 선 인줄 알면서 행할 수 있는 힘이 없고, 악이 죄인 줄 알면서 그것을 잘라 낼 힘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인간이 육신을 입고 사는 이상, 인간의 육신에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부패한 성품이 남아 있습니다. 마귀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 부패한 성품입니다. 이것을 충동질하여 죄를 짓게 하고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합니다.
▶베드로를 한 번 생각해 보자! 그는 예수님 앞에서 큰 소리쳤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단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가식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실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비천한 계집종 앞에서 어이없게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아니야. 나는 그 사람을 몰라." 뒤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나서는 "내가 왜 이랬지?"하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그렇게 약합니다. 믿을 것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잊지 말고 늘 조심하면서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특별히 죄악된 자리에는 아예 가까이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부패한 인간의 육신도 죄악된 자리에 가까이 가면 자기도 모르게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악한 것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아예 흉내조차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만큼 약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사도 중에 사도요 능력 받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이런 훌륭한 하나님의 종인 바울도 이런 갈등 때문에 몸부림치고 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행동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우리가 미워하는 행동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것은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으나 성령의 충만한 생활을 하면 성령이 우리의 정욕과 싸워 주시기 때문에 죄를 짓는 빈도수가 줄어들게 되고, 더더욱 믿음으로 성장하면 죄를 이기고, 끊을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인간은 싸우는 존재입니다. 나 자신과의 싸움도 외적으로 오는 것과, 내적으로 오는 것이 있습니다.
①외적에서 오는 것; 약에서의 요셉이 이 시험을 받았습니다.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집안 총리로 있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높은 신분과 경제력 그리고 여인의 미모를 무기 삼아 날마다 요셉을 유혹합니다. 오늘의 시대는 요셉이 받는 시험을 노골적으로 받는 시대입니다. 영상매체를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선정적이고, 자주적, 노골적인 장면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 외부에서 오는 시험을 이기려면 요셉처럼 피하는 방법이 제일입니다.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창39;9절에서 요셉은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죄를 이겼습니다.
②내적 에서 오는 싸움은 16-17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16-17절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우리는 외적인 모습보다는 우리의 내적인 성결을 지켜야 합니다. 바울이 은혜를 받기 전에는 자기의 겉모습만 보았습니다. 그리고서는 자기야말로 율법의 의로는 아무런 흠이 없다고 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난 뒤에는 달라졌습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비로소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형제에 대한 미움도 있었고, 음욕도 있었고, 탐심도 있었습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참모습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바로 살인자요, 간음한 자요, 도적질한 자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거기다가 자기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영적 교만과 위선 죄까지 범하고 말았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바로 죄인 가운데 괴수요, 가장 큰 죄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내면,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죄 성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죄인 중의 단순한 괴수가 아니라, 죄인 중의 괴, 괴수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의 외적인 죄악을 근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속에 거하는 죄, 내적인 죄를 근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은밀한 것을 살피십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내 속에 거하는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근심하십시다. 바울처럼 내적인 성결을 위해서 몸부림을 치십시다. 겉으로만 거룩한 체하지 말고,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지도록 고민하는 자가 되십시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인간의 삶의 수준을 세 가지를 집 모양에 비유했습니다.
⑴지하실 수준의 삶을 사는 사람; 대체로 지하실은 창고로 사용합니다. 그 속에는 거미줄도 있고, 온갖 잡동사니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습니다. 지하실 수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저 육신의 쾌락만 추구하면서 더럽고 추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⑵거실 수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손님이 오면 거실에 모십니다. 따라서 거실은 대체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 잘 꾸며 놓습니다. 이러한 삶은 자연적 외모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죠. 바리새인들과 같이 속보다는 겉에 많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⑶침실 수준의 삶; 침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곳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거미줄이 있고, 온갖 잡동사니가 있는 지하실과는 다릅니다.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이는 곳이 바로 침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17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죄는 욕심이요, 탐심입니다. 인간의 싸움 중에서 가장 어려운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플라톤은 <인간의 최대의 승리는 자신과 싸워 이기는 것이요, 참는 끈기는 승리 중에 가장 큰 승리요, 자신을 자제하는 것은 가장 큰 용기>라고 했습니다.
