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간증의 펜을 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고 강권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분들에게 작은 위로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큰 기쁨이겠습니다.
예수 믿는 실수만은 하지 않으리라
신안군 섬마을에서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난 나는 철저한 유교 가정에서 일 년에도 예닐번
씩 제사 드리는 것만 보고 자랐습니다.
종가집 종손인 아버지께서는 조상을 묻어 드릴 명당을 찾아 전국 명산을 헤매고 다니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옛날에도 미션 스쿨에 다니셨다는데 불행하게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그저 서양에서 태어난 성인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동네에 교회가 있었지만 성탄절에나 한 번씩 과자 먹으러 가는 곳이었고 집안의
어느 누구도 교회에 다닌 사람이 없는 탓에 내 유년의 기억엔 예수님이 안 계십니다.
그러던 우리 집안에 이변이 일어났는데 혼기에 찬 언니가 어떤 부흥집회에 한 번 참석하고 나더니
예수를 믿겠다고 선언하고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아버지 앞에 도전장을 내미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아느냐.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셨듯이
예수께서 던진 칼이 우리 집에 분쟁의 불을 붙였고 날마다 싸움소리가 담 밖을 넘어갔습니다.
한 집에 두 사상을 가진 식구가 함께 살 수 없다고,
죽어도 예수만은 안된다고 아버지는 소리소리 지르셨고,
언니는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각오로 때리면 맞고 쫓으면 쫓겨나가고,
그 날부터 우리 집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교회에 못 가게 하려고 아버지는 언니가 입던 모든 옷을 변소 오물통에 처넣었고,
성경 찬송가도 사다 놓기가 바쁘게 오물 속으로 함께 들어갔습니다.
언니만 눈에 보이면 두들겨 패고 예수 믿지 않겠다는 그 말이 나올 때까지 언니의 긴 머리
채를 끌고 다녔습니다.
보다 못한 어머니께서 "예수도 사람이 믿는 것인데 어쩌면 그렇게 무지하게 자식을 때리느냐고
역성이라도 드는 날이면 여지없이 어머니까지 쫓겨나가곤 했습니다.
언니는 주일에 교회 가기 위해서 토요일 밤새 달빛을 받으며 밭일을 하는 등
아버지의 반대가 심할수록 언니의 인내와 기도 시간은 더 길어졌습니다.
언니의 입에서 찬송소리가 새어 나오기라도 하면 아버지는 사정없이 발길질을 해댔고
그런 광경을 지켜본 내게는 '예수가 뭐 길래 저 고통을 당하면서까지 믿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풀 수 없는 숙제로 남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는다는 죄 아닌 죄로 몇 년씩이나 심한 매질을 당하던 언니는
교회 전도사님의 중매로 신학대학에 다니는 청년과 결혼을 하게 되었으나
예수 믿는 사람한테 시집간다고 부모님께서는 참석하지 않으시고 입던 옷을 그대로 입혀
보내 언니는 고아처럼 결혼해서 목사 사모가 되었습니다.
예수만 믿지 않았다면 그렇게 모진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왜 언니는
예수를 믿는다고 저 난리를 칠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절대 예수 믿는 실수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수없이 다짐을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모른 채 학창시절을 보내고 나이 열 아홉이 되던 봄에 이웃동네 같은
또래의 남자와 철없이 이른 나이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 좋아질 수가 있는지 편지만 받아도 좋고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아도 좋은데
좁은 시골 마을에 소문이 퍼지게 되고 드디어 아버지 귀에까지 연애소문이 들어가게 됐습니다.
완고하신 부모님께서는 노발대발하셔서 문 밖 출입금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갇혀만 지내던 나는 어느 날 "언니 집에 간다"는 쪽지만 남기고 집을 나오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향기 가르쳐 준 가나안모자원
무안군 망운면에 있는 작은 교회의 전도사로 계시는 형부를 찾아갔더니 언니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라"고 나를 달랬지만 결국 내 고집을 꺾지 못하고
시누이가 보모로 일하는 광주의 한 시설을 소개해 주며 직장생활을 해 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을 그 때는 몰랐습니다.
