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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주의 길을 예비하라-1, 2 (김우현 감독님)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5. 25. 08:47

어느 날 이스트 윈드 작업실에 동생들과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며 한 줌 햇살 아래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 때,  늘 진지한 동훈이가 갑자기 질문을 했다.
그래서 이 예기치 않은 재림에 대한 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동훈
-형이 요즘 나누는 메세지는 거의 재림에 대한 것이 많은데...
좀 우문(愚問)인것 같지만...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 뿐 아니라 주변의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성장이나, 은사, 기름부음, 개인적인 비전에는 집중하지만 재림에는 그다지 깊은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

 

김감독-그래..유감스럽게도 우문이구나..^^
그러나 내가 현답(賢答)을 하겠다...내 이름이 우현(遇賢)이니까..하하..
나 역시 주님의 재림에 관심이 거의 없었다. 언젠가 기도 가운데 주님께서 “재림의 메시지를 나누어라”고 하셨을 때, 그 자체가 큰 부담이었다. "재림이라니요? 방언도 나누기가 ...그것을 나누라는 그 응답에 순종하기가 쉽지 않았는데..이젠 재림이라니요?" 그런 불안에 떨었다.

 

일동-하하하

 

김감독-그래..그래..맘껏 웃어라...
순종이 쉬운 줄 아는가 보지.. 솔직히 재림을 나눈 다는 것은 이상하게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래서 한동안 순종하지 못한 부끄러움이 있었다. 왜 우리가 재림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가? 가장 단순하고도 즉물적인 답을 하겠다. 그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백성들, 제자들, 그 몸의 지체인 교회의 가장 간절한 간구와 소망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진정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요 우리는 그의 신부들이다. 이 아름답고 놀라운 신분과 위치를 아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신랑이 곧 와서 우리를 그 혼인잔치에 데려가기를 간절히 원할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저 죄 용서만을 다루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복음은 죄 용서만이 아니라 부활의 권능, 성령님의 강림과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은 모든 신부들, 교회의 복된 소식이다. '굿 뉴스'여야 한다. 누군가가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지의 평가는 그것으로 매겨질 것이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사랑한다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그 날”(고전13:12)을 사모하고 너무나 그리워 하는 것이 당연하다. 만일 스스로 깊이 돌아 보아 그 주님의 재림에 대한 갈망이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문제가 있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랬다.

 

민석-재림에 대한 관심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문제라는 것인가요?

 

김감독-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토록 이 주제가 성도들에게 버겁고 문제가 많은 것이다. 진정한 것들은 미혹과 변질과 비판의 영들이 공격을 가한다. 성전의 제사에 쓰이는 중요한 기명(器皿)들을 바벨론의 세력들이 훔쳐가 자기들 연회에 썼듯이 하나님 나라의 귀중한 은사, 진리의 보화들을 마귀가 변질시키려고 안달이다. 많은 이들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말세’, ‘종말, ‘환난과 심판’’이라는 어두운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한다. 그래서 재림에 대한 소망이 더욱 적어진 이유도 있다.
구약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는 이미지가 우리에게도 스며 있는 것이다. 환난과 불심판이라는 부정적인 생각들로 인해 믿는 이들조차 재림에 대해 마음의 빗장이 닫혀 있다. 그러나 재림에 대한 진정한 갈망의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날은 바로 우리가 그토록 사모하고 보고 싶었던 예수님을 만나는 '그 날'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가장 강렬한 소망이요 추구였다. 요한 계시록을 읽으면 무수한 재앙과 심판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은 타락한 세상이나 온전한 믿음을 가지지 않은 이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진정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를 깊이 읽고 새겨야 한다. 그 때는 우리 하나님이 통치하시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계19:7)고 한다. 진정 재림은 종말을 넘어서서 교회가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 해야할 날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주의 그 날을 기뻐하며 사모하는 이들이 너무나 드물다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의 다른 한 부분만 읽어 보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 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계22:1-7

 

세준-재림은 모든 것이 회복되고 가장 좋은 날이네요?

