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기독신앙인물탐구

[스크랩]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1832-1905)-중국 내륙 선교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4. 28. 10:47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1832-1905)-중국 내륙 선교사




(1)주님께 맡기는 삶

1832년 5월 21일 영국 반슬리에서 출생한 허드슨 테일러는 17세에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어느 날 "나를 위해 중국으로 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중국선교에 대한 열망이 불타게 되었고 1850년 5월 중국선교를 위해 의학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좁은 하천을 따라 형성된 빈민촌에서 검소한 생활을 하며, 불편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적응하는 선교사 훈련을 쌓아갔다. 특히 그가 선교를 위해 준비한 것은 기도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비결을 터득하는 것이었다.

그는 영국을 떠나기 전에 어떤 어려움이 온다 해도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겠노라고 결심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결단을 물질적인 궁핍을 통해 시험하셨고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통하여 필요한 것을 공급받는 비결을 깨우쳐 갔다. 이러한 모든 믿음의 과정을 통과한 후 비로소 선교사로 중국에 갈 확신이 섰다. 이처럼 하나님만 의지하는 훈련은 훗날 그의 선교현장에서 맞게 되는 갖가지의 역경들에 굴하지 않고 기도로 승리하는 귀중한 영적 비결이 되어주었다.


(2)선교의 토착화 시도

1854년 하나님은 약 5년간의 훈련과정을 마친 그로 하여금 처음으로 중국 땅을 밟게 하셨다. 당시 중국은 태평 천국의 난으로 혼란스러웠는데, 상해에서의 혹독한 추위와 무더위, 그리고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그는 굴하지 않고 2년 동안 10회의 전도 여행을 강행했다.

그러나 1년 동안의 헌신적인 전도에 비해 열매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 이유는 테일러의 복장이 중국인들에게 이질감을 느끼게 하여 선교활동에 큰 장애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외모를 중국인과 똑같이 하기로 작정했다. 중국복장을 하는 것이 외국인들에게나 본국의 선교회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줄 것은 뻔한 일이었지만, 죽어 가는 영혼들의 외침이 너무나 간절했기에 테일러는 주저하지 않고 멸시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곧바로 머리를 깎고 중국 옷으로 갈아입은 뒤 거리로 달려나갔다. 진짜 중국인이 된 것이다. 이후로부터 전도의 문은 활짝 열리게 되었다.


(3)하나님만 의지하는 삶

그 당시 '중국선교회'는 재정적으로 큰 빚을 지며 테일러의 봉급마저도 꾼 돈으로 송금해 주는 형편이었다.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롬13:8)는 성경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갈등하던 테일러는 이듬해 아무런 경제적 대책 없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채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사표를 제출하였다. 테일러는 27세 되던 해에 평생의 반려자인 다이어 양을 만나 결혼을 하였다.

그후 그는 2년간 노방전도·교회설교·신앙상담·전도여행 등으로 바쁜 일정을 보내며 풍성한 선교의 열매를 맺었다. 그런데 동역자인 파커 박사가 설립한 병원이 사정에 의해 테일러에게 맡겨지면서 자금 사정이 매우 어려웠다. 일하던 조수들도 봉급을 받지 못해 하나둘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요리사가 마지막 쌀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보고해왔다. 그때 테일러는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시간이 가까이 왔음이 분명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에 신실하게 응답하셨다.


(4)영적인 고뇌의 순간

1860년 계속되는 과로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휴양을 위해 영국에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점차 건강이 좋아지자 의학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닝포성경(중국어 성경)을 개정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점차 중국선교에 대한 외부의 관심이 약화되어 갔기 때문에 젊은 선교사 부부는 점점 더 고립되어 갔다. 런던의 빈민가에서 보낸 5년은 그들에게 있어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선교사 부부를 연단하시고 훈련시켜서 보다 큰그릇의 일꾼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테일러는 중국에서 한 달에 백만 명씩이나 하나님을 모른 채 죽어가고 있음을 생각하고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열악한 생활 환경과 선교의 장애 요인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동역자들이 현지의 고난과 무거운 짐을 견디다 못해 쓰러져 자기에게 책임을 돌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염려하고 있었다. 마귀는 계속해서 기도와 믿음에 자신이 없다면 중국 내륙 선교를 포기하라고 유혹했다. 더구나 자기가 솔선하여 선교사들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커다란 영적인 고뇌 속에 있을 때, 주님은 수개월 동안 맛보지 못했던 마음의 평안을 주셨다.


