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 존 맥아더
1. 고린도전서 15:1-58 / 부활 진리의 개관
서론
1. 불멸에 관한 호기심
욥은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 14:14)라는 질문을 하였다. 그러나, 욥만이 유일하게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아니다. 정상적인 지능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죽음 이후에도 삶이 있는가?”라고 불멸에 관한 질문을 했으리라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죽음 이후에도 삶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나, 아무리 그런 사람이라 해도 이 문제와 씨름해 본 적은 있을 것이다.
2. 고린도를 타락시키는 자들
고린도 시에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일어났다. 고린도전서 15장을 기록하게 된 이유가 12절에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 중에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도 있었던 것같다. 고린도 교회의 잘못은 대부분이 실제적인 것들이었으나, 15장에서 우리는 그들이 하나의 중요한 교리적인 잘못을 범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활에 관한 문제이다. 부활을 부인할 경우, 아주 엄청난 결과들을 초래하게 되므로 바울은 이러한 질문을 매우 단호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3. 부활의 중요성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 전체를 파괴하는 셈이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예수님의 교훈이나 그분의 생애, 그분의 사랑, 그분의 기적, 또는 그분의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결정을 이룬 이 모든 것들 위에 기초하고 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모든 다른 요소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잘못을 시정해 주는 데에 고린도전서의 가장 긴 장을 할애하였다.
4. 영원에 대한 의식
인간의 전 역사를 통하여 모든 사람, 모든 사회, 모든 종교, 그리고 모든 조직은 항상 사후 생명의 실재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인간은 자신이 두 개의 막다른 끝 사이에 있는 의식의 희미한 빛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또는 거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원형질(原形質)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 것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였다. 인간은 항상 그 이상의 무엇이 되기를 갈망해 왔다.
예일 대학교의 학장이었던 찰스 브라운(Charles Brown)은 이렇게말했다.
”내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에 등을 돌리셨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분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런 다음 그를 무덤에 버리셨다는 것, 그리고 세째는 그분께서 인간의 마음 속에 불멸에 대한 소원을 심으시고 그것을 충족시키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불멸을 갈망하고 추구해 왔으며,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자 애써 왔다.
5. 성경의 확증
성경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거듭하여 언급하고 있다.
1) 마태복음 25장 46절
모든 영혼에게는 영원한 지옥, 혹은 영원한 천국이란 내세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마 7:13-14 / 계 20:12, 15 참조).
2) 요한복음 5장 25-29절
어떤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며 또 어떤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로 나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에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이 있으며,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이 있다. 성경은 죽음 이후 삶의 실재에 대하여 명백히 말하고 있다.
죽음 이후의 삶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알아 보기 위하여 우리는 고린도전서 15장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중요성과 또한 이것이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주는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주제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또한 그분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의 중요성이다. 바울은 부활에 대한 증거와 또한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왜 믿어야 하는가를 보여 줌으로써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을 다루고 있다.
6. 기독교의 핵심
신약성경에는 부활에 대한 언급이 104회 나와 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사도의 설교에 있어서 부활은 가장 심오하고 탁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1) 사도행전 1장 21-22절
유다가 자살한 후, 열 두번째 사도가 사도의 계열에 보충되었는데, 그 기준 가운데 하나는 그가 부활의 목격자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2) 사도행전 2장 14-36절
오순절날 베드로가 행한 첫번째 설교는 부활에 근거한 것이다. 32절에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하였다.
3) 사도행전 4장 33절
사도행전의 좀더 뒷부분에서는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4) 사도행전 17장 22-32절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행한 설교의 중심 교리는 부활에 대한 것이었다.
5) 사도행전 26장 23절
바울은 아그립바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면서 부활을 설교했다.
부활은 근본적인 것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미혹된 순교자의 영웅적인 죽음이나 정신착란을 일으킨 광인(狂人)의 감상적(感傷的)인 죽음, 또는 한 사기꾼이 처형당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의 값을 지불하는 대속(代贖)의 죽음이 되었으며, 또한 믿는 자들을 자유케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우리 신앙의 핵심인 부활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어야 하는가?
그렇다. 반일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로마서 10장 9절에서는 말씀하기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하였다. 이처럼 구원은 부활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만일 자신이 부활을 믿고 있는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무엇을 주장하든지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이다.
부활의 증거(1-11절)
바울은 부활의 증거를 언급함으로써 고린도에 들어온 이단에 대하여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세 영역의 증거를 들고 있다.
1. 교회(1-2절)
부활의 멧세지가 참되다고 하는, 첫번째 영역의 바울의 증거는 지구상에 사는 모든 믿는 무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데 모인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하는 말의 근본적인 의미는 ”내가 전한 복음을 너희가 받아, 그 위에 섰으며, 그것에 의하여 구원을 얻었으며, 또한 오늘도 그것을 굳게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며 자기의 교회를 세우시고 계심을 나나내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2. 구약성경(3-4절)
부활을 믿을 수 있는 두번째 이유는 그것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1)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 예언됨(3절)
구약성경은 메시야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실 것을 말하였다.
- 시편 22편
- 이사야 53장
- 구약의 제사에 있어서 제물로 바쳐진 어린 양은 모두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모형이었다(요 1:29/ 행 8:32/ 벧전 1:19).
- 모세가 광야에서 든 뱀은 장차 들리우실 그리스도, 즉 죄를 치료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에 대한 모형이었다(민 21:9/ 요 3:14-16)
- 그 밖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예언하고 있는 많은 구약성경 구절들이 있다.
2) 부활하실 것이 예언됨(4절)
구약 성경은 또한 메시야가 부활하실 것을 말하였다.
- 시편 16편 10절은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예언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무덤 속에서 결코 죽지 않으실 것임을 가리킨다. 과연 그분은 썩지 않으셨다(행 2:31/ 13:34-37 참조).
- 메시야가 사흘 동안 무덤 속에 있을 것이 요나서 1장 17절에 상징적으로 예언되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가리켜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 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고 친히 말씀하셨다.
3. 목격자들(5-11절)
- 베드로
- 열 두 사도
- 500여 형제
- 야고보
- 모든 사도들
- 바울 : 그는 이 목격자들의 목록에서 자기 자신을 따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지닌 상이(相異)한 특징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말하기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요지는 이와 같다.
”이 사람들은 모두 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글쎄, 이 사람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사랑하고 또한 너무나 간절히 그분을 보고 싶어한 나머지 환상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간절히 그분을 보기 원했기 때문에 그분을 보았다고 생각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는 어떠한가? 내가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이었다. 이 경우는 좀 다르지 않은가 ! 나는 그분을 보고 싶어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그분의 환상을 구하고 있지도 않았다. 사실 나의 경우에 있어서, 비록 내가 늦게 왔으며 또한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분께서 일단 나를 은혜로 붙드시자 나는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나나 그들이나 우리는 모두 똑같은 부활을 전파하며 믿는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겠는가? 다른 목격자들은 원래부터 그리스도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지만, 바울은 비호의적이었다. 그런데 부활에 대해서는 그들 모두의 의견이 똑같이 일치하였다.
부활의 중요성(12-20절)
1. 비평가들
고린도 교회의 교인 가운데는 부활을 부인하면서도 겉으로만 교회 일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12-20절에서 부활의 중요성을 다루고 있다. 비평가들이 와서 ”부활은 없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12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라고 말하고 있다.
2. 결과
13-19절에서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정말 없다고 할 때 생길 결과에 대하여 고찰하고 있다.
-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13절).
- 모든 설교는 무의미하며 모든 사람들의 믿음은 어리석은 것이다(14절).
- 설교자들은 모두 거짓말장이이고 그들의 설교는 거짓말이다(15절).
- 믿음은 전적으로 무익하며 사람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17절).
그 요점은 이렇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셨다. 만일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죄가 그분을 죽인 것이다. 따라서 그분은 죄를 정복하실 수 없으셨던 것이 된다. 만일 그분이 죄를 정복하실 수 없었다면, 우리는 곤경에 처할 것이다. 왜냐하면 죄가 우리 또한 죽일 것이며 우리를 지옥에 떨어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3. 결론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현세(現世) 뿐이라고 바울은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그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리라”(19절)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이 현세에 국한된 것이고 내세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없다면, 그런 것에 신경쓰지 말라! 그런 것이 뭐 필요한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 힘으로도 할 수 있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부활은 철학적인 논의처럼 대강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부활을 그릇 처리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에서 바로 그 심장을 떼어 내는 셈이다. 왜냐하면 모든 일에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부활이기 때문이다.
부활의 순서(20-28절)
20절의 첫 단어는 ”그러나...”이다. 당신은 이 말이 반갑지 않는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그분은 살아나셨으며, 이것은 사실이다 ! 1-11절에서 주어진 증거들이 이것을 뒷받침한다. 이제 부활이 일어나는 순서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 그분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1. 첫 열매의 의미
1) 원리
밭에 씨를 뿌렸을 때, 똑같은 기후에 똑같은 양의 비가 내리면, 맨 처음에 뿌려진 씨가 맨 처음에 결실할 것이다. 첫 열매가 나머지 농작물보다 먼저 맺어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첫 열매를 원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 그들의 곡식 단을 조금만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처음에 결실하는 것을 거두어 들여 그분께 바치고, 그런 다음 나머지 농작물들이 잘 결실하게 해 달라고 그분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아주 실제적인 농부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 저는 모든 농작물이 다 결실할 때까지 기다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만일 밭에 남는 것이 있으면 그때 그것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당신께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은... 그것은 결실한 것으로 제가 알고 있는 일부입니다. 나머지 곡식도 그것처럼 충실하게 결실이 될지는 불확실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첫 열매는 하나님께서 받기 원하시는 부분이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이었다 !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만일 너희가 나에게 첫 열매를 가져온다면, 내가 너희 창고를 채워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원리를 예시(例示)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가장 먼저 얻은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면, 그분께서는 그 나머지도 얻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2) 과정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은 첫 열매가 결실하면 그것을 베어서 성전으로 가지고 가 제사장에게 주었다. 제사장은 그 곡식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탈곡하여 구멍이 뚫린 냄비에 넣어 불에 그을렸던 것이다. 그런 다음 바람에다 대고 껍질을 날려 보냈다. 이 곡식은 한차례 가루로 빻아진 다음, 제사장에게 주어졌으며, 그는 그것을 봉헌하였고,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 먹었다. 이것이 그 과정이다. 첫 열매는 그 후에 결실할 수확의 예표(豫表)였다.
3) 모형
바울은 이곳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그리스도를 잠들어 있는 모든 자들의 첫 열매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는 무덤으로부터의 첫 열매이셨다. 첫 곡식처럼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베어 하나님께 바치셨으며, 죽음의 불에 태워지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생명의 떡”(요 6:35)이 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한 보증이시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 다음에 거둬지는 수확물이다.
2. 부활의 순서
1) 차례
그 구체적인 순서는 23절에 나온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 개관
이 20-28절까지의 부분은 나중에 상세하게 다룰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개관만 하겠다. 아담이 오고 세상에는 죽음의 씨앗들이 뿌려졌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누구나 똑딱거리는 시계와 함께 태어나는데, 이 시계는 그가 죽을 때 카운트다운 제로(0)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모두 죽음의 씨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써 새로운 부활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나타내 보이셨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다 부활할 것이다. 언제 부활하는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부활한다. 수확물이거두어 들여졌을 때 왕국은 그분의 것이 될 것이다. 그런 다음 그분은 이 나라를 취하시고 성부 하나님을 제외한 우주의 모든 것들을 그분 자신에게 복종시키실 것이다. 모든 것들을 복종시키신 다음, 그분은 그것을 취하셔서 그분 자신을 포함하여 성부 하나님께 드리실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 과정은 완성되는 것이다.
부활의 가치(29-34절)
1. 구원에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29절)
이것에 대해서는 본 시리이즈의 후반에 가서 상세하게 논의하겠다.
2. 봉사에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30-32절)
30-32절에서 바울이 하는 말의 기본적 의미는 이렇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왜 내가 이렇게 힘들고 어렵고 험난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참으로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만일 내가 내일 죽는다면, 나는 오로지 먹고 마실 것이다. 만일 부활이 없고 내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다면 나는 여한없이 최대한으로 생을 즐기며 살겠다.”
바울의 말이 옳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모든 것을 잃는다. 모든 도덕도, 모든 정의도, 모든 윤리도 사라진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만다. 내일 죽을 것이라면 차라리 먹고 마시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당신이 현재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최대한으로 만끽하라. 왜냐하면 그것이 당신이 누릴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
3. 성화(聖化)에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33-34절)
33-34절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 가운데 부활을 부인하고 부도덕하고 악한 삶을 사는 자들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다음 그는, 부활이 있으며, 또한 의로운 심판이 있을 것이므로 그들과의 교제를 끊으라고 말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은 의로운 표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좋고, 또한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과 사귀지 않는 게 좋으며, 그들이 행하는 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기」때문이 다.”
당신이 믿는 바는 당신의 행위에 큰 영향을 끼친다. 세상에는 악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악하게 산다고 해서 불행한 결과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이나 부활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다. 무신론자란 교활한 결론을 내리는 교활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을 제거하고자 하는 악하고 비열한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가 죄를 범해도 아무런 불행한 결과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부활의 가치는 이렇다. 즉, 만일 부활이 없다면, 도덕도 없고, 윤리도 없고, 의도 없으며 아무것도 없다! 차라리 우리는 놀러 다니고 육체가 하고자 하는 대로 행하며 여한없이 사는 것이 낫다. 그러나, 부활은 있다 !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또 하나의 문제가 따른다.
부활의 몸(35-50절)
1. 비평
35절에는 누군가가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 물었다고 했다. 다시 말하자면, 혹자가 와서 이렇게 말한다.
”오, 그거 아주 좋은 말씀이오. 바울 선생,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것인지는 왜 말해 주지 않소? 나는 죽은 사람들을 보아 왔소. 얼마 후에 보면 흙밖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살아날 수 없었소 !” 그들은 부활에 대한 모든 관념을 비웃었다.
2. 전환
36-41절에서, 바울은 비평하는 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원리, 즉 씨가 식물로 전환(轉換)하는 원리로 그 비평적인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씨를 땅에 뿌렸을 때 그 씨는 죽고, 썩고, 부패하고, 또한 분해되며, 그런 다음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나온다고 바울은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당신이 전문가가 아닌 이상 어떠한 씨앗을 보고서 그것에서 어떤 식물이 나올지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한 움큼의 씨앗을 이름도 말해 주지 않고 주었다면, 당신은 그 씨앗을 심어 거기서 식물이 자라나올 때까지는 그것이 무슨 씨앗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씨앗과 그 씨앗에서 자라 나오는 식물과는 그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어떠한 몸으로 부활하는가?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현재 우리의 몸은 죽어서 분해될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지금의 몸과는 다르고 또한 독특한 몸이 나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3. 특징
42-44절에서 바울은 부활체(復活體)의 네 가지 특징을 말하고 있다.
1) 썩지 아니함(42절)
그것은 결코 죽거나 썩거나 늙지 않는다.
2) 영광스러움(43절)
다시 말해서, 그것은 현세적인 몸이 아니다. 그것은 현세적인 몸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3) 강함(43절)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능력을 지닌 몸으로 살아날 것이다.
4) 영적임(44절)
우리의 자연적인 몸은 이 세상적인 요인에 의해 지배를 받지만, 영적인 몸은 그러한 제약을 받지 않는다.
4. 확증
45-50절에서 바울은 성경에 호소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확증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창세기 2장 7절을 인용하고 거기에다 약간의 생각을 첨가하고 있다. 자연적인 몸과 영적인 몸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운데, 바울은 아담이 자연적인 몸을 입었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아담과 같은 자연적이고 흙에 속한 인간의 몸을 입는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영적인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몸을 입는다. 우리의 첫번째 몸은 아담과 같고 두번째 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같다. 그리고 50절에 의하면,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몸을 입지 않으면 안 된다. 썩을 몸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부활의 순간(51-53절)
51절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 다 변화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믿는 자들이 다 죽지는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다 변화할 것이다. 왜 그런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썩지 아니할 몸을 입지 않는다면, 썩지 않는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다. 영광스러운 몸을 입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광스러운 영역에서 살 수 없다. 강한 몸을 입지 않고는 하나님의 강하심을 나타낼 수 없다. 영적인 몸을 입지 않고는 영적인 영역에서 살 수 없다. 우리는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 변화하는가? 52-53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일은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들어 올리시기(휴거) 위하여 오실 때 일어나는데(살전 4:13), 그분은 언제라도 오실 수 있다.
부활의 승리(54-57절)
54절은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땅에 씨앗을 뿌릴 때, 당신은 ”아, 가엾어라, 불쌍한 작은 씨앗”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꽃이 필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한다. 씨앗이 존재하는 이유는 꽃을 피우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아, 슬프다. 그리스도인이 죽다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슬픈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충만한 부활의 생명을 경험할 것이며 또한 영광스러운 새 몸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망의 쏘는 것을 제거하셨다. 사망은 그리스도인에게 무력하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부활의 실용성(58절)
아마 당신은 ”이것은 단지 먼 훗날에 가서야 누리게 될 축복인가? 이것은 단지 미래의 소망에 불과한가?”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 여기에는 상당한 실용성이 있다. 58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자기를 충성되이 섬긴 자들에게 상급을 주시러 오실 것이니 굳게 서서 일하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부활의 실용성은 이러하다.
- 그것은 우리에게 큰 확신을 준다.
-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순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을 위해서 일하게 한다.
당신은 당신의 삶에 부활이 실재함을 알고 있는가?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면 그것을 알 것이다 !
2. 고린도전서 15:1-4 / 부활에 대한 증거(1)
서론
1. 기독교의 초석
심장이 생명을 주는 피를 온 몸에 밀어 보내는 것과 같이, 부활은 바로 복음의 심장으로서 진리의 전 영역에 생명을 공급해 준다. 부활은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기독교 전체가 회전하고 있는 추축(樞軸)이다. 부활을 빼내어 버린다면 기독교는 희망적인 사상, 아니면 또 하나의 무익한 인간 철학이 되고 만다.
여러 시대를 통해 내려오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치스러운 죽음을 죽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살아나셔서 죽음을 이기셨으며 또한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9 하)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동일한 부활의 소망을 주셨다고 하는 사실에 자신의 운명과 삶과 소망을 의지해 왔다. 십자가에 못박힌 스승을 따라다녔던, 비탄에 잠긴 자들을 초대 교회의용감한 순교자들로 변화시긴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이었다. 성도의 교제를 탄생시킨 것은 바로 부활이었으며, 그들이 교회가 되었다. 교회가 성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당시, 그들은 옥에 갇히고 형벌을 받고 매 맞고 욕설을 듣고 심지어 죽음을 당했지만, 그러나 아무도 그들로 하여금 부활의 실재를 부인하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기독교 신앙의 초석은 항상 있어 왔으며, 또한 항상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다면 구원도, 그리스도의 신성도, 영생도, 그리고 죽음의 중요성도 다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활은 항상 공격을 받고 있다.
2. 고린도인의 부인(否認)
1) 구원의 필요 조건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9절에서 말하기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하였다. 구원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데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고백이 없다면, 구원이 있을 수 없다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성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고서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수 없다. 이것은 최소한의 조건이다.
2) 고린도전서 15장을 기록한 목적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들이 부인한 것은 성도의 육체적 부활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관심사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문자 그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기 때문에 그들 역시 문자 그대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히 하고 입증해 보이기 위하여 고린도전서 15장이 기록되었다. 이 장(章)의 내용은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이 무덤에서 나오는 것에 관한 것이다.