인간 내면에서는 두개의 자신이 싸우고 있는데 이것을 괴테는 <영과 육의 싸움>이라고 성경 말씀을 인용했고, 파스칼은 <이성과 정욕의 싸움>이라고 했으며, 바울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투쟁, 마음의 법과 죄의 법과의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거짓된 자기와 참된 자신, 게으른 자신과 부지런한 자신, 무책임한 자신과 책임감 있는 자신, 어리석은 자신과 슬기로운 자신, 이기적인 자신과 이타적인 자신, 교만한 자신과 겸손한 자신, 비겁한 자신과 용감한 자신, 동물적인 자신과 이성적인 자신 등등 이렇게 두개의 자신이 항상 싸우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피를 흘리며 싸우는 싸움은 아니면서 우리 가슴속에서 진지하게 벌어지는 싸움입니다. 이 전쟁터는 우리 가슴속입니다. 모든 종교는 이 싸움에서 승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제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그 기준은 하나님의 거룩 성과 판단에 둘 때, 바울의 고백처럼 '곤고한 사람, 실패자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한마디로 승리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말해줍니다. 이 내적 싸움의 승리의 길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믿는 신앙 안에서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 수단, 방법, 지식, 경험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자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오직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고 자유 함을 주어야 합니다. /할/
성령의 법은 근신하고 깨어 있는 자만이 승리합니다. 벧전5;8-9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우리는 약합니다. 그러나 주의 성령이 우리를 강권하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할/
▶18-20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선한 것을 바라면서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나의 옛 성품 속에는 선한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선한 일을 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한 것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치 않는 것을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살아 있는 죄입니다."
여기서 18절은 17절의 상세한 설명이고 19절은 15절의 반복이며 20절은 17절의 반복입니다.
18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인간적인 부패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나의 나됨을 내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내 행동을 내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속상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정말 어느 때는 내가하는 내 모습이 짜증날 때가 많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 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소설가 스티븐슨은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유명한 작품이 남겼습니다. 지킬박사는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의학박사요, 과학자였습니다. 그러나 지킬박사의 마음속에는 숨은 사람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하이드'였습니다. '하이드'는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야비하고 포악했습니다.
지킬박사는 자신의 지위와 명성 때문에 자기 속에 숨어있는 본능을 억제하고 착실한 생활만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연구를 계속 한 끝에 자신의 마음속에 같이 존재하는 '선과 악'을 떼어내는 약물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는 때때로 그 약물을 먹고서 '하이드'라는 악의 인간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하이드'가 되어 마음대로 나쁜 짓을 했습니다. 길모퉁이에서 부딪힌 소녀를 짓밟고 넘어가기도 하고, 길에서 처음 만난 노신사를 지팡이로 후려쳐 숨지게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하이드'가 경찰에 쫓기게 되자 겁이 난 지킬박사는 본래의 자신으로만 남아 있으려고 노력했으나 숨은 인간 '하이드'에 대한 욕구가 너무 강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마음속에도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있어서 끊임없는 갈등이 오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우리 속에는 '하이드'가 있습니다. 이 '하이드'는 우리 속에 악하고, 음란하고, 야비하며, 추한 생각을 계속 심어줍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이러한 양면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에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기만은 버리지 않겠노라고 장담했으며,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 후에 작은 계집 종 앞에서 주를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인간의 부패성, 연약성 때문입니다.
19절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한다"는 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의 공통된 신앙 체험입니다. 원하지 않는데도 자주 죄를 짓는 것은 바로 육의 성품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할 수 없습니다. 비록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중생 되었다고 하지만 육의 성품이 남아 있어서 정욕에 이끌려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상교회를 가리켜 전투하는 교회라고 합니다. 계속 우리는 싸워 나가야 합니다. 죄와 싸우고 마귀와 싸우고 나 자신과 싸워 나가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지체가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깨어 기도해야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주십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힘으로도 할 수 없고, 능으로도 할 수 없고,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되느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야 합니다. /할/
▶21-23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사도 바울이 신앙을 체험한 후 자신의 심정을 자세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나는 선한 일을 하려는 나에게 악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을 좋아하지만 내 몸에는 또 다른 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내 마음과 싸워서 나는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죄의 종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선을 행하기 원한 속 사람과 함께 악이 있다는 사실을 바울 뿐 아니라 우리 믿는 성도의 공통된 고백입니다. 도둑들의 세계에서도 법이 있답니다. 지금은 범죄가 너무 난폭하고 잔인해져서 사람들의 치를 떨게 합니다.