(5)중국 내륙 선교회 창설

새로 이사한 집에는 선교 지망생들로 붐비기 시작했고, 테일러는 가진 돈 전부인 50달러를 은행에 넣고 '중국 내륙 선교회'라는 은행구좌를 만들었는데, 요청하지도 않은 수백 달러의 자금이 들어오게 되어 중국으로 떠날 제1진의 선교사들이 준비되었다.

또한 『중국의 영적 필요와 요구』라는 소책자를 출판하여 판이 거듭됨에 따라 선교 지망생들이 전세계적으로 많아졌다. 이렇게 해서 버거씨 부부는 영국에서 선교회의 대표가 되어 후원을 담당하기로 했고, 테일러 부부는 1866년 5월26일 최초의 내륙선교사 16명과 그의 가족들 일행을 인솔하고 4개월의 긴 항해에 들어갔다. 배 안에서 테일러 부부는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중국어를 가르쳤고 배 멀미로 쓰러지는 사람에게는 간호사 역할까지 하였다.

그러나 도착하기까지 한시도 쉴 사이 없이 태풍이 불어 파선의 위기를 겪었으며, 식수가 떨어지고, 불이 꺼져 밥을 지을 수도 없게 되는 등등의 무수한 시련 속에서도 믿음과 기도로 하나님께 매어 달렸기 때문에 생명을 잃거나 중상을 입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6)영적인 열매를 거두다

12월에 항주에 도착한 그들은 추위와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열심히 전도하여 그 해 크리스마스 전에 교인 수가 50-60명이나 되었다. 또 환자들이 하루에 200명씩이나 몰려들었고, 테일러는 테이블 위에 서서 병원 뜰에 잔뜩 몰려든 환자들에게 설교하였다. 그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으며 언제나 변함없이 친절하고 사려 깊은 관심과 사랑을 베풀었다. 1867년 8월에는 1500명이 모이는 교회가 세워지는 큰 기쁨을 맛보기도 했으나, 8살된 맏딸을 잃게 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이 주님을 향한 열심과 사랑을 막지는 못했다. 16개월간의 각고 끝에 안정된 항주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복음이 한번도 전파되지 않은 양주를 향해 떠났던 것이다. 양주에서 방을 하나 구한 테일러 선교사 부부는 끊임없이 찾아오는 환자들과 방문객들에게 유창한 중국어와 겸손한 태도로 선대하여 많은 신자들을 얻게 되었다.


(7)폭동이 일어나다

양주에 자리잡은 테일러 부부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이곳의 지식인들이 단합하여 "모든 범죄와 악행이 예수교를 전파하는 외국인들의 소행이며 24명의 어린이들이 그들에 의해 죽었다"고 선동하였다. 충동된 폭도들이 고함치고 불을 지르며 몰려 왔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매번 위기를 모면했다. 테일러는 "이번 사건을 전화위복으로 우리가 내륙에 복음을 전파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감사하였다. 한편 영국 매스컴은 양주 폭동사건을 오해하여 중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매스컴은 선교사들이 대포와 총검을 앞세워 중국인들에게 기독교를 신봉하라고 강요했으며, 이에 대해 현지 인들이 들고 일어나자 선교사들이 영국함대에 보호를 요청하여 전쟁이 일어날 위기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자연히 '중국 내륙 선교회'는 비난의 대상이 되어 후원의 손길이 줄어들면서 심각한 재정적 위기를 맞게 되었고, 안으로는 선교 초창기부터 말썽을 부리던 몇몇 선교사들이 사표를 제출하며 반기를 들었다.


