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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손기철 장로, 승리주의 위험성 주의해야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8. 13. 20:25

손기철 장로, 승리주의 위험성 주의해야

[손 장로 치유사역에 대한 소고]독단적 사역 사전 예방 기대
최은상



▲ 손기철 장로가 인도하는 월요말씀치유집회 현장. 헤븐리터치미니스트리 홈페이지 (www.heavenlytouch.kr) 갈무리.

치유 사역과 성령 사역을 평가하는 기준은 우선 그 사역이 성경적으로 건강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가이다. 또한 사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윤리적인가, 지난 2000년간 교회사를 통해 검증된 중요한 신학적 유산에 근거하고 있는가 하는 점 등이다.

지난 수십 년 간 한국 교회에 등장했다가 사라진 수많은 능력 사역들은 몇 가지 공통적인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부작용을 야기하였다. 그러한 문제점과 부작용을 견디지 못하여 소멸되거나 사라져버린 치유 사역들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최근 새롭게 등장한 손기철 장로의 치유 사역을 조명해 볼 필요가 제기되었다. 손기철 장로의 치유 사역은 이미 개인 사역 차원을 넘어서 한국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손기철 장로 치유 사역의 건강성에 대하여 기복주의, 승리주의와의 관계, 각종 윤리성, 신학적 건강성이라는 기준에 따라 고찰해보고자 한다.

1. 기복주의의 함정

기복주의란 하나님에게 복 받는 것을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설정하고, 하나님을 달래는 종교적 요건 충족을 위해서는 열심을 내면서도 인격의 변화와 삶의 열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기독교 신앙의 한 조류이다. 인격의 변화와 삶의 열매가 강조된다해도 그래야 현세적인 복을 더 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궁극적인 목표는 여전히 현세적인 축복을 더 많이, 더 오래 누리는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그 신앙은 여전히 기복주의의 틀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달래어 자신이 원하는 축복을 받게 해주는 종교적 열심 중 단연 으뜸은 헌금과 기도이다. 기복신앙에서는 헌금과 기도를 무척이나 강조하는데, 헌금과 기도 본연의 가치가 드러나기 보다는, 자신의 현실적인 필요를 하나님에게 해결 받으려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변질이 발견된다.

신명기 28장의 축복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와 말씀에 대한 순종의 결과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선물이다. 성경적으로 균형 잡힌 건강한 신앙에도 축복은 포함될 수 있지만, 초점과 중심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고 말씀 안에서의 올바른 삶에 맞춰 있어야 한다.

치유 사역도 기복주의 입장에서 진행될 수 있는데, 손기철 장로의 치유 사역은 하나님나라 신학의 틀 안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보이며, 치유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고 치유를 계기로 치유 대상자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인도하고자 하기 때문에 기복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2. 승리주의(Triumphantalism)의 함정

승리주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때, 그리스도의 성육신, 겸손, 고난, 십자가의 죽음보다 부활하고 승천하여 온 천하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영광과 권세에 더욱 주목하는 기독교 신앙의 한 조류이다. 승리주의 신앙은 예수님의 성육신, 고난, 자기 비움을 과거형으로 처리하거나 약식 처리한다. 현재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승리하고 다스리는 분이시며, 교회는 현재의 그리스도에게 비중 있게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승리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두 축 가운데 십자가라는 축을 약화시키고 부활이라는 축을 강화시켰다. 십자가를 강조해도 십자가의 공로를 강조할 뿐, 교회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지고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승리주의 신앙은 역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지나치게 강조하면서도 부활에 대해서는 언급이 적은 기독교 신앙의 또 다른 조류와 대조를 이룬다. 미국에서 일어나 한국으로 수입되어 온 치유 사역과 성령 사역이 승리주의 신앙 노선에 근거하여 추진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던지는 기본적인 질문은 이렇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가난하게 살기를 기뻐하실까요, 부자로 살기를 기뻐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병들어 살기를 기뻐하실까요, 건강하게 살기를 기뻐하실까요?"

