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성령을 모신 자의 행복/요14:16-20 / 옥한흠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5. 12. 14. 06:04

성령을 모신 자의 행복/요14:16-20 / 옥한흠 목사

이 시간 우리는 사람의 지혜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말씀을 펴
놓고 있습니다. 너무나 신비한 내용이라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
다. 제가 설교를 준비할 때도 똑같은 기도를 하면서 준비했지만 말씀을 들
으시는 여러분도 똑같은 기도를 하면서 들으셔야 됩니다. 머리로 듣지 마시
고 마음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지혜로 깨달으려 하지 마시고 하나
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지혜로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남겨 놓고 십자가를 지기 위해 떠나면서 슬픔에 젖
은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여러 번 반복하신 말씀이 몇 가지 있습니다. 기
도에 대해서 가장 많이 반복하셨고, 그 다음으로 많이 반복하신 내용은 성
령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를 쭉 읽어보면 성령
에 관한 말씀이 네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반복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
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 번 들은 이야기는 안 들으려고 합
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자주 듣는 말씀일수록, 성경에
서 자주 반복되는 말씀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어야 합니다. 중요하
기 때문에 한번만 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관해 네
번이나 반복하시는 이유도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너무 중요하니까 거듭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누구십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이 누구
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처녀의 몸에 잉태케 하신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
령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그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신 하
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무덤
에 장사되었을 때 그를 죽음에서 일으켜 주신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이
누구십니까? 선지자와 사도들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신구약 성경을 영감으로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이 누구십니까? 이 세상에 교회를
탄생케 하시고 그 교회에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하나님의 권세를 입혀 주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부가 하나님이요,
성자가 하나님인 것처럼 성령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물건이 아닙니다. 어
떤 능력이나 기운도 아닙니다. 사람의 어떤 공상이나 환상도 아닙니다. 그
는 하나님으로서의 인격자십니다. 성령이 너무 중요한 분이기에 예수님께서
남겨 놓고 가는 제자들을 향해서 여러 번 반복해서 성령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똑같이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성령에 대해서 다 안다고 은근히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대해서 더 많이 배우고, 듣고, 체험해야
합니다.

또 다른 보혜사 - 성령
16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여기서 처음으로 성령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16절부터 20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성령이라는 단어는 한번도 안 나옵
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본문이 성령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주님이 십자가를 지
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시면 하나님께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시도록 요청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말했습니다. '보혜사'는 '돕는 자'(helper)
라는 뜻으로 성령의 별명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돕는 자라고 말씀하신 데
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를 위해서 하
시는 일은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만 바로 깨달으면 아무
아쉬운 것이 없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돕는 분이 계
십니다. 그는 돕는다 해도 별로 힘이 못 되는 인간과 같지 않습니다. 성령
은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케 하셨고, 그를 죽
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바로 이러한 분이 우리를 돕는 자로
와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는 한 가지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입니다. 왜 주님은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
하셨을까요? '또 다른'이라는 말은 성령 외에 다른 보혜사가 또 있다는 이
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말고 또 누가 보혜사라는 말입니까? 그것은 바
로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 나라에 가시면 하늘과 땅
의 모든 권세를 한 손에 쥐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것입니다. 거기에 앉
아서 주님은 보혜사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에 보면 참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
도시라."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가끔 죄를 범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1계
명이나 7계명, 8계명을 범하지는 않습니다만 엄밀하게 따지면 죄를 범할 때
가 많습니다. 이럴 때마다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은 자기 손의 못
자국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우리의 대언
자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대언자'라는 말
과 '보혜사'라는 말이 원문에서는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라는 동일한
단어로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
면서 범죄 하는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로마서 8장 34절 역시 동일한 사
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 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해 간구 하시는 자시니
라."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보혜사이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
다. 그는 바로 성령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돕는 보혜사시라면,
성령은 땅에 오셔서 우리를 돕는 보혜사이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는 성
령이 어떻게 우리를 돕고 있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우리를 위해 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에 각각 우리를 돕는 보혜사를 가진 사람
들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까? 얼마나 행
복한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에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을 통해 성령이 처음 임하시는 사건이 얼마나 극적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수양관을 짓고 입당 예배를 드릴 때 요란했던 것처
럼 성령이 처음 임하실 때는 굉장히 요란했습니다. 바람소리가 들리는가 하
면, 불의 혀 같은 것이 사람들 머리 위에 임했습니다. 사람들의 입술에서
방언이 터져 나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얼마나 소
란했던지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고 달려올 정도였습
니다.
