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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울타리 너머 초월 꿈꾼 ‘위대한 소수자들’ [진리의 발견,마리아 포포바 지음,지여울 옮김/다른]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2. 22. 04:29

시대 울타리 너머 초월 꿈꾼 ‘위대한 소수자들’

등록 :2020-02-21 06:01수정 :2020-02-21 10:21

 

재능과 용기로 미래 조각한 과학, 문학, 미술사 속 여성 지성의 역사
얽히고설킨 관계와 사랑 훑으면서 당시 재현한 마리아 포포바 ‘수작’

진리의 발견
마리아 포포바 지음, 지여울 옮김/다른·4만4000원


그들의 재능은 “태양광선을 한 점에 모으듯” 집중하는 습관이었다.

그들의 위대함은 재능이란 성별, 인종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믿는 윤리였다.

그들의 아름다움은 다양한 존재와 사랑의 형태를 인정하는 솔직함이었다.

그들은 홀로 전진하지 않았다. 지성을 자극하고 영감을 고취하고 친밀함과 사랑의 기운을 불어넣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지혜와 통찰이 담긴 책으로, 위대한 발견의 유산으로, 또는 친구와 연인의 형식으로 서로 함께했다. 인물들의 삶의 무늬는, 직간접적으로 맺은 인간 관계, 타인과 주고받은 영향 속에 담겨 있다. 불가리아 출신의 문화비평가인 마리아 포포바가 쓴 <진리의 발견>은 각종 저술과 편지·메모 등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19~20세기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전개된 ‘여성 지성사’를 빼어난 솜씨로 직조한 태피스트리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에밀리 디킨슨, 마리아 미첼, 레이첼 카슨, 마거릿 풀러. 배서대학·코네티컷대학 아카이브, 위키코먼스, AP/연합뉴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에밀리 디킨슨, 마리아 미첼, 레이첼 카슨, 마거릿 풀러. 배서대학·코네티컷대학 아카이브, 위키코먼스, AP/연합뉴스


꿈꾸는 자만이 깨어난다

여성들의 서사가 뼈대를 이루지만, 이야기는 행성들의 운동 법칙을 발견한 독일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에서 시작한다. 케플러의 어머니는 아들이 지동설에 대한 은유를 듬뿍 담은 에스에프(SF) 소설 <꿈>을 쓴 것이 빌미가 되어 마녀 재판에 회부된다. 고향 마을 사람들과 불화를 빚다가 느닷없이 마녀로 몰린 노모를 구하기 위해 케플러는 고군분투하고, 몇년이 지나서야 무고함이 입증된다. 케플러는 어머니가 애초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된 원인을 ‘여자’라는 데서 찾는다. 남자가 아니라서 교육의 기회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며, 남녀 차이는 천공의 질서가 아니라 성별에 따른 차별구조에서 비롯됐다는 선구적인 주장이다. 케플러를 통해 ‘꿈을 꾸는 자만이 깨어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 포포바는 밤마다 지붕에 올라 별을 관찰한 미국 최초의 여성 천문학자 마리아 미첼(1818~1889)로 곧장 넘어간다. 여기서부터 저자는 시공을 넘나들며 인물과 인물을 엮어내는 현란한 이야기 직조술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미첼의 가족은 노예제 폐지에 찬성하는 퀘이커교도였고, 흑인노예들의 야간 도주를 도우려면 별자리, 천문학에 밝아야 했다. 미첼과 그의 아버지는 각각 천왕성과 핼리혜성을 발견한 윌리엄·캐럴라인 허셜(1750~1848) 남매를 롤 모델로 삼았다. 미첼이 동경한 캐럴라인은 어릴 적 티푸스를 앓아 키가 130㎝에 불과했지만, 천문학자인 오빠의 충직한 조수로서 별자리를 관측하고 이 자료를 수학적으로 계산해 항성 목록을 재작성하는 위업을 이룬다. 미국에서 여성 최초로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의 회원이 되고, 배서 대학에서 천문학을 가르친 미첼의 유산을 이어간 사람은 그로부터 한세기 뒤 배서 대학을 졸업한 베라 루빈이었다. 우주 암흑물질의 존재를 처음으로 입증한 루빈은 미첼이 배서대 최초의 천문학 교수로 임명된 지 딱 100년 뒤에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뛰어난 망원경이 설치된 팔로마천문대를 이용하는 권한을 여성 최초로 받아낸다.

미국에서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일간지 편집자를 지냈으며 <19세기 여성>이라는 역작으로 성차별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한 마거릿 풀러(1810~1850) 역시 미첼이 존경한 여성이었다. <작은 아씨들>을 쓴 루이자 메이 올컷의 아버지 브론슨 올컷과 함께 ‘초월주의자’ 그룹에 속했던 풀러는 미첼이 밤하늘을 관측하고 있을 당시 “나만의 특별한 별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썼다. 그는 <뉴욕트리뷴>의 저널리스트로서 매춘을 양산하는 결혼제도의 모순을 폭로했고 반인권적인 감옥 실태를 고발했으며, 노예제와 사형제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미첼이 열렬하게 사랑한 시인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1806~1861)은 남편 로버트 브라우닝과의 ‘사랑의 야반도주’로 유명하다. 7살 연하의 작가 로버트는 사후 아내보다 더 명성이 높아졌지만, 생전에는 평생 아내의 그늘에서 지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배럿은 시 <오로라 리>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과 계급 문제를 직설적으로 다루면서 예술의 힘과 여성의 강인한 자아를 찬미했는데, 포포바는 이 구절들이 위대한 여성들의 삶에 어떻게 변주됐는지를 보여준다.

