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 (마 5:1-3)
마5-7장은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말씀하셨다고 해서 '산상보훈,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본문 5:1-12까지의 말씀은 '여덟 가지의 복을 산상에서 가르쳐 주셨기에 산상 팔 복'이라고 합니다. 산상보훈은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모든 설교의 요약이며 인간윤리의 최고봉입니다. 그래서 산상보훈은 그리스도인의 황금률입니다. 일본의 하천 풍언은 '산상보훈은 모든 종교의 서곡'이라고 했고, 주석가 흑기는 '산상보훈은 수백의 보석으로 꾸며진 왕관'이라고 말했으며, 톨록은 '산상보훈은 하나님의 나라의 대헌장'이라고 설파했습니다. 이 교훈은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는 윤리적인 교훈이요, 그 속에 복음이 담겨져 있는 황금률'입니다. 유명한 문필가 톨스토이는 '성경이 다 없어진다 해도 산상보훈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인도의 위대한 민족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위하여 영국과 싸우다가 2,338일을 감옥에서 보낸 사람입니다. 그는 비록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평생에 산상보훈을 애독했고, 심지어 인도인들에게 '우리가 살길은 이 교훈대로 사는 길'이라고 말하면서 자기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마5-7장을 읽어주었다고 합니다. 간디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생활 기본으로 삼았고, 이 정신으로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대항하며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르신 산은 갈릴리 호수를 에워싸고 있는 '햇틴'산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성지 순례를 다녀오는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갈릴리 바다 서북쪽 가버나움 근처에 예수님이 친히 올라가셔서 여덟 가지 복을 가르치셨다고 해서 그 산을 팔 복 산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 팔 복 산에는 팔 복을 기념하여 팔각으로 지어진 팔각 예배당이 있는데, 천장은 팔각으로 되어 있고, 그 한 면마다 여덟 가지 복을 차례로 기록하여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있으면 여덟 가지 복 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맨 먼저 하신 일은 제자를 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복음의 일꾼으로 훈련시키신 일입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산상교훈의 설교가 예수님께서 친히 택해 세우신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설교가 다만 제자들만을 상대로 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아멘!/
▶예수님은 팔 복에서 이 세상에 있는 기존의 전통적인 개념들을 바꾸어 놓고 새로운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 가지입니다. ①행복의 개념을 새롭게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사람은 모두 행복해지려고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최상의 목표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동서고금 할 것 없이 공통된 욕망일 것입니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것은 참 묘합니다. 행복은 모든 사람에게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시대에 따라서 그 기준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행복의 기준이 100년 후에도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때는 또 달라집니다. 그래서 행복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서 환경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또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것도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서 행복의 기준이 다를 수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이 다르고, 신앙 인들이 말하는 행복의 기준이 또 다릅니다.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재미있고, 쾌락적이고, 육감적인 것들이고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들을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그런 것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행복의 기준이 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신앙 인들에게는 또 다른 차원의 행복의 기준이 있습니다. 신앙 인들이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 것, 마음이 온유한 것, 애통한 것, 경건한 생활' 등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참 재미없는 것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사람들에게는 행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매력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참 기쁨의 근원이 됩니다. /아멘!/ 오늘 팔 복에서 예수님은 영원 불변하는 행복의 기준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 여덟 개의 복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 '마음의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고 녹슬지 않고 없어지지 않고 누가 빼앗아 갈 수 없는 복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 복입니다. /믿/ 이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보이는 복을 말하고 만져지는 복을 말하고 화려한 복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잠시 후면 변해 버리기 쉬운 것들입니다.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극히 일시적입니다. 모두들 그것을 찾다가 실망한 사람들이 많고 실패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신 교훈 중에 이 산상수훈이 가장 심오한 교훈이라고 하는데 이 말씀 속에서 강조하신 복이 바로 이 마음의 복입니다. /할/
②다음은 보상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보상에 대해서 오해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상하면 모두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축복하면 또 물질적이고 보이는 것을 생각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기복신앙'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복을 너무 많이 기대합니다. 부흥회를 한번 했다 하면 복 받으라는 말을 너무나 많이 합니다. 그러면 또 성도들은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복 받으라는 말이 너무나 많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은 그렇게 받으라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복을 받을 만한 생활이 뒷받침이 되어야 받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는 여기서 복을 말할 때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복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복을 더 생각하면 그 신앙은 기복신앙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 신앙은 무속신앙의 차원을 넘지 못하게 됩니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보다 복 자체를 더 중히 여기면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돈 버는 일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주일을 소중히 지키는 일이 먼저인 것입니다. 또 복을 모두 물질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바로 그 점을 바로잡아 주고 있습니다. 팔 복을 보면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얼마나 멋있는 보상입니까?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마음을 비우고 쾌락을 물리치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에게 보상이 주어졌습니다. 