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간증+믿음의 글

[스크랩] 나는 죄인중에 죄인이였으며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8. 12. 17:52

 

 

 

 나는 죄인중에 죄인이였으며(박동민목사님 간증)

 
  박동빈 목사님 간증
 

       나는 죄인중의 죄인이었으며 괴수중의 괴수였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지만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용서해 주셨고 60세가 넘은 나를 종으로 선택해 주셨다.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이 죄인에게 간증의 자리를 마련해 주실 것으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영천성시화신문”을 통해 나의 과거의 폭력과 죄, 그릇된 삶, 시련과 고난의 인생을 영천지역의 크리스천들에게 밝힐 수가 있어 후련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내 죄를 평생 가슴에 뭍고 생을 마감하려 했는데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로 생각하기로 했다.나는 중학교에 입학할 때 까지 어머니로부터 심한 매질을 당했다. 어떤 때는 추운 겨울철에 발가벗기고 찬물을 온몸에 퍼부으셨다. 그 영향으로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닐 때는 기가 죽어 있었고 성적도 반에서 중간정도였다.


    중학교 3학년 초 “철암교회”에 나와 같은 학년의 여학생이 이사를 왔다. 성격이 밝고 말괄량이 기질이 있어 남학생들의 관심을 끌었다. 3학년 말경 어느 날 그 여학생이 나에게 다가와 “동빈아, 너는 할 수 있어. 나는 너를 믿는다”는 말만 남기고 황급히 가버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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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이 나의 뇌리를 사로잡았고 너무나 고무되고 기뻤다. 이때부터 나의 생활은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었다. 책상에 앉아 공부에 매달렸고 태권도장에 등록을 하여 운동에도 전념하였으며 매일 밤마다 샌드백을 치고 치면서 역기와 아령으로 몸을 만들고 줄넘기로 순발력을 키웠다. 고등학교 1학년말에는 학년전체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성적이 향상되었고 싸움도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의 대장부로 변해가고 있었다. 2학년에 들어서면서 매일 새벽 냇가에 나가 냉수마찰을 시작하면서 하루를 시작하였다.


   어머니로부터는 “강인한 정신력”을 교육받았고, 여자 친구로부터는 "자신감“을 얻은 셈이었다.이 기쁨도 잠시, 고 2때부터 아버지의 외도로 어머니와의 가정불화가 잦아지자 반항감으로 폭력에 재미를 들이게 되면서 급기야는 열차를 타고 원정을 다니는 폭력 서클에 가담하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은 교회로 찾아가는데 나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여자 친구가 나를 교회에 출석하도록 권유하였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항시 멀리서 나를 지켜만 볼 뿐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고 3때는 폭력의 강도가 더 심해졌다. 술을 대하는 횟수도 잦아졌다. 술을 먹은 상태로 교회에 찾아가서 저녁예배시간에 “친구 ㅇㅇㅇ 면회요 ”하면 교회 내에 폭소가 터지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학교에서도 백지동맹, 동맹휴학, 술이 만취되어 교실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친구들에게만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철칙은 지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을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반성을 하고 책 보따리를 싸들고 서울대학교를 목표로 EMI재수학원에 등록을 하였다.아버지께서 연탄공장을 운영하고 계셨기에 서울에 올라와 좋은 집에 전세를 얻어 나 때문에 퇴학을 당한 ‘찬규’라는 친구와 함께 자취생활을 시작하였다.


     집 주인은 육군중령으로 중앙정보부에 재직하고 있었고 부인은 이화여대를 중퇴한 재원이었다.2개월 동안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에 재미를 붙이려는 시기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주인집 부인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이상해졌다. 화장이 달라지고 옷차림이 달라지고 머리모양이 달라졌다. 친구가 야간고등학교에 가고 없을 때 밤에 내 방으로 수시로 찾아와 맛있는 음식을 건네주고 옷을 세탁해주고는 했다. 특별한 배려가 고맙기는 했지만 무척이나 심적인 부담이 되었고 친구는 그 사실을 알고는 투덜대기도 했다.