▶옛날 산도적의 경우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나그네를 때리고 그의 유물을 빼앗아 갑니다. 어떤 때는 무고한 백성의 목숨을 빼앗기도 합니다. 선한 것과는 관계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법이 있습니다. 어떤 도둑이 아프면 다른 도둑이 도와줍니다. 빼앗은 물건을 공평하게 나누기도 합니다. 자기들끼리는 도적질하지 않는 것 등등 그들에게도 법이 있습니다.
또한 도둑들의 세계에도 눈물이 있습니다. 형무소에 간다든지, 생명이 위독하다든지 하면 그들은 서로 도와줍니다. 그들 사이에서도 선행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행은 사회의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기 친구를 도와준다고 해서 자신이 범한 죄가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의리일 뿐이지 선행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그 선행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선은 빛나는 악덕>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이름으로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만 대접하여도 우리 주님은 그 상급을 계산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실로 우리 안에 반대되는 두개의 세력이 싸우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려고 하는 마음과 악을 행하려고 하는 마음이 대결합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마음과 내 멋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이 대결합니다. 선과 악의 대결은 기독교의 특징이요 구원받은 증거가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 선과 악의 투쟁이 없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성도입니다. 선을 행하지 못한 것, 믿음으로 살지 못한 것, 깨닫고 통회해야 합니다. /믿/
그러나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이 투쟁(싸움)에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본문 22-23절은 다음 24절 "나는 곤고한자로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사도 바울의 유명한 탄식에 대한 전제적인 말씀입니다.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자신의 고민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털어놓는 바울의 모습에서 우리는 바울의 위대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구원받은 인간의 깊은 곳에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그 법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지! 기도해야지! 감사해야지! 십일조를 도적질하지 말아야지!" 그러나 이러한 마음에 정반대가 되는 마음이 있어 인간은 죄의 법의 노예가 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법을 준행하려는 마음은 구원받은 성도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호라!(아!)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말씀의 뜻은 '곤고하다. 괴롭다. 비참하다' 라는 의미로 "아! 괴로운 사람이로구나!" 터져 나오는 탄식인줄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구원받은 기쁨이 충만하다고 했는데 왜 이런 탄식이 나올까? 한마디로 구원받은 사람이 자신을 돌아보면서 부족함을 깨달을 때, 이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이 탄식이 없다면 오히려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이 탄식은 긍정적인 탄식입니다. 우리도 이 탄식이 나와야 합니다. 죄를 범했을 때, 이 탄식이 나와야 합니다. 은혜가 떠났을 때,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했을 때, 이 갈등과 가책과 고통의 회개의 눈물이 바로 '오호라'의 탄식입니다. 이 '오호라'의 탄식이 없는 사람은 큰 문제입니다. 거짓 믿음을 가졌거나 버림당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습니까? 성령의 소욕과 은혜의 소욕으로 갈등하고 있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탄식이 있어야 합니다. '오호라의' 탄식은 하나님의 자녀만이 아는 은혜입니다. 이 탄식이야말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건강하게 하는데 절대적인 조건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 치고 이러한 탄식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누구겠습니까? 누구에게나 이런 고민과 몸부림은 다 있기 마련일 것입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바리새인인 시몬의 집에 들르셨습니다. 그때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발아래 앉았습니다.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여인은 그 성에 살고 있는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얼마나 마음이 고통스러웠으면 아무 소리도 없이 그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서 눈물만 펑펑 쏟고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이 세상에 이 여인처럼 죄 짐을 지지 않은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공자도, 석가도, 베드로도, 바울도 다 죄인이었습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라고 보다는 아담의 후손으로서 부패한 육신 덩어리를 가지고 있기에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속에서 끓어오르는 부패한 육체의 소욕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깊은 탄식을 했던 것입니다.
