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분이 가까워오는 9월 20일 토요일, 남도의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모처럼 광주에 들러 친구들과 만나 오랜만에 맛있는 남도의 음식, 생고기 비빔밥을 먹은 뒤 광주-해남의 쭉쭉 뻗은 도로, 길 양옆에는 벼가 익어가느라 황금빛 물결이 바람따라 일고 있는 아름다운 풍경, 참으로 한가한 마음으로 차 창밖을 내다보며 달리고 달렸습니다. 행사가 시작되기 얼마 전, 우리는 해남군청 곁에 있는 해남문화예술관에 도착했습니다. 조선 시대의 해남현 관아가 있던 군청의 앞 광장에는 수백 년 전 노거수,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몇 그루 정정하게 서서 지나간 역사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 다른 감옥으로 압송되어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옥일까 대구옥일까 아니면 대전옥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는 아버지의 논으로 가고 싶다 ··· - 김남주 < 이 가을에 나는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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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를 쓰다가 50세도 못되어 세상을 떠나버린 김남주 시인의 20주기를 기념하는 ‘문학제’에 참석하려고 찾아온 길이었습니다.
문학제가 개막되고 나는 김남주를 못 잊고 그리워하는 회고담으로 인사말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영상물에서 김남주의 육성으로 < 이 가을에 나는 >이라는 시가 낭송될 때, 그 절절한 자유에의 그리움을 들으면서 눈물이 쏟아짐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순간에 또 유배살이의 서러움에 잠겨 그곳에서 자유를 찾아 탈출하고 싶어했던 다산 선생, 김남주가 그렇게도 좋아했던 다산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가을바람 흰 구름에 불어 푸른 하늘 가린 것 없구나 이 몸도 갑자기 가볍게 느껴져 훌쩍 날아 세상으로 나가고 싶네 |
秋風吹白雲 碧落無纖翳 忽念此身輕 飄然思出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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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白雲)」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다산의 시입니다. 경상도 장기라는 첫 번째 유배지에서 처음 맞는 가을, 창살 없는 감옥인 유배생활, 그런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싶던 다산의 자유에 대한 그리움, 오라와 쇠사슬에 묶여 이감을 가면서 차창을 내다보다 들에서 일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곁으로 자유롭게 가고 싶다던 김남주의 그리움은 왜 그렇게 정확하게 일치할 수 있었을까요.
무서운 것은 권력욕입니다. 자신들의 권력욕 때문에 큰 죄도 짓지 않은 다산을 유배 보내고 김남주를 감옥에 가뒀던 독재자들의 앙심이 미워만 질 뿐입니다.
전국에서 모여든 작가회의 회원들과 김남주를 못 잊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김남주 20주기 문학제를 그런대로 잘 치렀습니다. 밤에는 땅끝의 명찰 「미황사」에서 템플스테이로 숙박을 했습니다. 금강 스님의 따뜻한 배려와 우화 보살님의 우정어린 안내로 아침 산책까지 마치고 공양도 제대로 대접받았습니다. 아침 공양을 마친 우리는 해남 봉학리의 김남주 생가에 들러 남주의 흔적을 살폈습니다. 남주의 동지이자 아내였던 박광숙 여사와 그의 아우 김덕종 등과 함께 사진도 촬영한 뒤 그곳을 떠나왔습니다.
패악한 독재자들이 언제쯤 세상에서 사라질 날이 올까요. 민족시인 김남주와 민족 최고의 학자 다산 선생이 자유를 잃고 묶여 살았던 아픔을 기억하면서 이번 여행은 자유의 가치를 일깨웠던 시간이었습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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