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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리스도인과 물질(약5장1-6) / 박조준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2. 7. 07:57

그리스도인과 물질(약5장1-6)

 

                                                                                           출 처| 박조준목사

 

 

우리는 야고보서 1장을 생각하면서 시련과 시험에서 승리하는 삶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생각하게 되는 야고보서 5장에서 다시 우리가 당하는 고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면서 그 고난 속에서 승리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1세기에 사람들이 겪은 고난이 오늘 20세기말을 사는 우리에게도 꼭같이 반복됩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사회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못 가진 사람들이 받는 수모 가 많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산업 사회에서 노사문제는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억 울하게 산업재해로 인해서 평생을 장애자로 지내는 사람은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은 원치 않는 병으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또 진리를 떠나서 그 영혼이 방황하며, 영적으로 타락해서 고난 속에 헤매이는 이도 많습니다.

이런 고난은 우리에게 언제든지 찾아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6절에서는 물질을 앞세우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부유한 사람을 무조건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자는, 그릇된 방법으로, 요샛말로 부정 축재한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이렇게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축재를 했으니까 그 부를 잘못 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하자면 황금만능주의자로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물질을 그들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거나 가치관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부를 얻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4절을 보세요.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부자가 되는 것을 경고하지 않습니다.

돈을 모으는 것이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물질을 소유하고 돈을 버는가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읽은 4절 말씀은 잘못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세의 율법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 하는데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가져야 할 물질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신명기 24장 14∼1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의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했습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은 농사를 짓는 품꾼이었는데 겨우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수입을 가지고 살았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일을 하고 하루라도 제 시간에 품삯을 받지 못하게 되면 그와 그의 가족들은 그 다음 날은 굶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문제에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사실 넉넉한 사람은 당장 수입이 끊어진다고 해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한두 달도 문제가 안됩니다.

그러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은 그 날의 수입이 끊어지면 그 다음날 먹을 것이 없어질 지경입니다.

 

레위기 19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난 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그리고 구체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계신지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정신이 노동법에 적용된다면 가난한 노동자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임금을 체불하지 않게 되고, 귀먹은 사람이나 소경, 다시 말해 장애자의 권익을 보장해서 그들도 할 수 있는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도록 보장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선진국에서는 어느 직장이나 장애인을 몇 퍼센트씩 고 용하는 것이 의무조항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법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시행은 아직도 요원합니다.

어서 빨리, 어느 직장에서나 장애자를 고용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어야겠습니다.

 

예레미야서 22장 13절에 보아도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그 다락방을 지으며 그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있을진저”라고 아주 신랄한 경고를 하였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4절에서 부자는 일방적으로 품꾼에게 주어야 할 품삯을 주지 아니하고 연기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에게 성경은 경고했습니다.

 

6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 하였느니라”했습니다.

 

이 말씀은 문장의 연결이 잘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말하자면 부자들이 품꾼의 삯을 주지 아니하고 착취하여 재물을 축적 하자 당연히 받아야 할 임금을 받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 법정에다 그들의 고용주를 고발하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법관들이 한 말이 6절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 당시의 법관들은 공의를 왜곡하고 부자들의 뇌물에 사주를 당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가장 공정해야 할 법관이 돈에 매수를 당해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고 억울한 사람은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법관 들을 돈으로 사서 자기들의 잘못을 정당화시켰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과거에 그렇지 않았습니까?

법관이 재벌과 권력자에게 시녀 노릇을 해왔습니다.

 

우리가 이미 생각한바 있는 2장 6절은 그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 하느냐”

 

법 앞에는 만인이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부정과 부패가 생기게 되고 불법이 판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가난한 사람들을 법정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면 이미 돈으로 매수된 법관들이 소위 재판을 하게 됩니다.

권력자들의 눈에 벗어나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잡아넣습니다.

이것을 손본다 고 했습니다.

법관들은 권력자가 지시하는 대로 재판을 합니다.

그러니 이런 재판이 공정한 재판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런 사회에 살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잘못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압제하는 사람들을 경고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에 뭐라고 했어요?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해지는 것, 정당하게 돈을 모으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어떻게 돈을 모으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돈을 사용해야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2∼3절을 보세요.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했습니다.

 

이 부자들은 재물이 늘어나는 재미로 살았고 그 자체로 보람을 느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경고하십니다.