     공부를 하기 위해 친구들에게는 나의 거처를 알리지 않고 숨어 지냈는데 친구들이 알아내고 몇 놈이 찾아왔다. 자연히 오랜만에 만났으니 술판이 벌어졌다. 그 자리에 그녀가 끼어들었다. 웃음판이 되고 즐길 즈음에 합석했던 주인집 여자가 정색을 하면서 우리들을 향해 한마디 던지는 것이었다.


    “동빈씨 친구 분들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나는 동빈씨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동빈씨를 선택하겠습니다” 이 말을 마치자마자 내 가슴에 안기며 눈물을 터트리는 것이었다.우리는 주먹을 휘두르는 싸움에는 이력이 나 있지만 이런 경우는 너무도 당황스런 일이어서 모두가 줄행랑을 쳤다. 술 탓이거니 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그 사건 이후로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유혹하며 달려드는 것이었다. 남편과 자녀들도 안중에 없는 듯 했다. 중앙정보부 고위직 아내가 이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풋내기를 사랑한다고 달려드니 고민 끝에 태백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서 급히 상경하셨다. 하지만 주인집여자의 정숙한 언행과 며칠계시는 동안 융숭한 대접을 받은 어머니께서는 “너나 딴 생각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하시면서 오히려 나를 핀잔하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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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상황에 태백에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한 ‘종식’이라는 친구가 찾아와 내가 기거하던 자취방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그런데 종식이가 온 후로 주인집의 귀중품이 하나씩 없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난감했다. 주인집 여자와 찬규라는 친구는 종식이를 의심하는데 그렇다고 오갈 데가 없는 친구를 내보낼 수는 없었다. 나의 의협심을 알아챈 주인집 여자는 어느 날 단도직입적으로 폭탄선언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녀를 만나주지 않으면 찬규 친구를 유혹하여 파멸의 길로 가게 만들겠다”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나의 의리를 역이용한 협박에 나는 답을 주겠노라고 약속하고 하루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친구와 그녀를 살려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결단을 내렸다. 친구 ‘찬규’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에게 “떠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났다. “오늘 강원도 태백의 집으로 내려갑니다. 방을 빼주세요. 집에서 한 달쯤 쉬다가 상경하여 만나드리지요. 지금 오갈데 없는 친구 종식이는 방 나갈 때 까지만 있게 해 주세요”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녀는 회색이 만연하여 “태백에 가 있으면 내가 곧 내려 갈 테니 동해안으로 해수욕을 같이 가도록 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심결에 “그렇게 할께요”라고 대답해 버렸다. 나는 남편과 자녀들을 팽개치고 나를 쫓아 올 일은 없으니 집에서 공부하다가 상경하여 자취를 감추면 모든 일이 쉽게 마무리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나 나눈 이 몇 마디의 대화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녀와 나의 친구 종식에게 엄청난 큰 재앙과 파멸을 불러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고향집으로 내려가 머리를 식히면서 가볍게 공부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아침, 장성경찰서 수사과 형사 3명이 들이닥쳐 나를 결박하면서 그들이 타고 온 차에 태워 경찰서로 향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신변에 큰 사건이 있음을 직감했다. 예상한대로 그녀의 도피 행각이 시작된 것이었다. 친구 종식이는 그녀가강원도 태백으로 내려온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그 전날 방을 빠져나와 이튿날 청량리역에서 우연히 만난것처럼 가장하고 태백으로 내려오는 야간열차에 동승하여 철암역에서 하차한 후 나의 집과는 반대방향인 산으로 유인하여 돌로 그녀의 얼굴과 온몸을 내리쳐 죽이고는 돈을 탈취하여 도망한 것이었다.


     종식이는 그녀를 끌어다 물이 고인 웅덩이에 던지고 나뭇가지를 꺾어 덮어놓고 달아났다.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웅덩이의 물 때문에 그녀가 깨어났고  그 전날까지 많은 비가 내려 계곡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타고 기어 내려와 도로변에 쓰러져 혼절해 있던 그녀를 고등학교 학생이 발견하고 경찰서에 신고함으로서 사건이 접수된 것이었다.