어떤 보상이 주어졌는가 하면 천국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얼마나 멋진 축복입니까? 이것말고 더 소중한 복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③미래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셨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래입니다. 미래는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고상한 자본입니다. 그래서 미래는 희망입니다. 그런 희망적인 미래가 없는 인생은 가장 불쌍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미래가 불투명하면 우선 살아갈 힘을 잃어버립니다. 사람은 지극히 미래 적인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미래만 있다고 해서 살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미래에는 내세도 있어야 합니다. 이 내세는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생각 없이 살아가니까 그렇지 좀 조용히 앉아서 인생을 생각하고 죽음을 생각하고 종말을 생각하면 그렇게 아찔해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내세 문제가 걸리기 때문입니다. 지금 죽어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병이 문제가 아닙니다. 먹는 문제도 아닙니다. 바로 이 내세 문제입니다. 내세 문제만 해결되면 병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죽을병이 들었어도 그렇게 절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세의 문제가 시원스럽게 풀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복을 새롭게 정립해 놓으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자신 만만합니까? 지금 죽어 가고 있는 사람에게 천국이 훤히 보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왜 죽음이 두렵겠습니까? 지금 한창 뛰어가고 있는 마라톤 선수에게 골인 지점이 눈앞에 보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왜 중도에서 포기하겠습니까? 천국 없는 기독교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천국 없는 종교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천국 없는 예수를 왜 믿겠습니까? 팔 복의 결론은 천국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12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할/ 그렇습니다. 천국 없는 기독교는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기독교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천국이 없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없으니까 죽는 이야기만 나오면 불안하고 중병에 걸리면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천국도 없고, 보상 기대도 없고, 사모함도 없이 싸늘하고 냉랭하고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런 마음에서 무슨 힘이 나오고 기쁨이 나오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는 천국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믿/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더 이상 무슨 아쉬운 것이 있습니까? 힘을 내시고 믿음 안에서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할/
▶1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예수께서' 설교자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세상에 그 어떠한 선지자보다도, 모세보다도 더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시고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설교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할/ 누구에게 설교하셨는가? '무리를 보시고' 그렇습니다. 제자들에게만 설교한 것이 아니라 무리들에게 모인 회중에게 설교를 하셨습니다. 산상보훈의 끝 부분인 7:28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 설교가 제자들에게 주신 설교만이 아니라 무리를 대상으로 했으며 더 나아가 이 설교가 간접적으로 온 세상에 증거 되기를 의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주님의 말씀은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전 성도들에게 주시는 천국의 대헌장이요 기독교인의 윤리의 황금률입니다. 이렇게 귀중한 교훈일지라도 우리가 바로 해석하지 못하면 도리어 우리 신앙 인격에 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해석을 바르게 하는 것이 귀한 축복입니다. /믿/ 먼저 산상보훈의 진수는 자잘한 영적 규칙들을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크고 위대한 영적 원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많은 부분이 시적인 표현으로 쓰였으므로 일반 산문과 같이 해석하면 도리어 본뜻에 반하는 큰 뜻에 어긋나는 복잡한 해석이 나올 위험도 있습니다. 가령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구절을 시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가슴을 치며 슬퍼하는 것, 자체가 복이 되어버리는 우스운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1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여기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자기를 쫓아다니는 무리를 보시고 갑자기 산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이 산상설교를 이해하는 기초가 됩니다. 마4장의 마지막 23절 이하에 보면 쉽게 예수님의 행동을 문맥상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시는 그 사역을 감당하셨는데 그에 대한 소문이 온 수리아까지 퍼졌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귀신을 쫓아내고 불치병을 고치는 초자연적인 놀라운 능력에 관한 소문이었습니다. 특별히 24절을 보면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고 했고, 그 범위가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이라고 한 것을 보면 얼마나 소문과 인기가 대단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 많은 무리들이 나사렛에서 살았던 한 청년에게 좇아왔을까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병 고치는 기적' 때문입니다. 4:24절 이하에 보면 말씀의 진리보다는 병 고치는 기적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합니다. 한국교회가 세계에서 제일로 부흥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한국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립고 천국에 진리가 좋아서 교회에 몰려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말씀보다는 특별한 표적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다'는 속담처럼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 자신보다는 어쩌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기사와 이적에 관심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관중들이 마음을 아시고 자신이 대중의 인기와 환호성 속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무리를 떠나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용히 하늘의 진리와 성도의 삶의 원리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아멘!/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이 말씀을 강론하신 장소가 산입니다. 기독교는 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살던 곳이요 그리심 산은 축복의 산이요, 시내산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산이요, 호렙 산은 모세가 소명을 받은 산이요, 갈멜 산은 엘리야가 바알신과 대결하여 이긴 산이요, 모리아산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친 곳이요, 후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산이요, 갈보리 산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산이요, 감람산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산입니다.
