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 6:12-17)

성령충만땅에천국 2015. 12. 16. 07:14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 6:12-17)

 

  어느 날 같은 시간에 화장터로 세 명의 사람이 실려 왔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 모두 한결같이 웃고 죽었습니다. 관리인이 궁금해서 세 사람을 데려온 사람에게 물었답니다. "저 첫 번째 사람은 왜 저렇게 웃고 죽었습니까?" "예,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되어 너무 좋아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럼 저 두 번째 사람은 왜 저렇게 웃고 죽었습니까?" "예, 아들 녀석이 전교 꼴등 하다가 전교 1등으로 올라가서 기뻐서 죽었답니다." "아하. 그럼 마지막 사람은 왜 저렇게?" "벼락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왜 웃고 죽었지요?" "사진 찍는 줄 알았답니다." 웃기는 이야깁니다. 웃어야 정신이 반짝 납니다! /할/
  ▶오늘은 한국교회가 맥추감사절로 예배를 드립니다. 일 년의 전반기를 1-6월로, 후반기를 7-12월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전반기를 결산해 보는 때가 '맥추 감사절'이라고 하면, 후반기를 결산하는 때를 '추수 감사절'로 보면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대부분 7월 첫 주부터 셋째 주까지를 맥추절로 지킵니다.
  ▶감사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⑴조건부 감사입니다. 무엇을 주시면 드리겠다는 1차원적인 감사입니다. ⑵'-때문에' 감사가 있습니다. 무엇이 이루어졌으니 드리는 2차원적인 감사입니다. ⑶'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3차원적인 감사. 이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출23:14절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유대인들은 이 명령에 따라서 일년에 삼대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유월절'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지킨 절기로 해방절기입니다. ▶두 번째 절기가 바로 오늘 우리가 드리는 '맥추절'인데 이날은 오순절이라고도 하고 칠칠절이라고도 하는 절기로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입니다. 첫 열매는 '제일 좋은 것을 드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절기로는 '수장절'로 일년 동안 농사를 지은 것을 창고에 들이고 가을의 들판에 초막을 짓고 일주일 동안 생활하여 조상들이 광야에서 40년 간 초막을 짓고 생활하던 것을 기념하며 지키던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우리가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맥추절의 유래를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인도를 받아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50일째 되던 날, 시내광야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 산 위로 부르신 후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맥추절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출23: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지키라'는 말은 권면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반드시 지켜야 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맥추절은 첫 곡식을 거두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감사절입니다. 그래서 맥추절을 초실절이라고도 하고,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라고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맥추절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밀, 보리 수확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지키시고 보호 해주신 것도, 건강을 주신 것도, 구원을 베푸신 것도, 환란과 시련을 이기게 해주신 것도 시시때때로 인도해 주신 것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란 무엇입니까? 감사는 은혜를 받은 자들이 은혜를 주신 분에게 보답하는 것입니다. 감사란 글자를 보면 '느낄 감'자에 '사례할 사'를 쓰고 있습니다. 이는 은혜 받은 자들이 고마움을 느끼고 은혜를 주신 분에게 사례하는 것을 말합니다.
  ⑴감사는 '축복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시100;4절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기에서 '그 문'은 하나님께서 계신 그 궁정의 문입니다. 승리가 있고 응답이 있는 곳입니다.
  ⑵감사하는 마음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이 떨어지면 우리의 마음속에 무엇이 싹틉니까? 원망과 불평, 불만이 터져 나옵니다. 이것들은 감사의 싹을 자르는 요소들입니다.
  ⑶감사하는 마음은 '축복 받은 마음'입니다. 감사는 분명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아무나 감사할 수가 없지요!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는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⑷감사하는 마음은 '더 큰 감사를 불러들이는 마음'입니다. 확실히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일이 더 많이 생깁니다. 감사하는 곳에는 또 기적이 일어납니다.     시50:23절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⑸감사의 조건은 '찾아 만드는 사람의 것'입니다. 감사는 감사할 조건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감사가 넘치는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⑹감사는 또 감사를 낳습니다. 감사엔 약속이 있고, 감사는 또 감사를 낳습니다. 갈6:7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⑺감사는 천국은행에 투자한 것이고, 우리의 창고를 채우는 축복의 길입니다.