 

김감독-그래,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알고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은 말씀 그대로 ‘혼인 잔치날’이다. 그런데 정작 신부들인 교회는 재림을 말하기는 하나 그 날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기다리고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집회를 통해서 재림에 대하여 메시지를 나누자 어떤 목사님이 고백을 했다.
“정말 그동안 재림에 대한 말만 나와도 회피하려 했던 것 같아요. 재림이 너무나 좋은 것인데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서...두려워 하게 된 것이지요.”라고 말이다.

 

정혜-왜요?..왜 그렇게 되어 버렸지요?

 

김감독-그것은 주님의 말씀이 깊이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무수한 시간을 성경공부하고 책을 읽고 나누었다. 그런데 최근에 너무나 그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 많음에 놀랐다. 나의 취향, 체질, 편리대로 성경을 취한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주님의 재림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수없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의 신부들에게 놀라운 축복이요 결혼식의 날이다. 그 동안 사단으로 인해 이 세상에 부어진 모든 고통과 눈물, 상처, 전쟁, 죽음이 사라지고 만물이 새롭게 되는 날이다. 히브리 찬양 가사처럼 오직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을 꿈꾸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이런 성경적인 전망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움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마지막 때는 교회의 가장 큰 희망이요 기쁨이다. 아멘!!

 

일동-아멘!!

 

김감독-그래, 아멘, 아멘, 아멘이다.
그동안 이스라엘에 가서 예수님의 여정을 다큐멘터리로 만들면서 무척이나 부러운 것이 있었다. 예루살렘, 여리고, 갈릴리, 유대 광야 등 주님께서 걸으신 그 길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2천 년 전, 제자들은 그 길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대하고 그 음성을 듣고 심지어 요한은 주님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기까지 하면서 가까이 지낸 것이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부러웠다.
갈릴리 호수가를 처음 걸을 때 눈물이 핑 돌았다.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5)하고 물으셨던 그 장소는 지금 작은 교회당이었다. 그곳에서 “내 안에 사는 이”라는 찬양을 부르는데, 견딜 수 없는 눈물이 뜨거운 용암처럼 내 심연으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정말 성령님께 붙들려 한 없이 울고 울었다. 우리의 육신은 세속에 시달려 묶이고 무디어져 깊이 느끼지 못하나 우리의 영은 그토록 주님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는 바울의 말을 요즘 깊이 생각한다.
진정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그 날은 우리 영의 간절한 소망이다. 나 같은 굴러 다니는 먹물이라도 그 그리움만은 진실이다. 이스라엘 땅이 감격인 이유는 사랑하는 주께서 걸으시고 말씀을 전하신 그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것보다 제자들에게 가장 부러운 것이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림’(再臨)이라는 것은 바로 그 사랑하는 우리 주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신 다는 것이다. 당신의 신부들인 우리를 만나기 위하여 말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2,3

 

이스라엘에서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신부감을 찾으면 그 집에 가서 7일간 선을 본다. 그리고 혼인하기로 결정하게 되면 다시 아버지 집으로 가서 신부와 살 ‘신혼집’을 준비한다. ‘거처’(처소)를 마련하러 가는 것이다. 집이 다 마련 되면 다시 신부를 데리러 간다. 그것이 바로 재림이다.
동훈이는 예수님을 보고 싶지 않니? 주님의 재림이 가다려 지지 않아? 얼굴이 왜 그리 어두워?

 

동훈-보고…무..무척 ..싶지요?

 

김감독-어?..왜 말을 더듬어…안 보고 싶었나 보지?

 

동훈-아니요..갑자기 물어서…당황해서…

 

김감독-예수님께서 도적같이, 갑자기 오신다고 하셨다.
그 때 동훈이처럼 당황하지 않도록 깨어 준비하도록 하자.

 

일동-네..하하하..

 