3) 고린도인의 신학에 있어서의 문제점
고린도인들이 갖고 있었던 문제는 성도들이 문자 그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데 관한 것이었다. 그들이 갖고 있었던 문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데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인들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자신의 부활을 부인할 때 생기는 결과에 대해서는 결코 알지 못하였다. 이것이 바로 15장 전체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문제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살펴보자. 고린도인들은 그 당시의 신념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그들이 살던 사회의 모든 철학에 사로잡혀 그 죄가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였다. 고린도 교회는 세상과 혼합하게 된 것이다.
1)헬라 철학의 영향
헬라인들 사이에서는 육체적인 부활과 같은 것이 부인되고 있었다. 그래서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물질적인 부활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헬라 철학의 강력한 영향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다 육체적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즉, 그들은 육체적인 부활을 그리스도에게만 국한시켰다. 그들은 일어나기로 예정된 유일한 부활은 이미 일어났다고 말한 디모데후서 2장 17-18절에 나오는 후메내오나 빌레도와 같았다 !
헬라 철학이 신봉하는 바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실례를 보려면, 사도행전 17장 18-32절을 보라. 이곳을 보면 바울은 헬라 세계의 철학의 중심, 그 중에서도 핵심인 아덴 시에 있었다. 아덴에 도착한 바울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무덤으로부터의 육체적인 부활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헬라인들에게 뚜렷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들은 바울을 ”말장이”,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 ”새 교(敎)”를 소개하는 사람, 그리고 ”이상한 것”을 전하는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더우기 32절에는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희롱도 하고”라고 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철학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아덴에서 전한 멧세지를 확실히 믿을 수 없었다. 고린도가 아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아덴에 본거지를 둔 헬라 철학이 고린도에 끼친 영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철학적 이원론
철학적 이원론(二元論)이란, 물질은 악하고 정신은 선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 철학의 창시자는 플라톤(Plate)으로서 헬라 사상을 지배하였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악한 육체는 벗겨져 버리고 선한 영혼은 불멸의 상태로 들어간다고 믿었다. 그들은 육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인간의 육체는 사람이 죽을 때 탈출하는 감옥이라고 플라톤은 가르쳤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육체의 부활이란 두번째 지옥과 같은 것이었다. 사실 헬라인들에게는 ”육체는 무덤이고, 나는 시체에 속박된 가련한 영혼이다”라는 속담이 있었다. 헬라인들은 영혼의 불멸은 믿었지만 육체의 부활은 믿지 않았다.
- 스토아 철학
사도행전 17장 18절에 언급되어 있는 스토아 철학자들은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비슷한 아주 흥미로운 철학적 집단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은 불타는 영(靈)이신데, 사람이 태어날 때마다 자신의 불에서 작은 조각을 보내 사람의 육체 안에 살게 하신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육체 안에 있는 신성(神性)의 작은 조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신성(神性)의 작은 조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가르치는 내용과 일치한다. 그런데 스토아 철학자들은 육체가 죽으면 무덤 속으로 들어가 유골(遺骨)로 해체되고 티끌로 돌아가며, 작은 불 조각은 돌아가 큰 불(하나님)과 재결합한다고 했다.
이러한 문화와 철학, 그리고 종교에 길들여진 헬라인들이 육체의 부활을 용납하거나 심지어 이해하기조차 어려웠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육체의 부활은 조롱하지 않을 수없는,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이상한 멧세지였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을 믿으면서도(그들은 구원받은 것이 분명하다), 모든 사람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2절에서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다시 말해서,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또한 육신적으로 다시 살아나셨음을 이미 인정하였다면, 너희도 역시 다시 살아날 것임을 왜 믿을 수 없는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야기된 데에는 또 다른 요인들이 있다.
2)사두개인들의 영향
그 당시에는 샤두개인으로 알려진 유대인들의 집단이 있었다. 그들은 육체적인 부활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소망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기대하는 것도, 기다리는 것도 없었다. 사도행전 23장 8절에 의하면 사두개인들은 천사의 존재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아마 고린도인들은 이들의 영향도 받았을 것이다.
3) 회의론자들의 영향
”썩고 부패하고 악취가 나는 것이 땅에서 나와 불멸의, 신적인 영혼의 거처가 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라고 육체적인 부활에 대하여 농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육체적인 부활을 그렇게 보았다. 주후 220년 경에 셀수스(Celsus)라는 사람이 이러한 말로써 기독교의 육체적 부활 사상을 공격했다.
”이것은 벌레의 소망이다! 무엇 때문에 사람의 영혼이 썩어버린 육체를 더 원하겠는가?”
바울은 15장의 상당한 부분에 걸쳐 부활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고 따라서 육체는 썩는다고 광신하는 많은 회의론자들은 더 이상 부활에 대하여 비난을 퍼붓지 못했을 것이다.
유의사항 : 고린도전서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맨 먼저 기록된 책이다. 고린도전서는 복음서들보다 훨씬 오래 전에 기록되었다.
3. 일반적인 기초의 확립
1-11절에서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다. 12절에 가서야 비로소 문제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는데, 이것은 그가 먼저 일반적인 기초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 일반적인 기초란,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기초를 세운 다음, 바울은 15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우리 자신의 육체적 부활을 믿는 데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묻고 있다.
이 장과 다음 장에서, 1-11절을 중심으로 부활의 타당성에 대한 다섯 가지 증거에 대하여 알아 보겠다.
교회의 증거(1-2절)
1. 복음의 재확인
바울은 고린도인들로 하여금 기초를 기억하게 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장사지냄, 그리고 부활의 복음을 재진술한다. 바울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그들에게 전파했던 복음을 기억하게 하며, 또한 다음의 사실을 기억하게 한다.
1) 그들이 부활의 진리를 받았다는 사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또한 장사지낸 바 되셨다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사실을 받아들였다(요 1:12 참조).
2) 그들은 부활의 진리 위에 서 있다는 사실
”그 가운데 선 것이라”는 말은 헬라어에 있어서 완료 시제이다. 이것은 그들이 과거에 복음 위에 서 있었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그 위에서 있다고 하는 뜻이다.
3) 그들이 부활의 진리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진리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소유하게 되었다.
바울은 그들이 이미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재확인시키고 있으며, 또한 이것을 그가 이 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말하게 될 내용의 기초로 삼고 있다.
2. 복음에 대한 책임
1) 문제
2절 끝에 가서, 바울은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이라는 흥미로운 주(註)를 덧붙이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복음을 굳게 붙들고 있다면 그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만일 그들이 복음을 굳게 붙들지 않는다면 구원을 잃는다는 뜻인가? 바울은 믿는 자들이 영원히 안전하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는가? ”헛되이” 믿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바울이 2하반절에서 말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을 설명해 보겠다.
2) 관점
신약성경에 보면 보증과 가정(ptesumption) 사이에는 항상 균형이 잡혀 있다. 즉,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행하시는 것과 믿는 자들이 자신의 믿음을 보존하기 위하여 행하는 것 사이에는 균형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관점은 하나님 편에서 보는 것이고, 또 하나의 관점은 사람 편에서 보는 것이다.
(1) 하나님의 관점
참된 신자는 보호되며 또한 안전하다. 고린도전서 15장 2절을 기록한 바울이 똑같이 다음 구절도 기록하였음을 기억하라.
- 로마서 8장 29-30절
이 구절들 가운데서 바울은 믿는 자가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안전함을 보여 주고 있다. 아무것도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정죄하거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그를 분리시킬 수 없다.
- 로마서 5장 9-10절
여기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를 의롭다 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심으로 우리가 더욱 확실히 구원받을 수 있음을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이다. 그는 믿는 자들이 안전하다는 것과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유물을 안전히 붙들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2) 사람의 관점
참된 신자는 그가 믿음에 거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의하여 알아볼 수있다.
- 무익한 믿음
만일 어떤 사람이 얼마 동안 믿다가 믿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가 결코 구원받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는 ”헛되이 믿은” 것이다. 그의 믿음은 무익하고, 쓸모 없는, 그리고 자신을 온전히 맡기지 않는 믿음이다. 사실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많다. 왜 그런가? 자신을 맡기지 않는 믿음은 무익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 야고보서 2장 17-20절 / ”너희는 나에게 너희의 믿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에게 그 증거를 보이라. 단지 너희가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귀신들조차도 믿는다 !”라고 야고보는 말했다.
- 누가복음 8장 13절 / 복음에 응답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들 모두가 합당한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네 종류의 땅에다 씨를 뿌린 사람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 네 종류의 사람들 중에 몇 명이나 참으로 중생했는가? 한 사람뿐이다! 바위 위에 떨어진 씨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은 사랑으로서 이것은 감정주의를나타낸다. 그들은 잠시 동안 믿지만, 뿌리가 없기 때문에 시험을 받을 때에는 넘어지고 만다. 그들의 믿음은 공허하고 헛되며 무익하고 아무 효과가 없다. 즉, 이 믿음은 참으로 맡기지 않는 믿음이다.
그런데 고린도에서 바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 그곳에는 놀라운 복음 전도 운동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고 교회는 성장하였으며, 굉장한 일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모든 감정에만 이끌려 인기있는 쪽에 붙었다. 그러한 그들의 믿음은 무익하였고, 효과가 없었으며 또한 공허하였다. 그들의 믿음은 자신을 맡기는 믿음이 아니었다.
- 요한복음 2장 23-25절 / 많은 사람이 애수께 대하여 ”그 이름을 믿었다”고 하였다. ”굉장한데! 그것은 큰 부흥이야!”라고 당신은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에 그 몸을 그들에게 의탁치 아니하셨다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자신을 온전히 맡기지 않는 피상적이고 무익한 믿음임을 아셨다.
- 요한복음 8장 30-31절 /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라고 30절에 말씀하였다. 이것 역시 복음 전파의 대단한 수확처럼 들린다. 그러나, 다음 절을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인기있는 쪽에 붙는다.
- 요한복음 6장 66절 /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잠시 동안 피상적으로 믿은 제자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대로 일들이 되어가지 않았을 때는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66절)고 하였다.
- 구원얻는 믿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참된 신자는 보호를 받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믿음에 거하는 자가 참된 신자이다. 믿음에서 떠나는 것은 그가 참으로 구원받은 것이 결코 아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 히브리서 10장 38-39절 /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기 때문에 당신은 그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다. 그의 믿음은 우발적인 순간 동안만 믿거나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믿음으로 생활한다. 의인은 계속적인 믿음으로써 살 것이다. 계속하여 38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당신은 누가 거짓된 그리스도인인지 말할 수 있다. 그는 공허하고 헛된 믿음을 가진 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파멸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 야고보서 1장 22-25절 / 야고보는 말하기를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듣고서 ”오, 이 말씀은 아주 놀랍다 !”라고 말한다. 야고보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믿음에 거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 된 증거이다!
- 골로새서 1장 21-23절 / 21절과 22절에서 바울은 구원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런 다음 23절에서 ”...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가진 복음의 소망이 흔들린다면, 그 소망이 참으로 당신의 것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당신은 헛되이 믿은 것이다. 당신의 믿음은 공허하고 무익하고 쓸데 없는 믿음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주권에 자신을 맡기지 아니한 믿음이었다.
- 요한일서 2장 19절 / 요한은 말하기를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고 하였다. 당신은 요한이 말하고 있는 바를 알겠는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떠나 믿음에 거하지 않을 사람은 결코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요한은 말하고 있다.
- 고린도후서 13장 5절 / 바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하고 있다. 당신은 당신의 믿음이 자신을 온전히 맡기지 않는, 공허하고 효과없는, 그리고 쓸모없고 무익한 믿음이 아닌지 살펴보는 것이 좋다.
3. 복음의 실제성
부활에 대한 최대의 주관적인 증거는 바로 교회의 존재이다. 고린도인들이 부활을 받아들였으며, 그 위에 섰으며, 또한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다는 증거이다. 그들은 더러운 자들이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외에 어느 누가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겠는가? 살아계신 그리스도 외에 어느 누가 이 강도, 도적, 동성연애자, 음란한 자, 거짓말하는 자, 그리고 간음하는 자(고전 6:9-10)를 모두 변화시켜 구속받은 자의 공동체 안으로 들게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어떠한 윤리 체계가 18개월의 기간 동안에(행 18:11 참조) 고린도의 전 주민들을 참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으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그것은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임에 틀림없다 ! 그리스도는 살아계심에 틀림없다 !
그리고 이곳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수년이 지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부활을 믿고 있으며, 그 가운데 서 있으며, 그것에 자신을 맡기고 있으며, 그것을 붙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덧붙인다면,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부활을 믿고 있다. 나는 세상에서,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최대의 주관적인 증거는 우리라고 믿는다. 이 2,000년 동안 우리는 부활의 신앙 가운데 거해 왔고, 세상의 무신론자들은 부활에 대하여 논박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왔으나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당신은 기억하는가? 사실 우리가 더욱 오래 살면 살수록, 부활의 증거는 더욱 더 커질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그분이 살아 계시다는 산 증거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증거(3-4절)
3절과 4절의 ”성경대로...”라는 말에 주목하라. 다시 말해서, 부활의 복음은 뒤늦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이미 다 예언되어진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수께서 죽으실 것과 또한 제 3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알고 있었다. 누가복음 24장 25-26절에 보면 부활하신 후 예수께서는 두 제자와 함께 엠마오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걸어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믿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영광을 얻기 위하여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그들이 말한 것을 너희가 알았을 것이다”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 것이다.
사도행전 26장 22-23절을 보면, 바울은 아그립바와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늘까지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1.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예언됨
- 시편 22편
- 이사야53장
- 창세기 22장 4-14절(히 11:19 참조)
- 구약의 모든 제물은 그리스도를 예언적으로 말하고 있다(요 1:29/ 행 8:32/ 벧전 1:13).
2. 그리스도의 부활이 예언됨
1) 레위기 23장9-14절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은 부활의 모형(模型)이다.
2) 시편 16편 10-11절
시편 기자는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 절에서, 그는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 거룩한 자는 장사지낸 바 될 것이지만, 그분의 육체는 썩지 않을 것이며, 다시 무덤에서 나와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뜻이다(행 2:25-32 / 13:34-37 참조).
3) 요나 1장 17절, 마태복음 12장 40절
예수께서는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 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4) 이사야 53장 10-12절
이사야 53장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예언되어 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 끝에 가서 보면 그분은 자신의 나라에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5) 호세아 6장 2절
”제 삼 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본 절에서 ”제 삼일에 그분이 자기 자신의 부활 안에서 자기와 함께 우리를 일으키시리라”고 이스라엘이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이 일으킴을 받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이다.
이렇게 구약성경이 부활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또한 살아 있는 교회가 부활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부활에 자신을 맡기지 않겠는가?
3. 고린도전서 15:5-11 / 부활에 대한 증거(2)
서론
최근의 신학자 에반스(C. F. Evans)는 부활에 대하여 말하기를, ”기독교 - 적어도 신약의 기독교 - 는 무엇보다 부활의 종교이다”라고 하였다(Resurredion and the New Testament, Naperville: Allenson, 1920, p 1).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 죤 로크(John Locke)는 말하기를, ”우리 구세주의 부활은 기독교에 있어서 정말 대단히 중요하다. 그분이 메시야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거기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A Second Vindication of tbe Reasonableness of Cbristianity, lled., London, 1821, vol. 7, pp. 339-42).
이 두 가지 진술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요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기독교는 부활에 기초해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가 메시야이시며 주님이시라는 사실 또한 부활에 기초해 잇다는 점이다. 부활은 기독교 진리의 초석이며, 또한 모든 인간 영혼의 운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1. 죽음과 내세에 대한 현대인의 호기심
1) 논제(論題)
Psycblogy Today 지(誌) 1976년도 9월호에서는(p. 44) ”죽음은 유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이란 이제 우리가 화제로 삼을 수 있는 논제이며, 또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2) 연구의 주제
현재 일부 고등학교와 대학들은 죽음과 내세에 대한 강좌를 개설하고 있다.
3) 일반적 관심사
최근의 갤럽 여론 조사의 보고에 의하면 미국 사람들 가운데 73%가 내세를 확실히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은 모두 다 죽음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다. 내세를 확인하지 못하는 27%의 사람들도 내세에 대하여 생각한 경험은 많다. 조사에 의하면, 실제로 대부분의 십대들은 5분마다 한 번씩 죽음에 대하여 생각한다고 한다.
2. 죽음과 내세에 관한 잡다한 개념들
1) 영혼이 잠든다(soul sleep)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죽을 때, 그 영혼이 잠시 동안 잠든다고 가르친다. 그런 다음, 그 사람은 열반(涅槃) 또는 극락(極樂) 세계 안에서 깨어난다는 것이다.
2) 종국(終局:termination)
이 견해는 사람이 죽으면 티끌로 돌아가며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이다. 즉, 소멸한다는 것이다.
3) 재화신(再化身:reincarnation)
나는 이 견해를 ”환생”(幻生)이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이것은 사람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부터 다른 무엇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다.
4) 흡수의 철학(the philosophy of absorption)
이것은 고린도 교회 주변의 헬라인들이 주장했던 견해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모든 사람 속에는 신성(神性)의 불꽃이 거하고 있으며, 사람이 죽으면 이 불꽃은 큰 불, 또는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죽으면 그는 신적인 정신에게로 돌아가 흡수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힌두교도들과 불교도들이 믿는 것이다. 사람이 일단 신적인 정신으로 돌아가 흡수되어 버리면, 결국은 그는 인간성과 개체성을 잃게 되며, 따라서 그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들은 개중에 운이 좋은 사람이 있다면, 후에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 환생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흡수, 재화신(再化身), 그리고 소멸의 모든 견해들에는 자아의 상실과 인간성의 소멸이라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인간의 영혼은 영원하며, 또한 인간의 몸은 불멸하는 몸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독특한 개체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 수 있도록 놀라운 변화들이 다소 일어나는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영원히 우리 자신으로 계속 존재할 것이다.
복습
1. 고린도 교회의 문제
고린도에 사는 헬라인들은 흡수론을 가르치고 있었으며, 그들의 철학은 고린도 교회를 잠식(蠶食)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 고린도 교회 안에는 육체적 부활을 부인하는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겼다. 그들은 영혼의 불멸은 믿었지만, 육체의 불멸은 믿지 않았다.
2. 고린도전서 15장을 기록한 목적
바울이 15장을 기록한 목적은 영혼의 불멸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몸의 불멸도 믿어야 하며, 또한 사람은 단지 부활 생명에 의하여 놀랍게 변화할 뿐, 영원히 동일한 사람으로 계속 남아 있게 된다는 사실을 고린도인들로 하여금 확신케 하기 위함이었다.
1) 바울의 멧세지
고린도전서 IS장의 멧세지는 영혼의 불멸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몸의 불멸이다. 헬라인들은 몸의, 육체의, 문자 그대로의 부활을 부인하였으며, 교회는 그것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에 대하여 대답하고 있다.
2) 바울의 방법
바울은 11절까지에서 이렇게 말함으로써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보라 ! 우리는 이미 예수께서 무덤에서 문자 그대로, 육체적으로, 육신적으로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고 있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있다. 그런데 너희가 너희 자신의 부활을 믿는 데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면, 그분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이며, 따라서 우리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3. 바울의 주장의 전제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육체적인 부활을 받아들이기를 원했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일반적인 기초, 즉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으며, 또한 이것을 그들 자신의 부활을 주장하는 전제로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받아들인다면, 그들 자신이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을 왜 믿지 못하는가 라는 것이다.
