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호 목사 설교

[스크랩] 유대인 그비밀/미국 사회의 유태계 커넥션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9. 21. 08:41

유대인 그비밀/미국 사회의 유태계 커넥션

 

1950년대 美 공산당(CPUSA)원 과반수가 유태인      
한 때 찬란한 문명과 세력 판도를 자랑했던 이집트, 그리스, 로마, 메소포타미아, 페르세폴리스, 오스만 투르크 제국도 결국은 쇠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유태인만은 아직도 고유의 문화와 종교를 고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언제부터인지 미국의 신문, 잡지, TV의 보도를 보면 이스라엘 또는 유태인 문제가 미국의 국내문제와 비슷한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에 본지는 미국의 유태계 커넥션에 대해 알아본다. <편집자주>

현재 미국 내 유태인 숫자는 약 700백 만 명 정도(미국 전체 인구의 약 2.5%)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총인구 2억 8천 1백만 명 중 백인이 1억 9천4백만 명(69.1%), 히스패닉계가 3천5백만 명(12.5%), 흑인이 3천 3백만 명(12.1%), 아시아계가 1천 1백만 명(3.6%)인 것에 비하면 매우 미미한 숫자이다. 그러나 미국 내 유태인의 영향력은 전혀 인구와는 비례하지 않는다.

20세기 초 석유왕으로 불리던 록펠러(John D. Rockefeller) 그는 독일에서 이주한 유태인의 후손이다.

유태인이 미국에 최초로 정착한 역사는 1654년 7월 8일 바르심슨(Jacob Barsimson)이라는 네덜란드계 유태인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본격적인 유태인의 미국 이민을 1840~1880년간 있었던 독일계 이민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러시아, 동구계 이민으로 본다면 약 150년 정도의 이민역사밖에 되지 않으며, 오래된 가계(家系)라 해도 많아야 평균 3~4대 정도의 뿌리를 갖고 있다.

日, 전후 유태인에 대해 면밀히 연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미국의 유태인들은 세계 최강국인 미국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유태인이 미국이란 초강대국의 막후에 숨어 세계경제를 맘대로 주무른다는 이른바 ‘유태인 음모설’은 미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유행이었다. 특히 일본의 경우 2차 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줄곧 유태인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해왔다. 실제로 1980년대 일본 서점 가에는 ‘유태코너’라는 것이 있을 정도로 유태관계 서적이 붐을 이룬 적도 있었다.  

▲정치 분야 : 남북전쟁 이전까지 미국 내 유태인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며 부(富)를 축적한 반면 정계에는 많은 인물을 진출시키지 못했다. 이는 만약 유태계 인사들이 미국의 주요 정치적인 상*하의원이나 또는 주지사에 많이 진출하게 되면 일반인의 반감, 나아가서는 반(反)유태주의로 연결될 수 있다는 우려를 염두에 둔 신중한 자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 같이 각자가 능력만 있으면 어떤 직종에나 접근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유태인도 현실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1970년대 이후부터는 유태인도 상*하원에 속속 진출하기 시작했다.

미국 유태인의 대다수는 매우 리버럴하다. 이로 인해 이들의 정치적 성향도 자연히 보수적인 공화당보다는 상대적으로 소수민족을 우대하며 리버럴한 성향을 띤 민주당 선호로 기울어져 있다. 과거 미국 유태인 중에는 사회주의자도 많았다. 더욱이 미국 내 정치색이 짙은 각종 사회활동(노동*여성운동)에는 유태인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단체와의 연대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당에 대한 지지가 고착될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 공산당원 과반수가 유태인

1886년 시가(담배) 제조 노동자들의 조합을 이끌던 유태인 사무엘 곰퍼스(Samuel Gompers)가 창설한 미국노동총연맹(AFL)의 경우 1904년 1백75만 조합원을 거느린 미국의 대표적인 노동 조직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1960년대 이후 흑인 민권운동을 성원한 주축세력도 유태인이었으며, 월남전 이후 기승을 부리던 인권단체 등의 지도부 역시 거의 유태인 일색이었다.

일례로 1921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유대인이 차지했던 비율은 33.5퍼센트였으며 평당원 수준에서는 40퍼센트를 차지했다. 1950년대를 거쳐 5만 명에 달했던 미국 공산당에서 유대인은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으며 이들에 있어 입당자의 숫자는 항상 탈당자의 숫자를 상회했다.

