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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달러로 시작한 워싱턴살이 홀서빙하며 ‘노예문화’ 실감했다”[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9. 8. 28. 05:18

100달러로 시작한 워싱턴살이 홀서빙하며 노예문화실감했다

등록 :2019-08-26 20:49수정 :2019-08-26 20:53

 

만주 조부모 찾으라부친 유언에
평화병해법도 찾으려 유학 결단

1965년 봄 약혼자 전성원과 미국행
아메리칸대-조지워싱턴대 각각 입학
여행자 150달러 제한에 무일푼

숙박비 줄이려 결혼뉴욕 신혼여행
캔사료를 개장국인 줄 알고 먹기도

접시 치우는 버스보이허약해 포기
택시운전사는 시내지리 몰라 탈락
영어 서툴러 호텔 전화교환수 해고
심야엘리베이터 보이 박봉에 중단

중국식당 홀서빙 순발력으로 성공
담당 테이블 늘어나며 도 독점
공평분배제안 다른 직원들 호평
팁 생활하며직업 귀천뼈져리게

1965년 봄 워싱턴 디시로 유학을 떠난 박한식(오른쪽) 교수는 약혼자 전성원(왼쪽)과 4월 결혼식을 올린 뒤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대도시였던 뉴욕으로 신혼여행을 떠나 자유의 여신상 등 명소를 둘러봤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1965년 봄 워싱턴 디시로 유학을 떠난 박한식(오른쪽) 교수는 약혼자 전성원(왼쪽)4월 결혼식을 올린 뒤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대도시였던 뉴욕으로 신혼여행을 떠나 자유의 여신상 등 명소를 둘러봤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12회-미국 유학 생활 시작하다
12-미국 유학 생활 시작하다
   
나는 1965년 약혼자 전성원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전성원은 조지워싱턴대학에서, 나는 아메리칸대학에서 각각 입학 허가서를 받았다. 전성원의 주머니에는 달랑 50달러가 들어있었고, 나의 주머니에도 달랑 50달러가 있었다. 나에게 돈도 없었지만 박정희 정권은 50딜라 이상을 소유하고서 외국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당시 국가의 외환보유고가 그렇게 많지 않았겠지만, 국외 여행자 최대 보유 한도액을 50달러로 제한한 것은 사실상 나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또한 외국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주관하는 영어와 국사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는데, 그 시험의 합격율도 아주 낮게 책정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우리 두 사람의 유학은 너무나도 무모한 일이었다. 전성원도 무일푼인 나 하나만 보고서 인생을 걸었다.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동기생 중에서도 그때 미국 유학은 나 혼자 뿐이었다.

내가 그처럼 어려운 여건에서, 그처럼 비현실적 꿈을 꾼 까닭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었다. 빨갱이로 몰려 어려운 삶을 살아가시던 아버님의 평생 소원은 만주에 계시는 조부모님을 찾는 것이었다. 아버님께서는 훗날 임종 순간에도 나에게 조부모님을 찾아 달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그러나 그 당시 중국은 죽의 장막이었고, 소련은 철의 장막이었다. 한국에서 살면 조부모님을 찾을 길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미국에 간다면 혹시 어떤 방법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처럼 막연한 꿈이 나의 실존적 결단을 이끈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둘째, 학문적 이유가 있었다. 내가 유년시절부터 앓고 있는 평화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전쟁과 평화 문제, 한반도 통일문제 등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서울대 재학 중에 극심한 지적 방황을 겪으며, 한국에서는 나의 평화병을 더 이상 치유할 수 없을 것 같았다.

1965년 4월 박한식(오른쪽)·전성원(왼쪽) 커플은 워싱턴 디시의 유일한 한인교회에서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황재경(가운데) 담임 목사가 주례를 해주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19654월 박한식(오른쪽)·전성원(왼쪽) 커플은 워싱턴 디시의 유일한 한인교회에서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황재경(가운데) 담임 목사가 주례를 해주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박한식 교수 부부가 결혼식을 한 워싱턴 한인교회는 1951년 워싱턴 디시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한인 감리교회로,  78년 새 건물을 지어 독립할 때까지 백악관 인근의 파운드리(화부) 연합감리교회를 빌려 ‘화부 한인교회’ 이름으로 예배를 올렸다. 사진은 1961년 창립 10돌 때 모습이다. 사진 워싱턴한인연합감리교회
박한식 교수 부부가 결혼식을 한 워싱턴 한인교회는 1951년 워싱턴 디시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한인 감리교회로, 78년 새 건물을 지어 독립할 때까지 백악관 인근의 파운드리(화부) 연합감리교회를 빌려 화부 한인교회이름으로 예배를 올렸다. 사진은 1961년 창립 10돌 때 모습이다. 사진 워싱턴한인연합감리교회