이제 1-11절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상기시키고 있으며, 부활의 타당성을 증거함으로써 부활에 대한 주장을 강화하며, 또한 예수께서 실제 육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문자 그대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대한 다섯 가지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교회의 증거(1-2절)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입증하기 위하여 고린도 교회에 제시하고 있는 첫번째 증거는 그들 자신이 교회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지 20년이 지난 당시,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있으며, 그 부활에 의하여 구원을 얻었으며, 그 위에 서 있으며, 그리고 그것을 붙들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바로 그들 자체가 산 증거였다. 즉, 그들은 부활의 공동체였다. 그들이 첫번째 증거였다. 사실, 모든 역사를 통하여 줄곧 교회가 존재해 왔다는 것은 부활의 복음이 참되다는 증거이다. 다른 것은 제치고라도 교회 하나만을 보라. 이 모든 것이 속임수로부터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셨다는 것밖에는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없다.
성경의 증거(3-4절)
1. 구약성경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고함
- 모든 인류를 위한 부활이 예고됨(시 49:15/ 73:24/ 사 26:19/ 단 12:2).
- 메시야의 부활이 예고됨(시16:10/ 호 6:2 등).
2.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고함
1) 예수님 자신의 예고
1) 마가복음 2장 18-20절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자기가 ”빼앗긴 후”에 그들이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헬라 원전상 ”빼앗긴다”라는 말은 구약성경 이사야 53장 8절의 헬라어 번역(70인역)에 사용된 말과 똑같다. 이사야 53장 8절은 그리스도가 도살장으로 끌려간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초기부터 자신이 죽으실 것을 예고하셨다.
2) 마가복음 8장 31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인자가...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막 9:9, 31 참조).
예수께서는 공생애 초기부터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이것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자신의 전(全) 사역의 본질이기 때문이었다.
2) 사도들의 설교
교회가 태동할 무렵 맨 처음 행해진 설교는 부활에 대한 것이었다(행2:22-36/ 3:13-15). 사도행전 1장 22절을 보면, 열 한 명의 사도들이 가룟 유다의 자리를 보충할 사람을 선택하려고 했을 때, 그 자격 중 하나는 그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자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3. 하나님 나라의 계획에 예정된 사항
예수님 자신이 생각하신 것처럼, 구약성경의 예언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신약의 서신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사명은 왕국(하나님 나라)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 일을 행하시기 위하여 그분은 사셔야만 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왕국의 백성들을 얻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죄의 대가를 지불하셔야 했다. 즉, 그분은 죽으셔야 했다. 이렇게 그분은 죽으셔야 하기도 했고, 또한 사셔야 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분이 이 둘 사이에서 살아나셔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부활은 복음의 중간적 위치에 있다. 그분은 죄의 값을 치르기 위해 죽으셔야 했지만, 또한 왕국을 세우기 위해 사셔야 했다. 그래서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야 했던 것이다.
구약성경은 메시야의 죽으심을 거듭 예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왕이 오셔서 자기 왕국을 세우시고 다스리실 것 또한 예고하고 있다. 만일 성경이 메시야가 죽으실 것과 또한 그분이 다스리실 것을 말하고 있다면 그 중간에 부활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목격자들의 증거(5-7절)
1. 증언
목격자들의 증언은 좋은 증거이다. 오늘날과 그리고 전 역사를 통하여 인간의 법정은 가능한 한 언제든지 목격자들의 말을 근거로 하여 판결을 내린다. 특히 목격자들이 진정한 성실성, 지성을 갖춘 유능하고 건전한 사람일 때, 이들의 말은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에 호소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실제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들이 만일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에 대하여 의심한다면, 그분을 본 500명 이상의 사람들에 대하여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얼마나 확실한가?
에드워드 클라크(Edward Clarke) 경이라는 한 법률가는 이렇게 말했다.
"법률가로서 나는 오랫동안 처음 부활절의 사건들에 대한 증거들을 연구해 왔다. 내가 보기에 그 증거는 확실하며, 고등법원에서 있었던 많은 재판 때에도 이처럼 강력한 증거는 거의 찾아보지 못했다. 증거에 대해서는 추론(推論)이 뒤따르게 되는데, 믿을 만한 증언은 언제나 꾸밈이 없으며 결과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부활에 대한 복음서의 증거는 그와 같다. 법률가로서 나는 그 증거를 자신들이 입증할 수 있는 사실들에 대한 진실한 사람들의 증거로서 거리낌없이 받아들인다”(John R. W. Stott, Batic Cbristia-anit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g 1971, p. 47에서 인용).
세 권으로 된 저 유명한 「로마사」(History of Rome)의 저자이고, 또한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의 현대사 교수인 토마스 아놀드(Thomas Arnold)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주님의 생애와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거는 만족할 만하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자주 그렇게 인정되어 왔다. 좋은 증거와 나쁜 증거는 일반 법칙에 따라 구별하게된다. 모든 판단들이 가장 중요한 한 대의(大義)로 집약될 수 있도록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증거들을 하나씩 하나씩 주의깊게 검토해 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만족하기 위하여, 여러 번 거듭하여 그것을 검토하였다. 여러 해 동안 다른 시대의 역사들을 연구하며, 또한 그 역사들에 대하여 기록한 사람들의 증거를 조사하고 검토해 본 결과, 나는 인류 역사상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증거보다 더 훌륭하고 충분한 증거에 의해 입증되는 어떤 사실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Sermons on the Christian Life-Its Ho-pes, Its Fears, and Its Close 6th edition, London, 1859, p. 324).
신학자인 찰스 핫지(Charles Hedge)는 부활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고대 역사에 있어서 가장 잘 입증된 사건이다”라고 했다. 왜 그러한가? 무수한 목격자들의 증거 때문이다.
2. 현현(顯現)
5절에 보면 ”... 보이시고...”라고 했는데, 이는 직역하면 ”... 나타나시고 ...”이다. 부활하신 후 예수께서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까지는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1) 막달라 마리아
마리아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동산에서 그분을 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분이 예수이신 줄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께서 자신을 마리아에게 나타내셨을 때까지 그녀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요 20:14-16).
2)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두 제자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분과 함께 엠마오로 향하는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분이 누구신지 알았던가? 예수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나타내실 때까지 그들은 그분이 누구신지 알지 못했다(눅 24:13-31).
3) 고기를 잡고 있었던 사도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몇몇 사도들이 고기를 잡고 있었을 때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 나타나셨다. 그들은 그분을 보았으며, 심지어 그분과 이야기까지 하였지만, 예수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나타내시기까지 그들은 그분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그분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실 때까지 아무도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지 못하였다. 이곳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이러한 자기 계시들을 연대순으로 열거하고 있다.
3. 목격자들
1) ”게바”
”게바”라는 말은 반석이라는 뜻의 아람어이다. 반석이라는 뜻의 헬라어는 베드로이다. 따라서 게바는 베드로를 가리키는 또 하나의 이름이다. 베드로는 사도들 중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제일 처음 본 목격자였다. ”왜 예수께서는 자신을 부인했던 사도인 베드로에게 처음으로 가셨는가?”라고 당신은 물을 것이다. ”왜 그분은 절친하고 사랑하는, 또한 충성되고 훌륭한 요한이나 또는 다른 제자 중 하나에게로 가지 않으셨나?” 정확한 대답을 할 수는 없지만, 약간의 추측을 할 수는 있다.
-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용서를 강조하고자하셨다.
- 예수께서는 전략상 중요한 사역을 위하여 베드로를 필요로 하셨다. 그분은 곧은 막대기 뿐만 아니라 굽은 막대기도 사용하실 수있기 때문에, 곧바로 베드로에게 가신 것이다.
- 그리스도를 부인한 후, 베드로는 밖에 나가 상한 심령으로 통곡하였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하였으며, 또한 결코 그 일을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에게로 가서 그를 만나신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베드로를 지목한 것은 그가 열 두사도 중의 의심할 바 없는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첫 12장까지를 보면 그는 모든 사도들 가운데 가장 큰 사역을 감당하였으며, 가장 큰 신뢰와 신임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 가장 큰 능력과 영향력을 끼쳤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의 첫번째 증인으로 베드로를 선정하면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다. 그는 그분을 보았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열 두 제자”
유다가 배신한 후, 사도는 열 한 명이 되었지만, ”열 두” 사도라는 말은 이미 그들의 공식 칭호가 되어 있었다. 부활하신 후, 예수께서는 다락방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눅 24:33-43 /요 20:19, 26-29). 이들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교회를 탄생시킨 신학을 기록한 사도들이다. 사도행전 2장 42절 이후부터 계속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분명하게 말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수사도(首使徒)인 베드로와 다른 모든 사도들이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증거이다! 이들은 지성을 갖춘, 자격이 있는 증인들이다.
3) ”오백 여 형제에게 일시에”
부활은 증인들의 성격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증인들의 수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바울은 그 성격이 완벽하고 의심할 여지없는 베드로와 그 외의 사도들을 열거할 뿐만 아니라,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일시에 본 오백 여 명의 무리도 열거하고 있다. 그는 증인들의 질(質)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증인들의 양(量)도 말하고 있다.
이 일은 어디서 일어났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 일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고 믿는데, 그 이유는 이곳이 교회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1장 15절을 보면, 교회가 탄생될 때 예루살렘 다락방에 모인 자들은 단지 120명 가량의 제자들 뿐이었다. 마태복음 26장 32절과 28장 10절을 통해서 볼 때 예수께서 가장 큰 무리의 사람들을 맞이하신 일은 아마도 갈릴리의 한 언덕에서 있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
이 나타나신 일이 어디에서 일어났든지 오백 여 명이라는 증인들은 상당히 많은 수이다. 어떤 법정에서 오백 명의 증인이 모두 똑같은 사실을 말한다면, 그것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증거일 것이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어떤 일은 두세 증인의 말에 의해 확증되었다(신19:15).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신다. 바울은 이러한 증인들의 대부분이 아직 살아 있으므로 고린도의 어떤 회의론자라도 스스로 그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고 부언한다.
4) ”야고보”
이 사람이 사도들 중에서 이 이름을 가진 두 사람(알패오의 아들이나 세베대의 아들) 중의 어느 하나를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다. 바울은 우리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를 가리키고 있다. 그는 야고보서를 기록하였으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즉,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로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의 증거가 무엇이 그리 중요한가?”라고 당신은 물을 것이다. 야고보는 또 다른 종류의 증인이다. 요한복음 7장 5절에 의하면, 예수의 형제들 중에는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다. 야고보는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예수님 자신이 주장하신 바를 믿지 않았다.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 야고보는 그 죽음의 자초지종을 알고 나서 다소 양심의 가책을 느꼈으며, 또한 감탄을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부활하신 모습으로 야고보를 찾아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야고보는 믿었던 것이다! 바로 예수님 자신의 가족 중에서 믿지 않던 자가 믿었으며 완전히 변하였다. 야고보서 1장 1절에서 그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는 말로 자신의 편지를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자에게 있어서 엄청난 변화이다 ! 이렇게 바울은 질적으로 우수한 사람들의 증거와, 양적으로 많은 무리의 증거와, 그리고 예수님 자신의 가족 중의 한 회의론자 - 믿지 않다가 부활로 인하여 믿는 자가 된 - 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 다른 모든 것들은 그를 확신시키는 데 실패하였으나 부활은 그에게 확신을 가져다 주었다.
5) ”모든 사도”
사도행전 1장 3절에 말씀하기를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사도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고 하였다.
앤더슨(J. N. D. Anderson)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증거를 기각해 버리는 가장 철저한 방법은, 이 이야기들은 날조(捏造) 된 것들일 뿐이며 순전히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오늘날 단 한 사람의 비평가도 그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그러한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오백 명 이상이라는 증인들의 수를 생각해 보라. 그 증인들의 인격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세상이 이제까지 알고 있는 최고의 윤리적 교훈을 세상에 주었으며, 또한 그들의 원수들조차도 그들이 그러한 삶을 살았다고 증거하는 자들이다. 다락방 속에서 패배감에 젖어 위축되어 있던 일단의 겁장이들이 그로부터 며칠 후에는 어떠한 핍박에도 굴하지 않는 담대한 무리로 변하였다. 이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확신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세상에 유포시키려고 했던 보잘것 없는 날조 사실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불합리하다는 것을 생각하라. 그것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다”(”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Cbristianity Today, Match 29, 1968, pp. 5-6).
이렇게 증거는 찾으면 찾을수록 늘어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은 교회에 의하여, 성경에 의하여 그리고 목격자들에 의하여 입증되는 것이다.
특별한 증인의 증거(8-10절)
1. ”맨 나중에 ... 내게도 보이셨느니라”(8 상반절)
1) 누가?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매우 추종하는, 질적으로 우수한 사람이나 오백명의 믿는 형제, 또는 예수님 자신의 형제도 아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을 살해하던 자이다 ! 여기 전적으로 믿지 아니하며 교회를 핍박하는 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바울이다.
2) 언제?
바울은 자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맨 마지막으로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 때문에 나는 소위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무수한 체험들을 의심한다. 베드로는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 1:8)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3) 어디에서 ?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 갑자기 그는 땅에 엎드러졌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빛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나셨다. 바울은 그분을 보았는데 그분의 광채로 인하여 그는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2. ”...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8 하반절)
1) 직역
헬라어 토 에크트로마티(t ektr mati)는 에크트로마(ektr ma)에서 파생된 말로서, 유산된 태아, 유산, 조산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2) 추정 가능한 의미
(1) 조산(早産)
헬라어의 문자적인 의미로는 바울이 너무 일찍 태어났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는 열 두 사도들과 관련해 볼 때에도 역시 너무 늦게 태어났다!
(2) 때 아닌 출생
문자적으로 헬라어는 때 아닌 출생으로 이른, 또는 늦은 출생을 의미할 수 있다. 아마도 바울은 단순히 자신이 잘못된 시간에 태어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같다. 이것은 사실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견해의 문제점은 이 말이 이러한 의미로 사용된 다른 예가 없다는 것이다.
(3) 죽은 태아
어떤 주석가들은, 바울이 자신을 단지 가장 나쁘고, 가장 추하며, 가장 멸시받으며 결국은 폐기되는 존재로 생각하여 죽은 태아로 지칭하고 있다고 말한다.
(4) 낙태아
에크트로마티( ktr mati)에 정관사 토(t )가 사용되었으므로 이 말은 ”그 낙태아”로 직역할 수 있다. 이는 조롱과 악의와 증오의 말이었기 때문에, 바울을 가리켜 ”그 낙태아”라고 부른 사람들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고 어떤 주석가들은 말한다. 사실 바울이 전한 은혜의 복음이 자신들의 율법의 체계와 반대된다고 하여 바울을 증오한 사람이 많았었다. 정관사가 있으므로, 바울은 ”나는 그 낙태아인 바울이다. 멸시받고, 쓸모 없고, 추하고, 죽은, 혐오할 만하고 무가치한 살덩이이면, 교회를 핍박하던 자이다. 그런 나에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 대우하시는 분이 아님을 말해 준다.
3.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9절)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핍박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가 일생동안 마음 속으로 잊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당신은 상상할수 있는가? 그들은 모두가 그의 형제와 자매들인데, 그는 그들을 죽였던 것이다!
4.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10 상반절)
우리가 현재의 우리로 된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만일 당신이 구원을 얻었다면, 그것은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것은 주권적인 것이며 공로없이 된 것이다. 바울은 ”나는 단지 그리스도인을 죽이기 위하여 가고 있었는데, 그 다음 내가 아는 일은, 예수께서 오셔서 내게 나타나셨으며, 나를 변화시키시고, 나를 사도로 만드셨다. 나는 그분이 그러한 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믿을 수없다. 나는 세상의 찌꺼기였다 !”라고 말한다.
5.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10 상반절)
바울은 단순히 구원을 받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바쳐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아 영적인 존재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헛되지 않은지를 당신은 가끔씩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부분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6.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10 하반절)
바울은 여기서 다른 사도들보다 자신이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수고한다”는 헬라어 코피아오(Kopia )는 기운이 모두 고갈될 때까지 일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께서 다른 어느 누구에게 주셨던 것보다 더 풍성한 결실을 나에게 주셨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수고를 격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풍성한 응답에 차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인 살해자」를, 어떤 방법으로 「이제까지 살았던 이들 중 가장 위대한 사도」로 변화시키겠는가? 교회를 멸절시키기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하던 자를 어떤 방법으로 이제까지 살았던 가장 위대한 교회의 옹호자로 만들겠는가? 이러한 일이 일어날수 있었던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본 것이었다 !
공통적인 멧세지의 증거(11절)
1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우리는 모두 다 동일한 멧세지를 전하고 있으며 동일한 복음을 믿고 있는데, 그것은 부활의 복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나 베드로나 열 두 사도나 야고보나, 그들은 모두 똑같은 멧세지를 전파하고 있었다. 또한 고린도에서 전파되었든지, 아니면 에베소나 골로새나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전파되었든지, 그 전파된 멧세지는 항상 동일한 것이었다. 부활에 대한 가장 큰 증거 중 하나는 초대 교회의 신앙의 일반적 단일성과 일치성이다.
복음의 세 가지 커다란 함축적 의미
고린도전서 15장 8-10절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에 대한 복음의 커다란 함축적 의미 세 가지를 끌어내고 있다. 어떤 사람이 부활의 복음을 들을 때, 거기에는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
1) 죄에 대한 인식(8-9절)
바울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죽은 태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사도가 되기에 부적합한 자, 교회를 핍박했던 자로 언급하였다.
2) 인격의 변혁(10 상반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바울은 놀랄 정도로 일변하였다. ”... 헛되지 아니하여”라는 말은 그가 변화된 삶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였음을 보여 준다.
3) 힘의 방향에 대한 재조정(10 하반절)
”...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자기 존재를 하나도 남김없이 하나님의 일에 바쳤다 !
4. 고린도전서 15:12-19 / 육체의 부활을 부인할 때 생기는 결과
서론
고린도전서 15장의 주제는 무덤으로부터의 부활, 즉 사람의 신체적인, 육체적인, 문자 그대로의 부활이다. 바울은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며, 또한 다시 살아날 것임을 고린도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1. 육체적 부활 사실의 표명(表明)
1) 구약 시대의 소망
아주 오래전 욥기(19:26-27)라는 오래된 책에서, 욥은 말했다.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욥 14:14/ 사 26:19 참조). 욥은 육체적인 부활을 믿었던 것이다.
2) 예수님의 약속
(1) 요한복음 5장 28-29절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나오리라.”
(2) 요한복음 6장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3) 요한복음 11장 2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3) 사도들의 전파
신약 시대의 사도들 역시 죽은 자의 부활을 전파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을 보면, 사실 그들은 이 때문에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4) 바울의 멧세지
(1) 고린도후서 4장 14절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우리도 다시 살리실 ... 줄을 아노니”
(2) 골로새서 3장 4절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3)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
바울은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4) 빌립보서 3장 20-21절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이것은 우리 믿음의 기초이며,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토대이다 !
유의 사항 : 부활한 모습에 있어서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일 것이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서 요한은 ”...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보다 작거나 중요성이 덜한 사람도 있고 그 반면, 보다 큰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가졌던 것과 같은 인격을 어느 정도 유지한다. 우리의 부활한 모습에 있어서, 우리는 진정한 모습의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다!
2. 고린도 교회의 부인(否認)
구약성경, 예수님, 사도들의 전파, 그리고 사도 바울이 명백히 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인들은 육체적인 부활을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영혼은 불멸하지만 육체는 그렇지 않다고 가르치는 헬라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사실, 고린도전서 15장 12절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비평가들이 말하고 있었던 내용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다시 말해서, 그들은 ”죽은 사람들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단지 헬라 철학의 견해를 앵무새처럼 되뇌는 사람들이 있었다.