재물은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꼭 물어야 할 것은 재물을 모아두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옷과 금, 그리고 금과 은을 말씀한 것은 그 당시의 부자들의 상징입니다.

그들은 좋은 옷을 입었고 금과 은을 계속 모았습니다.

그러나 재물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철학이 없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에도 재물에 대한 바울의 교훈이 있지요.

물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그리스도인들과 이 돈을 사용할 줄 모르고, 모으는 것만 즐기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돈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이런 삶은 우리를 잘못 된 삶으로 빠지게 합니다.

 

이 사회에 문제가 되곤 하는 것이 모두가 이 재물과 관계가 있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그러니까 돈을 사랑하는 자, 밤낮 돈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다고 말했습니다.

 

돈은 잘 쓰면 귀한 것 이지만 잘못 쓰면 사람을 파괴시킵니다.

예수님의 유명한 달란트 비유를 기억하시지요. 주인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을 책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돈을 간수할 줄은 알았는데 잘 쓸 줄은 몰랐습니다. 돈은 모으는 것도 중요하 지만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가 돈을 바로 사용할 줄 모르면 실패의 삶 을 살게 될 것입니다.

미국에 공부한다고 간 학생 가운데 집에 돈이 많아서 넉넉하게 보내주니까 공부할 생각은 안하고 고급 옷에 고급 승용차 타고 다니면서 놀러 다니는 학생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학생 사회에서 사람으로 취급도 안합니다.

결국 부모는 알지도 못하게 타락해 버리 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이유는 돈 때문이고 잘 쓸 줄 몰라 그럽니다.

돈에 대한 올바른 철학이 없는 사람은 전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 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마 6:19∼20).

 

재물을 모아서 두기에는 천국 은행이 가장 안전합니다.

한 개인의 인격과 그의 영적인 상태를 보려하면 그가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부의 허무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 당시 에 돈을 많이 벌었다고 자부하던 이스라엘의 많은 부자들이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쓰고 불과 10년 이 못되어 그러니까 주후 70년에 로마의 침략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쌓아 두었던 재물을 모두 약탈당하고 만 것입니다.

 

물질은 허무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재물에 치심치 말라 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 믿는 사람은 저축을 하지 말거나 사업에 대한 투자 의욕을 버리라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은 저축을 가르칩니다.

요셉은 다가올 흉년을 대비하여 7년 동안 열 심히 저축했습니다.

이기심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저축은 정말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혜 있는 사람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 지혜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잠언 21장 20절에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버리느니라.

 

벌자마자 다 소비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도산 안창호 선생이 가장 강조한 것 중에 하나가 저축 생활이었습니다.

번 대로 다 써버리지 말고 저축해서 경제적인 저력을 키우자고 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도 물질에 관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철학 셋이 있다고 하면서, 열심히 버세요. 힘껏 저축하세요 그리고 하나님과 의를 위해서 쓰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올바른 물질관의 확립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 나타나는 부자들은 마땅히 지불해야 할 임금을 착취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은 사치와 연락을 탐닉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인생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와도 같았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마시고 먹고 즐기자 하며” 사치와 연락을 즐겼습니다.

돈을 바로 쓸 줄 아는 철학과 교훈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돈은 팔과 다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팔과 다리는 계속 써야지 사용하지 않으면 병이 납니다.

여기 오늘 주신 말씀에서 부한 사람이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이기심에 근거한 저축, 마땅히 지불해야 할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치부한 것, 사치와 연락에 빠져있는 삶,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힘없는 사람을 압제하고 박해한 것입니다.

 

이처럼 부로 인해 엄청난 죄를 지었습니다.

이런 부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재물이 강한 우상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대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돈이 결코 우리 생의 목표나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물질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질을 얻더라도 우리의 시선을 물질에 두지 말고 그 물질을 주신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왜요? 언젠가는 그 물질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물질을 어떻게 얻었는지를, 그 물질을 어떻게 썼는지를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날은 도살의 날이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을 보세요.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돼지나 소를 잡는 데를 도살장이라고 합니다.

전에 돼지를 잡는 데서 많은 돼지를 몰고 가는 비결이 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돼지 앞에 콩을 떨어뜨려 주면 돼지들은 콩을 주워 먹는 재미로 열심히 꿀꿀대며 도살장까지 간다고 합니다.

