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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의 기쁨[The Joy of Christian Commitment]/John White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8. 14. 19:19

헌신은 자유로 향하는 길이다.

고난이 따르기는 해도 기쁨이 충만한 길이며

분쟁이 있기는 해도 평안이 충만한 길이며

의심과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깊어가는 신뢰가 충만한 길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친밀함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저자는 예수님과 아브라함, 자신의 헌신의 여정을 통해

진정한 헌신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아낌없이 팔아

귀한 진주를 사는 것과 같다는 성경의 진리를 보여 준다.

그는 헌신에 대한 보상만 강조하거나

그에 따른 고난만 과장하지 않고

성경적인 관점에서 헌신의 유익과 대가를 균형 있게 제시한다.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으로 말미암는 불가피한 갈등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법을 독자들에게 조언해 주고 있다.

 

헌신을 주저하는 이들에게는 결단을,

이미 헌신한 이들에게는 지속적인 재헌신을 촉구하는 본서는

기쁨과 평안, 신뢰와 친밀함이 충만한 헌신의 길로

당신을 한걸음 더 가까이 인도할 것이다.

 

헌신의 기쁨  (The Joy of Christian Commitment)

John White 지음       박영민 옮김; 출판사 IVP

 

    차례

  서문

  1. 재헌신

  2. 십자가의 길

  3. 순례자, 이방인, 난민

  4. 미움을 불러일으키는 충성

  5. 고난과 그리스도인

  6. 예수님과 고난

  7. 자기 십자가를 지라

  8. 그리스도인과 법과 박해

  9. 믿음의 좁은 길

  10. 첫걸음과 마지막 걸음

 

    서문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두 부류가 있다고 말한 사람은 어느 유명한 중국의 소설가였다고 기억된다. 사실을 조사하여 이를 호소력 있게 논리적으로 배치하는 사람과, 같은 사실이라도 체험을 근거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후자에 속한 사람이야말로 진실을 체험하는 사람이며, 그 진실과 진지한 투쟁을 하고 난 뒤 글을 쓰는 사람이다.

  나는 늘 두 번째 부류에 들고 싶었다. 자기 안에서, 존재의 밑바닥에서 진실과 씨름하는 것은 평생의 목표가 될 만하며 또 그래야 마땅하다. 그것이 아니라면 산다는 것이 대체 무엇이겠는가? 그 평생의 투쟁을 해가는 과정에서 당사자의 시각은 서서히 변한다. 지평이 넓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았던 미묘한 문제가 나타나며 새로운 위험과 영광의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몇 해 전에 쓴 글에 여전히 만족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내가 쓴 책을 거의 읽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읽어야 할 더 좋은 책이 많이 있을뿐더러, 힘들게 박사 학위 논문을 끝내놓은 사람처럼 나 역시 한 책을 끝내 놓으면 마음이 놓여서 더 이상 대하고 싶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대개 한두 주간 회복기를 보내고 나서 새 일에 착수한다.

  그러나 가끔은 큰 불만에 휩싸여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할 때가 있다. "이걸 그 때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이 책 혹은 저 책은) 다시 쓰지 않으면 안 되겠어."

  새로운 유행이 일반화되고, 잘못이 새로 드러나면서 책이 시대에 뒤쳐지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 삼았던 상황이 사라질 수도 있다. 많은 책이 이미  죽은 말을 채찍질하기 때문에 시의를 잃는다. 이 책이 나온 이래, 건강과 부요의 복음은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고통 없는 평안함과 성취감, 경제적인 번영이 강조되는  문화에서 이는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그러나 복음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의 희생에 대한 책에서 정면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이 주제를 다룬 내 책의 제목은 원래 '헌신의 대가'였다.  나는 이 책을 쓸 당시에도 그리스도께 열정적으로 헌신했거니와, 그 열정은 지금껏 해가 갈수록 자라났다. 내 열정은  젊은 날의 일시적인 열정이 아니었다. 편집자들이 이 책을 다시 한 번 살펴보라고 권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내 열정이 자랐다면, 헌신의 기쁨과 위험에 대한  나의 이해 역시 자랐다. 오늘날 헌신의 대가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큰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지금 내가 새로 고쳐 쓰는 이 책에 반영되어 있다.

  헌신의 배경 역시 변했다. 수많은 논쟁점이 새로 생겨났다. 예컨대 텔레비전 전도자들  등의 추문 때문에 우리의 대외적인 이미지가 더럽혀졌다(1987년경 미국에서는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설교와 전도 활동을 하는 이들의 금전 비리와 성추문이 잇달아 드러난 적이 있었다-역주).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럽혔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은 더럽혀질 수 없다. 적대적인 대중도 그리스도께만은 존경을 나타낸다. 그러나 텔레비전 전도자들로 인해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것이 약간은 곤혹스럽게 되었다. "당신도 그런 사람 아닌가요?"라는 대꾸가 나올 수도 있다.

  정치적인 분위기도 변했다. 악은 더욱 폭넓게 용납되고 있으며, 서구에서 기독교의 자유는 더욱 쉽게 침해되고 있다. 또한 기독교계 자체도 변했다. 20-30년 동안 우리는 '위로자 그리스도', '심리적인 위안자 그리스도', '부를 가져다 주시는 그리스도'  경도되었다. 그러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그만큼 강조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감옥이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따라오라고 명하신다. 그래서 나는 한 장을 추구하여 그리스도인이 정부를 어떻게 보아야 하며 시민의 불복종에 참여해야 할 것인지의 여부를 다루었다.

  새로 쓴 1장을 통해 독자들은 내가 이 책을 처음 쓴 이후에 드린 헌신의 삶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9장에서는 영적인 전쟁에 직면한 신앙에 대한 단상을 추가하였다. 새로운 자료도 이곳 저곳에 추가하여 논의를 보강하려 했으며, 흐름을 좀더 부드럽게 하려고 전체를 재구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 작은 책에 약간의 새로운 선율을 불어넣었는데, 이 선율이 옛 선율과 잘 어울렸으면 한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전보다 많은 열정을 느끼게 되리라 생각한다. 내가 전보다 더욱 깊은 열정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열정은 그리스도를 위한 열정이 되어야 하며, 국가에 대한 충성이나 교파에 대한 충성을 온전히 넘어서는 열정이 되어야 한다.

  끝으로 나는 이 책의 제목을 바꾸기로 했다. 원래의 책은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의 대가라기보다는 그 헌신의 영광, 그 헌신의 경이와 놀라운 특권에 대한 책이었다.  제목으로 '헌신'을 생각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는 진주 장수와 그가 훌륭한 진주  하나를 손에 넣기 위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희생한 그 정신 나간 열망을 생각하면서  「헌신의 기쁨」(원래 영서 제목은 '숭고한 열정'이라는 뜻의 Magnificent Obsession이다-편집자 주)을 제목으로 삼았다.

  편집자들은 이 제목이 그럴듯하다는 의견을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 바로 이것이 내가 다른 무엇보다도 말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은 최고의 보물을 추구하려는 헌신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삶을 불태우는 열정이 되실 때, 우리의 보잘것없는 잡동사니를 모두 팔아 버리는 것은 결코 희생이라고 할 수 없다.

 

    1. 재헌신

 

  아름다운 5월의 저녁이다. 나는 서재의 창을 통해 저녁 어스름이 내리면서 눈 덮인 케스케이드 산맥이 흰색에서 금빛으로,다시 연분홍색과 푸르스름한 빛으로  천천히 변해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예순다섯, 내가 예순다섯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

  나이를 의식할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지난 5년 동안 내가  나이를 의식하게 되는 때는 관공서 직원이 내게 "선생님, 노년 연금  생활자(보통 여자 60, 남자 65세 이상-역주)신가요?" 하고 물을 때 정도였다. 그런  질문을 들을 때면 나는 즉각 무용하고 연약한 존재로 전락해 버린다.  대체 누가 노년 연금 생활자가 되고 싶어하겠는가? 나는 예순다섯 살일지는 몰라도 어떤 범주에 묶이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나일 뿐이다. 아하, 알겠다. 그 직원들은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고, 또 대개는 친절하게 물어 본다. 그러니 그들에게 지금처럼 이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 아직도 더 배워야 할 것이 있다니...

  그러나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다.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 삶과 나  자신과... 또 모든 것에 대해 흥미롭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다. 나는 아직도 변하고  있으며 무언가 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나는 새로운  재주를 배우고 있는 늙은 개와 같다("늙은 개에게는 새로운 재주를 가르치지 못한다"는 영어 속담이 있다-역주).

  그 결과는 물론 실망스럽기 그지없을 때도 있다. 나는  가끔 후회와 상실감에 젖어든다.

"내가 40년 전에 이것을(혹은 저것을) 알았더라면, 인생이 얼마나 달라졌을까!"하고 되뇌인다. 그러나 온통 이런 실망에 사로잡혀 있을 수만은 없다. 무엇보다, 내 동년배 중에서 많은 사람이 몇 해 동안이나 정체 상태에서 판에 박힌 생활을 이끌어 가며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두려운 광경을 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은 더  이상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젊은 시절 자기 모습의 낡은 복제판처럼 행동하며, 더 성숙한 것이 아니라  더 둔감해지고, 젊음의 불꽃이 사라진 채  더 조심스러워지고 완고해졌을 뿐이다. 나는  이들과 전보다 덜 접촉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내 나이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마침 나와 같은 것을 배우고 있는 사람을 새로운 친구로  사귀기도 한다. 아마 다른 무엇보다도 이 때문에 내가 젊은 기질을 유지할 수 있는 듯하다.

  내 육체는 노쇠해 간다. 여기저기가 삐걱거리고, 전보다 쉽게 피곤을 느끼며, 잠도 제대로 못 잘 때가 있는가 하면 식사도 덜한다. 샤워를 마치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면 내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실은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이제 머리가 거의 다 벗어졌고 몸매도 형편없다. 그러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는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있다.

  나는 거의 언제나 무엇이든 할 마음 자세가 되어 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전보다 더 어려울지 모른다. 나는 가끔 반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젊었을 때보다 더  열심히 배우고자 하며, 더 많은 희망을 품고 더 많은 추진력을 발휘한다.

  나는 그 까닭을 안다. 그것은 헌신과 관련이 있다.  헌신이란, 그것이 진정한 것이라면 신체가 쇠약해지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노쇠의 과정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한다. 나이가 반드시 무관심과 노쇠로 빠져드는 지루한 내리막길이 되어야  할 까닭은 없다. 가만히 누워서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을 거부하도록 만드는 무엇인가가 내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나는 전보다 더 큰 정서적인 아픔과 더 큰 기쁨을 경험한다. 살아 있음을 전보다 더 강하게 느끼고, 아내를 더욱 사랑하며, 하나님의 창조물에 더 큰 경외를 느끼며, 새로 태어난 아이 앞에서 더 큰 경이를 느낀다. 그리고 이는 내가 오래 전에 정신과 진료와 연구 활동에서 일찌감치 은퇴했을 때 일어났던 어떤 일로 거슬러 올라간다(실상 이 과정은 내가 열여섯 살이던 때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여전히 나이를 느끼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 속의 생명은 늙어가는 육체에 억눌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해 두고 싶다.

 

    생기 잃은 낙원

 

  내가 은퇴한 까닭은 저술에 대한 요청이 정신과 진료와 학문 연구 생활과 상충하기 시작했고, 그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내 로리와 나는 이 문제에 대해 1-2년 가량 기도한 뒤에 저술을 선택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우리는 섬이 몇 천 개나 있는 큰 호숫가에 자리잡은 아주 외떨어진 아파트를 한 채 샀다. 그 곳에서 조용히 글을 쓸 작정이었다.

  그 곳은 멋진 곳이었다. 물론  넉 달간이나 눈이 내리고 눈보라가  치면서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는 문제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시골의 겨울이란 볼 만한 광경일 뿐만 아니라, 필요한 만큼은 제설 작업이 행해졌다. 눈 그 자체는 언제나 깨끗하고 흰 상태로 남아 있었다. 우리는 중앙 난방으로 따뜻하게 지냈고 게다가 장작도 충분히 쌓여 있었다.

  그 외의 계절에는 저마다 특별한 기쁨이 있었다.   호숫가에서 지낸 1년여의 시간은 내게 치유의 기간이었다. 분주한 도시 생활, 사람이 지치도록 돌아가는 진료 시간, 시시콜콜한 것을 따지는 연구 생활은 물새의 울음과 다람쥐의 재잘거림, 소나무 숲의 경치와 호수의 섬으로 바뀌었다. 나는 숲을 거닐며 숲 속의 평화에 젖어들곤 했다. 겨울에는 두껍게 얼어붙은 호수를 몇 킬로미터나 터덜터덜 걷곤 했다. 여름에는, 밑으로는 겨울의 차가움이 그대로  머물러 있지만 표면의 1미터 가량 햇볕으로 따뜻해진 호수에서 수영을 역시 가끔은 몇 킬로미터씩 하곤 했다.

  물론 나는 글도 쓰고 연구도 하고 기도도 했다.

  그러나 낙원은 점점 매력을 잃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모자란 점이 있었다. 예컨대 집 주위의 숲에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아내가 많이 걸을 수  없어서 나와 자주 동행할 수 없었던 때문이기도 했지만, 좀더 깊은 내면에서는  숲의 아름다움과 혼재되어 있는 조락과 죽음의 모습에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를 둘러싸고 있는 대지가 저주받은 대지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으면 숲은 그 아름다움을 조금은 잃고 말았다.

  또한 나는 이전에 경험한 것보다 더 깊은  인생의 투쟁에 대해 점점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기독교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었고, 하나님이 내 저술을 받아 주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후에 나는 셰익스피어의 '헨리 8'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떠올렸다.

 

  인간사에는 조류가 있다네. 밀물을 잘 타면 행운으로 이어지나 조류를 놓치면 인생의 모든 항해, 낮고 천한 곳에 이르리니.

 

  우리 부부는 도시의 치열한 경쟁을 피하려다가 그만 '낮고 천한' 곳으로 흘러 들어온 것은 아닌가? 나는 전투의 현장에 있고 싶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전선에 투입해 달라고 간구하기 시작했다. 영광이나 각광을 구했던 것이

아니라 오로지 끝까지 의미 있는 삶을 구했던 것이다. 나는 무엇엔가 목말라 있었다. 전투가 '그 무엇'의 한 부분이었고 게다가 큰 부분이긴 했으나, 그것은 그 정도로 그치는 문제가 아니었다. 주님이 가장 뚜렷이 눈에 드러나는 곳에 가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 날 아내가 내게 말했다. "한동안 기도해 온 기도 제목이 있어요."

  "그렇소? 그게 뭐요?"

  "이 곳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아서요."

  "나도 알아요. 당신에겐 힘들겠지. 당신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데  여긴 사람들과는 떨어진 곳이니까. 게다가 나와 함께 하는 시간도 많지 않고. 여보, 미안하오.  당신에겐 별로 즐거운 생활이 아닐 거야. 난 글을 쓰고 있지 않으면 밖을 거닐고 있거나 하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그보다 전 여기서 전혀 쓸모가 없는 듯이 느껴져요. 저는  전투 현장에 가고 싶어요."

  나의 미안한 마음은 금방 기쁨으로  바뀌었다. "당신도? 나도 몇 달이나  그 문제를 놓고 기도했소. 난 전투 현장에서 현역으로 죽고 싶소."

  이렇게 해서 우리는 최전선의 임무를 맡겨 달라고(그것이  언제가 되든지)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온전히 깨달은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 때 자신을 하나님께 재헌신했던 것이다. 헌신이란 결코 정적인 것이 아니다. 헌신은 시들기 마련이다. 우리는 때때로 미래에 대한 소망을 새롭게 하고 각오를 새로이 다지며 죽기까지 실행할 새로운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계속 기도했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난 뒤에 한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로 새로운 진로를 찾을 수 있는 문이 열리게 되었다. 우리의 헌신이 매일의 순종으로 실현되면서, 전에 생기 있는 삶을 살 때 느끼던 새로운 삶의 느낌이 점점 우리 영혼을 다시 일깨우기 시작했다. 그 뒤에 우리는 아파트를 팔고 3년 동안 이곳 저곳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기쁨과 슬픔

 

  우리는 새롭게 헌신함으로써 기쁨과 함께 아픔과 슬픔도 맛보았다. 새로운 헌신을 통해서 전에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죄와 연약함 뿐만 아니라, 전에는 알지도 못했던 일상적인 죄와 연약함에 대해서도 새로이 깨닫게 되었다. 그런 아픔과 슬픔 가운데는 우리의 과거의 경험에서 온 것도 있었지만(친구를 잃거나 비난을 받는 것), 적어도 하나는 새로운 괴로움이었다.

  나는 1년 전에 다른 나라에서 그 나라의 국민인 친한 친구를  위해 기도한 적이 있다. 기도 중에 주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  사람은 머지 않은 장래에 나로 인해 죽음을 당할 것이다." 나는 그 음성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기도 중에 마음이 흔들리고 기도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마치 내가 상상 속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틀 후에 나는 일행 중에 한 사람이 같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별안간 그는 울음을 터뜨리더니 계속 기도하려  애쓰면서 안타깝게 우는 것이었다. "왜 우셨습니까?" 나는 나중에 그에게 물어 보았다.

  "제가 기도하고 있는데, 주님은 제게 그 사람이 순교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슬퍼하지 않아야 옳을지도 모른다. 슬퍼하기보다  순교의 영광에 감동하고 기쁨으로 가득해야 할 것이다. 실제 전투에서는 희생자가 생길 수밖에 없고, 순교자는 특별한 면류관을 얻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왜 이런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가? 우리의 생각은 아직 하나님의 생각과 같지 않으며,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싶어하지 않는다.   친구를 볼 때마다 속으로 운다. 그에게 말해 줄 용기가 없다. 오래지 않아 언젠가는 말해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고난과 슬픔. 헌신의 삶에서 고난과  슬픔은 무슨 역할을 하는가?  왜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고난과 슬픔이 수반되어야 하는가? 고난과 슬픔은 둘 다 헌신의 일부이다. 나는 5-7장에서 이에 대해 좀더 이야기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을 위한 고난과 우리의 죄나 어리석음이나 실수로 인한 고난을 어떻게 구별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겠다.

  나는 또한 고통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눈물도 흘린다. 몇 달 전 필레몬 씨 부부는 홍콩에서 한 단체와 공동 사역을 마치고 나서, 우리 일행을 중국 해안에 있는 포르투갈 식민지 마카우로 안내했다. 일찌감치 출발한 우리는 정오가 되기도 전에 홍콩의 전직 유명 축구 선수요 마카우 복음 사역의 일꾼인 램 목사의 안내를 받아 제임스 모리슨이 오래 전에 지은 교회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모리슨의 무덤을 찾았고, 그의 아내와 아이들의 무덤도 함께 보았다. 그의 가족 가운데는 아주 일찍 죽은 사람이 많았다.

  나는 모리슨의 무덤 발치에 조용히 서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왜 우는지 몰랐다. 모리슨을 만나 본 일도 없었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사람이다. 또 몇 년 간 그에 대해 생각해 본 일도 없었다. 나는 그 날 하루 종일 간간이 울었다. 모리슨의 무덤을 생각하기만 하면 그대로 울음이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이에 대해  한두 번 이야기해 보려고 하였으나 결국 울음으로 끝나고 말게 될 것이기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던 것일까?

  나중에 가서야 나는 그 까닭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그 몇 해 전에 제임스 모리슨에 대한 책을 읽고 그가 중국 복음화에서 감당한 역할, 그의 번역물, 그가 편찬한 중국어  사전을 대하고 감동한 일이 있었다. 중국 기독교 개신교의 초기에 그의 역할은 특히 중요했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감동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던가?

  포르투갈어에는 그런 까닭을 나타내 주는 단어가 있다. '사우다데'라고 하는 이 말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의 소망을 나타낸다. 내 소망은 전투의 현장,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하나님의 실재를 체험하는 것이었다. 신비한 방식으로 모리슨의 무덤에서 느낀 절박한 현실감으로 인해 나는 내가 소망하던 더 큰 실재와 맞닿았던 것이다.  그 비석을 쓰다듬고 비문을 읽을 때 하나님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손을 뻗으셔서 내가 그 전에는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깊이 묻혀 있던 강렬한 소망을 일깨워 주셨다.

  독자들에게도 알려 주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에게도 그와 같은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 소망은 혹시 깊이 묻혀서  양심으로부터 가려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일깨워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또다시 어거스틴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추구하는 마음과 갈급함이 있으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지 않는 한 채워질 수 없는 불만이  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안식을 찾기까지 이 불안은 우리 마음에 계속 머물 것이다. 하나님이 이것을 우리 마음에 넣어 두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갑자기  깨달을 수도 있고 차츰 깨달을 수도 있지만, 아마도 잇단 추구와 위기를 통해서 깨닫게 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하게 된다.

  루이스는 저서 '순례자의 퇴보'(천로역정'이라 번역된 존 번연의 '순례자의 전진'에 빗대어 만든 제목-역주)에서 이에 대해 말한다.

  그 책의 2장에서 루이스는 존의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존은 창살 없는 창문을 통해 한 순간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 "숲 너머를  보자 안온함과 함께 찌르는 듯한 느낌이 왔다. 그 느낌은 너무도 강렬해서 그는 아버지 집도, 어머니도, 지주에 대한 두려움도, 규칙의 짐도 순식간에 다 잊었다.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는 어느 결에 흐느껴 울고 있었다... 숲 저편 끝에 걸린 안개가  잠깐 갈라지면서 언뜻 그 사이로 고요한 바다와 그 바다에 떠 있는 섬 하나를 본 것 같았다."

  그 이후 존은 평생토록 환상에서  본 섬을 찾는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금욕적이고 희생적이고 무미건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루이스의 이야기에서 존이 사모한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은 다른 두 가지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 두 가지는 신비에 싸인 까다로운 지주의 모순적인 규칙과, 존이 여행길에서 맛보게 되는 가짜 쾌락으로서, 둘 다 그 섬에 대한 거짓된 대체물이었다. 헌신은  종교적 '의무'의 굴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또 헌신의 기쁨은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뒤쫓는 만족함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헌신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헌신은 끌어내고 당겨야 하는 것이다. 헌신은 본래 우리의 모습, 진정한 우리의 모습으로 변해 가는 것이며, 우리가 본래 해야 할  그리고 본래 하도록 되어 있던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9장에서 조금 다루고자 한다.

  헌신에는 슬픔과 고통, 굴욕까지도 따를 수 있지만, 그 기쁨만은 비길 데 없다. 제임스 모리슨의 무덤에서 그 일이 있고 몇 주 뒤에, 필레몬 씨의  아내인 엘렌은 우리 일행 몇 사람을 중국 본토 광둥성의 성도인 광저우로 안내했다. 거기서 우리는  또 다른 램 목사를 만났다. 예순 살인 그는 800명이 모이는 가정 교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의 집은 행인과 자전거만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길가에 있었다. 교회는 정부의  허가를 받지 못해서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도 않았지만,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가 외국인인 것을 보고  램 목사의 집을 찾고 있는지 물어 보더니 안내해 주겠다고 나섰다. 게딱지만한 집에 들어서자 웃음 띤 젊은이들이 서둘러 차를 내왔다.

  램 목사는 신앙 때문에 두 차례나 투옥된 적이 있었다.  두 번째 투옥은 25년이나 계속되었고, 그 동안 그는 광산에서 중노동을 해야했다. 그 때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에게는 기쁨에 찬 말이 흘러나왔다. "아주 놀라웠지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당했지만, 하나님이 제 목숨을 지켜 주셨어요. 광산에서 많은 사람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지만 저는 상처를 입은 일도 없고, 거기서 설교까지 했답니다!"

  그는 영어를 꽤 잘하는 편이어서 자기가 살아 온 길을 다소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것은 놀라운 이야기였지만, 우리는 그에게서 넘쳐흐르는 말할 수  없는 기쁨에 너무나도 감탄하여 그 이야기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지난 두 주  동안 경찰이 세 번이나 심문을 하러 왔지만 그는 진정 기쁜 마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크게  부르짖었다. "전 계속 설교할 겁니다!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저들은 저를 잡아갈 수 없어요. 그리고 저는 가는 곳마다 계속 예수님을 증거할 겁니다!" 그것은 허풍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전에 본 적이 없는 기쁨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가 당하고 있는 위험과 또 그의 놀라운 용기를 생각하는 동안 우리는 겸허해지면서, 감탄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는 예수님께 헌신하는 가운데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보화를 찾았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 보화이다. 나는 다음 장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 어떻게 고통과 슬픔을 낳을 수 있는지, 그러나 또한 어떻게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을 낳을 수 있는지 깊이 있게 다룰 것이다.

  내 경우를 말한다면, 나는 낚시 바늘에 걸려 있는 셈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헌신된  상태인 것은 내가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서가 아니라 일종의 중독자가 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내게는 분명 바라는 대상이 있고, 그것을 손에 넣고  싶다. 그분의 낚시 바늘은 내 턱에 걸려 있다. 그 바늘에 끌려가는 것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황홀하기도 하다.

 

    토론 문제

 

  1. 저자는 자신이 늙어가면서도 계속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는 원인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2. 헌신하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헌신이 부족하여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친 일이 있다면 언제였는가?

  3. 저자가 저술을 위해 한적한  곳으로 이사해 감으로써 그리워하게  된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 말이 가리키는 바를 말해 보라.

  4.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당신의 헌신이 제자리에 머문 적이 있었는가? 다시 앞으로 나가기 위해 어떻게 했는가?

  5. 저자가 자신에게 그토록 기쁨을 불러일으킨다고 하는 그 헌신이 또한 슬픔도 불러일으킨 것은 왜 그런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으로 인해 기쁨과 고통을 함께 느껴 본 경험이 있는가? 이야기해 보라.

  6. 저자는 자신도 제임스 모리슨이 그랬던 것처럼 전투  현장에서 살고 싶은 소망이 있었기에 모리슨의 무덤을 보았을 때 감동되어 울었노라고 말하고 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소망은 무엇인가?(잘 모르겠다면,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는가?)

  7. '순례자의 퇴보'의 인용문에 나타난 헌신의 거짓된 대체물을 말해 보라. 다른  대체물로는 어떤 것들이 있겠는가? 그런 거짓된 대체물이 어떻게 당신의 영적인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가?

  8. 이 장에 나타난 저자의 헌신에 대한 묘사를 요약해 보라. 헌신은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2. 십자가의 길

 

  예수님께 헌신하고 그분을 따르는데 삶을 드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삶을 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서 그리스도의 눈으로 인생과 세상을 보아야만 한다.  그러면 한때 매우 중요했던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한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것들이 귀중하게 생각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 그리스도는 세상을  어떻게 보셨는가? 그분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보셨는가?  그분의 가치관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분이 가졌던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그분은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보셨는가?

