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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새벽기도 - 김남준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8. 13. 20:57

새벽기도 - 김남준목사

 

1. 능력의 하나님 : 견고한 그 성 앞에서(여호수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하여 땅을 얻었다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전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이미 주셨습니다. 이것은 완료형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 기업을 주셨어도 아직도 우리에게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이길 수 있는 놀라운 약속들을 주셨지, 완전히 승리해서 전쟁이 필요없는 상태를 주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을 성취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며, 그것은 이미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싸움입니다. 주님은 주신 은혜를 따라서 힘써 싸우는 사람들에게 그 약속을 실현하여 주십니다. 그들의 믿음을 통해서 이 일을 하십니다. 
  여리고 사람들은 특이하게도 아예 다 성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꼭 닫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애초부터 공격은 포기하고 여리고 성을 방어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인 것입니다. 과연 그들은 왜 그랬을까요?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셨고, 늘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그분의 위대한 역사의 소문을 들은 까닭에 이스라엘은 여리고 백성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들이 가지는 영적 권세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무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위엄과 권위를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드러나,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오만하고 패역한 무리들을 두려움으로 떨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그렇게 무릎 꿇게 만드는 위대한 힘은 오직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어쨌거나 지금 우리의 관심은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이적적인 사건 자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놀라운 기적에는 크게 세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요인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 성을 내가 무너뜨려 주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요인은 그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을 반드시 이루실 거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요인은 완전한 순종입니다. 만약 믿기만 하고, 그 일을 위해서 주시는 명령을 실천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믿음이 믿음으로 인정받는 것은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2. 승리의 하나님 : 확실한 패배 앞에서(히스기야)
  그들에게 절망의 밤이 있었기에 새벽에 목격한 승리가 진정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그러한 절망의 밤이 없었다면, 이튿날 새벽의 이 놀라운 승리는 조금도 감격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절망과 고통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믿음 안에서 누린다면, 우리에게 희망과 감격의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만 한다면 아무리 어둡고 험한 골짜기라 할지라도 은혜로 점철된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는 것 이상의 방책은 없습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 아무리 대단한 방책이라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원한다면, 인간적인 방법에 의지하지 마십시오. 완전한 도우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절망적인 상황만큼이나 뼈저리게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의 시선은 오직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고, 상황이 절망적일수록 보좌를 바라보는 두 눈은 불탔습니다. 그는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걸었습니다...(그런데) 절망의 밤을 히스기야처럼 기도로 보낸 사람에게만 새벽이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절망의 밤을 원망과 슬픔과 무기력한 태만으로 보낸 사람에게도 새벽은 찾아옵니다. 하지만 두 새벽은 다릅니다. 인생의 어두운 밤을 기도로 보낸 사람, 확정된 패배 앞에서도 하나님의 위대한 역전을 꿈꾸며 어린아이처럼 매달린 사람들이 맞이하는 새벽은 유난히 눈부십니다. 그 새벽에 주시는 승리의 환희 때문에...

3. 구원의 하나님 : 환난을 벗어나(롯)
  모든 사람들에게 새벽이 이처럼 위대한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새벽의 위대한 의미는 새벽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발견되었습니다. 우리가 놓여 있는 삶의 상황이 캄캄한 어둠의 한복판을 지나는 것 같아도, 우리의 기도는 거기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목격하는 기회를 만들 것입니다... 롯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온 이들과 교통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하나님과 교통한 것입니다. 롯은 새벽까지 그 천사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새벽까지 하나님과 교통한 것입니다. 이것이 롯 일가와 다른 백성들간의 차이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시련이 은혜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롯에게 있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라는 이 엄청난 환난은 하나님의 독점적인 은혜를 경험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시련과 고난이 크고 작음은 신앙에 있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된다면, 여러분은 아직 인생을 너무나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많다는 것이 우리를 절망으로 몰고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인생의 한계와 절망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며, 그 분은 당신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강한 능력을 드러내는 것을 기뻐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눈뜨는 새벽에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새벽에 당신을 찾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4. 기적의 하나님 : 위기를 넘어서(모세)
  출 15장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으신 것은 과거에 이런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다고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이런 위대한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니 하나님께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높이 들어 이적을 행하게 한 모세의 손은 언제나 기도하기 위해서 높이 들었던 기도의 손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손이었기에 그 손은 기적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 손이 죄를 짓던 손이었다면 아무리 높이 치켜든다 해도 홍해는 갈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손이 아닌, 하나님을 향하여 높이 기도하고 들려지던 모세의 그 기도하던 손을 원하셨습니다. 그 기도하던 손이 펼쳐질 때 바다가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고, 바다가 합쳐지며 이스라엘의 대적을 휩쓸었습니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새벽은 매우 특별한 시간이지만, 그것은 새벽이라는 시간 자체에 무슨 신령한 힘이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것은 특별히 새벽 시간이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기에 적합한 시간이기에 생긴 자연스런 결과일 뿐입니다... 절망 속에서 울며 잠든 사람들도 기도 속에서 절망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것이며, 그 사랑에 잡혀 사는 하루는 절망 대신 감사함으로 잠들게 할 것입니다.