3. 바울의 논의
15장 1-11절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말하기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너희들이 이미 믿었는데, 이제 와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다”(3-4절)고 하는 복음을 받았으며, 그 위에 섰으며,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음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다시 말해서,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을 이미 알고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것과 같은 일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자로서, 그리고 논법가(論法家)로서의 놀라운 재능으로 일반적 근거를 세우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다. 그들은 이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야기를 계속해 나갈 수 있었고, 그들이 빠져 있는 오류에 맞서서 자신의 논리를 세울 수 있었다.
나는 당신이 12절을 유의해서 보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단락(12-19절)을 이해하는 일종의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12절의 마지막 구(句)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다. 헬라어 원문에는 관사 ”그”(the)가 없다. 따라서 이 원문을 이렇게 직역하여 읽을수 있다.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시체의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 여기에 바울의 논거가 있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어째서 당신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는가? 당신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물론 믿었으며, 그 사실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었다!” 이렇게 하여 바울은 그들을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고 있으며, 또한 자신의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더우기 13-19절에서 바울은, 만일 그들이 부활을 믿지 아니할때 복음과, 또한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그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당신이 지금까지 보았던 가장 논박하기 어려운 구절들 중의 하나이다. 바울은 근본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육체적인 부활이 없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단지 기독교 전체에 치명타를 가한 셈이다.” 따라서 13-19절에서, 바울은 육체적인 부활을 부인할 때 생기는 일곱 가지 파괴적인 결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심(13절)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 바울의 가정(假定)
근본적으로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 육체적인 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서슴없이 말하며 다니는데, 그러면 그리스도는 어떤가?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엇을 추측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논리적인 귀결인 것이다.”
바울은 사실과 상반되는 진술을 사용하여,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진술이 참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며, 또한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등등으로 말하고 있다. 아마 당신은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달라, 그분은 사람이 아니셔”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과연 그런가?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사람이시며, 또한 전적으로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바울의 주장의 기초이다. 즉, 그는 완전한 성육신(成肉身)을 가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고 당신이 말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된 것인가? 그분도 사람이신데”라는 뜻이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이 사람이셨다고 확신하는가?”라고 묻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하여 아주 명백하다.
2.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1) 성경의 언명(言明)
(1) 사도행전 2장 22절
사도들이 행한 설교 가운데서는 처음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하나님으로부터 증거를 받은 사람 나사렛 예수...”(KJV).
(2) 고린도전서 15장 21절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3) 갈라디아서 4장 4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 그분은 인간으로 태어나셨다.
(4) 디모데전서 2장 5절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5) 히브리서 2장 17절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그분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
2) 사람들의 선언
세상이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그분이 인간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분을 떠다니는 팬텀기나 신비스러운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분은 인간이셨다!
(1) 마가복음 6장 3절
예수께서 나사렛의 자기 고향을 찾아가셨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그 사람들은 그분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으로 보았다.
(2) 요한복음 19장 5 하반절
빌라도는 예수께 몹시 고통스러운 고문을 가한 후에, 그분을 군중들 앞으로 데리고 와서 말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3) 요한일서 1장 1-2절
요한은 인간 예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4) 요한이서 7절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3)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상세한 묘사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상세한 묘사들을 통하여서도 우리는 그분이 인간이셨음을 알 수 있다.
- 그분은 여인의 뱃속에서 잉태되셨다(마 1:18).
- 그분은 인간의 방식대로 태어나셨다(마 1:25).
- 그분은 할례를 받으셨다(눅 2:21).
- 그분은 인간의 영혼을 소유하셨다(마 26:38).
- 그분은 인간의 육신을 지니셨다(요 1:14).
- 그분은 키와 지혜가 자라났다(눅 2 52).
- 그분은 우셨다(요 11:35).
- 그분은 배가 고프셨다(마 4:2).
- 그분은 목마르셨다(요 19:28).
- 그분은 졸리우셨다(마 8:24).
- 그분은 피곤하셨다(요 4:6).
- 그분은 슬픔과 비관과 고통을 느끼셨다(요 11:33).
- 그분은 주먹에 맞으셨다(눅 22:64).
- 그분은 채찍에 맞으셨다(마 27:26).
-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눅 23:33).
- 그분은 죽으셨다(요 19:30).
- 그분은 옆구리를 찔리셨다(요 19:34).
- 그분은 장사지낸 바 되셨다(마 27:59).
4) 예수님의 부활하신 육체가 나타남
누가복음 24장 33-35절을 보면 엠마오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았던 두 제자가, 그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열 한 사도들에게 전해 주고 있다. 그런데 36절부터 보면,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그들은 헬라 철학의 영적 부활을 믿었을는지도 모른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다시 말해서 ”만일 내가 영이 아니라는 더 이상의 증거를 너희가 원한다면 먹을 것을 내게 달라 !”는 말씀이다.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그분은 인간이셨다 !
바울이 말하는 요점은 이렇다.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고 너희 철학자들이 말한다면, 예수께서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인간이셨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게 말하겠는가? 너희들의 믿음은 전적으로 그분의 부활에 기초를 두고 있다”(롬 10:9-10). 따라서 육체적인 부활을 믿지 않는 데 따르는 첫번째 파괴적인 영향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신 셈이 된다는 것이다.
모든 복음 전파가 쓸 데 없음(14절)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쓸데 없음)”
1. 복음의 확증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장사지낸 바 되었다가...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복음이라고 할 때, 그분이 행하신 모든 것이 결국 죽음으로 귀착되었고 다시 살아나지 아니하셨다고 한다면, 복음이 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복음 전파는 공허하고 무익한 허튼 소리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죽으신 것이라면, 사도들의 멧세지에서 속 알맹이가 떨어져 나가게 된다. 아무것도 할 말이 없으며... 전파하는 일도 없어지며 ...복음은 파괴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의 유효성은 그분이 무덤으로부터 살아나셨는가 아닌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만일 그분이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되고, 만일 그분이 살아나셨다면 모든 것을 얻게 된다.
1) 부활은 예수님의 신성을 말해 준다
로마서 1장 1절과 3절(2절은 삽입구이다)을 보면 ”... 하나님의 복음 ...그의 아들에 관하여...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했는데. 여기서 3절은 그분의 인성을 증거한다. 그러나 4절은 계속해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하였다. 다시말해서, 그분의 인성은 그분이 다윗의 혈통이라는 데에서 뚜렷이 나타나며, 그분의 신성은 부활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분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리고 만일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모든 복음 전파는 무가치하고 공허하며 헛되다.
2) 부활은 그분의 주권을 말해 준다
(1) 요한계시록 1장 18절
그리스도께서는 사실상 ”나에게는 교회를 다스리고, 교회를 인도하고, 교회에 책임을 지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왜그런가? ”(나는)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교회를 지배하고 다스릴 권리와 내세를 약속할 권리는 그분 자신의 부활에 기초를 두고 있다.
(2) 로마서 14장 9절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2. 복음의 결론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부활과 그리스도의 주권,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그 내용으로 삼고 있는 복음은 전적으로 없어져 버리고, 그것은 텅 비게 된다. 좋은 소식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모두 나쁜 소식일 것이다. 따라서 ”보라 내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말한 천사는 거짓말을 한 셈이 될 것이다! 만일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에 좋은 소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복음 전파는 가짜이며, 속임수이며, 꾸며낸 이야기이며, 그리고 엉터리가 된다. 그리고 그분은 죽음과 죄와 지옥을 정복하지 못하셨다. 이 얼마나 나쁜 소식인가 !
믿음이 헛됨(14하반절, 17상반절)
"... 또 너희 믿음도 헛 것이며(알맹이가 없고 무익함)...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알맹이가 없고 무익함).”
바울이 하는 말의 요점은 이렇다. ”만일 복음이 거짓말이며 또한 무익하다면, 당신이 그것을 믿는 것 역시 무익하지 아니한가? 우리는 우리의 손을 뻗어 존재하지 않는 어떤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한 것이다! 우리는 살아있지 않는 어떤 구주를 만지려고 한 것이다 ! 우리는 일어나지 아니한 복음을 믿은 것이다 ? 이것은 불가피한 결과이다. 우리는 차라리 시편 73편 13절에서의 시편 기자와 같이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한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차라리 이사야 49장 4절에서와 같이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라. 하나님을 믿은 아벨은 바보였다. 에녹은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노아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무가치한 신앙적 행위로서 돛이 없는 배를 만들기 위해 120년을 허비하였다. 만일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무덤으로부터 다시 살리실 수 없으며, 또한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한다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기드온, 삼손, 바락, 입다, 사무엘, 엘리야, 이사야, 다니엘, 에스겔, 예레미야 등 모두는 자신이 계획한 구원을 성취하실 수 없는 하나님을 헛되이 믿은 것이다.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히브리서 11장 36-38절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 즉 ”희롱과 채찍질...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며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했던 자들과, 그리고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붙잡고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 만일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신약의 모든 순교자들과 새로운 세대의 성도들은 헛된 믿음의 본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도들은 거짓말장이가 됨(15절)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잃을 뿐만 아니라, 사도들을 믿을 수 없게 된다. 그들은 거짓말장이이다! 사도행전 1장 22절을 보면, 사도가 될 수 있는 자격으로 제시된 것 중 하나는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어야 한다고 사도들이 말했다. 이것이 그들의 전 사역의 최저선(最低線)이었다. 만일 부활이 없었다면, 그들의 사역은 거짓말에 기초를 둔 것이 된다. 즉, 그들은 일단의 사기꾼들이 되는 것이다! ”글쎄, 그들은 단지 다소 미혹된 선의의 사기꾼들이었다”라고 당신은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은 ”거짓 증인”, 또는 글자 뜻 그대로 해서 ”철저하게 기만하는 거짓말장이들”이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시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살리셨다고 하나님에 대하여 거짓 증거를 하는 협잡꾼, 엉터리, 그리고 사기꾼이 되는 것이다 !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만일 당신이 부활을 부인한다면, 당신은 복음 전체와 여태까지 그것을 전파해 온 모든 사람들을 파멸시키게 된다. 그들은 단지 나쁜 충고를 하며 신실하고 정직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했으며, 그분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며,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고, 또한 그들이 그분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들은 거짓말장이가 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의 오류
죽은 자의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 사도들의 설교, 그리고 모든 믿는 자들의 믿음은 하나의 단위를 이룬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믿든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을 믿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당신은 ”글쎄, 나는 예수님의 부활은 믿지만, 모든 사람의 부활은 믿지 않아”라고 말할 수 없다. 바울은 「그렇게 취급할 수 없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부활은 믿을 수 있을는지 몰라도, 육체적인 부활은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한다. 혹은 ”우리는 부활은 믿지 않지만, 사도들은 확실히 놀라운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취급할 수 없다. 그들은 거짓말장이들이었다」고 말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말하기를, ”글쎄, 비록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우리도 부활하지 아니할 것이지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그렇게 취급할 수 없다. 당신은 그것을 다 믿든지, 아니면 다 믿지 않든지 해야 한다. 그것은 배타적인 진술이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며, 복음은 사실이 아니고, 당신의 믿음은 어리석으며, 그리고 지금까지 설교한 모든 사람들은 거짓말장이이다」라고 말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사도들 뿐만 아니라, 부활을 예언한 구약 성도들과 예수님도 거짓말장이이며, 성경은 거짓말로 가득 차게 된다. 적어도 자유주의자들은 부활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권위와 진실성을 부인하는데 있어서 서로 일치한다.
16절에서 바울은 자기 주장의 주요한 전제를 재차 언급하고 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이것은 그가 지금까지 말해 온 내용의 요약일 뿐만 아니라, 그가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내용의 시작이기도 하다. 육체적인 부활을 부인함으로 생기는 처음 네 가지 파괴적인 결과들이 신학적인 것이라면, 나머지 세 가지 결과들은 개인적인 것으로서 바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다.
죄의 세력이 깨어지지 아니함(17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 죄의 결과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죄가 그분을 죽였으며, 또한 그분을 죽은 상태로 머물러 있게 한 것이다. 당신은 예수님을 죽게 한 것이 바로 우리의 죄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기 때문이다(고후 5:21). 그런데 만일 그분이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죄가 그분을 완전히 죽게 만들어 그분이 다시 돌아올 수 없게 한 셈이다. 죄가 승리한 것이다! 믿음이 우리에게 은혜를 가져다 주려면,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우리가 죄책과 형벌로부터 구원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우리의 믿음이 그 일을 할 수 없다면, 그 믿음은 무익한 것이다. 로마서 6장 23절에 의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죄를 다루실 수 없었고 정복하실 수 없었다면, 우리 스스로가 죄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활이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심만으로는 우리의 죄가 제거될 수 없다. 만일 그분이 죄를 정복하지 못하셨으며 죄가 그분을 죽게 하고 또한 그분을 죽은 상태로 머물러 있게 하였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무익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부활이 없이는 화목이나 칭의, 구원, 그리고 생명이 있을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아직 죽은 상태에 계시다면, 모든 믿는 자들은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있으며, 구원이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 된다 !
2. 죄의 정복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붙잡혀 계신다면, 죄값은 결코 지불되지 않은 것이며, 따라서 우리에게는 아직도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이 남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정복하셨다.
1) 로마서 4장 25절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말했다(8:33-34 참조). 그분은 무덤에서 살아나셨다.
2) 로마서 6장 3-11절
그리스도를 믿을 때, 당신은 그분과 연합하게 된다. 만일 그분이 죽어 무덤 안에 머물러 계신다면, 우리가 죽을 때 우리도 역시 무덤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무덤으로부터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할 수 있다.”
3) 고린도전서 1장 30절
오직 살아계신 그리스도로서만 그분은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실 수 있다.” 만일 살아계시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우리를 지키실 수 없었고,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었으며, 우리를 위하여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4) 사도행전 4장 12절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만일 그분이 죄를 정복하시지 못했다면, 달리 우리를 구원할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죽었다 !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죄값을 지불하지 않으셨으며 우리에게 돌아오셔서 생명을 주시지 않으셨다. 죄가 그분을 죽였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 살아계시지 않으므로 항상 우리를 위하여 중보자의 역할을 하시거나, 우리를 용서하시거나, 우리를 붙드시고 지키시거나 하실 수 없다. 만일 그분이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으셨고, 또한 우리를 지키실 수도 없다! 우리가 그분의 부활을 믿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배 안에서 가장 수영을 잘하는 사람
사도행전 5장 30-31절을 보면, 베드로는 대제사장에게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고 말했다. ”임금”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르케고스」(archegos)이다. 이 말의 의미는 ”선두 주자”, 또는 ”개척자”이다.
배 안에서 가장 수영을 잘하는 사람을 대개 「아르케고스」라고 불렀다. 배가 해변에 거의 이르렀을 때, 물결과 파도를 만나 안전하게 정박하기가 어려울 경우, 아르케고스는 밧줄을 자기 허리에 매고 물로 뛰어들어 거친 물결을 헤치고 헤엄쳐 가 해변에 도착한다. 그런 다음 그는 밧줄을 바위나 나무에 붙들어 맨다. 그래서 나머지 배에 탄 사람들은 그 밧줄을 붙잡고 무사히 해변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밧줄을 내려 그것을 해변에 고정시킨 사람은 아르케고스이다.
예수님은 임금, 즉 아르케고스이다. 그분은 죽음의 물결을 헤치고 헤엄쳐 가셨다. 죽음도 그분을 붙잡거나 물에 빠뜨릴수 없었다. 그래서 그분은 해변에 도착하여 밧줄을 고정시키셨다. 이제 나머지 우리들은 그분을 뒤따라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예수께서 물에 빠져 죽으셨다면, 우리도 역시 물에 빠져 죽게 될 것이다. 만일 그분이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죄가 그분을 죽인 것이며, 우리도 마찬가지로 죽일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망함(18절)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으며, 모든 믿음은 헛되며,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죄 가운데 있고,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모든 자들은 지옥에 떨어졌다. ”그들의 믿음은 우리들의 믿음과 같이 헛되며, 그들은 다 지옥에 있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지 아니하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아니하셨다면, 여태까지 자신의 눈을 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기를 바라면서 죽어 눈을 감은 모든 믿는 자들은 영원히 멸망하였으며, 자신들이 사랑했던 그분을 결코 보지 못하였다.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 지옥이 그들 모두를 붙잡고 있으며, 사단은 승리했고 하나님은 패배하셨다 !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아니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됨(19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헬라어 원문에는 ”다만”(only)이라는 말이 상반절의 맨 끝에 나온다. 따라서 원문 그대로 하면, ”만일 금생에서 우리가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만 소망을 갖는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라고 읽을 수 있다. 이 말의 뜻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전적으로 그리스도만을 신뢰하였는데, 만일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불쌍한 무리라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허비한 것이다. 유혹과 싸우고, 죄와 투쟁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쓰며,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십자가를 지고, 수치를 당하고, 증거하기를 힘썼던 모든 사람들을 상상해 보라. 그것은 모두가 헛수고일 뿐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이것은 얼마나 큰 낭비인가 !
그러나 바울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20절)라고 말하고 있다. 그분은 살아계시다 !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다 ! 이것은 모두 사실이다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엇을 입증하는가 ?
1) 진리가 거짓보다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내가... 진리요”(요 14:6)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그분은 ”너희가... 지금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 8:40)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진리를 가지고 오셨으며, 또한 진리로서 오셨다. 그러나 그분의 원수들은 거짓을 원했으며, 그래서 그들은 진리(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 만일 진리(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상태로 머물러 있다면, 거짓이 승리한 것이다. 부활은 진리의 불멸성에 대한 최종적인 보증이다.
2) 선이 악보다 강함을 입증한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세력들은 악의 세력들이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악이 승리한 셈이며, 따라서 우주의 도덕적인 원리인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이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무덤으로부터 살아나셨다면, 선이 승리한 것이며, 따라서 악은 파멸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선의 불멸성과 악이 파멸할 것에 대한 최종적인 보증이다.
3) 사랑이 미움보다 강함을 입증한다
예수께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미움의 세상을 직면하셨는데. 세상은 그분을 몹시 미워하여 그분을 죽였다. 만일 그분이 죽은 상태로 머물러 계셨다면, 미움은 승리하였고 사랑은 패배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미움이 행할 수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의 승리이다.
4) 생명이 죽음보다 강함을 입증한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런던에 있는 한 교회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전쟁 중이었는데, 그 교회는 추수감사제를 위하여 온통 장식이 되어 있었다. 교회의 정면 제대(祭臺) 위에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수신 은혜에 대한 진정한 감사를 나타내기 위한 커다란 곡식 단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예배는 드려질 수가 없었다. 그들이 모이기 전인 토요일에 맹렬한 공습이 있어서 교회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버리고 만 것이다. 여러 달이 지나 봄이 왔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은 깨어진 잡석들 사이에서 약간의 푸른 새싹들이 땅에서 돋아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름이 오자 그 새싹들은 잘 자라났으며, 가을이 되었을 때, 깨어진 잡석들 사이에는 무성하게 자린 곡식들이 생기게 되었다. 폭탄이나 파괴조차도 제대(祭臺) 위에 놓여 있던 씨앗 속의 생명을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생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 죽음을 정복하셨기 때문에 생명은 죽음을 정복한다.
5. 고린도전서 15:20-28 / 부활 계획
서론
저명한 신학자 에릭 싸우어(Eric Sauer)는 이렇게 말했다.
”현 시대는 부활절 시기이다. 그것은 구세주의 부활로 시작하여 구속받은 자의 부활로 끝난다. 그 사이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영적 부활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두 부활절 사이에 살고 있으며, 첫번째 부활절의 능력으로 우리는 마지막 부활절을 맞으러 간다.”
