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신학 및 개혁신앙 교리

[스크랩] 칼빈의 기독교강요특강(1) -자연계시적 지식(Ⅰ)-

성령충만땅에천국 2018. 4. 24. 03:42

칼빈의 기독교강요특강(1) -자연계시적 지식(Ⅰ)-

                                                                           부산한우리교회 구모영장로

Ⅰ. 강의를 시작하며  

  

1. 칼빈의 생애

   칼빈1)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의 ‘느와용’(Noyon)에서 ‘제랄드 칼빈’(Gerald Calvin)과 ‘잔느 르 프랑’(Jeanne le Franc)의 네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2) 그는 남달리 교육열이 강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최고의 교육을 받는 혜택을 입고 자랐습니다. 칼빈의 아버지는 칼빈이 12살이 되자 출세를 위해서는 신부가 되어야 한다고 권면하였고, 그 역시 같은 생각으로 14살 되던 해에 당시 최고의 지성의 도시인 파리 ‘라 마르슈’(la Marche) 대학에서 예비과정을 마치고, ‘몽떼규’(de Montaigu) 대학에 정식으로 입학하여 4년간 인문학 과정과 신학예비과정을 지독하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칼빈이 ‘몽떼규’ 대학을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자, 그의 아버지는 성직자보다는 법률가가 되는 것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면서 아들의 진로를 바꾸게 하였고, 결국 칼빈은 파리를 떠나 ‘오를레앙’(Orleans) 대학으로 가 법률을 전공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비밀리에 헬라어를 공부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의 일대 전환이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가톨릭에서는 일체 헬라어를 공부하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헬라어로 되어 있는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시키고 있었습니다. 칼빈은 ‘오를레앙’ 대학에서 1531년 22살에 법학석사 학위를 받고 그 다음해에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이라는 탁월한 논문을 발표하여 그의 자질과 능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으며, 1533년에는 법학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로 된 성경을 읽게 되면서, 그동안 로마가톨릭에서 가르쳐 왔던, 또는 설교 해 왔던 내용들이 옳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1533년 10월 31일 자신과 교제하고 있던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이 파리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게 되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제목의 취임연설문을 발표 하게 되었는데, 이 연설문은 사실상 당시의 소르본느 대학과 그 신학자들을 비판하고 루터의 종교개혁에 동조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것으로, 칼빈의 영향 하에 작성된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니콜라스 콥과 칼빈은 사실상 파리에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다음해인 1534년 10월 18일 소위 ‘벽보사건’3)이라고 부르는 프로테스탄트들의 공개적인 저항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유일하신 중보자시오 구세주이신 우리 주님의 그 거룩한 성찬을 직접 반대하여 만들어진 교황주의 미사의 그 무섭고 용납할 수 없는 남용에 대하여…‘로 시작되는 벽보들을 파리와 프랑스의 주요도시에 게재하고 신앙의 자유를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당시 프랑스의 국왕인 프란시스 1세는 교황 바울 3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자신의 영토 내에 모든 이단을 섬멸하겠다고 칙령을 발표함은 물론,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을 체포하고 그 중 35명을 화형에 처하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35명의 화형처분자 중에는 칼빈의 친구 안티엔느(Etienne de la Forge)는 물론 자신의 친 형제도 1명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그를 회심4)케 함은 물론 나아가 경건한 삶에 눈을 뜨게 하였고, ‘경건’을 그의 일생의 목표로 삼았던 것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25살에 받은 성직의 특권을 포기하고 정치적 변혁기에 있는 프랑스를 떠나 스트라스부르크를 거쳐 스위스 바젤로 도피하였으며, 그의 나이 27세 때 이곳에서 저 유명한 “기독교강요”(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를 써서 종교개혁자로서 길이 빛날 대 과업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복음의 진수가 담겨 있고, 기독교 신앙의 원리와 체계가 스며있으며, 종교개혁 이후에 나아가야 할 신학의 나침반이요 신앙의 길잡이 역할을 감당할 대작이었습니다.

   칼빈은 평생 경건을 연습하며 살았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난의 삶이 그를 엄섭하였지만, 이러한 고난이 그를 좌절케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더욱 빛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겸비한 삶을 살아왔는데, 그 모습은 그가 죽을 때 유언으로 남긴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내가 죽으면 제네바 공동묘지에 안치하되, 어떤 묘비도 만들지 말라.” 칼빈은 1509년 7월 10일에 출생하여 그러한 삶을 살다가 1564년 5월 27일 5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죽어간 숭고한 신앙과 정신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상세한 내용은 2009년 11월 1일 주일 오후특강 참조). 