그러나 그런 사건은 한번으로 끝났습니다. 수양관 입당 행사가 한번으로
족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에게 이제 필요한 것은 입당 행사가 아니라 수
양관에 가서 기도하고, 형제들과 교제하고, 신앙 훈련도 받으면서 온갖 혜
택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도 처음에 오실 때는 아주 극
적으로 오셨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모든
은혜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받아 누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성령
그러면 세상에 오시는 성령이 예약해 놓은 숙소는 어디입니까? 또 머무는
기간은 얼마나 됩니까? 조금 이상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여러분의 기억을 돕
고자 제가 예약 숙소니 예약 기간이니 하는 말을 사용합니다. 16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
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예약 기간은 얼마입니까?
'영원토록'입니다. 예약 장소는 어디입니까? '너희와 함께'입니다. 다시 말
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17절을 보십시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
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
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성령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는 성령을 압니다. 성령이 교회 곧 우리 안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이 계시겠다고 예약해 놓은 장소는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것이 정말 사실일까?' 하고 조금이라도 의심하기 시작
하면 끝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신 성령이 내 마음속에 와서 거하실
까? 그분이 어떻게 영원토록 나를 떠나지 않고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실
까?'하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나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신비로운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
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면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살아 계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영으로 계시게 된다고 합니다. 좀더 쉽게 말씀드리면 성령이 우
리 안에 거하심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다
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 뿐아니라 성자 예수님까지 모시고 사는
기가 막힌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보혜사와 땅에 있는 보혜사
두 분을 모두 모시고 사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
이 내 안에 거하시고 성자가 내 안에 거하시는 사건은 신학적으로 '내주하
심'(indwelling)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살아 계신 예수님도 우리 안에 거하
신다는 것을 우리가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요?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여기서 '내
가'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예
수님이 부활해서 제자들을 만나시겠다는 의미로만 보면 안 됩니다. 더 중요
한 것은 성령이 오심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시 오신다는 의미입니다.
19절 이하를 보십시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
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보리
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상은 다시 보지 못하지만 우리는 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와서 우리 마음에 거하시기 시작하면 성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서도 우리 마음에 영으로 거하시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로
마서 8장 9절에서 11절까지를 보면, 처음에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
한다고 말씀하시다가 그 다음절에 가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신다고 말하
고, 그 다음절에 가서는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우리 안에 계신 분이 성자인지 성령인지 구별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 인간의 지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주
헷갈리는 말씀을 해 놓고도 주님은 거기에 대해 무슨 설명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태연하게 이렇게만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는
....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20절). 성령이 오시면 우리
가 다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이 시간 저의 설교를 들으면서,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정말
꿀맛 같은 말씀이구나. 성령이 내 안에 계시고 살아 계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다니 정말 꿀맛 같구나. 주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아멘!' 하고 벅
차 오르는 감격을 느낀다면 여러분은 아는 사람입니다. 뭐라고 설명하지는
못해도 믿기 때문에 압니다. 그리고 알기 때문에 나타나는 감정이 있습니
다. 사랑에 빠진 남녀가 어떻게 말로 사랑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압
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
아들일 때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압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심을 압니
다. 그래서 마음이 평안해지고, 기쁨과 자신감이 넘쳐 나서 하나님 앞에서
"아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읽거나 조용히 묵상하는 가운데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들
려주시는, 영의 귀로만 들을 수 있는 음성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야, 대
단하네.'하고 생각하실 지 모릅니다만 여러분도 저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
러분이 말씀을 놓고 조용히 묵상하면 이전에 몰랐던 말씀의 진리를 깨닫고
마음이 뜨거워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길을 가다가 조용한 숲 속을
거닐면서 '주님.' 하고 예수님을 찾으면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성령이 나를 꼭 붙들고 함께 걷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이것은 공상이 아닙니다. 내가 믿으니까 그 사실이 현실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아는 사람입니다.
