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간증+믿음의 글

[스크랩] **김순이간증(1)**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5. 13. 19:00
김순이 간증(1)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 것

삶을 포기한 분이 계시다면

오늘 아침에도 샤워실 쪽에서는 예외 없는 찬송가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 온다.

"주우여- 나의 정성, 나의 생명 드립니다." '옆집 할머니 염불 드리는데 오늘도 욕을 꽤나

하시겠군' 집 앞에서 어쩌다 마주치는 할머니의 싸늘한 눈빛이 생각나 걱정이 되지만

그것은 잠시이고 그 다음 소절은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고 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참 좋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흘러나온다.


며칠 전 남편에게 "여보, 나 기도원에 며칠 다녀와야겠어요"하고 말했을 때 남편은

서슴치 않고 "그래! 당신이 다녀오면 다음에 내가 가야지!"라고 대답 하는 것을 들으며

나는 다시 한 번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이란 말을 코끝 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4년 전만 해도 너무나 괴롭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아무 말도 없이 한라산 기도원

에 올라가서 닷새 째 금식 기도를 하는데 남편은 어찌어찌 수소문해서

그 곳에 있는 것을 알아내곤 그리로 찾아왔다.

원장님이 기도실 문을 열더니 "김 집사님, 밖에 누가 찾아왔는데 남편 되시는 분 같아요.

그런데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으니까 잘 처신하세요"하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그때 나는 "흥, 겁날 것 하나도 없다. 이미 나는 그 사람 과 헤어질 마음의 준비가

끝났으니까"하면서 밖에 나가니까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해진 남편이 서 있더니

차 문을 열고 무조건 타라고 날 밀어 넣었다. 같이 기도하던 어느 교회 권사님 한 분이

놀라서 "사장님, 집사님이 가정과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하셨으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

닷새째 금식을 했 으니 몸이 많이 지쳤을 겁니다. 잘 좀 돌보아 주세요"라고 말하니까

날 한번 힐끗 보고 그 권사님을 보더니, "지랄 육갑들 떠네"라고 서슬이 퍼렇게

소리 를 치는 것이었다. 그 때 남편은 초췌해진 우리들 모습을 보면서 누가 굶으 랬나!

육갑 떠는 것으로밖에 더 보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나는 남편의 모든 소지품을 손수 챙겨 주고 이곳 기도원까지 데려다 주고 간 일을

생각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나 같은 사람이 쓴 어줍잖은 간증이 당선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믿기에, 이 글을 쓰는 것을 전혀 눈치 못 채게 마치 무슨 음모라도

꾸미듯 은밀하게 쓰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 에 부끄럽지 않은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부끄럽 지 않은 마음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람들 앞에

사람을 자랑하고자 함도 아니고 남편의 지난날을 들추어 그 분을 부끄럽게 하고자

함도 아니고 현재의 우리들 믿음이 크다고 행여 자랑하고자 함은 더더욱 아니다.

이것은 오직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그 오묘하신 섭리와 약속대로

이루시 는 그 광대하신 사랑을 나 혼자서 누리기엔 그 기쁨이 너무 벅차고 너무 크 기에

행여 지난날의 나와 같은 처지에 속해 있어 절망감을 안고 이제는 모 든 것이 끝이라고

삶을 포기하는 분이 있다면 그런 분들에게 "예수를 믿으세요.

당신이 만약 주님을 이미 모신 분이라면 그래도 당신의 삶이 그렇게 고통스럽고 견딜 수

없는 절망에 처해 있거든 기도하세요.

오직 기도만이 당 신을 그 절망의 늪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다"

라고 간절히 얘기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은 절대로 감기신 적이 없고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는 주님

귀는 막힌 적이 없으시며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은 절대로 식어지지 않는 마음을 가진

그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신데 무엇 을 염려하고 무엇을 좌절하여 마귀에게

승리의 쾌재를 부르게 할 것인가.

이제 나는 부끄러운 삶을 살아온 한 사람의 여지이지만 감히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직

그 분의 그 크신 경륜을 찬양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쓰지 않을수가 없다.

찬송가만 불렀던 어린 시절

나는 내가 언제부터 예수를 믿었는지,

왜 어릴 때부터 내가 아는 노래는 다 른 아이들이 부르지 않는 이상한 노래뿐이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먹을 것만 앞에 놓이면 기도라는 것이 끝날 때까지

그 음식을 먹을 수 없었는지 그것 을 몰랐다.

어쩌다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친구의 부모가 먹을 것을 줬다.

한 참 기도하다 눈을 뜨면 앞에 있던 감자나 옥수수, 때론 그 맛있는 곶감 그것 들은 간

데가 없고 내 앞에서 우물거리는 친구들의 입만 보일 뿐이다.

나는 자라면서 기도를 하지 않고 음식을 재빨리 먹을 수 있는 아이들이 부러웠고 저녁마다

호롱불 밑에서 알아듣지도 못할 이름들을 불러가며 예배(가정 예배)를 인도하는

아버지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나로선 정말 다시는 생각도 하기 싫은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음악시간에 선생님이 노래 자랑을 시킨 것이다.

"누구 노래를 잘 부를 사람 나와서 한번 해 보세요."