(8)계속되는 시련

6주 후, 테일러는 아내와 아들을 동시에 잃는 큰 슬픔을 맛보았다. 그의 병약한 아내는 아들을 출산했으나 그 아들은 영양실조로 6개월만에 죽고 곧이어 부인조차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테일러는 아들과 아내를 동시에 잃는 큰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또 1871년에는 육체의 질병으로 많은 고통을 겪어야했다. 간장이 나빠져서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고통을 당했고, 설상가상으로 허파에 이상이 생겨 호흡까지 곤란하였다.

그 해 말경에는 그 동안 선교부의 영국업무를 지원하였던 버거씨 부부가 은퇴함으로 선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테일러는 15개월간 귀국하였다. 사태를 수습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테일러에게 시련은 계속되었다. 그가 없는 동안 중국 내륙 선교활동은 점점 침체되어 교회들은 힘을 잃고, 선교지부 교회들마저도 인원이 태부족이었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아예 문을 닫아버렸다.


(9)다시 하나님의 사역은 시작되고

이 때 하나님은 충실한 여성 지도자였던 폴딩 여사를 두 번째 아내로 보내주심으로써 33년간 헌신적인 동역을 하도록 도우신다. 테일러는 자신이 솔선 수범하여 가장 힘든 일을 맡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초신자들과 선교사들에게 새로운 열심을 불어넣었다. 부인과 함께 남경에서 3개월간 전도에 힘써 어떤 날은 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교회에 몰려오기도 했다. 모든 선교지부를 심방 하면서 중국인 지도자나 전도자, 성경교사를 만나 격려하였다.

1874년 6월에는 쥬드 선교사와 함께 무창에 서부지역 선교지부를 창설하기도 했으나, 7월에는 헌신적인 블래췰 양이 영국에서 과도한 선교업무와 어린이 사역을 감당하다가 사망하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테일러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급히 귀국하여보니 영국 선교회 본부는 텅 비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전에 다쳤던 척추까지 재발되어 끝내 하반신이 마비되는 고통을 겪게 되었다.


(10)하나님이 이루신 기적

하나님께서는 병중에 있는 테일러를 대신하여 큰 일을 하고 계셨다. 모 기독신문에 아직 미개척 상태인 중국의 9개 성(城)과 선교 목적에 관한 테일러의 글이 보도되었다. 그러자 그 동안 기도해오던 18명의 선교사들이 지원하였고, 선교사업에 사용될 물질도 모였다. 또한 중국 선교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1876년 9월 치푸 협정의 체결로 선교사들이 중국 내륙을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래서 1876-1878년에는 중국 내륙을 향해 전격적인 선교활동이 개시되었다. 당시 북쪽 지방에는 600만 이상이 기아에 허덕였고 어린아이들이 수천 명씩 굶어 죽어갔으며, 처녀들은 종으로 팔려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린이 사역을 감당할 지원자가 없어서 고민하던 테일러는 부인을 인도자로 세워 몇몇 여성들과 함께 내륙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여성선교 사역이 시작된 지 2년이 되자 내륙지방에서도 60-70명의 중국인 신자들이 모이는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1881년 11월 당시 선교부의 총 인원은 100명 정도였고 자금사정도 좋지 못하였다.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 무창에서 70명의 사역자를 위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70명의 선교사를 보내주시는 기적을 맛보기도 했다. 또한 1887년 12월 한 미국 기업인이 1888년 테일러를 미국으로 초청하였고,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호주 등을 방문하여 중국선교의 필요성과 후원을 호소하였다. 하나님은 테일러를 통해 말년의 12년간 전세계적으로 놀라운 역사를 일으켜 '중국내륙선교회'의 조직과 사업은 커져 선교사의 수는 무려 750명에 달하였다.


# 중국 내륙 선교회 회칙

①선교회는 초 교파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된다.
②선교회는 교육이 부족하여도 헌신과 사명과 능력이 있으면 된다.
③현지에서의 신속한 결단과 신축성 있는 행정력 동원을 위해 선교 지휘부는 영국이 아니라 중국에 있어야 한다.
④선교사들은 중국인 복장을 해야 하며, 될 수 있으면 중국인과 자신 을 동일시해야 한다.
⑤선교회의 일차적인 우선 과제는 언제나 복음 전파에 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