▶산은 하나님의 계시의 터전입니다. 왜 예수님이 산으로 올라가셔서 천국의 대헌장을 선포했을까요? ①산에 올라가면 세상만사를 잊어버리고 초월하게 됩니다. 세상의 시기와 증오, 고통과 번민, 허위와 무질서를 떠나 진리의 산봉우리에서 자신을 보면 다시 한 번 새로운 감정, 진실 된 감정으로 자신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 김영삼 대통령은 뚝하면 산에 가서 '마음을 비우고 온다.'고 했습니다. ②산에 올라가면 전부를 한꺼번에 볼 수가 있습니다. 남산정상에 올라가면 서울전역이 보입니다. 인생은 아는데 있어서 먼저 인생 전부를 보아야 합니다.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만 보고 속단하기가 쉽습니다. 그 어떤 것도 그렇습니다. 정치도, 경제도, 산업도, 우리들의 사업도 전부를 보아야 합니다. 부분만 볼 때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말씀하신 내용이 인간의 삶을 한 눈으로 내려다보시면서 주신 메시지입니다. /믿/ ③산에 올라가면 앞을 멀리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앞에 것만 보고 살지 말고 멀리 내다보고 살아야 합니다. 운전할 때, 멀리보지 않고 눈앞에 것만 보고가면 위험에 부딪치게 됩니다. 멀리 보고 가는 사람은 위험을 미리 예방하고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게 됩니다. 신앙문제, 인생문제, 현실만 보고 살 것이 아니라 멀리 내다보아야 합니다. ④산에 올라가야 시야가 넓어집니다.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는 우물 안이 세계전부인 줄 압니다. 그러나 산에 올라가면 넓게 보입니다. 나만 보고 사는 사람이 산에 가면 이웃이 보이고 교회가 보이고 민족이 보입니다. 속이 좁은 인간들은 지극히 작은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합니다. 그러나 생각은 높은데 두면 마음도 넓어집니다. 인생을 좁게 보면 좁쌀양반이 되지만 넓게 보면 관용과 이해를 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가 산 속에 들어 있습니다. '앉으시니' 앉아서 가르치셨다고 하는 것은 길을 걸으며 제자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것과는 다릅니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랍비들이 공식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선포하지만 가르칠 때에는 언제나 앉아서 했습니다. 회당에서도 가르치고 설교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이것은 보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앉으셨다는 것은 그 교훈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이고 또 정신적이며 본질적인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2절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예수님은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 종종 이러한 표현을 쓰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찬가지입니다. '입을 열어'라는 표현도 중요하고 엄숙한 내용을 가르칠 때 사용하던 관용구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바야흐로 가장 위대한 설교자의 입에서 나온 지상 최대의 설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마7:28-29의 말씀을 보십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그들은 예수님의 설교에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세 있는 가르치심에 완전히 압도를 당하고 만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할/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여기서 입을 열었다는 말은 단순히 입을 벌리는 행동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원의 '입을 열어'라는 말속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엄숙하고 장엄하며 권위 있는 말을 묘사는 것입니다. 행8:35절에서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때 입을 열어 가르쳤다고 했고, 행10:34절에서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초대되어 복음을 가르쳤는데 이때에 '입을 열어'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즉 권위 있는 가르침을 나타낼 때, '입을 열어'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길을 가리킬 때 입을 여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는 한 개인이 자기의 마음을 열어 정성을 다 쏟을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르치는 사람과 가르침을 받는 사람 사이에 간격이 없이 친숙하게 깊숙이 가르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은 오른팔 같이 쓸 제자들에게 자기의 마음과 뜻을 다해 가르치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로 이 말씀을 받는 자세가 진지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 우리 마음 밭 옥토에 뿌리를 내려야 할 줄 믿습니다. /믿/
▶여기서 '가르쳤다'는 단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헬라어원에 과거 시제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⑴완료 과거시제: 어떤 특수한 행동이 과거에 끝난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가령 '그 사람이 성경책을 샀다'고 할 때 사는 행위가 이미 과거에 완료되었기 때문에 완료과거시제입니다. ⑵미 완료시제: 즉 진행형입니다. 이것은 어떤 행동이 반복적이고 계속적이고 습관적일 때 사용되는 것입니다. 가령 '그는 매일 학교에 다녔다.'에서 다녔다는 과거이지만 반복 또는 습관을 나타내기 때문에 미 완료시제입니다. 그런데 2절에 가르쳤다는 단어가 바로 이 미 완료시제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계속적으로 제자들을 통하여 가르쳐 내려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2000년이 지난 오늘 행복한 강단에서도 이 말씀을 가르치고 있으며 앞으로도 전 세계 교회에서 이 말씀이 가르쳐질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산상보훈의 서론적인 말씀입니다. 이제 본론입니다. 