김감독-우리가 재림에 대하여 이렇게 나누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다.
깨어 그 날을 예비하여 온전히 신부로 서는 것. 그 날을 사모하자. 예수님을 만나는 것. 그 신랑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그 사랑 가운데, 영광 가운데 사는 감격의 날이다. 우리는 너무나 이렇게 그저 믿음으로만 살아서 그 실제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얼굴과 얼굴을 맞댄다"는 컨셉은 히브리어로 '파님 엘 파님'이라 하는데 ‘눈 앞의 사물을 만지듯이 식별한다’는 의미다. 요한은 이것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3:2,3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진정 그분의 '참모습'을 그대로 볼 것이다.
이 말씀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주님의 진정한 얼굴, 그의 사랑, 그의 형상의 본질을 정확히 본다는 것이다. 지금은 거울(청동거울)보는 것처럼 주님에 대하여 부분적이고 희미하기만 하다. 그것이 불만이다. 더욱 예수님의 형상을 보고 싶어서 날마다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한다. 그래도 너무나 부족하고 부끄럽다. 그러나 그 날이 오면 나는 예수님의 그 진정성을 알게 된다. 바울은 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 하였다.
그만큼 주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의 소망이다. 그래서 더욱 재림을 사모한다. 그를 알고 싶어서, 그 분을 알게 되니...

 

민석-그동안 이런 부분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정혜-저도 재림에 대하여 약간 두려움이 있었는데...이젠 기대가 넘치네요.

 

김감독- 벌써?...시작도 안했는데...
그래도 감사하구나. 이왕에 내친김에 바울의 소망을 하나 더 나누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4:8

 

우리가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할 분명한 이유는 무엇이지?

 

세준-의의 면류관...상급을 받게 되네요.

 

김감독-그래, 하늘의 상급을 받게 된다.
창세전에 예비하신 그 나라의 축복....아버지가 우리를 위하여 창조하시고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그 놀라운 은혜의 유업...이 천국의 상급에 대한 복된 갈망이 교회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주님의 몸, 교회의 큰 손실이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느냐...어떤 성장...부흥..자신의 비전에만 매몰되어 하늘의 상급이란 것이 아이들의 우화같은 추상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천국에 대한 열망이 없는 것이다. 나는 재림에 눈을 뜨면서 나 자신을 깊이 돌아 보게 되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2)란 말씀이 그토록 살 깊이 다가 오기는 처음이다. 이제 곧 우리 모두는 주님 앞에 서게 된다. 그것이 기대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두렵다. 물론 나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설 것을 믿는다. 하지만 내 삶이 진정 주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잘하였구나...내 착하고 충성된 종...우현아.."이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그렇게 되기를 소망하고 추구한다.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날마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할 뿐 아니라 깨어서 그 날을 예비해야 한다.

 

세준-초대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김감독-너 그걸 어떻게 알았어?
초대교회는 재림에 대한 갈망이 무척 컸다. 물론 큰 환난과 핍박 가운데 있었기에 더 더욱 천국을 사모했을 것이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고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깊이 믿었던 것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계22:7)라는 말씀은 초대교회의 심장에 새겨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멘, 마라나타..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계22:20) 라고 예배마다 기도마다 고백한 것이다. 그런데 이 초대교회의 유산이 지금 우리 시대엔 사라져 버렸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초대교회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이 고백을 먼저 회복해야 하리라. 예수님의 재림은 물론 천국의 상급에 대하여 깊은 생각을 가진 이들을 주변에서 찾아보라.

 

동훈-정말, 주변에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구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은 보기가 힘든 것 같아요.

 

정혜-저도 그러지 못했는데...왜 그렇게 된 것인가요?

 

김감독-글세,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일단은 그 답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 진정한 신부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성경을 탐구하였다. 그러다가 매우 충격적인 말씀을 만났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요14:23

 

여기서 ‘신부’라는 존재는 당연히 ‘주님을 사랑하는 자’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 말씀을 지킬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에 깊이 주목하라. 이것이 성경의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개념이다. 그런 순종의 사람들을 또한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우리’(성부, 성자, 성령)가 그런 이에게 가서 ‘거처’(혼인집)를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진정으로 그 하신 말씀을 생명처럼 순종하는 자들이 주님의 신부들인 것이다.
이것이 왜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구하는 이들이 드문가의 답이 될 것이다.

 

민석-예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요?

