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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 [정인철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7. 14. 05:26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 목회………목회관련자료

봉서방 | 조회 142 |추천 0 | 2019.03.05. 06:13 http://cafe.daum.net/cgsbong/20yi/6927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

 

 

 

 


 

                                                                                            정 인 철 목사

 

1. 들어가는 글

야고보서는 우리가 흔히 공동서신(the Catholic Epistles), 혹은 일반서신(the General Epistles)이라 부르는 것 중 첫 번째 서신이다. 몇몇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이 서신들은 기독교회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다. 이는 신약성경의 중요한 다른 서신들, 특히 바울 서신의 그늘에 거의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야고보서는 초대교회에서부터 많은 문제점을 안은 채 오해를 받아왔고, 정당한 평가를 받아오지 못했다. 아마 야고보서만큼 시련을 당한 서신도 드물 것인데, 그 중 가장 많이 제기되었던 문제점은 두 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그 하나는 사도적 권위에 대한 의심 때문에 초대교회 당시에 제기되었던 정경성의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 당시의 이신칭의(以信稱義) 사상과의 마찰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은 모든 교회가 야고보서를 정경으로 인정함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칭의론에 관한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좀 더 명확한 해답을 요구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바울은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말하고 있는 반면, 야고보는 이와 상반된 이행칭의(以行稱義)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특히 종교개혁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던 마틴루터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해석적 안경으로 모든 것을 보려 했던 그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까지 말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제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루터의 부정적인 평가는 그 후 교회가 야고보서를 대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제공하였고, 사람들이 야고보서를 최우선적으로 야고보서 자체의 상황 속에서 해석하기보다는 바울 신학의 틀과 전제로부터 해석하는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결론부터 먼저 말한다면 이것은 바울 서신과 야고보서의 차이점을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비롯되었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 서신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하는 칭의(稱義)의 원인을 말하고 있는 반면, 야고보서는 ‘의롭게 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칭의(稱義)의 결과를, 즉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2. 야고보와 바울과의 관계

 성경의 기록을 미루어 볼 때 야고보와 바울과의 사이에는 네 차례의 만남­1차 방문(갈1:18~20), 2차 방문(행 11:21~ 30), 3차 방문(행 15:6~29), 그리고 4차 방문(행 22:17~23)­이 있었다. 이 기록들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이들 사이에 대립적인 모습이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대목을 한 곳도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사상의 일치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바울이 부조여행을 위해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행 11:21)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에게 자신의 복음을 제출하였고, 야고보는 이 복음을 승인하였었다. 또한 세 번째 방문인 예루살렘 회의(AD 48/49)에서도 야고보는 다시 한번 바울의 복음을 재 승인했던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특히 예루살렘 회의―이방인이라도 할례나 율법의 조건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안에 들어 올 수 있다는 것을 확정지었던 중요한 회의―에서 사회를 보았던 야고보는 이방인 선교는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밝히면서, 이방인에게 할례를 비롯한 율법의 멍에를 메우는 것을 거부하면서 바울의 ‘할례와 율법 없는 복음’의 정당성을 인정하였다(행 15:13~22). 이렇게 하여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사도들, 특히 야고보 사이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신학적인 합일점’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회의에서의 야고보의 태도를 통해 그가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된다. 만약 야고보가 유대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중요하게 여겼다면, 바울을 반대하여 이방인들에게도 이 율법의 행위들을 요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의 요구들을 거부하였다는 것은 결국 야고보는 이러한 율법의 행위가 구원과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에 대한 이러한 야고보의 태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야고보는 바울에 대해서 처음부터 죽음을 앞에 둔 순간까지 대립과 갈등의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고, 오히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확고한 신학적 합일점이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고보서가 바울의 로마서를 반박하기 위해서 쓰여 졌다는 주장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야고보서는 예루살렘 회의 이전에 쓰여 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2. 수신자의 상황

