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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 7:13-14)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4. 23. 17:05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 7:13-14)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듣고, 읽고, 보고, 그리고 때로는 암송할 때에 큰 힘과 위로를 받게 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할 때, 더욱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스러운 말씀들이 많이 있는데, 구약과 신약의 말씀 가운데, 특별히 황금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황금률이란, 하나님 말씀 가운데에도 아주 중요하고 귀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황금률은 미가서 6:8절 말씀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황금률은 마태복음 7:1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예수님께서는 비록 원수라 할지라도 남을 지극히 대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요, 절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겸손함으로, 낮아짐으로 이웃을 섬기는데 무슨 문제가 발생하겠습니까? 있던 문제도 쉽게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인간 관계 문제점의 해결책이, 바로 이 한 절 말씀에 다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데올로기 갈등의 문제라든지, 빈부격차의 문제라든지, 여야 문제, 노사 문제, 학원 문제, 양극화 현상 등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씀을 가리켜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말씀하신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의 말씀을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이 산상수훈의 말씀은 7:12절, 곧 황금률로 일단 끝이 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무엇인가? 천국 백성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해,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 적극적으로 이웃을 대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산상수훈의 결론입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 나오는 말씀은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을 들었으면, 결단하고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13절 이하에서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직접적으로 적용하면서 살아가야 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었다 할지라도, 구체적으로 자기 삶에 적용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 적용의 문제와 결단의 문제가 13절에서부터 우리들에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13-1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아멘.

 

예수님은 산상수훈 앞부분에서 참된 크리스챤의 삶의 본질과 모습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그리고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팔복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참된 크리스챤의 삶의 본질과 모습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는데, 참 좋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런 좋은 말씀을 들었으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참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시고 나서, 우리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마지막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즉 마태복음 5:1-7:12절까지의 말씀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크리스챤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좁은 문, 좁은 길에 대한 것을 좀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먼저 좁은 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내 몸뚱이 하나 겨우 빠져 나갈 정도의 문이라는 뜻입니다.

좁은 문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좁은 문은 천국의 문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소유가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더 부유해지려고 노력하고, 애쓰고, 투쟁합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정신적인 부유이건, 물질적인 부유이건,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문은 우리들이 그렇게 소중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유물들을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재물, 보화를 가지고 천국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빈손으로 가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6.25때 이북에서 피난 나오는 사람들은 멋진 장롱, 골동품, 수많은 책 등 좋은 것들을 다 버리고 나왔습니다. 피난할 때, 아무리 좋은 것이 있으면, 무엇 합니까? 천국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몸에 지니고, 땅을 수십만 평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천국에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천국 문은 자기 몸 하나 겨우 빠져 나갈 정도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좁은 문은 우리가 세상에서 귀하다고 하는 모든 것들을 거부합니다. 포기해야지만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둘째로, 그것은 작기 때문에 발견하기가 어려운 문입니다.

좁은 문은 우리에게 유익을 줄 것 같지도 않고,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며, 좀처럼 쉽게 발견될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크리스챤의 삶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화려하고 큰 문이 아니기 때문에, 인기가 없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문입니다. 또한 그 문은 갑자기 좁아졌다거나, 점차적으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좁고 협착한 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착각을 합니다. 좁은 문을 들어가고, 좁은 길을 가다 보면, 큰 길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논리가 아닙니다. 크리스챤의 삶은, 처음도 좁은 문이고, 끝도 좁은 문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좁은 문입니다. 이 좁은 문을 기뻐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좁은 문을 발견하고, 그 안에 들어가는 소수의 사람은, 세상을 버린 사람이요, 자기를 버린 사람입니다.

 

셋째로 그것은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누구든지 좁고 협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문에는 처음부터 고난과 박해 그리고 오해받음이라는 문패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할렐루야” 하고 뛰어 들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문은 상식과 이성과 합리로써 들어가는 문이 아니요, 오직 영광스러운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14절에 보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좁은 문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만이, 그 문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 스스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그 고통스러운 문을 통과해야 합니까? 그것은 구원 때문이요, 영생 때문입니다.

반대로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문은, 어떤 것입니까? 13절에 보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라고 하였습니다. 큰 문은 무엇을 가지고도, 다 통과할 수 있는 문입니다. 우리들의 재물도, 학식도, 명예도 모두 가져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크고, 쉽고, 편안한 것을 좋아합니다. 또한 눈에 보기 좋고, 감각적이며, 화려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넓고 큰 문은, 멸망의 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자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넓은 길입니까? 좁은 길입니까? 당연히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좁은 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좁은 길이란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길입니다. 신앙이란 단순히 좁은 문을 통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좁은 길을 걸어가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는 단순한 사실에, 기독교 구원의 전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삶을 걸어가야 하는 좁은 길에, 구원의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구원의 문이란, 구원의 길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좁고 협착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크리스챤은 세상과 다른 외롭고 고독한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힘들고, 귀찮고, 어렵지만, 그냥 묵묵히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입니다. 고독과 고난이 없는 축복과 영광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고난이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광의 시작일 뿐입니다.