그 곳은 광주 주월동의 가나안모자원이라는 곳이었는데 목사님이 원장으로 계셨고
모자 세대가 20세대 정도여서 백 명 가까운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모자원은 가장이 갑작스런 사고나 병으로 사망하여 생활능력이 없는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살아갈 수 없을 때 얼마동안 보호해 주면서
그 동안 기반을 닦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또 엄마의 개가로 자칫 고아가 될 아동들을
미연에 방지하는 곳이었는데 정부에서 양곡, 연료비, 약간의 부식비를 보조하고,
외국기관인 컴패션의 주선으로 외국 후원자와 결연하여 생활비 보조를 받아 생활하는 곳이었습니다.
아동들을 지도하는 보모들과 성경 교사, 사무실 직원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서신을 담당했는데 외국 후원자들한테서 온 편지를 사서함에서 받아다가
번역실 맡게 번역한 뒤, 아동이 한국어로 회답을 쓰게 되면 다시 번역실에 맡겨 영어로
번역된 편지를 발송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 해 보는 직장생활,
모르는 일은 배워 가면서 할 수 있었지만 가장 힘든 일은 매일 새벽 한 시간씩 드리는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일이었습니다.
새벽 다섯 시에 기상 벨이 울리고 불이 켜지면 온 식구가 강당에 모여 매일 새벽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시간에 한 번도 일어나 본 적이 없던 내게 그 추운 새벽에 난로도 없는 마룻바닥에
한 시간씩 꿇어앉아 있는 일은 너무 큰 고통이었습니다.
오금이 쑤시고 다리가 아파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곳에서는 교육상 직원들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선생님 체면상 안 나갈 수도 없었고
어쩌다 한 번씩 게으름 피우고 새벽 기도회에 빠지는
날이면 원장 목사님께 불려가 호되게 야단을 맞아야 했습니다.
가나안 모자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사귀던 남자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군대에 가게 되었다면서 자기가 입대하게 되면 우리의 사귐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지
마지막 군용열차가 떠나는데도 발길을 옮기지 못하는 그를 보며 저는 손가락을 내밀며
약속의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마음놓고 군대에 다녀와. 자기 제대할 때까지 변심하지 않고 기다릴게.
다른 데로 시집을 가더라도 3년 후에 갈 테니까 걱정 말고 군복무나 잘해!"
그렇게 그를 떠나 보내고 저는 주위에다 군대 간 애인 기다리는
여자라고 연막을 쳐 놓고 일편단심 그를 기다렸습니다.
매일 일기 쓰듯 한 통씩 편지를 주고받았고 글 속에 정이 들었는지
기다리던 3년이 그리 길지는 않았습니다.
모자원에서 생활을 사명감도 없이, 오로지 세월 땜질하는 곳으로만 여긴
나에게 하나님은 서서히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외국에서 보내온 후원자들의 편지를 읽다 보니 하나님을 섬기는
그 분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대할 수 있었습니다.
농사 짓고 접시 닦고 간호사로 일하며 그리 부유하지 못한 생활을 하면서도,
수입의 십 분의 일은 하나님께 드리고 십 분의 일은 나보다 더 불우한 이웃을 위해
사용하며 그 나머지를 가지고 저축하며 생활한다는 그 분들의 금전관리법에서
크리스천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으며,
국가와 인종을 초월해 불우한 한국의 아동을 위해 매일 기도하며, 후원금을 보내며,
장차 훌륭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기를 소망하는 그 분들의 편지를 대하며 나도 그 사람들
처럼 온전한 인격을 가진 진실한 크리스천이 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자발적은 아니었지만 억지로라도 매일 설교를 듣다 보니 머릿속에 성경 지식이 꽤나 쌓여 갔고,
주일 예배시간에는 직원들이 순서 한 가지씩 맡았는데 기도나 찬송,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주일마다 동화를 읽어 주게 되었습니다.
동화라는게 고작 이야기로 꾸며진 성경 동화책을 읽어 주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내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자라고 있었던가 봅니다.
그렇지만 나는 절대 예수는 믿지 않을 것이라는 못을 가슴 깊이 박아 놓았기에 어서 군대 간 애인이 제대하면 가나안모자원을 벗어나서 새벽기도 안하고 늦잠 실컷 자며
사는 것이 내 소원이었습니다.
주일에 예배 드리기 싫어서 이리저리 피해 다녔습니다.
내 또래였던 성경 교사 미스 한은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늘 안타까워하다가
서울로 신학공부를 하러 떠났습니다.
