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선희*김양재 목사 설교

가장 큰사랑[1](요한복음 15장 13절~15절) / 곽선희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12. 14. 11:00

가장 큰사랑[1](요한복음 15장 13절~15절)

 곽선희 목사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없나니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그 동안 일 년여에 걸쳐서 예수님의 잠언을 강해해 왔습니다. 오늘이 예수님의 그 쉰한 번째 강해로, 이 시간으로 예수님의 잠언 강해는 끝을 맺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부터는 사도행전 강해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잠언 강해가 있은 쉰한 주일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예 하신 분이 몇이나 되는지 알아보고 싶지만, 그간 많이 빠지신 분들이 부끄러워하실 것 같아서 그만두었습니다. 사도행전 강해가 시작되는 다음 주에는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강해 시간에 빠지지 않아야 되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다지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의 잠언 가운데서 가장 클라이맥스가 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13절)"---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가장 큰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강하게 계명으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영어로 'creed'라고 하는 '계명(戒名)'에는 명령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이요, 동시에 생명의 길입니다. 이 계명을 좇아 행할 때에는 생명에 이르고, 이 계명을 어길 때에는 구원에서 떠나게 됩니다. 따라서 이 계명은 명령인 동시에 생명의 길이요 축복의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이 그렇습니다. 그 계명대로 하면 복을 받고, 그 계명에서 떠나면 복을 받지 못합니다.

계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생명의 길이요 축복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계명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계명은 우리로 살게 하시고, 영생하게 하시고, 복 받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의견을 물으심이 없이 주신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치의 양보도 하실 수 없는 가장 강한 원리가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계명은 길지 않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 '서로 사랑하라'-이것이 주님의 계명입니다. 오직 사랑하라 하십니다. 헬라어로 '아가파테 알렐루스'라고 하는 이 '서로 사랑하라'하는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누차에 걸쳐서 하시고 계십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주신 이 계명을 받아서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사도 요한이 다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이라고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아주 깊은 뜻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인 요한복음 15장만 보더라도 12절과 17절에서 '서로 사랑하라'라고 말씀합니다. 거슬러 올라가서 13장 34절에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거듭거듭 '아가파테 알렐루스'라고 말씀합니다.

'서로 사랑하라'하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각도가 있습니다. 방향이 있습니다. 이 방향에서 이해해야 오늘의 본문말씀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깊은 뜻이 담겨 있으면서도 긴 해석이 필요 없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엄청난 의미가 담긴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헬라 원문대로 보면 "카토스 에가페사 휴마스"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했으니 너희들도 그와 같이 서로 사랑하라 하심입니다. 보십시오. 서로 사랑함에 있어서의 본뜻, 사랑의 한계, 사랑의 방법, 사랑의 척도가 바로 주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척도요 원칙이요 설명의 전부입니다. 다른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그 사랑으로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세상에 사랑하지 못할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랑하지 못할 사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또 하나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3, 14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의미를 가진 말씀입니다. 친구 사랑과 연관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친구 사랑-이것이 가장 큰사랑입니다.

모든 사랑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사랑이요 가장 높은 가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사랑의 의미가 친구 사랑과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사랑, 가장 높은 사랑이 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다, 너희는 나의 친구다,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죽을 것이다, 나는 친구 사랑의 의미로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깊고 오묘한 주님의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먼저 '친구 사랑' 부정적인 면에서 생각해봅시다. 친구 사랑은 노예적 사랑이 아닙니다. 노예가 상전을 위해서 바치는 사랑은 복종과 충성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친구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가피해서 사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사랑합니다. 도망칠 수도 없고 헤어질 수도 없고 해서 할 수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예적인 사랑입니다. 이 길밖에 더는 다른 길이 없어서 억지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 그럴 수밖에 없어서 하는 사랑은 친구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떤 관계에서 사랑하고 있는지 모릅니다마는 이 사랑이 불가피성에, 필연성에 매인다면 그것은 진정한 친구 사랑이 아닙니다. 사실 친구관계에서는 사랑할 수도 있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친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녀를 낳았다던가, 흑은 부부로 맺어졌다던가 하면 사랑을 안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어쨌든 불가피하게 억지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 하는 노예적인 사랑은 친구 사랑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녀 사랑도 친구 사랑이 아닙니다. 자식을 낳아서 키웁니다. 간혹 이런 이야기를 드리면 어떤 분들은 듣기 싫어합니다. 요즈음은 가정주간이다 어버이주일이다 해서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대단히 귀하게 이야기합니다만, 그실 이 사랑은 사람만이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동물도 제 새끼를 사랑합니다. 극진히 사랑합니다. 동물도 자식을 위해서는 때로 목숨까지도 버립니다. 저는 어렸을 때에 암탉이 병아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독수리와 싸우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암탉이 독수리와 상대나 됩니까? 그러나 암탉은 제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독수리를 물고 늘어집니다. 새끼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버립니다. 모성애의 본능이 대단합니다. 모성애가 가장 강한 동물 중의 하나가 곰입니다.