”마지막 부활절”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우리 모두가 천국에 이를 때 성취되는 것이다. 성경에는 ”마지막 부활절”에 대한 많은 사실이 묘사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네 가지 주요한 요소 또는 약속이 있다.
1) 그리스도의 심판대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네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고 하셨다. 이 구절의 일부분이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서 바울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라고 말한다. 이곳은 믿는 자들이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상을 받을 곳이다.
2)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하여 상을 받은 후에, 성경은 요한계시록 19장 7-8절에서 우리가 큰 잔치에 다 초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신부인 우리 교회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영적인 결혼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최후의 결혼 잔치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크고 영광스러운 시간이 될 것이다!
3) 지상 왕국 통치의 도래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고전 6:2-3). 우리는 대환난이 있은 후에 이 땅으로 돌아와 그분의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4) 부활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심판이 있기 전에,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있기 전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지상 왕국이 임하기 전에, 우리는 부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구속사의 절정이며, 또한 고린도전서 15장의 주제이다.
복습
자, 기억해 보자. 고린도 교회에는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 문제와 씨름하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을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육체적인 부활에 관하여 이제까지 기록된 가장 위대한 장(章) 이다. 바울의 주장은 매우 논리적인 순서를 따르고 있다. 처음 11절까지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그들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을 믿었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시작하고 있다. 그런 다음 12절에서 그는 논리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그것은 ”너희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으면서, 어찌하여 너희 중에 어떤 자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육체적인 부활이 없다고 하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말로써 바울은 자신의 주장을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12절의 바울의 질문에 대해서는 이러한 대답도 나올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특이하였으며, 그분의 육체적인 부활은 단 일회적 사건이었다.”
바울은 20-28절에서 이러한 생각을 공격하고 있다. 20절을 보면,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너희에게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 너희가 그분의 육체적인, 육신적인, 문자 그대로의 부활이 믿을 만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이것이 너희가 다시 살아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은 부활의 첫 열매이시기 때문에, 너희는 그 다음번 부활의 열매가 될 것이다.” 이것이 20-28절에서 근본적으로 그가 말하고 있는 요점이다. 그러면 이것을 염두에 두고, 부활의 영향을 받는 세 가지 주요한 요소에 대하여 살펴보자. 그것들은 구속주, 구속함을 받은 자, 그리고 회복이다.
구속주(20하반절-22절)
1.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20절)
1-11절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그들이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었음을 상기시켰다. 12-19절에서 그는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그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됨을 그들에게 설명하였다. 이제 20절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좀더 나은 사본들에는 ”되셨도다”라는 말이 빠져 있다).
1)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묘사
(1) 첫 열매에 대한 자세한 설명
첫 열매를 바친다는 것은 무엇이었나? 레위기 23장 10절에 의하면, 유월절 때 밭에서 추수하여 농작물을 거두어 들이기 전에, 첫 이삭을 잘라 단으로 묶어 제사장에게 가져가야 했다. 차례대로 씨를 밭에다 뿌렸기 때문에 가장 일찍 뿌린 씨가 먼저 결실하였다. 이것이 첫 열매이며, 나머지 농작물들도 잘 거두어 들이게 될 것이라는 믿음의 행위로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었다.
(2) 첫 열매의 상징적 의미
바울이 20절에서 말하고 있는 전(全) 요점은, 이삭이라는 첫 제물을 하나님께 바칠 때까지는 완전한 수확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기까지는 아무도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이다. 무덤으로부터 살아나셔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신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증한다. 첫 이삭의 제물은 뒤따라 오는 수확물의 상징이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뒤따라 오는 믿는 자들의 부활의 상징이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면 반드시 어떤 영향을 미친다. 그분은, 마치 특별한 밭에서 자란 곡식같이 분리되어 부활하지 아니하셨다. 그분은 부활의 전 수확물의 한 부분이셨다. 죽는 씨앗의 견지에서 그분은 땅 속으로 던져지셨다가, 생명으로 돋아나셔서 땅 속으로 떨어져 죽는 나머지 우리들 역시 생명 가운데 다시 살아날 것임을 보증하셨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의 수위성(首位性)
”첫 열매”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이제까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심을 뜻하는가?”라고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그렇지 않다! 구약을 보면 엘리야가 한 어린 아이를 다시 살렸다(왕상 17:17-23). 그리고 신약을 보면 예수께서도 친히 각기 다른 세 사람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는데, 즉 야이로의 딸(막 5:22, 23, 35-43)과 나인 성의 과부의 아들(눅 7:12-15)과 나사로(요 11:41-44)이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최초의 인물이 아니셨다. 그분은 부활이라는 수확의 첫 열매이시며, 또한 그 보증이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골로새서 1장 18절과 또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1장 5절은 무엇인가?”라고 당신은 말할 것이다. ”먼저 나신”이라는 말은 헬라어로「프로토토코스」(pr totokos)인데, 이 말은 순서에 있어서 처음을 뜻하지 않고 ”수위(首位)의 것, 가장 좋은 것, 가장 위대한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처음 분이 아니라,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자 중에 가장 위대한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또한 최종적인 부활 수확의 첫 열매이시며, 그 보증이시다.
3)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
”잠자는 자들”(20절)이라는 말은 영혼이 잠자는 것이나 선잠자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죽음은 영혼의 잠이 아니라 육신의 잠으로 언급되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그리스도인은 죽는 바로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하심 안에 있게 된다.
(1) 고린도저서 5장 8절
”우리가...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2) 빌립보서 1장 23절
바울에게는 빌립보인들과 함께 있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말하고 있다.
믿는 자는 곧 떠나 영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만, 그의 육체는 부활을 기다리며 무덤에서 잠든다.
"그런데 바울은 단지 예수께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모든 죽은 신자들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어떻게 한 사람의 부활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라고 당신은 물을 것이다. 아주 좋은 질문이다. 우리는 21절과 22절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발견할 수있다.
2.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21-22절)
1) 그 행위
자신의 한 행동으로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다준 그 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아담이었다! 단 한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로 모든 인간이 죽음을 겪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우리 모두는 아담의 허리 안에 한데 묶여 있었다. 따라서 그가 죄를 범하자 우리 모두가 함께 타락하였으며 그가 죽었을 때 우리 모두가 함께 죽은 것이다. 아담의 씨로 태어난 모든 사람들, 즉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세상에 왔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 행위와 또한 그 행위에 따른 죽음의 형벌이 모든 사람에게 전가(傳加)되었다(롬 5:12). 이렇게 어느 한 때, 역사의 한 장소에서, 그리고 한 가지 점에 있어서, 한 사람이 행한 그 행위가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요점이다 !
2) 유추
그런데 만일 한 사람의 한 행위로 말미암아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면, 왜 다른 한 사람의 다른 한 행위로 말미암아 생명이 모든 사람에게 임할 수 없겠는가? 당신이 아담의 죄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부활에서도 분리될 수 없다. 바울은 로마서 5장 12-20절에서 이러한 추론을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충분히 전개시키고 있다. 그러한 추론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읽고 이해해야 할 사항이다.
유대인들은 모든 사람이 자기 조상들 허리 안에 있다고 하는 ”인종적인 결속”을 믿었기 때문에, 한 사람의 행위가 그의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이 개념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모든 인류가 아담의 허리 안에 있음을 믿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와 동일한 개념을 사용하여 똑같은 것이 그리스도에게도 해당된다고 말하고 있다.
3) 연합
22절에서 바울은 한 사람에 의해 모든 사람이 죽고, 한 사람에 의해 모든 사람이 살게 되었음을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연합 관계에 크게 의존한다. 누가 죽었는가? ”아담 안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다. 누가 살았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다. 22절의 ”모든 사람”은 각 개인과 그의 구체적인 행위 모두에 연관시켜 하는 말이다. 아담으로부터의 자연적인 혈통에 의해 우리 모든 사람은 죽는다. 그러나, 초자연적으로 그리스도의 혈통을 이은 모든 사람은 살 것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은 산다. 첫번째의 ”모든 사람” 가운데는 죄라는 공통적인 요인에 의해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포함되며, 두번째의 ”모든 사람” 가운데는 믿음이라는 공통적 요인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
이와 같이 바울의 첫번째 논점은 구세주와 관련된 부활의 영향인데, 그것은 부활 생명의 첫 열매와 보증, 그리고 그 근원이다. 그 다음 그는 두번째 논점으로 넘어간다.
구속함을 받은 자(23절)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바울은 부활의 영향을 살펴보면서,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알아보고, 그런 다음 수확물인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본문에 나타난 부활의 순서는 이렇다. 먼저는 그리스도이며, ”다음에는(이 말은 결정되지 않은 시간의 간격을 뜻한다)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이다. 이런 일은 언제 일어나는가? ”...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일어난다. ”강림하신다”는 말은 헬라어로 「파루시아」(parousia)라고 하는데 이는 ”있음”(presence)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오실 때, 그분이 계신 데서 부활이 일어날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부활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으며, 또한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 ”의인들의 부활”(눅 14:13-14)
- ”생명의 부활”(요 5:28-29상)
-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빌 3:10-11)
- ”더 좋은 부활”(히 11:35)
- ”첫째 부활”(계 20:6)
부활에는 오직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이다. 첫째 부활은 의인과 구속받은 자의 부활이다. 둘째 부활은 불의한 자와 저주받은 자의 부활인데, 이것은 천년 왕국 끝에 크고 흰 보좌(요 5:29/ 계 20:11-15)에서 일어난다. 첫째 부활은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 그리스도의 부활(고전 15:20)
- 휴거시 교회의 부활(살전 4:16-17)
- 7년 끝에 있을 환난받은 성도의 부활(계 20:3-5)
- 환난 끝에 있을 구약 성도들의 부활(단12:1-2/ 사 26:19, 20 참조)
23절은 ”각기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차례”라는 말은 헬라어로 「타그마」(tagma)인데, 이 말은 ”순서”를 뜻하며, 원래 군대의 행렬과 관련된 말이다. 따라서 부활에는 순서가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교회, 환난을 받은 성도, 그리고 구약 성도의 순이다. 첫째 부활은 이들로 이루어진다. 둘째 부활 즉 불경건한 자와 저주받은 자의 부활은 천년 왕국의 끝에 하나님께서 반역하는 모든 자들을 모아 지옥에 던지실 때 일어난다.
회복(24-28절)
이것은 세번째이자 마지막 단계인 부활의 마지막 영향이다. 이 단락은 전부가 회복된 낙원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회복(res-totation)이라고 부른다. 24절은 ”그 후에는 나중이니...”로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나중이라고 할 때, 끝난, 또는 끝마친 무엇을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텔로스」(telos)라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그것은 ”성취, 완성, 목적, 또는 목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나중”이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지적해오신 때이다. 그 때는 어떤 때인가? 그것은 ”저가 나라를... 하나님께 바칠 때”이다. 우리는 우리가 출발했던 곳으로 정확히 되돌아 온다. 만물이 회복되며 하나님께로 되돌려진다. 마침내 만물은 처음 상태와 같이 될 것이다. 즉, 죄가 없으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가 될 것이다.
이 구절들이 말하는 내용을 살펴보자.
”그 후에는 나중(직역하면, 목적 또는 목표) 이니 저(그리스도)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리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그리스도)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하나님이) 만물을 저의(그리스도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24-27 상반절). 당신은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가?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취하신다. 즉, 다른 모든 나라들과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복종시키신다. 그런 다음 나라를 설립하시고 나라를 세우시며, 모든 반역을 진압하신다. 그리고 마침내 나라를 성부 하나님께 바치신다. 이것이 이 구절들이 말하고 있는 바이다.
1.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세부 사항들
1) 예비 행위
먼저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한다. 그런 다음 부활이 있다. 일단 첫째 부활은 완성되며, 그리스도께서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하신다. 그분이 이렇게 하시는 데는 잠시면 될 것이다. 우선 교회가 휴거되어야 한다. 일단 이 일이 일어나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신다. 요한계시록 5장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대한 권리 증서를 그 손에 취하시고 그 책을 펴기 시작하신다. 책을 펴시고 그 인봉을 떼실 때, 그분은 이 땅을 강탈자로부터 도로 찾아 하나님께 바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2) 획득
요한계시록 5-20장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 땅을 도로 찾아 친히 통치하기 시작하시는지, 그분이 어떻게 모든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정사를 복종케 하시는지, 그리고 그분이 어떻게 모든 반역자들을 진압하시고 그 반역을 분쇄하시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나라의 끝에 이르러조차 사단은 잠시 풀려 나와 전 세계적인 반역을 일으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반역을 분쇄하시며, 모든 반역을 끝내시고,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신다.
3) 통치
25절에서는 모든 원수들이 ”그 발 아래” 놓일 때까지 그분이 천 년동안 계속 왕노릇하실 것을 말한다. 왕들은 항상 높은 자리에 올라갔으므로, ”그 발 아래”란 말은 복종을 가리킨다. 신하들은 왕의 발아래에 있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왕이 되실 것이며, 다른 모든 통치자들은 강등되고 굴복되어, 다른 모든 정사나 권세, 또는 능력은 없어지게 될 것이다. 세계는 전적으로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다스려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수행하는 한에서 우리는 그분과 함께 다스리는 자가 될 것이다(고전 6:2). 그리스도께서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승리하신 후, 땅으로 돌아오셔서 자신의 통치를 시작하실 것이다. 이 천 년 통치 기간동안에 반역이 있을 것인데. 이 반역은 ”철장”(鐵杖)에 의해 진압될 것이다(시 2:9). 마침내 천년 왕국의 끝에 이르러, 사단이 풀어 놓여져 마지막 반역을 일으킬 것이며, 패배하여 영원히 지옥으로 던져질 것이다(계20:7-10).
2. 사망의 멸망
26절은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멸망시키신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 그분께서는 이미 무덤에서 죽음을 이기지 않으셨는가? 히브리서 2장 14-15절에는 십자가 위에서 그분께서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셨다고 말해 준다. 무덤에서 나오실 때, 그분은 죽음의 사슬을 끊으셨다. 그분은 이미 죽음에 대해 승리를 거두셨지만, 궁극적으로 죽음을 멸망시키실 것이다(딤후 1:10 참조).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 의하면, 더 이상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 그리고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다. 죽음은 마지막 원수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멸망될 것이다.
3. 나라를 바치심
그리스도께서 땅에서 나라를 다스리신 후, 24절에 ”그 후에는 나중이니 ...”라고 말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런 다음 그분은 나라를 성부 하나님께 바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상태, 즉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는 천년 왕국이다.
1) 책임
요한계시록 5장 1-5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을 구속(救贖)하라는 임무를 받으시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분은 자신의 임무, 즉 어린 아기로 오셔서 인간으로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원수들과 사단과 싸우시고, 모든 원수들을 진압하시며 멸절시키시고, 만왕의 왕과 만주의 주로서 다스리신 후에는 구속함을 받은 모든 자들을 취하셔서 그들을 성부 하나님께 드리시며 ”자, 나의 임무를 다 했습니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이 성부 하나님께 바치신 나라는 무엇인가? 그것은 구속받은 자들이다!
2) 파생되는 결과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고 있는 요점은 이렇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이 땅을 취하실 수없으며, 또한 그것을 성부 하나님께 바치실 수 없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 그 나라에는 백성이 하나도 없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죽은 것같이,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산다. 만일 육신적인 생명이 없다면, 천년 왕국은 있을 수 없다. 만일 천년 왕국이 없다면, 회복된 땅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만일 회복된 땅이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에덴 동산에서 잃어버리시고 도로 찾지 못하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에는 그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결과들이 있다 !
3) 배역
28절은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때에도 성육신하신 모습으로 성부 하나님께 복종하심으로 겸손의 배역(配役)을 맡아 하신다.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때부터 세상을 하나님께 돌려드릴 때까지, 그분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종이시다.
4. 그리스도의 통치 기간
그리스도는 천년 통치가 끝나고도 세상을 더 다스리시는가? 그렇다.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하여 다스리실 것이다. 누가복음 1장 33절을 보면 그분이 탄생하셨을 때,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하기를 그분이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하였다. 그분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여(계 3:21/ 22:3) 영원히 왕노릇하실 것이다(계 11:15).
만물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그분의 생명, 그분의 통치, 그리고 그분의 본질을 소유한다. 태초에 우리는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며, 마침내 우리는 다 하나님께로 돌아가 공동 생활 가운데 그분과 함께 왕노릇한다. 예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고 하신 말씀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분이 만물을 지으셨으며, 또한 만물은 그분께로 환원된다. 이것이 역사가 흘러가고 있는 방향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며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 바로 부활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을 때, 그분은 그들이 자신과 함께 영원히 살도록 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인간을 의롭게 지으셨다. 그들이 그 의를 상실하였을 때에도 그분은 그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들을 의로운 새 인간으로 다시 살려 자기 앞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시는 이것이 바로 역사이다 !
6. 고린도전서 15:29-34 / 부활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사실들
서론
고린도전서 15장 29-34절을 살펴보기 전에, 나는 우리가 이 단락에서 취급하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기본적인 원리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모든 교리, 신학, 또는 성경적 진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제적으로 응답하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성경은 결코 이론이 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 아니다. 성경 말씀 속에는 실제적인 행동을 유발시킬 동기들이 내재되어 있다. 올바른 교리는 사람을 올바른 행위로 인도하며, 또한 올바른 원리는 사람을 올바른 행동으로 인도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진리들을 제시하신 다음 그것에 상응하는 어떤 종류의 행위들을 기대하신다. 따라서 성경의 신학은 실생활로 옮겨져야 할 그 무엇인 것이다.
1. 성경적 예증(例證)
1) 로마서 12장 1절
로마서에서 믿는 자에게 주어진 첫번째 권면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 산제사로 드리라”는 것이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신학적인 열 한 장(章)의 논문이 주어진 후에야 비로소 이 권면이 주어졌다. 이 모든 신학을 다 가르친 후에, 바울은 ”그러므로 이 모든 교리들과 신학적 진리들을 기초로 하여 너희들은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이렇게 열 한 장에 걸친 신학적 가르침을 주고 난 후에야 비로소 행위에의 권면을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 행위, 또는 도덕이 구속(救贖)의 성취라는 기초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바울의 고유한 특징이다. 모든 위대한 신학적 진리 안에는 실제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2) 시편 116편 12절
이 구절은 시편 전체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시편은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그분이 무슨 일을 행하셨는가를 말하고 있다. 그런 다음 116편 12절에 이르러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모든 성품과 그분이 행하신 모든 일로 인하여, 우리는 그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 자신의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3) 누가복음 7장 40-47절
이 두 빚진 자의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우리의 응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정도에 비례해야 한다는 원리를 가르치고 계신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살펴보고, 그분의 관대하고 광범위한 역사에 같은 정도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2. 구체적인 정의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이 원리를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는 28절까지에서 부활의 실재성에 대한 이론을 확립하였다. 이제 그는 그것의 실제적인 의미를 논한다. 만일 육체적인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어진다면, 사람들은 자기 몸을 그리스도께 드리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께 오지 않을 것이고,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거룩한 삶을 살지도 않을 것임을 바울은 보여 주고 있다.
바울은 15장 이 부분에서 부활이 없다고 하는 비평가들(12절)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너희가 부활이 없다고 말한다면, 너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주요한 동기를, 즉 행동 원리들을 제거한 셈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소망을 두지 않는 것에 자신의 삶을 바치려 하지 않는다. 만일 너희가 사람들에게 육체적인 부활이 없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너희는 그들이 기독교와 씨름하며, 희생적인 삶을 살며,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구별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만일 부활도, 결과도, 상급도, 형벌도, 그리고 아무 책임도 없다고 한다면, 그 모든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반대로, 만일 부활이 있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면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설 것이며, 천국에서 재결합하는 날이 있을 것이며, 우리가 주 예수와 그리고 모든 시대의 성도들과 영원히 함께 살 때가 있을 것이고, 우리가 바라고 믿는 것들이 영원한 세계에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삶에 대한 동기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요점이다!
