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조선의 공법(토지세법)을 만들 때 대규모 여론조사를 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호조에서 5개월에 걸쳐 전·현직 정부 관리와 지방관, 일반 백성 등 모두 17만2806명을 대상으로 찬반을 물었다. 당시 남정(양인인 성인 남자)의 수가 69만2475명이었으니, 전체의 4분의 1이 참여했다. 거의 국민투표에 가까웠다. 찬성이 57.1%로 반대 42.9%보다 많았지만, 세종은 법을 곧바로 시행하지는 않았다. 정부 관리들 사이에선 반대가 많았고, 땅이 척박한 평안도, 함길도 등에서도 반대가 강했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한 뒤, 폐위시킬 것인지 폭넓게 의견을 물었다. 전·현직 관리 970명, 종실 170명과 도성에 사는 백성에게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 의견수렴이라는 뜻을 가진 수의(收議)를 시행한 것인데, 대상이 폭넓었다. 극소수 조정 관리만 폐모에 반대 의견을 냈고, 대부분 찬성했다. 그런데 가장 먼저 반대 의견을 낸 전 영의정 이항복이 귀양 간 것에서 보듯 광해군의 수의는 위력으로 사람을 줄세우는 여론조작에 가까웠다.
서양에서는 1824년 미국 대통령선거 때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 주민들이 대선 후보인 앤드루 잭슨과 존 퀸시 애덤스를 두고 모의투표를 한 것이 최초의 여론조사로 꼽힌다. 20세기 들어 선거 여론조사와 정책 여론조사는 매우 활발해졌다. 결과를 유리하게 조작하려는 시도도 끊이지 않는다.
2015년 말 박근혜 정부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정하고 의견수렴을 할 때, 청와대와 국가정보원, 교육부가 찬성 의견을 늘리려고 의견서를 조작한 정황이 최근 드러났다. 한 사람이 낸 수백장의 의견서, 같은 양식에 이름만 바꿔 쓴 의견서가 무더기로 나왔다. 찬성 의견서 일부에는 이완용, 박정희 등의 이름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 살아 돌아와서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