(1) 수신자: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

 본 서신은 유대적 배경을 가진 저자 야고보를 전제로 할 뿐 아니라, 수신자들도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수신자는 간단히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1:1)로 소개되고 있다. 과연 이 서신의 수신자들이 누구였는가 하는 문제를 정확히 밝히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는 워낙 다양한 견해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신자들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는, “흩어져 있는(디아스포라) 열 두 지파”(1:1)라는 단어와, 그들의 정기 집회장소가 “회당”(2:2)이었다는 두 가지에 불과하다.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디아스포라)”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팔레스틴 바깥에 사는 여러 부류의 유대인들을 가리킬 때 쓰이는 용어이다. 또한 “회당”(2:2)은 유대인 집단의 회집 장소를 가리키지만, 동시에 유대계 기독교 집단의 회집 장소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수신자들이 야고보의 관할구역이었던 팔레스틴 지역 밖에 사는, 즉 로마제국 전체에 흩어져 사는 유대계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실지로 이 견해가 가장 전통적인 것으로 저자인 야고보와도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그러나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라는 이 단어가 반드시 유대계 기독교인에게만 국한되었을까? 이와 비슷한 수신자에 대한 언급이 베드로전서 1장 1~2절에서도 나타나는데, 그곳에서는 구체적인 지명까지 언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전서의 경우에는 독자들의 인종적 배경이나 지형적인 문제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흩어져 있는’이란 단어는 문자적 의미로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쓰인다는 사실이다. 실지로 당시 초대 교인들에게는 ‘교회는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개념이 상당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를 반증하기라도 하듯 야고보는 본 서신에서 구체적인 지역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기독교 독자들에게 적합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수신자는 좀더 크게 확대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수신자의 문제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은 일차적으로 로마 제국 전체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신자들이지만, 동시에 흩어져 있는 일반 기독교인들도 완전히 배제되고 있지는 않는 듯이 보여진다.

 

(2) 수신자의 상황

 수신자들의 세부적인 상황에 대한 증거가 거의 없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야고보서가 예루살렘 회의 이전 시기에 쓰여 졌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한 수신자들이 디아스포라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야고보서의 내용을 볼 때 첫째 본 서신이 핍박당하고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편지라는 것과, 둘째로 예루살렘 회의 전에 폭넓게 전파된 바울의 복음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던 것을 바로잡으려는 의도가 보여 진다. 이런 내용을 기초로 우리는 야고보서가 쓰여 지게 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1) 핍박 아래 있었던 당시 그리스도인들

 이때의 핍박의 정체는 세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종교적 핍박과 정치적인 박해,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그것이었다.

 첫째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적인 핍박(유대인으로부터의 핍박)의 상황 아래 놓여 있었다. 스데반의 순교(행 7장) 이후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가해진다(행 8:1). 사람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되는데, 심지어는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까지 이르게 되었다(행 11:19). 당시 수신자들이 겪고 있었던 가장 큰 환난은 한마디로 유대인들에 의한 종교적 핍박과 환란이었다. 이런 핍박의 상황은 예루살렘 회의(행 15장)와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행 21장)까지 계속되고 있었다고 사도행전은 증거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심한 종교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둘째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정치적인 핍박(로마제국으로부터의 핍박)을 당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인 핍박을 당하고 있었다. 이것은 야고보의 순교 사건과 베드로가 감옥에 갇힌 사건(행 12장)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 사건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치적인 박해도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셋째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큰 흉년이 발생하여(AD 46) 바울이 부조여행을 위해서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사실을 통하여 알 수 있다(행 11:27~30).

 요약하면 당시 수신자들은 내부적으로 유대인들로부터 종교적인 환란과 도전에 직면해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아직까지는 큰 핍박이 가해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정치적인 박해 아래 있었고, 그리고 기근으로 인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우리가 야고보서의 내용을 보면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신자들은, 몇몇 부자가 섞여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1:9~10, 2:5~7) 그런데 문제는 교인들 가운데 바울의 복음을 잘못 이해해서 남을 돌보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살면서도, 자신들이 지금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믿음과 행함과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이 입증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도 있었다.

 이런 어려움에 처해 있는 수신자들에게 먼저는 위로와 그리고 도전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지금 야고보서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야고보서는 핍박당하고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인 동시에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돌보지 않는 미성숙한 사람들에게 참된 믿음은 행함을 동반한다는 것을 역설하면서 어려운 자들을 잘 돌볼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1:27, 3:13, 4:17, 5:1~6; 14).

 

2)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을 오해했던 그리스도인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폭넓게 전파되었던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신자의 행함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래서 구원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첨가물 정도로 간주하거나, 혹은 행함이 없이도 마치 믿음이 좋은 것처럼 오해했다.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또는 그저 믿음만이 중요하고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식의 오해! 마치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행함이 없이도 믿음이 좋은 것으로 착각하거나, 혹은 믿음과 행함은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여 행함이란 신자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구원의 표시가 아니라 자신에게 상을 가져오는 공로가 된다고 오해하는 것처럼! 안타깝게도 당시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은 살아 있는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며 반드시 행함으로 열매 맺는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야고보는 당시 교인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들을 바로잡을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사실 야고보는 어느 누구보다도 바울의 은혜의 복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미 여러 차례의 만남과 토론을 통해서 바울의 복음에 대해서 잘 이해하였던 야고보는 이러한 잘못을 바로잡고 성도들을 다시 바른 믿음 위에 세우기 위해 야고보서를 쓰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야고보가 왜 야고보서를 써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야고보서는 주의 형제 야고보가 예루살렘회의 이전에 여러 상황으로 인해 어려움과 고통에 처해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하여 기록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의 복음을 잘못 이해하여 실천적인 삶이 결여된 사람들에게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시하고 바로잡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다.