  예수님의 목표는 아버지의 뜻을 아는 것과 그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목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하나님을 사랑하신 동시에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는 때 이른 죽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사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인생의 한창때에 죽으실  것이었다. 그분은 자신이 사랑하는 세상을 구속하기 위해서  범죄자가 당하는 죽음, 폭력적이고  수치스런 죽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아셨다. 공적인 사역의 후기에는 이 일이 정확히 언제 일어나게 될지도 알고 계셨다.

  역설적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바라보는 그분의 시각이 긍정적이며 기쁨에 찼으며, 그것도 죽음의 끔찍한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기보다 바로 죽음 때문에 그러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수치쯤은 예수님께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이는 그로 인해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리라는 것을 아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구할 수 있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에  대해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는 말로 이 점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공포나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 않으셨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것들을 모두 느끼셨다. 하지만 그분은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그것이 자신에게 지극히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값이기 때문이었다. 그 값은 그 어떤  것에 대한 대가보다 더 비쌀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리스도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손에 넣기로 결심하셨다.

  그분이 바라신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자 하셨으며, 또한 우리를 얻고자 하셨다. 생각해 보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우리와 교제를 나누기 원하신다. 그리스도께는 그것이 충분히 가치가 있는 대가였다. 당신은 당신의  교제가 그렇게 가치 있다고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리스도는 당신의 교제에 그렇게 높은 가치를 두신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동정하는  것은 커다란 실수다. 경악할 수는  있다. 경이와 놀라움을 표시할 수도 있다. 경배하고 경외할 수도 있다.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 하지만 동정이라니, 안 될 말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벼이 여기자는 말이 아니다. 그분의 죽음이 대변하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비길 데 없는 사랑만으로도, 우리는 최고의 경이와 엄숙함으로 그 죽음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나는 버지니아 비치시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적이 있다.

  내 옆자리는 비어 있었지만, 통로 쪽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고, 바로 뒤와  앞 좌석에도 사람이 있었다. 나는 주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묵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묵상하라고 이르시는 것을 느꼈다. 즉각 마음속에 벌거벗은 그리스도께서 고통 중에 달려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나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성령님이 "그 눈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게 나 혼자서 조작해 낸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하고 생각했다.

  잠시 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다가 같은 명령이 되풀이되었다. "그 눈을 바라보라."  내가 그 눈을 바라보자, 앞 좌석 등받이 저 너머에서  나를 내려다보시는 그분의 부드러운 사랑의 눈길이 내 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나는 그토록 강력한 사랑을 경험해 본 일이 없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자 그분의  눈이 말했다(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느꼈다). 그분의 눈은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고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널 위해 이런 일을 당할 수 있어서 기쁘구나!"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 눈, 그런 사랑의 힘을 한 순간도 더 대면할 수 없었다. 나는 주위에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크게 외쳤다. "견딜 수 없습니다! 예수님! 예수님!" 내게 닥쳐왔던 힘이 너무나 강해서 나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다. 계속해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강렬하고 고상한  사랑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부끄러워지면서 겸손해짐을 느꼈으나, 앞으로 언젠가 그런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 중단되었던 그 대면을 끝까지 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마음에 가득 찼다. 잠시 후 나는 통로 쪽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슬며시 눈길을 주었으나 그 사람은 독서에 열중한 나머지 내가 외친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마 비행기의 엔진 소음이 외침 소리를 삼켜 버린 모양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묵상할수록 그것은 더욱 경이로워지는 것 같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취에 대한 경탄과 놀라움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거룩하신 분, 곧 신인이  이루어 놓으신 일이다. 그것은 앞에  놓인 기쁨을 위해 행한, 사랑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였다.  그리고 우리는, 헌신하도록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도록 또 '예수님께 눈을 고정하도록' 부름 받고 있다.

 

    십자가의 길에 대한 그릇된 견해

 

  물론 우리 모두가 서른 세 살에 폭력적이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삶을 본다면) 삶의 모든 것, 심지어 삶 자체까지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헌신을 이해하려 애쓰는 가운데 헌신의 긍정적인 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오랜 세월 동안 심각한 실수를 범해 왔다. 그래서 '희생적인 삶'이나 '십자가의 길'이라고 하면 얼굴이 수척해질 정도로 열심을 내는 것을 떠올린다. 이들은  물질적으로 빈한하게 사는 것을 강조한다. 가난할수록, 고난을 받을수록 더욱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견해에는 진리가 일부 들어  있긴 하다. 앞으로 이야기하려는 것에도  '없이 사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자기 부인과 고통이라는 측면은 이야기의 반도 안 된다. 긍정적인 면을 희생시켜 부정적인  면을-이득보다는 손실을-강조하는 것은 정말로 진리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진리를 왜곡하는 것 이상으로 악영향을 끼친다. 그것은 진리를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사람 앞에 엄청난 영적  장애물을 놓는 격이 된다.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게 되면,  스스로의 영성을 고상하게 보려는  견해와 싸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당신의 싸움은 당신이 정말로 덕스러운(당신이 생각하기에 말이다)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복잡해진다. 그리하여 당신 속에서는 인정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당신은 거듭해서 자신에게 "나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 일을 한 것"이라거나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였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당신이 한 일이다. 당신은 성실하게 희생했을지라도,  그것은 자기 노력, 곧 겸손해 보려는 당신의 헛된 노력을 통해 성령님을 속이려는 자기 수고일 수 있다.

  당신은 또한 당신보다 덜 헌신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비판하지 않기가 어렵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물론 당신은 바리새인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비판적인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매우 애쓸 것이다.  그러나 그 감정을 누그러뜨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감정은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못 이해한 데서 생긴다. 그리스도인들은 헌신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피해야 할 사항을 너무 많이  강조하기 때문에, 이런 일반적인 오류를 먼저 해결하고 넘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십자가의 길은 지적 활동의 가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내게 "우리는 고등 교육의 가치를 믿지 않는다.  고등 교육은 세속적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등 교육이 세속적인 것은 아니다. 좋은 직장 혹은 지위에 대한 야망이나 지적이고 학문적인 속물 근성이 세속적인 것이다. 지식이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학문에 대한 야망 때문에 패배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위험은 학문을 추구할 때가 아니라 학문에 빌붙을 때 나타나는 결과일 뿐이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지식을  얻으라, 명철을 얻으라"는 충고를 무효화시키는 곳이 없다. 그리스도의  군대에서는 학자와 목수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행진한다. 어떠한 소명이든  차별이 없다. 머리를 쓰는 일이든 손을  쓰는 일이든, 중요한 것은 소명을 추구하는 우리의 동기다.

  십자가의 길은 예술적 표현의 가치를 부인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본성이 타락한 이상,  인간의 창조성 역시 부패한 용도에 사용될 수 있다. 당신이 만약 여호수아 시대의 히브리인이라면 전쟁에서 노획한 그림과 조각상들을  파괴해야만 했을 것이다. 노골적인  우상 숭배와 악마주의의 유혹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당시는 악신에 대한 믿음과 또 그 악신들이 조각상 가운데 거한다는 믿음이 강한 시대였다. 현대의 고고학자와 예술가들은 '매우 귀중한' 보물들이 후손에게 전해지지 못한 것을 슬퍼할지 모르지만, 역사의 그 시점에 처한 당신의 책임은 후손에게 더 큰 가치가  있는 어떤 것-사람이 만든 조각상  안에 거하지 않으시는 한 분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고고학적 조형물의 유실은 훨씬 더 큰 가치가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지불한 작은 대가였다.

  시각 예술품에 대한 청교도의 반박이 모두 정당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헌신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기독교' 음악, 찬송가, 기독교 소설 등을 제외한 모든 예술 표현을 수상하게 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부지불식간에 영성을 문화적, 예술적 빈곤과 연결해서 측정하는데,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에게 경이로운 별 무리의 장관과 눈의 결정체와 난초의 연약한 아름다움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역시 그분과 마찬가지로 창조자가 되도록 만드셨다. 예술의 위험은,  하나님이 만드신 예술을 감사하게 받거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사용하는 대신,  예술 표현 그 자체를 예배하기 시작하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그 같은 위험을 경계해야만 한다.

  이제 당신은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당신이 베토벤을 좋아한다고 할 때) 베토벤 음악을 영원히 내버린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십자가의 길은 정당한 즐거움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즐거움을 만들어 내셨고, 사람에게 그 즐거움을 주셨다. 그런데  악마가 인간에게 즐거움을 오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악마는 즐거움에 악을 섞음으로써 그것을 죄 된 즐거움으로 만들었다. 인간이  즐거움을 오용한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즐거움을 포기해야 할-즐거움은  본래 악마의 특권이라는 인상을 남기면서-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즐거움은 결코 정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욕은 즐거움 자체가 목적이 되거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질 때 생겨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진리를 균형 있게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안다. 아예 어떤 즐거움은 악이라고 딱지를 붙여 버리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예를 들면, 출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성 관계는 악이라고 하거나 영화, 소설, , , 담배, 세속 음악은 금기시하고, 찬송가조의 오케스트라 편곡을 연주하는 것은 고매하며 신령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이러한 접근법은 건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어 영화나 텔레비전에 담긴 매우 많은 것들은 단순히 쓰레기일 뿐만 아니라 악한 쓰레기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이 문제를  단순화시켜 생각함으로써 손해를 본다.  하나님이 주신 즐거움들을 향유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희생한 전부라면, 그 대가는 작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신앙을 부정적인 견지에서 보는 정도만큼, 우리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신앙을 부정적으로 나타내게 될 것이다. 더욱 나쁜  것은, 우리가 아무리 반대로 설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속으로는  복음주의 교회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기본 사항들을 준수하면 그리스도의 충성된 추종자가 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실상 우리의 삶에는 즐거움도, 경건함도 없는지 모른다. 그러면 사단은 우리에게서 크나큰 승리를 쟁취하게 될 것이다.

  전시에 군인들은 즐거움 없이 지내지 않으면 안 된다. 즐거움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물론 어떤 즐거움은 악하지만) 더 긴급한 일들로 인해 다른데 신경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군인들은 굶주리고, 목마르며, 잠을 자지 못해 눈이 아프고, 불쾌한 냄새가 나는 옷을 입고, 물집이 생긴 발과 지친 몸으로 몇 개월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상관은 음식과 휴식의 가치는 물론 기분 전환의 가치에 대해서도 잘 안다.

그래서 그 동안 누리지 못했던 즐거움을 즐길 수 있도록 군인들에게 휴가를 준다.

  그리스도인들도 전쟁을 하도록 부름받았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리스도가 돌아오셔서 통치하실 때까지는 결코 정상적인 시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난을 감내하고 즐거움을 보류해야만 한다.

  하지만 때때로 하늘에 계신 지휘관은 우리에게 영적인 즐거움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즐거움도 베풀어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신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추종자들로서 우리는 즐거움을 추구하라는 부름이 아니라 지도자를 따르라는 부름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때때로-전신에까지도-우리가 놀랄 정도로 많은  즐거움을 베풀어주시는 것에 대해 당황할 필요가 없다.

  이제까지 나는 십자가의 길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앞에서  당신에게 십자가의 길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긍정적으로 보라고  부탁한 적이 있으므로 이제 직접  긍정적인 관점에서 십자가의 길이 무엇인지 설명할  차례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십자가는 (1)  인생의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비길 데 없는 보물을 찾는 것이고 (2) 자신을 노예로 파는 대가로 자유를 발견하는 것이다.

 

    비길 데 없는 보물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13: 44).

  이 이야기에는 그 사람이 기뻐했다는 사실 외에는 자세한 언급이 없다.  그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했다. 어떻게 보물을 발견했을까? 그는 밭에 고용된 일꾼이었는가? 우리는 이에 대해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음 세 가지가 고작이다.  첫째, 그 사람은 보물을 발견했다. 둘째, 그 사람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셋째, 그 사람은 매우 흥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샀다.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과감히 희생한 전형적인 예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포기를 묘사했다기보다는 가치의 재발견을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은 재산을 최고로 여겼음에  틀림없다.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은 재산에 집착했으며 특별한 경우에만 재산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주었을 것이다.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에게 돈을 좀 빌려주거나 친한  친구나 친척을 돕기 위하여 물건을 팔았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대체로 그의 삶은 자신이 소유한  풍요한 물질에 그 존재 가치가 있었다.

  그의 관점이 변화된 것은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하고서부터다. 갑자기  그에게는 재산이 하찮게 보였다. 기쁨이 솟구치고 흥분으로 땀이 나고 몸이 떨렸다. 소중히 여기던 가구나 가보에 대해서는 잠시나마 아쉬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무가치한 잡동사니와, 보물이 묻혀 있는 밭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따라서 그의 희생에 특별히 숭고한 것은 없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어처구니없이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었다.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그 사람처럼 재산을 다 팔아 보물이 묻힌 밭을 샀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행운을 잡은 그 사람을 부러워하고 그의 기본적 상식을-그 사람의 영성이 아니라-칭찬했을 것이다.

  내가 앞에서 '그 사람이 가진 하찮은 잡동사니'라고 부른 것은 우리가 자연히 집착하게 되는 이생의 것들 즉 돈, 재산, 자동차, 안락, 명성, 좋은 직장 등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보물을 물려받기 위해서 우리가 가진 모든 재산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다만 그분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영광을 이해한다면 그런 쓰레기 같은 것에 집착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자신에게 정직해야만 한다. 재산과 야망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는 정말로 하늘의 영광을 가치 있게 여기는가? 나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한 장면을 잊을 수 없다. 1장에서 주인공인 그리스도인은 설명자의 집을 찾아간다. 그가 그 집에서 본 그림 가운데 하나에는, 한 남자가 무언가 값나가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쇠스랑으로 오물을 뒤지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리스도가 그에게 왕관을 내밀고 계시지만, 그는 하고 있는 일에 정신이 팔려 머리 위에 있는  왕관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람과  같다. 지푸라기와 누더기에 몰두하는 바람에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왕관을 보지 못하고  만다.

  마태복음 13: 45의 비유에도 재물을 아끼지 않는 어리석은 짓이 나온다. 이 비유는 진주에 미친 사람-진주를 모으는 취미를 가진 상인-에 관한 것이다. 어느 날 그는  모든 진주를 능가하는 훌륭한 진주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숨을 급히 몰아쉬며,  빤히 들여다보고, 마른 입술을 핥으며, 조심스럽게 가격을 물어 보고, 값을 깎으려고 옥신각신하면서 그 진주의  엄청난 가격에 대해 심사숙고했을 것이다. 그는 집에 돌아가서 그 동안 모은 진주들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진주를 하나씩 꺼내 부드러운 가죽 주머니에 담았을  것이다. 그러고는 진주 하나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 동안 모은 모든 진주뿐만 아니라 집과 노예를 비롯한 다른 것들을 다 팔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커다란 진주 하나 외에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먹을 것이 없을 때 진주를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초라한 오두막집에 앉아서 진주를 쳐다보고 즐기면서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는 미친 상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미쳤다고? 실은 이 사람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제정신인 사람일 것이다.

  모든 것은 그 진주가 얼마나 가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하늘의 보물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세상의 보물을 구하는 데는 그렇게 빠르면서 하늘의 보물을 붙잡는 데는 그렇게 느리단 말인가?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천국의 실재를 믿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머릿속으로만 천국을 믿고 있지, 그 이상은 아님을 드러낸다.

  진실한 신앙만이 우리의 발걸음을 십자가의 길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 길을 따라가려면, 다음과 같은 신앙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곧 그 기쁨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다음에 오는 삶이야말로 중요하며, 예수님이 실제로 하늘에서 처소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확신에 찬 신앙이 있어야 한다.

  십자가의 길은 인생의 다른 모든 것이 가치가 없어서 하늘의 진주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기회만 있다면,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보물을 살수는 없다. 그것은 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비유의 요점은 하늘의 보물을 한 번 본 이상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그  보물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 거듭  직면했다. 한때는 영문학과 예수님 사이에서 고민한 적도 있었다. 의과 대학생이었지만 문학에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시대 소설가들의 소설 초판을 수집하려 하기도 했고, 너무  밤늦게까지 책을 읽는 바람에 다음날 아무 것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훌륭한 문학이 나에게는 도피처였다. 나는 바람직하게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구름을 잡는 듯한 감상적인 이야기에 마취되어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보물을 보여 주셨고, 나는 그 보물을 갈망하게 되었다. 어떤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는 소설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약점이 그리스도가 주시는 기쁨을 누리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18-19세기 소설가와 시인들의 작품을 모두 큰 상자에 담아 영어를 전공하는 친구에게 줘 버렸다. 그제서야 나는 안도하며 감사할 수 있었다. 그것이 제대로 된 결정이라는 점에 대해 지금까지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지금 내 서가에는 책들이 어수선하게  채워져 있으며 또 방마다 책들이 흐트러져 있다. 그러나 이 책들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나를 방해하지 못한다. 그 때 내가 내린 선택은 일종의 희생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 선택이 내가 더 갈망하던 것, 즉 나의 진주를 위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우리가 직면하는 선택은 중요한 것도 있고 또 상대적으로 사소한  것도 있을 수 있다. 어느 쪽이든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한번은 어느 겨울 휴가 중에, 해변에서 햇볕을 쬐고  있을 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옆에 펜과 종이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몸을 굴려 엎드린 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산들바람이 불어와 모래사장에 내려놓은 종이가 펄렁거리더니 낱장으로 흩어져 버렸다. 또 따뜻하게 나를 어루만지는 듯하던 햇볕도 골치 아픈 땡볕으로 바뀌어 버렸다. 자세도 편하지 않았다. 글을 쓰기 원한다면 호텔 방으로 가는 것이  훨씬 더 현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겨울의 휴가를 즐겼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해 일광욕을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두 가지 다 할  수는 없었다. 글을 쓸 것이냐, 햇볕에 몸을 태울 것이냐를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글을 쓰기로 결정했다. 내가 내린 결정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더 좋아한 것을 선택했을 뿐이다. 내가 내린  결정이 내가 갖고 있는 가치관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 주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것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노예가 됨으로써 얻는 자유

 

  앞서 언급한 선택이나 그와 유사한 선택을 하게 되면 늘  감사가 넘쳤다.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림으로써 자유로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한 번에 두 방향으로 찢어지는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오로지 한 가지 열정-값비싼 진주 하나-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멕시코 시에 사는  한 미국인 공산주의자가 자신의 약혼자에게 약혼을 파기하며 쓴 편지를 인용해보겠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여러 가지 재난으로 고난을 겪소. 총에 맞기도 하고, 교수형을  당하기도 하며, 린치에 처하기도 하고, 엄벌을 받기도  하며, 투옥당하고, 비방을 받으며, 일터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이오. 온갖 방법으로 수난을 당하는 그런 사람들이오. 우리 중에는  죽은 사람도 있고 감옥에 갇힌 사람도 있소. 우리는 궁핍하게 살고 있소. 우리는 번 것 중에서 사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을 뺀 나머지 돈은 모두 당에 바치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자주 영화관이나 연주회에 갈 시간도 없고  돈도 없소. 또 아름다운 집과 새 차를 살 돈도 없소. 사람들은 우리를 광신자라고 부르오. 그렇소. 우리는 정말 광신자들이오. 우리의 삶은 오직 한 가지 궁극적인 것의 지배를 받소. 그것은 바로 세계  공산화를 위한 투쟁이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인생 철학을 갖고 있소. 우리는 뭔가 목숨을 걸 만한 대의 명분을 가지고 있소.  인생의 특별한 목표를 가지고 있소. 우리는 인류라는 거대한 강물 속에 개인의 하찮은 정체성을 던져 버린다오. 그리고 개인 생활이 고되다 할지라도, 또 당에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아가 상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풍성한 보상을 받는다오. 비록 매우 작은 방식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인류를 위해 새롭고 좀더 나은 무언가에 기여한다는 생각을 하면 말이오. 내가 진심으로 헌신하고 있는 것은 바로 공산주의의 대의 명분이오. 공산주의의 대의 명분은 나의 생명, 사업, 종교, 취미, 애인, 아내, 여왕, 낙과 즐거움이오. 낮에는 공산주의의 대의 명분을 위해 일하고 밤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꿈을 꾼다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더욱더 공산주의의 대의 명분에 사로잡히게 되오. 그러므로 내 삶에 생명을 불어넣고 내 삶을 지배하는 이 힘과 관련되지 않는다면, 나는 그런 친구나 연인과는  사귈 수 없으며 대화조차 나눌 수 없소. 나는 사람과 책과 사상과 행위를 그것들이  공산주의의 대의 명분에 끼치는 영향과 또 공산주의의 대의 명분에 대해 취하는 태도에 따라 평가하고 있소. 나는 이미 내 사상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도 갔다 온 적이 있소.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죽을 각오가 되어 있소. 이 편지를 읽고도 감동을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미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여행자가 눈 더미 위에서 몸이 얼어 가고 있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당신도 부지중에 잠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심장이 더욱 빨리 뛴다면 기뻐하라. 당신에게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욱 박진감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당신을 대저택이나 호화 별장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형장과 영광의 왕관으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멕시코 시의 무명 공산주의자는 우리가 얼마나 하찮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크게  반성하게 한다. 우리는 그의 사상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또 그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정치적 기계의 압착기에 내던지는 것에  섬뜩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리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며 또 죽음까지도 무릅쓰려는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당신은 그 편지를 읽으며, 그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우리의 삶을  어수선하게 하는 재물을 박찬 그는, 타산과 즐거움을 경멸하는 열정에 불타오른다. 우리를  괴롭히는 탐욕이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그에게 전혀 매력을 발하지  못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그런 철저한 포기보다는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자유함을 느끼는  그의 모습이 더 인상에 남는다. 그가 누리게 된 자유는 그의 정치 이념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그가 누리게 된 자유는 더 큰 것을 추구함으로써 좀더 작은 열망들을 포기하기에 이른 사람-비록 타락한 사람이기는 하지만-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의 편지를 읽을 때 당신의 마음에도 그 자유가 메아리 쳤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당신은 에서처럼 죽 한 그릇을 위해 장자권을 팔도록 창조된 사람도 아니요, 또 그것을 위해 구속받은 사람은 더구나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 사람보다 훨씬 더 심도 깊은 헌신을 하며 좀더 큰 모험에 당신의 생명을 걸도록 부름받았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9: 23).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놀라운 영광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죽으려는 마음가짐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를 들어서, 예수님이 그분의 십자가를 지셨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옷깃에 달거나 목에  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어깨 위에-등에 질 것을 요구하신다. 땅에서 그것을  바라보면 괴롭고 무거워 보일지 모르지만, 당신이 그것을 지면 마귀들과 사람들과 천사들이 수치를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세상이 얼굴을 돌린 자, 바로 예수님의 친구가 되기로  의도적으로 결정한 사람이라고 당신을 주목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중이 좋아하는 그리스도와 참된  그리스도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첫 번째 그리스도는 물을 탄 것처럼 희석된 그리스도, 대중을 즐겁게 하기 위해 개조된 그리스도다. 당신은 그런 그리스도를 주장하면서 그가 그러는 것처럼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예수님의 진리는 사람들의 양심을  찔렀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하고 또 불화케 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냉혹할 정도로 추구함으로써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제도를 위협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존재를 묵과할 수 없어서 그분을 죽여 버렸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12: 26).

  예수님이 서신 곳에 서는 것, 예수님의 발걸음을 좇는다는  것은 당신의 사람의 마음속에 여전히 잠자고 있는 태도-당신은  예수님을 좇는 그 순간에 사람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이 태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로부터 반드시 공격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당신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하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정한다는 것은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0: 24)고 말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직업,  , 애정, 야망, 계획, 취미 그리고 삶 자체를 탁자  위에 놓고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이것들을 내놓는 것이 저로서는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원하신다면 예수님이 이것들을 100배로라도 되돌려주실 수 있음을 압니다. 이것들을 당신 뜻대로 처분하소서. 제게 되돌려주시든지 아니면 영원히 사라져 버리게 하옵소서.  이것들을 어떻게 되든 저는 분명히  결정했습니다. 전심을 다해 주님을 따르기 원합니다." 이것이 도처에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또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무거운 짐을  가벼운 짐으로 바꿔 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내가 열여섯 살이던 어느 밤, 나는 너무나 흥분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 때 처음으로 나는 나의 삶을 하나의 전체로 놓고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목적 없이 이것저것 관심을 끄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면서, 겨우 몇 주 앞을 내다보며 삶을 헛되이 보내고 있었지만,  나는 나의 삶 전체를 어떤 큰 일을 이루는 데 사용하기를  원했다. 여러 가지 흥미진진한 공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경이와 감사하는 마음이 일더니 문득 내 모든 삶을 그리스도께 바치고, 그분이 결정하시는 대로 내맡겨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그런 기도를 했다. 내가 내린 결정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적어도 부분적으로 그것은 나 자신의 이득 때문에 내린 것이었다. 하지만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내 말을 그대로  믿어 주셨으며 또 나로 하여금 거듭 그 결정을 상기하도록 해주셨다. 그 당시에는 우리 사이의 계약이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삶을 예수님께 내맡긴 이상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관여할 것이 없으며, 자동적으로 하나님이 나의 삶을 주관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삶이 하나님의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나의 삶은 정말로 하나님께 속했다.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내 삶을 관리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나의 삶이 하나씩  하나씩-실로 한 번에 하루씩-내게 다가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진 빚을 아주  조금씩 나누어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이 점을 유념하셨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내가 뜨거운 8월의 어느  날 밤에 충동에 이끌려 순간적으로 내린 결정이, 이후 순간마다 내리는 결정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선택들 중에서 두 가지는 이미 앞에서 서술한 바 있다. 다행히도 그리스도는, 내가 스스로 자유롭게 되기를 원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나를 자유롭게 하셨다. 그리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처럼 나는 그분에게 빚진 것을 갚지 못한 적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그분은 내가 내린  수많은 작은 결정 가운데서 어떻게  자유를 발견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시면서 나를 언제나 따라다니셨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8: 36). 예수님이 주신 자유와 젊은 공산주의자가 멕시코 시에서 경험한 자유에는 차이가 있는가? 이 두 자유에는 본질적으로 같은 특성이 있는가? 요컨대 이 두 자유는 다 작은 것에 얽매여 있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한가지 위대한 것에 예속-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하는 예속이라고 할 수 있는-되게 하는 그런 자유다. 이 자유에 대해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을 말하고자 한다. 즉 자유는 하기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내가 하기 원하는 것을 한다면 결국에 가서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될 것이다.  처음에 자유를 약속하던 것이 나중에는 더 무거운 부담이 되는 예속 상태가 되고 만다. 당신은 이데올로기를 섬기기 위하여 자신을 내던진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것이 당신이 지금까지 알았던 것 가운데 가장  자극적인 자유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기분 좋은 상태가 진정되면 자유 의식은 사라진다. 결국 냉혹하고 황량한 예속 상태는 당신이 이전에 이기적인 생각의 노예 상태로 있던 것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는 듯한 생각이 든다. 그 이데올로기가 공산주의냐 기독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많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도, 교리와 진부한 영적인 표현과 심리적인 기술이 섬뜩할 정도로 교묘하게 혼합된 것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도 인격이신 그리스도보다 반기독교적 이데올로기에 예속되어 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말라. 나는 결코 진리의 중요성을 과소 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은, 아무리 참된 이론이라 할지라도 이론을 섬기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론은 사람을 예속한다. 참 진리는 인격이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신다. 예수님은 그분이 우리  인간들을 위해 계획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참된 자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신다. 그리고 무한히 인내하시면서 우리에게 하나씩 하나씩 자유롭게 되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11: 28-30).

