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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위대한 신앙위인 38인의 이야기/백범 김구선생 - “피와 눈물로 조선을 하나님의 나라로”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4. 18. 10:53

백범 김구선생 - “피와 눈물로 조선을 하나님의 나라로”
 

“왜놈이 조약을 강제로 체결해 국권을 뺏는데 우리 인민들은 원수의 노예가 돼 살
것인가 아니면 의롭게 죽을 것인가!”

1905년 겨울 서울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대한문 앞. 수많은 청년들이 모인 간운데 한
젊은이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문을 서성이던 일본 순사가 깜짝 놀라 칼을 빼들고 달려들자 이 청년은 순사를 순식간에
발로 차 넘어뜨려버렸다.
순사들은 총을 쏘기 시작했고 이 젊은이를 비롯한 청년들은 기왓장을 집어던지며 싸웠다.

이 청년의 이름은 김구.
대한문 앞에 모여 총칼 앞에 맞선 이 청년들은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리기 위해
모인 상동교회 애국청년회였다.

이당시 상동청년회는 전국적으로 기독교 애국 청년들이 모이는 곳으로 이름나 있었다.
김구는 황해도 진남포 엡윗(Evert·의법)청년회 총무의 자격으로 이날 상소문 작성에 참여했다.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는 뜨거운 가슴을 지닌 기독 청년이었다.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에서 안동 김씨집안의 7대 독자로 태어난 김구는 기독교인이 되기 이전에 승려로
떠돌았고 그 이전에는 동학, 그 앞서는 유학에 전념한 파란만장한 종교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여러 종교를 전전한 까닭은 민족의 앞길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다녔기 때문이다.

9세부터 유학을 익혀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했지만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세태에 울분을 느끼고
이듬해 동학에 몸을 담았다.
19세에 ‘꼬마 접주’가 돼 해주지역 동학군의 선봉장이 됐다.

명성황후가 참변을 당한 을미사변에 충격을 받은 김구는 1896년 2월 왜병 중위를 맨손으로 처단했다가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는다.
1897년 고종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됐고 1898년 탈옥,삼남 일대를 떠돌다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됐다.

김구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20대 후반이다.
황해도 장연에 학교를 설립해 계몽운동을 벌이던 김구는 을사조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에 상동청년회의 조약반대 전국
대회에 참석했다가 대한문 앞에서 가두연설에 나선 것이었다.

김구는 1919년 3·1 운동까지 국내에서 교육계몽운동을 벌이며 비밀단체인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주도했고,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 혐의로 19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3·1 운동 후에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으로 참여했다.
백범 김구는 중도 우파이면서도 무장독립운동을 주장했다.
항일 무장 독립군을 조직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뒤 한반도 수복 작전을 계획했다.

그러나 미처 실행에 옮기기 전에 해방이 이뤄졌고,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은 열강에 의해 분단됐다.
백범은 이 시기 발표한 논설 ‘나의 소원’을 통해 “하나님이 내 소원을 물으신다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조선의 독립”
이라며 “완전자주독립 노선만이 통일정부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한반도 민중의 뜻을 대변했다.

당시 미군정 책임자는 “그는 내가 만난 가장 특별한 한국인이었다. 이름 모를 위엄과 광채가 항상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를 검은 호랑이라고 부르고 싶다.”는 기록을 남겼다.

임시정부 수립 31주년인 1949년 6월26일 정오 네발의 총성이 경교장(경교장)에 울렸다. 암살범으로 체포된 육군소위
안두희는 백범을 블랙 타이거(검은 호랑이)라고 불렀다.

백범은 생전 한 기독교 잡지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그리스도인인 고로 거짓없는 내 양심은 내 죽음을 초월하고 나라를 사랑하였습니다. 내가 만일 어떤 자의 총에
맞아 죽는다면 그것은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듯 이 나라에 많은 애국자를 일으킬 것입니다.
눈물과 피로 우리들이 갈망하는 조선을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봅시다”


김지방기자
fattykim@kmib.co.kr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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