어느 책에서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을 먼저 만난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회갑이 넘으신 원장 황 목사님이 육신의 눈으로 보기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부족한
사모님을 존경과 사랑으로 대하시던 모습,
원생들을 씻어주고 달래 주며 그러한 가운데도 찬송이 떠나지 않던 보모 선생님들,
그 추운 겨울에도 항상 일찍 일어나셔서 발목까지 쌓인 눈을 치우시고 말없이 사랑의 봉사
를 하시면서도 마귀가 얼씬도 하지 못하게 우렁찬 기도를 하시던 김 집사님,
방학이면 가고 싶은 일도 많을 텐데 방학 내내 원생들에게 찬송과 성경공부를 시켜 주던
젊은 대학생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좋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 주셨는데
나는 학습도 세례도 받지 않은 채 버티다가 군대 간 그 사람의 제대와 함께
아무런 미련 없이 사표를 내고 결혼식 준비를 했습니다.
깨가 쏟아지는 신혼생활, 그러나 ······
결혼과 함께 남편에겐 고향 농협의 직장이 주어졌고,
군대에 가 있는 동안 고무신 거꾸로 안 신고 기다려 줬다면서
남편은 내 구두를 반짝반짝 닦아주며 나를 행복하게 해줬고 시부모님께서는 그 동네에서
제일 좋은 집도 지어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깨가 쏟아지는 신혼시절을 보내고 첫딸을 낳아 우리는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살았습니다.
자수성가하여 많은 염전과 토지를 갖고 계신 시부모님께서는 쌀통에 쌀이 넘치도록 채워 주셨고,
푸성귀며 온갖 양념, 장작까지 쪼개어 마당 가득히 쌓아 주셨으니 우리의 저금통장은 날로 불어났고,
돈 모으는 재미, 아이 기르는 재미에 빠져 예수님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친구 하나 없는 낙도에서의 생활이었지만 남편과 아이는 나의 전부였고 오로지
나는 신앙처럼 남편만을 믿고 살았습니다.
첫애가 돌이 지나자 2년 터울로 둘째딸이 태어났는데 체중 미달을 간신히 면하고
나온 둘째는 잔병치레가 많았습니다.
남편은 일 잘하고 능력 있기로 소문 나서 직장에서 가장 빠른 승진을 했고,
그러다 보니 점점 퇴근시간이 늦어지고 출장 가는 마을마다 친구에,
선후배에, 술친구가 많아서 애들에게 시달리며 남편만 기다리던 나는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우리 마을에 교회를 짓기 시작했는데 새로 달아 놓은 종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졌고,
새벽에 잠이 깨 그 종소리를 듣고 있으면 알 수 없는 어떤 소리가 내 가슴속까지
밀려오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밤, 두 아이가 모두 감기로
열이 잔뜩 올라 애들을 안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밤이 깊어도 남편은 돌아올 줄을 몰랐습니다.
의무병으로 군복무를 한 남편은 가끔 급할 때 주사를 놓곤 했었기에 해열 주사라도 놓아
달라고 하려고 불덩이 같은 아이를 업고 남편 직장으로 찾아갔더니 세상에,
바쁜 일로 퇴근 못한 줄 알았던 남편은 다방 아가씨와 맥주 파티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나의 실망은 컸고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충격이고 배신이었습니다.
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과 싸웠고 화가 난 나를 달래다 못한 남편은 오히려
나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나는 그 길로 집에 돌아와 절대로 이 남자와 결혼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냉전상태에 들어갔습니다.
몇 날을 생각해도 화해할 수가 없었고 어디든 가고 싶었지만,
결혼을 반대했던 친정으로 갈 수도 없고 친구 하나 없이 남편만 믿고 살아왔던
나는 속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사람 하나 없이 혼자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그렇게 분노와 미움으로 밤새 잠 못 자고 새벽을 맞았는데
그때 집 앞으로 걸어가는 어느 여자 분의 찬송소리를 들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찬송을 듣는 순간 마음이 가시밭길처럼 헝클어진 나는 찬송을 부르는
그 분의 마음속에 있는 평화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순간 떠오르는 생각은 이렇게 오래도록 하나님을 멀리하고 살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실까 하는 불안과,
오늘도 문 열어 놓고 두 팔 벌리고 나를 기다리고 계실 것 같은 예수님의 큰사랑이었습니다.
결혼하고 4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예수님.
가나안모자원에 근무할 때 지긋지긋하게 싫었던 새벽기도회.