 

    토론 문제

 

  1. 헌신이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의 모본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 것은 언제였는가?

  2. 저자는 그리스도의 눈을 바라본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능력에 감동받은 적이 있다면 언제였는가?

  3. "고난을 받을수록 더욱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  믿는 사람을 알고 있는가?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해 보라. 이런 태도는 어떤 면에서 진리를 왜곡할 수 있는가?

  4. 하나님의 은혜 대신 자신의 공로에 의존했기 때문에 넘어진 적이 있는가?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는가?

  5. "헌신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기독교' 음악,  찬송가, 기독교 소설 등을 제외한 모든 예술 표현을 수상하게 본다"는 저자의 말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어떤가? 당신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자신의 창조적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6. 정욕과 즐거움의 차이를 이야기해 보라.

  7. (비교적) 사소한 삶의 문제에 정신이 팔려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로부터 마음을 빼앗긴 적이 있다면 언제였는가?

  8. 마태복음 13: 45에 나오는 커다란 진주를 손에 넣은 사람처럼 미친 듯한 그리스도인을 본 적이 있는가? 이 이야기를 보고 그런 사람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바뀌었는가?

  9. 저자가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을 버린 것처럼 당신도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결정을 내려야 했던 적이 있는가? 어떤 일이었는지 말해 보라.

  10. 젊은 공산주의자의 편지에서 높이 사고 본받아야 할 태도는 어떤 것인가?

  11.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당신의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12.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사람을 예속시킨다고 보는가, 자유하게 한다고 보는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리스도인을 예속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나님께 예속되는 것이 자유를 얻는 길이 될 수 있는가?

 

    3. 순례자, 이방인, 난민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에는 언제나 시민권의 근본적인 변화가 따른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시민권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충성심이 향하는 방향이 달라져, 이 땅보다 하늘에  우선적인 소속감을 느낀다.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하늘을 본향으로 여길 줄 알게 되며, 태어난 나라는 우리가  이방인으로서 사는 나라가 된다. 그 나라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힘을 합쳐 그분의 뜻을 더 널리 펴는 것이다.

  이것은 태어난 나라에 대한 반역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나라의 합당한 통치자이시며, 실상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하는 것보다 그분께  복종하는 것이 우리가 더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는 길이다. 우리는 국가의 법을  존중할 것이다. 우리는 많은 나라의 기본적인  법률이 상당 부분 유대교와 기독교의 사상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국가 역사의 특정 시기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국가에 대한 복종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때가 있었다.

  나는 편안함이라는 말을 신중하게 골랐다. 잠깐 하늘 나라의 시민권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지상에서 우리가 태어난 나라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한다.  나는 영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의 상당 기간을 그 곳에서  살았다. 프랑스, 스위스, 미국, 카리브 해,  이집트,  인도, 실론(스리랑카의 옛 이름-역주)에 가 본 적이  있지만 그런 곳에서 오래 살지는 않았으며 언제나 영국을 '고향'으로 생각했다.

  나는 내가 방문한 많은 나라에 반한 나머지, 고국으로 그에 대해 긴 편지를 쓰기도  했다. 또한 경치, 생활 방식, 기후(영국의 기후는 한심하다) 등 그런 나라의 많은 장점을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 살려 하지는 않았다. 영국이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나는 미국에서 오래 지내며 그 곳에서 캐나다  여성과 결혼했고, 남미의 여러 나라에서 10년을 지냈다. 그 후 우리는 캐나다에 자리잡았다. 나는 계속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캐나다는 고국같이 되었고, 우리 아이들은 그 곳에서 성장기의 대부분을 보냈다.

  영국을 떠난 지 이제 서른다섯 해가 된다.  그 동안 가끔 영국에 가 볼 기회가  있었지만, 갈 때마다 나는 영국이 나의 영국이 아니라는 것을, 곧 내가 청소년기에 알던 그 영국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깨달음은 고통스럽기도 했다. 도시와 거리가 완전히  변해 있기도 했다. 지리를 알려주던 특징적인 표시도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알던 사람들도  죽거나 많이 늙어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를테면 립 반 윙클[미국 소설가 워싱턴 어빙의 단편 소설의 주인공. 산 속에서 잠을 자고 내려와 보니 20년이 지나 있었다-역주] 효과랄까, 어리둥절함과 커다란 상실감이 들었다. 그리고 물론 나 역시 변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어느 곳에서고 완전히 고향같이 느끼지 못한다. 어떤 곳을 완전히 고향같이 느끼려면 그 곳에서 태어나야 할 뿐 아니라, 생애의  대부분을 그 곳에서 보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 법칙을 어겼다. 그래서 지금 나는 다른 곳보다는 캐나다가 그래도  고향같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 곳에서도 완전히 고향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내 말투가 다르다. 내게는 어딘가 영국식 기질이 남아 있다. 나는 이것을 결코 떨쳐 버리지 못할 것이며, 이 때문에 캐나다에 있다 하더라도 이 곳에 완전히 동화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법칙을 주목해 보라. 완전히 고향같이 느끼기 위해서는 당신은 그 나라에서 태어나야 하고 또 생애의 대부분을 그 곳에서 보내야 한다.  이민자들은 이민 간 나라가 완전히 고향에 온 것같이 편하게 느껴진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많은 경우 이들은 자신을 조금은 속이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가 태어난 나라 안에서 낯선 곳으로 이사 가는 것과, 이민 간 나라에서 본토박이 사람들만큼 고향같이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그리스도인은 '위로부터 태어난', 즉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을 때 천국의 분위기와 그 천상 도시의  문화는 그들의 존재를 파고든다. 그들이 묵상하고, 기도하고,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때에도 이와 같은 일이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일어난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와 같은 천국의 시민들과 함께 경배를 드릴 때, 이들은 진정 자기가 새로이 태어난 나라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 천상 도시에서 고향같이 편안함을 느끼는 정도는 그들이 에녹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곳의 공기를 호흡한 시간의 양에 달려 있다.

 

    아브라함-유랑자인가, 난민인가?

 

  아브라함을 유랑자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실상 그는 유랑 생활을 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웃의 종족민들과는 차이가 있다.  비록 아브라함은 안정된 생활  기반을 뒤에 남겨 두고 떠났지만,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그러하듯이 더 영구한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이 그렇다. 그는 자신과 그 후손들이 평화롭게 살 나라를 추구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소망이 실현되는 것은 결코 보지 못했다.  자신이 찾던 나라를 발견했지만, 그것을 소유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지금 천국을 소유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더 깊은 의미에서 우리는 아직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그 나라를 찾고 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정착하고자 했던  그 나라 안에서 방랑하는 이방인인 채로 있었다. 그는 '순례자', '나그네',  '이방인' 등 여러 가지로 묘사된다.  그가 요즘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그를 난민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원형이다.  우리는 나그네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천막에서 살지는 않는다. 심지어 우리는 현대의 몇몇  형제 자매들처럼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살도록 부름받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관점을 공유하게 된다.

  우리는 어디에 '속하지' 않는다. 단지 일시적으로 거주하는 자일뿐이다. 우리의 진짜 집을 즉시 손에 넣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 외 어느 곳에서도 영구히 거주하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순례자이며 이방인이다.

  이런 일시적인 생활 양식이 좋아서 그것을 택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유목민이 아니다. 유목민들은 단지 다음에 일시적으로 머물 목초지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속 깊은 곳에는 우리의 진정한 집에 대한 열망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특징짓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열망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어딘가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본향을 고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열망은 병적이고 도피주의적인 것이 될 것이다. 도피주의자는 어디에서도 안주하지 못한다.  유목민들이 다음에 머물 목초지를 생각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도피주의자들은 항상 이전의 초장에서 달아날 생각만 한다.

  고향을 찾으려는 충동은 인간의 깊은 본능이다. 20세기에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조상의 지상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에서 그 본능의 비애와 아름다움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다. 격정, 고통, 고난, 투쟁, 이 모든 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리 추하다 해도 귀소 본능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증명한다.

  현대 이스라엘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판단해 본다면 한 가지 일반론을  끌어낼 수 있다. 박해를 받는 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부유하고 안정되며 안락한 사람들보다 귀소 본능 충동을 더 예민하게 느낀다. 따라서 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일으키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기부할지는 모르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핍박당한  유대인들보다는 자기들이 뿌리내린 곳을 떠나 그 곳으로 이주해 가서 살 가능성은 훨씬 더 적을 듯하다. 뉴욕의 유대인과 텔아비브의 유대인은 매우 다른 사람들이다.

  교회에도 이와 유사한 면이 있다. 이 땅에서 번영하며  안락함을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사역에 후하게 헌금을 할지는  모르지만 보통 하늘을 본향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렵다고 느낀다. 죽는 것에 대해 "고향으로 간다"  경건하게 말하는 것과 의도적으로 목숨이 위험한 곳에 자신을 던지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비극적이게도 '본향'에 대해 경건하게 이야기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 가고자 하는 열망을 보여 주는 증거는 거의 나타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플로리다에 있는 집이 더 매력적이다. 지상의 고향과 하늘의 본향 간에는 긴장이 존재하며, 우리의 진정한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들이 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

 

  정신 분석학자들은 정신의 집중이라는 것에 대해 말한다. 정신의 집중이란 (대략) 정서적 투자를 뜻한다. 어떤 것에 심하게 정신을 집중한다는 것은 정서적 생활이 그 정신을 집중하는 것에 상당히 얽혀 있다는 뜻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직면하는 문제는 이것이다. 즉 우리가 하늘 나라에 대해 덜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이 땅에  더 열중하며, 하늘 나라에 더 열중하면 할수록 이 땅의 고향에 대해서는 덜 염려하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맨션에 얼마나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가?  나는 '너무나 천상 지향적이기  때문에 지상에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묘사하는 진부한 어투에는 싫증이 난다. 오랜 세월 동안 그런 묘사에 딱 들어맞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대개 내가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지상 지향적이어서 하늘에 유익을 끼치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더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이다.

  몇 년 전에 우리는 다른 나라로 이사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우리의 계획은 우리의 사고 방식과 행동에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생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장차 지금 우리 집을 살 사람의 눈으로  그 집을 바라보았으며 더 이상 그 집을  살기 좋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사 계획은 물건을 사는 습관에도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좋은 겨울 옷을 사려고 애쓰지 않았다. 이사 가려고 하는 나라에는 겨울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혹한의 겨울을 얇고 값싼 겨울 코트 하나로 났다.  쓰다가 낡은 물건도 새로 사기보다 그대로 손보아서 썼다. 조그마한 불편은 대부분 참고 지냈다.

  우리가 남달리 덕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가려고 하는 나라에서 멋진 출발을 하기에 충분한 돈을 확보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우리는 캐나다에 대한 정신적 집중은 줄이고 카리브 해에 대한 정신적 집중은 증가시키고 있었다. 캐나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축소되고 있었던 반면에 카리브 해에 대한 관심은 자라나고 있었다.

  예수님이 하늘에 우리의 보화를 쌓아 놓으라고  촉구하셨을 때 그분은 바로 이와  똑같은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분의 말씀은  우리의 자기기만을 단번에 분쇄해 버린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6: 21). 이것은 그를 따르는 자들은 이 땅보다는 하늘에 더 정신을 집중하라는 단순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서 하늘의 고향과 지상의 고향이 서로 줄다리기하고 있음을  아셨다. 그분은 돈에 대한 사랑과 하늘의 보물간에 일어나는 우리의 투쟁을 아셨다. 그분은 우리에게는 '바른 눈'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바른(또는 '성한') 눈을 갖지 못하면 우리는 내적 어둠 속에서 더듬거릴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6: 22-23). 끊임없이 두 방향으로 분열된다면 우리는 당면한 문제를 결코 분명하게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죄의식과 소외감으로 괴로워하며,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 혼란스럽고 당황한 채 인생을 통과할 것이다.

  돈만 추구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일이 훨씬 더 쉽다. 적어도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고 있다.  그가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다른  목표와 이상들에 이끌려 방해를 받지만 않는다면, 그 역시 바른 눈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그리스도인보다는 덜 애처로워 보인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빈곤하게 살기로 서원하도록  부름받는다면 문제는 더 간단할  것이다. 우리 중 누구든지 차를 소유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 모두에게  정확히 속옷 두 벌과 겉옷 한 벌, 월세 20만원, 슬리퍼 한 켤레, 구두 한 켤레만 허용된다면, 우리는 모두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그렇게 쉽게 하시지는 않는다. 옷을 두 별 가진 자는 한 벌도 없는 자에게 한 벌을 주라는 그분의 가르침은 생활 수준의 최고 한계치를 설정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사실상, 복지 담당 공무원이라면 누구나 알 듯이 일단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소유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에 들어가면, 여기에 넓은 회색 지대가 있음을 알게 된다.  게다가 하늘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사실상 이전 어느 때보다 '사물 중심적'이 된다. 예를 들어 20만원의 월세만이 허용치일 때,  직장에서 1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불편하고 허름한 방을 한 달에 10만원씩 내고 빌리는 것과 직장 근처에 있는 방을 한 달에 22만원씩 내고  빌리는 것 중 어떤 것을 택해야 하는가? 자원하여 가난한 생활을 하는 것은 미묘한 문제들을 많이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여전히 은밀하게 재물을 섬기는 자로 남아 있게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이 재물에 대해 자유롭게 되기를 원하셨다.  다음의 설명은 이것을 매우 분명히 보여 준다. 그분은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6: 24). 이 문맥에서 재물은  물질적 필요에 마음을 쏟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분은 항상 그렇듯이 물질과 하나님 사이에서 우리 모두가 겪는 내적 투쟁에 관심을 가지신다.

  우리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다람쥐들은 우리를 장식하고 있는 바퀴 굴리기를 즐길 수도 있다(정말 즐기는지 확실히 알 도리는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인간들에게 그 바퀴는, 결코 앞으로 전진하지 않는다는 맥풀리는 느낌을 갖고 일상 생활 속에서 끝없이 투쟁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우리는 좀더 많은  돈을 벌면 자유로워지리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좀더  낫고 멋진 상품들이 항상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에 우리는 버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쓰게 된다. 놀랍게도, 인간은 자신이 받고 있는 연봉이 1  원인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목표는 3천만 원이나 4천만 원을 더 벌어야 도달할 수 있는 지점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 목표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그가 전진할 때마다 점점 뒤로 물러선다.

  사람은 2억 원을 벌면서도 자신의 영혼이 예속되어 있다는  쓰라림을 맛볼 수 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많이 번다면 예속된  것 같은 느낌은  받지 않을텐데...." 그러고는 계속해서 어떻게 시간을 자유롭게  쓰면서 돌아다닐 것인지를 말할 것이다. 자유란 당신이 가진 것에 대해 내적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하늘의 보물만을 갈망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 태도는 당신이 심리적으로 자유롭게 느끼기 때문만이 아니라 당신의 시야를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에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 그것은 당신이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도록, 그래서 당신이-이를테면- 지금과 같이 긴 시간 동안 일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 나라에 직접 관여하는데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이제 당신은 왜 예수님이 인간이 정확하게 어떤 소유물을 가져야 하는지가 아니라 하나님과 재물간에 결정해야 할 필요성에  더 집중하셨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재물의 반대편에 서는 결정은 이렇게 말하는 결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세상에 잠시 있을 뿐이야. 내게 필요한 것은 그저 나 자신과 부양 가족들이 생존하기 위한 것뿐이야. 만일  하나님이 그 이상을 주신다면(그리고 그분은 매우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이시지) 나는 그분이 공급하시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겠어. 하지만 그것을 추구하거나 내가  실제로 필요한 것 이상을 얻으려고 자신을 종으로 만들지는 않겠어. 나의 진짜 보물은 하늘에 있거든."

  나는 내 마음속에서 '실제적인', '현실적인', '균형 감각', '책임감' 등에 대해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 끝없는 합창은 이 땅에서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리라고 확신한다.  심지어 정의를 내려 보라는 말을 들을 때마저도("당신은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분량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단지 육신과 영혼을 함께  유지할 수 있는 정도면  된다고 보는가? 아니면 건강과 교육 등도 필요하다고 보는가?" ) 나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일단 그런 유의 정의에 지배되면 우리는 서서히 '지금 여기에' 매혹될 것이다.  일단 우리의 우선 순위가 명료하게 되면 필요와 같은 것들은 저절로 규정된다.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 필요한 것이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도 똑같이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상반되는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질까 하는 것이지 털이 얼만큼 많이 모여야 턱수염이 되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늘에 쌓아 두는 보물

 

  하지만 하늘에 있는 보물을 논하지 않고 이 문제 전체를 넘어갈 수는 없다. 나는 그 보물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이미 고백한 바 있다. 분명 그것은 내세에 우리에게 귀중하다. 똑같이 분명한 것은 그것이 지상의 투자와  달리 우리에게 불안을 야기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6: 19-20). 유가 증권(유가 증권을 뜻하는 영어 단어는 '안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편집자 주)은 그 이름과는 달리  안전하지 못하다. 은행과 보험회사들은 사라질  것이다. 역사를 통해 볼 때 귀금속들은 모두 도난 당해 왔다. 이 지상에는 안전한 투자란 없다. 심지어 어느 정도 안전한 투자도 없다. 하지만 하늘의 보물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보증받는다. 그것은  귀중하다. 그것은 안전하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얼마나 하찮게 생각하는가!

  하늘에 보물을 쌓아 놓기 위해서는 지상의 시간-자동차와 양탄자를 사기 위해 바쳤을 수도 있었던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계신 전체 요점이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에너지를 분배하는 방식은 바로 우리의  관심이 어디 있는지를 나타낸다. 과거에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이 세상 돈으로 하늘의 은혜를 사려고 했던 것처럼, 복음주의자들은 선교회에 헌금하는 것으로 하늘의 보물을 사려 한다. 돈으로 하늘의 보물을 살 수는 없다. 그 환율은 0이다. 이 세상의 보상을  얻기 위해서 노동을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보물을 얻기 위해서도 노동을 해야 한다. 유일한 차이점은 후자의 노동은 기쁨과 즐거움인 반면 전자의 노동은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그 보물은 무엇인가? 성경은 전혀 말해 주지 않는다. 비유에서 신실한 청지기는 나중에 다스리게 된다. 바울의 명백한 가르침은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딤후 2: 12)라는 것이다. 다스리는 보상은 '보물'과 동일한 것인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고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갖가지 보물이 저마다 사람들에게 달리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살펴보면 재미있다.  진주, 다이아몬드, 황금 등은 해적 행위, 도둑질, 살인, 강도, 근심, 탐욕, 잔인함, 고문 등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은 인간 속에 있는 불건전한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많은 주석가들이 제안하듯이 '보물'  그리스도를 더 잘 이해하는 능력이라면  어떠할 것인가? 분명 그리스도의 모든 아름다움을 알려는 열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수천만원을  버는 행운과는 매우 다른 영향을 끼칠 것이다.

 

    검토하며 사는 삶

 

  당신 자신을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라. 거울  속에 나타난 인물에게 이렇게 물어 보라. "나의 보물은 어디 있는가? 나의 마음은 어디 있는가? 나의 진정한 야망은 어디 있는가? 나는 내 육신이 태어난 나라의 자녀일  뿐인가, 아니면 동시에 영원한 나라의 시민이기도 한 '순종 잡종'인가?"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을 뚫어지게  보라. 당신이 보게 될 눈을 피하지 말라. 그 눈은 당신에게 진리를 말해 줄 것이다. 그리고 자유로워지려면  당신은 진리에 직면해야 한다. 당신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먼저 당신은 자신에게 채워져 있는 사슬을 보아야만 한다.

 

  우리 영혼은 우리 영혼이 붙잡고 있는 것에 붙잡혀 있다.

  금사슬에 매여도 노예는 노예.

  우리가 집착하는 모든 것은

  생명이건 토지건

  우리의 오른쪽 눈이나 오른손처럼 귀중히 여기는 모든 것은

  우리를 얽어매는 사슬.

 

  그렇다면 그 매인 사슬을 끊고 예수님께 나가도록 애쓰라.  그분께 당신을 위해 그것들을 깨뜨려 달라고 청하라. 그 다음에는 그것들을 집어들어서 영원한 불 속에 던져 버리라. 보이지 않는 수많은 방관자들 앞에서 이렇게 선포하라. "나는 하늘의 시민이다. 나는 한 분 주님을 모시고 있으며, 오직 그분만을 섬길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찰스 웨슬리가 다음과 같이 표현한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사슬은 벗어지고

  내 마음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나는 일어나 나아가

  당신을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늘의 보물을 위해  어떻게 수고하는가? 그 주제는 복음서에서  비유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되풀이되어 나타난다.

  두 가지 개념이 가장 중요한  듯하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특정한 잠재력(시간, 기회, 능력 등)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이 주신 잠재력으로 무엇인가를 그분께 돌려드려야 할 책임을 갖고 있다. 두 번째로 이와 관련된 개념은 우리가 잠재력을 얼마나 잘 사용하는지에 따라 보상 또는 보물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일단 우선 순위를 선별하게 되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시간을 자유롭게 내는 일이 가능함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여름에는 몇  달 동안 기독교 캠프를 돕고 겨울에 벌어들인 수입으로 살아가는  어떤 보험 사원을 나는 알고  있다. 자영업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와 비슷한 계획을 생각해 낼 수 있다.

  돈을 버는 것은 세속적이고, 기독교 캠프만이 '참된 기독교적 봉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돈에 우선권을 덜 둔다면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발견하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갖고 있는 잠재력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당신에게 시간, , 신체, 타고난 은사, 영적 능력 면에서 무엇을 주셨는가? 그것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떤 식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당신은 어느 정도까지 그 잠재력들을 사용해 왔는가?

  당신은 오늘 그것을 조금이라도 사용했는가? 이번  주에는? 지난달에는? 한 해를 되돌아 볼 때 당신은 어느 정도나 하나님을 위해 살아 왔는가?

  만일 양심이 당신을 괴롭힌다면 당신은 얼마나 빨리 행동을 취할 수 있는가? 공부를 마친 후에? 다른 직업을 갖게 될 때? 결혼하고 나서?

  바로 지금 시작하지 않겠는가?

 

    토론 문제

 

  1. 저자는 자신이 살았던 여러 곳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당신은 어느 정도까지 외국인으로서 겪은 저자의 경험에 공감할 수 있는가? 아브라함이 유랑자인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며 지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2. 당신이 별로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던 경우를 이야기해 보라. 이 세상과 건전한 긴장 관계에 놓이는 것과 도피주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3. "너무나 지상 지향적이어서 하늘에 유익을 끼치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당신을 지상 지향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4. 우리는 어떻게 돈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겠는가? 당신에게는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 목표가 어떻게 변했는가?

  5. 당신은 하늘의 보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6. 이 하늘의 보물을 추구하고 지상의 보물을 거부하는 데 열쇠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어떤 선택을 의미하는가?

  7.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당신의 은사를 지금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4. 미움을 불러일으키는 충성

 

  지금까지 우리는 헌신된 삶이란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는 삶임을 보았다. 또한 거기에 고난과 고통이 따를 수도 있지만, 이 삶이 충만하고 기쁨에 넘친 삶이라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당신이 이렇게 그리스도께 삶을 헌신하고 나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어린 시절에는 어떤 아이들과 친구가 되면 다른 아이들과는  적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에게 더 중요한 사람을 택해 친구를 결정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분을 선택하면, 우리에게는 강력한 친구와 함께 실질적인 적이 생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더구나 자신의 가족이 관련될 때는 더욱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헌신한 사람은 다른 모든 삶의 관계가 자동적으로 변한다. 그분이 당신에게 최상의 존재가 될 때 다른 사람들은 원래와는 다른 위치를 갖게 된다. 당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원래와는 다른 위치를 갖게 된다. 당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멀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한 때는  당신이 혐오하던 사람들이 소중하고 친밀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미래의 결혼이라는 문제는 새로이 진지함을 지니게 된다. 헌신에 따르는 재평가와  새로운 방향 설정은 우리의 가치관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또한 적용된다.

 

    사랑과 미움의 역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10: 32-39).

  그러나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예를 들면 이렇게 말한다는 뜻이다- "제가 지금까지 부모님께 드렸던 부양비를 이번에는 기독교 사업에 바쳤어요")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15: 3-6).

  예수님의 말씀을 검토해 볼 때 처음에는 혼란스럽고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역설을 발견한다.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고 존중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핑계로  부모의 물질적인 필요를 무시하는 것을 강력하게 비난하신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우리가 그분을 따르려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미워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신다( 14: 25-26). 그분의 가르침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 가르침은 과연 일관성이 있는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답하려 하기 전에 성경은 다른 관계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혼란스럽게 말하고 있음을 주목해 보자. 우정은 위험할  수 있다. 의인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으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 1:1). 반복해서 우리는 행악자들과 사귀지 말라는 경고를 받는다. 하지만 이상하게 대조적으로 예수님 자신은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다. 의사가 병든 자를 찾는 것같이 구세주는 죄인을 찾으셨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행하도록 촉구하신다.

  우리는 이 명백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혹시 그리스도인은 결코 비그리스도인과는 진정한 친구가 되어서는 안 되고, 어부가 고기에게  또는 세일즈맨이 고객이 될 만한 사람에게 미끼를 던지듯이 그렇게 접근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혐오감을 자아낸다. 사람을 낚는 위대한 어부이신 예수님은 죄인들을 그렇게 계산적인 눈으로 보실까? 그분은 오히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동정심을 느끼지 않으실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감정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난점은 해결되기 시작한다. 나는 그에게 친절을 베풀기를 원한다. 그가 나를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으며, 또한 그를 이해하려는 관심이 있다. 두 가지 요소-요구하는 요소와 주는 요소-는 모두 어떤 관계에서든 존재하지만,  그것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며  서로 다른 비율로 존재할 수도 있다.

  40세의 미성숙한 남편인 짐은 아내가 떠나 버리자 비통하게  운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형편없는 남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아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나는 아내 없이는 살 수 없어요."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여전히 자기 아내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의 입술에서는 독설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그녀는 인정이라곤 전혀 없어요. 나를 두고 떠나다니요! 어떻게 내게 이렇게 할 수가 있어요? 그녀는 비열해요. 정이라곤 없다구요."