  ⑻왜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붙여진 이름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도, 신도, 그리스도인(크리스천), 예수쟁이, 등 많이 있습니다. 행11:26절에 보면 초대교회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안디옥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전문가', '예수의 무리들', '예수님의 것'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전문가를 부를 때에 쟁이라는 말을 씁니다. 땜 쟁이, 침쟁이, 이발쟁이 즉 전문가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성도)이라면 예수님에 대해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크리스천이란 이름은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불리어진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믿지 않은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뜻으로 불렀던 이름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붙여진 영광스러운 명칭이 되었습니다. 롬1:17절에 성도로 불리어졌는데 성도라 함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구별된 사람들로, 하나님께 받혀진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받혀진 사람들입니다. 구약은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또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붙여준 이름이 있습니다. 뭡니까? 제자라는 명칭입니다. 지금 우리는 서로를 성도들이라고 부르지만 초대교회 때는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제자라는 말은 오늘의 학생과는 다릅니다. 학생은 선생으로부터 지식과 지능을 배우지만, 제자는 스승의 인격을 배웁니다. 학생은 다 배우면 졸업하지만 제자는 평생 배워야 함으로 졸업이 없습니다. 제자는 그 스승의 인격과 성품, 지식, 사상, 정신과 신앙을 본 받고 닮는 것입니다. /믿/
  그러므로 제자는 배우고, 따르고, 절대 순종하고, 신뢰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21:19, 22절에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을 본 받고 예수를 닮아 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 있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11: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할/
  그러므로 내가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증거는 예수를 닮은 흔적이 어느 부분에서라도 나타나야 합니다. 내가 나를 보아도 예수 닮은 흔적이 보이고, 남이 나를 보아도 예수 흔적이 보여야 합니다. 교회 이름 가운데 보면 예닮교회가 있습니다. 예수 닮은 교회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17절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이 말씀을 쉽게 표현하면 '나는 예수를 닮았다. 나는 예수의 제자다'라는 선언입니다. 흔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티그마'로, '표식 곧 마크'란 말입니다. 스티그마는 그 당시 주인의 소유물의 표시로서 짐승의 몸에다 쇠 도장(인)을 찍는 표시였으며, 또 노예의 몸에 찍은 것을 스티그마, 즉 흔적이라고 했습니다.


  ▶몇 가지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①스티그마는 자신의 몸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팔려온 주인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표식입니다.
  ②스티그마는 병사의 복장에 그 지휘관의 이름을 새겨 표식으로 나타내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③스티그마는 소와 양에게 낙인을 찍어 소유주를 나타낼 때 사용하였습니다.
  ④스티그마는 도망간 노예가 붙잡히면 그 노예의 몸에 불에 달군 인두로 주인의 이름을 새길 때 사용했습니다.
  ⑤스티그마는 그 주인을 위한 절대적인 복종을 나타내는 표식입니다.
  ⑥스티그마는 엄격한 자유의 통제를 나타내는 표식입니다.
  ⑦스티그마는 사실상 죽음의 표식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이 고백한 흔적은 불명예스러운 단어인데, 바울은 예수 안에서 영광스럽게 자신에게 이 흔적이 있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나는 예수님의 영원한 소유요, 예수님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변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병사요, 예수께 소속된 신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 '가졌노라'는 '짊어졌노라'는 뜻입니다. 짊어졌다는 말은 사명에서 나온 말입니다.