3. 희생과의 관계
그리스도인들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자신들이 믿는 구주(救主)를, 자신들 역시 다시 살아나 그분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가지고 섬기며, 전파하며, 순종하며 수 세기 동안 살아 왔다.
1) 스데반
참으로 부족함 없는 부활에의 확신이 있었기에 돌에 맞아 그의 생명이 스러져 가는 순간에도 자기에게 그렇게 행하는 자들을 위하여 용서를 빌 수 있었다!
2) 안드레
참으로 부활의 소망만이 안드레로 하여금, 전설이 말해 주고 있듯이, 죽을 때까지 여러 날 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수 있게 하였다.
3) 베드로
참으로 부활의 소망만이 베드로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생을 살고 마침내, 전설이 말해 주는 바와 같이 십자가에 거꾸로 달리게 할 수 있었다. 베드로는 언젠가는 자신의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볼 것이며, ”잘 하였다. 베드로”라는 말을 들을 것이며, 또한 언젠가는 천국에서 자기 수고의 열매를 볼 것임을 믿었음에 틀림없다.
4) 바울
오직 부활의 소망만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하나님께 드리고, 마침내 자신의 머리를 단두대에 놓을 수 있게 하였다. 오직 부활의 소망만이 그로 하여금 그러한 일을 하게 했다. 그는 그리스도와, 또한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랑했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사람들을 볼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행동 동기가 된 것은 바로 부활에의 소망이었다. 만일 당신이 부활의 가능성을 제거한다면, 당신은 이 크나큰 동기를 제거하는 것이다.
29-34절에서 바울은 육체적인 부활을 믿지 않을 경우, 우리가 잃어버리게 될 세 가지 강한 동기를 제시하고 있다. 즉, 구원에의 동기, 봉사에의 동기, 그리고 성화(聖化)에의 동기이다.
구원에의 동기(29절)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1. 가능한 해석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40-400가지나 되는데, 그 중에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다 옳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구절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독단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매우 모호하고 난해하여 아무도 독단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문맥에 맞는다고 생각되는 어떤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내가 믿기로, 바울은 우리가 육체적인 부활의 관념을 포기할 경우, 무엇을 잃게 되는가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있어서 가장 강한 동기 중의 하나인 부활의 소망을 포기하게 된다.
나는 바울이 29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사람들은 부활을 예기(豫期)하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덤의 어두움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것, 즉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당신이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재결합할 수있으며, 또한 그들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천국, 즉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에 들어가 그분과 함께 살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내세의 모든 놀라운 것에 참여할 수있음을 의미한다. 부활의 소망은 구원받기를 구하게 하는 커다란 동기이다. 나는 바울이 여기서 근본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2. 잘못된 해석
물몬 교회는 이 구절에서 표면상으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 보이는 내용을 취하여, 누군가가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몰몬교도들은 이 의식을 ”대리 세례(침례)”라고 부른다. 그들은 살아 있으면서 이미 세례(침례)를 받은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하여 대리로 재세례(침례)를 받음으로써 죽은 사람이 구원을 얻을수 있음을 바울이 가르치고 있다고 믿는다. ”대리 세례(침례)”의 교리는 본문에서 벗어나 내용 외적인 것을 추가한 해석으로서, 성경 해석상의 기본 원리에 위배되는 교리이다. 본문 외에 다른 여러 구절에서 뒷받침해 주고 있지 않은 것을 무리하게 교리로서 추출해 내지 말라는 것이 성경 해석상의 단순한 원리이다. 세례(침례)는 죽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살아있는 사람도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해석은 불가능하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엡 2:8-9)고 가르친다. 세례(침례)는 단순히 구원의 증거를 선포하는 순종적 믿음의 행위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든지 죽은 사람이든지 아무도 세례(침례)에 의해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말씀하기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다. ”세례”(침례)가 아닌 ”심판”인 것이다.
3. 독특한 표현들
이 구절의 독특한 구(句)와 단어들을 살펴보자.
1) ”...세례...”
나는 이 말이 보통 쓰이는 용어로서, 기독교의 세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이교적 풍습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할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다소 불확실해 보인다. 이 말을 대하는 사람은 이것이 기독교의 세례(침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구절은 ”어떤 사람들이 기독교 식으로 세례(침례)를 받고 있다” 또는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오고 있다”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신약에 있어서 세례(침례)를 받는다는 관념은, 만일 그것이 성령 세례와 같은 영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항상 구원과 관계가 있다. 신약에 있어서 물 세례(침례)는 구원과 같은 뜻이다.
-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 예수께서는 세례(침례)라는 말을 구원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셨다.
- 사도행전 19장 3-5절에서 바울은 세례(침례)라는 말을 구원과 같은 뜻으로 사용했다.
29절의 세례(침례) 라는 말을 이와 같이 구원과 같은 뜻으로 볼 때, 이 구절은 ”... 구원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로 읽을 수 있다.
2) ”...자들...”
”...자들”이란 아마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같다. 그 다음 절에 나오는 ”우리”는 믿는 자들, 특히 사도들을 가리킨다. 결국 바울은 멀리 떨어져 서서 그들을 가리키면서 ”지금 구원받고 있는[세례(침례)는 구원의 외적인 상징이므로] 저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떠한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 죽은 자들을 위하여”
(1) ”... 위하여...”
”위하여”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는 「후페르」(huper)이다. 이 말은 여러 가지로 다르게 번역될 수 있는데 문맥에 따라 어떤 말로 번역이 될 것인가가 결정이 된다. 이 말은 ”...의 표면에, ...의 위에, ...을 가로질러, ...을 넘어, ...의 대리로, ... 대신에, ...의 이름으로, ... 때문에, ...에 관하여, ...에 대해서”로 번역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여기서 가장 좋은 것은 원인을 나타내는 ”... 때문에”인 것 같다. 따라서 이 구절을 ”어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은 자들 때문에 구원을 받고 있다”로 읽을 수 있다.
(2) ”죽은 자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알기 쉽게 번역해서, ”이미 죽은 어떤 그리스도인 때문에 그리스도에게로 와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로 할 수 있다.
4. 구원에의 주요한 동기
이 특정한 영역에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두 가지 동기가 있다.
1) 죽음에 직면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에 대한 증거
그리스도인이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죽음에 임하는 것을 믿지 않는 자가 볼 때, 그것은 죽음을 두렵고 침울하게 보는 그 사람에게 하나의 동기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죽음, 그것은 누군가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도구가 되는 경우도 때때로 있는 것이다.
2) 재결합에의 소망
사람들이 구원을 받으려는 또 다른 큰 동기는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재결합에 대한 소망이다. 이 일이 늘 일어나고 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로 오지 않다가, 자기 아내가 죽자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된 한 남편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아내와의 재결합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다. 나는 고집이 세고 반항적인 자녀들이 죽음이 임박한 자기 어머니와 재결합할 소망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오는 것을 보았다. 바울은 ”보라, 만일 재결합도 없고, 그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 성취되지도 않는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마음과 생활 속에서 이러한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성경 전체를 통하여 믿는 자들의 소망은 언제나 죽은 다음의 재결합이었다.
(1) 창세기 37장 34-35절
야곱은 자기 아들 요셉이 죽은 줄 알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여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고 했다. 그는 슬펐지만, 후에 자신이 죽으면 자기 아들과 재결합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그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다.
(2) 사무엘하 12장 23절
다윗은 그의 어린 사생아가 죽었을 때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는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 다윗은 재결합에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3)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4절
데살로니가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어느 순간에라도 오실 것임을 믿었다. 그러나 이 놀라운 확신 가운데서도, 그들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예수님은 오실 것이며, 또한 우리는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죽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가? 그들은 무덤 속에 있지 아니한가 !”라고 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당시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했던 철학의 희생물이 된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이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내세나 부활을 믿지 않는 헬라인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재결합할 것이다”라는 말이다.
재결합에의 소망 때문에, 그리고 죽는 순간에 그리스도인이 갖고 있는 확신을 보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온다. 나는 사람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고, 자기 옷을 벗어 바울의 발앞에 두었을 때, 바울은 이 일로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또한 나는 바울이 스데반의 빛나는 얼굴과 용서하는 마음, 그리고 그가 죽음 앞에서 가졌던 소망을 결코 잊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7:54-60). 아마도 스데반이 죽는 순간 가졌던 소망에 대한 기억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께 그렇게 빨리 응답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한다면, 구원에 대한 동기는 상실된다.
봉사에의 동기(30-32절)
1. 바울의 인내 (30절)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바울은 ”보라, 만일 부활이 없다면,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내가 무엇인가? 자기 학대자인가?”라고 말하고 있다. 솔직히 나는, 만일 당신이 부활의 소망을 버린다면,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에의 모든 동기를 즉시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기꺼이 참고 견디게 만들며, 모든 고난을 감당하게 만들고, 또한 그리스도의 일을 하게 만드는 유일한 동기는 그 일로 인하여 언젠가는 영원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는 소망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천국에서 그들은, 예수께서 그곳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 열매를 보게 될 것이며, 또한 그분 앞에 서서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잘 하였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모든 일들은 헛되지 아니할 것이다. 만일 그 이상 아무것도 없으며, 무덤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지금 나의 생명을 제물로 드릴 아무런 이유가 없다. 만일 이것이 있는 전부라면, 나는 여한없이 살고, 또한 내가 누릴 수있는 모든 즐거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절대로 나 자신을 번제로 드리거나 나의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죽어서 영원한 흑암 속으로 들어가지도 않을 것이다. 봉사는 부활의 소망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우리가 참는 것은 우리 앞에 있는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바울의 단언(31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때마다 위험을 무릅쓴다고 한 바울의 말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는지 모른다.
”그런데 바울, 당신의 말은 과장된 것이 아니오? 때마다라니 바울, 당신은 이따금 위험을 당하지 않을 때도 있지 않소?”
그래서 31절에서 바울은 매우 격렬하게 말하고 있는데, 문자 뜻 그대로 하면, ”맹세하건대, 나는 매일 거의 죽을 고비를 겪고 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때마다, 매일이다!”라는 뜻이다. 맹세를 할 정도로 그가 아주 격렬한 태도를 취한 것은 흥미롭다. ”내가 ... 단언하노니”라는 말은 직역하면 ”내가... 맹세하노니”인데, 이 말은 헬라어에서 맹세를 시작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바울이 하고 있는 맹세는 이렇다.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하신 일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만큼 진정한 마음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매일 죽는다. 내 삶은 매일매일 한계에 놓인다. 나는 늘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3. 바울의 문제들(32 상반절)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바울의 삶은 날마다 위기의 연속이었다. 인생의 말년에 이르렀을 때 그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딤후 4:7 상)라고 말하였다. 고린도후서 4장 8-12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문제 몇 가지들을 열거하고 있다.
”...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바울은 이 문제에서 저 문제로, 그리고 또 다른 문제로 나아갔다. 이것은 바울이 사역의 한 종류인 대항(confrontation)에 대하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자신의 삶의 체계에 대항하였으며, 반대를 야기시켰다.
4. 바울의 전망(32 하반절)
”...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근본적으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오직 현세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해오고 있다고 말하지 말라. 이것은 사는 방식이 아니다! 나는 단지 현세를 버려, 내세를 위하여 투자를 하려는 것이다.”
빌립보서 3장 7-8절에서 그는 현세에 속한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였다. 마태복음 6장 19-21절에서 예수께서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셨는데, 그 말씀의 근본적인 뜻은 이렇다. ”보물을 이 세상에 쌓아 두지 말라. 그것을 버리든지, 아니면 나누어 주어라. 그것을 사람들의 생활에,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투자하라. 그것을 이곳에 쌓아 두지 말라. 중요한 것은 내세이므로 현세를 버리라.”
그래서 어떤 사람이 와서 내세가 없다고 말했을 때, 바울은 ”나의 확신은 너무 깊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여기서의 멧세지이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정말 맹수들과 싸웠는가 ?
고린도전서 15장 32절에서 바울은 ”내가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바울이 언제 맹수들과 싸웠는가? 그가 더불어 싸웠다는 것이 정말 맹수들이었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단 만 번만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다른 아무 데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정말 맹수는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신은 이 사실이 기록된 것(고전 15:32)을 알고 있다. 어떤 것을 확실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것을 몇번이나 말씀하셔야 하는가? 또 다른 사람들은 말하기를 바울은 로마 시민인고로 맹수가 있는 투기장 안에 던져질 이유가 없었고, 따라서 그것들은 실제적인 맹수일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음으로 해서 면할 수 있었던 일들도 있긴 있었겠지만 이 일은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분명 이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만일 맹수들이 그를 삼켜버린다면, 누가 저항하겠으며, 누가 로마인들에게 서신을 기록하고 그들에게 전도하겠는가? 우리도 아니며, 또한 확실히 그도 아니라면.”
어떤 사람들은 이 ”맹수”가 사도행전 19장 23-30절에 기록된 소요(騷擾) 사건 당시 에베소의 사나운 폭도들을 비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들 사이에 역사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한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에베소에서 맹수들과 싸웠는데, 그 결과는 다니엘이 사자들 앞에 던져졌을 때와 같았다고 한다. 즉, 사자들은 매우 유순해졌으며, 그를 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든지 아니든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만일 인간의 수고만이 전부이고, 무덤에서 인생이 끝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만일 부활이 없다면,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5. 바울의 제안(32 하반절)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만일 모든 것이 무덤에서 끝나고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오직 관능적인 것을 위한 생활, 즉 누가복음 12장 19절에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고 말한 어리석은 부자처럼 원하는 모든 것을 먹고 마시며, 할 수 있는 것은 다하며, 얻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하나도 놓치지 않는 생활을 하게 된다고 바울은 주장하고 있다. 이런 식의 생각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32 하반절은 이사야 22장 13절에서 인용한 것이고, 전도서에서도 솔로몬은 반복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먹고 마시고 원하는 것을 하여 낙을 누리며 즐거워하다가 죽는 것보다 해 아래서 나은 것이 없도다”(전 2:24/ 3:12-13/ 5:18/ 8:15/ 9:7)라고 하였다. 결코 실현되지 않을 목적을 위하여 단 하루 단 한 시간도 당신의 생명을 제물로 드리지 말라.
이런 식의 생각은 고전 문학에도 스며 들어 있다. 만일 영원한 결과가 없다고 한다면, 늘 도전과 위험이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익한 것이 된다.
믿음 생활에서 만일 당신이 부활의 사실을 제거해 버린다면, 그것은 주님을 섬기는 것에 대한 동기를 제거하는 것이다. 한 예로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하나님 나라에 자신을 바쳤던, 히브리서 11장 32-40절에 나오는 저 사랑하는 고귀한 성도들을 보라.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왜 그렇게 하였는가? 35절에 보면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라고 하였다. 만일 당신이 부활을 없앤다면, 이 모든 일들에 대한 동기가 사라지게 된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에 대하여조차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를 참게 한 것은 부활의 영광에 대한 기대였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참거나 봉사할 동기가 없어지게 된다.
성화에의 동기(33-34절)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하는 말의 근본적인 뜻은 ”너희는 부활을 부인하는 이 이단을 제거해야 하며 속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그래야 하는가?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동무”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호밀리아」(homilia)인데 이 말은 원래 ”교제”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어떤 헬라어 사전들에 따르면 이 말에는 ”설교” 또는 ”강의”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의미를 결합하여 볼 때, 바울은 ”속지 말라 악한 멧세지를 전하는 악한 사람들과 교제하면 악한 행실에 빠지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잘못된 신학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는 것이다.
34중반절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라고 말씀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하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고, 그 결과 그들은 이단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잘못된 신학은 너희의 선한 행실을 더럽힐 것이다. 너희는 이 이단들과의 교제를 끊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너희를 더럽힐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결은 선한 교훈과의 관련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부활의 진리를 부인한다면, 당신은 선한 삶에 대한 동기를 제거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식으로 살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내가 주님 앞에 서서 그분과 회계(會計)해야 할 것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당신의 마음은 성결에 이르게 될 것이다. 34상반절에서 바울은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또한 잘못된 신학을 가르치는 자들과 교제한다면,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내세에 대한 생각과 또한 하나님과 회계(會計)해야 한다는 생각을 제거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성화와 성결에 대한 동기를 제거하는 것이다. 삶은 그 가치를, 그리고 행실은 그 동기를 상실하게 된다. 부활이 없는 신학은 하나님을 모르는 신학이며, 그러한 신학은 우리를 잘못된 삶으로 인도한다. 34하반절에서 바울은 ”나는 너희에게 말해야함을 부끄러워한다. 왜냐하면 너희는 이것을 이미 알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다.
부활에는 엄청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면, 그리고 우리 역시 그렇게 다시 살 것이라면 사람들에게는 구원받아야 할 동기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세와 재결합에 대한 소망이다. 당신은 현세를 버릴 수 있으며, 또한 내세에서 그것을 백만 배로 되찾을 것을 알기 때문에,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겨야 할 동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선한 행실이 내세에서 칭찬과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은 성화에 대한 동기가 된다. 이 같은 진리에서 벗어난 것은 부끄러운 이단이며, 진리를 더럽히는 것이다. 부활을 굳게 붙들라!
7. 고린도전서 15:35-49 / 우리의 부활체
서론
1. 부활에 관한 몇 가지 사실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기초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자신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보증이다
3) 부활은 기독교 신학의 기본적인 요소이다
O 예수께서 육체적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 요한복음 5장 28-29절에서 예수께서는 의인과 악인의 육체적인 부활, 즉 어떤 이는 생명의 부활로, 어떤 이는 심판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 요한복음 6장 44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구원의 최종적 행위로서 자신이 마지막 날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다시 살리실 것을 알고 계셨다.
O 바울도 육체적인 부활에 대하여 말했다.
- 로마서 8장 23절에서 바울은 최종적인 육체의 구원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
- 고린도후서 5장 2-4절에서 바울은 육체가 없는 인간의 영혼은 ”벗은” 상태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유의 사항 : 헬라인들은 육체는 악하고, 세속적이며 물질적인, 그리고 부패해 가는 감옥으로서 영혼을 감금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육체는 하나님의 성령의 전(고전 6:19)이라는 위치로까지 높여져 있다. 육체는 변화되고 변형된 모습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다.
2. 부활에 관한 몇몇 회의적인 질문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의 처음 34절까지에서 부활의 실재성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35절에 보면 어떤 회의론자들은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 말했다.
1) 회의론자들의 견해
(1) 헬라인들의 회의론
35절의 질문을 하고 있는 자들은 사실 ”좋소, 바울. 당신은 우리에게 죽은 자의 육체적 부활에 대하여 이야기하려는 것이오? 그러면 과연 그것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설명해 보시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바울의 그 모든 생각이 터무니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진짜 의심스러워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회의론자들처럼 말하고 있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헬라인들은 육체는 영혼의 감옥으로서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며, 영혼은 자유롭게 되어 우주적 신성(神性), 또는 우주적 신(神) 안으로 흡수된다고 믿었다. 그들은 썩고 부패하고 악취가 나는 물질 덩어리가 무덤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활의 관념은 그들에게 거부감을 일으켰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일은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와 같은 전제 하에서 이런 질문(35절)을 한 것이다.
(2) 랍비적 교훈의 의미
랍비들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부활체는 죽은 육체와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다시 모아져 무덤으로부터 나올 뿐이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바룩의 묵시를 기록한 사람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때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지를 묻고 있는데, 그에 대한 랍비의 대답은 이러했다.