2. 기독교강요의 저술목적과 개요

   

(1)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목적에서 저술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5) 첫째는, 신학도와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공부를 위한 기초를 제공 해 주고자 한 것입니다.6) 이 점은 초판의 목적도 동일하지만(다만 초판은 특히 경건을 강조했음), 특히 그가 쓴 1599년 8월 1일 제네바에서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1559년 마지막 정정 증보판에 부치면서)에도 잘 나타납니다. 즉 그는 “본서에서 내가 목적한 것은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가르쳐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접근하며 아무 장애 없이 그 말씀 안에서 생의 걸음을 걸어갈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이 책의 모든 부분에서 기독교의 개요를 개진하였고 또 그러한 순서대로 그것을 배열하였으므로 누구든지 그것을 바르게 파악하기만 하면 성경연구의 기본적인 목적이 무엇이며, 성경에 포함된 내용을 어떤 목표에 귀착시켜야 하는가를 결정짓는 데 어떠한 곤란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를 더 들라면 당시 프랑스의 왕인 프란시스 1세에게 바친 이 책의 헌사(獻辭)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프로테스탄트들의 주장하는 교리가 마치 이단인 것처럼 호도되어 이들을 향해 적대적 행위를 일삼는 핍박을 받고 있지만, 루터로부터 시작된 개신교의 종교개혁 내지 개혁주의 신앙관이 결코 비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변호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칼빈은, 당시 교회를 유형적이며 가시적일뿐만 아니라 그 형체를 로마교회의 교황청과 교직 계급제에 두고 있지만, 이와는 반대로 교회는 어떤 유형적인 형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형체는 그들이 어리석게 찬양하는 그런 외부적인 화려함에 내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개혁교리가 결코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에게 원수들의 중상모략을 조심할 것을 권하면서 자신들의 결백함을 변호하기 위하여 적은 것이 바로 “기독교강요”이기도 합니다. 즉 그는 “폐하의 마음은 지금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대하여 분노하고 계시지만, 그러나 폐하께 드리는 우리의 변호, 즉 이 신앙고백을 조용히 또는 침착하게 하번만이라도 읽어 주신다면, 우리는 다시 폐하의 호의를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우리는 인내로 우리의 영혼을 얻을 것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손을 기다릴 것입니다. 이 능력의 손은 때가 되면 곤궁한 자를 그 고난에서 구출하고 또 기고만장하여 날뛰며 우리를 멸시하는 자들을 벌하시기 위하여 무장하고 틀림없이 나타나실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는 데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7)  

(2) 칼빈의 “기독교강요” 그 초판은 516쪽 옥타보판(Octavo)으로 1535년 8월경에 집필이 완료되었으며, 그 다음해인 1536년 4월 바젤에서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초판은 6장으로 되어 있었는데, 첫 4장은 율법(십계명해설), 신앙(사도신경해설), 주기도, 성례전으로 되어 있고, 이것은 루터의 요리문답서회의 순서에 따라 배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5장과 6장은 논쟁적인 방법으로 각각 거짓 성례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다루고 있습니다. 5장에서 칼빈은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성례라 불리워지고 있는 견신례, 고해례, 안수례, 결혼례, 종유례 등 다섯을 성례가 아니라고 논박하였습니다.8) 6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개념을 해설할 뿐만 아니라,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논술하였습니다. 이것은 1534년의 그 유명한 ‘벽보사건’을 공적으로 정죄한 데 대한 대답이요, 또한 종교개혁에 대한 프랑스 왕의 잘못된 태도를 시정해 보려는 항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1539년 8월, 칼빈은 다시 새로운 라틴어판 강요를 출판하였는데, 그 부피는 6장에서 17장으로 늘어났습니다. 이 판에서 칼빈은 서두를 두 개의 장으로 장식하였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으로 된 두 장이었습니다. 그것은 1536년 판에서는 율법이라는 장에서만 다만 개략적으로 다루었던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재세례파9) 카롤리(Caroli)와의 치열한 논쟁 끝에 삼위일체론의 해석을 상당히 확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또한 재세례파를 한층 더 논박하기 위하여 신약과 구약의 관계를 다루는 장을 새로이 삽입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1536년판에서도 다소 다루어지긴 했지만, 회개와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가 여기서 새로운 두 장으로 개설되었습니다. 그는 또 여기서 예정과 섭리의 교리를 처음으로 조직화하였습니다. 이렇게 진일보하게 된 것으로 스트라스부르크의 개혁자 부처(Bucer)와의 대화와 어거스틴의 연구를 통해서였습니다.