  "나는 아내를 사랑해요." "그녀는 인정이라곤 전혀 없어요."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내게 이 여인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돌아와서 그의 손을 잡고, 양말을 꿰매주며, 식사를 차려주고,  그와 함께 잠자리에 들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는 아내에 대해  자기 엄마와 장난감 곰에게서 느꼈던  것과 똑같은 유의 감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아내에게 동정심을 갖지  않는다. 그는 아내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깊이 슬퍼하지 않는다. 그는 아내의 행복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행복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탕자의 아버지가 느낀 감정은 이와는 얼마나 달랐던가!( 15: 11-32) 그는 아들이 직면하게 될 어려움과 위험들을 충분히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픈 마음을 감추고는 유산의 일부를 주어 그를 떠나보냈다. 그 노인은 분명 날마다 지붕에 올라가서 희미한 눈을 부릅뜨고 자기 혈육을 그리워하며 바라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 아들을 보냈다. 그러므로 그는  분명 아들의 마음에 있는 요구와 열망을 인식하고 아들을 위해 자신의 개인적 열망을 억눌렀을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이제 앞에서 살펴본 구절에 나와있는 명백한 모순들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간 관계에는 여러 가지 다른 요소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여기, 근본주의적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라난 불안정한 사춘기 소년 죠가 있다. 그는  자기 또래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 받기를 갈망한다. 그들이 담배를 피우면  그는 더 많이 담배를 피워야 한다. 그들이 성 관계를 가지면(아니면 그들이 그렇게  한다고 말하면), 그가 여자를 정복한 이야기는 그들의 이야기를 훨씬 능가해야 한다.

  여자 친구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가 부모의 손에 들어갔을 때, 부모는 그 편지의 추잡함과 악함을 보고 부들부들 떨며 맥이 빠져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그들은 바로 자기 친구들이라고 항변했다. 그들은 그를 이해한다. 그들은 그의 단짝들이다. 물론, 그는 그런 것들을 편지에서 언급하지 않았어야 했다. 죠는 어쨌든 대개는 허풍을 떨고 있었던 것이니까.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 그는 친구들을 포기할 수는 없다.

  왜 그런가? 그는 자신을 원하고 인정해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마침내 그를 숭배하는 집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부모가 죠에게 물었다. "네 친구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말했니?"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들은 엄마 아빠가 종교적이라는 것을 알아요. 나는 그들에게 교회에 가야 한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그들은 상관하지 않아요. 그들은 상당히 관대하지요."

  이 경우에 세상과의 우정은 정말로 하나님께 대조적이다. 죠의 행동은 받아들여지고 칭찬 받으려는 측은한 욕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너무 비싼 대가를 치르려 하고 있다. 우리가 상당히 공감할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가 자신의 장자권을 너무 값싸게 팔고 있다는 것을 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에 있는 보화를 포기하고 이와 같은 하찮은 이유 때문에 무리들과 함께 내리막길로  달려간다. 이런 상황에서 행악자들과의 사귐은 잘못된 것이며 해롭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죠와 같은 문제를 갖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끼친다.

  이슬람교에서 개종한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것 때문에 집과 마을에서 괴롭힘을 당할 때 그는 무엇을 느끼겠는가? 그는 단지 자신의  고백을 철회하기만 하면 된다. 심지어 그것을 비밀에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가족들은  다시 그를 그들의 품에 맞아들일 것이다. 그렇다. 가족들이 그를  추방할 때도 그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이전에 경험했던 어떤 사랑보다도 큰  새로운 사랑이 그의 마음을 너무나  사로잡았기 때문에 심지어 가족에 대한 사랑마저도 그 사랑에 비하면 미운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러나 떠나가면서 그는 눈물을 흘리고 그의 마음은 무겁다.

  그러면 가족과 친구들이 당신을 조롱할 때 당신은 어떤가?

  다시 말하건대 예수님은 결코 우리가 의무를 소홀히 해도 좋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부모, 배우자, 자녀들 또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애정을 주라고 명령하신다. 심지어 하나님의 일에 드리는 돈이라 해도 그것이 궁핍한 친척들을 희생시켜 가며 드리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어기는 죄다( 15: 3-6). 사도 바울은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를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딤전 5: 8)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남겨 두고 떠나는 어머니가 잘 되도록 관심을 가지셨다.

  가족, 특별히 따스하고 행복한 가족은 그 가족 구성원을 위로하고 따뜻이 돌보아 준다. 가족을 미워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깊이 헌신되어 있어서 그것이 설혹 가족이라는 집단에서 멀어질 것을 요구한다 해도 그 안락함에서 냉혹하게 벗어나 맨발로 그분을 따라 험한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아내가 멀리 떨어지게 되었을 때 서로 안아 주면서 "여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요. 다 예수님을 위한 거라오."라고 말해야 한다는 뜻이다.

 

    역설과 예감

 

  미움이라고?

  언젠가 나는 아내와 어린 아들이 비행기 사고로 죽으리라는 예감이 든 적이 있다. 우리는 따로따로 미국에서 남아메리카에 있는 볼리비아로 가야 했다. 아내는 브라질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친 뒤 북으로 방향을 틀어 볼리비아로 비행기를 타고 갈 예정이었으며, 나는 멕시코와 중앙 아메리카의 몇 나라, 베네주엘라, 콜롬비아,   외 나라들에 들러 학생 사역을 격려하고 볼리비아에서 아내와 합류할 예정이었다.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밤에 우리가 헤어지기 직전에 그 예감은 고통스럽도록  분명하게 다가왔다. 차를 몰고 떠나면서 소용돌이치는 눈송이에 둘러싸인  현관의 노란 불빛 속에 비치는 아내의 그림자를 보았을 때 나는 겁쟁이 바보인 것처럼 느껴졌다. 왜 되돌아가서 아내에게 비행기표를 취소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왜 나는 이 예감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는가?

  나는 예감이란 것을 믿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지식의 말씀'이라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는 터였다. 아마도 아내는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게다가 나는 늦었고, 다음날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기 위해 밤을 보낼 장소에 도착해야 했다. 나를 호텔까지 태워다 주는 사람과 단 한 마디 대화도 나눌 수 없었다.  두려움, 수치, 죄의식, 구역질,   모든 것이 내가 호텔로 가는 비참한 여정 내내 내 안에서 끓어올랐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나는 비참한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물론 나는 기도했다. 믿음으로 그것을 물리치려 했다. 믿음으로? 그토록 강력한  예감이 있는데? 내 입은 바짝 말랐다.  사지가 떨렸다. 하나님은 까마득히 먼 곳에 계셨다. 시간은 느릿느릿  흘러갔으며, 한 시간 한 시간이 공포의 1년 같았다. 왜 나는 옷을 입고 차를 빌려서 그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는가?

  "무슨 일이냐? 너는 나를 신뢰할 수가 없느냐?"

  나는 깜짝 놀랐다.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시는가?

  ", 주님을 믿습니다-그들을 내게로 되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만 하신다면."

  침묵.

  그러고는 "내가 그렇게 약속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네게 되돌려보내주지 않는다면, 이제 나를 신뢰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 하나님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너는 그들을 삶에서뿐 아니라 죽음에서도 내게 맡길 수 없단 말이냐?"

  갑자기 따뜻한 기운이 몸 전체에 흘렀다. 나는 조금 울었던 것 같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 그들을 주님 손에  맡깁니다. 주님께서 사망에서나 생명에서나 그들을 돌보아 주실 것을 압니다."

  그러자 떨림이 가라앉았다. 빈속에 마신 마티니보다 훨씬 더 나은 평화가 내 몸 가득 넘쳐흘렀다. 그러고 나서는 나른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그들을 미워하라고? 도대체 내가 어떻게 그들을 미워할 수 있는가? 하지만 믿음으로 나는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나 그들에게 어떠한 대가를 요구할지라도 그것을 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겠습니다."

  그들이 탄 비행기는 추락했다. 그리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다. 하지만 아내 역시 어떤 예감을 느꼈고 여행을 갑자기 중단하여 그 참사가 일어나기 바로 전 기착지에서 비행기에서 내렸다.

  나는 그 일이 일어난 과정에 대해 감사드린다. 하지만 나는 사전에는 일이 그런 식으로 돌아갈지 몰랐었다. 일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비탄에 잠겼겠지만(내가 얼마나 비통해했으리라는 것을 하나님은 아신다), 그분을  신뢰하고 계속 나아가기로 한 결정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또한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최근 나는 기독교 부흥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부흥이 이루어졌던 것은 지상에 천국이 이루어졌던 시기가 아니라 어떤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던 시기였음을 알게 되었다. 첫째로, 하나님의 성령이 크게 임하시고, 죄인들이 회개하고 회심하며, 성도들이 새로이 소성하며, 교회가 전진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적대감과 치열한 싸움, 비난이 유례없이 최고조에 달하기도 한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일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위기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자기'일에 대한 위협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흔히 그 두 편에 모두 진정으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들어 있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존 웨슬리가 살던 당시에,  또한 무디가 살던 당시에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증오라는 예리한 바람이 자기들의 심장을 저미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척 당할 때 그 고통은 두 배가 되는데, 하나님이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하시는 사람들을 기독교 지도자들이 맨 먼저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도 그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러한 사실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우리는 과거 신앙 위인들의 죽음에 이를 데 없는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우리의 그리스도인 선조들은 바로 그 신앙 위인들의 목에 칼을 씌워 모욕거리로 만들거나 그들을  죽이기도 했다. 그보다 정도는 덜하더라도, 그리스도께 진정으로 헌신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와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이제 하나님의 가속이나 비그리스도인 또는  국가에서 비롯되는 박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나는 뒤에서 더 광범위한 박해의 문제, 특히 국가의  박해 문제를 다룰 것이다. 이 장에서는 대인 관계의 변화라는 당면 문제와, 특히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사람들을 미워하라고 하신 말씀의 뜻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다. 우리의 미움이라는 말에서 잘못된 연상을 할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욱 폭넓게 이해하면 그분이 하시는 말씀의 뜻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우정과 도움을 소중히 여기는 그런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거나 배척 당하거나 박해를 받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라는 것이다.

  이런 일을 당할 때 고통과 회의가 올 수 있다. 오해받고 심지어 배척 당하는 충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똑같이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때로 그리스도인의 반대에까지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옳다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이 두 가지 문제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고통을 받고서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잘못되지 않았는지 자문해 보게 된다면,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고통은 바람직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오해와 배척에 직면해야 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신실한 확신이 있다면 고통을 덜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확신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온다. 그 성품이 전적인 신실함이라는 것을 그리스도가 보여 주신다. 그리스도는 절대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당신이 그분을  겸손히 신뢰하며 그분께 헌신한다면, 그분은 당신이 길을 잃고 멀리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당신이 잘못 행하더라도 그분은 곧 당신의 행실을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그분의 성령이 계속되는 성경의 조명에 의해서든, 다른 곳에서 오는 도움을 통해서든 당신의 죄를 깨닫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가 발생한 그 지점을 다시 돌아보며 그분께 물어 보라. "제게 정말 이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또는 "당신 말씀이 정말 이런 뜻입니까?"

  그러나 나는 정신과 의사로서 이 문제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모두 자기 나름의 안경을 쓰고 성경을 읽거나, 어떤 진리 혹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숙고한다. 이 안경은 우리의 심리적 필요나 약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이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첫 번째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가 코끝에 걸려 있는 안경을 인식하도록, 즉 마음속의 내밀한 동기를 인식하도록 해달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독립성을 주장하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픈 욕구가 있을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칭찬에 목말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가장 깊은 심리적 욕구를 채워 주는 그런 '진리'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마음속의 동기를 보여 달라고, 즉 당신이 끼고 있는 안경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그 동기가 남이 당신을 좋아하고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당신의 욕구인가? 당신의 자만심이나 불안감인가? 아니면 여러 가지가 합쳐진 것인가?

  예를 들면 우리가 오래 사귄 친구들에게는 비판을 받으나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는 칭찬을 받을 때, 우리는 아마 그 두 집단 모두로부터 이해와 인정을 받고 싶어할  것이다. (양쪽 모두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우리는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절대로 인기를 얻는 것이 우리의 인생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6: 26).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를 감찰하는 분이 되셔야 한다. 자기를 비난하는 일에 푹 빠져 버리는 것은 건전하지도 않고 현명하지도 않다. 정죄자인 사단은 언제나 우리에게 거짓된 죄책감의 짐을 씌우려 한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의 비밀을 지적하시는 까닭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우리를 그분께 더 가까이 이끄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분 앞에서 겸손해져야 하리라. 우리의 심리적인 약점은 언제나 죄악된 마음의 태도로 나타나며, 우리는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그 최종 결과는 언제나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강하게 해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쁨과 더욱 큰 확신을 낳게 될 것이다. 우리가 원래 가던 일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든,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든 말이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다.  이 문제에서 그리스도의 군사와 무기력한 겁쟁이의 차이가 생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미지의 지배를  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 기업은 대중적인 이미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다. 목재 회사는 몇 십 년 간 땅을 황폐화하며 산을 벌거숭이로 만들고 땅을 파괴하며 동물을 멸종시키면서도, 재식림을 강조하는 텔레비전 광고 방송을 후원하면서 연구와 식수에 대한 때늦은 생색을 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대중이 품고 있는 이미지인 것이다.

  이것은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나 대통령 입후보자들은 이미지 관리자를 고용한다. 중요한 것은 강렬한 이미지다. 지위나 권력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이미지이다. "타임"지에 실린 마이클 킨슬리의 "대처를 대통령으로"라는 글은 이 점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킨슬리는 자유주의자다. 그가 중요하게 본 것은 대처 여사의 정치 철학이라기보다 여사의 용기와, 인상의 정치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그는 대처는  지도자이나 "레이건이나 부시는 지도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마가렛 대처는 10년 간 수상을 지내고 세 번의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으면서도  영국에서 사랑 받거나 특별히 선호되는 인물도 아니다. 지금까지도 그랬던 적이 없다. 그러나 집권 중반기 여론 조사의 낮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대처는 내일 4선을 위한 선거에서 승리할 것으로 보인다. ...높이 떠받들어지는 미국 유권자들이라 할지라도 그같이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 정치가, 사탕 대신 시금치를 내밀고 사랑이 아닌 존경을  요구한 정치가에게는 틀림없이 반응을 보일 것이다. 반드시 보수주의자만이, 더구나 반드시 여자만이 이런 정치가가  되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불행히도 교회는 자신의 이미지를 고양하는  데 너무나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교회 지도자들은 결코 이미지의 영향과 작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교회를 이루는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쓰고 있다. 인기를 얻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 모두를 타락시키고 있다.

  진정한 지도자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들은 형편이 좋든 나쁘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한다. 그리스도께 진정으로  헌신한다면 우리는 지도자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꼭 인기를 얻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진정한 헌신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고 요구할 것이다.

  한편 우리가 옳은 길을 걷고 있으며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과, 배척 당하는 고통을 겪어 나가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통찰하시면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 위해 다른 사람의 칭찬을 희생하기로 작정했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오해받는 고통은 여전할 것이다. 그 고통이 사라지려면 시간이 흘러야 한다.

  나는 우리를 비판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보다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관한 더 큰 지표를 알지 못한다. 그 어떤 일에도 우리는 비탄과 분개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저주를 받거든 복을  빌어 주어야 한다. 우리는 한때 친구였던  사람들이 우리를 배척하는 이면에는 그들 역시 자신만의 문제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진정한 적은 형제간에 분쟁을 일으키는 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배척 당하는 경험을 중요한 영적 성숙의 기회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보고 주님께 우리의 약함을 내어드리며 단호히 부정적인 태도를 다스려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따르는 것의 의미다. 이것이 그분이  우리의 모든 개인적 관계들-가족, 배우자, 친구 등 그들이 누구이건 간에-에 끼치고자 하는 영향이다. 당신을 주저하도록 만들지도 모르는 두려움은 불신으로 인한 것이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무시한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 왜냐하면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온 우주에서 가장 안전한 안내자와 로프로 몸을 묶은 채 신뢰라는 위험한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토론 문제

 

  1. 당신이 그리스도께 처음 헌신했을 때 다른 사람과 맺은 관계에 변한 것이 있는가? 그 이후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은 당신에게 중요한 대인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2. 친구가 당신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방해한 적이 있는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3. 비그리스도인과 인간 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던 적이 있는가? 어떻게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 가운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었는가?

  4. 아내와 아들이 탄 비행기가 추락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던 저자의 경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은 그 정도로 하나님을 신뢰했던 적이 있는가?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

  5.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 때문에 친구와 가족으로부터 배척 당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깨달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6. 그리스도를 섬기기보다 친구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인정을 받으려 했던 때가 있었는가?

  7. 당신은 가족이나 친구들의 배척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그들이 어째서 당신을 부정적으로 대한다고 생각하는가?

 

    5. 고난과 그리스도인

 

  나는 지금까지 헌신과 십자가의 길에 대한 보상이 고통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지금쯤은 고통이 따르기는 따른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을 것이다. 이제 고난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어야 할 때가 된 듯싶다. 왜 세상에는  고통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가? 특히 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자신의 고난과 다른 사람들이 고난에 대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수년 동안 나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스도께 정말로 충실하게 헌신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포기해도 언제나 내게는 포기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내 삶은 사도행전이나 엘리자베스 엘리어트의 '빛나는  문을 지나서'와는 너무 거리가 먼 것 같았다.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헌신에 이를 수 없었고,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삶은 죄책감에 쫓겼다. 그러나 그 죄책감은 진정한 죄책감이 아니었다. 지금 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나는 그 때 정죄자 사단의 조롱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거짓된 죄책감이 일었던 것은 진정한 헌신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나를 괴롭혔던 한 가지 문제는, 내가 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며 더 가진 것 없이 살아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고난을 받을 때에도,   고난은 때때로 헌신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 같기도 했지만, 보통은  헌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고난이었다.

  헌신의 대가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 위해 우리가 지불하는 값이다. 그러나 나처럼 헌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여러 가지 일로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헌신의 대가와 상관없이 부딪히는 고난의 형태가 무엇인지 언급하고 나서 본론에 들어가기로 한다.

 

    인간의 공통 운명

 

  필립 얀시는 다음과 같은 헬무트 틸리케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그들(미국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의 신학은 부적절하다." 얀시는 계속해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200년 동안 외세의 침입 없이 지냈고, '기후 조절'로 모든 기후상의 불쾌함을 해소하고, 조금만 고통스러워도 알약을 처방해 주는 그런 사회에서 어떻게 '고통의 신학'이 성립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유약하며, 고통에 분개하며, 불편함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편안함을 기본권으로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회의 일부로서  우리 역시 무의식중에 그에 따른 고난의 신학을 형성해 온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올바른 맥락에 놓고 보고자 한다.  모든 인간이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우리도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 우리는 고통의 세계에 살고 있다. 비록 우리가 기쁨과 아름다움을 알고 있으며, 고개를 들어 장엄한 밤하늘을 바라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고통은 존재한다. 갈매기 소리와 산호초의 잔잔한  아름다움, 비 내린 후의 상큼한 내음과 흰 눈으로 뒤덮인 스키장의 모습에 감동하여  행복감에 젖기도 하지만, 그래도 고통은 존재한다. 또 손자의 손을 가만히 만질 때의 촉감이나, 따스한 난롯가에 둘러앉아 정겨운 대화를 나누었던 어느 겨울밤을 기억하면서  만족해하지만, 이것들은 이야기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어렸을 때 바로 그  난로에 손가락을 덴 적이 있다. 또 우리  옆에서 걷고 있는 손자, 손녀 아이는 아버지가 술 때문에 아이와  어머니를 돌보지 않는 그런 집에서 자라나는 아이일 수도 있다. 또 부자들이 스키장과 산호초를 즐기는 그 순간에도 수백만의 사람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다. 아름다움과 선함, 분노와 공포가 엇갈려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고난에 대해 변명하시지 않는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을 비웃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이라는, 호되지만 엄숙한 가치를 남겨 두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과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진정한 선택권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그 결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은 물론 모든 인류에게 비극이 초래되었다.

  자신의 아이가 유괴되어 살해당한 여인이 "어찌하여 하나님이 내 아이를 데려가셨단 말인가?"라고 물을 수 없다. 그 아이를 죽인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악한 사람들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여인과 함께 우신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우시며 또 전능하시다면, 왜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으신단 말인가?

  이 자리에서 몇 마디로 악의 문제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또 지금 책을 한 권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을 설명할 능력이 없다. 내 머리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방법을 도저히 헤아릴 수 없다. 다만 두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을뿐이다.

  첫째, 전능하신 하나님조차도 하실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나님은 그것이 본질상 불가능하거나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위배될 경우  그 일을 하실 수 없다.  본질상 불가능한 것들은 루이스가 '본질적 불가능'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하나님이 둥근 정육면체를 만드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격찬하는 것이 아니라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 말들은 무의미하다. 루이스가 지적한 것처럼, 부조리한 문장 뒤에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고 해서 무의미한 말이 의미 있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주면서, 그와 동시에 그 사람에게 주어진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면, 사람은 악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현실이 보여 주는 것처럼, 악은 다른 것들에 해를 끼칠 수가 있다.

  루이스는 이것을 우화적인 상상력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지주'는 하나님을 나타내며, '나라'는 세상을, 소작인들은 인간을 나타낸다. 주인공인 존은 스승에게서 지주가 무기력한 까닭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스승은 그 지주가 쇠사슬에 매인 노예가 아니라 자유 소작인으로 그 나라를 경작하는 위험을 감수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자유민인 그들이 금단의 장소로 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소작인들이 그런 일을 했더라도, 지주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있고 또 그런 습관을 끊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도를 넘어서면, 그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사람들은 오랜 기간 계속해서 야생 사과를 먹을 것이고, 마침내 아무 것도 사과에 대한 탐심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과 속에 있는 벌레의 영향으로 그들은 사과를 더 많이 먹어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비록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와도 일치한다. 또 하나님은 자신에게 진실하셔야만 한다. 그분은 자신의 존재에  위배되실 수 없고, 위배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고, 하려 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또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깨뜨릴 수도 없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사람을 통제해서 전쟁이 끝나도록 하시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람을 인간 이하로 만들며, 또 하나님과 사람의 언약을 헛되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설사 그렇게 하실 수 있다 하더라도(실제로 하실 수 없으시지만),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정말로 전능하신 천체의 과학자(하나님)의 조종을 받는 다정한 인간 컴퓨터가 되려고 하겠는가? 나는 기계가 아니며, 기계가 되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다. 내가 인간인 것은 민첩한 지적 능력이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기능 때문이 아니며, 더 나아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능력  때문도 아니다. 내가 인간인 것은 지상의  범위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 나를 그분의 형상대로 노예가 아닌 아들로 만들어 주신 창조주를 알 수 있는 능력 때문이다. 기계가 고난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난을 피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치고는 너무 크다!

  행동주의 학자 스키너가 우리에게 제시한 해법은 실상 이것이다. 스키너는 '월든2' '인간의 존엄성을 넘어서'에서 행동주의 원리를 주창했다. 인간은 개가 훈련을 받듯이 훈련될 수 있고, 컴퓨터가 프로그램 되듯이 프로그램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키너도 인간이 곡마단의 동물과 같이 훈련된다면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된다는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존엄성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뛰어넘기를 바랐다.

  이것은 어리석은 이론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만 한다. 지배자가 피지배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무시할 때마다 독재와 압제가 나타났다. 실로 우리는 그렇게 인간의 존엄성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을 반영한다는 사상이 강조될 때마다,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의 존엄성이 인식되었고, 노예 제도에 대한 반대가 일었으며, 고통이 뿌리뽑혀야 할 악으로 인식되었다.

  나는 고난이 존재하는 이유를 불가해한 신비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헤아릴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는 있다. 궁지에 처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우리 가운데 사시는 것이었다. 우리의 고통을 다 맛보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를 위한 인간 구원의 잔을 채우시는 것이었다.  머지않아 하나님은 우리 역사의 마지막 장을 쓰시고 평화의 통치를 도래케 하실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는 고난이 계속된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인간인 까닭에, 치통을 앓고, 마음의 아픔을 겪으며, 뼈가 부러지고, 친구 관계가 깨지며, 퇴행성 질병과  몰락하는 사회를 함께 체험한다. 해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모두 비치는 것처럼, 세균은  죄인과 성자의 몸에 다 침입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우리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겪는다. 자기 중심성과 교만으로 그리스도인들의 결혼 관계가 상할 때 겪는 고난은 죄로 말미암은 고난이라고 할 수 있다. 마약으로 제정신이 아닌 그리스도인 청소년이 미끄러운 길 위를 시속 150 킬로미터로 달리다가 사고가 나 죽으면 그것은 그의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인간이면 누구나 겪게 되는 고난을 피할 수 없다면,  분명코 우리 자신의 완고한 고집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결과로부터 우리만 특별히 보호받기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불을 붙이면 타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 수호 천사는 있다. 그러나 불에 타지 않는 옷을 입은 성도는 없다.

 

    고난을 통한 훈련

 

  또 그리스도인들은 훈련으로서 고난을 받는다. 하나님의 훈련을 겸손하게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우리의 삶은 더욱 순수해지고 신앙은 더욱 강해진다.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1:2-4).

  우리는 훈련을 가져오는 고난의 신비를 파악함으로써 변화되는 경험을 한다. 당황과 낙심이 기쁨으로 바뀐다. 연약한 손과 발이 굳건해지고 목청을 높여 노래하게 된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2: 11).

  "고난으로 연단 받은 사람들에게...." 고난으로 연단을 받는다고? 어떻게? 그리고 고난이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생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주신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항상 알지는 못할 것이다. 또 여하튼 고난이 생기는 원인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고난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난이 생긴 원인을 완전히 알지 않고서도 고난으로 '연단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난으로 연단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주를 지배하시는 통치자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다. 하나님은 내가 고난 당하는 것을 아시며 관심을 가지신다.

  이 모든 일에 대해 나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만 한다. 더 나아가  알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악에서 선이 나오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이 고난을 도덕적 암을 잘라 내는 칼로 바꿀 수 있도록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고대하신다. 여름 가뭄이 나무 뿌리를 땅 속 깊이 들어가게 하는 것처럼, 힘든 훈련이 운동 선수의 힘과 스피드를 증가시키는 것처럼, 고난은 성숙한 성도를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나는 고난 가운데 감사한다. 이것은  고난을 인해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이 내게 피학대 음란증 훈련을 시키고  계신 것은 아니므로) 고난 가운데서  감사하는 것이다. 나는 넉넉한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이 나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으며 또 정하신 때에 나를 구원하시리라는 확신 가운데  하나님께 감사한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갖고 계신 목적을 이루는 데 고난을 사용하시리라는 기대 속에 하나님께 감사한다.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내가 받을 고난보다 더 많은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가 고난 당할 때 내 형편을 이해하실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면서 나는 두 가지 점을 깨닫게 된다. 하나는 고난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고난 가운데의 평안은  고난의 강도를 반감시키고, 고난에 수반되는  두려움과 공포를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고난이 줄어든다. 또 하나는, 고난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희망이 생긴다는 것이다. 나는 고난이 결국에는 내게 유익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 거의 흥분하게 된다. 더 이상 내가 어떻게 하면 고난을 참아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는다. 고난은 새로운 삶의 지평으로 가기 위한 일종의 전차가 된다.