그러나 콩나물 시루에 물을 부으면 그대로 빠져 버리는 것 같아도 콩나물은 자라듯,
3년 동안 매일 듣던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 어딘가에서 뿌리 내리고 자라고 있었던가 봅니다.
그렇게 내가 예수님을 향해 마음 문을 조금씩 열고 있을 때 성탄절이 오래 전에 지나가 렸는데도
늦은 카드 한 장이 날아왔습니다. 가나안모자원에서 함께 근무하다가 서울로 신학 공부러 떠난
미스 한의 성탄카드였습니다. "순아, 아직도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니? 사람은 새해가 되면
계획을 세운다는데 너는 다가오는 새해에 무슨 계획을 세웠니? 새해의 계획속에 예수님을한 번 초대해 봐.
" 그 짧은 몇 줄의 글귀가 내 심장 깊은 곳에 박혔습니다.
신학공부를 마친 미스 한은 그때 인천 주안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며 부족한 나를 위해 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미스한의 카드를 받고 나서 무심코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순간 캄캄한 미로를 헤매는 것같이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남편과의 냉전을 해소시킬 어떤 답이 섬광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는데 그
것은 우리 부부가 단정하게 옷을 입고 성경과 찬송가를 들고 교회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영상이 눈앞에 떠오르는 순간 누워 있던 나는 자리를 박차가 일어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고,
집에 온 남편에게 다음 주일부터 함께 교회에 나가자고 말했습니다.
평소에는 예수라는 이름만 나오면 과민반응을 보이는 남편이었지만,
오랜 냉전 상태의 타협점을 찾고 싶었던지 자신은 나중에 나갈 테니 먼저 나가라고
마지못해하며 승낙을 했습니다.
세 가지 결심
나는 주님의 부르심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생전 처음 내 손으로 성경 찬송가를 사고 새해 첫 주일 교회에 나갔습니다.
성도들은 나를 쳐다보며 웬일이냐는 듯 수근거렸고 나는 맨 뒷좌석에 앉아 돌아온 탕자처럼
부끄러운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교회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집회를 앞두고 사십 일 밤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나는 기도할 줄도 몰랐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참석했고 집회기간에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간추린 말씀들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마음 판에 새겼습니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훌륭한 인물들이 나보다 먼저 예수님을 섬겼던 신앙의 선배라는
사실에 놀랐고 그 분들이 믿던 예수를 나도 믿게 된 사실에 감격해 했습니다.
집회가 끝난 뒤 나는 세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새벽에 도우리라는 말씀을 믿고
새벽에 기도할 것과 교회 안에서는 절대 마음 상하지 않기로 다짐한 일,
그리고 남편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몸도, 마음도, 통장도,
식성까지도 하나 되게 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남편과 하나 되기 위해
남편이 모르는 비밀통장을 없애기로 했습니다.
결혼할 때 혼수를 제대로 못해주신 어머니께서 살다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비상금으로
쓰라고 지참금을 주셨는데 빌려 쓴 사람들이 이자를 더해 와서 꽤나 큰돈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남편 몰래 간직하느라고 힘들었는데 나는 하나님의 성전에 피아노가 없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터라 이름을 밝히지 않고 피아노 헌금을 바쳤습니다.
세상은 하나님 아니면 돈이라는데 지금까지 돈을 더 좋아했던 나를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자로 변화시켜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성전에서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던 날
나는 기쁨의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집회 후에 때마침 목사님께서는 나에게 새벽종을 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자명종을 맞춰 놓고 매일 새벽 일어나 종을 울렸습니다.
파수꾼의 마음으로 이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성전에 나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백성들이 되게 해 달라는 간절함을 담아서 종소리를 보냈습니다.
겨울이면 하얗게 눈바다가 된 새벽길을 걸어 새벽 별들의 반짝이는 모습을 보면서 종 줄을
잡아당기노라면 별들의 찬양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듯 했습니다.
