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멘토 - 성령 (3)
벧전 4:12-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로마 집정관이었던 아그립바에게는 첩이 네 명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첩들이 어느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날 설교 제목이 “순결”이었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이 첩들이 그날부터 아그립바와의 잠자리를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또 다른 집정관인 알비누스의 아내도 베드로의 순결의 설교를 듣고 잠자리를 거부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집정관 알비누스와 아그립바가 그때부터 베드로를 증오하고 죽이기로 공모하였는데 그 비밀이 사전에 누설되어 이 첩들과 믿음의 형제들이 베드로에게 로마를 떠나라고 종용해서 베드로는 마침내 위협을 느껴 변장을 하고 조용히 로마를 떠납니다. 베드로가 막 로마성을 벗어났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로마로 들어오고 계셨습니다. 스쳐가다가 베드로가 그 분이 예수님인 것을 발견하고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묻습니다. 그 말이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라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다시 달리려고 로마로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의 눈이 번쩍 뜨였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길로 다시 로마로 들어가서 끝내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경외서인 베드로 행전 3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내용을 가지고 생키에비치(Henrik Sienkievicz)라는 사람이 “쿼바디스”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사후 초월적 능력이 있음에도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를 합니다. 로마의 핍박 앞에서 예수처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죽기 위해 십자가 앞에 섰을 때 그렇게 고백하였다고 합니다. “오 십자가의 이름, 숨겨진 신비여 십자가의 이름으로 표현된 형언할 수 없는 자비여, 지상의 경력을 끝내는 자리에서 나는 당신을 붙잡습니다, 사형집행자들이여 나의 머리를 아래로 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주시오." 그리고 베드로가 죽어갈 때 예수님처럼 찬미하며 기쁨으로 죽어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용감하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였습니다. 그 후 사람들은 그런 베드로의 모습에 감동받아 아이들 이름을 베드로 혹은 피터라고 지었으며 천주교에서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이름도 베드로 이름으로 짓기도 합니다. 베드로의 모습에서 감화를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의 유약함
예수님 곁에는 늘 세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그 자리에 이 세 제자를 대동하고 가셨습니다(막 5:37).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에도 이 세 제자를 동행하게 하셨습니다(막9:2). 감람산에서 성전을 바라보시며 마지막 때의 징조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안드레를 추가한 채 그 세 제자들을 동행시키셨습니다(막13:3).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도 이 세 자자를 가까운 곳에 두셨습니다(막14:33). 그 중에서도 특히 베드로는 모든 장소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예수님의 최 측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를 수제자라고 부릅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마가입니다. 공관복음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은 마가복음입니다. 그 마가가 베드로의 제자입니다.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을 맡았던 측근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할 때 베드로에 대해서 조금도 가감 없이 그대로를 기록하였습니다. 위인전을 보면 대부분 미화되어 있습니다. 링컨도 어렸을 때 통나무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고 하지만 켄터키 주에 나무가 많지만 그곳은 그냥 농촌이었지 그렇게 깊은 산골 통나무집이 아니었습니다. 패트릭 헨리는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록하여 독립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으로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를 굉장한 자유 애호자인줄로 알고 있지만 그는 자기 집에 있는 노예 수백 명을 해방시키지 않은 사람입니다. 괴테는 아주 고상한 지식인인줄 알려져 있지만 집 주모의 월급이 아까워 매번 투덜거리며 월급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세가 하루라도 늦어지면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오늘 세상에 나온 자서전들은 다 이렇게 미화한 것이 많습니다. 삶에서 주어진 실패나 오점이나 부족한 점은 다 생략되고 장점만 극대화시키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마가가 쓴 마가복음은 스승인 베드로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를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 측근 세 제자들 중 베드로는 측근 중의 측근이고 2인자이고 수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 초대 교황으로 섬길 정도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을 보면 어디를 보아도 베드로는 그런 카리스마도 용맹스런 모습도 없습니다. 마가는 스승인 베드로를 위대한 사람으로 기록하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 초라한 모습 그대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8장27~30절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고 물으셨을 때 “엘리야라, 선지자 중 한사람, 세례요한이라고 합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보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합니다. 그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대화가 끝납니다. 