 

3. 믿음과 행함과의 관계

 야고보서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구원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행함이 결여된 신자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야고보서만의 문제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아마 야고보가 오늘 이 한국 땅에 와서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을 본다면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동일한 지적을 하지 않겠는가?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큰 고민 중의 하나는 교회 생활을 그렇게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이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 아리송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는 증거가 삶으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입증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순종 없는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성숙의 문제를 다루고 강조하고 있는 야고보서는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가장 겸손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읽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 그 원인이 무엇인가? 우리 한국교회가 이신칭의의 은혜의 교리에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한국교회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칭의와 성화의 균형잡힌 것’보다는 일방적으로 받아들여, 성화와 선행에 대한 강조는 소홀히 하고 칭의적인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기독교의 구원을 ‘값싼 구원’으로 만들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신자의 선행은 그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래서 구원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첨가물 정도로 간주하거나, 또는 신자의 상급론에 종속시켜 버리든지, 아니면 구원받은 사람은 자동적으로 선행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경향마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다 보면 ‘믿음’을 말할 때 절대로 행함과 분리된 믿음을 말하고 있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히려 믿음과 행함은 바늘과 실처럼, 혹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다니는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참된 믿음, 살아있는 믿음이란 것은 ‘행동’으로 그 진실성이 증거 되고 나타나는 믿음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증거가 나타나야한다”는 교훈은 야고보서가 특히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강조는 동시에 성경 전체에 나타나고 있는 핵심적인 교훈이다. 침례요한은 “너희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고, 예수님도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살라”(마 5:16)고 명령하셨다. 이어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하셨고, 결론적으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행함을 강조하셨던 것을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이중기준’을 제시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인데, 어떻게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행위구원’을 동시에 주장하시는 것일까? 그렇게 의문이 드는 사람은 야고보서를 읽으면서도 역시 야고보도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실지로 야고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2:21)고 묻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정말 야고보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울과 대조적으로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것이란 말인가? 이것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믿음과 행함은 항상 함께 나타나야 하는 것이기에, 구원받은 자는 그 ‘구원의 표’가 선한 삶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에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도 곧 이어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고 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을 주장했던 바울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편집자 註: The only thing that counts is faith expressing itself through love.(갈 5:6)] 특별히 이런 강조는 바울 서신에서 더 잘 찾아 볼 수 있는데 바울이 기록한 모든 서신은 그것이 교리적이든 혹은 신학적이든 할 것 없이 언제나 행함과 실천을 강조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오직 믿음을 강조하는 바울 또한 믿음과 행함과의 관계를 서로 나눌 수 없는 통합적인 관계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선한 행실로 나타내야만 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성도의 모습이고, 행함이 없는 신앙고백은 결코 성숙한 신자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을 닮은 선한 행실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올바른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3-1 행함이 있는 믿음의 실례

(1) 아브라함(약2:20-24)

믿음의 조상이며 ‘너희 조상’인 아브라함이다. 그는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린 행함의 좋은 예가 되었다. 아브라함도 행함으로 의로워진 것이 아니라, 믿음 이후에 올바른 순종과 행동으로 그 믿음이 온전케 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할례 시에 인(印)쳐진 것이 아니라 무할례 시에 가졌던 것을 인(印)친 것처럼(롬 4장), 아브라함의 행함 또한 행하기 전에 가졌던 믿음을 온전케 한 것이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2절)는 두 부분에서 앞부분은 구원의 조건으로 ‘신행합력설’(信行合力說, synergism)이 아니다. 이것은 참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곧 믿은 순간부터 그 후로 계속 역사한다는 것을 이 시상은 말하고 있다. 따라서 ‘시간의 경과’가 요구된다. 이에 비해 바울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할 때의 ‘행위’는 인간의 공로로서의 행위를 말하며,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순간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행위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시간의 경과가 없으며 ‘시간’(time)이라는 변수가 없다.

 

그리고 뒷부분인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는 것은 “전에는 아브라함에게 믿음은 있었지만 아직 초보적인, 유아적인 믿음에 불과했는데 이제 이러한 순종을 통하여 그의 믿음이 성숙한 단계, 견고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야고보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전제한 행동을 말하고 있다.

(2) 기생 라합(약2:25)

그녀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러 온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보호해 주었기에 행함의 좋은 예가 된다. 라합은 “하나님의 벗”으로 여겨지는 아브라함과 여러 면에서 대조되는 사람이다.

