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바라보라! (민 21:4-9)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4. 17.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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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에 달린 놋 뱀을 바라보라! (민 21:4-9)

 

  오늘은 사순절의 끝자락인 종려주일, 고난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주간입니다. ◀제목 소개!▶
 
  민수기는 광야 여정의 책입니다. 죽음의 땅 애굽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걸어가는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민수기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에나 천성을 향해 걸어가는 성도들의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광야 길은 인생길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불평과 반역의 이야기로 얼룩져 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노예들을 불러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고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 먹여 주셨고, 반석을 쳐 생수가 흘러나게 했습니다. 수많은 적들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이쯤 되면 매일같이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저들은 눈만 뜨면 원망이요 입만 열면 불평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입으로는 찬양하면서도 감사가 없고 믿음이 없이 세상을 근심 걱정 염려로,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민수기의 이야기는 바로 나 자신의 자화상입니다. /믿/
  ▶민수기를 보면 10장 이후 어리석은 백성들의 불평불만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11장;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행진 후미에 큰불이 떨어지는 사건이 있었고,
  ▶12장; 미리암이 지도자 모세를 비방하다가 문둥이가 된 사건이 나오고,
  ▶13-14장; 열 정탐 군의 원망이 나옵니다.
  ▶16장; 고라 일당이 반역하다가 지진을 만나 몰사 당한 사건이고,
  ▶20장;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했고,
  ▶오늘 21장은 길 때문에 불평하다가 불 뱀 떼가 나타나 백성들을 물어 죽이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당시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하여 진군하는데 그 여정길이 에돔 땅에 이르렀을 때, 에서의 후손들인 에돔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땅 밟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에돔을 돌아 홍해 쪽으로 가다가 그만 심신이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마음이 상했다'는 말은 흔히 쓰는 말로 '속이 상했다'는 정도의 뜻이 아니라 낙심하여 '짧게 자르다'라는 의미로 '이제껏 자신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은 멀게만 느껴졌고, 앞길을 가로막는 광야의 돌풍과 사막의 열기로 인내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대한 소망보다 현재 광야에서 당하고 있는 시련으로 절망감에 사로잡힌 채 척박한 땅만 바라보고 걸어갈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잘사는 사람 애굽에서 끄집어 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먹을 것도 모자라고 마실 물도 모자란다고. 매일같이 먹는 만나와 메추라기 같은 음식엔 넌더리가 난다고 불평'이었습니다.
  ▶성경은 불평과 원망 죄를 간단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 뱀 떼를 보내 백성들을 모조리 물어 죽게 했습니다. 당황한 백성들이 모세를 찾아왔고 모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백성들을 이대로 죽어가게 하시겠습니까? 용서하시고 살려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종아! 장대 높은 곳에 불 뱀 모양의 놋 뱀을 만들어 달아라. 누구든지 쳐다보면 낫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순종함으로 놋 뱀을 쳐다본 자는 모두 나았다고 하는 간단한 얘기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사실 종교입니다. 사건 종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을 사건을 통해서 나타내시고 역사적 사실로써 우리에게 계시하면서 교훈을 주십니다.
  한마디로 너희는 원망하고 불평하던 이스라엘처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너희에게도 똑같은 저주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고전10:10-11절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할/
  여기 장대에 달린 놋 뱀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사건입니다.

 