만일 이 시간 말씀을 들으면서 '정말 헷갈리네.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도
무지 모르겠네. 저 사람 알고 하는 소리야? 모르고 하는 소리야?'하고 생각
하는 분이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주님, 예수님이 정말 내 마음에 계십니까? 저는 예
수님을 믿기 원합니다. 성령님, 내 마음에 계십니까? 내가 믿습니다. 알게
해 주세요." 보혜사 성령께서 여러분을 반드시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제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정말 행복하다고 느낀 말씀이 한 구절 있습니
다. 그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나 제 가슴이 뜨거워졌는지 모릅니다. 18절 말
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참으로 기가 막
힌 말씀 아닙니까? 저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진한 사랑이 베어 있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 모두가 자인하는 것처럼 인생은 고독한 존재입니다. 누구나
마지막까지 자기 인생을 혼자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외
톨이로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다시금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
께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과 함께 했던 3년 동안 예수님은 어머니와 아버지 같았습니
다. 제자들을 먹이고 입히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그들을 데리고 다녔으며,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떠나시게 되자 뒤에 남은 제자들은 자신들이 고아처
럼 여겨져 한없이 슬퍼하며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보시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 왜 그러
냐? 그럴 필요가 없다. 너희는 고아가 아니다. 내가 가면 성령을 보내겠는
데 그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내가 지금 있을 때 보다 너희가 훨씬 더 행
복해 질 수 있어. 너희들이 나와 함께 3년 동안 있을 때는 내가 육신의 몸
을 입고 있으니까 내가 안보이면 너희들이 찾아 다녔지 않으냐? 내가 배를
타고 가다가 자면 너희들이 흔들고 깨웠지 않으냐? 하루 이틀 너희들을 떼
어놓고 가기라도 하면 돌아올 때까지 안절부절 못 하며 기다렸지 않으냐?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너희들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너
희 속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속에 있는 나를 너희들이 찾아다닐
필요도 없고, 또 내가 없다고 해서 너희들이 불안해 할 필요도 없다. 그러
니 얼마나 좋으냐? 그런데 왜 너희들이 두려워하고 근심하느냐? 내가 너희
속에 있기 때문에 너희는 어느 때든지 내 이름만 부르고 기도하면 우리 아
버지께서 다 들어주신다고 말했지 않으냐? 내가 너희 속에 있기 때문에 내
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할 것이요. 그것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가 말했지 않으냐? 그렇다면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는 행복이니라.
너희는 고아가 아니다."
이것이 어떻게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겠습니까? 저는 우리 모두에
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위로의 말씀이라고 확신합니다. 제자들이 마음에 모
시고 있는 성령을 우리도 모시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 성령을 통해서 살
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마음속에 계셨던 것처럼 지금 우리 마음
속에도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
니다.