  ▶A.D. 325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하여 소집된 세계 제1차 종교회의인 '니케아' 회의에 모인 감독의 수는 300명이었는데 그 회의에 참석한 감독 중에 오른쪽 눈이 뽑힌 사람, 양손이 없는 사람, 그 외 다른 여러 불구자들이 많이 참석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받은 고난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는 이 고백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굉장한 도전적인 언어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몸에는 선민 이스라엘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할례의식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 받은 민족으로 선민의 흔적을 자랑하였습니다. 할례 받은 흔적을 받은 유대인들에게만 구원이 있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나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그토록 핍박을 받았던 것은 할례의 무의미를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인 중에는 이방인 성도를 유혹하여 할례를 강요하고 그 할례를 자랑으로 삼으면서도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 교외 안에는 할례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흔적임을 말하며 율법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파고 들어온 이단자들의 신앙은 어떻게 보면 양다리 작전입니다. 그들이 할례 받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12절입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를 할례 받게 하려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이라"
  핍박을 면하기 위하여 할례 받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 지배 하에서 유대교는 공인된 종교이기 때문에 핍박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입장이 달랐습니다. 그 당시에 기독교는 신흥종교요, 그리고 기독교가 섬기는 그리스도는 로마에 의하여 반역자로 처형된 죄인이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다시 살아나서 구주가 되셨다는 이 교리를 로마 정부는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게 되면 어떠한 이득이 있는가 하면 로마 사람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너 기독교인이지?"라고 물으면 "아닙니다. 우리는 유대교입니다. 증거가 있지 않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표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해서 로마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고 동시에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우리는 다 같이 예수 믿는 사람들 아니요?" 이래서 양다리 걸치고 예수를 믿으려고 할례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정치적으로는 로마와 타협하고 종교적으로 유대교와 타협해서, 한 마디로 아무 고난과 희생 없이 예수를 믿어보려고 했기에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13절입니다.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육체로 자랑하기 위해서 할례 받게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예수 믿은 것은 이방인들이 오다가다 어쩌다가 예수 얘기 한 번 듣고 감동해서 신앙고백 한 번 하고 예수 믿은 것이 아니라, 나는 벌써 옛날부터 율법이 뭔지도 알았고 율법을 따라서 깨끗하고 경건하게 산 사람이다. 소위 경건한 율법 아래서 뼈대있는 신앙의 가문에서 자랐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가 자기 신앙의 뿌리와 경건의 연조를 자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할례의 추종자들이란 아무 어려움도 없고, 수고도 없고, 희생도 지불하지 않고 편하게 예수를 믿으면서 동시에 자기들의 경건을 자랑하고 칭찬을 받기 원하는 그 사람이 바로 할례주의자들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바울은 '다만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득의 교리를 그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본문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고 할례나 무 할례나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직 예수 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자만이 존귀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의 힘을 자랑합니다. 자기의 돈을 자랑합니다. 자기의 명예를 자랑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권력을 자랑합니다. 자기의 인생 연륜과 경험을 자랑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지혜를 자랑합니다. 찬란한 자기의 이력서를 자랑합니다. 자기의 특별한 달란트와 은사를 자랑합니다. 자기의 종교적 충성을 자랑합니다. 자기의 미모를 자랑합니다.
  여러분들의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에서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예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자랑하고 헬라인들은 지식을 자랑하지만 우리는 예수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이 절망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치욕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광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저주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정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형벌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낙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죽음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할/
  여러분! 우리들은 세상의 헛된 것을 자랑하지 말고 헛된 것을 붙들지 말고 예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높이며 살아 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은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내심 불쾌한 심정을 토로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심히 괴로웠습니다. 그가 개척한 갈라디아 교회가 이단에 물들어가고,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을 받아 넘어가는 것을 보고 심히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더 이상 이단자들에게 미혹을 받지 말고 든든히 서라는 의미로 하신 말입니다.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여기 나오는 흔적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상처가 그대로 바울에게도 새겨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일례로 아씨시의 성 프랜시스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흔적이 그 손바닥에 새겨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한 이 흔적은 그의 영혼 속에 각인된 주의 십자가의 은혜요 능력인줄 믿습니다. ▶이 고백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1. 나는 예수님의 종(노예)이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소유물이다. 나는 예수의 종이다. 나는 예수의 십자가의 인을 친 흔적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이 지울 수 없는 생명의 인이 찍혀 있다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의 인이 찍혔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 십자가는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흉악범이 십자가형을 받았고, 반역자가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애굽, 헬라, 로마 등에서 최악의 극형자는 십자가에 달려 죽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흉악범이라고 해도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형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런 저주의 십자가 형틀에 우리 주님이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부터 십자가의 개념이 달라 지게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뒤집어쓰시고 십자가형을 받음으로 이제는 그 십자가가 저주의 십자가가 아니라 구원의 십자가요, 능력의 십자가요, 평화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나는 십자가의 인을 받은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다는 것은 이제 나는 예수의 종이요, 노예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종의 개념은 주인만을 위한 존재입니다.
