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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시시각각] 나라를 살리는 세 번째 방법 / 중앙일보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2. 22. 06:40

[이훈범의 시시각각] 나라를 살리는 세 번째 방법

태극기나 촛불이나 나라 걱정하는 방법
하지만 그것을 악용하는 세력들 있다
이제 광장을 떠나 헌재 심판 기다려보자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장면1: 도무지 부아가 치밀어 참을 수 없다. 이만큼 먹고사는 나라를 만들었다는 자부심 하나로 감내했던 칠십 내 평생이 송두리째 부정되는 느낌이다. 안 먹고 안 입고 죽자 사자 일만 한 죄밖에 없는데. 대통령이 주제 넘은 언저리들을 단속하지 못한 잘못은 있어도,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고 따로 챙긴 건 없지 않은가. 그런데 탄핵이라니 이게 웬말인가. 이런 얘길 하면 손자 놈들은 무슨 외계인 보듯 고개를 흔든다. 아들·며느리까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그래서 태극기 집회에 나갔다. 군대여 일어나라’ ‘좌빨은 죽여도 된다는 섬뜩한 구호들이 눈에 거슬려 참아왔었다. 그래도 일방적인 탄핵으로 몰아가는 건 아니다 싶어 용기를 냈다. 그건 용공·종북 세력들의 불순한 음모에 놀아나는 것이다. 대통령이 탄핵되면 그 빈자리를 그들이 차지할 것 아닌가. 그러면 내 조국 대한민국은 어찌 된단 말인가. 태극기를 흔들며 목청껏 외치고 나니 가슴이 좀 후련해졌다. 여전히 거슬리는 주장들도 있었지만 모른 척하면 그만이었다. 다음 주 집회에도 꼭 참석하련다.

장면2: 도무지 분노가 치밀어 참을 수 없다. 도대체 이게 나라냔 말이다. 스무 살짜리 여자애 하나 챙겨주려고 온 나라가 총동원됐다. 대통령의 수석비서관이 기업들 목을 졸랐고 대학 총장과 교수들이 학사규정에 덧칠을 했으며 비선실세를 등에 업은 무리들은 문화·스포츠계를 주물렀다. 절망적인 취업문을 비집고 들어가겠다고 높은 학점에 온갖 스펙까지 쌓느라 부모님 등골 브레이커가 되고 있는 나는 뭔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나를 구해 줄 지푸라기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래서 촛불집회에 나갔다. 이석기 석방’ ‘사드 배치 반대같은 생뚱맞은 외침과 섞이는 게 싫어 참아왔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건 아니어서 용기를 냈다. 대통령 연설문을 고치면서 이권이 생길 만한 구멍은 모조리 쑤셔대던 비선실세는 구치소에서도 여전히 위세를 부리고 있다. ·차관과 비서실장, 수석비서관들이 줄줄이 구속되는데도 아무것도 몰랐다는 대통령은 어떻게든 탄핵을 피해 볼까 온갖 꼼수를 끄집어낸다. 그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게 해 줄 때까지 촛불을 들련다.

애국하는 방법이 하나가 아니듯 나라를 걱정하는 방법도 하나가 아니다. 두 장면 모두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 시민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두 형상이 부딪쳐 긴장을 만들어 낸다. 결정의 날이 다가오면서 갈등은 더욱 끓어오른다. 그야말로 내전(內戰) 일보 직전의 비등점이다. 결국 탄핵이 되든 안 되든 어느 한쪽에서는 불만이 폭발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그렇잖아도 이념과 세대 갈등이 칡과 등나무처럼 얽히고 꼬인 우리 사회다. 거기에 난데없는 최순실 아교풀이 달라붙었다. 그것을 떼내고 푸는 게 정치의 몫일진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정상배들이 더 많고 더 날뛴다. 그들의 관심은 국민도 국가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앞날뿐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사실 호도조차 주저하지 않는다.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지만, 그들 역시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끄는 데만 진력한 공범과 다름 아니다.

이제 광장을 비울 때가 됐다. 태극기를 흔들든 촛불을 켜든 더 이상 계속하는 건 그런 무리들의 불순한 의도에 놀아나는 것이다. 대통령이 스스로 문제를 풀었으면 좋았으련만 너무 멀리 와 버렸다. 결자해지(結者解之) 할 의지도 생각도 없어 보인다. 이제 명백해졌으니 양쪽 모두 광장을 떠나자.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지켜보자. 더욱 중요한 것 하나. 헌재의 결정을 받아들이자. 나와 생각이 다른 결정이 나오더라도 승복하자. 그것이 삼류 정치가 만든 아수라장을 늘 현명하게 극복해 온 일류 국민의 지혜 아니었던가. 그것이 또한 애국시민들이 나라를 걱정하고 살리는 세 번째 방법이 아니겠나 말이다

이훈범 논설위원 


[출처: 중앙일보] [이훈범의 시시각각] 나라를 살리는 세 번째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