   1541년 라틴어판을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하였으며, 1543년에 세 번째의 라틴어판과 1545년 프랑어판이 출판되었는데, 이는 1539년과 거의 차이가 없으나 내용이 17장에서 21장으로 늘어난 것이 차이라면 그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 여러 차례 재판을 거듭하면서 1550년에 라틴어판을 다시 출판하였는데, 이 판에서는 1543년판과 마찬가지로 21장으로 되어 있지만 여기서 처음으로 장마다 절을 분류하였습니다. 다만 칼빈은 이 1550년판에서는 성경과 그 권위, 성자와 그 형상에 대한 예배에 대하여 다소 첨가하였고, 양심에 대하여 설명을 첨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새로운 판을 거듭할수록 새로운 인용문들을 풍부하게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끊임없는 연구를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559년 이제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결정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프랑스어판은 1560년). 이것은 칼빈이 전 생애를 바쳐 이루어놓은 정점이라 하겠습니다. 이 당시 그는 사일열(四日熱/ 일종의 말라리아)에 걸려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순간순간 느끼면서도 종래 21장으로 되어 있던 기독교강요를 무려 4배가 되는 80장으로 늘려놓았습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계획에 따라 완전히 개정하였으며, 또한 상당한 증보를 하였습니다. 1536년 초판의 요리문답 형식은 완전히 사라지고, 사도신경에 따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그리고 교회의 4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이 1559년의 기독교강요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1부의 제목은 “하나님의 사역과 성품과 관련하여 세상의 창조주요 절대적인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하여”적고 있는데, 그 주요 내용은 자연계, 성경,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된다는 것, 우상과 하나님과의 구별, 삼위일체 하나님, 악의 존재는 하나님의 의를 훼손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그 내용을 하고 있습니다. 제2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 바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하여” 적고 있는데, 그 내용은 인간의 타락과 자유의지의 상실을 주장하여 인간에게는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논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3장 이하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스도와 율법과의 관계, 구약과 신약의 관계,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사역 등의 순서로 논술해갑니다. 제3부에서는 성령에 대하여 논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는 방식에 대하여” 적고 있는데, 이는 곧 신앙에 대하여 논한 것으로, 그 내용으로는 신앙, 중생, 회심, 그리스도인의 생활로 나누어져 있으며, 특히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서는 극기, 십자가, 종말사상, 성결, 행위, 자유, 기도, 예정, 최종부활 등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제4부에서는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우리를 이끄시고 예수 안에서 우리를 지키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은혜의 외형적 방편에 대하여” 논하는데, 여기서는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 사도시대의 교회, 로마교회, 신경과 교회와의 관계, 회의와 그 권위, 교회의 성례전, 정치적 통치 등을 그 내용으로 진술해갑니다.10)   


3. 칼빈의 “기독교강요” 특강의 목적

   필립 샤프(Phillip Schaff)는 “칼빈이 기독교강요로 인하여 개혁교회의 아리스토텔레스요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이중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개혁주의 교회에 있어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미친 영향을 지대합니다. 이러한 책을 우리 모두 힘을 합쳐 같이 공부를 해 봄으로써 오늘날 우리들에게 엄섭하고 있는 각종 사조의 탁류(濁流)를 잘 해쳐나갈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특히 종교다원화, 가치상대주의라는 포스터모너니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여러 사조들이 우리의 생각과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는 대형화되어 가면서 세속주의라는 극한 풍랑에 교회의 정체성이 함몰되어 가고 있으며, 나아가 처처에 이단이 날뛰는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정신을 차리고 경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대사조에 맥없이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기 위한 방법론으로 16세기 종교개혁자였던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통하여 그가 바라본 신학사상과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진수를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금년 2011년 우리교회의 표어가 “말씀을 사모하자”인데, 이즈음에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적은 제1목적에서도 본 것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함은 물론 말씀에 의지하여 경건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그 역량을 배양하려는데 또한 이 특강의 목적을 둡니다.11)

   그런데 앞으로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특강함에 있어 기본교재로 삼은 것은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Ⅰ-Ⅳ(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8), 죤 칼빈(김종흠․신윤복․이종성․한철하공역),“기독교강요(상)(중)(하)”(서울: 생명의말씀사, 1994)입니다. 이 책의 전체분량은 ‘상’(上) 735쪽, ‘중’(中) 615쪽, ‘하’(下) 634쪽 합계 1,984쪽입니다.12)

Ⅱ. 제1부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자연계시적 지식(제1장-제5장)13)


제1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면 이 둘은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가?