흔히 우리는 곰이 미련하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곰이 얼마나 영리한데요. 생긴 것만 보고 미련하다고 하는 모양인데, 곰은 아이큐가 높은 짐승이자 동물 가운데서도 새끼를 극진히 사랑하기로 이름 나 있습니다.

그런데 동물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 사이에는 형식적으로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동물은 제 새끼를 어릴 때에는 사랑하지만, 좀 자라면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동물기를 아직 못 벗은 사람들도 자식이 어릴 때에는 사랑하다가도 좀 자라면 싸웁니다.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싸우고, 어머니하고 딸하고 싸웁니다. 미워하면서 싸웁니다. 동물기를 덜 벗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극진히 사랑하다가도 크면 미워하는 것은 잘못된 사랑입니다. 물론 모성애를, 자식을 위하는 우리의 사랑을 동물에 비교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쾌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동물도 제 자식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지고(至高)의 사랑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최고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사랑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라고.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는 '말도 안된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하는 것이 최고의 사랑이지'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사랑이 최고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최고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머니가 자식을 위하는 것은 동물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에는 동물적 본능이 가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같지만, 그실 그것은 불가피한 사랑입니다. 자기가 낳았기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명의 일부이기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미 자기가 사랑했고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기에, 이미 투자한 것이 있기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현 시점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이미 낳았고, 이미 사랑했고, 이미 고생했기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사랑의 일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높이 평가되어야 할 사랑이 못됩니다.

무릇 어머니의 사랑은 그 사랑 자체가 한 번 더 중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함으로 중생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그 사랑 자체의 개념이 신앙적으로 완전히 중생을 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한 본능의 발로로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높은 가치의 사랑으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친구의 사랑이 더 크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부모님의 사랑은 수직적이요 하향적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냥 놔두면 죽습니다.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쁩니다. 이런 것들이 다 관계가 되어 사랑하는 것입니다. 친구 사랑과 다른 것은 그 때문입니다.

남녀의 사랑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일반적인 애정입니다. 지극히 본능적인 애정입니다. 그래서 이 남녀간의 사랑을 진화론자들은 생식 본능의 발로라고까지 아주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본능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람들을 보면 만나서 화끈하게 사랑하고 가정을 꾸려 애를 낳고 합니다마는, 그것도 잠시입니다. 그것이 지나면 더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역시 동물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사랑이지요. 남녀간의 애정을 아주 귀한 것으로, 남녀간의 애정에 온 인류의 모든 아름다움과 정열을 다 쏟고 온 인류의 의미를 부여하려고도 합니다마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역시 친구 사랑만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인을 위해서 죽어봤댔자 친구 사랑만큼 가치가 없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온 생을 다 바쳐봤댔자 친구 사랑만큼 순수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다 더 순수한 사랑, 보다 높은 의미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구제형(救濟型)의 사랑을 생각해봅시다. 누구를 불쌍히 여긴다든가,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든가 하는 의미의 구제적 사랑에는 인격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때로 구제라는 것은 도덕적 향락주의에 속하기도 합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돕는 것은 재미나거든요. 내 양심에 쾌락을 주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랑은 남을 돕는 사랑이기에 앞서 나 자신을 즐겁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랑 역시 최고의 사랑일 수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 역시 귀한 사랑이기는 하지만 친구 사랑만큼 높은 사랑은 아닙니다. 우리의 동정심, 우리의 도덕성이 쏠림으로 불쌍한 사람을 도와줍니다. 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사랑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최고의 사랑인 친구 사랑,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친구 사랑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것은 인격적입니다. 인격 대 인격으로 수평단계에 있습니다. 그러한 관계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랑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꼭 무슨 신세를 진 것도 아닙니다. 앞으로 신세를 지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순수한 수평관계에서의 자율적 사랑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명예와 인격을 주는 사랑입니다.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저를 사랑함으로 인격을 줘야 합니다. 때로는 내가 저를 사랑하고 저를 높이고 저를 위해서 죽음으로써 마침내 그의 명예는 높이고 나의 명예는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친구 사랑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친구 사이에는 질투가 있습니다. 때로는 경쟁의식을 가지기도 합니다. 잘 지내다가도 틀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나보다 못한 자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저가 나와 같아지기 시작하면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백인들이 흑인을 사랑합니다. 아시아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자기네 보다 못하기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잘 대해주더라 거니 인심이 좋더라 거니 합니다만 웬걸요, 같아져보십시오. 일대 일로 같아져서 수평에 딱 올라와 보면 어림도 없습니다. 자기의 70퍼센트 수준으로만 올라서면 가차 없이 잘라버립니다. 라이벌 의식이 생기면 어림도 없습니다.

