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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대 신곡문학상 수상자 작품 / 양미경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11. 7. 14:53

 

나이 들면 보이는 것들 - 동피랑 벽화마을에서

 

                                                                         양 미 경

 

 

나이가 들수록 사물을 보는 눈은 침침해지지만, 그 사물의 내면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보는 눈은 깊어지는 것일까.

 

얼마 전 동피랑 마을을 찾았다. 왜 갑자기 그곳 언덕 가파른 마을을 올라가볼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아마 봄 햇살이 따스해서였을 것이다.

 

동피랑은 이름 그대로 ‘동쪽 벼랑’이라는 뜻이다. 통제영(統制營)의 동쪽 바다를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한 포가 설치되었던 언덕 꼭대기가 동포루(東砲樓)이다.

 

시에서는, 좁은 골목을 따라 다닥다닥 붙은 낙후된 이 마을을 철거한 뒤 동포루를 복원하고 언덕 전체를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었다. 그즈음 한 시민단체가 발 벗고 나서서 ‘동피랑 색칠하기-전국벽화공모전’을 열었고, 전국의 미술대학생과 일반인들이 모여 담벼락과 축대에 벽화를 그렸다. 그 후 관광명소로 탈바꿈하면서 보존 쪽으로 정책이 바뀌었고, 타 지역 예술인들이 작업할 수 있는 공간도 서너 채 활용되고 있다.

 

사실 나는 그게 관광객이 탄복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환경은 열악하고 공간은 좁고 오르내리기 힘든 비탈길은 그대로 일 테니.

 

그런데 오랜만에 가본 동피랑은 생각과는 달랐다. 마을은 예전 그대로인데 정경은 사뭇 달라 보였다. 천천히 걸으면서 숨 차는 데까지만 갔다 오리라던 생각은 바뀌고 말았다. 마을입구에 설치된 ‘트릭아트 포토존’에선 연인들이 추억 만들기에 바빴고, 갤러리에서는 전시회가 한창이었다. 마을 뒤쪽 동문로에는 차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관광객들은 ‘천사의 날개’ 앞에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부모들과 여행 온 아이들은 행복해 보였고, 힘들다며 투정하는 여자 친구를 다독여주는 젊은이의 모습도 정겨웠다.

 

쉬엄쉬엄 이곳저곳을 다니다보니 어느새 동포루에 다다랐다. 그곳에 서서 내려다보니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고, 강구 안으로 들고나는 어선들도 보였다. 비좁고 열악했던 동피랑 마을이 이제 통영바다를 배경으로 비로소 아름답게 보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순간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마을이 달라진 게 아니라 내가 달라진 것이라는-.

 

벽화로 아기자기하게 꾸몄다고는 하지만 생활의 편리함만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이곳은 불편한 환경 속의 삶일 뿐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보니 불편함보다 더 불편한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삶이라는 깨달음이다.

 

이곳은 하나 둘 어깨 부빌 온기와 등 기댈 최소한의 공간을 찾아서 들어 온 사람들에 의해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마을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골목 귀퉁이 곳곳에 좁은 골목길 여기저기에 진솔한 이야기가 깃들고 숨 쉬는 곳이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처럼 어느 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살면서 서로 눈인사조차 인색한 곳과는 다르다. 오가는 동네사람들의 인사말 속에서, 주름진 웃음 속에서 정이 흠씬 묻어난다. 서로가 가족구성원들을 속속들이 알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인사말이다.

 

“그 집 아들내미 엊그제 취직시험 칫다쿠더마 우찌됐노?”

“느그 영감 뭄팍 수술 했다카더마는 좀 개안나?”

그런 인사들은 정말 끈끈한 정을 나누면서 살아 온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수십 년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가 아름다운 벽화로 승화된 동피랑 마을. 왜 나는 예전엔 그런 것을 못 느꼈을까. 아마 젊어서 보이는 것들이 있고 나이가 들면서 보이는 것들이 있는가 보다.

 

나이가 들면서 속이 더 좁아지거나 이기적이 되는 사람도 있다. 아름답게 늙자면 늘 비워내는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악기도 빈속이 필요하고 그릇도 속이 비어 있어야 무언가를 담는다. 꽉 차 있으면 자기 자신 밖에 볼 수 없고 다른 진실을 담을 수도 없다. 하나씩 덜어내고 비워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 빈곳을 메우고 들어오지 않는가.

 

평생을 통영에서 나고 자라 나이 들어가면서 동피랑을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그리고 늦은 개안(開眼)이지만 그런 나 자신이 다행스럽다.

 

나이가 들수록 사물을 보는 눈은 침침해지지만, 그 사물의 내면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보는 눈은 깊어진다는 생각을 하며 그곳을 내려왔다.

 

 

 

 

출처 : 수필과비평 작가회의
글쓴이 : 노혜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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