그런데 그 대목을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대단히 칭찬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인간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너는 이제 베드로라, 네 이름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노니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6~19). 너무 구구절절 마다 칭찬과 과장이 심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베드로는 계속해서 실패합니다. 막 8:29절을 보면 조금 전 개명사건, 천국열쇠를 주신 사건, 칭찬받은 일들이 순식간에 일시에 다 까먹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막 8:33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며 만류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32).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치십니다. 어제는 천국열쇠를 주시며 칭찬을 하시고 오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치십니다. 그런데 누가복음(9:18~22)에는 사탄아 물러가라는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베드로는 분위기를 분간 못하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마가복음9장5절을 보면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갑자기 엘리야 모세가 나타나 함께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아주 환상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갑자기 “랍비여 여기가 좋아오니 초막 셋을 짓고 ... 여기서 삽시다”하고 제안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분위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마가복음14장37절을 보면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기도합니다. 내일은 십자가 져야 합니다. 아주 심각한 시간입니다. 도움이 될까 해서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외롭고 고독한 싸움을 하며 피땀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를 비롯해서 세 제자가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코를 골며 잠을 잤다는 말은 없지만 분명 제자들은 그때 코를 골며 잠을 잤을 것입니다. 또 마가복음14장72절을 보면 예수님이 대제사장 집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 베드로는 멀찍이 마당에서 불을 쬐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여종이 “너도 한패 아니냐”고 물을 때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맹세하며 부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저주하며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다음 나가서 참담한 심정으로 통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마가복음은 마가가 기록했는데 스승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를 조금도 가감하지 않고 평신도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가려지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베드로 모습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의 거듭남
그러던 베드로가 언제 진정한 제자로, 용기자로, 순교자로, 지도자로 거듭나게 되었는가 하면 성령을 체험하고 난 이후입니다. 마가복음의 시대가 지나고 사도행전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 사후 그리고 승천 후에 성령이 임한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 성령이 임하시고 나서 베드로는 그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를 받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때 강력한 지도자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때부터 베드로는 다시는 물러서지 않는 영적 지도자로, 예수의 참 제자로, 수제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사도행전 중 1장에서 8장까지는 전반부로 베드로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성령역사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얼마나 용감한 지도자로 변화 받는 가를 보여줍니다. 지도력이 눈부시고 카리스마가 넘칩니다. 예수 승천 후 120명의 신자들을 모아 기도회를 주도합니다. 가룟유다를 메울 제자를 새로 선택하는 지도력을 발휘합니다. 또 오순절 날 다락방 기도회를 이끌고 그날 모두가 성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밖에 나아가 설교할 때 수많은 인파가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행2:37)”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주 의연하고 당당하게 “주 예수를 믿으라(행2:38~39)” 외칩니다. 그 결과 3천명이 회심하였다고 했습니다(행2:41). 예전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그리고 사도행전3장7절을 보면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웁니다. 사도행전3장11절 이하에서는 두 번째 설교 때문에 핍박을 받아 이틀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그 일로 5천명이 믿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4장6절에서는 대제사장 안나스가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모여 베드로를 문책했을 때 전에는 여종에게도 무너졌고 예수를 맹세까지 하며 부인했는데 오늘은 당당하게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사도행전4장13절을 보면 그 모습에 모두가 놀라 저가 평소 어부였고 학식이 없고 언변도 없는 사람인데 오늘은 저렇게 담대하니 “할 말이 없었다(행4:14)”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속수무책으로 베드로를 그냥 놓아주었다(행4:21)고 했습니다. 얼마나 강력한 카리스마입니까. 또 병든 자들은 베드로가 지날 때 그림자라도 밟으려 모여들었습니다(행5:15). 대제사장이 시기하여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었는데 밤에 천사가 빼내 주었습니다(행5:19). 그러자 대제사장들이 어떻게 하지를 못하고 “불러다가 다시는 예수를 전하지 말라(행4:28)” 하고 주의를 주니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4:29)”고 말합니다. 이제 베드로는 더 이상 예전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사람이 술에 취하면 다른 사람으로 변하듯이 베드로는 이제 성령에 흠뻑 취한 사람으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베드로의 고난 신학