  주인의 뜻이 자신의 뜻이고 주인의 삶이 자기의 삶이고, 주인의 목적이 자신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종은 오직 주인을 기쁘게 해드리는 의무만 있지 자신의 뜻도 삶도 목적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바울의 이 고백은 '나는 주님을 기쁘게 할 책임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오늘 우리들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됨의 표시는 자신의 몸에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스티그마는 영원히 지을 수 없는 주인의 소유물임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 마크가 십자가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바울 당시 로마 황제의 치하에 있던 사람들은 황제를 큐리오스(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칭호를 그리스도에게만 사용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다가 많은 핍박을 받았고, 처형도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증거하지 못하고 은밀히 따르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연약한 성도들은 입술로 주를 고백하다가도 그 입술로 주를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지을 수 없는 흔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나의 주가 되십니다> /할/ 얼마나 당당한 고백입니까? 신앙은 바른 고백 위에 세워져야 흔들림이 없습니다. 우리들도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나는 예수의 종이다. 예수가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다> /할/
  그렇습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것은 곧 나는 주의 종이요, 나는 그의 소유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소속감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땅에 살고 있지만 하늘에 시민권을 가진 자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사는 목적이 다르고 종착점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소속감이 분명한 사람은 책임감이 있습니다. 소속감이 분명한 사람은 주인의식이 있습니다. 소속감이 분명한 사람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할/
  여러분, 우리 모두 하늘에 시민권을 가진 잡니다. /믿습니까?/ 우리 모두 하늘나라 갈 때까지 성림교회의 기둥이 되어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2. 그리스도인에게는 충성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몸에 지녀야 할 흔적은 충성이라는 흔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고전4:2절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계2:10절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주님의 뜻에 자기의 전 생애를 바치며 살았습니다. 그의 온 몸은 충성스런 종의 흔적뿐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두 종류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쾌락과 동물적 본능에 따라 사는 죄악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신앙의 위대한 흔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본문 17절의 '흔적을 가졌노라'는 뜻은 '내 등에 짊어졌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복음을 전하다가 수 없이 많은 매 맞은 흔적이 있습니다. 환난 받은 흔적, 희생과 고난의 흔적을 짊어진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무거운 짐을 진 노예의 충성스러운 모습입니다. ▶행14:19절을 보면 실제로 그는 갈라디아 지방의 한 성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은 후 죽인 줄로 여김을 받아 성 밖에 버려진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의 어깨에는 돌에 맞은 흉터가 있었고, 그의 손목에는 반점과 감옥에서 채워졌던 사슬의 흔적도 있습니다.
  ▶고후11:22-28절을 보면 그는 복음을 위해서 수없이 매를 맞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태창으로 세 번 맞았으며, 돌로 한 번 맞고, 세 번 배가 파선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여러 번 선교 여행길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주리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던 흔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날마다 정신적인 고통이 있었으며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이 모든 것이 다 주의 종으로서 자기의 몸에 오는 흔적'이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사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당한 핍박, 환난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사람들에게 당하는 핍박에 감사하십시다. <하나님! 이 핍박을 잘 이겨 하나님께 상급 받는 흔적 되게 하옵소서!> /아멘!/
  ▶6.25 사변 때 공산당은 남한의 많은 인사를 반동으로 몰아 죽였습니다. 인민군들은 일하지 않은 자들을 반동분자로 취급했습니다. 목사님 한 분이 지역 유지들과 함께 붙들려 창고에 갇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공산군이 후퇴하게 되었는데 밤중에 한 사람씩 끌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손바닥을 만져서 지주와 농민을 구별했습니다. 그 때 손바닥에 일한 흔적이 있으면 살려주고 일한 흔적이 없으면 지주로 몰아 죽였습니다.
  목사님은 마침 성전 건축공사를 했기에 손바닥이 거칠어 졌습니다. "동무는 무엇을 했나?" 목사님은 큰 소리로 "목사 일을 했습니다." 했더니 목사란 말을 목수로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목수 동무가 어찌 왔소? 빨리 나가" 그래서 살아났다고 합니다. 인민군도 일한 흔적을 보고 살려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를 위해 일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흔적을 보시고 상급을 주십니다.