▶옛날 로마 시대에는 아주 무서운 형벌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죄인을 살아있는 채로 죽은 시체와 함께 꽁꽁 묶어 버리는 형벌이었습니다. 코와 코를 맞대고 입과 입을 맞대고 무릎과 무릎을 맞대어서 묶어 버립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구역질이 납니다. 그러나 며칠 동안 굶고 나면 혀로 시체를 핥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시체에서 나오는 독이 스며들어 그 시체와 함께 썩어서 죽도록 만드는 아주 무서운 형벌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부패한 육신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리해서 그는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이 부패한 육신 덩어리에서, 이 썩어 냄새나는 시체에서 누가 나를 풀어주랴."
여러분! 우리도 오호라의 탄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성도라면 반드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죄를 범했을 때는 오호라의 탄식이 반드시 터져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을 때, 갈등과 가책과 회개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오호라의 탄식이 없는 신앙생활은 오히려 비정상일 것입니다.
사람은 발이 땅에 닿아야 제대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물 속에서 발이 땅에 닿기 전에는 그저 허우적거리기만 할 뿐 힘을 제대로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려가고 또 내려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기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기 사망은 죄의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롬6;23절 "죄의 삯은 사망" 그래서 죄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놀라운 사실을 또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24절에서 25절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십시오. 실로 극적인 전환을 보여줍니다.
▶24-25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그저 오호라의 탄식 속에서 몸부림치며, 그 속에서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을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망의 몸에서 건져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터져 나오는 감격스러운 외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할/ 이 외침은 '오호라의 탄식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외침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죄를 한 번 지은 사람도 용서받고, 죄를 백 번 지은 사람도 용서를 받습니다.
▶어떤 권사님이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다가 집까지 사기를 당해서 잃어버렸습니다. 목사님이 그 소식을 듣고 심방을 가셔서 위로했습니다. 그러자 그 권사님은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남편을 잃고도 사는데 그까짓 집이 뭐 그리 대수입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내 아들, 내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준 이 판국에 인간의 죄를 따져서 무엇을 하겠느냐?"
그렇습니다. 죄 많은 인간일지라도 십자가의 공로만 의지하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따지지 않으시고 다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고 그저 '오호라'의 탄식 속에 머물며 죄책감에 떨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비록 죄인 중의 괴수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의 자리로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여러분, 탄식의 자리에 너무 머무르면 안 됩니다. 전에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많이들 울었습니다. 눈물을 많이 흘려야 은혜를 받는 줄 알았습니다. 물론 회개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오호라 탄식할 때마다 재빨리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기뻐 할렐루야를 외쳐야 합니다.
왜? 우리의 상한 마음을 싸매시고 눈물로 씻겨 주실 분이, 우리의 질병에서, 실패에서, 고통에서 건져내실 이가 누구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울다가도 즉각 우리 주님을 봐야합니다. 탄식하는 자리에 오래 머무르면 안 됩니다. 재빨리 십자가의 주님, 부활의 주님을 봐야합니다.
여러분, '오호라'의 은혜가 있습니까? 즉시 '감사하리로다'의 은혜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25절은 24절의 해답입니다.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십니까? 실패, 질병, 고통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주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만이 사망의 몸에서 건지실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믿/
①우리 영적인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죄는 사람의 골수까지 찌르는 듯 아픔을 줍니다. 죄는 우리에게 압력을 주어 고민해서 신음하게 합니다. 그리고 죄는 하나님의 진리를 격발케 함으로 환경을 어렵게 만들고 조건이 엉키게 됩니다. 죄는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바울은 이 죄에서 벗어나려고 고민과 노력 끝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②영적인 사람은 무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깨닫는 자가 복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바로 실천에 옮기시기 바랍니다.
③영적인 사람은 현실보다 미래 지향적인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현실보다 남은 세계로 향하여 달려가려는 노력이 없는 자는 마치 예루살렘으로 낙심하여 엠마로 내려가는 두 제자처럼 의심, 불신, 낙심으로 내려가는 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자주 올라가야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신앙이 독수리가 날개 치며 하늘로 올라가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만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런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넘쳐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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