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넓은 세상으로 보내 줘야 할 ‘왼손’으로
» 쉬잔 발라동, <버려진 인형>, 1921년, 캔버스에 유채, 미국 워싱턴 D.C. 내셔널 여성미술관.
오늘 아침에도 큰아이와 다퉜다. 9살이 되면서부터 늘 이런 식이다. 먼저 후다닥 등교 준비를 마친 아이는 학교에 혼자 먼저 가겠다고 내게 통보했다. 어차피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에 다니는 둘째 아이를 데려다 줘야 하기에 잠시 기다렸다가 같이 집을 나서자고 얘기했지만, 이미 독립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큰아이는 막무가내였다. 자기는 이제는 학교에 데려다줘야 하는 아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울컥, 서운한 마음이 솟구쳤지만 좋은 말로 구슬려 양손에 아이 둘의 손을 잡고 함께 집을 나서는 데 성공. 하지만 결국 거기까지였다.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큰아이는 내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뒤통수를 향해 애타게 이름을 부르는 내 모습에 아이는 잠깐 뒤돌아섰지만 그뿐. 웃으며 “먼저 갈게!”라는 인사만 남긴 채 아이는 시야에서 총총 사라졌다.
‘왜 굳이 그렇게까지…이제 간섭으로 느껴지는 건가. 내가 귀찮은 건가’ 섭섭했다. 그렇게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무심코 SNS에 접속했는데 마치 내 마음을 꿰뚫어본 듯한 글을 만났다. “우린 왼손 같은 엄마를 원한다.” 만화 <슬램덩크>에 나오는 명대사 ‘왼손은 거들뿐’에 빗된 말이었다. 농구에서 최고의 슈터가 되려면 오른손의 스냅을 이용해야 하고 왼손은 중심을 잡아주는 지지대, 보조역할만을 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나온 대사로 기억한다.
세상에, 왼손 같은 엄마라니. 그제야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다. 과연 나는 오른손이 최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옆에서 살짝 거들어주기만 하는, 듬직한 왼손 같은 엄마였는지.
쉬잔 발라동(Suzanne Valadon, 1867~1938)의 1921년 작 <버려진 인형> 속에 등장하는 엄마도 아마 그 글을 봤다면 나처럼 뜨끔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방금 목욕을 하고 나온 딸의 몸을 닦아주고 있다. 하지만 딸은 그런 엄마의 손길이 귀찮은가보다. 한손으로 슬쩍 엄마를 밀어내며 고개를 돌린 딸의 시선은 다른 쪽 손에 들고 있는 손거울에 머문다. ‘딸내미 행동이 정말 무심하네.’라는 생각이 들 때쯤 그림 속 딸의 성숙한 몸이 보인다. 딸은 목욕 후 남은 물기를 엄마에게 맡길 만큼 어린 나이가 아니다.
하지만 엄마는 딸의 머리에 나이에 걸맞지도 않은 커다란 리본을 달아주었고, 어린 아기들이 가지고 놀만 한 인형을 딸의 품에 안겼다. 딸이 인형을 바닥에 내팽개쳤을 때 엄마는 그제야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딸은 엄마가 만들어주고 보호해주는 세계 속에서 얌전히 인형을 갖고 노는 시기가 지났다는 것을. 대신 거울을 보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시기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그녀는 이제 아이를 더 넓은 세상으로 보내줘야 하는 ‘왼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딸이 내 친구였으면, 내가 딸에게 친구 같은 엄마였으면 하고 바랐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내 욕심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런 엄마의 판타지를 내비치는 게 아이에게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을 터. 친구보다는 멋지고 믿음직한 어른으로 딸의 곁에 남는 것이 오히려 아이에게 더 든든함을 줄 것 같다. 아이를 위한다며 아이 동의 없이 아무렇게나 풀어놓았던 여러 감정의 밸브를 조금씩 잠그고, 좀 더 튼튼한 사랑을 위한 마음 근육을 키워나가기. 그것이 엄마 경력 9년 차 나의 숙제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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