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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문학과 방언문제 / 이명원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2. 19. 14:56

[크리틱] 문학과 방언문제 / 이명원

한겨레 등록 :2017-02-10 18:20수정 :2017-02-10 20:36

 

이명원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염병하네, 라는 말을 듣고 속 시원해 하는 사람이 많다. 최순실의 염치없는 민주주의 운운하는 외침에 한 청소노동자가 했다는 말. 이 말은 전라도 지역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인데, 생각해 보니 대학 시절 한 동기가 염병하네, 말할 때마다 좌중을 웃음으로 끌어넣었던 기억이 난다.

사투리랄지 방언이랄지 하는 것을 우리는 일상의 도처에서 듣고 있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문어체계 안에서 이것을 발견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공식 매체에서 활용하고 있는 한국어는 표준어다. 이 표준어는 서울의 교양 있는 중류층 사람들이 쓰는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지만, 사실 특정 시기에 문법적 표준이 되고 확정된 인공어에 가깝다. 이 문법적 기원을 망각했기에,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할 뿐이다.

표준어 바깥의 언어, 즉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활용되는 입말을 우리는 방언이라 규정한다. 방언은 기실 교양 여부와는 상관없는 지역의 유구한 토착어인데, 이보다는 단정한 표준어를 쓰는 게 교양인에 가까운 언어습관이라고 우리는 오인한다. 아마도 이것은 방언의 구어적 성격보다는 문자를 쓰고 읽는다는 행위에 대한 모종의 언어 계몽주의의 흔적처럼 보인다.

표준어는 구체성의 언어가 아니다. 이것은 문법적 척도로 국민국가 안에서 소통을 용이하게 만드는 효율적 장치다. 표준어의 효율성과 규범성은 정보전달의 속도성 및 가치중립성에 기인한다. 반면 방언은 생활세계 안에서의 민중적 정념은 물론 사전적 의미를 초과하는 감각적 구체성을 함축하고 있다. 현대에 방언이 간신히 문어체계 아래서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장은 문학일 것이다.

가령 우리는 이문구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의 유장한 충청도 방언이 없었다면 싱겁다고 느꼈을 것이다. 조정래의 소설을 읽으면서 민중들의 걸쭉한 전라도 방언을 만날 수 없었다면, 소설 읽기의 묘미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현기영의 소설에 제주 방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4·3의 비극을 감각적·구체적으로 인식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최근에 읽은 임우기의 평론집 <네오 샤먼으로서의 작가>에는 이러한 언어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의식이 개진되고 있다. 요컨대 한국의 현대문학은 표준어문학으로 시종되어, 민중적 삶의 이상과 정념 및 교감의 언어인 방언을 배제하는 것을 문학의 현대성으로 과잉 규정했다는 것이다.

가령 이청준이나 김승옥의 소설을 읽으면, 설사 그 배경이 전라도라 할지라도 소설 속의 모든 인물들은 표준어를 구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기이하지 않으냐는 것이다. 박경리의 <토지>와 같은 대하소설 역시 경남 하동 평사리를 배경으로 하지만 주인공 서희는 표준말로 일관하고 있다거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김범우 등 인텔리 역시 표준어로 말하고 대화하고 있음은, 표준어로 상징되는 근대주의에 대한 작가적 환상 또는 무의식의 결과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표준어와 방언 문제를 검토해 볼 때, 이른바 4·19 세대의 대표적 비평가였던 김현은 문제적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를 최초의 한글세대로 규정했고, 그 근거를 ‘표준어’에서 찾았다. 김현 식의 표준어의 근대성은 일종의 언어적 계몽주의에 해당한다. 이 언어적 계몽주의는 방언으로 상징되는 민중적 교감과 생활의 구체성을 격하·배제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종래의 문학을 샤머니즘과 패배주의라며 격렬하게 비판했는데, 이것은 김현뿐만 아니라 이른바 4·19 세대가 공히 취하고 있는 계몽주의적 문학관의 권위주의적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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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2194.html#csidxb32b949ffa1eb27ab35e40f5c3e169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