첫째 복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본문에 나오는 팔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는 그 개념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동양 권에 복은 '돈이 많고, 건강하고, 출세하고, 자녀들을 많이 낳고' 이것이 복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역설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오늘 본문은 쉽게 표현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은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은 우리가 죽어서 들어가는 천국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기 천국은 지역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입니다. 즉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보호와 인도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보호와 인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할/ 여기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말씀이 눅6장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로 나옵니다. 그러면 여기 마음이 가난한 것이 무엇인가? 성경이 그 주석을 달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마다 그 견해가 다릅니다. 실제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고금동서 어느 문헌에 도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한 곳이 없습니다. '집이 가난하다, 나라가 가난하다. 그 사회는 문화와 지식이 빈곤하다.'는 말은 할 수 있지만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애매 모호한 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도 마음이 얼마나 해야 가난한 건지 모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령의 가난은 영적인 가난'을 의미합니다. /아멘!/ 심령은 '영'으로 또는 '마음'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심령'을 빼고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뻐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착취를 당하는 식민지 백성으로서 모두가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선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와는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저들이 고대하고 기다리는 메시아는 정치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통치에서 자유와 독립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시각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난에서 부요를 줄 수 있는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수많은 사람에게 먹이시는 기적을 베풀자 왕으로 추대하려고 난리를 피었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말씀하신 첫 번째 복이 물질적 가난에 대한 것이었다면 성도들은 먹지 못해 굶주리는 기아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물질적 가난에 국한되었다면 교회는 어떤 구제도 행할 의무가 없게 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심령이 가난한 자, 마음이 가난한 자'는 무엇을 말합니까? ⑴물질의 가난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물질의 가난을 예찬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이 가난한 것은 좋은 일이 못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질이 가난하면서도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있고 반대로 물질은 부유하지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몇 백 억의 빌딩 주인이 돈이 아까워서 세 정거장이 넘는 길을 걸어서 가는 마음이 가난한 부자'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물질이 많고 적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3장에 니고데모를 보겠습니다. 그는 유대의 높은 관원(국회의원 정도)이고, 또 율법선생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높은 계급과 신분과 재산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무명의 나사렛 청년 예수님 앞에 나와서 그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물음을 던질 만큼 마음이 가난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 이 가난한 마음 때문에 니고데모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가난은 영적인 가난입니다, 영적인 갈급함, 사모함을 말합니다. 이 가난은 절대빈곤을 의미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빈곤을 느끼십시오, 거지가 먹어도, 먹어도 먹고 싶은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도, 받아도 갈급 함으로 사모하십시오, 이런 사람이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할/ ⑵지식이 가난한 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바로 섬길 수가 있습니다. 무식한 것이 여기서 말하는 가난이 아닙니다. ⑶심지가 약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도 아닙니다. 마음이 가난하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쉽게 마음이 갈대와 같이 이리 흔들, 저리 흔들거리는 마음 약한 사람들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그런 가난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어떤 가난을 말하고 있는가? ⑴하나님 앞에서 죄와 자기의 무능력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깨어진 마음'입니다. 구약의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모세입니다. 그는 살인자의 모습으로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치기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그의 삶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호렙산에서 '네 백성을 탈출시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저는 아닙니다.' 