다른 민족출신들에 비해 인구비례상 유대인의 공산당 입당율은 10배가 넘는 것이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비슷한 숫자의 유대인 사회주의자 및 무정부주의자들과 같은 좌경급진주의자들이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Nathan Glazer, The New Left and the Jews, 1969) 1920년대 초반부터 미국 공산당은 소련으로부터 물질적, 정신적인 지원을 받으며 미국 내에서 소련의 입장을 옹호하고 소련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한편 지하에서는 소련 비밀경찰의 지령에 따라 미국에 대한 간첩임무도 수행했다. (1947년 소련에 원자폭탄 비밀을 넘긴죄로 처형된 유대인 로젠버그 부부 역시 미국 공산당 당원이었다.)

1930년대 미국에서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이 심어놓은 공산주의 지하세포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으며 1947년 스미스 법안에 의해 기소된 공안사범들 가운데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다. 폴란드와 러시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실상 유대인의 운동이었던 공산주의를 만인 보편적인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미국 공산당의 유대인 수뇌부는 간부들을 상대로는 그들의 이름을 미국식으로 개명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했고 외부의 눈에 띄는 직위에는 항상 지방출신의 비유대계 인물을 배치했다. (Source: H. Klehr, Communist Cadre, 1978; N. Glazer, The New Left and the Jews, 1969; K. Kann, Joe Rapoport, 1981; Klehr, Haynes & Firsov, The Secret World of American Communism, 1995; A. Liebman, Jews and the Left, 1979)

특히 유태계 좌파 핵심세력들은 미국의 베트남 완전철수를 요구했으며 이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자 공산주의자들의 완전한 승리를 원하기도 했다. 특히 반전론자들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발생하자 美 의회 앞으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다.

미국의 외교정책을 증오했던 사람들 그리고 존 케리(John Kerry*체코계 유태인)와 제인 폰다(Jane Fonda)처럼 낭만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은 미국의 북 베트남 폭격을 비난했다. 뉴욕 출신의 여성 국회의원이었던 벨라 앱저그(Bella Abzug*유태계 페미니스트)의 경우 수천 명에 이르는 남부 베트남의 정치범 석방을 주장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유태인은 낙태문제, 정교분리 등 주요 사회문제에 있어 민주당보다 더 개방적이다. 특히 각종 선거 때마다 미국 일반인의 평균 투표율은 53%인데 비해 유태인의 투표율은 80%를 넘는다. 1992년 대통령 선거 이후 있은 출구조사를 보면 유태인 78%가 클린턴(민주당)에게 투표하고 12%는 부시(공화당), 10%는 페로(무소속) 후보에게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태계, 공화당보다 민주당 지지

유태인들은 지지하는 후보의 당락에 상관없이 평균 55~65%가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고, 약 10%선이 공화당후보에게, 그리고 나머지는 리버럴 혹은 무소속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Jewish Power’, 1997년 판) 특히 친(親)유태적 성향이 강했던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은 4선 모두 유태인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반대로 유태계 혈통이지만 보수주의자 이었던 골드 워터(Barry Goldwater) 공화당 후보의 경우 1964년 대선서 약 10%의 유태인 득표에 그쳤다.  

한편 부시 가문(家門)의 경우 유태인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現 부시 대통령의 동생인 젭 부시(Jeb Bush)가 플로리다 주지사 출마했을 때 유태인들은 멕시코 인을 아내로 맞은 그를 낙선시키려고 했고, 2000년 대선의 플로리다 재검표 사건 때도 유태인들이 고어 편에 서서 부시를 낙선시키려고 법정투쟁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지난 美 대선직전 여론조사 기관인 ‘그린버그 리서치’가 유태인 유권자 81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5%가 민주당의 존 케리(체코계 유태인)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힌 것을 보면 이러한 현상을 잘 이해 할 수 있다.

특히 세계적인 헤지펀드 업계의 대부인 조지 소로스(헝가리계 유태인)는 지난 대선에서 전례 없는 반(反)부시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반(反)부시 단체인 ‘함께 가는 미국’(America Coming Together)에 1000만 달러 기부를 약속한 뒤 500만 달러를 전달했으며, 부시 정책을 반대해온 인터넷 시민단체 `무브온`(Move On)에 250만 달러를 지원하기도 했다.

당시 부시의 재선을 막기 위해 소로스가 기부를 약속한 돈은 드러난 것만 1550만 달러(한화 약 180억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화당의 조직이 부시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치고 동성연애자 결혼 허용 반대의 기치를 내걸면서 전체 유권자들의 3분의 1이나 되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부시는 재선에 성공했다.

▲경제 분야 : 지난 2000년 10월 ‘포브스’誌가 발표한 미국의 4백대 자산가 가운데 유태인은 64명(16%). 유태인의 인구비율(2.5%)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이 같은 유태인의 경제력은 지난 85년의 부호 순위 점유율 26%를 정점으로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막강하다.