돈 모으는 재미에 정신없이 가다보니 어느새 인생의 마지막이 온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도살의 날,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 다.

 

성경은 모든 부자를 다 부정적으로 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요셉, 솔로몬, 엘리야, 아리마대 요셉, 바나바, 빌레몬 같은 사람도 다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가 훌륭한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야고보서에 기록된 부자들은 좋지 못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변에 가난하게 살던 사람이 올바른 물질관을 확립하지 못한 채 돈을 벌어 그만 그 인격이 부패해 버리고 마는 경우를 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 성에 가서 돈을 많이 벌자 그의 신앙과 인격이 더렵혀진 것과 같은 비극입니다.

 

그러면 심판자는 누굽니까?

오늘 주신 말씀 9절을 보세요.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 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느니라”

 

심판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장차 오실 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정확하게 말 하면 오시고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오신 분이 아니라 오시고 계신 분입니다.

오시고 계신 주님을 의식하는 그리스도인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른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주 먼 훗날 오실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지금 오시고 계십니다.

주님이 오시고 계신 소리를 들으십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실 때 증인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모아둔 물질입니다.

2∼3절에 말씀한 옷과 금과 은입니다.

입지 않고 두었던 옷, 녹이 쓸도록 보관만 해 두었던 금과 은이 다 이들을 고발하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고 모아두기만 했던 물질이 그들을 고발하는 증거물이 될 것입니다.

 

그들을 고발할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지불하지 않은 품삯입니다.

악한 부자는 말할 것입니다.

저는 절대로 돈을 잘못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가 떼어먹은 돈이 소리칠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였는데 죽은 아벨의 피가 소리칩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주님은 억울하게 죽은 아벨의 핏소리를 듣고 계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의 백성들이 애굽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 고통의 모습을 보셨고,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고, 그들이 당하는 고통스러운 사정을 아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지금도 보시고 들으시고 아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불하지 않은 품삯에 대해서도 주님은 보셨고 들으셨고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말론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곧 오신다. 나는 이제 곧 주님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살아왔던 삶을 주님 앞에서 결산해야 한다. 그 날이 곧 온다라는 의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오래오래 살 줄로, 그가 벌어들인 돈으로 즐기며 살 줄로 생각하기 때문에 물질을 탐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그 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두 가지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 전에 실컷 먹고 마시려는 사람과 주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서기 위해 삶을 준비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청지기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처럼 가지지 못한 이웃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가 가난한 사람을 가난에서 해방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기독교 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의 편에 서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더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위치를 잃게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이름 모를 이웃 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냉수 한 잔의 친절을 베푼 것까지 잊지 아니하시고 기억하시는 그 하나님을 향한 투자는 가장 귀한 투자입니다.

 

잠언 19장 17절 말씀을 기억하세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께 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불할 의무를 갖게 됩니다.

그 선행은 갚아 주시리라 했습니다.

물질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종종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의 신앙이 얼마만큼 성장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가 물질을 어떻게 사용 하고 있느냐 하는 것에 비례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물질관을 확립하기 위해서 는 시선을 물질에 두지 말고 주님께 두셔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난하지만 저 세상에서는 부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세상에서는 굉장한 부자인데 저 세상에서는 아주 가난하게 살아갈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5절에도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 에게 약속하신 나라들을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것이 반드시 저주가 아니며, 부한 것이 반드시 축복이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가 어떤 태도로 물질을 소유하며 어떤 태도로 물질을 사용하고 누리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주님의 사역과 봉 사를 위해 물질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의 믿음은 성숙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한 다고 해도 물질에 관한 삶이 바로 드려지지 못한다면 아직도 그의 신앙은 올바른 자리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헌금의 의의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5절에 보면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헌금했던 일을 생각하면서 한 말씀입니 다.

 

단순히 돈을 드린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자신을 주께 드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서 바울은 이 일을 명령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의 의의가 무엇입니까?

헌금을 통해서 자신을 주께 드리는 것이고, 헌금을 통해서 사랑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이 물질을 통해서 주님께 우리의 사랑을 증명하고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계십니까? 그리고 이런 생활은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물질을 바로 사용해서 나중에 하나님께 칭찬받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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