”땅은 그때 죽은 자들을 분명히 내어줄 것이지만 형태에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오직 받아들인 그대로 내어줄 뿐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동일한 육체가 무덤으로부터 나올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하는 욥기 19장 26절 본문에 대한 그들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대답이다. 랍비들은 육체가 들어간 무덤으로부터 동일한 것이 나온다고 하는 매우 문자적인 견지를 취하였다.
이 견해는 헬라인들에게 매우 어리석게 보였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주장을 더욱 강화시켜 주는 셈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셀수스(Celsus)라는 한 헬라인은 랍비들의 견해에 대하여 ”이것은 벌레들의 소망이다”라고 말했다. 헬라인들의 견해는, ”무슨 신학이 그런가? 누가 그것을 원하겠는가? 일단 나의 영혼이 자유롭게 온 우주를 떠다니고, 올라가며, 또한 돌아다니며, 영원한 신성(神性) 안으로 흡수되었는데, 누가 그 낡고 쓸모없는 육체를 또 다시 원하겠는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것이다.
2) 질문의 배후에 있는 문제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바울이 계속하여 말하므로, 회의론자들은 ”좋소, 그렇다면 바울. 그것은 어떤 모습이 될 것이며, 또한 당신은 어떻게 땅으로부터 나오게 되는가?”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독교의 실제적인 약점을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죽음과 부패와 썩은 시체들을 보아 왔으며, 인간적인 견지에서 볼 때, 그 모든 것을 되돌려 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1) 오늘날과의 유사성
똑같은 형태의 질문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의 똑같은 결여 상태를 오늘날에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자주 이와 같은 질문들을 받는다.
- 당신은 화장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어떤 재가 누구의 것인지 정확히 찾으실 수 있을 것인가?
- 바다에서 죽어 부패하고 해류에 의해 시신이 흩어져 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어느 뼈가 어느 사람의 것인지 아시는가?
- 난파를 당해 산산조각이 났거나, 또는 폭탄에 의해 폭파되었거나, 혹은 불에 까맣게 타버린 시체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람에 날려 가버린 재들을 모두 되돌려 놓으실 것인가?
-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유골을 다른 사람의 유골과 구별하실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35절에서 고린도인들이 물은 것과 근본적으로 같은 형태의 질문들이다.
(2) 노골적인 힐책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바울은 ”어리석은 자여”(36상반절)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노골적인 접근이다. 바울은 결코 점잖게 말하지는 않았다. 헬라어에 있어서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분별없는 자”이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그들을 힐책하는 이유는 그들의 질문이 대답을 알고자 하는 자의 질문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대답을 갖고 있는 자의 질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은 모든 대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진리를 조롱하지만, 사실은 전혀 올바른 대답을 알고 있지 못한 회의론자들의 특징이다.
36절부터 시작하여, 바울은 35절에 제기된 회의론자들의 두 가지 질문, 즉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는 데 대하여 대답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그는 그들에게 네 가지 방면으로 대답하고 있다. 즉 부활의 예증(例證), 부활의 형체, 부활의 대조, 그리고 부활의 원형이다.
부활의 예증(例證, 36-38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1. 방식
바울은 땅에 묻힌 후 다시 살아나는 씨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세 가지 생각을 다루고 있다.
1) 분해
새로운 생명이 땅 위로 솟아나올 수 있기 위해 씨는 죽어 분해되지않으면 안 된다.
2) 차이점
일단 씨가 분해되어, 거기에서 자라나오는 식물은 외관상 그 씨의 모습과 전혀 다르다.
3) 연속성
씨에서 자라나오는 나무나 곡식의 줄기가 외관상 씨와는 모습이 다르지만, 그것은 동일한 생명 원리를 가진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어떤 곡식의 씨를 뿌렸든지 당신은 뿌린 것과 똑같은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2. 모형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2장 23-24절에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하여 이것과 동일한 비유를 사용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것은 바울이 믿는 자의 부활에 관하여 사용하고 있는 예증과 똑같은 것이다.
나는 부활시 예수님의 육체가 영광스러운 육체로 변했다고 믿는다. 실제로 예수님의 육체는 너무 영광스러웠기 때문에, 그분이 자신을 명백히 나타내심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알아보게 하셨을 때까지는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 보았을 때, 그들은 그분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셨다는 것만 다를 뿐, 그 전과 똑같은 상처 자국과 똑같은 용모를 지니신 변함없는 그분임을 본 것이다. 이와 같이 무덤 속으로 들어간 육체는 어떤 의미에서 차이는 있긴 하되 전과 동일한 육체로 나오는 것이다.
3. 능력
38절은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아주 근본적인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장(章)에 언급된 부활에 관한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38절에서 바울은 전 과정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 즉 하나님은 자신이 주고자 하시는 어떤 육체라도 주실 수 있음을 독자들이 기억하기를 바라고 있다. 부활시에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실 수 있는 육체를 과소평가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관한 문제이다!
부활의 형체(39-42 상반절)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이 구절들에서 바울은, 만일 어떤 것이 무덤에서 나온다면 무덤 속으로 들어간 것과 동일한 것으로 나와야 한다고 하는 육체적 부활에 대한 비평에 대하여 대답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바울은 ”왜 그러한가? 하나님께서 모든 육체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모든 육체를 창조하셨으며, 또한 하늘에 속한 모든 육체와 땅에 속한 모든 육체를 창조하셨다. 감히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리고 어느 육체라도 자신의 뜻대로 주실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1.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다양성에 대한 유추
1)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39 상반절)
아미노산(Amino acid)은 육체의 구조 성분이다. 아미노산이 결합하는 방식은 셀 수 없이 다양하고, 사람마다 독특한 결합 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는 두 사람도 서로 똑같이 생긴 경우가 하나도 없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라고 한 성경 말씀은 바로 그러한 의미인 것이다! 창조시에 하나님은 한 가지 육체에만 제한받지 않으셨다. 창조 때도 그랬는데 부활에 있어서 왜 제한을 받으시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형체로 무덤 속에 들어갔든지, 들어간 형체 그대로 무덤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2) ”... 사람의 육체요...짐승의 육체요... 새의 육체요...물고기의 육체라”(39 하반절)
39절은 진화론의 관념과 전적으로 반대된다. 예를 들어, 진화 과정에 있어서 뱀(파충류)은 새가 된다. 그 이론에 의하면 뱀은 백만 년동안 날 수 있기를 원하면서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서 마침내 그 소원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뱀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들의 아미노산 결합 방식은 언제나 뱀의 육체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들은 깃털을 자라나게 하지 못했으며, 뼈 속을 비게 하지 못했으며, 또한 날지 못하였다. 39절은 다른 종류의 육체, 즉 사람을 위한 육체, 짐승을 위한 육체, 물고기를 위한 육체, 그리고 새를 위한 육체가 각각 따로 있으며, 그것들은 결코 만나지(cross)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3) ”...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40 상반절)
땅에 속한 형체란 여러 가지 동식물들을 가리키며, 하늘에 속한 형체란 하늘의 형체들, 즉 해와 달과 별들을 가리킨다. 이 두 가지 종류의 형체들의 영광, 또는 출현(出現)은 서로 매우 다르다. 인간의 견지에서 볼 때, 꽃의 영광과 별의 영광은 하늘과 땅 차이다. 꽃은 일 주일 내에 지지만, 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래로 아직까지 떠있다! 하늘에 속한 형체들은 땅의 형체들보다 더 영광스럽고, 더 멀리까지 미치며, 더 빛난다.
바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부활시에 육체는 이 세상에서의 육체와 달라진다는 것이다. 부활체의 영광은 이 땅에 속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선, 무한한 영광일 것이다.
4)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41절)
41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땅에 속한 형체들의 영광이 하늘에 속한 형체들의 영광과 다를 뿐만 아니라, 하늘에 속한 형체들간에도 영광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한다. 태양은 찬란한 빛으로 자신을 나타내며, 달과 별들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나타낸다. 당신은 별들조차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아는가?
서로 같은 별은 한 쌍도 없다. 두 사람이 서로 똑같이 닮은 경우도 없다. 똑같이 닮은 꽃도 없다. 두 풀잎이 서로 똑같이 닮은 경우도 없다. 두 마리 새가 똑같이 날은 경우도 없다. 두 개가 서로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는 무한한 능력이 있다. 바울은 ”도대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모든 작은 조각들을 완전히 되돌려 놓으시겠는가?”라고 말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며, 거기에는 아무 제한이 없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씨들도 서로 다르며, 땅에 속한 형체들도 서로 다르며 또한 하늘에 속한 형체들도 서로 다르다. 따라서 부활체들도 각기 스스로의 영광을 지닐 수 있다.
2.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다양성에 대한 분석
42상반절에서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라고 말하고 있다. 39-42상반절에는 두 가지 개념이 등장한다.
- 한 형체가 다른 형체와 다르듯이, 부활체는 땅에 속한 현재의 우리 육체와 다를 것이다.
- 각각의 부활체는 독특할 것이며, 사람들은 그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모세와 엘리야는 죽은 지 오랜 후에 어떤 형체를 입고 변화산에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마 17:3-4). 크고 흰 보자 앞에서의 심판 끝에, 요한은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계 20:12)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부활체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다. 즉, 부활의 기본 형체는 다른 영광에 비해 그 수준이 더욱 높은 것이고, 부활체는 현재의 우리 육체와 다르지만,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다른 부활체와도 다른 독특한 육체이리라는 것이다.
부활의 대조(42하반절-44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42하반절-43절).
전형적인 헬라인이 부활의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주요한 이유는 육체는 썩고 부패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일련의 대조로써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다.
1. 일련의 대조(42하반절-43절)
1) 썩을 것 / 썩지 아니할 것
(1) ”썩을 것으로 심고”
이것은 단순히 매장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패는 인간의 삶 전체에 나타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썩기 시작한다. 출생은 부패의 시작이다! 부패는 물론 무덤 안에서 가속되지만, 사실은 인간의 삶 전체가 부패의 과정이다. 우리는 부패의 영역 속에 살고 있다. 즉, 우리는 썩어가고, 질병에 걸리고, 허약해지며, 병든다. 또한 오래 살수록 우리의 근육과 뼈는 약해진다. ”썩을 것으로 심고”라고 할 때, 그것은 말 뜻 그대로 우리가 죽을 때 씨처럼 땅에 심기워져 썩는 우리의 육체를 말하는 것이다.
(2)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4절에서 우리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늘에 간직한 기업”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장차 우리는 부패하거나 허약하지 않은, 썩지 않는 존재로 살 것이다. 우리의 부활체가 결코 부패하거나 늙지 아니할 것임을 깨닫는 것은 황홀한 일이다. 우리는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이다. 절대 부패하지 않을 것이다!
2) 욕된 것 / 영광스러운 것
(1) ”욕된 것으로 심고”
이 세상에서의 우리는 욕된 존재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우리에게 주신 것을 이용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다. 인간의 두뇌는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단지 그것의 1/100 정도 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창조시에의도된 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다.
(2)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나는 바울이, 인간이 될 수 있는 잠재적인 모든 것을 가리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을 때, 그분은 자신이 만드신 다른 어떤 것 이상의 영광을 인간에게 주셨다. 그분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 능력을 주셨는데, 그것은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바로 그 생명은 인간을 통하여 보여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욕되게 하였으며, 상처를 입혔고, 또한 훼손시켰다. 그리하여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간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욕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 그 잠재적인 영광은 회복될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의도대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3) 약한 것 / 강한 것
(1) ”약한 것으로 심고”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질병과 실패와 마음 아픔, 그리고 죽음에 복종한다. 우리는 우리의 꿈과 소원을 이룰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병약함을 극복할 수 없다. 우리는 환경, 음식물,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등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과 싸우며, 또한 그것들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우리는 연약하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연약함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무덤에서 다시 살릴 수 없을 때이다. 무덤 속에서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2)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소유하도록 계획하신 완전한 능력이다. 우리는 전혀 아무 제약이 없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육체에 대하여 말하기를, ”비록 육체는 현재 연약하여 무덤 속에 누울 때 전혀 힘과 능력이 없지만, 마침내 때가 이르면 강하여져서, 무엇을 하려고만 한다면 불가능한 일이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가볍고 민활하여져서 순식간에 이 곳 땅 아래에서나 혹은 하늘 위에서 떠다닐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주를 가로질러 신속히 갈 수 있는 것은 우리 부활체가 지닌 능력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무덤은 썩을 것, 욕된 것, 그리고 약한 것 등 육체에 관한 진리를 나타내 보여 준다. 그리고 부활은 썩지 아니할 것, 영광스러운 것, 그리고 강한 것 등 영광스러운 육체에 관한 진리를 나타내 보여 줄 것이다.
2. 요약(44절)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1) ”육의 몸으로 심고”
”육의 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쉬키콘 소마(psuchikon s ma)인데, 글자 뜻 그대로 이 세상에 적합한 육체를 가리킨다. 바로 지금 우리는 육의 몸을 입고 있으며, 현세에 속해 있다. 똑같은 프쉬키콘(psuchikon)이라는 말이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는 ”육에 속한 사람” 또는 육적인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특별히 초자연적인 것과 대조적으로, 우리는 현재의 자연적인 생활 방식에 알맞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
2)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신령한 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뉴마티콘 소마(pneumatikon s ma)인데 영적인 생활에 적합한 육체를 가리킨다. 우리는 새로운 종류, 새로운 수준, 새로운 차원의 생활, 즉 우리가 이제까지 경험했던 것 이상의 새로운 존재의 차원에 적합한 육체를 입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 20장 34-36절에서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현재의 육적인 몸과 부활체와의 차이 중의 하나로서 장차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계신다. 다시 말해서, 통상적인 인간 생활의 과정이 끝나게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 이와 같이 부활시에 우리의 전 존재는 변화하여 천사들과 같아질 것이며 그들의 존재 수준에 어울리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 좀더 알고 싶다면, 성경에서 천사들이 어떻게 왕래하고 있는지 그 하나만을 살펴보라. 그것은 우리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헬라인들에게 바울은 ”보라, 부활시에 우리는 육체를 갖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랍비들에게는 ”부활할 때, 우리는 다른 육체로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식물이 씨와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새로운 육체도 옛 육체와 연결되어질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부활의 원형(45-49절)
1. 성경의 뒷받침(45절)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이 구절의 상반절에서 바울은 창세기 2장 7절을 인용하고, 거기에다 ”첫”과 ”아담”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창세기 2장 7절은”... 사람이 생령(산 영)이 된지라”고 말씀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이제 방금 말한 요점, 즉 자연적인(땅에 속한) 육체와 초자연적인 육체가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을 예증(例證)하기 위하여 성경적인 원리를 끌어 내고 있다.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그는 자연적인(땅에 속한) 육체를 받았다. 그는 영광스러운 육체를 갖지 않았었다. 만일 에덴 동산에서의 시험에 통과하여 하나님께 순종했었다면, 그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변화시켜 그에게 영광스러운 육체를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범죄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생명나무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셨다(창 3:22-24).
창세기 2장 7절의 내용 이외에, 바울도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하고 있다. 아담은 자연적인 육체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자연적인(땅에 속한) 육체를 주었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시에 영적인 육체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적인 육체를 주신다.
바울은 왜 반복해서 아담 - 그리스도의 유추를 사용하는가 ?
이 유추가 한 사람의 행동이 전 인류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완전한 예증(例證)이 되기 때문이다. 아담의 한 죄로 말미암아 죄가 모든 사람에게 이른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들은 구속함을 받는다. 아담의 자연적(땅에 속한)인 육체가, 그의 모든 자손에게 전하여진 것같이,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영광스러운 육체는 모든 부활체에 대한 원형이 된다. 아담과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행동은 그 결과가 전 인류에게 미치는 것이다.
그런 다음 바울은 45절에서 두 혈통의 머리, 즉 자연적인(프쉬키콘: psuchikon)것과 혼(프쉬케: psuch )에 속한 것의 원형인 아담과, 영적인(프뉴마티콘: pneumatikon)것의 원형인 그리스도를 대조시키고 있다.
2. 차례(46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바울은 여기서 차례에 대하여 고린도인들에게 말하고 있다. 처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연적인(땅에 속한) 육체를 받으며, 그 다음 내세에서는 초자연적인 육체를 받는다. 먼저 현재 우리가 사는 곳에 가장 적합한 육체가 오고, 그런 다음 내세에 적합한 육체가 온다.
3. 근원(47절)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땅의 흙을 취하여 그것으로 아담을 지으셨다. 따라서 그는 흙에 속한 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흙으로 지음받지 않으셨다. 그분은 영원히 존재하셨다. 이것이 바울이 하는 말의 요점이다. 아담은 우리로 하여금 땅에 속한 존재가 되게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하늘에 속한 존재가 되게 해 주실 것이다. 아담은 우리에게 흙으로 만든 육체를 주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특별히 하늘에 속한 능력들로 만들어진 육체를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4. 요약(48절)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만일 아담 안에 있다면 우리는 흙에 속한 자가 될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하늘에 속한 육체를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아담은 땅에 적합하도록 창조되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시에 하늘과 영원의 영적 차원에 적합한 육체를 받으셨다.
5. 부활체의 특성들(49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가 지금은 아담을 닮은 것처럼, 장차에는 그리스도를 닮을 것이다. 만일 당신의 부활체가 무엇을 닮았을 것인지 알고 싶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체를 보라.
- 그분은 나타나실 수도 있었고 사라지실 수 있었다(눅 24:31, 36).
- 그분은 벽을 통과해 다니실 수 있었다(요 20:19, 26).
- 그분은 생각만으로도 자신의 몸을 이동시키실 수 있었다(눅 24:31).
- 그분은 생선을 잡수실 수 있었다(눅 24:42-43).
- 그분은 제자들과 함께 앉으셔서 그들에게 자기 손의 상처 자국을 보여 주실 수 있었다(눅 24:40).
- 그분은 말씀하실 수 있었고 사람들은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눅 24:32).
- 그분은 썩지 아니하셨다(행 1:11).
- 그분은 능력이 있으셨다(행 1:11).
- 그분은 영광스러우셨다(요 20:5-7).
"정말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꼭 같아질 것인가?”라고 당신은 말할 것이다. 빌립보서 3장 21절은 ”그가...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말한다. 또 요한일서 3장 2절은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이다! 누가복음 24장 13-43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엠마오로 걸어가셨으며, 잡수셨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그분을 만져 보았고, 느꼈으며, 보았고, 알았다. 예수님은 그 전과 동일하시면서도 매우 다르셨다. 그분이 자신을 나타내실 때까지 그분을 사랑했던 자들은 그분을 거의 알아보지 못했다. 또한 그분의 영광이 가리워지지 않은 채로 나타날 때는 사람의 눈을 멀게 할 정도로 대단하였다(행 9:3-8). 이것이 장차 우리가 입게될 육체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하는 말은 이것이다. 당신의 육체에 너무 애착을 갖지 말라. 그것은 순전히 쓰레기일 뿐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자신은 영원한 생명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다. 만일 현재의 우리 육체가 보기 흉하게 되고, 못쓰게 되며, 또는 기진맥진하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에 애착을 가져야 할 것인가? 만일 그 육체가 산다면, 혹은 죽는다면 우리는 무엇에 애착심을 가져야 할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이 소유하게 될 새로운 육체이다. 교회의 소망은 부활의 소망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 생전에 휴거가 일어난다면, 우리는 무덤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으며, 우리는 올리워가는 도중에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무덤 속으로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슬퍼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어느 날 우리를 무덤에서 끌어 내어 새로운 육체를 입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8. 고린도전서 15:50-58 / 죽음에 대한 승리
서론
"오래 된 학교에 한 설교자가 있는데,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전세계가 그의 교구이고, 그는 지구 도처를 다니며 모든 언어로 말하지만 그는 인기가 없다. 그는 가난한 자들과 부한 자들을 방문하며 종교인과 비종교인 모두에게 설교하지만, 그의 설교의 주제는 언제나 동일하다. 그는 감동적인 설교자이며 다른 설교자들이 할 수 없었던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때도 많고 전에는 결코 흘려 본 적이 없는 눈물을 자아내게 하기도 한다. 그의 주장은 아무도 논박할 수 없으며, 또한 그의 호소력에 감동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는 자신의 멧세지로 삶을 부숴뜨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미워한다! 모두들 그를 두려워한다.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죽음이다! 모든 묘비는 그의 강단이다. 모든 신문에는 그의 설교문이 실려 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다 그의 설교의 일부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의 모든 공포가 육체적인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사라진다. 고린도전서 15장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비록 무덤 속으로 들어갈지라도 천국에 적합한 영광스러운 새 육체로 나오게 될 것임을 알았다.