라합은 야고보서 4장 4절에서 경고하고 있는 바로 그런 자였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인 데 반해 라합은 그와 정반대로 세상 사람의 벗이었으며 하나님과 원수된 자였다.

그러나 라합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가진 후 그 믿음에 합당한 행동을 취했다. 그는 아브라함처럼 먼저 가졌던 사람이다. 행함으로 의로워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가 가진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즉, 라합이 이스라엘의 사자를 숨겨준 것은 믿음을 가진 이후였다. 여호수아 2장 8-10절의 구절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기생 라합은 구원의 방편으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믿음 이후의 생명 보전을 위해 행동을 하였다. 라합은 “너희 하나님은 여호와는 상천하지(上天下地)에 하나님이시니라”(11절)라는 고백을 하는 자였기에 정탐꾼을 보호해 준 것이다. 라합의 행위는 이런 믿음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도 라합에 대해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11:31)라고 말했다. 라합의 믿음은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하는”(약 2:25) 순종하는 믿음이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그의 아들 이삭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일을 경험하였으며, 그로 인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친구)라는 명예까지 얻게 되었다. 라합은 기생이었지만, 여리고 성에 들어오는 정탐꾼이 섬기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을 믿고, 그 정탐꾼을 살려주었다. 전자는 산 사람을 죽이므로 의롭다함을 얻었고, 후자는 죽을 사람을 살려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 그들은 행동으로 산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다.

3-2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의 실례

(1) 말만 하고 실천이 없는 자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등의 좋은 말만 할 뿐, 가난한 자에게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은 무익할 뿐이라고 언급했다. 야고보는 말만 하고, 행함이 없는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결론지었다.

(2) 귀신

야고보서엔 말과 관련된 언급이 많은 것도 바로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말을 했으면 하나님처럼 지키던지, 또한 한 입에서 좋은 말과 나쁜 말이 나오지 않게 하든지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을 야고보는 책망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성경 말씀 하나라도 “다 이루었다”(요 19:30) 하신 후 운명하셨는데,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말만 할 뿐 행동이 없는 것에 대해 야고보는 일침을 가한 것이다.


 

귀신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지만, 그 믿음이 그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귀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한들, 그 믿음이 구원을 가져오지 못하고, 오히려 그 믿음이 그를 떨게 하고 있기에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2:19) 즉,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이 한 분임을 믿는 믿음을 가지면 구원을 받게 하지만, 귀신이 된 다음에서야 그 믿음을 가진다면 그 믿음을 가질지라도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믿는 시점에 따라 구원의 유무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살아 있을 때 믿으면 하나님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분이 되지만, 죽어 귀신이 된 다음에 믿으면 심판과 형벌로 다스릴 분이 되는 것이다. 살아 있을 때 믿으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지만, 죽은 후엔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게 된다는 것이다. 경건함으로 하나님 앞에 떠는 자가 아니라,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떠는 자가 되는 것이다.

 

4. 결 론

 야고보서는 주의 형제 야고보가 예루살렘 회의 이전에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바울의 복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성숙한 삶을 권면하고, 핍박 속에 있는 독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기록한 서신이다.

 과거 흔히 오해했던 것과 달리, 야고보서는 바울 서신과 대립 관계에 있지도 않고, 또한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서신도 아니다. 그렇게 보여 졌던 이유는 수신자들의 대상과 상황의 차이 때문이었다. 야고보서의 대상은 믿음은 있지만 실천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었기에 야고보는 성숙한 삶을 위해 ‘행함’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바울은 행위구원을 주장하는 유대교와의 긴장 속에서 ‘오직 믿음으로’만을 강조해야만 했다. 즉 야고보와 바울은 ‘상황’이 달랐고 독자가 서로 달랐다. 이런 차이를 보지 못한 채 마치 한쪽은 옳고 우월하고, 다른 한 쪽은 틀렸고 열등하다는 흑백논리를 주장하는 것은 ‘다름과 틀림의 차이’를 보지 못하는 무지의 결과인 것이다.

 정작 두 당사자인 야고보와 바울은 후대의 해석자들과는 달리 결코 대립관계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철저한 신학적인 합일점이 있었고 일관된 주장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야고보서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이유는, 야고보와 바울과의 관계를 대립관계로 보고 그러한 전제 속에서 편파적으로 야고보서를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에는 누구도 이의가 없다.(엡2:5, 8) 그러나 믿고 구원받는 자들이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보이고, 믿음의 결과로 당연히 따라와야 할 ‘행함’을 등한히 여기는 자들이 많다.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증명해야 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는 권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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