성령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거의 날마다 내적 공허와 고독을 느낍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오셔서 채워야 될 것을 다른 것으로 못
채우니까 전부 텅텅 비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느끼는 공허함과 고독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들 숨기고 티를 안 내려고 하니까 그렇지
얼마나 심각한지 모릅니다. 현대인들은 젊은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가만히 혼자 있지를 못합니다. 인기척이 없는 적막이 죽음처럼 느껴
져 혼자 있기를 싫어합니다. 혼자서 자기라는 상대를 앞에 놓고 대치하기에
는 너무나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수만 개의 거울을 둘러놓고 동으로
보나 서로 보나 남으로 보나 오로지 그 거울 속에 비친 자기만을 보는 그런
무서운 공허감을 현대인들이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핸드폰을 들었다 놓았다, 켰다 껐다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혼
자서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혼자 있을 때면 음악을 틀든지 텔레비전이라
도 켜 놓고야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이 바보 상자가 그래도 자기에게 고독
감을 덜게 해 주는 좋은 위로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
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확인해야 마음이 놓이는 것
이 바로 현대인들입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혼자의 고독을 견딜힘을 상실하
고 있습니다. 자기가 고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존적인 고독
에서 자유 함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 역
시 인간인지라 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외로워서 눈물을 흘
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느끼는 실존의 고독은 느끼지 않습니
다. 예수님이 우리 속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 영혼의 빈곳을
가득히 채우고 계십니다. 그의 생명의 풍요로움이 우리 마음을 물댄 동산처
럼 만들고 계십니다. 주님은 절대 우리를 혼자 두지 않습니다. 이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저는 이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사실을 즐깁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믿습니까? 향유합니까?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 예
수님 때문에 나는 고아가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 나를 고아처럼 세상에 던
져 놓고 계시지 않는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하는 사실 때문에 여러
분이 얼마나 달라지고 있습니까? 예수 없는 세상 사람과 얼마만큼 다른 인
생을 살고 있습니까?
안타까운 것은 이런 어려운 말을 하면 잘 알아듣지 못하는 교인들이 교회
안에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분들 대부분은 성령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
답을 너무나 잘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그런 성경적인 지식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고아처럼 두려워하며 울
고 있는 것을 봅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예수는 있어도 마음으로 알고 있는
예수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지식만 가지고 매달려 있으면 우리는 안 믿는 사람과
별 차이가 없는 공허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고아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
다. 역사적 예수가 무엇입니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
해서 지식으로만 아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식은 나에게 생명을 부여하지를
못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성경만 알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머리에는 주님이 계신데 가슴에는 안 계시다보니 그
주님이 내가 실제로 세상을 사는데 도움이 되지를 못합니다. 고아처럼 버림
을 받았다고 하는 고독 속에서 몸부림을 쳐도 내가 알고 있는 성경의 예수
가 나에게 전혀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어떤 문제와 싸울 때, 외로
움이 찾아 올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절망 속에서 몸부림 칠 때
내가 알고 있는 성경의 예수는 저 멀리 서 계시는 것 같고 나에게는 무슨
도움을 주지 못하는 막연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내 속에 거하시는 예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입
술로는 고백하지만 전적으로 그분에게 의존하는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근심과 고독과 무기력이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합니까? 성경의
예수는 그만큼 많이 알고 있는데 왜 이토록 무기력합니까? 왜 이렇게 내 마
음은 텅텅 비어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성령 앞에 무릎 꿇고 우리는 이렇
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도와주옵소서.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옵소서." 성경에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떤 유대인 청년이 액클레이라고 하는 사람을 찾아와서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니, 왜 날 보고 자꾸 예수 믿으라고 합니까? 내가 무슨 이
유로 예수를 믿습니까? 십자가에 처형된 젊은이를 내가 왜 믿습니까?" 그러
자 액클레이라는 분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맞아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 되셨어요. 그러나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셔요. 내 마음속에
계셔요. 나는 날마다 그분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분과 이야기하고 그분과 함
께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극복하고 있어요. 지금 내 안에 계신데 안 보여
요?" 유대인 청년이 그분을 볼 리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인데 어떻
게 그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액클레이(A.H.Ackley)라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와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이런 찬송을 썼습니다. 151장 찬송입니다. "다시 사신 구세주 나 항상 섬기
네/ 온 세상 조롱해도 주 정녕 사셨네/ 그 은혜로운 손길 부드러운 음성/
내 평생 주님 함께 늘 계시네/ 예수 예수 늘 살아계시네/ 주 동행하여 주시
며 늘 말씀 하시네/ 예수 예수 내 구세주 예수/ 내 맘에 살아 계시네 늘 살
아 계시네" 이 고백이 어떻게 액클레이라는 사람 한 분만의 고백이요 찬양
이겠습니까? 우리 모두의 찬양인 줄 믿습니다.