  나는 졸저 '믿음의 싸움'(생명의 말씀사 역간)의 한 구절에서  하나님이 처음에 어떻게 이 교훈을 깨닫게 해주셨는지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맏아들 스코트는 볼리비아에서 심한 지체 부자유아로 태어났다.   한 살이 되기까지 아이는 끔찍한 부목처럼 생긴 것에 갇혀 있었다(하지만 이것은 아이에게  고통을 주는 기구는 아니었다). 한 살이 되자 부목을 떼어 내었고, 아이는 곧 뛰거나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아이라면 으레 그렇듯이, 한번은 크게 넘어져 턱이 크게 찢어지며 입에까지 상처가 났다.

  우리는 문명과 동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내게는 수술 기구라고는 전혀 없었고,  쪽집게 하나와 재봉용 바늘과 실뿐이었다. 아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아이의 작은 몸이 단단히 붙잡혀 있는 동안, 나는 겁에 질린 아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어야  했다. 내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고 한다면 감상적으로 들리겠지만,  실제로 아이의 고통은 바로 내 고통이었다. 어째서 모든 것이 다 잘 끝날 것이라고 아이를 위로해 줄 방도가 내게 없었던가? 나는 아이의 고통에 가슴 아파하면서 족집게로 보드라운 살갗을 집어 올리고 재봉용 바늘을 몇 번이고 그 턱에 찔러 넣었다.

 

  아들아이는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무언가를 가르치실 때 우리가 처해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 있었다. 다만 한 가지가 다르다. 그 때 아이는 그 고통의 의미를 몰랐다. 우리는 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한다. 왜 고통이 필요한가?  성경적인 대답은 고통으로 "연단 받은 자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12: 11).  고통은 언제나 우리의 특정한 약점이나 잘못을 고치기 위한 것이다. 스코트의 경우에 그 상처는 감염으로 덧날 수 있었고,  그렇다면 목숨마저 위태로웠을 수도 있었다. 상처를 즉시 꿰맸기 때문에 감염의 위험이  줄었다. 또 상처를 그대로 두었다면 얼굴 밑부분에 보기 싫은 흉터가 남을 수도 있었다. 그 상처 자국은 지금 눈에 띄지 않는다. 나는 아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했던 것이다.

  어째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시지 않는가? 어째서 하나님은 우리의 특정한 약점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씀해 주시지 않는가? 이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은,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으며,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전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수용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째서 꼭 고통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셔야 하는가? 다른 방법은 없단 말인가?"하고 물을  수도 있다. 물론 다른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많은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만, 루이스가 말한 것과 같이 고통을 통해서는 우리에게 외치고 계신다.

  고통은 징벌이 아니다. 내가 아들 스코트에게 그런 고통을 준  것은 징벌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 역시 우리에게 징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다. 연단(Training)일 수는 있지만, 징벌은 아니다. 또한 나는 온몸을 쥐어짜는 듯 했던 그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 역시 고통 당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하는 아이를 훈육할 때, 당신은 그 아이와 같은 고통을 맛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고난을 당하신다.  당신이 이를 이해한다면, 또한 하나님이  분명한 목적 가운데 일하신다는 것과 당신이 그 능력의 손에 놓여 있다는 것을 진실로 신뢰한다면, 고통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도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이미 지적한 것처럼,  두려움은 고통을 배가하며, 신뢰는 고통을 반으로 줄인다.

 

    예수를 위하여

 

  이 책에서 나는 모든 인간이 다 겪게 되는 고난이나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과 죄로 말미암아 생기는 고난 또는 훈련으로서의 고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을 작정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충성함으로 말미암아 겪는 그런 고난이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는 방법 때문에 겪는 고난조차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우리들은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거나 자기 의를 드러내면서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고난은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그런 고난이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내가 등에 지는 십자가와 관계가 있다. 그것은 의도적인 선택으로 말미암는 고난이다. 그리스도가 언급하신 십자가는, 류마티즘을 앓으면서 그것을 '십자가'라고 말하거나 옛날 복음주의자들이 자기 인생의 십자가라고 부르곤 했던 바, 성가신 일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언급하신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추종자들의 표지다. 이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병일 수도 있고 굶주림일 수도 있으며, 외로움일 수도 있다. 박해일 수도 있고, 죽음일 수도 있다. 그것은 2000년 동안 교회의 영광이 되어 왔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도, 교회의 주인 되시는 주 하나님의 말씀은 수세기를 가로질러 들려 온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2:10).

 

    토론 문제

 

  1. 저자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에 충실하게 헌신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에 자주 죄책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헌신의 굴곡은 어떠했는가? 진정한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2. 미국에서 적절한 고통의 신학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 필립 얀시의 인용문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어떤가? 그의 평가가 정확하다고 보는가, 부정확하다고 보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3.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를 당신의 말로 설명해 보라.

  4. 본문의 내용에 따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까닭은 무엇인가? 이 대답은 당신에게 얼마나 타당하게 느껴지는가?

  5. "불에 타지 않는 옷을 입은 성도는 없다"는 구절에서 저자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6.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고난 받은 적이 있는가? 고난을 하나님의 연단이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각각의 경우에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7.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고난 가운데서 찬양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당신의 경우에는 어떻게 찬양이 고난 경험의 일부가 되었는가?

  8. 저자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느끼시는지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가? 당신이 고통 받을 때 하나님도 함께 고통 받으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9.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일반적인 고난은 어떻게 다른가?

 

    6. 예수님과 고난

 

  예수님을 따르는 데 헌신한 결과 받게  되는 고난이라는 특정한 고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가 이 장에서 살펴보게  될 고난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진실함 이외에는 다른 원인을 찾아볼 수 없는 고난이다. 첫 번째 질문은, "그런 고난은 불가피한가?"이다.

  우리가 마음에 들어 하든 말든, 이에 대한  답변은 '그렇다'는 것이다. 다름 아닌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가운데 이렇게  훈계하셨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15: 20-21). 요한복음의 이 말씀 외에도 고난과 관련된 말씀은 얼마든지 더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난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우리는 고난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 고난을 피하려고 애써야 하는가?   문제를 논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이 자신이 직면하신 고난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특히 그분이 자주  당하셨던 핍박을 어떻게 대하셨는지를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언제 자신이 고난 받을 운명인 것을 깨달으셨던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예수님이 언제 자신의 정체를 깨달으셨는지조차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어린아이 때 특별한 소명을 깨달으신 것 같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2: 49) 하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독생자인 것과 참혹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신 때는, 예수님이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난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의 세례

 

  예수님의 세례는 그분의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인 동시에 참혹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최초의 전조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는 그분  생애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사촌인 세례 요한은 그분이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요한이 주는 세례는 바로 죄를 회개하는 의미의 세례였다) 세례 주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저하는 요한을 기묘한 말씀으로 압도하셨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3: 15).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의를 이루는  '은 무엇을 뜻하는가? 세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가장 흔한 설명은 세례 자체와 관계가 있다. 어떤  설교자들은 세례를 받으라고 사람들을 설득하면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좋은 모범'을 보여 주시려고 세례를  받으셨다고 말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례를 받는 그리스도인이 하는 말은 요한이 회심자들이 세례를 받을 때 했던 말과는 매우 다르다. 그 당시에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자기에게 세례를 주는  바로 그 사람의 인격과 가르침에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나는 이 사람의 가르침을 따르기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례 받는 행위 자체에는 가치가  없다. 그러나 기독교의 세례의 전체적인 초점은 자신을 예수님께 공개적으로 내맡긴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세례는 예수님에 대한 내적인 헌신을 외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흔한 설명은 무리 중에 있던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자신이 회개할 것이 있다고 느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으나,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매우 높은 그분의 윤리적 표준에서는 공적으로 죄라고  인정하고 싶어서 예수님의 민감한 양심을 괴롭혔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회개가 무엇인지 그 모범을 제시하셨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는 예수님이 다른 곳에서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것과 상충된다. 이 견해는 또 신약의 다른 저자들이 가르치고 있는 것과도  모순된다. 후에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성전에서 그분을 적대시하는  무리를 꾸짖으셨다( 8: 46). 또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선언한다( 4: 15). 신약은 예수님에게 도덕적인 결함이 있다는 견해를 거부한다. 따라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기 위해 요한에게 가셨을 때, 무언가를  회개하시기 위해 가신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세례의 의미

 

  그렇다면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인가? 첫째, 예수님은 분명히 세례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원하셨던  것으로 보셨다. 이것이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그럴 듯하게 해석하는 것 같다. 또 예수님의 행동은 그분이 요한의 설교에 찬성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게는, 예수님의 세례는 그분이 기꺼이 죄악에 찬 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려 했다는 점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자신을 죄의 딜레마에 빠져 있는 우리와 동일시하셨다.  그분은 우리 죄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고자 하셨기에 우리 곁에 오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줄에 서셔서  우리의 옹호자가 되셨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이 순간까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도 언급하신다. 이 구별은 아주 중요하다. 예수님이 우리의 대표자와  대속자로 죽으시려면 예수님은 대표자도 되시고 대속자도 되셔야만 한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서만 우리를 대표하실 수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만 우리를 구속하실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취하신 조치는 신학적  관심사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기꺼이 고난뿐만 아니라 수치도 받으시려는 의지를 나타낸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복음서에 나오는 이 이야기의 경이로움을  깨닫게 된다. 성육신으로 시작된  예수님의 사역이 여기에서 두 번째의 의도적인 선택으로 확증되는 것이다.

  사실 성육신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성육신을 통해 그분은 인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 즉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과 동일한  모습으로 오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말구유에 기저귀를 찬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갈라진 벽 틈으로는 바람이 드는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마구간에서, 깨끗함과는 거리가 먼 말구유에 누워 계신 모습을 그려 보라.

  우주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지금 갓난아기의 몸에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배가 고프다고 해서 품위 있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분은 다른 아기들과 마찬가지로 울면서 작은 주먹을 그저 꼼지락거리며 작은 발을  바둥대야 한다. 대소변도 다른 사람들이 다 받아 주어야만 한다. 천사와 마귀들도 놀라워하며 의아해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요즘 정치인들은 공허한 몸짓으로 자신을 유권자와 동일시하는 시늉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정말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 그리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은 다시 우리들과 나란히 줄을 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자신을 낮추셨다.

  의대생 시절 경험했던 일이 한 가지 기억난다. 성병 치료  센터에서 가진 임상 수업에 한 시간 결석한 적이 있었다. 빠진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 보통은 의대생들이 가지 않는 한밤중에 진료소에 가야만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힘이 센 남자 간호사가 내 팔을 잡더니 진료를 기다리며 서 있는 남루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 사이로 나를 밀어 넣는 것이었다.

  나는 "저는 담당 의사 선생님을 만나러 온 건데요"라고 내 입장을 설명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라구요. 기다리세요"라고 그 간호원이 대답했다.

  "그게 아니구요. 저는 의과 학생이란 말이예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의과 학생들도 그런 병에 걸리는 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마침내 나는 그 사람에게 내가 환자가 아니라 진료팀의 일원이라는 것을 납득시켰다.  '우리' '그들' 간의 간격이 얼마나 크며, 또 내가 그 간격을 뛰어넘어 나 자신을 성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과 동일시하기를 얼마나 꺼려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 일 이후로 나는 우리 죄인들 곁에 나란히 서기 위해 (죄를 전혀 알지 못하셨던) 예수님이 뛰어넘으셨던 그 간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고는 늘 경탄해 마지 않았다.

  그리고 이 행동, 예수님이 기꺼이 우리 인간의 수치를 함께 하려고 하셨던 이 행동에 대한 반응으로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첫째, (세례 요한과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비둘기의 형태로 성령님이 예수님께 내려와 머무셨다. 둘째,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3: 17).

  이 문장은 메시아에 관한 구약의 두 구절-하나는 시편,   하나는 이사야서-을 결합시킨 것이다. 시편은 메시아의 아들됨을 알리고, 이사야서는 메시아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전한다. 시편 2편은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권능과 승리와 관계가 있다.  이 시편에 "너는 내 아들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2: 7).

  이사야서 42: 1에는 "내 마음에 기뻐하는"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사야서  42장에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종에 관한 구절-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이사야서 53장이다-중에 하나가 나온다. 전체적으로 보건대 이사야서의 종에 관한 구절은 의를 세우다가 그 과정에서  죽음, 구속적인 죽음을 당할 충성된 종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사야서 42장이 구체적으로 메시아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없지만, 나는  예수님이 그 인용구가 의미하는 바를 깨닫고 계셨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친히 이사야서(61)의 종에 관한 한 구절을 택해 읽으시면서,  이 말씀이 자신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셨다( 4: 18-21). 그리고 예수님이 종에  관한 이 구절이 자신을 언급하는  것이라는 점을 아셨다면, 세례를 받으실 때 자신이 고난과 죽음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도 아셨을 것이다(3: 17).

  그리고 내가 하늘에서 들려 온 말씀을 잘못 이해했다 하더라도, 훗날 예수님이 자신이 직면할 죽음을 생생하게 이해하셨다는 것은 분명하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유명한 고백을 했을 때(  16:16),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다"( 16:  21)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성과 다가오는 고난의 관계를 주의 깊게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이셨지만, 또한 고난 받는 종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이해하려 할 때, 예수님이  고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셨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이 고난에  대해 취하셨던 태도를 알아보면, 다음 네 가지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는 고난을 피하셔야 한다는 제안을 잔인할 정도로 단호하게 거부하셨다는 점, (2) 예수님은 불필요한 고난을 피하셨다는 점, (3) 생명을 내줄 때만 생명을 얻게 되는 역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4) 예수님께 참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추종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그분의 주장.

 

    베드로를 심하게 꾸짖으신 예수님

 

  불쌍한 베드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을 때 그는 따뜻한 반응을 얻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6: 17). 베드로는 흥분되고 행복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이의를 제기한 것은 인간 베드로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항상 동정심이 많으셨던 예수님인지라, 이러한 베드로를 부드럽게 바로잡아 주시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깜짝 놀랄 정도로 냉정하게 말씀하신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16: 23)

  예수님은 매우 강한 어조로 감정을 표현하셨다. 여기에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후에 베드로가 맹세와 저주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온유와 사랑으로  대하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이의를 제기한  것에 대해 예수님이 충격적으로  반응하신 것은 베드로가 표현했던 생각에 대한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베드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이 매우 민감하게 느끼신 무언가를 건드렸던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고난 때문에 이미 기가 죽어 계셨던 것은 아닐까? 예수님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예수님은 좀더  쉽고 편안한 길을 선택하려는 욕망을 떨치기 위해 마음속에서 큰 싸움을 하시지는 않았겠는가? 바로 이것이 광야에서 사단이 예수님께 권유했던 길이었다. 예수님은  정작 베드로 자신은 모르고 있었던,  베드로의 권유의 출처를 아셨던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면  가르쳐 달라고 고뇌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간구하셨다( 26: 36-46). 또 예수님은 이렇게 외치시기도 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12: 27).

  예수님(마지막 아담으로서)이라고 해서 우리보다 고난에 맞서기가 더 쉬웠던 것은 아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던"  예수님도( 9: 51) 인간의 모든  본능을 극복하고 고난과 죽음의 길을 선택하셔야만 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이의 제기에 단호하게 대처하신 사실을 비추어 볼 때, 그분이 얼마나 심한 내적 갈등을 겪고 계셨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모든 점에서 유혹을 받는 것처럼, 예수님도 좀더 편한 길을 선택하려는 유혹을 받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유혹이, 그분이 사막에서 맨 처음에 직면하셨던 것과 같이 사단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아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삶에 집착하는  인간의 반역성을 입고 있음을 감지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강력한 자기 보존 본능을  느끼셨지만 그것을 더 강력한 결단으로 눌러 이기셨다. 그런 까닭에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응수가 잔인할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불필요한 고난을 피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11-12장에서, 요한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인기는 치솟았고, 누구나  예수님을 만나 보고 싶어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높은 인기를  자기들의 권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산헤드린이 긴급하게 소집한 모임에서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가 죽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가야바의 말처럼 예수님의 죽음으로 유대인들은 로마 통치자들과의 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에 따라 즉시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계획되었다( 11: 45-50). 예수님은 위험을 알아차리시고 일부러 사막 끝에 있는 에브라임에 잠시 몸을 숨기셨다.

  또 다른 경우에, 무리가 예수님을 죽이려 했을 때 어떤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났다는 암시가 있다. 즉 무리가 예수님께 해를 가하려 하자 예수님은 신비하게도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다"( 4: 30).  예수님이 어떤 경우에는 죽음에 직면하는 데 단호했던 반면, 또 다른 경우에는 재빨리 죽음을 회피하신 경우도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어떤 날은 다른 날보다 더 강하기라도 하셨단 말인가?

  신약은 결코 희생과 고난 그 자체가 선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죄인을 구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직면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이 고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이 그분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였기 때문에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12: 2).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많은 시대에 걸쳐 종교적인 스승들은 고행 기술을 가르쳐 왔는데, 그것은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 공적을 쌓아 올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참으로 신령한 사람이 될 때까지 반항적인 육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스파르타식 훈련의 일환으로 더욱 그렇게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 가운데는  그와 같은 고행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비록 가난하긴 했지만 예수님의 삶이 금욕적이었다는 암시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으셨는데( 11: 19), 그것은 스스로도 인정하셨듯이 예수님이 그 당시의 여느 다른  사람들처럼 먹고 마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금식하거나 기도하는 데 시간을 보내신 것은 그렇게 할 목적이 있을 때만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은 육체적 욕구를 억제하기  위하여 자신을 훈련하시지는 않았다.

  예수님의 삶은 고난에 대한 이 두 가지 태도에 전혀 얽매이지 않으셨다. 마침내 예수님이 수난에 직면하신 것은 바로 ''가 왔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자학적인 분도 아니요, 스파르타인도 아니요, 고행주의자도 아니셨다. 그분은 잃어버린 인간을 사랑하시고 또 그 잃어버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던 것이다.

 

    죽음을 통한 생명

 

  예수님은 불필요한 위험은 피하실 수 있을  만큼 자신에게 닥치는 위험을 잘  알아차리곤 하셨지만, 결국에는 예루살렘에 공공연히 입성하셨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군중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시자 군중은 길 위에 겉옷과  종려나무 잎들을 깔아 놓았다( 12: 12-19). 이와 같이 군중이 흥분한 데에는  물론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 11: 38-44)에도 그 이유가 어느  정도는 있다. 성전에서는, 외국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자들까지 예수님을 찾았으니 말이다( 12: 20-22). 그릇이 작은 사람이라면 군중의 환호에 도취되어 그 호운의 물결을 타고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빌립이 예수님께 와서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다는 전갈을 하자 예수님은 다른 종류의 환희에 찬 반응을 보이셨다.

  예수님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말씀하셨다(  12: 23). 이 말은 예수님이 때를 맞춰 놓으셨다는 말인가? 예수님은 자신이 무장 혁명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후원을 받고 있다고 느끼셨다는 말인가? 다음의 말씀은  그와 같은 생각을 일소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2: 24). 그러므로  영광을 받는다는 것은 인기에 편승해 권력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내버림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예수님은 권력을 장악함으로 권력을 쟁취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줌으로 권력을 쟁취하신다. 진실로 자신의 생명을 내버리는 것이야말로 생명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12: 25).

 

  약함과 패배로

  예수님은 왕관을 얻으셨도다.

  짓밟히심으로

  그분의 발 아래 모든 적들을

  짓밟으셨도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앞에서 예수님이 고난 그 자체가 미덕이라고 가르치지는  않으셨다는 점을 살펴본 바 있다. 예수님의 행위는 두 가지 원리에 의해 지배되었다.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이 두 원리에 따라 예수님은 때가 무르익으면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만 했다.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그리고 예수님이 공포감 때문에 아무리 십자가를 피하고  싶어했을지라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내포된 모든 고난에 직면하기로 결정하셨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미워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를 생명보다 한량없이  더 귀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복종할 것인가 하는 선택에 직면할 때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생명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비통함이나 낙심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다른 더 많은 것들이 문제가 되고 있는 때에 생명에 집착하는 그와 같은 생각을 경멸하시면서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꺼이 죽음에 직면하려고 하신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다. 슈바이처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예수님이 심리적인 이유 때문에 십자가 사상을  환영하셨다는 의견을 제안한 바 있다. 자신이 메시아임을 믿으면서도 유대인들과 로마 당국과의 갈등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자각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희생양으로 봄으로써 외적인 현실과 내적인 확신 간의 긴장을 해결하시려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신이라는 확신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세상의 구세주라고 믿으면서 행복하게  죽으실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견해에는 선험적인 가정이 개재되어 있다고  하겠다. 즉 예수님이 결국 인간에 불과했다는 가정이다. 사실은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인격과 인간의 딜레마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분투하며 성장해 가는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당황케  하는 상황에 짓눌려서 결국은 이런 해결책에 이르렀다는 말이며, 그리고 이것은 결국 정신병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아무도 이렇게 말하지 않겠지만 예수님은 미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예수님이 정말로 하나님이시라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내적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는 복잡한 이론은 전혀 필요 없다. 그렇다면 내가 이 견해를 언급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실제로 우리 가운데 때때로 오해나 대인 관계상의 어려움에 직면하기보다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에 고난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고난은 도피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설명한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심리적 약점을 무심코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아침 호텔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웨이터가 내 아내에게만  식사를 갖다 주고 내 것은 가져오지 않았다. 나는 오렌지 쥬스와 커피를 마셨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러자 "가만히 앉아만 있을 게 아니라 웨이터에게 신호를 좀 보내세요"라고 아내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웨이터가 매우 바쁘고 또  다른 손님들이 그 웨이터를 불친절하게 다루는 것을 죽 지켜보고 있었다. 더욱이 하찮은 일로 소란을 피우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웨이터를 배려해서 망설인 것이 아니라 소심해서 그런  것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웨이터가  나를 야속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보다 아침 식사를 기꺼이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내가 그렇게 처신함으로써 영적이라고 스스로를 기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권리를 희생했다. '하나님을 위해, 학대받아도 가만히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바로 일부 신학자들이 십자가에 직면한 예수님의 행동을 해석한 것-심리적으로 가장 쉬운 길을 택한 것이라는-  마찬가지다. 사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웨이터에게 가서 정중하게 그의 실수를 지적해야 했다.

  예수님은 결코 난처한 문제들을 피하지 않으셨다. 또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당혹스러운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셨으며, 또 중요한 어느 사건의 경우에는 폭력으로 맞서기까지 하셨다. 사실 예수님은 난처한 상황에서 도피하는 것을 영성이라는 미명 아래 감수하는 그와 같은 '고난'을 묵인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희생과 고난에 대해 아주 건전한 태도를 가지셨다.  그분은 희생과 고난을 미워하셨다. 희생과 고난을 피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희생과 고난을 선택하셨다.

  예수님이 죽음을 택하실 수 있었던 것은  죽음 너머의 기쁨과 승리를 기대하셨기  때문이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12: 2).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빌립과의 간단한 대화에서 예수님은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밀알이 되는  것은 곧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은 또한 한 가지  일반 원리가 포함된다는 점을 매우 분명하게 하셨다. 즉 자신의 생명을 가볍게 여김으로써, 생명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함으로써, 생존과 참되고 영원한 삶 간의 질적인 차이를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에 직면함으로 우리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수동적으로 고통을 받아들인 훌륭한 모델로 보는 것은 감상적인 자세다. 실제로 예수님은 죄와 사망과 강력하게  맞붙어 싸우신, 적극적인 정복자시다. 예수님은 감옥 문을 부수고 갇힌 자들을 자유케 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경멸하신 우리의 수호자시다.

 

  지옥에 가신 그가 지옥을 저 아래로 내던지시고

  죄의 몸을 입으신 그가 죄를 정복하셨네.

  죽음에 굴복하신 그가 죽음을 깨뜨리셨네.

  죽음으로써 사망을 죽이셨네.

  찬미하라, 죽임당하신 정복자를 찬미하라!

  승리의 죽임을 당하신 정복자를!

  살았다가 죽었으며, 다시 사실

  주님과 그의 교회를.

 

  예수님의 희생에 음울한 것은 전혀 없다. 수난곡은 단조가 아니라 장조로 쓰여야만 한다. 예수님은 영혼의 진통을 바라보시면서 즐거워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 너머로, 그분이 높이 들리울 때 그분에게 이끌려 올 구속받은 자들의 큰 무리를 보셨다. 굵은 핏방울을 흘리셨지만, 영적, 육체적 고뇌를 겪으셨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사단을 묶어 버리는 강한 사람의 죽음이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수동성이 아니라 바로 그분의 정결하심을 가리킨다. 우리는 예수님이 유다 지파의 사자라는 점 역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

 

  당신이 예수님을 따르기 원한다면 예수님께 해당되었던 원리들은 마땅히 당신에게도 해당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9: 23). 나는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 불멸의 원리를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내가 이제까지 말해 온 것을 간단히 요약 정리해 보기로  하자.

  앞장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정의하면서  다음 세 가지 형태의  고난을 제외했다.

첫째, 타락한 세상에 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다같이 겪게 되는 고난. 둘째, 우리가 저지른 죄와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은 고난. 셋째, 훈련으로서의 고난, 즉 우리를 믿음과 은혜 가운데 자라게 하는 고통스러운 경험. 나는 기독교적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름으로 인한 직접적인 결과로 생기는 고난에 국한시켰다.

  내가 이렇게 구별을 한 것이 다소 인위적일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고통스러운 경험이  나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저지른 실수로부터 배울 수가 있다. 또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르려다가 겪게 되는 고통도 나의 삶에 똑같은 유익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구별을 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르기로 결정하기에  앞서 그 대가를 계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항상 죽음에 직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이 고난에 대해 가지셨던 태도가 고난에 직면하는 우리에게 유익한 모델이라는 점도 알아야만 한다.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고난을 비켜 가게 하는 것은 다 사단의 짓으로 보면서, 굳은 결의로 구속을 위한 죽음에 직면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을  위한 고난 그 자체를 미덕으로 여기지 않으셨으며, 그래서 가능할 때에는 고난을 피하셨다.  더욱이 고난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병적이거나  신경증적이거나 자학적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 고통을 넘어 영광과 승리를 보셨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움츠러드는 육신을 이겨 내고 발로 죽음을 짓밟으면서 단호하게 앞으로 행진해 나가도록  추진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며, 인간을 구원하고, 어둠을 무찌르고 승리한다는 기대였다.