선생님 말씀이 끝나자 마자 친구들은 "저요, 저요, 저요"하면서 손을 들었다.

한 아이가 나 가 '산토끼'를, 한 아이는 '달아 달아 밝은 달아'를 불렀다.

나도 알뿐만 아니 라 많이 불러서 끝까지 잘 부를 자신 있는 노래가 있는 고로 크게

"저요"하 고 소리를 지르며 손을 들었다. 선생님은 "이번엔 네가 불러 봐라"하셨다.
나는 조금 부끄러웠지만 어른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도 그 노랠 부르며 모두 웃으시며

잘한다고 박수를 쳐주셨기에 용기를 내어 앞에 서서 손을 모아 잡고 두 눈을 지긋이

감고(이건 우리 어머니 스타일이다)

느긋한 타령조로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를 불렀다.

내가 부르면서 들어도 상당히 잘한 것 같았는데 갑자기 온 교실이 시끌시끌해지더니

여기 저기서 킥킥, 히히히 끝내는 우헤헤 하며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멍하니 섯서 있다가 "으앙-"하고 울고 말았다.


그때 그 어린 마음에 느꼈던 당혹감과 부끄러움은 생의 다리를 2/3를 건너
온 지금에 와서 뒤돌아보아도 아직껏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내가 무얼 알았겠나. 세상에 태어나면서 듣고 배운 것이 찬송과 기도 소리,

예수님 얘기뿐이 었는데 갑자기 세상 가운데 세워지고 별난 취급을 받게 될 줄은.......
나의 아버지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일제 치하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내가 기억하는 40년대와 50년대가 삶을 영위하기에 얼마나

힘들었으며 믿음의 본을 보이며 말씀 따라 살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아득할 뿐이다. 그 시절에 헌금이란 것이 어디 있으며 올바른 성도가 몇이나 되었을까?


믿음이 있다 해도 몇 끼 식량을 위해 어린 자식을 남의 집 머슴으로 서슴 없이 내어 주던

그런 시절에 아버지께선 전답 팔아서 이곳 저곳 다니시며 교회를 여섯 군데나 개척하고

세우셨다. 곡식을 가져다 밥을 한 솥 해서 굶은 사람들 불러다 먹이고 그걸 먹으러

온 몇 사람을 붙들고 예배를 보신다. 처음에는 남의 집 사랑방에 모이기 시작하고

다음에는 고향의 우리 논 몇 마지기가 팔려 나가고 다음엔 그 곳에 땅을 사고 동네

청년 몇 사람 모아다 흙벽돌 쌓고 소나무를 사고 썰고 다듬고 2, 3년 때론 3, 4년 지나면종탑이 올라가고 새벽마다 땡땡 종소리가 들리고 그러면 젊은 전도사 한 분 모셔다 놓고

다음엔 그 곳을 떠나 다시 고을로 마치 집시의 삶처럼 경상남도와 전라북도

벽촌을 찾아다니며 오직 교회를 세우기 위해 생을 바치셨다.

그런 곳의 순박한 아낙들이 하는 헌금은 주로 보리쌀 조금, 감자, 콩 때로는 고추,
호박도 들고 오고 쌀이나 헌금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거의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어린 시절 아주 재미있는 추억 하나가 있다. 한번은 그 시골 마을에

미국 목사님 한 분이 오셨다. 태어나서부터 벽촌으로만 찾아다니며 살아온 내겐 그건

굉장한 사건이요 가슴이 뛰는 일이었다. 노란 머리, 파란눈,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한 피부,

더군다나 그 분이 타고 오신 조그만 자동차, 그때까지 나는 시골길을 달리는 나무나

곡물을 실은 도락구(트럭) 외에는 다른 차를 본 적이 없었다. 온종일 마을아이들을

불러오고 집으로 밖으로 들락날락하며 차와 희안하게 생긴 그 사람을 보려고

정신이 빠져 버렸다. 그분과 손도 잡고 무어라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께 굉장한

행사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장로 장립식이란 걸 알게 된 것은 내가 한참 자란 후였다.


그날 마을 아이들 앞에서 으시대고 뻐기느라 흔치 않은 잔치 음식이 많이 있어도 먹는 것을

잊은 채 폴폴 날아다니다가 밤에는 지쳐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밖에서 웬 사람이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전혀 말 같지 않은 소리로 고함을 질러대는 것이 들렸다. 사람들이 다 뛰어나가 보니 그 미국 사람이 파자마를 움켜쥐고 손전등을 든 채 덜덜 떨며 마당 가운데 서 있었다.
밤에 볼 일을 보러 화장실에 들어가 계셨는데 잠자던 커다란 돼지란 놈이 느닷없이 별식(?)에 반가워 꿀꿀대며 뛰어올랐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방안으로 슬그머니 숨더니

이불자락을 입에다 틀어막고 눈물을 철철 흘리도록 데굴데굴 구르며 웃고 웃고 또 웃었다. 나는 잠에서 덜 깬 상태여서 그땐 그냥 잤는데 지금도 그때 그 목사님 얼굴만 생각하면

웃음을 참지 못해 한참씩 고생을 한다.

출처 : 여호와는나와함께
글쓴이 : 이관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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