세상이 감당 못하는 능력의 사람
초대교회 성도들은 지금처럼 아름답게 편집이 되고 제본이 된 성경책은
구경도 못하고 살다가 갔습니다. 그들은 신약성경조차 제대로 갖고 있지 못
했습니다. 초대교회 100년 동안은 마태복음이 기록되어서 이 교회 저 교회
로 회람되기는 했습니다만 누구 손에 가 있는지 발견하기조차 어려운 시대
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을 통해서 아는 성경의 예수님을 우리만큼 알
지 못했습니다. 아마 우리가 아는 것의 10분의 1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렇게 능력 있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있는 예수님은 잘
몰라도 내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
와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님과 성령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은 속에서 분출되는 힘을 마음껏 발산하면서 세상을 누비고 다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그 누가 그들의 기쁨을 억누를 수 있었습니까? 그 누가 그들의 입
에서 찬송을 빼앗아 갈 수 있었습니까? 그 누가 그들의 용기를 꺾을 수 있
었습니까? 가난 속에서도 찬송하고 기뻐하는 그들을 감히 그 누가 거꾸러뜨
릴 수 있었습니까? 아무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그들을 강하게 붙들고 계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상대할 수가 없었던 것
입니다. 결국은 대제국 로마도 300년도 채 안되어 그 가난한 그리스도인들
앞에 굴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 지요?
로마서 8장 35절 이하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
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
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과 나 사이를 갈라놓
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나를 사랑하시는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는 말입니다.
또 빌립보서 4장 12-13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
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
을 할 수 있느니라." 부요에 처하든, 가난에 처하든, 그 어떤 형편 속에서
도 자족하기를 배운 사람을 세상의 그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믿
는 사람은 누구든지 세상에서 바로 이러한 존재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이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이렇게 기도하
시기 바랍니다. "주님, 나 예수 믿겠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이 내 마음에
와 계신다는데, 내가 그 예수님을 모시고 세상을 살고 싶습니다. 그 성령의
손에 붙들려 세상을 살고 싶습니다. 나 혼자 너무 외로워요. 나는 고아와
같아요. 나는 자신이 없어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 내가 다시 일어서
야 될지 잘 모르겠어요. 나를 도와주세요. 내 안에 오세요. 내가 믿기를 원
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여러분에게 임하실 줄 믿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한 장의 종이는 누구나 쉽게 찢을 수 있을 만큼 너무나 가냘픕니다. 그러
나 이 가냘픈 종이를 두터운 콘크리트 벽에다 붙여 보십시오. 함부로 그 종
이를 찢거나 뚫지 못합니다. 강하고 두터운 콘크리트가 그 종이와 붙어 있
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스스로를 놓고 보면 정말 미약하기 그지
없는 존재입니다. 한때 공중에 나는 새도 떨어트릴 만큼 세도가 대단했던
사람도 가까이 가서 개인과 만나보면 그 속에 참새의 심장을 가지고 있습니
다. 바들바들 떨고 있습니다. 이렇게 연약한 인생이지만 죄와 사망을 이기
시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만유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오심
으로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아무도 우리
를 꺾거나 찢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실직을 당해도 꺾이지 않습니다. 내가 꺾인다는 것
은 곧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꺾인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
한 이야기입니다. 생활이 궁핍합니까? 몸에 어떤 질병이 생겼습니까? 눈앞
이 캄캄해지는 일이 닥쳐왔습니까? 그게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나만 당하
는 것처럼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앞차 뒤차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세