  우리도 정복자의 발걸음을 좇아 걷도록 초대받은 자들이다.

 

    토론 문제

 

  1. 당신의 경험으로 보아 그리스도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고난이 불가피한 것이라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는가?

  2. 본문에서 예수님의 세례의 의미가 어떻게 설명되어 있는가? 이 설명에 동의하는가,  동의하지 않는가? 그 이유를 설명하라.

  3. 당신은 생애의 어느 시점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을 외적으로  고백했는가?(세례, 교회 출석, 친구 전도, 기타 방법으로)

  4. 마태복음 16: 23에서 예수님은 왜  그렇게 베드로에게 강하게 반박하셨는가? 그리스도인 친구가 선의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맡기신 일을 피하도록 유혹한 경우가 있었는가? 이야기해 보라.

  5. 누가복음 4: 30에서 예수님은 왜  무리를 피하기로 하셨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불필요한 고난을 피해야 하겠는가?

  6. 목숨을 던짐으로써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7. 주문한 아침 식사가 나오지 않았는데 웨이터를 부르느니 고통을 감수하고 있었다는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가?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곤란한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핑계로 삼은 적이 있었는가? 이야기해 보라.

  8.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소극적인 희생이 아닌 적극적인  정복자로 보는 것은 왜 중요한가?

  9. 당신은 언제 고통을 넘어서 궁극적인 승리를 바라볼 수 있었는가?

  10. 5장과 6장을 읽고 당신 삶의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가?

 

    7. 자기 십자가를 지라

 

  고난 그 자체가 미덕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고난 받을 필요가 없는데 고난 받기로 결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철로에 드러누운 채 기차에 치여 한족 다리를 잃는다고 해서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험에 처한 어린아이를 구하다가 다리를 잃게 될 경우, 그것은 매우 비참하긴 하지만 희생적인 용기를 상징하며 인간 생명의 고귀함을 생각나게 한다. 따라서 그와 같은 고난에는 유익이 있다.

  예수님이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을 때, 그분은 당신에게 매일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단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미리 주의를 주고 계신 것뿐이다. 그 구절은 신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고난 그 자체를 목적으로 추구하라는 부르심도, 죽음이라는 내적 경험을 겪으라는 권유도 아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기 원한다면, 네가 직면해야만 할 것들에 대해 준비하라. 사람들은  내게 십자가를 지게 했고, 너에게 같은 짓을  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나를 조롱했다.  그들은 너 역시 조롱할 것이다. 그러니 나로 인하여  네게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도록 매일 자신을 무장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대가를 현실적으로 매일 대하게 된다면, 실로 더 깊은 의미의 죽음, '한 알의 밀'과 같은 죽음을 대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한때 살고 싶어했던 그런 삶에 대해서 죽게 될 것이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좌우할 수 있는 권리, 우리의 야심, 선택권 또한 그 밖의 모든 '권리'에 대해서 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헌신이 지니는 두 가지 측면을 함께 보아야 한다. 한 가지는 불쾌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의 삶을 누리기 전에 지금 여기에서 겪어야만 하는 죽음이라는 더 심각한 문제다.

  우선 불쾌함을 겪을 가능성부터 말해 보도록 하자.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거듭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신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10:  16-25). 다시 말해, 예수님이 명하신 일을 할 때 우리는 어떤 때는 영접을 받고 어떤 때는 배척당하는 등 예수님과  같은 일을 겪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대우받으신 것처럼 대우받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꿀벌이 꿀에 끌리듯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다른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선 자리마저 싫어할 것이다.

  사도들에게 하신 마지막 설교에서 예수님은 다시 이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15: 20-21).

  당신이 솔직하고 정직하다면-자신에게 진실하고 그리스도께  진실하다면-당신의 삶은 일부 사람에게는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강한 매력을 줄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될 것이다(고후 2: 16). 그리스도께 충실하다면, 당신은 인기를 끌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물론 그 반대의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문제는 상대적인 대가가 무엇이든  당신이 정말로 그리스도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느냐이다.

 

    피할 수 있는 고난

 

  하지만 우리는 '형벌의 탐식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추종자들에게 박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마태복음 10: 23에서 제자들에게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말씀하신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10: 38)라는 구절이 기록된 전후 문맥을 살펴보건대, 이것은 다음의 말과 유사하다.   "네 목숨을 손 안에 쥐고 있으라." 그 말은 이런 뜻이다. "네 자신의 올가미를 갖고 다닐 준비, 즉 어떤 것이든-죽음까지도-무릅쓸 준비를 하라. 그러나  죽음을 추구하지는 말라.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회피하라. 그래서 복음을 들어야 할 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위협하면,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있는 다른 곳으로 가라."

  15-16세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정적주의라고 알려진 신비주의 교리에  반대했다. 이 일은 옳았다. 정적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므로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은  하나님으로부터 곧바로 오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더 나아가 그러므로  우리는 삶에서 부딪히는 어떤 것에도 저항해서는 안 되며, 무엇이든  저항하지 않고 조용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훈련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고난에 저항하는 것은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일견 이는 내가 앞 장에서 말한, 하나님이 우리 삶에 보내 주시는 훈련을 위한 고난과 같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가 부딪히는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을 신뢰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그로 인해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책임을 져 주신다. 또한 우리는 그런 환경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실하시며 그것으로부터 선을 가져오시리라는 사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악에 직면해서 소극적이기를 바라지 않으시며, 깡패가 할머니를 때려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거나 두통이 나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지는 않으신다.

  내가 분주한 병원 응급실에서 일하던 시절, 배우자에게 얻어맞은 아내와 남편들이 병원에 오곤 했다. 그 가운데는 아주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는 그런 일은  경찰에 알리는 것이 관례라고 그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경찰은 피해자가 증언을  할 경우에만 도움을 줄 수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경찰에 피해 사실을 알릴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그러나 그럴 의사가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많은 여자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계속해서 도움을 거절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들은 사회 복지사가 알선해 주는 보호소에 갔다가도 다시 남편에게 돌아가 또 얻어맞곤 했다.

  정신과 의사로서 이런 부부에게  상담과 도움을 받을 기회를  주겠다고 해도, 피해자들은 협조하려 하지 않는다. 때때로 어떤 여자 그리스도인은 절망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마 제 잘못일  거예요. 남편에게 더 잘  복종해야겠지요." 남자 피해자들은 연약하게 보이는 것을 너무나 부끄러워해서 이런 일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려 하지 않았다.

  악에 대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 특히 거듭된  도발을 받고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은 악을 조장하며, 더 많은 악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경우에는 술 취한  남편의 폭력이 아이들에게까지 향해서, 그 아내의 목숨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목숨도 계속적으로 위험에 높이는 일이 있었다. 예수님은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폭력적인 사람에게서 악을 행하려는 유혹을 제거하는 형태로 선이 나타나야만 할 때도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

 

  피할 수 있는 고난과 불필요한 고난이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를 위한 진정한 고난도 있다. 관용과 정치적 자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시공간에서 겪는 위험을 잊고 지낸다. 오늘날 동유럽, 쿠바, 러시아, 중국 및 일부 이슬람 세계의 경우, 그리스도께 충실하다는 것은 많은 대가를 요한다. 우리에게는 형제  자매들이 겪는 위험이 강 건너 불처럼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관용과 자유의 정도가 역사상 유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50년 전만 해도 오늘날의 서구와  같은 신앙의 자유는 없었다. 그런데 벌써 심상치 않은 징조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는 지점을 지나쳤다. 자유라는 태양은 정점을 넘어섰으며, 언제 그 해가 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괴로움, 투옥, 순교라는 연쇄 반응을 일으켜 오늘날에도 계속 내려오고 있다. 지난 2,000년 동안 대부분의 시기에 세계 도처에 있던 이들이 그리스도로 인해 투옥과 죽음의 위험에 처했으며, 때로 수많은 무리의 손에 죽어가면서도 보좌 위에 앉으신 어린 양을 찬양했다.  물론 더 많은 자유를 누리던 때도 있었다.

  지금과 같은 풍부한 자유가 무한히 지속되리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성경적인 인간관을 제시한 종교개혁의 결과가 지연되어 나타난 것이다. 성경적인 영향력이 쇠퇴하면, 자유도 지속되지 않을 것 같다. 관용과 자유에 필요한 조건들이 이미 잠식되고 있다는 징조가 보인다. 민주주의는, 성급한 꽃샘바람이 몰아치면 시들어 버리기 쉬운, 때늦게 핀(그리스인들은 현재와 같은 민주주의 형태를 전혀 알지 못했다) 연약한 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다음과 같이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만 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투옥과 죽음을 무릅쓰고자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지만 기꺼이 위험에 직면하려 하지는 않는다. 20세기에 전체적이고 반종교적인 정권(좌파 및 우파 정권)이 세계 도처에서 발생함에 따라 그 아래 살고 있는 저명한 기독교 지도자들과 기존 기독교 단체들은 너무나도 쉽게 가이사와 협력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 다른 정권하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찌감치 그 나라에서 도망치는 사람도 있다. 반면에 비협력적인 소수는 우리가 너무도 당연히 여기는 시민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다.

  만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서 또는 좀더 최근에 중국이나 쿠바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했던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당신은 어느 편에 서겠는가? 그들의 권유는 매우 미묘하다. 아무도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인민과 국가 다음으로 적절한 위치에 그리스도를 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압력은 매우 크고,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내가 그 안에서 협력하면 그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이다." 1세기 교회도 유사한 유혹에 처해 있었다. 그와 같은 세계에서 그리스도는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셨던 것처럼,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도록 당신을 부르신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 충실한 것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에 대해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성경과 교회사의 흐름은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 나는 나팔 소리를 울려 서구 교회를 깨우고, 교회가 증거를 할 때 겪는 정상적인 상태는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기독교적 증거에 불리한 상태라는 점을 경고하고자 한다. 나는 어두움이 다시 내려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것에 대해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두렵기조차 하다. 우리는 오랜 순교의 전통을 갖고 있지만 이제는 유약하고 잘 준비되지 못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 12-13,16).

  베드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해야 할 세 가지 이유를 든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그분의 영광에 동참할 것이기 때문에 또한 기뻐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고난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표지이기 때문에 기뻐해야 한다.

  하지만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자.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고난을 '구속적'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또 우리는 다른 사람이 겪어야 할 고난을 대신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동료를 위하여 고난 받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보고 알도록 하기 위하여 고난 받는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자신의 박해자들을 돕고자 하셨기 때문에 굶주리고 피로하셨으며 조롱 당하고 비방 받으며 침 뱉음을 당하셨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

  그분의 추종자들이 동일한 이유로 동일한 적대감이나 동일한 고초를 경험할 때마다, 그들은 진실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과 더불어 동행하며 그분에게 닥친 박해가 우리에게 또한 닥친다.

  이 동참은 새로운 유대를 창출한다. 영국의 순교사 연구가인 폭스의 '순교자 열전'이나 메를르 도비뉴의 '종교개혁의 역사'를 읽어본다면, 이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으면서도 낙천적으로 기뻐하는 모습에 놀랄 것이다. 그들의 기쁨은 우리를 아연하게 한다.  우리를 캑캑 소리나 지르는 바보 천치로 전락시킬 그런 고문을 받고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했다. 우리는 그 같은 대담함과 용기를 나타내 보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점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그분과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과 가까워진다는 것은 외적 환경이 어떠하든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것이다.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과 같이,  우리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며 사물이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와 같은 환경에서는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쉬워진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경험하셨던 캄캄한 밤길을 경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길은 그리스도께만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받으신 고통 중에서  우리가 동참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된 부분을 통해 그분이 우리 가까이 계심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그런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함

 

  나는 앞에서 그리스도가 고난 받으셨을 때,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셨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분은 '많은 열매 맺기를' 기대하셨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고난을 넘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을 고대해야 한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딤후 2: 12).

  후광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을 때 보상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비열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보상을  생각하지 않고 고난 받는 것이  좀더 영적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우리가 받을 수 없을 만큼 큰 고난은 없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분이 보상해 주신다면, 우리 중에 누가 영광의 왕이 베푸시는 아량을 마다할 것인가? 또한 성경이 우리를 격려하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그와 같은 약속을 기록하고 있는데, 왜 눈앞에 약속을 두어 시험 날에 우리가 패하지 않도록 하지 않겠는가?

  성경에는 모든 형태의 신실함에 대해 보상이 약속되어 있지만 특히 고난 가운데  보이는 신실함에 대해 그렇다. 우리는 그 보상이 어떠한 형태를 취하게 될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왕관은 더 큰 책임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것이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보상이 무엇이 되든지, 그 보상을 획득하려는 생각은 품지 않고 그 외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있다면 우리는 바보들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 홍콩의 경우

 

  그러면 우리는 삶의 고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예컨대 당신이 홍콩의 중국 시민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홍콩의 지배권은 1997년에 중국 정부로 넘어간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홍콩 반환은 아직 미래의 일이지만, 자본주의가 남아 있을 동안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는 사람과 조직체가  많은 반면, 점점 두려움에 휩싸이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며, 기독교 단체와  교회도 그렇다. 이들은 중국 교회와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인가?

  나이 들어 자리를 잡은 목사의 대다수는 세계 곳곳에 있는 중국 회중의 초청에 응해 이미 홍콩을 떠났다. 이로 인해 홍콩 교계의 지도부에는 커다란 공백이 생겼고, 나이가 훨씬 젊은 목사들이 전에 없는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게 되었다. 나는 1988년 가을  연합 교회의 연례 목회자 회의에서 연설을 했는데,   자리에 참석한 목사들이 너무나 젊은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홍콩을 떠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도 많다. 돈이나 자격증 또는 초청장이 없는 이들은 형편이 어떻게 되든 꼼짝할 수도 없는 상태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떠날 것인지 머물러 있을 것인지를 물으면, 세 가지 대답 가운데 하나를 듣게 된다. 어떤 이들은 체념한 듯한 태도로 "떠날 능력이 없어요"하고 대답한다. 어떤  이들은 떠날 계획에 대해 말해  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안 갑니다. 형편이 어려워질 수도 있겠지만 여기  지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곳  홍콩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참고. 33: 4-7).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낯설고 적대적일 수도 있는 권력 아래 있는 도시라도 앞으로 계속해서 잘 되기를 (가장 깊은 의미에서) 바라는 사람들이다.

  필레몬 박사는 의사로 활동하여 경제적인 여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이를 포기하고, 홍콩의 기독교를 위한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단체 "돌파"("Breakthrough"라는 전도용 잡지를 중심으로 조직된 선교단체로서 지금은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있다-역주)를 이끌고 있다. 그는 얼마 되지 않는 봉급을 받으며 부인과 두 아들과 함께 비좁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돌파"의 회원들은, 1997년 이후에도 홍콩에 머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한편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생활을 돕고 또 한편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편, 재키 풀링어는 중국인이 아니라 영국인이다. 그녀는 언제라도 홍콩을 떠날 수 있지만, 떠날 생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녀는 이른바 성벽 도시에 본부를 둔 중요한 단체인 "성 스데반 협회"를 이끌고 있다. 그녀는 몇 년 동안 테레사 수녀와 같은 식으로 도시의 무주택자들뿐만 아니라  마약에 중독된 트라이애드(중국 비밀  결사와 폭력배) 조직원과 그 곳의 비참한 매춘부들을 돌보았다.

  성벽 도시 내 햇빛이 들지 않는 지역의 단칸방에 살면서 그녀는 몇 번이나 하나님이 트라이애드 조직원들을 오랜 죄와 마약  중독과 범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 몇 개의 구호소와 가정이 회복중인 마약 중독자들을 돌보고  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능력 가운데서 행하고 있다.

  따라서 재키도 남을 것이다. 그녀는 가난하고 얽매이고 비참한  사람들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필레몬과 재키 풀링어는 모두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며,  그 일의 대가를 현실적으로 직면해 온 이들이다. 이들은 홍콩 정부의 인정과 존중을 받고 있으며, 재키는 그뿐 아니라 경찰과 심지어 트라이애드 두목들에게도 존중받고 있다. 그러나  지금 영광이랄 수 있는 이런 것은 지난 날의 고통과  오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것이며, 영광은 정권이 바뀌면 언제라도 그 반대로 변할 수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

 

  이제 내가 조금 전에 물었던 질문, 고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답할 차례가 된 것 같다.

  두 가지 방법이 떠오른다. 첫 번째로 할 일은 이  문제를 마음속에서 가능한 한 현실적으로 대면하는 것이다. 특별히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하라. 무릎을 꿇는 것보다 그냥 앉아서 하면 더 오래 생각할 수 있고 육체적으로도  피곤함을 덜 느낄 것이다. 하나님께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을 분명히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하라.

  두 번째 단계는 우리가 이야기해  온 사람들의 처지에 서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위험과 불확실함에 그들과 함께(어쨌든 당신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같은 그리스도의 지체에 속하니까) 직면해 보라. "신실하게 반응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핑계거리를 찾을 것인가?" 자문해 보라. 두려움이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들더라도 놀라지 말라. 그것은 당신이 그 문제를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나타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경우에 자신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회의에 넘어가지는 말라. 당신은 홍콩에 살고 있지 않으며, 아직은 다른 사람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일에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형편이다.  당신은 지금 작은 일에서 시련과 훈련을 받고 있다. 자유가 계속되는  동안 당신이 작은 일에서 신실함을 보인다면,  큰 시험이 오더라도 신실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신이 처해  있는 곳이 귀중한 신실함의 훈련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곳이다.

  얼마 전 와이키키 해변에서 초급자에게 전문가 수준에 이르는 파도 타는 사람들을 지켜본 적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키보다 더 큰 길고도  값비싼 파도타기 판자 위에서 우아하게 균형을 잡으며, 감탄할 만큼 쉽고 능숙하게 아주 먼 거리를 파도를 탔다. 반면 해변에 더 가까운 바다에서는 젊은이들이 짤막하고 뭉툭한 파도타기 판자 위에서 파도에 몸을 싣고 물결을 골라 그 물결과 움직임을 맞추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두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느꼈다.  하나는 파도타기를 배우는 이상적인  방법은 젊은이가 해변 가까이에서 형편없는 파도타기 판자를 타고 작은 파도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큰 파도는 나중에 타게 된다. 다른 하나는 그런 배움에 희열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수도  없이 다시 바다로 들어가 조금이라도 더 파도타기를 하려 하겠는가? 파도 타는 사람들은 피학대 음란증 환자들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바로 앞에 있는 작은 파도와 더불어 가장 잘 배울 수 있다. 하나님께 그런 파도가 무엇인지 보여 달라고 간구하라. 작은 파도를 타고  배우는 일에 헌신하라. 그렇게 하면  새로운 기술을 익히면서 그에 따르는  희열을 경험할 수 있으며, 그와 함께 더 큰 파도를 기대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분을 온전히 따르는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토론 문제

 

  1. 그리스도께 내어드리기 어려운 당신의 '권리'는 무엇인가?  당신은 어떻게 개인적인 욕망을 포기하는가?

  2. 당신은 정적주의자들의 고난의 신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은 교회에서 이런 태도를 본 적이 있는가?

  3. 저자는 "악에 대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 특히 거듭된 도발을  받고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은 악을 조장하며, 더 많은 악을 불러들인다"고 말한다.  당신은 어떻게 악에 대한 능동적인 대응을 당신의 신앙에 통합할 수 있겠는가?

  4. 교회가 다시 핍박을 받으리라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는가?  당신의 견해의 근거를 설명해 보라. 만일 핍박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것 같은가?

  5. 저자는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기 알기 위해 폭스의  '순교자 열전'이나 '종교개혁의 역사'를 읽으라고 권한다. 이런 이야기나 그 동안 들은 기독교 순교자에 관한 이야기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6.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한다는 것은 당신에게 무슨 뜻인가?

  7. 필레몬과 재키 풀링어의 이야기를 읽으며 어떤 느낌이 들었는가?

  8. 만약 홍콩처럼, 지금부터 5년 뒤에 우리 나라가 북한에 합병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9. 당신은 고난이 따르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시작할 용의가 있는가?

 

    8. 그리스도인과 법과 박해

 

  그리스도가 지상에 계셨을 때, 그분의  존재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극단적인 헌신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극단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많은 사람이 양극단 사이를 오갔다. 때로는 예수님께 맹목적으로 열광하고 때로는 맹목적으로 적대시했다.  진정한 기독교는 언제나 이와 같은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사도 바울이 발을 들여놓은 곳마다 폭동 아니면 부흥이 있었다.

  하나님의 영이 권능으로 임하시는 곳에서마다  사람들은 반응을 보인다. 때로  그 반응은 적대적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 역시  베드로가 말한 대로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우리 위에 계신다는(벧전 4: 14) 분명한 증거이므로 기뻐하라고 명하신다. 요즈음 우리가 성령의 임재에 대한 결과로 유일하게 기대하는 반응은 다수의  회심이다. 박해도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낼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베드로는 매우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그가 언급하는  고난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것이다(벧전 4: 14).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방자함이나 우둔함으로 인해 고난받는다. 아마 당신 자신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발견한 적이 있을 것이다. 일부 완고한 열성 신도들은 공손함과 사랑에서 우러난 태도가 아니라 승리를 거두고자 하는 욕구에서 '증거'한다. 이들은 논쟁에서는 이기지만 사람은 놓치고 만다. 진정한  부흥의 역사에는 세속적인 욕심으로 (그것을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이라고 잘못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사업을 방해하는 파괴적인 결과를 낳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많다. 이런 사람들 역시 박해를 받는다. 이들은  박해를 자청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나라의 정부도 다른 나라의 정부에 대해  방자하거나 우매한 태도를 보일 수 있다. 그것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 정부와 국민은 고통을 받는다. 정부의 잘못된 열정이 '그리스도를 위한' 전쟁을 낳기도 한다. 예컨대 십자군을 생각해 보라. 이른바 모든 기독교적 시도가 그토록 분명히 비기독교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에게는 그 전쟁이 의심의 여지없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으로 보였다. 십자군의 군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통받고 죽어갔다. 그러나 이들의  고난은 잘못된 생각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이들과 이들의 지도자들은 신앙의 본질을 잘못 이해했다.

  그러나 고난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위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고난이 될 수 있다. 복음의 선포라는 문제가 걸려 있을 때에는 언제나 그렇다. 1  전에 나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말레이시아의 페낭에 도착했다. 우리는 페낭과 쿠알라  룸푸르에서 세미나를 열 예정이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이슬람교인데,   세미나의 목적은 복음 전도를 위해  교회를 구비시키는 것이었다.

  공항을 떠나 말레이시아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의 집으로 갔을 때, 우리는 즉각 심각한 질문에 맞닥뜨렸다. "당신들은 위험을 무릅쓰면서 세미나를 계속 밀고 나갈 의사가 있습니까?"

  우리가 도착한 그 때 말레이시아는 국가적인 비상 사태에 처해 있었다. 대중 집회는 금지되었고, 우리 세미나와 같은 집회는 성격이 불분명한 것이었다. 정권의 적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이 구속되었고, 그 가운데는 기독교 지도자들도 있었다. 그들이 어디에 잡혀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 때에는 아무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교인들은 두려움에 싸여 있었다.

  질문을 던진 그 지도자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진짜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우리가 고난당할 의사가 있는지를 물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들 스스로가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오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 더 좋았을 것이라고 간접적으로 말하려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그 곳은 그들의 나라였고, 그들이 직면한 위험은 우리가 처한 위험보다 훨씬 더 컸으므로 그런 추측도 무리는 아니었다. 우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들이  결정을 내리십시오. 우리가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하루이틀 정도  갇혀 있다가 이 나라에서 추방되는 정도일 거요. 그 정도라면 우리는 기꺼이 맞을 준비가 되어 있소. 그러나 당신들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을 겪을 수도 있을 거요."

  그들은 서로 돌아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리스도가 그들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대해 미리 결정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말했다. "밀고 나갑시다."

  다행히 우리는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았다. 실제로 어느 날에는 차를 탄 경찰이 우리가 건물에 드나드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하나님은 그 모임에 큰 복을 내려 주셨다.

 

    복음과 국가

 

  국가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때도 있다. 교회가 시작된 것은  로마 제국이 지중해 연안을 다스릴 때였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이사와 예수님 중 누구를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직면하는 날이 왔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가이사에  대한 경배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투옥과 고문과 죽음을 맞았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비밀로 했다.

  그 뒤로 거의 지속적으로 또 동시에 많은 장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 변함없이 신실함으로써 국가로부터 박해를 받을 것인지 아니면 신앙을 부인하고 고난을 피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에 직면했다. 최근에는  전 세계에 걸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중국, 러시아, 칠레, 알바니아, 몇몇 아프리카 국가, 이슬람 국가 그리고  기타 다른 많은 나라에서 죽음과 투옥을 당했고, 지금도 당하고 있다. 예컨대 내가 1장에서 언급한 중국의 램 목사는  그리스도를 위해 투옥되어 25년 간이나 광산에서 중노동을 했다.

  당신이 이런 어려운 시절을 맞는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상상해 보면 가슴이 두근거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서구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우리는 역사상 유례없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상황은 바뀔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존스타운의 비극(1978년 남미의 가이아나에서 주로 미국인으로 이루어진 '인민 사원'이라는 사교 집단이 진상 조사를 나온 미 하원 의원을 살해하고 900여 명이 집단 자살한 사건을 말함-역주) 이후, 여러 번에 걸친 작은 법률 개정을 통해 정부의 태도는 종교의 자유를 위한 감시와 보호에서, 대중에게 해로운  종교 단체나 사교 집단으로부터 전체 사회를 보호하는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지금까지는 이런 태도 변화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자유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미친 바가 거의 없지만, 머지않아 종교적인 관용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교회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교 저술가들은 사교 집단이라는 말을 과거의  극단적인 기독교 집단이나 거의 모든  초창기 단계의 부흥을 가리키는 말로  쓰는 경우가 있다. 이러다가는 하나님이 기르신 단체에 위험한 사교 집단이라는 딱지가 붙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 신앙 자체를 금지하는 나라도 있다. 좀더 일반적인 경우는 '남을 개종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은 침묵하는  기독교를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서양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구체적인(그러나 종종 논란의 여지가 많은) 요건에 집착하여 투옥되는 일이 계속 있었다. 예를 들면 반전주의, 노동 조합 가입 거부, 민권이나 핵 무기 문제로 인한 시위 등을 들  수 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은 낙태 시술소의 출입을 막은 죄로 구속당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낙태 반대론자와 찬성론자의 싸움이 어떻게 될지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미국과 캐나다의 정부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이라고 믿는 (옳든 그르든) 일을 하다가 법을 어길 경우 언제라도 이들을 투옥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 그리스도인이 개입하게 되는 모든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어떻게 정의하든, 우리가 언제나  치러야 하는 대가를 강조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원리만을 다루도록 하겠다.