친구사랑이 더 크다고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못사는 사람에게 옷 한 벌주고 불쌍히 여겨서 도와주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와 같아질 때에, 친구의 수준에 올라섰을 때에 사랑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 때에 저를 사랑하면 그는 높아지고 나는 낮아집니다. 그의 명예는 살고 나의 명예는 죽습니다. 그 때에 가서 사랑할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에는 도와주다가도 비슷해지면 차버리고 잡아당기고 흉보고 합니다. 사랑은 사랑이로되 이는 저질의 사랑에 불과합니다. 높은 사랑은 친구 사랑입니다. 수평적인 인격적 관계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겨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너희를 구원하고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친구의 위치로 너희의 인격을 높여놓고 사랑하는 것이다'하는 엄청난 의미가 담긴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제불능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을,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듯이 하는, 그런 의미의 사랑이 아닙니다. 의를, 명예를, 인격을, 위치를, 위상을 높여놓고 일대 일의 친구관계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저에게 의를 주고 나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저를 살리고 나는 죽는 것입니다. 저에게 생명을 주고 나는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친구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그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는 나의 친구라-여기에 얼마나 엄청난 사랑이 있는지 모릅니다.

친구 사랑은 물질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몸만 바쳐서도 안 됩니다.

명예, 신분, 인격을 다 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의의(意義)를 주는 것입니다. 내가 저를 친구로 삼는다는 것은 결국 내 의로 저를 덮는다는 것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주 형편없는 위치에서 무진 고생을 하는 사람을 붙들고 여러 사람 앞에서 "이 사람이 내 동창이요 내 친구입니다"라고 소개합니다. 사람들은 "저렇게 시시한 사람이 저런 분의 친구라니" 할 것입니다. 형편없는 그 사람의 위상이 당장에 올라갑니다.

그러나 높은 지위의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쩌다 저런 사람하고 친구래" 하는 사람들의 반응처럼 그의 위상은 떨어지고 맙니다. 높은 지위의 사람이 낮은 지위의 사람을 여러 사람 앞에서 "내 친구입니다"라고 소개한다면 낮은 지위의 사람에게는 좋겠지만,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는 높은 지위의 그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형편없는 사람을 "내 동창입니다"라고 소개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간의 내 위상이 땅에 떨어지고 만다---이렇게 여기기에 아무데서나 그렇게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앞서서 무슨 말을 한다고 높아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 사람이 나를 높여주어야지, 내가 나를 높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찬송을 불렀습니다마는, 저는 오늘 부른 이 찬송에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사를 한번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나의 구주, 나의 친구, 사랑하는 나의 친구……'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하신다면 감지덕지, 'thank you' 할 일이지요. 아주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친구'라고 하다니요. 안될 일입니다. 무엄합니다. 감히 어디다 대고 '나의 친구'라고 합니까? 그 소리가 통할 리 없습니다. 도대체가 뭘 모르는 사람이 지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기도할 때에 '나의 친구여' 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나의 친구'라고 하시는 것은 물론 좋은 일입니다. 그것은 진정 우리를 높여주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친구'라고 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주신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구제불능의 거지와 같은 사람을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높여놓고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친구 사랑에는 네 가지의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먼저, 희생입니다. 목숨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목숨'은 헬라어로 '푸시케'라고 합니다. 좀더 학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사이컬러지(psychology)' '사이코(psycho)'라는 말을 잘 쓰는데, 그 말의 첫자는 P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 P자를 발음하지 않습니다마는, 헬라어에서는 그 글자를 발음합니다. 그래서 푸시케입니다. 사이컬러지의 'psy'가 바로 이 푸시케에서 나온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육체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목숨'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때로 우리는 이것을 '혼'이라고도 번역합니다. 목숨은 육체와 정신이 합해진 것입니다. 육체만을 말할 때에는 헬라어로 '소마'라고 하고, 정신만을 일컬을 때에는 '누스‘라고 합니다.

