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앞두고 노산군 부인 송 씨는 자신의 노비와 재산을 정미수의 아내에게 상속토록 허락해달라는 상언(上言)을 제출한다. 남편과 영도교에서 헤어진 지 꼭 61년 만에 ‘공식석상’에 그 존재를 드러낸 송 씨. 나중에 복위되어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로 불린 분이다. ‘재주(財主)의 뜻대로 하라’는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송 씨는 혹시 있을 분쟁을 염려하여 이 내용을 문서화한다. 죽은 정미수의 처 이 씨에게 주는 별급문기다. 이 몸이 자식 없는 과부인지라 내가 죽은 뒤의 모든 일들을 의지하고 맡길 데가 없어 밤낮으로 슬퍼하고 울던 차에 (…) 자네 남편은 문종대왕의 유일한 외손으로 노산군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고 자네 또한 이 몸에게 잠시라도 마음을 거스르는 바가 없이 항상 정성껏 보살펴주었다. (…) (『해주정씨고문서』)
단종비 송 씨가 상속문서를 남긴 까닭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은 단종은 왕으로 3년, 상왕(上王)으로 2년을 보내고 급기야는 반역의 괴수로 지목되어 유배지 영월에서 죽임을 당했다. 15살에 왕비에 책봉된 송 씨는 1년 6개월의 왕비와 2년의 대비로 궁중에 살다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절집 정업원에 몸을 의탁했다. 그리고 남편 단종의 외로운 혼을 홀로 추모하며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송 씨는 절대권력 세조의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미미한 존재지만 억울하게 죽은 한 인간의 영혼을 돌보며 그 명예회복을 꿈꾸며 평생을 다짐한다. 사실 단종과 정순왕후의 시작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송 씨가 단종의 비로 간택된 것은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의 기획이었다. 왕위에 오른 지 1년, 13살의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과 그가 매수한 종친들의 혼인 요청에 극심한 시달림을 받는다. 부왕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버거운 마당에 혼인은 생각지도 못할 사안이었다. 더구나 3년의 “상중(喪中)에는 혼인할 수 없다”는 규정도 있다. 수양의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단종 1년, 5월 내내 대신들을 번갈아 들여보내 왕을 압박한다. 수양대군과 종친들은 “종사와 만민의 주인이니 한 몸의 상황에 따라 처신할 일이 아니라” 며 단종을 협박한다. 단종은 “나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때를 놓치는 일은 없을 것” 라며 맞선다.
반년이 지나자 수양대군은 혼인을 거부하는 단종을 뒤로하고,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는 창덕궁에서 처녀 간택을 실시한다. 대여섯 차례의 간택을 통해 후보가 좁혀질 무렵 수양대군은 정인지·한확을 대동하고 경복궁의 왕을 찾아가 “왕비를 맞을 채비가 끝났으니 이제 허락을 받아야겠습니다”라며 왕을 압박한다. 이런 기록을 보는 이도 진이 다 빠지는 상황인데 당사자 단종은 오죽하랴. 단종은 “불가하다”, “따를 수 없다”, “들을 수 없다”를 반복하며 “모두가 원할지라도 내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못 박았다.
여기서 단종의 혼인에 온 정신을 쏟고 있는 세 사람, 수양대군과 정인지와 한확은 사실 혼인으로 맺어진 ‘형제들’이다. 정인지는 수양대군의 딸 의숙공주의 시아버지고, 한확은 수양대군의 아들인 도원군의 장인이다. 이들은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의 삼정승 자리를 차지하여 겁에 질린 어린 군주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 문종의 갑작스런 승하로 왕위에 오른 단종은 말이 임금이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수양대군과 정인지와 한확이 간택한 신부가 바로 정순왕후 송 씨다. 간택의 순간에도 완강하게 거부하던 단종은 며칠 후 면복을 갖추고 근정문에 나가 혼인례를 거행하는 주인공이 된다. 왕의 줄기찬 반대에도 불구하고 송 씨는 이렇게 왕비가 되었다. 왕비의 아버지 송현수는 궁중에 바칠 곡물을 관리하던 종6품 풍저창부사에 불과했다. 세조는 그를 ‘옛친구’라며 친한 척 하지만 권력과는 무관한 존재였다. 다시 말해 세조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처족(妻族)을 선택한 것이다.
단종이 죽임을 당한 지 61년이 되자 송 씨는 재산 상속을 빌미로 단종에 대한 기억을 공론화시킨다. 그녀의 상언(上言)은 조정 회의를 촉발시켰는데, 정언 김정국(金正國)은 “정미수의 아내마저 죽으면 노산군의 제사가 끊어질 것이니, 대신들에게 노산군의 후사 문제를 논의해야 하지 않겠느냐” 고 한다.(중종 13년 7월 5일) 또 중종이 노산군의 제사를 내려주자 송 씨는 온갖 지혜를 짜내어 신주를 모실 사당을 조성하고 사당과 묘지를 지킬 노비를 배정했다. 되돌릴 수 없는 역사, 다시 쓰는 까닭은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친족은 정미수 뿐이었다. 정미수가 죽기 전 송 씨는 그에게 상속 문기를 만들어주며 “문종 상전의 유일한 손자로 특별한 은혜를 입은 자네를 바라보는 것은 늘 기쁨이었네”라며 극진한 사랑을 표현했다. 또 “자네도 이 몸을 절친하게 여겨 매사에 늘 보호하고 아껴주니 그 정이 골육과 같다”고 했다. 단종의 외가와 처가를 쑥대밭으로 만든 세조는 아이러니하게도 경혜공주의 어린 아들 정미수는 살려두라는 특명을 내린 것이다. 훗날 정조는 정 씨 묘역에 잠들어 있는 정순왕후를 찾아가 직접 제문을 지어 올린다. 정업원이 있던 곳을 동망봉(東望峯)이라 하네 여기서 무엇이 보이나? 영월의 높은 산일세. 소자가 와서 보니 장릉(莊陵)에 절하는 듯하네. 비석을 세우고 해평을 받들어 제사 올리며 그 자손에게 나의 작은 정성을 펴노니 내려와 임하소서, 제사가 잘 갖추어졌나이다. (『홍재전서』)
그리고 정조는 정순왕후 곁에 잠든 해평부원군 정미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제문을 올린다. “문종을 외조부로 하고 단종의 생질로서, 살아 계실 때는 봉양하고 돌아가신 뒤에는 제사를 받드니 정순왕후가 경(卿)에게서 편안하게 되었네.” 정순왕후 송 씨에게서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가를 본다.
재임 기간 이룬 치적과는 별개로 인간 세조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결과가 좋으면 된다고 할까? 언필칭 어린 조카를 도운 전설적인 정치가 주공(周公)을 자임하면서 명분 없는 쿠데타로 사욕에 충실했던 그. 신뢰와 신의와 같은 중요한 가치로 맞선 귀중한 인재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그 가족들을 노비로 전락시킨 그.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역사 다시 쓰기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는 있다. 역사는 정치나 사회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두려움, 꿈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 다산연구소 여름맞이 특강! 지금 바로 클릭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