  마5:11-12절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3, 바울은 자기의 몸에 나타난 예수의 흔적을 최대의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바울이 예수의 종이 되고 예수님을 위하여 충성된 고난의 증인이 된 것이 너무나 영광스럽다는 자부심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바울은 주님과의 모든 관계가 무엇이든지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결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갈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말하자면 현재의 환난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흔적이요, 장차 나타날 영광의 훈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1:24절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러므로 "이제 후로는 나를 괴롭게 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자기의 몸에 채우는 것으로 충분한데 육체의 할례 문제를 가지고 자기를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으므로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명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처럼 그렇게 큰 흔적을 남기지 못할지라도 ▶무릎 꿇고 기도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한 사람들은 무릎과 발등에 굳은살이 박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다가 생긴 흔적을 기뻐하십니다. ▶야곱도 기도의 흔적을 일생 지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러 400명의 군사를 끌고 올 때에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밤새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그 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야곱은 그 천사에게 '축복을 주고 떠나라'며 놓지 않고 매달리자 이 때 천사는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야곱을 죽을 때까지 절었습니다. 물론 기도응답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져서 일생을 절었습니다. 기도의 흔적이었습니다.
  ▶기도의 왕이라 별명을 가지고 있는 '죠지 뮬러'에게도 기도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후원자 한 명도 없이 3,000명의 고아를 일생동안 하나님의 방법으로 먹여 살린 신비한 기도의 왕이었습니다. 모두가 신비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한 부자가 뮬러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의 돈 나오는 구멍이 도대체 어디요?" 뮬러가 알고 싶으면 따라 오라고 하면서 자기의 기도 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도를 많이 하여 구멍이 난 방석을 들어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이 구멍이 바로 돈 나오는 구멍이요" 이런 기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던 뮬러를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사용하셨습니다. /할/
  ▶또한 우리의 얼굴에 눈물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같은 통회하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하던 밤에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베드로는 밖으로 뛰어나가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그 통곡하는 눈물이 있었기에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의 위치를 지켜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로 매달려 보십시오, 하나님은 성도의 눈물에 약하십니다. 히스기야 왕은 눈물로 기도하다가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열심히 교회에 충성하는 손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손길, 그 흔적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인류의 최대의 영광스러운 흔적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존귀하신 몸에 로마 병정들은 잔인하게 상처를 냈습니다. 이마에는 가시의 흔적이 있었고, 양손과 양발에는 대못에 박힌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 옆구리에는 창에 찔려 큰 상처가 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흔적 때문에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고, 구원의 자리에 설 수가 있었습니다. /믿/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화입니다. 메리 엄마는 얼굴에 흉터가 많이 있었습니다. 메리는 그런 엄마가 학교에 오거나 친구들 앞에 나타나는 것이 창피하고 싫었습니다. 하루는 메리가 울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왜 엄마는 그렇게 생겼어!" 친구들 보기에 창피하다고 울었습니다.
  그때 엄마는 "메리야 울지 마라! 엄마도 참으로 아름다운 때가 있었단다"하면서 앨범을 꺼내어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대학시절의 아름다운 얼굴, 결혼할 때의 행복했던 모습과 자기를 품에 앉고 찍은 엄마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난 일들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딸아! 네가 두 살 되는 어느 날, 너를 잠들게 하고 나는 시장에 갔었단다. 가다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뒤돌아보니 우리 동네에서 불길이 치솟기에 달려가 보니 우리 집에 불길이었단다. 나는 정신 없이 너를 살려내려고 불길 속에 뛰어 들어가 가슴에 너를 앉고 나오다가 화상을 입고 나는 쓰려졌단다. 후에 깨어나 보니 나는 병원에 있었고, 너는 머리칼 하나 상하지 않았기에 엄마는 너무 감사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단다."
  이 말을 들은 메리는 엄마의 품에 안겨 울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살려준 자랑스러운 엄마의 얼굴이 부끄러운 흉터로 알았던 것을 뉘우치고 그때부터 엄마의 흉터를 자랑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이 있었기에 우리가 오늘 구원의 반열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여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나는 그 십자가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자랑했습니다. /할/

 

4, 신앙은 흔적의 아픔 속에 기적이 나타납니다.

 

  새 생명이 태어날 때는 고통이 따르는 법입니다. 영적인 새 사람이 태어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산의 고통을 통해 얻은 생명,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바울은 갈4:19절에서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했다"고 했습니다. 참된 성도는 그 신앙의 아픔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아픔이 없는 신앙, 아픔이 없는 교회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생명력이 없는 성도는 죽은 성도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흐르는 물과 함께 떠내려갑니다. 사실 죽어서 함께 떠내려가면 전혀 고통이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평안합니다. 살아서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고통스럽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성도의 산 믿음의 증거입니다.