특히 지난 18년간 FRB(美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의장으로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해온 앨런 그린스펀은 뉴욕 태생의 유태인이다. 뿐만 아니라 M&A의 ‘달인’인 시티그룹의 샌 포드 웨일,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인 AIG의 모린스 그린버그, 메트라이프의 로버트 벤 모세, 리만 브라더스의 리처드 풀스, 골드만 삭스의 헨리 폴슨 회장 등이 모두 성공한 월가(Wallstreet) 유태인들이다.

美 연방은행(연준)의 전경. 연준은 사립은행의 집합체로 주요 소유자는 록펠러, 골드만 삭스, 로스차일드 등의 유태계 재벌이다

FRB는 상업어음의 재할인이나 공개시장의 조작으로 각 지구의 금융통제를 맡고 있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오늘날 FRB가 공개수수료를 얼마만큼 올리느냐 내리느냐에 일희일비하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FRB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금융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로 FRB는 사립은행의 집합체로 직접적인 FRB의 주요 소유자는 록펠러, 골드만 삭스, 로스차일드 등의 유태계 재벌이다.

그린스펀 후임 유태계 될 가능성 높아

실제로 미국의 ‘Yellow Page’(업종별 전화번호부)를 보면 ‘연준’은 정부기관란이 아닌 민간기업란에 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영국의 중앙은행이다. 영국의 중앙은행은 원래 로스차일드 가문의 개인 소유 은행이었다가 1946년 노동당 정부가 국유화 했다. 공식적으로는 국가 소유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민간은행의 성격을 띠고 있다.

로스차일드家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일어났다. 제1대인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1744~1812)는 아들이 5형제가 있었다. 그는 아들들을 모두 어릴 적부터 상인으로 철저하게 훈련시킨 다음, 당시의 유럽 5대 도시에 파견했다. 5대 도시는 프랑크푸르트, 비엔나, 나폴리, 파리, 그리고 런던 이었다. 5형제는 모두 각 도시에서 금융업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로스차일드가는 돈을 꿔주는 입장에서 전쟁이 날 때마다 더욱더 발언권을 얻게 되었고, 강력한 세력으로 중앙은행을 지배했다.

로스차일드家의 금융 지배력은 유럽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됐다. 그것은 바로 FRB를 통해서였다. 실제로 미국 내 유태계 은행들은 국제적으로 연대하기 때문에 순이익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미국 5대 은행(시티, BOA, J.P.모간 체이스, 와코비아, 웰스파고)은 체이스 맨하탄과 J.P. 모건 등의 유태 재벌이 직영하고 있으며 BOA(뱅크 오브 아메리카)는 유럽의 로스차일드와 제휴하여 많은 지원을 받고 있다.

한편 오는 2006년 초 임기가 끝나는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의 후임도 역시 유태인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 인물이 하버드대의 마틴 펠드스타인 교수이다. 지난 82년 레이건 행정부 시절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을 지낸 펠드스타인 교수는 現 부시 행정부의 경제정책을 이끌고 있는 로렌스 린지 백악관 경제보좌관, 글렌 허바드 대통령 경제자문위원, 로저 퍼거슨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부의장, 로렌스 서머스 前 재무장관 등의 제자를 길러냈다.

▲매스컴 : 유태인 파워는 美 언론계에서도 막강하다. 20세기 들어와 미디어의 위력은 날로 확대되고 정치도 여론에 의해 움직이며 이 여론도 결국은 언론에 의해 만들어지므로 언론은 모든 국가권력을 압도 할 수 있는 새롭고 강력한 특수기관으로 성장했다. 유태인은 리버럴한 데다 탈무드의 영향으로 이지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및 경제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언론*영화*정보 산업의 속성에 꼭 들어맞는 기본 훈련이 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7대 메이저 영화사 중 6개가 유태계 소유

미국 언론계의 유태인은 전체 종사자의 6%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 언론인이 커다란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이유는 이들이 거의 모두 주요매체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유태 언론인의 27%는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인 워싱턴 포스트(WP), 월스트리트 저널(WSJ), 뉴욕타임즈(NYT), 타임, 뉴스위크 및 CNN, CBS, NBC, ABC 등 TV 4사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 유태 언론인들은 여론을 만들고 확산하는 위치에 있는 주필, 정치평론가, TV 뉴스쇼 제작진 등의 요직에 많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소수 정예의 특성을 갖고 있다. 특히 뉴욕 타임즈(사주인 ‘아서 옥스 설즈버거’가 유대인), 월 스트리트 저널(사주인 ‘앤 드류 스타인’이 유대인)의 경우 대표적인 친(親)유태계 언론이다.  