5. 은혜의 하나님 : 결핍을 이기며(광야백성) 
  하나님께서 굳이 새벽에 이 이적(만나)을 베푸신 것은 새벽이 죽음과도 같은 어둠이 물러가고 빛의 날이 시작되는 시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깊은 잠 속에 빠져 의식없이 누워 있다가 눈을 딱 뜨게 되는 것은 곧 매일 아침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 같은 잠에서 깨어 그 하루를 살기 위해 새롭게 태어나는 당신의 백성들이 제일 먼저 당신을 대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그 사건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벽의 경건 시간은 그저 기도하고 말씀 보는 일반적인 차원의 시간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하루이기에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하며,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께 여쭈어보는 시간입니다. 
  묵상해 보십시오. 지난밤 어느 때에 잠들었든지 간에 새벽에 광야로 나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른 새벽, 진을 나설 때에는 피곤한 몸으로 가벼운 바구니를 무겁게 들고 떠나는 발걸음이었지만, 광야에서 돌아오는 그들의 바구니에는 하루를 살아갈 생명과 같은 양식이 가득하였고 마음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새벽의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루를 이기며 살 힘을 주시려고

 

6. 새벽에 뜻을 세우라(다윗 / 시108:1-2)
  신앙생활의 견고함은 늘 한가지로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마음을 정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불붙는 목표가 없다는 것은 마음의 정한 바가 없다는 것이며, 이것은 곧 인생의 초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맞추고 있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하는 불붙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순간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확정되지 않은 마음으로 설교를 들어서는 그 요구에 응답할 수 없습니다. 반응할 준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진리를 단순히 즐기려는 오만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그러니까 마음을 확정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 감격이 터져나왔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정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감격을 허락하시는 것은 그 마음의 확정함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그 확정된 마음대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아시기에 그로 하여금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마음이 정해진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감격하던 시인은 하나님을 상고하고 찬양하며 새벽을 맞이하였습니다. 새벽이 그를 깨운 것이 아니라, 그가 새벽을 깨웠습니다.

7. 부르짖음으로 눈뜨라(다윗 / 시 119:147)
  본문으로 미루어보아 시인에게 이른 아침, 하나님 앞에 하는 두 가지의 익숙한 일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기도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본분이 말씀을 상고하고 기도하는 것이지만, 서서히 그 일을 게을리 하다 보면 말씀도 깨닫지 못하고 기도도 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고 맙니다. 새들 중에 날지 못하는 새들이 존재하듯이,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경건 생활을 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시인처럼 새벽의 사람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새벽을 깨우는 삶이 좋음을 알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새벽을 깨우며 살고픈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이 삶을 통해 실현되지 못하고 다만 소망으로만 머무는 것은 그렇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곤하게 잠자고 싶은 욕구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하여 새벽 시간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체질이나 건강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새벽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중시하느냐 입니다. 새벽기도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시간을 희생하면서 쌓아 올린 일생의 업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왜냐하면 그 업적을 산 당사자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영혼들에게 새벽기도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전에는 이 땅의 것들을 보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그것은 매일 아침 하나님의 제단에 자신의 음성과 마음의 첫 열매를 바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더불어 하루를 시작하여 그 하루도 은혜의 날로 만들려는 거룩한 시도인 것입니다. 

8. 새벽에 충성하라(예수님 / 막 1:35) 
  예수님께서는 이른 새벽마다 한적한 곳으로 나가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한적한 곳으로 가셨던 것일까요? 이 한적한 곳이라는 단어는 원어 의미상 “외로운 장소”, “고독한 처소”를 의미합니다. 즉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방해받지 않는 장소를 가리킵니다. 기도는 어느 곳에서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깊이 기도하기 위해서는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는 구별된 장소가 필요합니다. 
  늦은 밤까지 고단한 섬김으로 힘이 진하도록 애쓰신 후에도 자신을 새벽 기도에 바치신 예수님의 생애는 너무나 쉽게 안일한 삶과 타협하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매일 매일 죽으시는 것처럼 기도하며 사셨습니다. 당신은 죽으시고 우리는 살리시려고...

9. 사랑으로 기도하라(막달라 마리아 / 요 20:13)
  ... 두 제자는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무덤을 멍하니 바라보다 결국 자기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는 돌아가지 않고 거기에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본문은 말합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 태도는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들여다보는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시간이 되어 예배에 나온 것일 뿐,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 볼 수 있으리라를 기대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찾으러 왔다가 발견하지 못하자 당연하게 여기고 집에 돌아간 것처럼, 오늘날 신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예배에 나왔으면서도 만나지 못함을 당연하게 여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가 사랑했던 그리스도는 죽었으나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사랑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영적 생활을 나타내는 지수는 은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사랑이 이 여인의 마음 속에 있었기 때문에, 이 여인은 논리와 상관없이 빈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눈물로 구한 것은 그리스도의 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눈물로 간구하였을 때, 그녀는 시체가 아닌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벽, 아직 어두운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벽에 부활하신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벽에 부활하셨기에, 이 부활의 감격은 호기심으로 바라보던 다른 사람들에게 나뉘지 않고 오직 참된 사랑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갔던 여인에게만 주어졌습니다.

10. 회복을 꿈꾸라(베드로 / 요 21:15)
  함께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것은 그분께서 베드로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계셨기에 부른 호칭이었습니다. 만약, 이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다면 베드로는 주눅이 들고 말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큰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믿음이 반석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그에게 반석 같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잔인한 일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불러 주셨기에 베드로는 그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허식과 껍질들을 벗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 분 앞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명예, 지위, 직분, 이 모든 것들은 껍질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때는 그러한 껍질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가야 하며, 그것이 영적인 회복의 지름길입니다. 
  베드로와 유다의 차이는 드러나 실패나 회개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질문, 곧 사랑에 있었던 것입니다. 실패한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는 실패한 그 순간에도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던져지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어떻게 실패했고, 어떤 일들로 넘어졌는지가 아닙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여러분 안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몇 번이라도 회복을 주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흠없는 완벽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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