대답은 자명한 것 같지만, 질문의 설정 자체가 성경을 기준으로 보면 처음부터 빗나가 있다. 복음서의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버려야 할 것들과 새롭게 취해야 할 것들과 변화되어야 할 것들에 대하여 반복하여 강조한다. 그 최종 목표는 하나님의 통치이며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건강과 풍요와 행복은 성경이 강조하는 초점이 아닌데도, 신자들의 관심을 그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 자체가 빗나가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중간기를 살고 있는 교회는 부활의 영광을 선취하여 간직하고 있기는 하나 십자가의 고난도 항상 동시에 간직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성령님의 모든 충만과 활발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교회에게는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이 동시에 현존하거나 교차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광과 수욕, 부요함과 빈곤함, 건강과 질병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자족하기를 배워야한다. 교회가 어떤 영적 원리를 개발하여 영광·부요·건강만을 누리고, 비참·가난·질병을 근원적으로 제거하려 한다면, 그 노력 자체는 다른 이유로 얼마든지 환영할 만하지만, 성경적으로는 빗나갔다는 비판을 면하지 못한다.

믿음이 좋고 기도를 잘해도 외관상 비참함과 질병, 그리고 빈곤으로부터 면제받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승리주의 신앙에서는 그런 일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나,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나님 주권으로 간혹 예가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아니면 사람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알고 있는 어떤 부정적인 이유로 믿음 좋고 기도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일종의 죄의 결과로 고난과 가난과 질병에 시달린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사도바울 자신이 가난과 질병과 위험에 시달리고 싸우면서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중에 가난하게 사셨다는 사실을 승리주의자들은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손기철 장로는 예수님은 가난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그렇게 말한 근거는 예수님은 소유하지는 않으셨으나, 필요한 것은 풍족하게 마음껏 누리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손기철 장로의 이 같은 견해는 두 가지 문제를 드러낸다.

첫째는, 통상적으로 부자인가 가난한가는 재산 크기와 소비수준을 기준으로 판단하는데, 예수님은 단지 충분히 누리셨기 때문에 부자였다고 말하는 것은 부자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은 부동산을 비롯한 유형고정자산을 소유하지 않으셨다. 아파트도 없고 에쿠스도 없었다. 팔레스틴 지역을 걸어 다니면서 복음 사역을 하셨다.

당시 문명 수준으로도 부자라면 훨씬 더 편리한 수단인 말이나 마차나 종들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분명 가난하셨다. 예수님이 가난했던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바울은 설명하였다. 바울의 설명이 옳다면 그리스도는 가난하게 살았지 부자로 살지 않았다.

둘째는 예수님은 필요한 것을 마음껏 누리지 아니하셨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의도적으로 선택한 가난한 삶이었다. 예수님의 내면과 존재가 가난한 적은 없었지만, 예수님의 소비수준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준이었거나 조금 상회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때로는 잔치에 참여하기도 하고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즐겨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셨지만, 필요한 것을 마음껏 누리지는 않으셨다.

예수님은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한 자들과 어울려 친구가 되셨다. 예수님의 소비수준은 주로 어울린 가난한 사람들과 비슷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만난 가난한 자들에게 빵을 만들어 먹여준 적은 있었지만, 그것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준을 다소 상회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손기철 장로는 많이 받아서 많이 흘려보내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풍성과 충만에 물질적인 것이 포함된다 하더라도 그 우선순위는 영적인 풍성과 충만에 비해 확실히 뒤로 밀려나는 게 맞다. 물질적인 부요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해도 가장 위험한 선물(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에)이어서 신약성경은 성도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적극적으로 권유하지는 않는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부자인 자들에게 그 부를 하나님 뜻대로 바르게 사용할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가난한 자들에게 이제부터 그리스도를 만났으니, 부자가 될 준비를 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신약성경이 신자가 부자가 되는 것에 무관심하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 언제나 하나님 뜻에 위반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이 같은 분위기를 무시하고, 예수님이 그의 성도들을 부자로 만들기를 매우 원하시는 것처럼 강조한다면 그것은 신약성경 전반적인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다. 가난과 부는 각각 하나님 백성들에게 서로 다른 고통과 과제를 안겨준다. 그래서 잠언은 적절한 수준에서 부에 대한 추구를 멈추라고 권면했다. 그럼에도 성경은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으로서 당대 최고의 부자들을 소개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욥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관계가 좋으면서도 거부가 되는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고 열어 둔다. 그러나 성경이 아주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정의롭고 거룩한 삶을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산 결과 번영이 은총과 축복으로 주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물질적 번영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대체하는 마력이 있어서 번영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마음은 즐겁기보다는 조심스럽고 씁쓰름하기조차 하다.