 

김감독-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거기에 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 그것을 사모하고 깨어 예비하라는 말씀은 성경에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는 자들은 드물다. 재림을 말하고 종말을 연구하는 이들도 많으나 진정으로 깨어 주님이 오시기를 사모하고 그 말씀하신 대로의 삶에 드려진 자들은 드문 것이다. 결론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고한 말이라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겠노라 헌신했지만 뒤늦게서야 그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4)라 하셨다.이 ‘친구’라는 말은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하나님이 칭하셨던 그것이다. 히브리어로 ‘아하브’라 하는데 그것은 ‘연인’(lover)이란 것이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오직 하나님의 음성과 언약에 복종한 이들이다. 육신의 나이가 100살이 되었는데 아들을 낳을 뿐 아니라 민족을 그에게 줄 것이라는 약속을 그는 믿었다. 인간의 육체적 상황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그 말도 안되는 약속을 그는 믿은 것이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고 그에게 ‘의’(義)가 되었다.
바울은 이렇게 외친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4: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그 언약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다는 것이다. 그 말씀대로 살았고 지켜낸 것이다. 이 삶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나의 벗’이라 부르는 축복을 가능하게 했다.

바울은 율법학자다. 그는 어릴 적부터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 대단한 천재다. 그는 토라(구약)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바울이 말하는 의의 본질은 신명기에서 가져온 것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신6:4,225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으려면 그의 명령을 깊이 순종해야 한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내 명령을 지키면 나의 친구라”(요15:14)는 그 말씀은 이 토라의 본질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그 앞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10)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주님조차도 그 하나님의 말씀, 명령과 언약을 지키심으로 그 사랑에 들어간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점을 잘 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러 나가셨을 때 요한이 말렸다. 그 때 하신 말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3:15)을 생각하라. 당시 세례는 죄인들의 회개의 표시였다. 그런데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왜 세례를 받으시려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것은 이미 창세기부터 언약 가운데 계시되어진 것이다.

주님은 그 아버지의 언약, ‘어린 양의 희생제물’을 통한 구속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죄인의 세례를 받으셨고 결국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이런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는 주님의 삶은 “모든 의를 이루시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요 이 말씀을 지키는 삶으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신 것이다.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그런 삶을 사는 이들을 ‘신부’, 친구‘, ’제자‘라 부르신 것이다.

 

세준-우리는 신부라는 개념을 어떤 정서적인 것이나 마치 영적인 프로젝트처럼 생각하는데 성경이 말하는 것은 좀 다르네요.

 

김감독-아마 ‘신부’라는 그 용어 때문에 그것의 의미를 매우 여성적이고 감성적인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물론 영적인 전쟁을 하는 이들에게도 적용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 명령에 복종하는 것으로서의 신부라는 개념은 성경 전체의 가장 중요한 의미다. 왜 최초의 그 신부, 하와가 타락을 하고 무너져 그 사랑 가운데서 떨어져 나갔지?

 

정혜-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아서요...

 

김감독-그래, 역시 하와의 후예라 잘 아는 구나...^^

 

정혜-............

 

김감독-하하하...농담이다.
거기에 답이 나오지. 결국 하나님의 언약, 명령, 계명을 목숨처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 아주 독특한 구절이 있는데 흔히 생각지 않는 것이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딤전2:14)는 말씀이다. 바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아담은 사단에게 속지 않았고 하와가 속아서 죄에 빠졌다고 한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 즉 예수님의 모형이다. 사단에게 미혹을 당한 것은 먼저 하와다. 바울은 이 부분을 로마서에서 깊이 다루는데,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롬7:11,12

 

여기서 바울은 ‘죄’를 인격적인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죄가 계명을 교묘히 이용하여 속였다는 것은 창세기3장에의 그 사건에서 가져온 것이다. 죄는 곧 사단의 불법적인 행동의 총체다. 요한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3:4,5)는 깊은 말씀을 기록했다. ‘죄’란 곧 ‘불법’이다. 헬라어로 ‘아노미아’라고 하는데 그것은 ‘율법을 떠난 상태’를 가리킨다. 헬라아로 죄는 '하마르티아', 곧 '과녁을 빗나간 상태'이다. 하와는 하나님의 계명을 깊이 순종하지 않고 임의로 행동했다. 그것이 죄가 된 것이다. 성경을 정확히 읽어보면 하와가 먼저 미혹을 당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먼저 따서 먹었다(창3:6).