국민 학교시절 짝궁과 카드놀이 할 때 속였던 일,
아버지 책 속에서 돈을 꺼내고도 시치미 뗐던 일,
학교 우물에 주전자를 빠뜨리고도 선생님께 혼날 것이 두려워 거짓말을 했던 일,
중학생 때 내 일기장을 훔쳐 본 친구를 끝내 미워했던 일······
내 기억의 저편에 아스라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과거가 생각날 때마다 회개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앞으로 남은 삶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생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다짐하는 내 안에는 아무도 모르는 기쁨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밥이 나오냐, 죽이 나오냐
그렇게 매일매일 사랑의 자양분을 먹고 자란 물오른 오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충만한 은혜에 젖어 찬송을 부르며 집에 돌아오면 남편은 화내는 날들이 점점 많아졌고
어쩌다 새벽에 애들이라도 깨어 우는 날엔 남편은 나를 닥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벽마다 교회 가서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했던지 어느 날은 나를 미행하고
교회 마룻바닥에 엎드려 기도만 하고 곧장 집으로 오는 나를 따라 들어오며
"새벽기도란 새벽 잠 없는 할머니들이 시간 보내기 위해 하는 것인데 젊디 젊은
네가 무슨 죄가 그리 많다고 달고 곤한 새벽잠 깨고 날마다 그렇게 빌어야 하느냐?
예수를 믿더라도 정신 차리고 보통 사람들처럼 주일 낮에나 한 번씩 가라!"했습니다.
남편과 그렇게 부딪히면서도 새벽기도는 계속되었고,
처음엔 남편 구원과 아이들 건강 주시라고 날마다 달라고만 하던 나의 기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믿지 않는 일가 인척과, 교회 식구들, 예수님을 모르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되었으며,
앞으로 어떤 시험이 닥쳐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주님 지신 십자가를 나도 함께 지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성숙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때 남편의 핍박 또한 한층 도가 높아졌습니다.
초신자를 위한 성경공부 모임에 가느라고 매일 밤 교회에 가는 나를 보고 남편은 미쳤다고 했고,
거기서 밥이 나오냐, 죽이 나오냐, 다른 일에 그렇게 미쳐 보라고
우리 집에서는 큰소리 나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싸우고도 주일날 교회에 다녀오는 나를 보며 믿지 않는 동네 사람들을 비웃었습니다.
"서영 엄마는 욕심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좋은 집에 좋은 시부모, 좋은 남편에 아이들 쑥쑥 낳아
잘 자라고 있는데 그 외에 무슨 복을 더 받겠다고 하나님 찾아다니는 것이지?"라고 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한 번 믿어 보세요. 복을 더 달라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나 위하여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감사 드리러 다니는 거예요."라고 대답을 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그 분들을 위해서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 무렵 교회 건축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는데 헌당 예배를 앞두고 남편이 기분 좋아 보이는 어
느 날 나는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습니다. "여보, 교회를 다 지었다는데 나도 건축헌금을 하고 싶어요.
이십만 원만 주세요.
" 그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남편은 저년이 정신이 있느냐고, 내 한 달 봉급이 육십만 원인데 이십만 원을
달라니 차라리 그 돈으로 밀가루 한 포대씩 사서 가난한 사람들 나누어주면 인심이나 얻겠다며
콩나물 백 원어치를 맘놓고 못 사는 여자가 이십만 원을 바치겠다니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문을 막아 버렸습니다.
그래도 나는 남편을 설득해 보려고 "여보, 나 그 동안 감기몸살 한 번 앓지 않고 살림 알뜰히 잘했잖아요?
교회 건축은 평생에 한 번이에요. 나 아파서 병원에 한 번 입원한 셈치고
제 부탁 한 번만 들어주세요.
나는 좋은 집에 살면서 하나님의 집을 짓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요?"하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건축헌금 못 내서 미안하면 교회 안 나가면 될 게 아니냐며 끝내 마음을 닫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
그 무렵, 두 딸을 잘 기르고 있는데도 남편은 아들 가진 친구가 은근히 부러웠던지 술이라도
한 잔하고 오는 날엔, "야, 성경에는 백 살 된 사람도 아들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더라.
너는 왜 아들 달라고 기도 안하냐?"하며 은근히 아들 노래를 불렀습니다.
생명은, 딸이든 아들이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똑같이 귀하게 여겼고 딸 아들 구별
않고 둘만 낳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들 갖는 게 소원인 남편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셨다!"고 큰소리도 치고 싶고,
그렇게 되면 남편 전도하기도 훨씬 쉬워질 것 같아서 아이 하나 더 갖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발목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찾아간 교회!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 아들 달라는 기도를 못 드리고 말았습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했는데 주는 대로 감사하게 받지 못하고 이것 저것
고르는 일이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께 너무 죄송한 일 같았고,
교회 봉사도 못하고 말씀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아들 주시라는 기도를 차마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 문을 나서는데 그래도 사람의 속 중심까지 보시는 하나님께서
내 미안해하는 마음까지 다 헤아리시고 분명히 아들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에 찬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나는 그 날부터 성전 청소를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하얗게 삶아 바스락거리는 수건 걸레로 성전 의자를 닦으며 찬송을 불렀고,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아낸 농부처럼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나만의 기쁨이 너무 커서
남편의 핍박이 아무리 심해도 끄떡없었습니다.