 

둘째, 좁은 길이란 의인의 길입니다. 시편 1편에 보면, 두 사람의 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의인의 길에 있고, 또 한 사람은 악인의 길에 있습니다. 먼저 의인의 길에 대해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의인의 길이요 좁은 길입니다. 좁은 길은, 끝까지 좁은 길이지만, 결과는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좁은 길을 걸어가면, 형통의 길, 평탄의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시편 1편은, 악인의 길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길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라고 하시며 이 두 가지 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맺습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것은 좁은 길은 의인이 가는 길이요, 넓은 길은 악인이 가는 길임을 보여 준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좁은 길 가기를 기뻐하고, 좁은 길 속에서 행복과 보람을 느껴야 합니다. 의롭고 진실한 사람은, 결코 세상과 짝하여 살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지도 않습니다. 눈에 빤히 보이는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셋째, 좁은 길은 뚜렷한 목표가 있는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왜 고생을 사서 하며, 불편하고 어려운 일을 스스로 택하겠습니까?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파이들은 특별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고통스럽고 좁은 길만 골라서 다닙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라는 14절 말씀에 비추어보면, 좁은 길을 선택한 사람은, 분명히 거기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에, 고통스럽지만, 그 길을 택하여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를 진주에 비유해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났을 때, 그는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다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진주는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보상이 없다면, 현재의 고난은 얼마나 억울한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없다면, 정의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천국이 없다면, 오늘 현재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악한 사람들이 득세하고, 우상이 가득하고, 권력이 세상을 지배하여, 정직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가난하여지고, 핍박을 받고, 오해를 받는 이 땅의 현실을 무엇으로 극복해야 합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 천국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이 사실 때문에, 억울함을 당하고, 오해를 받고, 고난의 길을 걷는다 할지라도, 기쁨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8:18절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하였으며, 마태복음 5:10절에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좁은 문과 좁은 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왜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는지 그 뜻이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참된 크리스챤의 축복은, 좁은 문과 좁은 길을 선택할 때, 얻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절부터 7장 12절까지의 말씀은, 13절 말씀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들으면 무엇 합니까? 삶의 변화가 없다면, 마당만 밟은 것뿐입니다. 자기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으면, 결단하고, 잘 적용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두 가지 선택의 가능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즉 두 나라- 하나님의 나라와 이 땅, 두 보물- 하늘에 쌓는 보물과 땅에 있는 보물, 두 주인- 하나님이야 재물이냐, 두 가지의 길- 멸망의 길이냐 영생을 얻는 길이냐 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의 길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좁은 문을 선택하기를 권면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좁은 문, 좁은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언제나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대는, 사탄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사탄과 싸워 이긴 사람도, 자기라는 우상 앞에 패배하기 쉽습니다. 철야하고, 금식하고, 회개하고, 성경공부하고, 말씀 듣고,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자기 앞에서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쾌락을 좋아하고, 편안한 것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명예를 좋아하고, 사람의 칭찬에 약한 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사역을 시작하시려고 할 때, 나타난 적은, 사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나타난 적은, 사탄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이 잔을 꼭 마셔야 합니까? 이 잔을 피할 길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그 잔을 마셔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와 싸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 싸움이 얼마나 컸던지, 땀방울이 피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로, 자기가 아끼고 사랑하는 것들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6:7-9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아멘.

 

우리는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물질에 대한 미련, 성공에 대한 미련, 삶에 대한 미련 등이 버려지지 않으면, 좁은 길은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결국 다 버리고 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루에 세끼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창고에 쌓아 두고, 자기는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자부심을 갖습니다. 세상의 것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하는 우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좁은 길을 걷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가야 합니다. 염려를 버려야 합니다. 걱정을 버려야 합니다.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쓸데없는 고민들을 가 버리고 걸어갈 때, 좁은 문을 통과하여,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셋째는, 핍박과 오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핍박을 받고, 오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18-19절 말씀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아멘.

또한 “내가 온 것은 평화를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려고 왔다”고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 보면, 또 좁은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은 평생 걸어야 할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 갑자기 부모가 핍박자로 변하기도 합니다. 형제들이 비난자가 되기도 합니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이, 가장 무서운 핍박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이란, 세상에서 선한 사람에게는 무한히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천국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비난을 받고, 핍박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런 양면성이 크리스챤에게는 있습니다.

 

여러분! 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뜻은 우리에게 좁은 문을 구경하라는 것이 아니라, 들어가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은 행동에의 초청을 말합니다.

산상설교의 특징이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 구경하면, 그렇게 좋은 말씀이 없지만, 막상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고통과 괴로움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산상설교를 대할 때, 부딪치는 당황함입니다.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이 드러나고, 안일함과 게으름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하였느냐보다는, 무엇을 하였느냐가 중요하고, 교회를 얼마나 다녔느냐보다는, 얼마나 변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 중에, 교회에 나와서, 몇 년이 지나도록, 감격이 없고, 마음의 변화가 없다면, 여러분의 믿음의 상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날마다 새로움을 경험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말씀을 읽으면서도, 말씀을 공부하면서도, 전혀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만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귀동냥, 눈동냥하며 교회 다닌 경력만 늘었기 때문에, 나중에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새로워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좁은 길, 좁은 문은 인간의 결단이나 도덕적 노력으론 갈 수가 없습니다. 실로 좁은 길과 좁은 문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은 성령님에게 있습니다. 인간의 본능은 이러한 것들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고, 보호하며,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를 미워합니다. 사람은 편안한 것을 좋아하고,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좋아하는 타락한 성품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능과 세속적 성품에 맡겨 놓아서는 안됩니다. 성령의 인도와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천국에 대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좁은 길을 걸으시고 좁은 문의 삶을 사셨던 믿음의 조상들을 바라보십시오.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베드로와 열두 제자, 스데반과 일곱 집사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특별히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가 없으셨습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것이 좁은 길이요, 좁은 문입니다. 영생을 가진 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장 눈에 보이는 대로 행동하지 마십시오. 넓은 길, 편한 길만을 고집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그 문이 생명의 문이라면 그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때로는 그 길이 고통의 길이요, 아픔의 길이요,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생명의 길이라면 그 길로 걸어가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여 주십니다. 늘 주님과 동행함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로 하여금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좁은 길로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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