네 번씩이나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손을 문둥병에 걸리게 했다가 고쳐 주시기도 하고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게 되는 기적도 보여줍니다. '이런 기적을 내가 보여 줄 테니 네가 가라' 그래도 모세는 못 가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왜? 그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신약에서는 베드로가 있습니다. 밤이 맞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순종하였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의 거룩한 영광을 보면서 자기의 죄와 무능과 연약함을 깨닫고 '주님!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는 영적인 태도,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하는 태도, 이것이 겸손한 성도의 자세입니다. ⑵겸손한 마음입니다. 성경에 보면 겸손한 마음과 교만한 마음을 가진 두 사람이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교만한 마음의 대표자는 바리새인이었고,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한 자는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주님! 저는 일주일에 한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도 꼬박, 꼬박 냅니다. 저는 저 세리와 다른 사람입니다. 저는 정의팝니다.' 자기를 들어내고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주님! 저는 주 앞에 아무 것도 내 놓은 것이 없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세리는 자기의 죄와 무능력을 내어놓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사모했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세리의 기도를 받으셨지만 바리새인의 기도는 외면하셨습니다. 성경은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욥22:29절에서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10:17절에서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했고, 또 시147:6절에서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잠3:34절에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으며, 잠22:4절에서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⑶가난한 마음을 단순한 마음입니다. 복잡한 마음도 아닙니다. 두 마음도 아닙니다. 오직 한 마음입니다. 신앙은 두 마음을 품으면 흔들립니다. 약1:8절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할/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간 두 마리 다 놓칩니다. 한 마음을 품으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히12: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아멘!/ ⑷마음의 가난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를 말합니다. 의지한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믿음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초가 되어 주시고 언덕이 되어주시고 발판이 되어주십니다. /아멘!/ 히11: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 실상은 하나님이 바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초가 되어 주십니다. 건강의 기초, 사업의 기초, 지혜의 기초, 이 말씀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만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⑸가난한 마음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탕자가 재산이 있고 건강이 있을 때는 먼 외국에 가서 자기 마음대로 허랑 방탕하게 살다가 재산을 다 날리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아비 집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왜 아비 집으로 갔습니까? 눅15:17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굶어 죽게 되니까 아비 집에 가서 구했습니다. 그래요! 가난하게 되면 무엇을 구하려는 강력한 소원을 품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가령 끼니가 없는 정도로 가난한 사람은 '먹을 것만 있었으면, 밥이라도 실컷 먹어 봤으면' 강력히 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가난하게 되면 영의 안식처인 하나님의 나라를 강하게 구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⑹내려놓은 마음입니다. 비운 마음입니다. 욕심도 탐심도 내려 놓고, 마음을 비우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산상보훈의 모든 교훈은 오늘 팔 복의 이 첫째 복을 이루지 않고서는 둘째 복도, 셋째복도, 아니 전체 산상보훈의 황금률도 이룰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할/ 여러분! 영적으로 가난하십시오,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하늘의 복을 탐내십시오,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탐내었습니다. 천국을 침노하는 자의 것이요, 빼앗는 자의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하여도 이것만은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형식보다 마음을 더 중요시하는 종교입니다. 잠23:7절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했고, 또 잠4:23절에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할/ 오늘은 팔 복의 첫째 복인 본문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천국을 누리십시오, 천국은 지역의 개념이 아닙니다. 통치개념, 다스림의 개념입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곳이 천국입니다. 보호와 인도입니다. 찬495장에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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