그 뒤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열 달이 내내 입덧이 그치지 않아 힘들었지만 무사히 산달을 맞게 되었는데
목사님께서는 하필이면 나에게 헌금위원을 맡기셨습니다.
남산만큼 부른 배로 어떻게 온 교인들 앞에 나가 헌금 바구니를 돌릴 것인지 심히 불편한 마음과
무사히 순산을 할 것인지 하는 잔뜩 불안한 마음으로 헌금 순서를 끝냈습니다.
목사님의 축복 기도 시간이 되었는데 "하나님이여, 김순의 집사님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무사히 열 달을 채우게 하신 하나님께서 출산 때에도 함께 하사 순산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하며 내 이름 석 자를 넣어 기도해 주시니 그렇게 불안했던 마음이 잠자고 아늑한 평화가 밀려 왔습니다.
며칠 후 진통이 시작되어 병원에 갔는데 나는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참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니 내 고통의 무게가 너무나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아들입니다. 축하합니다.!"하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들 낳으면 좀 부드러워질 줄 알았던 남편의 핍박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고,
출산 감사 헌금을 드리는 나에게 내 아들인데 누구한테 헌금을 바치느냐고 빈정거렸습니다.
아이 이름을 짓는데 남편은 사내아이니까 누구에게나 무슨 일이든지 이겨야 한다며 이길 승(勝)자를
넣아야 한다고 우겼고, 나는 다만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승규(勝圭)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한문으로 규(圭)자는 흙 토(土)가 내리 두 개 붙은 글자인데 흙은 곧 땅이고 땅은 곧 죄악된 세상이니
이 세상의 헛된 유혹을 다 이기고 소망을 저 높은 곳에 두고 살라는 엄마의 기도를 담았습니다.
승규가 백일이 될 무렵 남편이 뜻하지 않던 인사 발령을 받아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고,
예수 믿는 것을 핍박하는 것만 아니면 처자식밖에 모르는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인데 한 번도 남편과
떨어져 본 적이 없는 나는 어떻게 혼자 세 아이를 기를 것인지 걱정에 싸여 있는데 남편은 "너 좋은 일 생겼다.
마음대로 교회 다닐 수 있어 좋겠다."고 가슴 아픈 말을 남기고 근무지로 떠나
우리는 주말부부가 되었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집에 온 남편은 하룻밤 자고 다음날 근무지로 떠나야 했는데 주일이 되자 예배에
참석하느라고 저는 남편을 배웅할 수 없었습니다. "너에게 있어서 만은 내가 최고인데 내가
왜 하나님 바깥으로 밀려나야 하느냐?"고 남편의 불만은 점점 쌓여갔고,
나 역시 남편을 그렇게 보내고 나면 가슴이 아파 엉엉 울어 버릴 때가 많았습니다.
남편이 집에 없게 되자 나는 매일 애들을 데리고 성전 뜨락에서 파릇파릇 돋아는 새싹과 피어나는
예쁜 꽃들을 보며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생명과 자연들을 얘기해 주며 우리 아이들이 장차 자라서
성전을 가까이 하는 경건한 삶을 살게 해 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길렀습니다.
승규가 5개월이 되었을 때 며칠 동안 기운이 있던 아이가 갑자기 열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해열제도 먹이고 찬 물수건으로 찜질을 했지만 열이 내리지 않고 체온계의 눈금은 38도를 넘어 가고 있었습니다.
병원도 없는 섬이라 숨을 몰아쉬며 보채는 아이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연락 받고
오신 목사님께서 기도 해주시고 찬송가 43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를 불러 주셨습니다. 찬송을 두 번 반복해 부르는 동안 바둥거리던 아이는 잠이 들었고,
잔뜩 불안하던 내 마음의 긴장도 풀리면서 찬송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부터는 4절까지 가사를 다 외워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 찬송을 부르며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을 맛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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