상을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씩 겪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것들로
인해 꺾이지 않습니다.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예
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강하십니다. 그분이
주시는 능력만 입으면 아무도 나를 꺾지 못합니다. 할렐루야! 바로 이게 예
수 믿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먼데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분 이야
기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름만 대면 누군지 금방 알 수 있는 분의 이야
기를 하나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그분은 어머니와 사랑하는 다른 세분의 형
님들이 차례로 급사한 것을 보았습니다. 6.25때는 아버지와 가족들이 눈앞
에서 공산당에게 학살당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본인은 8.15와 6.25의 사
선을 수없이 헤매다 25시의 주인공처럼 기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사랑하던 잘생긴 동생 하나가 불놀이하다가 불에 타서 죽던 날
밤, 그는 그 죽어 가는 동생이 당하는 고통과 숨막히는 슬픔을 그 자리에서
체험을 했습니다. 또 다른 동생 하나는 집 근처 벌목하는 현장에서 놀다가
나무에 치어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2년 전에는 고등학교 교감으로 봉직하
던 착하디 착한 자기 동생이 10살에서부터 16살까지 줄줄이 달려 있는 딸
네 명을 남겨놓고 간암으로 죽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작년에는 자기 딸이
위암으로 157일간의 논스톱 고통을 겪다가 두 어린 딸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죽는 참혹한 비극을 당했습니다. 금년에는 동생과 제수가 죽고 막내
동생은 간 경화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고아원을 차려야 할 정도
로 모두가 부모 없는 유자녀들을 떠맡기고 떠났습니다. 이분의 나이가 이
글을 쓸 때는 환갑을 맞았습니다. 지금부터 15년 전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기막힌 상황입니까?
우리는 이 사람이 겪은 사건을 하나라도 겪었다면 아마 주눅이 들어 일어
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런 줄줄이 연이어 오는 많은 비
극들을 겪으면서도 그분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정직하게 고백하면 나는 하나의 얼굴로는 웃고 다른 얼굴로는 운다. 내
영은 주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깊은 곳에서 샘물같이 환희가 솟
는다. 그러나 다른 마음의 하늘에서는 비가 끊임없이 내리고 있다. 옆을 보
면 정신착란증에 걸릴 것 같고 위를 보면 현기증이 나고 내 안을 들여다보
면 죄와 추한 것들이 있고 과거는 회한과 슬픔뿐이고 미래는 안개처럼 불확
실하고 불안하다. 나는 주님만 바라봐야 한다. 과거는 아무리 더럽고 아프
고 서러워도 내일과 새해와 미래는 때묻지 않은 순수한 페이지, 무한한 잠
재적 가능성, 공주 같은 처녀성이 백지같이 열려있다. 시집가는 처녀처럼
새날을 맞이하여 새 집에서 새 살림 꾸려 새 사랑을 살자. 한해 한해를 사
는 것이 아니다. 하루하루를 사는 것도 아니다. 한 발짝, 한 호흡, 주님을
사랑하며 창세기 첫날처럼 날마다 영원한 첫사랑으로 살자. 주님을 호흡하
며 살자. 내게 깊은 위로와 감사와 찬송과 평안이 있다. 그것은 내게서 나
온 것이 아니라 성령이 은혜로 내게 주시는 것들이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게 바로 주님을 모시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한국 기독교가 배출한 전무후무한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다름 아닌 한국대학
생선교회(C.C.C.)의 김준곤 박사님이십니다. 그 많은 눈물 골짜기를 거쳐오
면서도 희한한 기쁨을 체험하며 하늘을 향하여 마치 처녀가 새 살림을 꾸미
듯이 새로운 인생을 바라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수 있었던 그 초인간
적인 능력이 어디서 나타나는 것입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내 안에 계시
는 예수 그리스도,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삽시다. 우리가
처한 형편이 어떠하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는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
서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시고 체험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할렐루야!*****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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