  ①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는?
  ⑴여자의 후손입니다(창3:15).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인류역사상 남자 없이 태어난 사람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⑵창3:21절의 가죽옷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⑶창22장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상에 번제로 드린 사건도 예표입니다. 
  ⑷유월절 양의 피입니다(출12:13). 장차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할 때 구원받는 유일한 표적은 마음의 문설주에 믿음으로 바른 예수님의 피 밖에 없습니다.   
  ⑸아사셀 양입니다(레16:10/20-22). 레위기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아사셀 양의 머리에 안수한 뒤에 모든 죄를 걸머지운 채 광야로 떠나보냅니다. 이것도 세상 죄를 지고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⑹제단 뿔입니다(출27:2/레4:18, 25, 30, 34). 성막 안에 제단이 있는데 이 제단에는 네 모퉁이에 네 뿔이 있고, 그 뿔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금으로 쌌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속죄 제물의 피를 제일 먼저 그 제단 뿔에다 바릅니다. 그리고 범죄 하여 죽을 죄인이라도 성전에 들어가 제단 뿔을 붙잡으면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은 즉위한 후에 정적을 숙청하는 중에 형 아도니아가 부친 다윗 왕의 후궁이었던 미인 아비삭을 달라고 하다가 죽을 것을 알고 제단 뿔을 붙잡았는데도 솔로몬 왕은 그를 끌어다 죽였고(왕상1:50-51), 요압이 도망하여 제단 뿔을 붙잡았을 때 역시 끌어다 죽였습니다(왕상2:28-31). 성경학자들은 솔로몬이 지은 죄 중에 가장 큰 죄, 우상 숭배의 죄보다 더 큰 죄는 바로 제단 뿔을 붙잡은 사람을 죽인 죄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⑺기생 라합의 붉은 줄입니다(수2:18).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붉은 줄을 창문에 드리운 라합은 의로워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예수를 믿고 십자가의 피 공로를 의지한 자는 다 구원을 받습니다.
  ⑻도피성입니다(신4:42/19:3-5,11). 실수하여 사람을 죽였을 때에 '도피성'이라는 곳을 만들어 그리로 달려가 숨으면 아무도 끌어내거나 죽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구원의 도피성이 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그의 십자가의 피가 그를 보호하시고 구원하십니다.
  ⑼그리고 오늘 본문의 놋 뱀 사건입니다. /할/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보느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좋은 것을 보아야지 나쁜 것을 보면 그만큼 손해가 큽니다.
  ▶어느 젊은이가 골동품 가게에 취직을 했습니다. 골동품 가게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것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 젊은이는 처음부터 가짜를 가려내는 법을 배우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가짜를 골라내는 법은 가르쳐 주지 않고, 6개월 동안 진품만 잔뜩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은 가짜를 하나 가져와서 점원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을 보자마자 가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진짜만 보니 가짜를 알겠더라'는 것입니다.
  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내 눈앞에 무엇이 있느냐,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학생의 눈에는 항상 책이 보여야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습니다. 교사의 눈에는 제자가, 의사의 눈에는 환자가, 목사의 눈에는 성도가, 기업가의 눈에는 근로자가 보여야 합니다. 또 정치가의 눈에는 국가의 장래가, 어머니의 눈에는 가정의 행복이 보여야 합니다. 올바로 보기만 하면 우리는 성공하고 승리하며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②성경에는 특히 성도들이 보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⑴주의 얼굴을 바라보라! 시17:15절에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⑵위의 것을 바라보라! 골3;1절에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⑶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상주실 것을 바라보라!(히11;6).
  ⑷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히12;2).
  ⑸하나님의 날이 임할 것을 바라보라! 벧후3;12절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⑹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을 바라보라! 벧후3:13절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올바른 것만 보면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보는 것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게 됩니다. 성공하려는 사람은 성공을 바라보아야 하고, 행복하게 살기 원하는 사람은 행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에 모세의 말대로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바라본 사람은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원망, 불평하며 땅만 쳐다본 사람은 불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바라볼 것을 바라본 사람, 순종한 사람은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모세의 말에 순종하고, 주의 종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삽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으로 바라본 자들입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는 사람은 그 불순종으로 인해 죄를 짓고, 또한 그 죄 값으로 인해 병들고 망하고 죽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때로는 고통과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대로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상처를 받고 과거의 축복과 사랑은 다 잊어버린 채, 현실만 보고 원망과 불평에 빠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원망과 불평은 뱀(사단)을 불러들이고 뱀은 결국 우리를 물어 독(죄)으로 인해 죽게 만듭니다. 불신과 원망과 불평은 우리 몸에 독이 퍼지게 해 건강을 잃고 병들게 만듭니다. 기쁨을 잃고 기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불 신앙에 빠져 하나님의 축복의 반열에서 서서히 떠나게 만듭니다. 가난과 저주와 질병으로 멸망하고 죽음을 당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할/