미혹하게 하는 영, 불법의 영인 사단에게 속은 것이다.
이것이 주는 영적인 의미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사단이 하나님의 백성, 그 신부들을 무너뜨리는 가장 본질적인 전략은 그 말씀을 흐리고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하기는 하나 진정으로 하나님의 의가 아니다. 먼저 신부가 금지된 열매를 먹고 그 다음 아담에게 주어 먹게 하였다. 아담은 죄에게 속지는 않았으나 이미 타락한 하와이 구속을 위하여 과일을 먹어야 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지만 죄인의 세례를 받으시고 죄를 전가 받으신 그 이유가 여기서 있다. 이해가 되니?

 

동훈-대강 이해는 되는데..아직 너무 어려워요?

 

김감독-그래? 그것은 내가 설명을 충분히 못해서이고 아직 너희들이 단단한 음식을 먹는 수준에 이르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인류의 구속을 위해서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이다. 다시 바울의 통찰에 기대어 보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5:21

이 말씀이 답이 되니?

 

일동-............

 

김감독-이런 것을 전문용어로 유구무언(有口無言)이라 하지..하하하

 

김감독-다른 무엇보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진정한 신부란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자’라는 것이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주목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삶에 새겨야 한다. 왜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을 갈망하고 속히 오시기를 구하는 간구가 교회에서 드문 것인가? 그 말씀, 명령을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듣고 기억하고 지키는 삶의 부재다. 좀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신앙에 이미 많은 미혹과 불법의 영의 틈입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가장 싫어할 세력들이 누구일까?

 

민석-사단의 세력...

 

김감독-역시 <해븐리 스파이>를 만든 작가라...^^
그래, 그들이 가장 싫어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동훈-주님이 오시면 자기들이 끝장나니까요.

 

김감독-정답이다.

그것이 성경의 약속이다. 이제 주님은 죄와 상관없이 사단의 세력들로부터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런데 그 주님의 오심은 아무 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늘과 땅의 준비가 맞아야 한다. 주님은 거처를 마련하시고 우리는 신부로서의 혼수감을 준비해야 한다. 예복(말씀의 본질에 의한 의의 행실)과 등불, 기름을 예비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신부들이 신랑을 사모하는 그 깊이와 열정의 기름부음이 충만해야만 한다. 신부들이 사모하지 않는데 신랑이 기쁨으로 오실까?
마귀는 신부인 교회가 재림에 눈이 멀고 그 언약의 본질이 닫히게 함으로 그 오시는 길을 훼방하는 것이다. 계시록에 이에 대하여 실감나는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
계12:12,13

 

마귀는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여자(교회)를 박해한다.
교회를 미혹하고 배교시키고 불법의 영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다. 그 뒤에 아주 심각하고도 중요한 통찰력들이 쏟아진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계12:15-17).

용이 토한 물은 바로 사단의 미혹하는 언어, 진리, 문화, 전략들이다. 그런데 그 용과 싸우는 남은 자들, 그리스도의 신부들의 모습이 나오고 있다. 어떤 자들이지?

 

정혜-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

 

김감독- 바로 그런 자들이다.
결국 이 마지막 전쟁에서 이기는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증거’, '그 마음, 능력, 그 사랑을 가진 자들이다'. 이것을 깊이 명심하라. 하나님의 언약, 주님의 그 명령을 뜨겁게 받아 들이고 지켜야만 한다. 이것이 없으면 죽는다. 바울은 이것을 계시 가운데 깊이 깨달았다. 너무 바울만 인용해서 좀 그렇지만 그래도 다시 살펴보자.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살후2:3

 

이 마귀의 수법은 에덴에서부터 아직 변하지 않고 있다.그러나 교회는 이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생명처럼 여기고 지키고자 하는 갈망이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통하여 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을 부릅뜨고 심령의 각을 세우고 이것을 직시해야만 한다. 마귀는 교회가 주님의 재림의 길에 서지 못하도록 변질시키고 이단들을 일으켜 미혹하고 가 마음을 닫아 버리고 이 땅의 것들, 현실, 자기 성장과 필요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이다.

 

정혜-두렵네요. 그래서 우리 눈이 재림에 대하여 가려 졌나 봐요.

 

김감독-그렇다고 너무 자책하지는 말고 이제 깨어서 말씀의 본질 가운데 서고 그것을 철저히 지키는 삶을 열어야 한다. 그 능력을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다. 주님께서 기름을 예비하지 못한 처녀들이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출처 : 바브TV http://vavtv.co.kr 

출처 :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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