    사건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그녀의 가방 속에 있는 나의 학원증을 보고는 나를 범인으로 지목한 것이었다. 경찰관들과 내가 경찰서에 거의 도착할 무렵 그녀가 깨어나 종식이가 범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를 인근 세탁소에서 체포할 수가 있었다. 그녀의 가정은 파멸되었을 것이고 친구는 15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후 대구에서 생활하다 죄책감으로 자살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목회자가 되어 지금 생각해보니 여자 친구를 따라 철암 교회에 출석했더라면 ‘그 여인이 요셉의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녀의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며 (창 39:12)’와 같이 요셉의 사건을 알수 있었고 나도 요셉과 같이 그녀의 유혹에 무조건 도망을 갔을 텐데 “놀러 오라”고 던진 그 한마디가 두 사람을 다 파멸시킨 꼴이 되어버렸다. 


    이후로 나의 인생은 40년 이상 환난과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건 이튿날에 나의 스캔들과 살인 미수에 대한 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나는 서울의 이태원으로 숨어들어 폭력조직을 결성하고 정신없이 폭력을 휘둘렀다. 그런 와중에 동생이 폭력사건으로 구속이 되어 버렸다. 나는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 내가 길을 잘못 걷는 바람에 동생놈마저 폭력으로 구속되었고 석방된 후에는 알콜중독자로 변질되어가고 있었다. 동생 사건의 충격으로 나는 폭력조직에서 손을 씻고 공부에 전념하여 중앙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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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외도는 점점 심하여 첩에게서 이복동생들을 둘이나 낳고 연탄공장은 부도를 내고 말았다. 그렇게 가족들이 모두 흩어지고 막내 동생놈은 중학교부터 사고를 치더니 아주 폭력세계에 몸을 담아버렸다. 나는 동생들의 인생까지 망친 죄인이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집안을 세울 사명을 가져야 했다. 나는 결단을 내리고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사생결단으로 싸워 아버지와 첩을 내보내고 연탄공장을 아버지 대신 경영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내 나이가 30이라 결혼을 추진하면서 아내를 만났다. 장인어른의 반대가 무척 심했지만 아내는 나의 박력과 용기, 도전정신에 반했고 결혼을 전제로 아내가 내게 요구한 조건은 “교회에 출석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결혼 후 아내를 따라 교회에 출석은 했지만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사업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사건의 연속이었다.


    연탄공장에 근무하던 외삼촌이 자기만 살겠다고 욕심부리는 것을 해고 시켰더니 그날밤 만삭이던 아내와 함께 있는 집으로 식칼을 들고 쳐들어 왔다. 위험을 직감하고 외삼촌을 거꾸러뜨렸더니 그 순간 아내가 충격을 받아 하혈을 시작하였다. 그때 뱃속의 아이를 잃는줄 알았는데 그 놈이 건강하게 태어나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며느리와 삼성의 사내커플로 근무하고 있다.


     연탄공장을 잘 경영하여 부도난 부채를 정리하고 5년만에 공장을 신축해주고 난 이후 아내와 나는 남매를 데리고 마산 창원에서 사업을 하다가, 처가의 사업체가 부도 직전이라 한방생약제약업체인 (주)해동약품공업의 대표이사로 경영을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처가의 어른들과 연속적인 싸움이 계속되었다.


    부도직전까지 이르게 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처조모와 장모님이 생활비를 포함해 처가의 대소사에 너무 큰 돈을 지출하고 있었다. 또 사원들이 회사의 약점을 잡아 협박을 해대고 납품업자와 이중가격으로 납품을 하고, 또 약품을 팔아 회사에 입금하지 않는 등 한마디로 경영이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모든 경비지출(처가의 집안)과 어른들의 생활비를 중단하였다. 회사에 협박을 해대는 사원들은 본보기로 전 사원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폭력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본보기로 해고조치 시켜버렸다. 그 협박을 해대는 주범들 둘 중 하나는 여의도 순복음교회 안수집사였고, 한명은 처 고모부로 삼덕성당의 신도회장 출신이었다. (  안수집사는 해고조치하고, 처 고모부와는 법정싸움에서 승소했다.) 안수집사가 회사에 대해서는 협박을 해대면서도 매주 나에게 조용기 목사 설교지를 우편물로 보내주는 것이었다. 그 설교지를 통해서 예수와 하나님에 대해 조금씩 눈이 떠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주들인 처남들과 회사 경영문제로 다투다 처남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머리로 탁자위에 있는 맥주병을 깨트리다 너무 심히 박아버려 맥주병이 깨지면서 머리에 박히고 허리에 충격을 받아 1년 6개월동안 허리를 못쓰는 앉은뱅이가 되어버렸다.