 

  ③우리는 원망하지 말고 불평하지도 맙시다(4-5).
  대개 원망하는 사람들에게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타당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물론 빨리 가면 좋겠지만, 매사가 빨리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지름길로 가지 않고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시간이 걸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믿음을 가지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인내하며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서 원망'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원망'이라는 것은 '대항하고 대적하고 반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먼저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라고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신 것은 그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살게 하시려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려고 인도하여 내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미래의 일은 내다보지 않고 당장에 죽을 것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죽을 것을 생각하지 말고 살리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또한 '식물도 없고 물도 없다'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없어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굶어 죽은 사람도, 목말라 죽은 사람도 없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죽을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하나님께서 내리신 만나 때문에 살았으면서도, 하나님의 축복에는 감사치 않고 오히려 '박한 식물이 싫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감사하는 신앙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망각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과 은총도 '싫다'고 말하므로 써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망의 말을 삼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마음이 상한 상태로만 그냥 있었어도 하나님의 진노는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입술로 원망, 불평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할/


  ▶왜 원망하는가?
  ⑴과거의 은혜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갈라지게 하여 건너가게 하시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자 원망이 튀어 나왔습니다.
  ⑵욕심 때문에 원망합니다.
  ⑶믿음이 없기 때문에 원망합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애굽의 종으로 팔려갔어도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옥중에 갇혔어도 하나님을 찬미하고 감사했습니다.
  ⑷어리석어서 원망합니다. 옛말에 '안되면 조상 탓, 잘되면 내 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일이 뭔가 안되어 갈 성싶으면 곧바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탓합니다. 이러한 원망은 아담 때부터 있었습니다. 원망은 습관입니다. 그리고 원망의 말은 바로 바로 자신을 향해 쏘는 화살입니다.
  ▶옛날에 작전을 아주 잘 세우는 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군이 세우는 작전은 늘 화창한 날에만 승리할 수 있는 작전이었습니다. 그 날도 화창한 날이라 병사들은 싸우기 전부터 승리를 확신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비가 오는 바람에 그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장군은 하늘을 욕하면서 일제히 하늘을 향해 활을 쏘라고 병사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결국, 그 화살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이렇듯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은 자신을 욕하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할/
  ⑸원망과 불평은 마귀로부터 옵니다.
  ⑹원망과 불평은 축복을 가로막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승리합니까? 감사하는 사람이 승리한다고 했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다 실패합니다. 사업을 해도 실패한 사람들이 불평이 더 많습니다. 불평과 원망은 자신의 인생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인생도 망칩니다. 그러나 감사는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게 합니다. 앞으로 전진하여 성공하고 승리하게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나와서 은혜 받고 감사하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불평하며 원망하는 사람은 불 신앙의 사람입니다. /믿/할/

 

  ④원망과 불평의 결과는 심판입니다(6).
  원망과 불평은 뱀을 불러들이고, 뱀은 우리를 물어서 몸에 독이 퍼지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원망과 불평은 우리 몸에 치명적인 독이 되는 것입니다.
  '불뱀'은 중동 지역에 많던 독사의 한 종류입니다. 이 뱀은 등에 불타는 듯한 붉은 반점이 있는데다가 독성이 강해서 사람이 한번 물리면 온몸에 독이 퍼져서 불같이 뜨거운 열을 내다가 죽게 만들기 때문에 '불뱀'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니까 불평과 원망은 몸에 열이 펄펄 나게 해서 우리를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물과 불로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홍수가 나기도 하고, 지진이 터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전쟁이 나기도 하고, 전염병이 돌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원망하는 자는 약속의 땅,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원망, 불평하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부르짖고 기도를 해도 그 기도가 하늘에 상달되지 못하며, 따라서 응답도 받지 못합니다. /할/
  ▶어느 병원에 한 임산부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은 기독교 병원이었기 때문에 복도에도, 병실에도 예수님의 액자가 걸려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그 임산부는 액자를 보고 이유 없이 반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곧 간호사를 불러서 그 액자를 좀 떼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간호사는 '저는 그 액자를 떼어 낼 권한이 없다'고 하자, 여자는 화가 나서 자기 남편이 누군 줄 아느냐며 원장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원장 역시 그 액자를 떼어 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병원에서는 그 액자를 떼 낼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내가 직접 떼지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임산부는 무거운 몸으로 의자에 올라가서 그 액자를 떼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내 아이는 절대로 저 사진을 보지 못하게 할겁니다' 큰 소리를 쳤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어 그 여자는 출산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말했던 대로 그 여자의 아이는 영원히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장님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람, 기독교에 대항하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저주받고 심판 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대항하는 사람, 감사치 못하는 사람, 그래서 가난과 질병,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원망, 불평하는 죄에 빠지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시50;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아멘!/