  기독교의 길은 눈물 없이 못 가는 길입니다. 피 없이 못 가는 길입니다. 그것이 골고다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아픔의 상처 속에서 나타나십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의 절정은 모리아 산에서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아픔이었습니다.
  이 고통과 아픔처럼 사람을 성화 시키는 일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그 언덕, 그 십자가상의 주님을 쳐다봅시다. 피와 땀과 눈물과 아픔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 몸부림과 탄식 속에서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절규가 들려오지 않습니까? ▶아픔이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아픔이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아픔이 있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딤후2:11절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할/
  ▶진주조개가 자신의 상처 속에서 진주를 갈고 닦아 만들어내듯 우리 영적인 생명은 '스티그마' 이 흔적의 상처 속에서 진주보다 더 아름다운 진리의 빛이 나타납니다.
  진정한 아픔은 자신의 희생이, 헌신이 동반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교회를 섬기는 것도, 희생과 헌신의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의 바울의 고백은 바로 이런 아픔의 고백입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이 흔적은 육체에 새긴 문신 같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의 마음속에서 한 순간도 사라지지 않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선명하게 새겨진 마음 판의 십자가 흔적이었습니다.
  그 흔적을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후2:15절 "우리는 구원 얻은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그리스도인 자체가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향기는 향기를 만들어서 내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어도 향기가 납니다. 그런데 움직이면 향기는 더 크게 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빛을 드러내고 섬김의 도리를 감당하는 향기를 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화장품으로 마사지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사지를 하고, 주님의 보혈로 마사지를 하고, 예수의 흔적으로 마사지를 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에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하고 진실한 삶이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얼굴에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기쁨과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와 찬송과 감사와 헌신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에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부지런히 복음을 위해 뛰어 일해야 합니다. 전도의 흔적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다고 말할 때의 흔적은 전도의 흔적입니다. 우리의 성품 속에, 심령 속에 예수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온유와 겸손, 사랑과 용서와 자비가 계속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죽어질 때 나타납니다. 예수의 흔적은 자기를 희생하고 드릴 때, 나타납니다. 이 흔적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 위대한 믿음의 주인공이 되고, 능력의 주인공이 됩니다. 이 흔적이 기적을 가져옵니다. 이 흔적이 축복을 가져옵니다. /할/
  ▶옛날 어느 부잣집의 막내딸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집의 가축들이 주인을 위해서 보답을 하자며 회의가 열렸습니다. 소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내가 이 집에 오래 있었으니 회장이 되겠소" 하고 점잖은 목소리로 개회를 선언합니다.
  "며칠이 지나면 집 주인의 사랑 받는 따님이 결혼하는데 누가 잔치 때 잔치 상의 제물이 될 것인지 결정을 하려고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주인을 위해서 할 일 없는 동물이 죽는 것이 좋겠는데 여러분 의향은 어떻습니까?" "좋소!" 모두는 만장일치로 결의되었습니다.
  먼저 소가 "나는 주인님의 농사일을 해야 되니까 지금 죽을 수 없소. 짐도 날라야 되고 밭도 갈아야 되니까 어쩔 수 없소."라고 말했습니다. ▶다음에 나귀가 "나는 주인님을 태우고 다녀야 되고 이번에 결혼할 막내 따님도 모시고 가야 되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살아야 되겠소."하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개가 나와서 "나는 주인님의 도둑을 지켜야 되니까 죽을 수 없소."라고 말하자, ▶고양이가 성큼 올라서서 "나는 주인님 창고의 곡식을 훔쳐먹는 쥐들을 지켜야 하니까 죽을 수 없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 때 닭이 일어서서 "꼬끼오" 하면서 "나는 이렇게 새벽마다 울어서 주인 깨워서 일 시켜야 되니까 나는 죽을 수가 없소." 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동물들이 하는 말을 잠잠히 듣고 있던 돼지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서 이 몸 바칩니다. 나는 주인의 것을 먹고 한 일 없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그저 주인 따님 잔치에 내가 죽겠소. 그래서 돼지가 잔치마다 잡혀지게 되었다는 전설입니다. 이렇게 희생하고 남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할/ 이런 삶 속에 예수의 흔적이 묻어나게 됩니다. /믿/   (2006년 7월 2일 맥추감사절 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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