▲ 손기철 장로. 헤븐리터치미니스트리 홈페이지 (www.heavenlytouch.kr) 갈무리

하나님의 씁쓰름함에 대한 최고의 해답은 하나님 백성들이 철저하게 청지기 사상으로 중무장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번영을 송구스러워하고 덜 좋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뜻을 받들어 관리하고 사용하는 길 뿐이다. 청지기 사상은 하나님과 그 백성과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적 번영을 조화시키는 단 하나의 좁은 길이다. 그래서 청지기 직분에는 언제나 배반의 유혹과 배반하지 않으려는 결단 사이의 긴장이 감돈다.

더 많이 받아서 더 많이 흘려보내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라는 견해에는, 청지기 직분이라는 좁은 길에서의 긴장과 고뇌와 위험성에 대한 각성이 생략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긴장과 고뇌와 조심이 약화된 청지기 직분은 자칫 천박한 물질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손기철 장로의 물질관에는 신명기서가 보여주는 긴장과 고뇌와 두려움 같은 것이 없어 보이며, 때문에 다소 위험해 보인다.

필자는 <뉴스앤조이>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며 손기철 장로의 예수 이해와 물질 이해에서 승리주의 신학의 냄새를 감지하였다. 손기철 장로는 하나님나라 신학의 틀 안에서 치유 사역을 진행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승리주의 신학에 더 많이 의존한다는 인상을 준다. 필자는 손기철 장로에게 승리주의의 위험에 대하여 더 많이 주의할 것과 하나님나라 신학 자체에 더 많이 묵상하고 연구해볼 것을 조언하고 싶다.

3. 성령 사역과 치유 사역자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들

(1) 재정의 함정

한국 교회에는 치유 사역을 통해 들어오는 거액의 헌금을 사적으로 전용하여 바람직하지 않게 사용하다가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버림받고 심판받은 치유 사역자들이 많이 있었다. 손기철 장로의 사역이 현재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치유 사역의 대선배들이 거의 예외 없이 빠져서 힘들어 했던 함정인 만큼, 가볍게 볼 일은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얼마 전부터 헌금을 받기 시작했다 하니, 재정 문제에는 각별하게 주의를 기울여야할 것이다.

잘나가는 치유 사역자에게는 거액의 헌금이 몰려온다. 능력 치유의 현장에서는, 중병환자들의 절박함과 천문학적인 병원비가 배경이 되어, 하나님의 치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여보려고 더 많은 헌금을 하려는 경향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거액으로 축적된 헌금을 어떻게 관리하고 사용할 것인가에 따라 치유 사역자의 운명이 결정된다.

HTM 사역 팀이 재정 운영 원칙을 확립하고, 수입 지출 내역을 투명하게 정리하여 공개하고, 정기적으로 감사를 받아 그 결과를 공개하면, 재정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오래갈 수 있을 것이다. 잉여 헌금을 사회적 약자나 어려운 교회에 지원하고, HTM 사역자체를 확장하기 보다는 사회적 정의와 인자를 실천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HTM 사역은 이전의 그 어떤 사역보다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HTM이 한국 교회 전체를 오래오래 섬기는 기관이 되려면, 이 정도는 필수적으로 해놓아야 하지 않을까?

(2) 독단의 함정

하나님께서 치유 사역자를 통해 강하게 역사해 주시기 때문에, 치유 사역자는 자기가 하나님을 가장 잘 대변한다는 독단에 빠지기 쉽다. 한국 교회에는 그간 독단적으로 치유 사역을 진행하거나 팀을 운영하다가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버림받는 경우가 많았다.

독단에는 신학적 독단과 리더십의 독단이 있는데 둘 다 위험하다. 신학적인 독단은 결국에는 이단으로 정죄받고 전체 교회로부터는 단절되고, 소수의 추종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게토로 전락하게 만들며, 리더십의 독단은 자신의 오류 가능성에 주의하지 않고 전횡하다가 내우외환을 맞이하여 초라하게 소멸되도록 만든다.

신학적인 독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한국의 저명한 신학자들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여 정기적으로 신학적 자문과 지도를 받아야 한다. 치유 사역과 성령 사역을 잘 이해하면서도 올바른 방향으로 지도할 수 있는 신학자들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리더십의 독단을 사전에 예방하려면, 몇 년에 한 번 정도는 공인된 컨설팅 기관으로부터 HTM 운영에 대한 컨설팅을 받도록 권하고 싶다. 하나님의 직접 인도를 받기 때문에 전문 컨설팅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이미 위험한 단계에 들어섰다는 경고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과 직접 대화했던 모세도 이드로의 컨설팅을 받아들여 이스라엘을 효과적으로 재조직하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3) 윤리적 함정

한국 교회 치유 사역자들은 아주 질이 나쁜 윤리적인 문제들을 종종 일으켰다. 하나님의 치유를 조작하거나, 헌금을 미리 받고 치유를 거래하거나, 치유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미한 사건들을 은폐 조작하거나 하는 것 등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 치유 사역과 성령 사역은 반드시 비극적으로 끝난다.

