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자 이윤택에 대한 ‘미투’ 기사를 보면서 머리를 스친 질문 하나. 만일 이윤택이 어깨만 주물러달라고 하고 변태적인 요구를 하지 않았으면 그는 끝까지 자애로운 스승으로 남았을까? 나라면 어깨를 주무르는 것만으로 이미 굴욕을 느꼈을 것 같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할 만한 행동으로서, 나 자신을 어린아이의 위치에 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속한 연극 공동체의 일부 구성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스승을 제대로 모시는 일에 안마가 포함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 안마가 퇴폐적인 성격을 띠었다는 것은 무거운 비밀이었다. 그들은 할아버지의 노망을 못 본 체하는 착한 손녀들처럼 자기들끼리 비밀을 공유하며 혼란을 견뎠다.이런 태도는 사실 한국 사회에서 그리 낯선 게 아니다. 한국의 학계와 문단은 원로 학자나 문인을 ‘어른’이라고 부르면서 ‘모시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가령 <고은 문학의 세계>(신경림·백낙청 편, 1993)에 실린 고은과의 인터뷰는 “그와 같은 어른을 모시고 있는 것은 한국 문단의 큰 복”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에는 생물학적인 어른과 구별되는 사회적 어른이 있는 것이다. 사회적 어른들은 헛되이 나이만 먹었을 뿐 진짜 어른이 되지 못한 우리에게 (신년사나 주례사 등의 형태로) 설교할 권리를 갖는다. 그들의 가르침은 폭력(죽비, 재떨이, 따귀)을 수반하기도 하고, 아주 독창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바지를 벗어 보임으로써 자유로운 영혼이란 무엇인지 알려준다거나), 어른의 가르침인 만큼 겸허하게 수용되는 게 보통이다.어떻게 하면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우선 남자로 태어나야 한다(그리고 가급적이면 결혼을 해야 한다). 고은은 회갑이 될 무렵 ‘문단의 큰 어른’으로 인정받았다. 반면 독신이며 여성인 최영미는 1961년생으로 육십을 바라보지만 전혀 어른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문인들의 만년은 성별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게 일반적이다. 남자 문인이 문단의 어른이 되어 이런저런 자리를 꿰차고 문화부 장관 물망에 오르거나 심지어 노벨상 후보가 되는 사이에, 여자 문인은 가난에 시달리고 우울증에 걸린다. 정신병원에 드나들고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된다(어른 대신 ‘어르신’이 된다). 젊었을 때는 똑같이 ‘천재’라는 말을 들었지만 말이다. 어른이 되기 위한 또 하나의 조건은 학식과 지위다. 한평생 막일을 하며 살아온 사람이 나이가 많다는 것만으로 ‘사회의 어른’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하대나 받지 않으면 다행인 것이다.결국 ‘어른’의 관념은 양반문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양반문화는 축첩을 허용하는 문화였으며, 어린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는 것은 양반들 연회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풍경이었음을 첨언해두자. 이 문화에서는 양기를 북돋기 위해 노인의 침소에 어린 계집종을 넣어주는 일도 흔했다. 이윤택의 안마 요구는 한 세기 전만 해도 그리 변태적인 것이 아니었다.그러니까 문제의 핵심은 사회의 ‘어른’들이 어른답지 않게 행동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들이 우리를 어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그들을 어른으로 모시면서 우리 자신의 어른 자격을 너무 쉽게 포기해버렸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특별한 지혜나 고매한 인격 또는 사회적인 지위 따위가 있어야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서로를 어른으로 인정할 때 우리는 다 같이 어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