마리아 미첼이 교수로 재직했던 배서대학의 천문학과 학생들. 배서대학 아카이브.
마리아 미첼이 교수로 재직했던 배서대학의 천문학과 학생들. 배서대학 아카이브.


가능성의 본보기가 되다

배럿을 정신적 대모로 여겼던 여성 조각가 해리엇 호스머(1830~1908)의 삶도 예사롭지 않다. 석회암을 인조 대리석으로 바꾸는 방법을 고안하고, 의대에서 해부학을 공부한 호스머는 뛰어난 인체 표현 능력으로 명성을 쌓았다. 그는 체로키족과 흑인 혼혈로 태어나 비참한 시련을 겪은 후배 예술가 에드머니어 루이스를 자신의 스튜디오에 받아들이는 등 너른 품새를 지니기도 했다. 비록 영구동력장치를 발명하겠다는 헛된 꿈으로 말년에 파산하지만 호스머는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에너지를 남김없이 펼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후일 호스머의 피렌체 작업실을 방문한 중년의 미첼은 오빠에게 종속된 삶을 살며 자신이 이룬 학문적 업적을 늘 ‘과분’하게 여겼던 캐럴라인 허셜과 비교하면서 “호스머는 가능성의 본보기가 되어 주었다”고 평가한다.

도요새·뱀장어·고등어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바다의 무한한 생명력을 묘사한 <우리들의 바다>를 쓴 레이철 카슨(1907~1964)은 과학과 문학을 통합하는 새로운 글쓰기의 지평을 열어젖혔다. “‘아는 것’은 ‘느끼는 것’의 절반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카슨은 암과 싸우면서도 디디티(DDT) 남용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를 경고한 <침묵의 봄>을 펴내 인간의 ‘환경범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800여쪽 가까이 되는 방대한 분량으로 카슨의 삶까지 훑은 포포바는 책의 말미에서, 다시 마거릿 풀러로 돌아간다. 카슨이 사랑했던 바다에서 세상을 떠난 마거릿 풀러. 포포바는 폭풍에 조난돼 때아닌 죽음을 맞은 그의 삶을 애도하면서 수백년 동안 얽혀온 지적 생태계의 사슬 잇기를 마무리한다.

미국의 최초 여성 조각가인 해리엇 호스머가 제작한 청동 작품 <브라우닝 부부의 맞잡은 손>. 호스머는 영국의 작가 부부인 엘리자베스 배럿·로버트 브라우닝과 친분이 두터웠고, 특히 배럿을 대모처럼 가깝게 여겼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미국의 최초 여성 조각가인 해리엇 호스머가 제작한 청동 작품 <브라우닝 부부의 맞잡은 손>. 호스머는 영국의 작가 부부인 엘리자베스 배럿·로버트 브라우닝과 친분이 두터웠고, 특히 배럿을 대모처럼 가깝게 여겼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퀴어의 삶을 확장시키다

진리를 향한 여성들의 투쟁사에서 한층 풍미를 더해주는 것은 ‘러브 스토리’다. 이 책에 나오는 여성들은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등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 동성을 사랑하거나, 이성과 동성 양쪽을 모두 사랑하는 성소수자다. 카슨은 40대 후반에 우연히 만난 50대의 유부녀 도로시와 12년 동안 900여통의 연서를 주고받았으며, 두 사람이 나눈 개인적 편지는 금단의 과일을 뜻하는 ‘사과’로 불리며 금고에 보관됐다. 마거릿 풀러는 지적 공감대가 깊은 랄프 왈도 애머슨과 질투하는 그의 아내 사이에서 초조한 줄타기를 하고, 자신이 연모하던 샘과 애니가 사랑에 빠져 결혼하는 ‘이중의 배신’을 겪기도 한다. ‘은둔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66)은 사랑하던 소녀 수전이 자신의 오빠 오스틴과 결혼하는 아픔을 겪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사후 디킨슨의 저작권이 오스틴과 밀회를 가져온 수전의 ‘연적’ 메이블에게로 돌아갔다. 해리엇 호스머는 사랑에도 거침이 없었다. 의무와 책임을 여성들에게 더 강요하는 차별적 상황을 감안할 때 여자 예술가가 결혼한다는 것은 “윤리적으로 잘못된 일”이라고까지 말했던 호스머는 죽을 때까지 동성의 연인과 수십년간의 사랑을 당당하게 이어갔다. 포포바는 “호스머의 유산은 그녀 자신의 존재,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로 한 선택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가능성을 넓혀주고 그들의 삶을 확장시켜준 방식에 있다”며 많은 퀴어 남녀들은 호스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짚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300년에 걸쳐 남성과 여성의 삶을 모두 경험하는 인물을 등장시킨 <올랜도>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인간에게는 그 자신에게 할당된 시대가 각기 따로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온 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시대의 울타리 그 너머를 바라봤다. 물론, 초월을 꿈꾼 이들에겐 대가가 따랐다. 71살에 세상을 떠난 마리아 미첼을 추도하는 신문 기사는 시대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했던 이들의 외로움을 이렇게 묘사했다. “재능 있는 이들은 높이 올라가야 하지만 너무도 자주 홀로 올라가야 한다. 그 아래의 평원에서 즐거운 대화가 오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대화에 함께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앞서나간 자들”에 대해 포포바는 말한다. “자신의 삶을 통해 앞으로 다가올 세대의 정신이 머물 장소와 가능의 지도”를 다시 그렸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바꿈으로써 세계를 변화시켰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