또한, 치유 집회에 자주 나오는 신도들로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을 도모하면서 기존 교회들에게 위협을 가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기존 교회에서 치유가 잘 안 일어나도 그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존귀와 신부로서의 존엄을 갖고 있다. 하늘에 계신 주님이 가장 분노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몸과 신부인 교회가 손상당하는 것이다.

HTM 사역은 치유가 활발하지 않은 기존 교회들과의 갈등에 반드시 직면하게 된다. 이때 기존 교회와 마찰을 최소로 만들며 화목하게 덕을 세워갈 전략과 전술을 세밀하게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들과의 문제 때문에 결국에는 커다란 상처를 입고 기존 다수 교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봉쇄당하게 된다.

4, 최면술과 양태론이라는 비판에 대하여

믿음을 강조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최면술이나 마인드 컨트롤과 비슷한 점이 발견될 수 있다. 최면술이나 마인드 컨트롤과 비슷하다고 해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최면술이나 마인드 컨트롤과 혼동할 위험이 있다고 해서 믿음에 대하여 강조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혼동 가능성에 대하여 주의하면서 차이점을 세밀하게 분별하여 제시할 필요는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 자체를 변질시켰다는 증거를 제시하기보다 최면술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은 비판으로서 특별한 의미가 없어 보인다.

양태론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신론의 하나로, 정통 기독교 신학에 의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 설명하고 있는 변종 삼위일체론 중의 하나이다. 양태론은 성부·성자·성령을 하나의 실체가 갖는 세 가지 얼굴이라고 설명한다.

가장 쉬운 비유는 한 남자가 직장에서는 과장인데, 아내와의 관계에서는 남편이고 자녀와의 관계에서는 아버지가 되는 것처럼 한 분 하나님이 구원 사역에서는 성자로 나타나고 교회의 성화와 선교에서는 성령으로 나타나고, 창조 섭리에서는 성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양태론이 좀 더 역동적으로 변형된 것은 성부 하나님을 태양으로, 성자 예수님을 그 빛으로 성령 하나님을 그 빛이 쬐일 때의 열기로 비유하는 설명법이다. 이것을 역동적 양태론이라고 한다. 양태론은 한국 교회에 상당이 광범하게 퍼져 신봉되고 있으나, 정통 기독교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이단에 해당한다.

정통적인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은 각각 개별 위격을 갖는다. 각각 완전한 신성을 갖는 하나님으로서 상호침투, 상호현존, 상호협력의 방식으로 일체를 구성한다. 세 분 하나님은 각각 구분되는 위격을 갖지만, 역동적인 그리고 완전한 친교를 통하여 일체를 이루고 계신다.

이 같은 삼위일체론을 본체론적 삼위일체론, 사회적 삼위일체론이라 하며, 현대 정통 기독교가 광범하게 인정하는 올바른 삼위일체론이다. 만약에 손기철 장로 치유 사역 중에 성령님을 설명하면서 양태론적으로 설명하였다면, 신학적 오류이며 시정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필자는 손기철 장로에게 정통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공부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성령의 나타남과 지성적 세련미의 결합이 손기철 장로 치유 사역의 가장 중요한 외관상 특징이다.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대화하고 수용하려는 자세 역시 학문에서 통용되는 방법을 성령 사역과 치유 사역에 접목시킨 것으로 보이며,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수십 년 간 한국 교회에 등장했던 수많은 부흥 강사들과 그들이 수행한 치유·성령 사역에 공로 못지않은 부작용이 많았다는 점에서, 최근 새롭게 등장하여 주목을 받고 있는 손기철 장로 치유 사역에 관심 갖고 몇 가지 조언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손기철 장로의 치유·성령 사역이 성경적으로 건강하게 오래가며 한국 교회 전체를 화평하게 섬기고 전체 교회에 환영받는 사역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기도한다.
최은상 / 주님의나라교회 목사 · 공의정치실천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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