 

    신앙과 거짓말의 세력

 

  언제나 국가에 복종해야 한다고 보는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민주주의 체제에서라도 국가가 잘못이라는 판단이 들면 망설임 없이 불복종해야 한다고 보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는가?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13: 1-2). 바울은, 잔인한 일들을 많이 한 부패한 권력이 십자가 형벌을 실시하고 노예 제도를 승인하던 시기에 이 글을 썼다. 그래도 그들이 하나님의 임명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일종의 긴장이 있다. 요한은 국가의 배후에 있는 사단의 악한 손길을 뚜렷이 보고 있다. 요한과 베드로는 국가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서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까, 너희들에게 순종할까?"(내 표현이다!) 그들의 대답은 그리스도인도 때로는 국가에 저항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바울의 원리는 일반적인 법칙을 제시한다.  권세는 비록 도덕적으로 흠이  있는 권세라고 할지라도 선하다. 만일 사단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무정부 상태와 무법 천지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자비로써 권세를 지지하시는 것은 가장  악하고 독재적인 정부라 하더라도 무법 천지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우리는 세속의 권세에 복종한다.

  그러나 요한은 우리에게, 언제나 하나님께 복종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며, 왜 일어날 것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우리가 보았듯이 국가에 복종함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되는 때가 올 것이다. 요한과 바울 사이에 의견의 불일치는 없다. 요한은 단지  문제의 이면을 보고 있을 뿐이다. 요한은 국가 권력의 배후에는  이 세상의 지배자인 사단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 세상의 지배자로서 사단은 인간의  정부를 조정하여 하나님을 대항하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도록 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전진시켜  나갈 때는 더욱 그럴 것이다.

  요한이 사용하고 있는 표상은 짐승이다. 짐승은 요한계시록에서 인간의 정치 권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짐승은 '바다에서' 솟아 나오는데( 13: 1), 바다는 인간 대중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인간의 정치 권력은 대중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것으로 여겨진다. 짐승은 면류관을 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 개인데, 이것은 그  짐승의 사단적인 성격을 가리킨다. 또한 용(요한이 요한계시록 12: 1-12에서 분명히 사단이라고 밝히고 있는)은 짐승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준다"( 13: 2).

  이것이 성경에서 긴장 가운데 주어진 정부와 국가의 두 측면이다. 두 가지가 다 옳다.  우리는 바울과 요한의 말을 다같이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정치 권력이 사단적이라고 해도 그것이 존재하도록 허용하신다. 국가가 하나님 나라의 전진에 반대할 경우에 한해서는 때로 시민의 불복종이 요청되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러해야 할 것인가? 그 두 가지 원리를 현실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언제 가이사에게 절하고, 언제 짐승에 저항할 것인가?

  이런 긴장에 관계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신비다.  신문에 나는 모든 사건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단의 능력이 다 개입되어 있다. 역사는 우리가 느낄 수 없는  '천상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반영한다. 우리는  도대체 그런 전투가 있다는  것에 어리둥절해 한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는 무한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재로부터 나온다. 사단은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사단의 능력이라는 것도  크기는 하지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어째서 하나님은 사단의  무리를 그냥 쓸어 없애지  않으시는 것일까? 사단과는 달리 하나님은 진지하시고 어느 곳에나 편재해 계신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가?

  하나님의 거룩하심 가운데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은 그분의 진실성이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진리의 원천이 되신다. 사단이 우리를 지배할 권세를 얻게 된 것은 우리가 그의 거짓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그것을 믿어 주기 전에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렇게 사단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인류 역사의 시초에 우리는 사단의 거짓말을 믿었고, 그 믿음의 끔찍한 결과로  사단의 세력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대로 만드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여, 우리가 사단의 거짓말을  잘못 믿은 그 결과를 당하도록 허용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행위의 결과를 당하고, 우리가 선택한 길을  걷도록 놓아두셨다.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배운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큰 교훈을 배워  왔는가! 그 자체로는 능력이  없는 그것(거짓말)은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무서운 능력을 지니게 되는 것을 이제 알 수 있다.

  우리가 우리 행위의 결과를 당해야  한다고 결정하시면서도 하나님은 세상을  통치하기를 멈추지 않으셨다. 또한 사단이 함부로 악의를 행사하도록 세상을 버려 두지도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주권은 이 세상에 대한  사단의 능력에 엄격한 한계를 그어 놓으셨다. 사단의 능력은 거짓말과 속임에 있으므로, 하나님은 진리를 단계적으로 점점 더 많이 계시하심으로써 인간의 역사에서 사단의 세력을 막아  오셨다.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진리를 믿고 선포함으로써 우리를 통해  사단을 이기시는 것이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 8: 44)이자 '나와서...백성...을 미혹할' ( 20:  8)으로, 그 주요한 힘은 이런 능력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거짓과 미혹이 통하는 곳마다  사단의 지배력은 한층 강해진다. 진리가 드러나고, 이를 믿고 실천하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한다. 진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에서 뚜렷해진다. 이를  붙든다면, 우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다( 8:32).

  의대생 시절, 나는 남자 기숙사에서 목욕을  하곤 했다. 그 낡은 건물 지하실에는  우리가 즐겨 이용하던, 매우 큰 구식 목욕통이 놓여 있었다. 나는 보통 김이 오르는 물을 통에 채우고 목욕을 즐겼는데, 하루는 마음이 몹시 답답하고 편치 않았다.

  나는 하나님이, 왜 내가 계속해서 짓는 한 특정한 죄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넘어지고,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해하고, 또 규칙적으로  그 죄를 반복하며 몹시 좌절하곤 했다. 특별 집회에 참석하기도 했고,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애도 썼고, 신뢰도 했으며, 자신에게 말해 보기도 했다. 나는 당시 기독교의 모든 방법을 다 써 보았다. 심지어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지' 물어  보기 위해 어느 성경 교사를 찾아 스위스까지 가 보기도 했다. 그 때 진리는 (그게 진리였다면) 나를 자유케 하지 못했다.

  나는 '더 애쓸 것 뭐 있어?' 이렇게 생각하며 근심을 풀어 버리려 목욕통 안에서 몸을  편안히 기대었다. 그 때 갑자기 이런 말이  떠올랐다. "너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느니라."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일어나 앉아 자세를 바로 했다. "정말 성경에 있는 말씀인가?"

  나는 목욕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새로운 조급함에 사로잡힌 나는 몸을 씻지도 않고, 큰 목욕 수건을 몸에 감고 서둘러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재빨리  구식 가스 난로를 켜고 책장에서 성경을 꺼냈다.

  내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내가 죽어? 로마서에서 그  구절을 찾았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6: 2,8) 나는 그 구절을 읽고 또 읽었다. 갑자기 내가 있지도 않은 감옥 안에 갇혀서 오락가락하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혹 감옥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단지 내가 거짓말을 믿었기 때문에 존재했던 것이다. 감옥은 내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었지,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진리가 쏟아져 들어오는 밝은 빛처럼 나를 휩쓸고 지나갔고, 내가 갇혀 있던 감옥의 벽이 사라지고 탁 트인 언덕을 걷고 있음을(사실 그 동안도 계속 그렇게 걷고 있었지만) 깨달았다. 나는 내가 자유롭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감옥은 현실이 아니었다. 언덕이 현실이었다. 이제 그 언덕 전체가 내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나는 그 때와 그 뒤로 자유로웠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 때 바로 성령님이  내게 그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신 것이다. 그 말씀은 성령의 능력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내게 왔다. 성령님이 그 말씀을  내게 주셨으므로, 그 말씀은 단지 내 머리속에만 떠오른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깊은 곳을 꿰뚫었던 것이다.

  우리는 진리보다 거짓말에 영향을 받기가 더 쉽다. 머리로는  어떤 원리를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그 능력은 놓치는 수가 있다. 진리는 거짓말보다 강력하다. 사람들이 그 진리를 믿지 않더라도 진리의 힘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적이라 하더라도 진리의 진술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진리는 인격이신 그리스도이다. 그분은 지금 이  시대에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서 우리에게 오신다.

  그러므로 짐승과 싸우는 우리의 주요한 무기는 언제나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힘입어 성경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사회적인 문제를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그 능력 가운데 복음을 선포하는 것보다 복음의 사회적인 의의를 실현하는데 더  관심을 쏟는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진전시키지 못하고 사회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문제는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만 갈 것이다. 역사는 이 점을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사단의 능력은 정말 매우 제한되어 있다. 사단은 우리가 거짓을 믿는 만큼의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사회에 대해서도, 정부나 국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거짓을 믿을 때, 우리는 사단이 강제로는 차지할 수 없는 능력을 그에게 넘겨 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거짓을 계속 믿어 왔다. 서구의 각국  정부는 점점 더 비성경적인 가치관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다.

 

    변모하는 상황

 

  어떤 사상이(요즘에는 일반적으로 자유주의적이라고 불리지만 어떤 특정한 꼬리표를 붙일 수 없는) 사회에 스며들면서, 각국 정부의 정책은 변해 왔다.

  우리는 더 이상 기독교 사회에서 살고 있지 않다. 사실상 지금껏 그랬던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분명하게 통찰해야  한다. 무엇이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이며 무엇이 천사의 무리를 마음속에 그리며 순교자 놀음을 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께 대한 비겁한 불충성이라는 것도 있다. 그 차이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지금 당장 시민의 불복종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지는 않다 해도 이 질문에는  답해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두 가지 충성, 곧 하나님께 대한 주된 충성심과 가이사에 대한 부차적인 충성심을 갖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러나 이 질문은 표현이 잘못되었다. 예수님께 헌신한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충성심을 갖는 것이다. 충성은 언제나 미덕이며, 국가에 대한 충성은 예수님께 대한 충성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다. 나는 예수님이 국가에 충실하신 것과 꼭 같은 방식으로 국가에 충실할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 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국가의 법에 복종해야 한다. 하지만  법에 반대하거나 혹은 충성심 때문에 법에 불복종까지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언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이제 우리는 적어도 무엇이 중요한지는 알게 되었다. 우리가 지금  이 곳에 남아 있는 이유가 그리스도를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전진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또 우리의 임무가 무엇보다 진리로 사단의 거짓말을 이기는 것이라면, 분명히 예수  안에서 성경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 우리에게 최우선되는 일이다. 복음의 사회적인 의미는 분명하다. 그러나 사단의  거짓말에 눈이 먼 사회에서 그 의미를 실현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전에는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병을 치유하시고 먹이시고 가르치시는 일을 동시에 하셨다. 한 가지 일은 다른 일을 강화한다. 그러나 사회적 고통을 덜어 주려는 우리의 노력은 현실적으로 사회가 사단의 거짓말이라는 암흑에서 벗어나는 정도에 따라 그만큼의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다. 사회 운동 자체는 결코 사람들을 깨우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진리의 선포가 언제나 우리의 가장 중요한 초점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도움을 베푸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유일한 진리이신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며, 예수님은 분명히 소개되어 마땅한 분이시다.

  우리가 행해도 박해받지 않을 만한 사회 활동이 많이 있지만, 예수님을 전파하는 일이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성전 마당에서 앉은뱅이 거지를 고쳐  주고 예수님을 전파한 뒤 공회에 끌려 나온 베드로와 요한은 법을 어긴 일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다. 안나스, 가야바, 기타 지배 귀족 인사들과 같은 고관 대작을 포함한 두려운 회중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을 전파하지 말라는 명령에 직면한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4: 19-20). 경고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교회 전체가 권세 잡은 자들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건물이 흔들릴 정도로 성령을 크게 부어 주심으로써 이들에게 응답하셨다(  4: 31). 분명 그들의 저항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여기서 문제는 분명하다. 그들은 지상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다( 28: 17-20). 그리스도의 명령은 분명했고, 또한 명백히 법과 어긋났다. 시민의 불복종이라는 문제보다 실수하기 쉬운 분야는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인 동시에 시민이다.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건물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다른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았다. 우리는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고, 헐벗은 자를 입히며, 배고픈 자를 먹이고, 약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는 때로 강제력을 동반하기도 한 잘못된 비극적 열정의 사례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 문제들은, 되돌아보는 지금 이해하기 쉽지만 당시의 주동자들은 완전한 확신 가운데 있었다. 혁명은 정말 옳은가? 라틴 아메리카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질문을 자주 던져 왔다. 영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올리버 크롬웰의 시도는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었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요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폭력은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강제력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으로는 한 정부를 타도하고 다른 정부를 세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렇게 세운 정부도 결국에는 이전의 정부와 별로 다를 바 없음이 드러날 것이다. 차르 치하보다 스탈린 치하에서 정말 더 많은 자유가 있었던가? 어떤 기치 아래서 행해지든 독재는 변함없는 독재다.

  그렇다면 복음의 선포라는 임무는 절대로 경시되어서는 안 된다.  비진리가 여전히 이 세상을 어둠 가운데 붙들고 있다. 여전히 짐승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와 제자들이 가르친 내용을 선포하는 것은 변함없이 우리의 최고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이 사명을 위협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존재 이유를 위협하는 것이다. 교회 회중으로 결성된 특별위원회가 다른 관심사를 논의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지만, 이런 활동도 그 중요성에서 지상 명령을 대치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사회 내의 악은 두 차원에서 싸울 수 있다.  한 가지 차원은 명백하다. 우리는 마약 중독자를 구하고, 마약 거래를 최소화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 명백한 악은 정면으로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악의 배후에는 하늘의 권세자들과 능력의 지배권이 있다. 이런 문제는 민간 사회 활동이나 새로운 입법만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악을 이기는 데는 사회 활동보다는 영적인 전쟁(우리는 이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교회의 진정한 전문성은 어느 곳에서 발휘되어야 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천상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다!

  그러나 이 장에서 내가 진정 염두에 둔 목표는 우리가 마음속으로 국가의 박해라는 문제를 대면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당할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인은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스도인은 그릇된 행위로 처벌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인이 피할 수 있는 박해는 피해야 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물론  어떤 위험은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적극적이고 생동하는 증거가 활기 없는 증거보다 낫다는 입장을 취해야만 한다.

  여러 해 전에 동유럽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내가 만나서 기독교 문서로 도와주었던 그리스도인들 간의 사랑에 크게 감동받았다. 그들의 활동  가운데 일부는 비밀리에 수행되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활동(예를 들자면,  세례 같은)을 수행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가장 감동시켰던 것은 오후 시간을 이용해 기독교 문서를 배부하곤 했던 나이 든 부인들의 용기였다. 물론 이것은 금지된 일이었다. 그들은 발각되지 않기 위하여 시내 버스에  올라가 숙달된 눈으로 승객들을 재빨리  조사해 보고, 문서를 나눠주며, 간단하게 공개적으로 전도한 후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간혹 잡히기도 하고 일정 기간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그 흥미진진함이 우리에게는 '술래잡기' 본능을 자극시킬는지 모르지만 그 부인들에게  그것은 놀이가 아니라 진지한  생활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곤란당할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재치 있게 행했다(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교회 또는 그 활동의 일부가 비밀리에 수행될 때, 윤리의 문제가 고개를 든다.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인쇄 일시를 혁명 전 시대의 날짜로 속여서 문서를 더 많이 인쇄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요청해 왔을 때, 나는 어떻게 했어야  했는가?(나는 그 때 응하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면 그렇게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권세에 복종하라는 바울과 베드로의  권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13: 1-7, 벧전 2:13-17)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떠한 지상 통치자도 간섭할 권리가 없는 분명한 명령이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한다. 그와 같은 조건하에서 권위를 거부할 용기와 잡히는 것을 피할 지혜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복이 있다.

  그런데 당신이 잡힌다면, 또 재판을 받는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체포되었을 때,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은 극단적인 두려움, 심지어 공포를  느낀다. 이는 정상적이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 회의와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간수들은 그리스도인 죄수들의 두려움과 회의를 참으로 교묘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문하게 될 것이다. "내가 옳았는가? 혹시 너무 교만했던 것은 아닌가? 주님은 내게 어떤 교훈을 주시려는 것인가? 가족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은 아닌가? 아내와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부모님이 괴로움을 당하시지는 않을까?" 감옥 안에서는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고난 가운데도 확고해야 하는 때는 바로  체포된 후이다. 그는 결코 중단하지 말고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다음 두 가지를 행해야 한다. 첫째, 거짓된  죄의식이나 수치심에 사로잡히지 말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해야 한다(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송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을 때 한밤중에 지진이 일어났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발 감옥에는 가지 않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옥에 가야 한다면 그릇된 수치심과 죄의식은 발아래  짓밟아 버리라. 그리고 고개를 높이 들라. 웃으라. 간수를 예의 바르게 대하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라.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당신의 운명을 신실한 창조주께 기꺼이 내맡기는 것이다(벧전 4: 19). 그분은 감옥 문을 여시되  고대와 현대에서 똑같이 반복해서 그리하신다.  때로 그분이 자기 종들로 하여금 갇혀 있도록 하시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다. 루스드라의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던 바울 역시 로마에서는 풀려나지 않았던  듯 하다. 하지만 로마에서 여러 서신이 쓰였다. 뿐만 아니라  존 번연의 위대한 작품도 감옥에서 쓰였다.  그것은 보통 성령님이 이런 상황에 놓인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감옥에 갇혀 있던 기간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내게 말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기독교 순교자들 역시 그들의 생생한 기쁨으로 그들을 지켜보는 자들을 언제나 놀라게 했다.

  그러므로 죽음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의 영혼을 그분께 맡기라. 주위의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며 의아하게 여길 방법으로  당신은 높이 들리며 권능을 받게 될 것이다.

 

    토론 문제

 

  1. 당신은 성령님이 어떤 식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보았는가?

  2.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실수 때문에 고난받는 그리스도인을 본 적이 있는가?

  3. 신앙으로 인해 (국내외에서) 정부의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의 사례를 아는가?

  4. 우리 정부가 기독교에 대해 더욱 관용적이지 않은 태도가 되어 가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경우인가?

  5. 그리스도인은 언제 국가에 복종해야 하며 언제 불복종해야  하는가? 각각에 대한 예를 찾아보라.

  6. 사단은 어떻게 세상에서 세력을 얻는가? 하나님은 어떻게 사단을 이기시는가?

  7. 죄를 극복하기 위해 사단과 전쟁을 벌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죄의 세력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8. 복음 선포가 사회 활동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는가? 그 이유를 설명하라. 당신은 생활 속에서 이 둘 사이의 긴장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9. 당신은 어떤 때 시민의 불복종 행동에 참여할 것인가(혹은 참여했는가)? 그리스도인은 언제 강제력을 사용해야 하며 언제 전쟁에 가담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겠는가?

  10.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양한 바울의 이야기를 읽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 그 일은 찬양에 대한 당신의 이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9. 믿음의 좁은 길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이 확실히 일어날 일보다 더 두려운  경우가 많다. 나는 어제 호숫가를 걸으며 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내게 그 전날 교회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호소하는 내용의 설교를 들었노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경건하고 매우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매우 고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요구하실 일을 마주 대할 자신이 없네. 머리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걸 알지만, 실감이 나질 않아. 두려운 마음이 드네."

  그는 그 모든 전통적인 대답(예컨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시지"  혹은 "하나님은 네 두려움을 이해하고 계셔")을 다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두려움과 의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머리로는 확신하고 있었으나,  마음으로는 고민 가운데 있었다. 그보다 더 안 된 것은, 그는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꾸짖으면서, 자신이 변화할 힘도, 하나님에 의해 변화될 힘도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정직하고, 더 현실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헌신에 직면하기는 더 어려운 법인데, 그는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있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는,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헌신하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가 직면했던 그런 가능성에 직면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또 그와 똑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모두 자기 나름의 괴로운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 가운데 십자가의 길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 상정하기로 한다.

  몇 해 전에 아내와 나는 두려움에 빠진 적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 이전에 요한계시록 12: 1-12을 기회가 되는대로 여러 번 강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게 불어넣어 주셨다. 이 구절은 연약하기 그지없는 그리스도인이라도 사단을 이길 수  있는 세 가지 중요한 방법을  다루고 있는데, 내가 이 구절을 설명할 때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감동과 큰 도움을 받았다.  나는 졸저 '믿음의 싸움'에서 "사단의 지옥 권세"라는  제목을 붙인 한 장의 대부분을  이 구절에 할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영적인 전투에 대해 설교하고 글을 쓰면서, 바로 나 자신과 가족을 그 영적인 전투에 끌어넣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내가 이 구절을 가지고 설교할 때마다, 보통 재난이나 사고와  같은 형태로 크고 작은 일이 아내나 아이들에게 일어나곤 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우연이  잇달아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우리 부부는 이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분명히 깨달았다. 사건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갔다. 아내와 나는 이 일에 대해 기도하고 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분명히 느꼈다.

  우리는, 사단이 '삼키는 용'이요 '우는 사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런 능력을 지닌 사단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우리 목숨을 죽기까지 사랑하지 않는 것'임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뒤로 물러서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자가 실제로 삼키는 경우보다 그저 울기만 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단의 첫 번째 목적은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다. 사단은 우리를 위협해 뒤로 물러서게 하고자 하며, 사단은 그 때  분명 내가 그 특정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공격은 계속되었다. 몇 달 뒤에  나는 영국 런던의 성 마가렛  교회에서 설교하기로 되어 있었다. 교회는 소련이나 그 위성 국가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학생들로 들어찼다. 그들은 기독교 의료 협회가 주최한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영국에 온 학생들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강력하게 사용하실 감동적인 기회였다.

  그러나 내가 런던에서 설교하던 그 날 밤, 캐나다에 있는 아내는 위중한 심장병으로 근처 병원의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생명이 위독했다. 그 다음날 아침 맏아들로부터 온  전화를 받은 나는 아내의 상태가 정확히 어떤지 알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내의 상태가 심각하기는 했지만, 회의에는 계속  참가하면서 전화로 연락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하루나 이틀쯤 뒤에는 아내와 직접  통화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무슨 일이  있든 계속 압력에 굴복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고통을 당한 마지막 일이었다.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요한계시록 12장을 설교하더라도 아무런 공격이 뒤따르지 않았다. 나는 그 구절을 여러 번 강해했다. 흥미롭게도 아내의 심장병은 4년 뒤에 신령하게 치유를 받았다.

  어렵게 배운 교훈이지만, 나는 위협이 사단의 특권인만큼 내 특권은 그 두려움의 문을 당당히 통과하는 것임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실제로 나는 진짜 전쟁에서 싸우기도 하고, 그러다보면 진짜 피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소명을 확신하고  두려움의 문을 당당히 통과한다면 대부분의 두려움은 근거가 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렇다면 헌신에 직면하기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두려움의 문 앞에서 용기를 내어 당당하게 통과하도록 해야 한다.

 

    믿음의 발걸음

 

  두려움과 의심은 서로 붙어다닌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적으로는 성경적인 대답을 모두 알고 있다. 우리는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다른 사람을 상담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불신 때문에 의심이 계속된다. 골프의 상투어를  사용하자면, 의심은 평균 타수다.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에 직면할 때 의심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정상이다. 내가 영적인 문제에 경험이 많을지  몰라도, 나 역시 여전히 의심의 공격을  받는다.

  삶은 그 자체가 모험이다. 인생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마다 우리는 얼마간의 위험과 그에 따른 두려움에 직면한다. 믿음이  아니라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알겠는가? 내가 공부해 온 과정을 제대로 골랐는지, 직업을 제대로 골라 지원했는지 어떻게 미리 확신할 수 있겠는가? 내가 '적합한' 사람과 결혼하게 되리라고 어떻게 미리 확신할 수 있겠는가? 믿음이 아니라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미리 알겠는가? 지금 꼭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일에는 무언가에 대한 신뢰가 개입되어 있다. 그것이, 모든 것이 괜찮게 풀릴 것이라는 희미한 희망이나 신뢰라 할지라도.

  사업가들도 모험을 한다. 이들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뿐만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세심히 연구하지만, 모든 사실을 알지는 못한 채 위험 부담을 무릅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결코 모든 사실을 다 알 수 없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위험 부담이 개재되는 것이다.

  물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이들의 태도는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빼면 신뢰의 태도라 하기 힘들다. 이들은 다른 가능성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억제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문제를 다루는 한 가지 방법이 된다.

  어젯밤 나는 캐나다 스노우버드의 편대장이 텔레비전에서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깜짝 놀랄 만한 대단한 편대 비행 기술을 보여 주는 비행단의 대장이다. 이런 비행 편대의 안전율은 높지만, 일단 사고가 일어났다 하면 그것은 매우 끔찍하다.

  작달만한 소화전같이 생긴 스노우버드의 대장은 반짝이는 눈과 느긋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었다. 인터뷰하는 사람은 비행 대장으로서의  책임에 대해 질문을 던졌고, 그는  자기가 편대를 이끌면서 판단 착오를 일으킬 경우 나머지 비행기에 어떤 무서운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지 설명했다.

  "실수를 하면 어떻게 되지요?" 인터뷰하는 사람이 물었다.

  "우리는 실수 같은 거 안 합니다. 실수를 감당할 여지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한다면요?"

  "전 그런 생각이 절대로 제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도록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비행을 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행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그러나 믿음은 어떤  생각이 절대로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도록 하는' 것과는 다르다. 믿음은 인간적인 계산에 따라 어떤 가능성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확신을 줄 정도로 신뢰할 수 있는 '그분'을 아는 것이다. 스노우버드의 다른 조종사들은, 자기 자신의 기술과 집중력과 판단력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대장과 이런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자면, 많은 교회와 기독교 단체가 재정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사실 이들은 기금을 모금하는 자기들의 재주를 신뢰하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첫 헌신이든 재헌신이든 헌신에 직면해 있는 당신과 같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이, 때로는 정말 믿음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곳인 넓은 바다로 배를 띄우는 것이라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앞으로 폭풍이 불어올지도 모르는 데다가 당신의 배는 작다.

  우리는 어떻게 믿음을 얻는가? 믿음은 얼마나 필요한가?

  헌신의 삶에는 극히 작은 믿음이 필요할 뿐이다. 순종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믿음이면 충분하다. 마리아의 언니인 마르다는 나사로가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에 극히 작은 믿음을 가졌던 것 같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본문은 그렇게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분명 그래도 마르다는 어느 정도의 믿음은 있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11: 21-22).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나사로가 다시 살리라고 이르셨고,  마르다의 믿음은 금방 실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11: 24).

  무덤가에서 시험은 더욱 어려워진다. 예수님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하셨고, 마르다는 금방 두려움을 느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11: 39). 마르다의 믿음은 얼마만한 것이었던가? 완벽한  믿음이었던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르다에게는 돌을 옮겨  놓을 정도의 믿음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당신의 믿음이 작을지는 몰라도, 한 걸음도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작지는 않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그 한 걸음뿐이다.