새 개정판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자신이 죽기 전에 자신의 무덤 앞에 세울 비명(碑銘)을 지었는데, 그가 죽자 유족들은 그것을 그의 무덤 위에 세워 놓았다.
"인쇄업자 프랭클린의 육체가(내용물은 찢어져 나가고 글자의 금박이 다 벗겨진 낡은 책의 표지처럼) 벌레들의 먹이로 여기 누워 있다. 그러나 그 작품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자에 의해 개정되고 고정되어 새롭고 더 세련된 판으로 한번더 세상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복습
육체의 부활에 대한 회의론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바울 당시에 고린도의 회의론자들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했으며(고전 15:12)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35절)고 조롱하는 듯한 질문을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육체를 창조하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부활을 부인하고, 비웃고, 조롱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회의론자들에게 대답하면서 그들이 부활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58절이나 되는 긴 장(章)인(고린도전서에서 가장 긴 장) 고린도전서 15장을 기록하였다. 이 확신의 기초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잠자는 모든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다(20절)고 하는 사실에 있다.
바울은 15장에서 부활의 위대한 진리들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는 부활의 증거, 중요성, 차례, 그리고 가치에 대하여 이야기하였으며, 또한 부활체에 관해서도 묘사하였다. 이제 그는 이미 이야기한 모든 진리에 응답하는, 문자 그대로 찬양하는 부분에 이르고 있다. 우리가 50-58절을 고찰하고 부활의 기대에 대한 사도 바울의 찬양에 관하여 살펴볼 때에, 나는 당신이, 바울이 취급하고 있는 네가지 방면에 대하여 주목하기 바란다. 즉, 「위대한 변화」 「위대한 승리」 「위대한 감사」 「위대한 그러므로」이다.
위대한 변화(50-53절)
1. 필연적인 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 영역에서 살기 위하여 변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아담처럼 ”흙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처럼 ”하늘에 속하게” 될 것이다(47-49 절).
1) ”혈과 육”
이것은 단지 물질적인 육체를 나타내는 말로서 신약성경에서만 사용되었다. 히브리서 2장 14절에서는 이 말이 인간과, 또한 인간이 되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그 곳에 보면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며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바울은 50절에서 ”혈과 육” 또는 자연적 존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2) ”하나님 나라”
50절에 언급된 하나님 나라는 우주적 또는 영적 의미에 있어서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의 하나님 나라, 즉 영원한 상태를 말한다. 바울은 우리가 현재의 몸으로는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며, 우리는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장에서 이 변화에 대해 고찰해 보았으며, 또한 우리의 변화된 육체는 영적 차원에 적응할 수 있도록 썩지 않을 것, 영광스러운 것, 그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 것임을 살펴보았다(42-44절). 또한 우리는 죽음이란 땅 속에 씨를 심는 것과 같으며, 그것이 썩어 새로운 생명으로 돋아나는 것같이 부활에 있어서도 그러할 것임을 살펴보았다. 믿는 자들은 무덤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으로 나올 것이지만, 그들은 죽기 전의 그들과 연결성 및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중대한 의문을 야기시킨다.
이 변화를 체험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은 죽어야만 하는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살아 있으며 또한 부활시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변화할 것인가?
2. 비밀(51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라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다 변화하리니”
다시 말해서, 죽지(”잠들지”) 않은 자들도 역시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썩고 죽을 육체로는, 썩지 않으며 불멸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변화해야 한다. 우리 가운데는 땅 속에 들어갔다가 무덤으로부터 나오는 순간에 변화할 자들이 있는가 하면, 하늘로 올라가는 도중에 변화하게 될 자들도 있다.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라고 한 바울의 말은 무슨 뜻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비밀이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그 무엇을 가리킨다. 비밀이란 말은 헬라어로 위스테리온(must rion)인데, 신약성경에서 이 말은, 감추어져 오다가 이제 막 알려진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있다.
유의사항 : 에녹과 엘리야는 이 비밀에 대한 좋은 예비적 본보기이다(창 5:24 / 왕하 2:11).
3. 순식간(51절)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1) 어떻게 우리는 변화할까?
51절은 ”순식간에 홀연히”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우선 알 수 있는 것은 이 변화가 어떤 과정을 거치는 오래 걸리는 변화가 아니라, 순식간에 일어나는 변화라는 것이다. ”순식간”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토모스」(atomos)인데, 원자(atom)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헬라어에 있어서 「아토모스」라는 말은 단지 ”나누어질 수 없을 정도의 가장 작은 조각” 또는 ”더 이상 자를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순식간이란 최대한으로 짧은 양의 시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화를 지켜볼 수 없다. 그것은 아주 빠르게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얼마나 빨리 변화할 것인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바울은 ”홀연히(흠정역에는 「눈깜짝할 사이에」)”라고 말하고 있다.
홀연히(눈 깜짝할 사이)란 얼마나 빠른 시간인가?
"깜짝할”이란 눈을 깜박거리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깜박할」이란 빛이 눈의 홍채(紅彩)에서 망막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어떤 과학자가 이것을 정확히 측정했는데 한 번 깜박이는 데는 1/6ns(내너세컨드: 10억분의 1초 - 역자 주)가 걸리는 것으로 계산하였다. 그러면 그것이 얼마나 빠른가를 알기 위하여 이런 식으로 살펴보자. 1ms(마이크로세컨드) 는 1/100만 초이고 1ns(내너세컨드)는 1/1000 ms이다. 따라서 우리의 변화는 1/10억초 동안에 일어날 것이다. 얼마나 빠른가! 그 일이 일어나는 데 1/10억 초가 걸리든지 아니든지, 바울이 하는 말의 요점은 놀랄 만한 능력이 우리를 순간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이다.
2) 우리는 언제 변화할 것인가?
51절은 ”마지막 나팔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구절들을 볼 때는 그것이 언젠가는 불리워질 마지막 나팔 소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교회 시대와 죽음과의 싸움을 종식(終息)시키는 소리이고, 또한 부활에로의 마지막 부름이다.
나팔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일에 사용되고 있다. 그것들은 축제 때에 백성을 소집하거나, 또는 커다란 승리를 알리기 위하여 종종 사용되었다. 또한 나팔은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모으기 위하여, 즉 그들을 하나님께로 소환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이렇게 사용된 예는 출애굽기 19장 16-17절과 이사야 27장 13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자기에게로 불러 모으기 위하여 나팔을 사용하실 것이며,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들은 장차 그 나팔 소리를 듣고 응답하게 될 것이다.
나팔소리가 날 것이다
남북 전쟁 중 한 1개 연대의 병사들이 어느 추운 겨울날 밤 야영을 해야 했다. 이른 아침에 그 연대의 군목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매우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밤새 수 인치나 되는 많은 눈이 내려서 피곤한 몸으로 담요를 감고 잠들어 있는 병사들을 완전히 덮어버렸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야영지는 자그마한 더미들이 많이 생겨, 마치 새로 만든 묘지같았다. 나팔수가 기상 신호를 울리자 그 소리와 거의 동시에 한 병사가 그 더미들 중 하나에서 일으켰다. 군목은 그 광경을 보고 고린도전서 15장 52절 말씀을 생각하였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유의사항 : ”변화하리라”는 말은 히브리서 1장 12절에서 천지 만물이 변화하게 될 방식에 대하여 말하는 데 사용된 것과 같은 말이다. 천지 만물에게 일어날 것과 똑같은 변화가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휴거의 진리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몇몇 다른 구절들이 있다.
1) 요한복음 14장 1-3절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방들)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서 예수께서는 부활의 날에 관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 계신다. 즉,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고 계시며, 또한 우리에게로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휴거의 위대한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분을 기다리고 있다.
- ”...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천국은 서로 다른 많은 집들로 가득하다는,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예비한다”는 말은 ”건축하거나 짓는다”는 뜻이 아니라 ”준비를 갖추거나 설비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실제로 말씀하시는 바는 ”내 아버지 집에는 방들이 많이 있는데, 나는 바삐 너희를 위하여 하나를 설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 ”... 내가 다시 와서...”
예수께서는 우리를 데리러 어느 누구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직접 오셔서 우리를 데리고 가실 것이다(행 1:11/ 딛 2:13/ 요일 3:2/ 살전 1:10).
(2)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
이 단락에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0-58절에서와는 정반대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고린도전서에서의 문제는, 죽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며, 만일 그들이 씨처럼 땅 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지 않는다면 그들은 어떻게 변화하는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은 올라가는 도중에 변화한다”고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인들은 올라가는 도중의 변화에 대해서는알았지만, 죽은 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들의 의문은 ”죽은 자들은 휴거를 잃게 되는가?”하는 것이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1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따라서 이 두 곳의 성구들은 고린도전서 15장과 더불어 휴거시에 있을 변화의 양면을 모두 취급하고 있다. 즉, 만일 당신이 죽는다면, 당신은 영광스럽고 변화된 몸으로 무덤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만일 그때까지 당신이 살아 있다면, 당신은 올라가는 도중에 변화할 것이다. 그 날은 얼마나 놀라운 날이 될 것인가!
위대한 승리(54-58절)
1. 바울의 목적론(54절)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이 구절에서 중심이 되는 말은 ”...때에는”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위대한 변화가 임할 때에 승리가 선언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는 말은 사실상 ”사망이 영원히 삼킨바 되리라”는 말로서, 이사야 25장 8절을 인용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멧세지를 확증하기 위하여 항상 성경을 사용한다. ”삼킨 바되리라”는 말은 완전한 멸망을 언급하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망이 아직도 우리의 원수임을 알고 있다. 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우리를 침범하고, 침해하며, 또한 우리에게 엄청난 타격을 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분께서 사망을 영원히 삼켜버리실 것이라”는 이사야 25장 8절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우리가 소리칠 수 있는 때가 오고 있다. 렌스키(R. C. H. Lenski)는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죽음이 더 이상 해를 입힐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입힌 모든 해가 남아 있는 한, 죽음은 전혀 파멸된 것이 아니다. 집들이 더 이상 파괴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파괴된 집들이 아직 황폐한 상태로 남아 있다면, 폭풍은 전혀 저지된 것이 아니다. 죽음의 파멸은 훨씬 더 격렬하다. 죽음과, 죽음이 승리한 것이 분명한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원상태로 돌아간다. 우리의 육체가 죽어서 썩을 때면 죽음에게는 승리로, 우리에게는 패배로 보이는 것이 완전히 역전(逆戰)된다. 그리하여 죽음은 완전히 패배하여 죽고, 우리의 육체는 완전히 승리하여 다시 산다.” 다시 말해서, 죽음은 패배하여 더 이상 해를 끼치지 않는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이제까지 행한 모든 것들까지 원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2. 바울의 비웃음(55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승리로 인하여, 바울은 죽음을 비웃는다. 그는 또다시 구약성경의 호세아서 13장 14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기 나름의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고 있다. ”쏘는 것”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켄트론」(kentron)인데, 이는 벌이나 독사의 침을 가리킨다. 죽음은 그 침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있어서, 죽음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찔렀을 때, 자신의 침을 거기에 놓아 두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의 찌르는 모든 것을 담당하셨고, 따라서 죽음은 우리를 찌르지 못한다. 그런데 죽음은 아직도 우리의 원수로서 우리 주위를 맴돌며 우리로 하여금 피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찌를 수 없다. 죽음은 그 침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놓아 둔 것이다.
3. 바울의 신학(56절)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실, 바울은 원래 성경 해석가이다. 그래서 그는 어떤 성경 구절을 이야기할 때 그것을 조금이라도 해석하고, 그 부분의 신학을 소개하지 않고는 그 이상 찬양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1)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만일 죄가 없다고 한다면 죽음은 아무 힘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 자체는 사람을 해칠 수 없다. 그 반면 죄가 있는 곳은 그 곳이 어디든지, 죽음이 사람에게 치명타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죄값이 치러지고, 죄가 용서함 받고 제거된 곳은 그 곳이 어디이든지, 죽음은 사람을 찌를 수 없다. 따라서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께서 당신의 죄를 지시고, 또한 그 찌르는 것을 친히 담당하셨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죽음의 찌르는 것이 없다. 그리스도인인 당신에게 전가되는 죄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1) 로마서 8장 33-34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2) 로마서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3) 시편 103편 12절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4) 미가 7장 19 하반절
”(주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5) 요한일서 2장 12 하반절
”...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이미 가리움 받았고, 용서함 받았으며, 또한 대속(代贖)함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의 죄에 대하여, 죽음은 이미 그 대가를 받았다. 죽음이 누구를 죽였는가? 그리스도를 죽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들에 대하여, 죽음은 그들을 치명타로 찌를 권한을 가지고 있다.
2)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칙을 어긴다는 사실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무 법칙이나 규칙도 가지고 계시지 않으며, 또한 우리가 행하고 싶은 대로 행할 수 있다면, 죄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표준들을 세워 놓으셨기 때문에, 죄는 실재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나는 하나님의 표준들이 무엇인지 몰라. 나는 결코 성경을 읽어 본 적이 없어”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성경을 읽어야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표준들을 인간의 양심에 심어 놓으셨기 때문이다(롬 2:15).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 안에도 놓아 두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규칙들을 세워 놓으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규칙들을 거스릴 때 죄가 나타난다.
(1) 로마서 5장 13절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2) 로마서 7장 8 하반절-9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은 죄를 드러내는 표준이며, 이 죄로 인하여 죽음은 사람을 찌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약속을 소유하고 있는 자에 대하여 죽음은 영원히 삼킨 바 되었다. 우리의 변화와, 죽음에 대한 우리의 승리로 인하여 바울은 세번째 항목에 이르게 된다.
큰 감사(5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죄 값을 치르심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충족시키고 55절과 56절의 문제들을 해결하신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승리를 얻게 하신 분이다. 바울이 하는 말의 근본적인 뜻은 이렇다.
”나는 내 스스로 사망의 찌르는 것을 제거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결과에 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가 할 수있는 유일한 일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에게 승리를 선물로 주신 것에 대하여 그분께 감사하는 것 뿐이다.”
그리스도의 사역(事役)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는 충족되었으며, 또한 죄의 값, 즉 죽음이 지불되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다. 죽음은 그리스도인을 찌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기 때문이다(빌 1:21, 23). 죽음이란 단지 이 곳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말한다.
위대한 ”그러므로”(58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부활이 실재할진대, 흔들리지 말며, 사람들이 너희를 미혹하여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도록 하지 못하게 하라. 견고히, 그리고 흔들림이 없이 부활의 실재를 믿으라. 그리고 우리가 내세에서 살게 될 것이 사실일진대, 영원한 나라가 있는 것과, 장차는 우리가 하늘에 쌓아 둔 보물만이 중요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만일 이 세상은 지나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이 사실일진대, 우리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고든 클락(Gordon Clark)은 이 구절을 이렇게 재미있게 바꾸어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정을 억제하고, 견고하며 변함이 없어야 하고, 변덕스럽거나 침착치 못하거나 쉽게 낙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선한 일들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게 하실 것임을 알고 선한 일들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행하는 모든 선한 일들에는 영원한 결과가 따른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행하는 일들은 모두 낭비이다. 그것들은 모두 나무나 풀이나 짚에 불과하다(고전 3:12-15참조). 그래서 바울은 ”견고히 서서 힘써 일하라”고 말하고 있다.
1. 견고히 서라
”견고하며”(steadfast)라는 말은 형용사로서, ”고정된, 정해진, 자리 잡은, 단단한, 확고한” 등의 뜻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혀 흔들리지 말며, 씰룩거리지도 말라. 너희의 신학은 어린아이처럼 이런 교훈, 저런 교훈에 밀려 앞뒤로 요동했던 에베소인들(엡 4:14)의 신학과 같아서는 안 된다. 속지 말라. 그대신 부활이 실재함을 믿는 데 흔들리지 말고 견고하라. 부활을 굳게 붙들라!” 왜 그래야 하는가? 바울은 만일 부활의 교리가 흔들리게 되는 경우, 우리가 현존하는 세상의 표준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이 생기게 되는 이유는, 만일 영원한 결과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동기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의 마음을 흔들지 못하게 하라. 부활을 굳게 붙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힘써 일하라
58절의 ”수고”라는 말은 ”힘을” 다 써버릴 때까지, 땀이 날 때까지 일하는 것, 즉 말 그대로, 지칠 정도로 일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항상 더욱 힘쓰는 ...”이라는 말에 주목하라. 휴가가 아닐 때에도, 또는 다섯 시 이전이나 여섯 시 이후에도 항상 더욱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더욱 힘쓰는”이라는 말은 헬라어에 있어서 ”지나치게 하다”라는 뜻이다(엡 1:18 참조). 우리는 주님의 일에 있어서 글자 그대로 ”지나치게 해야” 한다.
당신은 지나치게 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여유있게 하라”고 말하려고 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것은 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버려 놓았다. 나는 약간의 오락 시간을 갖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텐트를 접어가지고 몰래 어둠 속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딘가에 쳐놓은 텐트만이 그들의 방이며 오두막이다. 그리고 그들은 말하기를 ”나는 주님에게 아주 많은 것을 드렸어. 이제 멀리 가서 혼자 시간을 좀 보내야겠어”라고 한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활동과 동떨어져 ”취미를 즐기고” 있다. 우리는 취미를 통해서도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
헨리 마틴(Hency Martyn)은 인도에 가서 ”이제 하나님을 위하여 나를 불태우자”고 말하였는데, 그때 그는 35세가 채 못된 나이였다. 데이빈 브래이너드(David Brainard)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선교사로 가서 35세가 되기도 전에 죽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계속 퍼져 나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그가 한 일의 결과들로 가득 채워질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빌립보서 2장 25-27절은 우리에게 에바브로디도에 대하여 말해 주고 있는데, 그는 바울과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였다. 그러나, 27절을 보면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병이 몹시 심하여 거의 죽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30절은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주님을 위하여 너무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병든 것이다. 그는 바울을 돕기 위하여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건 모험을 하였으며 계속하여 일했다. 그는 병들어 죽게 되었지만 그래도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우리는 힘써 일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손을 뻗쳐야 할 영혼들이 있고 완수해야 할 사역들이 있다. 당신은 그 한 몫을 담당해야 한다. 우리는 당신을 필요로 한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과 몸과 영혼과 자금과 능력과 은사를 하나님의 나라에 투자해야 한다.
이와 같이 바울의 찬양은 실제적인 것, 즉 위대한 ”그러므로”로 끝난다. 부활은 사실이다. 당신은 이것을 알고 있는가? 언젠가 부활의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부활은 현재에 있어서도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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