    이내 아내가 교회에 나가기를 권유하는 것이었다. 아내의 부축으로 교회에 출석(대구 서구 만민교회)을 하여 허리수술도 받아 완치되고 교회 고등부 교사도 하면서 집사로 열심히 봉사하였다.아들 학군문제로 서구 중리동에서 수성구 범어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사업핑계로 또 교회출석을 중단하였다. 날이갈수록 사업도 번창하고 사원수도 20명 정도에서 86명으로 증원되었고 진량공단에 공장을 신축하였는데다 아들까지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였으니 완전히 내 세상인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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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1994년 시무식에 참석하기 위해 밥을 먹고 있는데 아내가 느닷없이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지 않아 벌을 받을것 같아요. 너무 불안해요”라고 이야기 하기에 “쓸데 없이 걱정하지 말라”고 큰 소리 치고는 출근을 하였다.그 시점에 대주주인 처남 동서들(6명 모두 손윗사람)이 처조카를 영업이사로 세우기 위해 작전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며칠 후 주주들이자 처남(4명), 동서(2명)들의 연명으로 된 내용증명이 나의 아파트로 배달되었다.“처조카를 영업이사로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대표이사직을 사임하라”는 것이었다. 사원들이 반대하며 들고 일어나자 그들(주주들)은 변호사를 선임해 주주총회를 열라고 대항해 왔다. 나는 결단을 내려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정든 회사와 사원들을 떠나 새로운 외식사업을 시작했으나 큰 실패를 맛보고 빚더미에 올라 앉게 되었다. 전문경영인으로 자처하던 내가 실업자가 된 셈이었다. 나는 아내를 달래고 진정시키며 3개월동안 성경읽기에 집중하였다. 말씀보는 3개월동안 하나님은 나에게 ‘아브라함’과 ‘모세’를 만나게 해주셨다. 또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받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팔았던 자이고 모세는 살인자가 아닌가?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그들을 귀하게 쓰신 것이다. 나는 결단을 내려 도전을 시작하였다. 우선 주인집 여자와 자살한 친구에게, 용서 해주는 것이 아니라 만날 수는 없지만 내가 용서를 구하고 명복을 비는 기도를 드렸다. 불편했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와 포용과 사랑으로 정상적인 관계로 회복시켰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쓰시기 위해 그녀와 친구와 동생을 내 대신 희생시키신 것이었다.  아들과 딸을 대학까지 졸업시킨 후 내가 대학원에서 신학을 전공하게 해달라고 매일 기도를 드렸다. 하양에서 다시 사업을 시작하였다. 손님이 넘치도록 대 호황이었다. 딸이 먼저 졸업을 하고 아들이 졸업하여 삼성에 취업하자 건물 주인은 자기가 사업을 할 욕심으로 계약을 연장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시설권리금 4천만원을 손해 봐야 하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재도전을 하여 영남신학대학교 신대원에 입학하였다.


     ‘기독교계의 정화를 위한 역할을 감당하라’는 소명을 받고 시작하였다. 입사준비기간중 장신대 출판사의 ‘성경종합자료집’이 조잡하게 발간되어 유통되는 것을 고용수 총장에게 서신을 보내어 보완 개정판이 나오게 하였고, 신대원 시절에는 시험부정행위가 자행되어지는 것을 보고 총장님에게 ‘자퇴서’를 제출하고 교수들에게는 협력을 구하고 학생들에게 이해를 시켜 ‘무감독 시험’을 정착시켰다.


    앞으로도 지역사회에 다양한 봉사를 하면서 기독교계의 정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만 61살인 지난해 봄 노회에서 안수를 받은 목사 초년생이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귀하게 쓰시는 종이 되도록 온 열정을 다하고, 목숨을 바칠 것이다. 간증을 기고하게 해 주신 ‘영천성시화신문’에 거듭 감사를 드린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 여호와는나와함께
글쓴이 : 김미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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