그리고 나서 베드로가 신학이 바뀝니다. 신앙도 변합니다. 베드로는 고난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던 사람인데 그 베드로가 이제 고난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베드로전후서를 기록합니다. 베드로전후서를 쓰면서 가장 강조한 내용이 고난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고난을 아주 신앙적으로 해석합니다. 그 말은 베드로가 이제는 성숙해졌다는 말입니다. 미성숙자는 고난이 오면 먼저 불평부터, 원망부터, 탓부터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뒤로 신학이 바뀌고 신앙이 변하여 고난을 신앙적으로 해석합니다. “믿음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벧전1:7)”,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고난 을 받으셨도다(벧전2:21)”, “너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라
(벧전4:13)“, “너희가 예수를 위하여 치욕을 당하면 복이 있을 것(벧전4:14)”, “너희는 그리스도인 됨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6).” 베드로가 이렇게 변화된 것은 성령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 제자들은 예수를 영광의 예수로만 알았습니다. 정치적인 예수로만 알았습니다. 기적을 베풀고 박수 받고 화려한 예수로만 보았습니다. 마가의 어머니가 예수께 찾아와 내 두 아들을 주님의 좌우에 앉게 해 달라고 청원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이 예수 사후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베드로를 비롯해서 제자들이 신앙과 신학이 완전히 변화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영광만 바라보던 메시야관이 고난의 메시야로 관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고 형통하고 성공하게 해 주는 영광의 예수에서 고난 받는 예수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베드로는 설교 때마다 예수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베드로서를 보면 고난이라는 말이 15번이나 나옵니다. 그 말은 베드로가 고난의 의미와 신학을 발견했다는 말입니다. 그때부터 베드로가 십자가의 고난을 전할 때마다 성령이 주어졌고 그곳에 신유와 능력이 나타났고 모두 어찌할꼬 하고 눈물의 회심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아주 성숙한 제자가 된 것입니다.
성숙은 이렇게 변화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렇게 성숙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이렇게 성숙하도록 인내하십니다. 자식이 어릴 때에는 주는 것만 좋아합니다. 선물을 주면 아주 좋아합니다. 용돈을 많이 주면 더 좋아합니다. 어려서 그렇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성장하고 철이 들게 되면 이제는 부모를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하고 보답할 줄 알게 됩니다. 성장하고 철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어린 딸이 하나 있었는데 심방을 갔다 오면 가방부터 뒤졌습니다. 그리고 가방에서 사탕과 과자를 찾아 먹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딸의 모습이 아주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심방을 갔다 올 때는 일부러 사탕과 과자를 사 넣고 왔습니다. 그 딸이 커서 시집을 갔습니다. 딸이 보고 싶어서 가방에 과자랑 사탕을 가득 채워가지고 딸네 집을 찾아갔습니다. 딸이 반갑게 맞더니 가방을 받아 소파에 놓고는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가방은 처다 보지도 않았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얘야 저 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하지도 않느냐”고 묻자 딸이 “아버지는 제가 아직도 어린애 인줄 아세요. 그동안에는 아버지를 만나면 무엇을 얻어먹을까를 생각하였지만 이제는 무엇을 해 드려야 하나를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이 성장이고 성숙입니다. 사람이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의미를 찾게 됩니다. 뜻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희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베드로에게서 찾게 됩니다. 베드로가 성숙치 못하였을 때는 철없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시행착오도 일으키고 실패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후 베드로는 보기 흉하게 망가지기도 하고 아주 왜소하고 처참하게 사탄으로 몰리기까지 합니다.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어느 여종의 말 한마디에 맹세까지 하며 예수를 모른다고 부정합니다. 그리고 나가서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합니다. 그러다 마침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이제 주님이 없는 조직을 추수려야 했습니다. 그때부터 베드로는 욕망을 버리고 자신을 버렸습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을 새로 무장하였습니다. 그때 그에게 성령이 임하셨고 그를 지도자가 되게 하셨고 용기자로 변신하게 하셨습니다. 지도자도 그냥 지도자가 아니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지도자로 변신을 했습니다. 그 베드로가 오늘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복이 평안의 복이고 형통의 복만 생각하면 그것은 미성숙자입니다. 진정한 복과 성숙한 믿음은 예수 때문에 받는 고난을 기쁨으로 감수할 수 있는 삶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예수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성령께 의존하십시오. 문제는 내가 성령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강력한 멘토이십니다. 그 성령께 의존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에게 삶을 맡기십시오. 그 분께 사로잡히려면 여러분의 내면을 비우십시오. 그래야 그 성령께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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