푸시케는 몸과 영이 합쳐진 말입니다. 몸과 영이 합해진 생명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너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몸뚱어리만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까지 합쳐서 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푸시케는 부분이 아니고 전체입니다. 인격 전체, 생명 전체를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숨'입니다. 어쩌다가 몸 하나를 주고 생명 하나를 준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친구 사랑이라는 것은 목숨을 주는 것이요,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의를 주는 것입니다. 친구 사랑은 곧 희생을 의미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담긴 두 번째 의미는 '친구성'입니다. 친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코 노예가 주인에게 바치는 충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길을 지나는데 웬 사람이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립니다. 이를 본 사람이 그를 건지려고 텀벙 물에 들어갔지만 역부족입니다. 결국 물에 빠진 사람만을 건져내고 자기는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참으로 거룩한 희생이라고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힘이 부족해서 죽은 것입니다. 그도 구하고 자기도 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마음까지 바친 것은 아닙니다. 순간적으로 그를 살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 희생도 고귀한 것이지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의미의 희생은 아닌 것입니다. 보십시오. 친구관계에서는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자율적으로 줍니다. 억지로 주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알고 주는 것입니다. 어쩌다 모르고 뛰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구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1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다 알고 있습니다. 서로 아는 바가 있어야 친구입니다. 알려야 친구인 것입니다. 동기, 과정, 결과……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깨끗합니까? 이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러나 어쩌다 그만 그를 위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순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것을 친구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친구 사랑은 늘 자발적이요 자원적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친구 사랑이란 수평관계에서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항상 현재적으로 고백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간혹 보면 옛날 사진을 꺼내놓고 "당신도 젊었을 때는 참 예뻤는데"하는 말로 부인을 울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좋은 말입니까, 나쁜 말입니까? 옛날에는 예뻤는데 지금은 어떻다는 것입니까? 아주 못된 말입니다. 우리는 현재 이대로가 좋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20년 전에는 참 좋았는데"하는 것처럼 슬픈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사랑은 현재적이어야 합니다. 부득이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대로가 최고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나이가 많건 적건, 예쁘건 안예쁘건 상관하지 말 것입니다. 이대로가 좋은 것입니다. 유행가 가사에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할 거야.' 이것이 가장 옳은 고백일 것입니다. 사랑은 현재적으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절대로 과거에서 오는 부득이한 고백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현재 그대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친구 사랑입니다. 친구 사랑은 언제나 오늘에서 출발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친구 사랑은 주도적 사랑입니다.

이니시어티브(initiative)를 가지고 있습니다. 받았기에 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친구로부터 먼저 사랑을 받고 친구를 사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으로 만족하고 너희도 친구를 사랑하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동기가 있다면 주님께 있지, 친구에게 있지 않습니다. 친구에게 사랑을 받고 그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친구 사랑이 아닙니다. 친구 사랑이란 받은 바가 없이 다만 주도적 동기를 가지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먼저 사랑해서 목숨까지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친구입니다.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받는 문제에 대해서 너무 신경을 씁니다. 받은 다음에 사랑하겠노라 합니다. 또 사랑하면서도 얼마나 받았는지 계산을 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데에 신경을 쓸 때에 사랑의 질은 떨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결혼주례 할 때마다 늘 신랑 신부에게 '제발 부탁인데 받는 사랑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보상에 대해서 신경 쓰는 것처럼 비참한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받아봤댔자 별것도 아닙니다. 내가 할 부분만 다하고, 내가 할 사랑의 분량만 다하면 됩니다.

저는 신랑 신부에게 이것을 간곡히 부탁하곤 하는데, 알아듣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에 정신없는 시간이니까요. 그러나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주도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initiative를 누가 가졌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보상을 바라지 말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내가 주도적으로 사랑할 때에 그 사랑은 결코 헛되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생산성이 있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하신 말씀대로 그 사람이 사랑에 감동합니다. 사랑에 감동하고 사랑의 사람이 될 때에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친구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그 친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랑하는 마음이 이웃에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주님께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랑 받음으로 감격할 때에 우리는 곧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친구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친구 사랑은 절대로 헛되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 사랑은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부모님께 대한 효도를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효도에 대해서도 그저 어떻게 하면 효도를 할까, 이렇게 하는 것이 효도다, 이렇게 하면 복 받는다, 효도 안 하면 벌 받는다. 효도 안 하면 저주 받는다…… 이렇게 이야기해봐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모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가' 하는 것을 깨닫는 데에 있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나,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나---그 사랑을 깊이 깨닫는다면 아무 일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 사랑을 깊이 생각하고 감격할 때에 그것이 효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사랑에 대하여 항상 아쉬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것만 같습니다. 그저 사랑을 받을 뿐입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받은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자기가 누구를 사랑하고, 어떻게 사랑하고는 문제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종일 죽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사랑에 어떻게 다 보답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지극히 작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최고의 사랑, 가장 큰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친구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 사랑의 마음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렇듯 친구 사랑은 인격적이요 자율적이요 자원적이요 지도적이요 창조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서 사랑하셨습니다. 의를 주시면서 사랑하셨습니다. 생명까지 주시면서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