1.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1)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참되며 건전한 지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 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둘 중 무엇이 먼저인지, 그리고 어느 쪽이 다른 쪽의 지식을 산출해 내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2) 칼빈에 의하면 우리 자신은, ① 하나님을 응시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살펴볼 수 없다. 우리가 받은 은사 중 어느 하나도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은 없다. 최초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빠지게 된 비참한 파멸은 우리로 하여금 ‘위’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굶주림과 배고픔 때문에 우리의 결함을 찾을 뿐만 아니라, 공포에 눈을 뜨게 되어 겸손을 배우게 된다. ②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의식하도록 자극을 받아 적어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소나마 얻게 된다. 우리 자신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 이보다 더한 것인 타락과 부패를 자각함으로써 지혜의 참된 광채, 건전한 덕, 차고 넘치는 선, 의의 순결함이 오직 주안에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③ 우리는 자신을 미워하기 전에는 진실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할 수 없다.

   (3)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우리를 일깨워서 하나님을 찾게 하며, 이는 마치 손으로 끄는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는 우리 자신을 올바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2.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1)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은 분명히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고 나서, 다음으로 자신을 세밀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단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본성상 위선(僞善)으로 가득차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닮은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사도가 로마서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전혀 의롭지 못한 존재가 마치 의로운 존재인 양 일종의 공허한 의(義)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의(義) 그 자체를 대신하여 스스로 자신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의와 지혜와 덕으로 완전히 만족하는 한, 우리 자신이 가장 훌륭한 존재라면서 우쭐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을 마치 자신을 반신적(半神的)인 존재로 착각하기에 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3) 그런데 태양을 바라보면 우리의 시력은 태양으로 혼란을 일으키는 것처럼, 하나님 쪽을 향할 때 하나님의 의와 지혜와 권능이 절대 완전하며, 전에 공허한 ‘의’(義)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를 즐겁게 하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최대의 불의(不義)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위엄과 인간

   (1) 인간들(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할 때마다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충격과 압도를 당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벌래 같고(벌래 같은 너 야곱아!) 지푸라기 같고(티끌과 재 같은 아브라함) 하루살이와 같은 무력한 존재자(無力者)라는 점을 깨달을 때 가능한 것이다.

   (2) 그러나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할 때에는, 인간 자신 스스로 안전하게 또는 확고하게 서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일단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면 죽음의 공포로 쓰러질 만큼 마음이 흔들리며 놀라게 되는 것 또한 인간인 것이다.

   (3)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단코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전자를 논한 후 후자를 논하는 것이 정당한 순서이다.

▶하나님의 위엄=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6:22-23, 13:22, 사 6:5, 겔 1:28, 2:1)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의 순결함(욥 38:1 이하)

▶ 아브라함의 티끌과 재 같은 존재시인(창 18:27)

▶엘리야가 주의 영광 앞에 겉옷으로 얼굴을 가림(왕상 19:13)


제2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 지식의 목적은 무엇인가?


1. 경건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필수요건이다.

   (1)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 앞에서 그를 영화롭게 하며 감사케 하는 우리의 경건생활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종교(Religion) 혹은 경건(Piety)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을 수 없다.14)

   (2)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이중지식’(二重知識)에 기초하고 있다. 즉, 그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①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와 성경의 일반적인 교훈에서 자신을 창조주로 나타내셨으며, ②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고후 4:6 참조) 자신을 구속주로 보여 주셨다는 ‘이중의 지식’으로부터 생기게 되는데, 칼빈은 이 중 전자부터 먼저 언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나아가 모든 선의 근원이시며, 그 분 밖에서는 아무것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 한, 단순히 하나님을 경외와 찬양의 대상으로 주장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즉, 하나님을 그 원인으로 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15) 