 

  ⑤백성들의 죄를 회개하는 모세의 기도를 보자!(7)
  이스라엘 백성은 뱀에 물려 독이 퍼져 죽게 되자, 비로소 회개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얻어맞아야 회개를 합니다. 오늘날도 병들어 죽어가고, 아주 망해 버려야 회개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스라엘은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라고 했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죄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원망한 것도 죄가 되고, 모세를 원망한 것도 죄가 됩니다. 왜? 불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뱀에 물려 죽어 가면서 모세를 찾아갔고, 모세는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뒤늦게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구원과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대하7;14절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질병에서 고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회개를 통해서 축복하십니다. 회개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요일서1;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어떤 죄라도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죄악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저주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천부여 의지 없어 두손들고 옵니다' 자복하고 통회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주십니다.
  ▶어떤 남자가 차를 몰고 가는데 갑자기 트럭이 나타나서 브레이크를 밟는다고 밟았는데 차가 돌아 그만 옆의 차를 받아 버렸습니다. 수리비를 계산하니까 700만 원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보험 기간이 만료되어 보험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자니, 그의 아내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낮에 있었던 사고에 대해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700만 원이 나가는데 뭐가 감사해?' '당신이 트럭에 치었으면 내가 과부가 되었을 텐데, 이렇게 무사하니 얼마나 감사해요?' /할/
  아내는 남편이 다치지 않은 것만도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보니 그도 그랬습니다. 돈만 없앴기에 망정이지 몸이 다쳤으면 어떻게 할 뻔했습니까? 그래서 자기도 뒤늦게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원망할 때는 기쁨과 평강이 사라지고 잠도 안 왔는데, 감사를 드리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져서 단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원망이나 불평하지 마시고, 원망하고 불평한 죄가 있다면 회개하시고,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⑥놋 뱀을 쳐다본즉 살리라!(8-9)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놋을 녹여서 불뱀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놋 뱀을 쳐다보라고 말했습니다.
  ▶뱀에 불 뱀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가 있습니다.
  ⑴불과 같은 맹렬한 독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⑵이 뱀에 물리면 불과 같이 펄펄 끓는 열이 나기 때문입니다. ⑶뱀이 불같은 색깔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 뱀은 모래 색깔입니다. 모래 위에서 기어다니면 도저히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사막에서 이슬만 먹고 자랐기에 맹 독이 있어서 한번 물리면 그대로 즉사하는 무서운 뱀입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불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연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틀림없이 하나님이 벌을 준 것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말했습니다.
  7절에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알려 주셨습니다. 불 뱀을 놋으로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놋 뱀을 들고 다니면서 불 뱀에 물려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살 것이라고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세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았습니다. 그리고 불 뱀에 물려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장대를 들고 이 불 뱀을 보는 이들은 다 살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하여 그 놋 뱀을 보는 이들은 다 생명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입니다. 놋 뱀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3:14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놋 뱀을 해석하면서 성경에서 가장 귀중한 진리인 요3:16절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요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리실 것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고서야 '아! 그 밤에 하신 말씀이 이것이었구나'하고 깨닫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을 얻는구나'라고 깨닫고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장례를 치릅니다. /할/
  그렇습니다. 장대에 달린 놋 뱀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 해석을 바울은 더 피부에 와 닿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놋 뱀에 대한 바울의 해석을 바울은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갈3: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불 뱀이 저주받은 것은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저주받으신 것으로 바울은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 뱀을 보는 사람마다 고침 받은 것은 예수 십자가를 보는 이마다 생명을 얻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모세가 만든 놋 뱀은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것일까요?
  ⑴비천해 지신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금으로 뱀을 만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은으로 만들거나 다이아몬드로 만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불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라고 하실 때에 하필이면 놋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놋은 당시 가장 흔한 금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놋으로 뱀을 만들라고 하신 데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 해석은 색깔해석입니다.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면 햇빛에 비취면서 놋이 꼭 불뱀 색깔을 내기 때문에 놋으로 불뱀을 만들라고 하셨다는 이론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놋은 열에 가장 잘 견디는 금속이기 때문입니다. 영국 소방수들이 불에 금속들을 넣어서 몇 도에 녹는가를 실험하여 보았습니다. 금은 1069도로 아주 높은 온도에서 녹았습니다. 그런데 놋은 금보다 더 강한 불인 1085도에서 녹았습니다. 불에 잘 견디는 금속이 놋이기 때문에 놋으로 뱀을 만들었다는 설입니다.