1947년 소련에 원자폭탄 비밀을 넘긴죄로 처형된 유대인 로젠버그  

뉴욕타임즈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유태계 칼럼니스트는 닉슨 대통령의 연설집필을 한 적이 있는 윌리엄 새파이어(William Saphire)와 아브라함 로젠탈(Abraham Rosenthal), 프랭크 리치(Frank Rich)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새파이어의 경우 지난 1993년 12월 이스라엘에 비우호적인 바비 인맨(Bobby R. Inman) 전 CIA 부국장의 국장 임명을 반대하는 내용의 칼럼을 통해 그의 임명을 저지한 일도 있었다.

방송의 경우 윌리엄 페일리(前 CBS 사주), 앤드류 랙(前 NBC 사주, 現 소니뮤직 최고 경영자) 및 레오나드 해리 골덴슨(ABC 사주)등이 유태 언론의 중추로 볼 수 있다. 한편 AP, UPI, AFP, 로이터(Reuter)등 세계 유수의 통신사들이 모두 유태인 소유이다. 뿐만 아니라 할리우드 ‘7대 메이저 영화사’ 중 6개의 영화사 (파라마운트, 20세기 폭스, MGM, 워너 브러더스, 콜롬비아, 유니버설)가 유태인이 설립한 기업이다.


존 케리, 베트남전 당시 반전 주도

지난 美 대선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존 케리가 유태계란 사실은 ‘Boston Globe’(2004년 2월 2일)에 의해 밝혀졌다. ‘Boston Globe’는 2002년에 지방출신 상원의원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라면서 케리의 조상을 조사했다.

원래 케리는 아일랜드계 이름인데 조부인 프리츠 콘(Fritz Kohn)이 오스트리아에 살 때 가톨릭으로 개종해 프레데릭 케리라고 이름을 바꿨다. 프리츠는 1873년생이지만 그가 산 시대는 유럽에서 반(反)유태주의가 고양된 시기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주류 종교는 가톨릭이었다. 유태인 박해를 피하기 위해 프리츠 콘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902년에 미국으로 이민 온 프레데릭 케리와 그의 부인 이다(Ida Lowe)는 자식들을 가톨릭교도로 길러내며 유태인임을 은폐했다. 프레데릭 케리는 아들 리챠드(Richard Kerry*케리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아버지)가 여섯 살 때 총으로 자살했다. 자살원인은 사업 실패였다.

리챠드의 부인 즉 케리 후보의 어머니는, 로즈마리 포브스 케리(Rosemary Forbes Kerry)라는 본명을 지니고 있으며 포브스 가문의 딸로서 파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포브스 가문은 잡지 ‘Forbes’ 로 유명한 대재벌이다. 한편 케리는 예일 대학 재학 때 ‘해골과 뼈(Skull and bones)`라는 비밀조직에 가담한 뒤 미국 상류사회의 구성원들을 친구로 삼았다. 그리고 그는 `해골과 뼈` 조직의 친구를 통해 첫 부인인 줄리아 손(Julia Thorne)을 만나기도 했다.  

케리가 자신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 제대직후 정훈장교 출신으로 반전시위를 주도하면서부터였다. 그는 1971년 전국적 조직인 반전베트남참전전우회(VVAW)에 조직과정에 참여해 단체의 대변인을 지냈으며 당시 반체제 인사로 유명한 여배우 제인 폰다와 미국사회의 대표적인 급진주의자였던 램시 클락 장관 등과 친교를 맺으며 반전시위를 주도했다.

케리가 앞장선 반전 시위대는 베트콩이 내세운 평화조약을 지지했으며 베트콩의 국기와 모택동의 사진 등 중국, 쿠바, 소련, 북한 등 공산국가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공산정부에 대한 케리의 호의적인 인식은 1990년대 상원의원으로서의 활동에서도 드러난다. 케리는 1991년 전쟁포로에 관한 상원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베트남과의 외교수립에 방해가 되던 전쟁포로 문제를 무마시켰으며 베트남의 인권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비생산적’이라고 주장했다.

반전운동을 주도하는 케리의 모습

중국의 천안문사건 발생 이후 5년이 지나 열린 1994년 5월 상원 청문회에서는 “미국은 아시아의 가장 강한 군사 대국인 중국과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면서 중국의 최혜국대우와 중국의 인권문제를 연결시키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케리는 민주당 대선후보로 지난 해 뉴욕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 문제에 대해 “미국은 북한과 양자대화에 나서야 한다”면서 “백악관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이 김대중 전 한국대통령을 좌절시켰다”고 말했다. 이에 북한의 중앙뉴스는 케리 후보의 연설을 자세히 보도한 바 있으며 케리에 대한 지지 입장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필재 기자 spooner1@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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