   (3) 칼빈에 따르면 이중지식의 하나인 창조주(創造主)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가 알 때 종교를 낳게 하는 경건을 우리가 바로 배울 수 있다고 본다(물론 상세한 내용은 5장에서).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경건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칼빈은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으로, 이 사랑은 그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써 오는 것이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께 빚지고 있다는 것,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인 사랑으로 양육 받고 있다는 것, 자기가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의 근원은 하나님으로부터라는 것 등을 인식하지 못하고서는 결단코 하나님께 순종하며 봉사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면 하나님에게 대한 경외도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종교 혹은 경건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신뢰와 경외를, 그리고 우리 인간의 편에서는 인간의 무력성(無力性)을 깨닫는 데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신뢰와 경외를 포함한다.

   (1)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과연 어떠한 분이신가?”라는 질문은 단지 사변적(思辨的)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와 달리 “하나님의 본성은 무엇인가?”를 묻고 그의 본성에 일치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본다.

   (2) 우리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첫째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를 가르치는 데 이바지해야 하며, 둘째로 우리의 안내자요 교사로서 이 지식과 함께 모든 좋은 것(善한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구하는 것을 우리가 배워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든 좋은 것(善)의 근원이며 원천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분명히 바라볼 수 없다. 

   (3)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이 있게 되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참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할 뿐, 어떤 공상적인 신을 꿈꾸지도 않는다. 따라서 자신의 공상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금수(禽獸)와 버러지로 만들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대로 믿는 것으로 만족한다. 더욱이 그는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혹은 경솔하고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최대의 열심과 주의를 기우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을 가질 때 갖게 되는 경건(敬虔)이다.

   (4) 이처럼 경건한 마음의 소지자는 하나님을 주(主)요 아버지로 인정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며, 그의 위엄을 경외하며,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힘쓰며, 또한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항상 하나님의 심판석이 자기 눈앞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그를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을 억제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마냥 두려움의 존재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경외하기 때문에 그를 주(主)로 예배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실로 순수하며 참된 종교가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두려움16)과 결합된 신앙인 것이다.


[특강 1 정리]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을 알 수 있을까?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그는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이 계속 드러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며 무력한 한계상황에 처해 있는 존재임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계속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 사람은 더욱 겸손해 지며 하나님 의존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을 모르면 모를수록 사람은 교만해집니다. 교만한 자는 스스로 자신의 의와 지혜와 덕으로 완전히 만족하면서 마치 자신이 가장 훌륭한 존재라도 된 것처럼 스스로 가장 멋있게 생각하고(우쭐대며) 나아가 반신적(半神的 demigods)인 존재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시며 존귀와 위엄이 한이 없으신 분이시라는 점을 우리 인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코 쉽사리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실존자로서, 한계상황에 처한 존재임을 뼈저리게 자각할 때에만 미미하나마 자신의 무익함을 깨닫고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부패한 본성을 지닌 인간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 칼빈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바로 종교 혹은 경건으로 이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라 합니다. 경건한 마음의 소지자는 하나님을 주(主)요 아버지로 인정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며, 그의 위엄을 경외하며,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힘쓰며, 또한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습관과 생각과 모습을 변화 시켜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함께 경외와 사랑이 넘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싫어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실로 하나님을 의뢰하고 경외하면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자로서 변화(성화) 시켜가려는 자들로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또한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하나님을 바로 알아 그분 앞에서 경건자 내지는 예배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자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되 뜻 없이 하고 있으며,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를 진심으로 경외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는 의식이 허식으로 흐르는 곳마다 마음의 진실성을 찾아보기 매우 힘들다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17)


결론적으로 칼빈은 1장과 제2장에서 ‘기초적인 서론’ 격으로 우리 자신을 아는 참된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엉켜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독립적인 실재로 우리를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허망한 환상을 갖게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땅 넘어서를 보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의와 지혜와 덕으로 만족하는 한 스스로를 가장 멋있게 생각하고 반신(半神)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성을 배경으로 해서 우리 자신을 보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이 참으로 무엇이며 누구인가를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18) 그러므로 다음 3장 이하에서는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논하게 되는데, 이는 다음 강의로 미루겠습니다.(2011년 1월 30일 주일 오후예배 특강자료, 구모영장로)

 

첨부파일 칼빈의_기독교강요특강(1)_자연적_계시(2011013.hwp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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