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고통 장력 산뜻한 봄을 맞아 행복과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고통은 행복에 대해 말하기 위해, 무엇보다 그것을 느끼고 누리며 감당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대상이자, 함께 고민해야 할 사유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우울감을 넘어서 위안이 되기를 바랄 뿐. 감히 말하건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감정의 윤리이자, 인간된 도리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고진감래라든가 새옹지마라는 말로 현재의 고난이 단지 일시적이며, 그것을 통과하면 언젠가는 행복이 온다는 것을 삶의 이치로 받아들여 왔다. 이러한 고통의 내러티브는 고소설부터 멜로드라마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한국문화사의 자료로서 축적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힘든 사람들에게 그 말은 단지 무책임한 위로에 불과하며, 증상을 가려 덮는 진통제(영어로 진통제를 뜻하는 painkiller는 고통을 뜻하는 pain과 제거자를 뜻하는 killer의 합성어이다. 말하자면 진통제는 증상에 대한 치료일 뿐, 원인 치료가 아니다.)처럼 여겨지는 듯하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사회가 고통을 다루는 현실적 방법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노하우가 절실하게 부족하다는 뜻이다.
고통은 사회적인 것 고통의 원인은 어떤 경우에도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 고통으로 괴로워한다면 그것은 심성이 나약해서라거나 성격이 모나서가 아니다(엄밀히 말하자면 그렇게 진단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은 언제나 ‘사회’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종종 발생하는 자살 행위는 물론, 거듭되는 취업 실패나 스펙 쌓기로 인한 스트레스, 과로, 주택난, 부부 불화, 연인 간의 갈등이나 우정에 금이 가는 행위조차도 그 원인이 되는 개인의 고통은 사회적 맥락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고통의 원인이 사회적인 것인데 비해, 그것을 감당하는 몫은 언제나 개인에게로 돌이켜지는 편이다. 사회적인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아 고통이 육체에 아로새겨졌을 때, 그 몫은 철저하게 개인의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것이 질병과 사망이라는 최악의 상태에 도달했을 때조차 개인과 가족의 문제로 치환되고 마는 것이다. (영화 〈밀양〉[이창동 감독, 2007]의 내러티브를 환기해보라. 죄지은 자는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로 인해 고통받은 자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고통이 배가 된다. 더욱 나쁜 것은 소위 죄지은 자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공감불능자일 때가 아닐까. 죄책감이 없는 그는 자신의 행동을 성찰할 도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판단과 행동을 제어하지 않으며,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문제적 행위를 활성화하게 된다. 이러한 사태는 역으로 공감이 성찰의 전제 조건이 되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고통의 프로파일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사자는 어리둥절한 사이에 그것을 감당한 병고의 주체가 되었을 뿐, 고통의 내력을 증명할 분석적 도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사회적 접근의 필요성을 느끼는 공감대도 아직은 없는 듯하다. 결국 고통의 몫은 언제나 개인이다. 그 때문에 고통은 고독하다. 우리 사회는 타인의 행복, 타인의 고통에 대해 얼마나 많이 공감하고 이해하려 하며, 배려를 준비하고 있을까.
고통은 언제나 사유로 가득하다 이 세상에 백치미를 가진 고통은 없다. 고통은 언제나 사유로 가득하다. 상처와 고통이 예술의 근원이 되는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거부하고 싶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상처와 고통을 통해서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권한과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 기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스스로를 ‘말하는 주체’로 만든다. 고통을 통해 주체는 비로소 입과 손을 가진 존재임을 자각한다. 고통은 육체를 표현의 도구로 만든다(우리는 ‘힘들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다’는 인식적 자각에 앞서, 머리가 아프고 피부 가려움증에 시달리며, 뒷목이 뻣뻣해지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육체적 증상에 압도된다. 육체적 변화는 병리적 반응인 것만이 아니라 육체가 나 자신에게 건네는 경고의 음성이며, 일종의 구조신호 SOS다.). 어쩌면 고통을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그에 지지 않으려는 생명적 동력인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 마음을 움직인다. 거기에는 오직 고통받은 자만이 말할 수 있는 진정의 세계가 열려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고통의 언어를 찾지 못해 숨죽인 사람들의 상처는 더욱 은밀하게 가려지고 숨겨진다. 그 때문에 고통은 배가되며, 당사자는 세 겹의 사회적 시련에 시달린다. 고통을 말해서는 안 되는 위치에 있다는 사회적 처지의 시련. 고통을 제대로 말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무지로부터의 시련. 그리고 고통을 말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무력감/무감각의 시련.
배려에 대한 연습 이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생각할 차례다. 그것은 고통에 대한 공감과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한 법적, 제도적 차원을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상처받은 이가 일상을 잘 살아낼 수 있도록 하는 소소한 배려가 필요하다.
“I have always depended on the kindness of strangers.” (저는 항상 낯선 사람들의 친절 덕분에 살아왔어요.)
위 문장을 얼마 전 읽은 한비야의 에세이 〈1그램의 용기〉에서 보았다. 테네시 윌리엄스가 쓴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나오는 대사라고 한다.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친절, 위로, 배려가 한 사람의 생을 움직여 나가는 동력이라는 것을 나 역시 잘 체험한 바 있다. 그것은 물에 빠졌을 때 나를 구해준 사람이 모르는 타인이었다, 라는 극적인 내러티브가 아니다. 위로는 언제나 소소하게, 일상 속에 무심히 스쳐 지나는 흐름 속에 존재하고 있다. 때로는 누군가 거기에 있다, 그렇게 누군가가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를 받게 된다. 비록 내가 켜지 않은 등불일지라도, 등불이 저기서 빛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어둠 속의 공포를 견디며 그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언 땅을 뚫고 새로 돋는 새싹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려면, 연한 새순이 굳은 흙을 뚫는 고통을 통과했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되듯이, 우리의 평범하고도 존귀한 삶을 지탱해 주는,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 가득한 시간에 대해서 헤아려야 하는 것은, 어쩌면 살아 있는 사람들이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의무의 감정이다.
고통의 상상력은 소소한 배려 속에 이미 치유라는 구원을 건넬 것이다. 작고 사소한 움직임이, 무심하게 스쳐 지나는 작은 미소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육신은 사소한 그 무엇에도 상처받지만, 반대로 아주 사소한 그 무엇에도 깊이 위로받는,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