 
전성원과 함께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 도착하니 꼭 사막에 들어선 것 같았다. 절해고도에 와 있는 듯도 했다. 당장은 배가 고팠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전성원과 나는 생존을 위해 결혼을 서둘렀다. 방을 하나로 합치면 이중으로 나가는 숙박비를 절약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65424일 감리교회인 워싱턴한인교회(화부 한인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황재경 담임 목사가 주례를 서 주셨다. 뉴욕으로 신혼여행도 갔다. 전성원과 손을 꼭 잡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도 가보고,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함께 사진도 찍었다. 또 뉴욕에 오니 내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해둔 절친김태원이 떠올랐다. 나는 김태원과 함께 걷기로 했던 브로드웨이를 나 홀로 몇 블록 걸으면서 진한 그리움에 젖기도 했다
 

월세 75달러 짜리 단칸방을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19674월 큰딸 주영이가 태어났다. 나는 매일 아침 가게로 달려가 우유를 샀다. 배달 우유는 비쌌기 때문이다. 하루는 아침 7시무렵 세븐업(7up)에 도착했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나는 문을 힘차게 두드렸다. 그러자 주인이 문을 바스스 열고서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간판에 표시된 세븐업을 손으로 가르치면서 고함을 쳤다. 지금 7시가 넘었는데 도대체 왜 문을 열지 않는 겁니까?주인이 눈을 끔벅이면서 나를 째려봤다. 그 순간 나는 아차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음료수 상표인 세븐업을 아침 7시에 문 여는 것으로 잘못 해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 같았다면 주인이 총을 들고 나와서 나를 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65년 박한식(오른쪽)·전성원(왼쪽) 부부는 워싱턴 디시의 원룸 월세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일과 학업을 동시에 하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부부가 10여 년 전 다시 찾아 갔을 때도 아파트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1965년 박한식(오른쪽)·전성원(왼쪽) 부부는 워싱턴 디시의 원룸 월세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일과 학업을 동시에 하는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부부가 10여 년 전 다시 찾아 갔을 때도 아파트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한번은 마트에 갔는데 통조림 깡통에 개가 그려진 것이 있었다. 순간 생각했다. ! 미국에서도 개장국(보신탕)을 먹는구나!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그것을 샀다. 왠지 기분이 뿌듯했다. 집에 와서 깡통을 따고 아내와 함께 개장국을 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면서 개장국 건더기를 우물우물 씹었다. 서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맛이 괜찮다는 사인도 주고 받았다.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을까? 개사료가 개장국으로 보였으니까!

내가 목격한 1965년의 미국 사회는 아직 산업사회 초기 단계였다. 생산직 근무자가 서비스업 근무자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아직 컬러 티브이도 없었고, 물론 휴대전화기도 없었다. 미국은 1969년도에 가서야 비로소 초산업사회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주지하 듯 미국에서 생활하려면 반드시 자가용이 있어야 한다. 나는 1965년에 사용한 지 9년된 쉐보레 중고차를 200달러를 주고 구입했다. 그래도 나는 내 차를 애지중지 사용했다. 집 앞 길가에 차를 세워 놓고서 바케스에 물을 담아 콧노래를 부르면서 자주 세차했다. 그렇게 정성껏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1년정도 타고나서도 225달러에 되팔 수 있었다.

1965년 박한식 교수가 입학했을 무렵의 미국 아메리칸대학교 전경. 1893년 설립된 사립대학이지만 수도 워싱턴 디시에 자리하고 미국 대통령들이 이사회 임원을 맡는 등 정치학과 공공정책학 명문으로 꼽힌다. <한겨레> 자료사진
1965년 박한식 교수가 입학했을 무렵의 미국 아메리칸대학교 전경. 1893년 설립된 사립대학이지만 수도 워싱턴 디시에 자리하고 미국 대통령들이 이사회 임원을 맡는 등 정치학과 공공정책학 명문으로 꼽힌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대 약대를 나온 박한식 교수의 부인 전성원은 조지 워싱턴대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대 약대를 나온 박한식 교수의 부인 전성원은 조지 워싱턴대학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미국에서 당장 생활하기 위해서는 직장이 있어야 했다. 한국에서 약학을 공부한 아내는 쉽게 정규 직장을 구했지만,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곧장 직업소개소에 갔다. 나에게 무슨 기술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술이 하나도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택지가 그렇게 많지 않다면서 버스 보이(bus boy)를 해보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버스 차장을 하라는 줄 알았다. 나는 흔쾌히 좋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소개소 직원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버스 회사가 아니라 식당이었다. 나는 거기 가서야 버스 보이가 식당 테이블의 접시 등을 치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처지가 급한 나로서는 곧장 일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당시 접시는 모두 사기로 만들어서 매우 무거웠다. 몸이 허약한 내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새 직장을 구해야만 했다.