  세 번째 이론은 가장 흔한 금속이 광야에서 놋이기 때문에 놋으로 불 뱀을 만들었다는 이론입니다. 광야에서 가장 천한 금속입니다. 놋 뱀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의 상징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가장 비천한 몸으로 오셨습니다.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목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버림받으신 비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하여 놋으로 불 뱀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성막은 뜰, 성소 그리고 지성소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뜰에 있는 성물인 번제단과 물두멍은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성소 안에 있는 세 성물, 분향단과 떡상은 겉에만 금을 입혔습니다.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는 겉에서 속에도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갈수록 귀한 성물입니다. 놋은 당시 제일 흔하고 천한 금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천한 분이 아니라 천하게 되신 분이십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후8: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할/
  ⑵저주받으신 예수님입니다. 놋뱀은 저주받은 뱀입니다. 장대에 달린 뱀입니다. 살아 있는 뱀이 아닙니다. 죽어서 장대에 걸려 있는 저주받은 뱀입니다. 이는 저주받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불 뱀이 저주받은 것을 본 이들은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저주를 담당하셨음을 믿기만 하면 내 저주가 살아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저주를 담당하신 분이십니다. 살아 있는 뱀이 아니라 저주받은 뱀입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외동딸과 함께 외롭게 살아가는 한 중년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딸이 가출하여 술집에서 남자들의 술이나 따라 주면서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여인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있을 만한 곳을 다 다니면서 전단지를 뿌렸습니다. 그 전단지에는 어머니의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어미가 너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단다. 너를 사랑한단다.'
  어머니는 딸의 사진을 넣으면 딸이 부끄러움을 당할 가 두려워 자기 사진을 넣은 것입니다. 결국 딸 사진 대신 자기 사진을 넣은 것입니다. 드디어 딸은 어머니 품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어요. 저를 위하여 대신 수치를 당하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 드려요.'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놋 뱀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나무에서 저주받으심으로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아멘!/
  ⑶놋은 변치 않은 믿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심으로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저절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믿어야 합니다. 놋 뱀을 쳐다보면 나을 줄 믿는 사람에게만 생명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할/
  의사가 암을 낫게 하는 약 연구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드디어 그 약을 만들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후배 의사들 손에 그 약을 쥐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이 약을 만드느라고 생명을 다 바쳤다. 너희 후배들은 이 약으로 암 걸린 사람들에게 주어 고쳐라' 후배 의사들은 그 약을 들고 다니면서 암 환자들에게 외쳤습니다. '이 약 먹어야 살아!' 오직 한 가지 외침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생의 약을 만들어 놓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피입니다. 복음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지 못 한 이들을 만나면 외쳐야 합니다. '이 사람아! 구약과 신약이라는 약을 먹어야 영생해! 복음을 먹으면 영원히 살 수 있어' 외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저절로 영생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구원을 이루는 오직 하나의 길입니다. /믿/아멘!/
  ⑷불 뱀은 죽음이었고, 놋 뱀은 생명이었습니다. 불 뱀은 병이었고, 놋 뱀은 회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복입니다. 놋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 살았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에게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순종이 없이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보는 이들은 다 건강하여졌습니다. 불 뱀에 물렸으면 약을 쓰고 주사를 맞는 것이 아니라 놋 뱀을 보면 살 수 있습니다. 상식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비상식적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놋 뱀이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믿음에 하나님이 회복의 역사를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할/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인가?
  ⑴바라보는 것은 관심입니다. 신앙생활은 관심입니다. 천국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에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관심이 곧 하나님에 대한 과심입니다.
  ⑵바라보는 것은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모든 학습은 모방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배우는 신앙의 모방은 오직 예수이십니다. 바울이 그 분을 본받아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나를 본 받으라
  보고 배우지 않고는 절대로 발전이 없습니다. 보고 배우지 않고는 능력을 확대할 수 없습니다. 혼자 배우는 운동, 혼자 배우는 악기, 혼자 하는 학문 등등은 한계가 있습니다. 선생님을 보고, 열심히 학습을 해야 그 선생님만큼 될 수 있습니다.
  ⑶바라보는 것은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님 되심을, 구세주 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므로 모든 문제의 해결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군인이 상관을 향하여 인사 때마다 '충성'을 외칩니다. 한두 번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군인인 한에 있어서 상관을 향하여 죽을 때까지 '충성' 하면서 충성을 서약합니다. 사랑의 고백도 한두 번에 그칠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한 계속 되어야 할 고백입니다. 주님의 주인 되심도 영원히 반복되고 확인되어야 할 고백입니다. /할/
  ▶D.L 무디가 지은 시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대 자신을 바라보라/반드시 실망할 때가 있을 것이다./친구를 바라보라/배신의 쓴잔을 맛보리라/남편이나 아내를 바라보라/어느 때인가 헤어지고 죽음으로 갈라서리라/자식을 바라보라/철이 나기 전 세상을 떠나리라/돈이나 명예를 바라보라/어느 날 허무함을 맛보리라/그러나/주 예수를 바라보라/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할/