  믿음은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는 고무줄과 같은 것이 아니라, 단련을 통해 굵어지는 근육과 같은 것이다. 믿음의 발걸음은 하나님이 근육을 단련시키시는 발걸음으로서, 그분은 근육의 각 단계마다 조금 힘에 부칠 정도의 연습량을 주심으로써 근육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또는 다른 비유로 말하자면, 믿음을 익히는 것은 파도타기를 익히는 것과 같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당신은 작은 파도타기 판자를  빌려 해안 가까운 쪽에서 판자  위에 올라 연습을 할 정도의 믿음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선 요구하시는 것은 그 정도가 전부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큰 파도가 있는 곳으로 데려 가실 때에는,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그 큰 파도를 타고 계시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친밀함

 

  스노우버드의 조종사들은 대장을 친밀하게 알고 있다. 그들은 그에게  여러 번 비행 전후의 지시를 받았다. 그들은 그와 함께 수많은 시간을 비행했고, 조종사로서 그의 놀라운 기술을 보고 감탄했다. 그들은 그가 실수하는 것을 보지 못했고, 그의 자신감과 느긋한 침착함을 익히 알고 있으며, 그의 정확한 판단력에 놀라워했다.

  그들은 일과 시간뿐 아니라 일과가 끝난 이후에도 그의 탁 트이고 따뜻한 성품을 지켜보며 그를 더 알게 되었다. 그에 대한 존경과 신뢰는 그들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더욱 커져 갔다. 그들이 더 친밀해질수록 더욱 자신 있게 비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편대  비행에서 핵심적이다. 까다롭고 위험한 모든 비행 동작마다 그들의  눈은 계기나 지평선이 아닌 대장에게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 순간에 그들은 오로지 자기 비행기와 대장 비행기의 정확한 상대적인 위치만을 생각해야 한다. 전체 비행대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것은 대장이다. 그들은 대장이 이미 산출해 놓은 결과를 자기들  스스로 계산하느라고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저 대장의 위치에 따라 자신의 위치를 맞추기만 하면 된다.

  조종사들은 목숨을 걸고 대장을 신뢰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대장을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당신이나 내가 그 비행단의 조종사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뢰하기보다 그를-실수의 가능성이 있는 인간을-신뢰하기가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단지 그가 눈앞에 있기 때문에, 살아서 가까이 사귈 수 있기  때문이며, 반면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무리 그분에 대해 많이 읽거나  들었다 해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좀 함부로 말한 듯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을 속이고 있다. 청산 유수처럼 성경을 인용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자랑하다가도, 그분이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위험한 비행 동작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면 공포에 질리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더 신뢰하기가 쉽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친밀함을 나누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신뢰는 그런 친밀함에서 나온다. 우리는 스노우버드의 조종사들이 자기 대장을 아는 것보다 더 친밀하게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인간에게 가능한 가장 큰 친밀함으로 그리스도를 알 수 있도록, 또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를 알 수 있도록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셨다. 우리는 그 목적을 위해 지음받았다.

  우리는 어떤 인간 관계도 만족시켜 줄 수 없는 그런 친밀함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태어났다. 이 갈망은 모든 인간의 가슴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으며, 인생을 겪으며 알게 된 두려움과 상처에 덮여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갈망은 변함없이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타고 있다. 이 친밀함을 기를 수 있는 한 가지 길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고 성경을 묵상하는 것이다. 당신의 배움을 도와줄 수 있는 책이 많이 있다. 어떤 책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나는 조이스 허기트의 '하나님께 귀기울이는 기쁨'과 빌 하이블즈의  '너무 바빠서 기도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를 권하고자 한다. 또 다른 방법은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작은 파도에서부터 먼저 신뢰를 배우는 것이다. 그분은 언제나 바로 그런 방법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그러나 헌신의 걸음, 십자가를 지는 걸음의  첫 발자국을 떼는 것이 가장 두려울  것이다.

나는 당신이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그분이  당신을 귀중한 존재로서 진정으로 받아들여  줄 것이라고 망설임 없이 말하고자 한다. 그분은 당신에게 언약을 제시하시며, 당신이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언약은 맺어진 것이다.  이제 십자가의 영상을 멍에의 영상으로 바꿀 차례다. 예수님은 이같이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명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11: 28-30). 누구를 부르고 계시는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다. 무엇을 주겠다고 하시는가? 멍에, 쉽게 지고 갈 수 있으며 우리를 그분과 함께 묶어 주는 가벼운 멍에이다. 그 목적은 무엇인가? 그 목적은 우리가 배우는 것이다. 그분과 함께 동행하기를 배우는 것이다. 혹은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분과 함께 파도타기 또는 비행을 배우는 것이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배움은 과정이라는 것이다. 배움은 일단 시작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된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초대하신다. 이 초대는 과연 신뢰할 만한가? 그분은 답하신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24: 35).

 

    토론 문제

 

  1. 하나님이 당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하도록  부르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두려워해 본 일이 있는가? 하나님이 실제로 그 일을 하도록 부르셨는가? 어떻게 되었는가?

  2. 우리의 의심의 뿌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3.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위험 부담이 개재된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는가?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 보라.

  4. 당신은 믿음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헌신에는 얼마만큼의 믿음이 요구되는가?

  5. 스노우버드의 조종사들이 대장을 신뢰하듯이 그렇게  당신이 신뢰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리스도보다 그 사람을 신뢰하는 것이 더 쉬운가? 이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

  6. 어떻게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를 높일 수 있겠는가?

  7. 그리스도께 더욱 헌신하면서 당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가?

 

    10. 첫걸음과 마지막 걸음

 

  우리는 많은 것을 함께 이야기했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는 어느 정도 자신의 생각의 방향을 재정립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기를 바란다. 당신의 삶과 이해의  어떤 측면을 재평가해 보았을 수도 있다. 나는 십자가의 길, 헌신의 길이 바로 자유로 향하는  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려 애썼다. 그것은 고난이 따르기는 해도 기쁨이 충만한 길이며, 분쟁이 개재되기는 해도 평안이 충만한 길이며, 의심과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자라가는 신뢰가 충만한 길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친밀함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재평가, 방향 재설정, 자유-나는 또한 당신이 첫발을 내디딜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려 했다. 왜냐하면 헌신이란 하나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다. 이 시점에서 그 첫걸음을 구성하는 특별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하나님은 그 첫걸음이 무엇인지 아시며, 그것을 당신에게 보이기 원하신다. 만약 아직 당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헌신한 적이 없다면, 당신의 첫걸음은 무릎을 꿇고 헌신하는 것이 될 것이다.

  아브람의 경우에 그 첫걸음은 하란이라는 조그마한 갈대아 부락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 데라는 오래 전에 순례 여정을 끝내지 못하고 거기에 정착했다. 온 가족은 가나안을 향해 출발했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그 손자  ...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11: 31-32). 결국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죽었을 때 그들은 아직 거기에 있었다. 아브람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시신 앞에서 울었을 것이다. 그는 사래에게 수태를 시키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에 굴욕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자기 조카 롯에 대한 책임 때문에 근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슬픔과 좌절과 책임 가운데 있던 아브람에게 자신이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하신다( 12: 1). 슬픔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하란에는 위안이  있었다. 그 가족은 친구들을 사귀었을 뿐만 아니라 대가족 관계 안에서 서로 위안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그 땅, 그 생활 방식에 익숙했을 것이며 그 사회에서 인정받는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면 희생이 따라야 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유해를  뒤에 남겨 두고 가야 했을 것이며, 롯이 잘 되도록 돌보아 주어야 하는 책임은 더 커졌을 것이다. 자기 짐승들을  먹일 새로운 초장을 찾아야 했고, 어쩌면 유랑 부족의 생활 양식과 관습을 다시 배워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철저한 헌신의 발걸음을 내디디라는 부르심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발걸음은 커다란 대가를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희생적인 헌신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그가 내디딘 발걸음을 희생적인 순종의 예로 볼 것인가, 믿음의 모험으로 볼 것인가? 왜냐하면 그에게 이런 말씀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12: 2-3).

  이것을 다른 식으로 살펴보자. 하란에서의 삶은 별로 두드러지지 않았고 궁극적으로는 망각되어 버릴 삶이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영원한 운명이 약속되어 있었다. 소유물을 꾸려 가족들을 데리고 사막을 건너가는 아브람은 전무후무한 전형적인 믿음의 삶의 첫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3,000년 간 서구 세계를 바꿔 놓을 것이며, 그의 자손들을 통해 다른 어느 사람보다 현대 음악, 연극, 과학, 은행업 등에 더 많이 기여하도록  , 그리고 그 똑같은 자손들이 종말에는 세계사의 중심 무대에 남아 있도록 할 역사의 흐름을 가동시키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통해서 왕과 선지자들뿐 아니라 세상의 구세주도 나올 것이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나기로 한 결정이 인류 역사에 끼친 막대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아브람은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이나 로트실트(독일의 은행가로 대금융 자본가의 가계를 창건-편집자 주)의 은행업 또는 2,000년의 교회사를, 이해는 고사하고 예측할  수 있는 수단조차 없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과 앞으로의 운명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떠나겠다는 그의 결심은 희생이건 아니건 본질적으로 믿음의 모험이었다. 그는 하란보다 더 나은 것이 있으리라고 하나님을 신뢰했다.

  나는 당신의 하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것을 떠나는  것은 아브람의 결정보다는 덜 충격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 나름대로 똑같이 중대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자유를 향한 발걸음이 될 것이다.

  카리브 해 연안에서 사람들이 야자 열매 껍질 속에 땅콩을 집어넣어서 나무에 매달아 놓고 원숭이를 잡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야자 열매  껍질에는 원숭이가 손가락을 집어넣어 땅콩을 움켜쥘 만한 크기는 되지만, 땅콩을 가득 쥔 주먹을 빼낼 만큼 크지는 않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자유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디려면 땅콩을 몇 개 떨어뜨려야 할지도 모른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땅콩인가, 운명인가?

  아브람은 믿음과 헌신의 여정을 따라 많은 걸음을 걸어야 했다. 그의 믿음은 우리의 믿음과 마찬가지로 산발적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의 신뢰는 왔다갔다해서 굴욕과 수치의 위기에는 아예 사라져 버리는 듯 보였다. 만일 아브람이 하찮은 즐거움을 주는 삶이나 심지어 순간적인 성공의 삶을 기대했다면 그는 실망했을 것이다. 하란을 떠난 직후에 그들에게 기근이 닥쳤는데, 너무나 심한  기근이어서 그는 할 수없이 애굽으로 내려가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하란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남쪽으로 가려는 선택도 그리 내키지 않았다.

  애굽은 아브람에게 우아함과 권세와 세련미의 나라였고, 그는 이  모든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두려움은 사래에 대한 강박 관념으로 변했다. 사래의 아름다움은 어딜 가나 이목을 끌었던 것이다. 애굽의 통치자들에게는 여자를 보는 눈이 있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아내를 뺏기지는 않을까? 아내 때문에  내 생명이 위험해지지는 않을까? 그의 기질에는 남자다움이란 조금도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는 아내에게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12:  13)고 말하면서 수치심조차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두려움은 현실로 나타났다. 주인의  눈에 들려고 안달하는 바로의  대신들은 바로의 잘 발달된 소유 의식과 그의 호색을 선동할 기회를 재빨리 포착했다. 조숙한 어린 소년들이 외국의 항구에 와 있는 선원들을 자신들이 접촉한 '아름다운 소녀'의 이야기로 유혹하는  것처럼, 대신들은 서둘러 바로의 귀에 사래의 모습에 대한 흥미진진한 묘사를 퍼부었다.  아브람의 '누이'는 곧 왕이 모아들인 여자들 속에 끼었다. 모든 사람이 기뻐했을 것이다.  아브람과 사래 그리고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약속에 기초해서 집과 친족을 떠난 아브람이라는 사람의 삶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은 부적절했을 수도 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판단할 수가 없다. 분명 그가 보여 주는 영웅적이지 못한 모습은 흔히 그가  '믿음의 거인'으로 묘사되는 것과는 기묘한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기 위해 간섭하셨다. 바로의 집을 괴롭힌 재앙. 바로의 마음속에 공포를 불러일으킨 환상, 되돌려받은 사래 등은 이제 역사의 일부다. 아브람은  잘못된 행위에도 불구하고 많은 가축을 받았고, 불명예스럽게 그의 길을 가게 되었다.

 

    아브람, 진흙과 대리석의 혼합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아브람의 연약함을 발견하고서 당신은 자신도 아브람과 같은 부류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스의 영웅과  성경의 영웅은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당신은 상상을 통해서만 자신을 오디세우스와 동일시할 수 있다. 하지만 아브람과는 현실적으로 동일시할 수 있다. 알다시피 아브람은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위대한 결단을 내리는 법을 배워서 마침내 믿음과 헌신의 영웅 역을 해 낸 사람이다.  그 역시 도중에 몇 가지 비열한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은 그가 영웅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인간적이었다. 얼마나 인간적이었는가! 설교와 책에서는 그 족장이 빠진 함정을 그럴  듯 하게 얼버무리고 넘어간다. 우리는 경건한 아브람보다는 호머의 작품에 나오는 영웅을 보기 원하는 것 같다. 우리는 열심히 호머의 이야기를 진열장에 장식해서 그것을 판매용으로 전시해 놓는다. 우리는 진열장을 장식할 뿐만 아니라  물건은 사지도 않으면서 진열장만  구경한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사지 않고 그저 감탄만 할 수 있다. 진열장을  장식하고 나니 더 이상 물건을 살 여유가 없다. 가격이 너무 비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나는 당신에게 인간적인 아브람, 즉 애굽 사건, 하갈과 이스마엘 사건을 일으킨  아브람을 말하고자 한다. 앞에서 보았다시피 애굽 사건은 그가 두려움에 민감함을 보여 준다. 하갈 사건은 그의 불신, 사래에게  너무 쉽게 양보하는 연약함을 보여준다.

  사래는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몹시 낙심했다. 물론  사래가 생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무의미할 것이다. 먼저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지 않고서는 열국의 아비가 될 수 없다. 사래는 자신을 아내로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데 있어서도 실패자요 장애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절망에 사로잡힌 그녀는 절충을 모색했고, 그 지방의 관습에 따라 자신의 몸종을 아브람과 동침하게 했다. 하갈에게서  난 아이는 누구든 사래의 아이로 간주될 것이었다( 16: 1-3).

  우리도 이 같은 유의 타협을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도록 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들을 생각해 내는 것은 매우 쉽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목적과 수단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부자연스런 합리화-실제로 실행될  때 관련된 모든 사람을 이전보다 더 불행하게 만들고, 좀더 중요하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앞에서 시들어 버린다.

  무엇 때문에 아브람은 하갈과 동침했는가? 음욕이 그 결정을 쉽게 하도록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또한 음욕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사래를 달래려는 마음이 아마도 더 중요했을 것이다. 그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전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후에  아브람이 사래가 하갈을 제거하려는 계획에 쉽게  동조한 것은 충격적이다. 어머니와 아들(아브람 자신의 아들)을 황량한 사막으로 추방해 버린 이야기는 아브람의  연약함을 여지없이 드러내 준다( 16: 4-6). 하나님의 약속이 멀리 있고 실현성이 없는  듯하여 낙심한 아브람이 자신의 불행한 일련의 행동을 거부할 최후의 저항력마저 상실했다는 것 역시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는 믿음의 길을 걷도록 부름받았으나 그 부름의  메아리가 모호하고 아득해 보였기 때문에 그의 발걸음은 비틀거렸다.

  아브람은 우리 자신과 똑같이 수치스러운  재료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의 비열한 행동까지 세세히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브람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진흙과 대리석의 혼합체임을 우리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에게도 대리석은 있었다. 하란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기로 한 고상한 결정은 여러 번 되풀이해서 내려졌다. 비록  그 부르심이 희미해질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새로운 힘으로 분명하게 반복해서 그의 양심에 파고들었다. 밀어붙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 그는 하란에서의 결정을 재연했다. 때때로 그 말씀은 어떤 강한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알고 있는 대로 행동한 이후에 오기도  했다. 그러고는 그 결정의 결과로 그가 서서 자신의 무모함에 떨고  있을 때, 그를 안심시키는 위안의 말이 들려 왔을 것이다.

  그가 롯에게 먼저 목초지를 택하도록  했을 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두 사람의 목자는 가축이 먹을 풀과 물을 놓고 서로 다투었다. 긴장이 고조되었다. 둘 중 좀더 강력할 뿐 아니라 또한 연장자인 아브람은 쉽게 자신에게 좀더 유리한 방향으로 일을 조정하여 주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에 그는 롯에게 유리한 땅을 고르라고  말했다. 자신은 롯이  선택하고 남은  땅으로 가족과  가축들을 데리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12: 5-11).

  롯은 가장 좋은 땅을 골랐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횡재를 가져다준다면 누가 그것을 마다하겠는가? 그리고 아브람은 협정을 굳게 지켰다. 겉보기에는  그것은 가족 문제를 관대한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 이상이었다. 하나님은 전에 그 땅을 아브람에게 약속하셨다. 롯에게  목초지를 줌으로 아브람은, 자신이 소유하기를 희망했던 바로 그 지역에 대해 롯이 언젠가 소유권을 주장할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그는 약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약속에 대한 비상한 믿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인가? 내 생각으로는 가족에 대한 의무(아브람은 롯에 대한 책임이 있었음을 기억하라)와 미래에 대한 자신의  야망이 상충되었을 때 그는 가족에 대한 충절을 선택했으며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보살펴 주실 것을 믿은 것 같다.

  이런 나의 직관은 그 이후에 아브람이 롯을 구하기 위해 두 번이나 위험을 무릅썼다는 사실로써 입증된다. 한 번은 롯을 구조하기 위한 공격이었고(  14: 12-16), 또 한 번은 아브람이 보기에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과 관계 있는 일이었다( 18: 20- 19: 29). 그러나 아브람은 롯을 위해 중재하고자 자신의 생명과 미래,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까지도 내걸었다. 아브람은 실수를 범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사래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너무 열을 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롯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의 깊은 믿음을 보여 준다.

 

    십자가의 길의 마지막 걸음

 

  이번 장에서 지금까지 나는 많은 것을  명백히 하려고 노력해 왔다. 첫째, 나는  하나님에 대한 아브람의 희생적 헌신은, 희생이 아니라 먼저는 하나님의  믿음의 발걸음이요 그 다음에는 믿음의 여정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둘째로, 나는 아브람이라는 사람에게는 비범한 것이 전혀 없음을 보여 주고자  애썼다. 그는 중대한 결점들을 갖고 있었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아브람의  믿음의 여정은 그것을 하나님의 반복되는 부르심과 되풀이되는 약속에 대한 그의 반응으로 볼 때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또 있다. 앞 장에서 친밀함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믿음은 친밀함과 함께 자란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이 그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귀에 들리는 음성의 형태로 왔는가 내적 확신의 형태로 왔는가 하는 것은 사실 요점에서 벗어난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인간과 의사 소통하기를 원하신다면, 그분은  어떤 수단이라도 선택하실 수 있다. 한 가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만일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알리기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시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이 의사 소통하기를 열망하신다는-아브람에게뿐만 아니라  그분의 모든 종들에게-것이다. 아브람의 이야기는, 그것이 당신의 이야기도 될 수  있기 때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 역시 종으로, 또한 자녀로 여기신다.

  하나님의 말씀과 아브람(혹은 이후에 바뀐 이름으로 하면  아브라함)의 믿음 간의 기묘한 상호 작용을 두드러지게 보여 주는 두 가지 사건이 눈에 띈다.   둘 중에 더 마음을 혼란시키며 분명 그의 삶의 절정이요 가장 커다란 전환점이 된  사건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다( 22: 1-18).

  여기를 제외하고는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인간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다. 실제로 부모가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런 가증스러운 일을 아브람에게 명령하셨는가?

  우리는 두 가지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것에 대해 현대인들이 느끼는 감정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그것이  그에게 도덕적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온갖  불안과 슬픔의 감정에 대항해서  투쟁해야 했겠지만 인간 제물 자체가 악이라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 당시에는 용인된 관습이었다. 그것이 그에게 의미하는 바가  있었다면,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봉헌의  증거가 되리라는 것이다.

  이 사실에서 두 번째 사항이 야기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 명령을 어떻게 볼 것인지 아시고(즉 봉헌의 행위로 볼 것을 아시고)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요즘 인물이 아니라 자기 자식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 궁극적인 사랑과 신뢰의 증거이던 미개한 시대의 인물)은 그 명령에 순종할 만큼 충분히 하나님을 신뢰했을까? 불가능한  -자신과 사래의 몸에서 자녀를 낳는 것-을 수십 년 간 기다렸던 그는 하나님이 하란에서 하신 약속, 그 때로부터 여러 번 되풀이된 그 약속을 지키시리라고 믿었을까?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결심은 그의 여정의 마지막 발걸음을 나타낸다. 그것을 그의 헌신으로 본다면 그의  헌신은 이제 완성되었다. 그것을  믿음(사건의 참된 핵심이 놓여 있는 곳)이라고 본다면,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이제 본능과 상식에 공공연히 반할 만큼 충분히 커졌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모험을 할 준비가 매우 잘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친아들을 칼로 찌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기"( 11: 19)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칼을 쳐들었으나 하나님이 간섭하셨다. 아브라함은  깜짝 놀라 당황한 눈으로 살아 있는 수양이 그 옆의 덤불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귀에는  익숙한 한 음성이 아들을 제단에 묶어 놓은 밧줄에서 풀어 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들렸다. 하나님의 목적은 완수되었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그분을 신뢰하는 법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분이 당신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모든 것이다. 당신이 그 음성을 듣든 듣지 않든 그분은 당신을 부르고 계신다. 다른 시끄러운 소리들을 꺼 버리라. 당신  영혼의 깊은 곳에서 그분은 당신을 만나려고 기다리신다. 그분이  당신과 의사 소통하려고 많은 애를 쓰신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말라.

  제단에서 절정에 이르는 장면이 있기 오래 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이  도저히 오해할 수 없는 말로 말씀하셨다. 그 당시 관습으로는  어떤 계약을 맺으려면 특별한 의식을 행해야 했다. 짐승을 반으로 갈라 그 반쪽짜리들을 몇 미터 떨어지게 놓는다. 계약  당사자들은 짐승을 반쪽으로 갈라놓은 그 사이로 지나간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상징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내가 내 말을 저버리고  언약을 깬다면 내 몸이 이 짐승과 같이 두 쪽이 될 것이다." 그런 계약은 매우 엄숙하고 구속력이 있다.

  심지어 아브람의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바뀌기 전에도 하나님은 바로 이런 종류의  언약을 그와 맺으셨다. 아브람은 살아 있는 다섯 마리 짐승(  언약이 극도로 엄숙함을 의미한다), 즉 암소, 암염소, 수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가져와서  그 짐승들(암소, 암염소, 수양)을 반으로 갈라 규정된 언약 의식에 따라 벌려 놓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15: 1-10).

  그 때 아브람은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심각하게  의심하고 있었다. 그의 믿음은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짐승들을 규정대로 놓고 기다렸다. 몇 시간이 흘렀다. 때때로 솔개가 사체를 뜯어먹으려고 내려왔기 때문에  아브람은 끊임없이 그것들을 내리눌렀다. 하나님의 뜻이 그에게 더 계시되었다. 그러고는 어둠 속에서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이 나타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다. 풀무와 횃불은 둘 다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   "내가 이 땅을...네 자손에게 주노니"라는 말씀이 들려왔다( 15: 11-21). 이 모든 일은 당시 유목민이라면 누구라도 이해할 만한 확증이 되었다.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에게도 이렇게 수고롭게  말씀하시면 좋겠다고 말하겠는가? 두려운 어둠이 내릴 때 골고다에 서 보라. 교수대에 달리신 신인을 보라. 하나님이 당신과 협상하실 때 그분이 선의를 갖고 계시다는 증거를 감히 더 요구할 수 있겠는가? 풀무와 횃불이 짐승 사이로 지나갔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분은 당신에게 위로와 확신을 주시기 위해 돌이킬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아마도 당신은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솔개들이  당신과 하나님  간에 어떤 계약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채 갈지도 모른다. 성경으로 가 보라. 복음서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두 읽어 보라. 성령님이 구절 구절을 통해 당신에게 말씀하시도록 시간을 들여 묵상해 보라.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의 육신이었으며 십자가에 들려 올려졌다. 어둠이 실제로 내리덮였다. 성전의 휘장이 둘로 갈라졌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주셨음을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해 일어났고, 또 기록되었다. 그분은 믿음의 모험이 결코 모험이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의 헌신과 희생과 믿음의 발걸음이 그분과 좀더 깊은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확신시키기 위해 이  모든 일을 감수하셨다. 당신이 치를 대가는 하찮은 것이다. 그분이 제시하는 것은 훨씬 더 값어치가 있다. 하지만  당신은 반드시 믿어야만 한다. 구체적인 발걸음을 내디딜 정도로.

  만일 당신에게 확신이 없다면 그 걸음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데 서두르지 말라. 열에 들떠 허둥대면서 하란을 떠나지 말라. 잠잠한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라. 억눌림과  좌절이 있는가? 하나님이 잠잠히 머물고 계시는 당신 마음속의 성막으로 가라. 그분께 당신이 그분을 경배한다고 말씀드리라. 그분은 말씀하실 것이다. 당신이 그분께 이르려 하는 것보다  그분이 당신에게 이르기를 더욱 갈망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사실 이미 말씀하고 계신다. 당신은 단지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된다.

 

    토론 문제

 

  1. 저자는 헌신이 '재평가, 방향의 재설정, 자유'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 각각의  사항이 당신에게 무엇을 뜻하는지 당신의 말로 대답해 보라.

  2. 아브람이 하란으로 갔을 때와 같은 어려운 발걸음을 당신도 내디뎌 본 일이 있는가? 그 발걸음에는 어떤 희생이 따랐는가? 또 어떤 복이 따랐는가?

  3. 아브람과 사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는가? 당신의 불신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4. 당신도 사래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실현시키기 위해 직접 나섰던 경우가 있는가?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5. 당신은 아브람과 롯의 이야기를 통해 아브람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당신이 아브람의 처지에 있었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겠는가?

  6. 하나님은 당신의 삶 속에서 어떻게 그분을 신뢰하도록 가르치셨는가?

  7. 하나님이 당신과 언약을 맺은 당사자가 되신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 주셨는가?

  8. 하나님은 당신에게 아브람의 길을 따라 어떤 첫걸음을 내디디라고 말씀하시는가? 그것이 확실하지 않다면 어떻게 하나님 음성을 들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