  그렇습니다.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⑴회개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자를 살리십니다. 재앙을 만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함으로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 원망하다가 불 뱀으로 인하여 회개합니다. 회개가 살길입니다. 문제의 원인은 죄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겸비하고 자세를 낮추고,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사55:7절에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⑵믿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자를 살리십니다. 놋 뱀을 바라보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그 말씀을 믿고 십자가 바라보고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⑶순종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자를 살리십니다. '바라보라 그러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바라보는 것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그대로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무슨 소리, 뱀독이 퍼져 가는데 놋 뱀 바라보면 산다고? 허튼 소리, 병원에 가야지. 독을 빼야 살지, 응급처치를 해야 살지'하며 그날 거기서 놋 뱀을 바라보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죽었습니다. /할/
  오늘 본문에 백성을 상하게 만든 뱀은 '불 뱀들'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을 구원하는 놋 뱀은 단수로 되었습니다. 죄는 많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치유의 길은 오직 하나 장대에 달린 놋 뱀입니다. 행4;12절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천하 인간의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아멘!/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원망하지 맙시다. 불평하지 맙시다. 오직 예수만 바라봅시다. 오직 하나의 조건은 '쳐다 보라'입니다. 이것은 종말적인 메시지요 마지막 통첩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영혼의 눈을 떠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마치 항상 태양을 향하는 해바라기처럼 항상 주님을 바라보는 '주(主)바라기'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그는/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할/
  우리의 구세주이신 위대한 주님을 향해 영적인 믿음의 눈을 고정시키라는 말씀입니다. '보면 살리라!' 예수님을 보면 삽니다! 부디 이 말씀 붙잡고 날마다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아멘!/ (2011년 4월 17일 종려주일예배 설교)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송수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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