정치학을 전공한 박한식은 유학 초기 특별한 기술이나 자격이 없어 갖가지 허드렛일을 전전해야 했다. 밤새 교대근무하는 엘리베이터 보이는 너무 일당이 적어서 그만 뒀다.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에서도 엘리베이터마다 사람이 타서 수동으로 작동시키는 단계였고, 여성보다는 남성의 직업이었다. 사진은 엘리베이터 보이가 등장하는 영화의 한 장면.
정치학을 전공한 박한식은 유학 초기 특별한 기술이나 자격이 없어 갖가지 허드렛일을 전전해야 했다. 밤새 교대근무하는 엘리베이터 보이는 너무 일당이 적어서 그만 뒀다. 1960년대 중반까지 미국에서도 엘리베이터마다 사람이 타서 수동으로 작동시키는 단계였고, 여성보다는 남성의 직업이었다. 사진은 엘리베이터 보이가 등장하는 영화의 한 장면.

두번째로 구한 직업은 엘리베이터 보이였다. 그 시절 엘리베이터는 지금처럼 자동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직접 조작을 해야만 움직였다. 나에게 배당된 근무시간은 밤 11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였다. 나는 너무 좋았다. 우선 그 시간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밤새 책을 보면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급여가 너무 적어서 오래 할 수 없었다. 한 학기 등록금만 700달러가 넘었는데, 엘리베이터 보이 급여로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내가 도전한 세번째 직업은 택시 운전수였다. 택시 운전을 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는 얘기에 귀가 솔깃하기도 했다. 그런데 운전 면허증 필기시험은 문제가 없었지만 실기시험은 두번이나 떨어졌다. 실기시험 문제는 예컨대 공항에서 국무부까지 가는 길을 설명해 보라는 것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내가 그 길을 알 수는 없었다. 택시 운전사 일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네번째 직업은 호텔 전화교환수였다. 그 때는 호텔에 전화가 오면 교환수가 각 방에 연결해 주어야 통화가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교환수는 영어를 잘 해야 했다. 나는 영어를 잘한다고 얘기해서 채용되었다. 그러나 막상 일을 해보니 영어 듣기가 쉽지 않았다. 한번은 알아듣기 어려운 발음으로 장시간 얘기하는 전화가 왔다. 여러 차례 되물었지만 여전히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할 수 없이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알았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호텔방에 연결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냥 뭉갰다. 그런데 내가 뭉갠 것은 하필 상갓집의 급한 부고였다. 나는 이틀만에 전격 해고되었다.

박한식 교수는 호텔의 전화교환수로 들어갔으나 영어를 잘 못 알아듣는 바람에 해고되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한식 교수는 호텔의 전화교환수로 들어갔으나 영어를 잘 못 알아듣는 바람에 해고되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다섯번째 구한 직장에서는 제니스(Jennys)라는 이름의 중국식당에서 홀 서빙을 했다. 제니스는 미국 국무부 근처에 있어서 국무부 직원들이 많이 찾았다. 나는 뚱뚱한 아줌마 몇 사람과 함께 일했다. 최저임금은 없고 오직 팁만 받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처음에 내가 담당한 테이블은 5개였다. 점심 때가 되면 손님들이 들이닥쳐 순식간에 테이블 5개가 꽉 찾다. 나는 5개의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의 주문을 한꺼번에 받았다. 그래서 주방에 한꺼번에 음식 주문을 했다. 예컨대 볶음밥 10, 소고기 볶음 9, 새우튀김 8, 탕수육 4개 등등과 같이 대량으로 주문을 한 것이다. 그러면 주방에서 내가 주문한 음식부터 만들어 주었다. 분량이 많았기 때문이다. 음식이 나오면 나는 번개처럼 빠르게 5개 테이블에 배달했다. 체구가 작은 나는 대단히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러자 내가 맡은 5개 테이블의 손님 회전율이 매우 빨랐다. 음식이 많이 팔리니 사장이 아주 좋아했고, 나에게는 팁이 쏟아졌다. 사장은 내가 담당하는 테이블 숫자를 점차 늘려줬다. 이는 아줌마들이 담담하는 테이블 숫자가 점차 줄어드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그들은 상대적으로 몸이 비대하니 나처럼 빠르게 움직이지도 못했다. 주문도 개별 테이블 단위로 받았다. 그러니 그들이 받는 팁은 내가 받는 팁에 반비례해서 자꾸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아줌마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나는 사회주의 정신을 발휘해서 아줌마들의 불만을 순식간에 해소시켰다. 아줌마들을 다 불러 모았다. 나는 팁을 받으면 각자 주머니에 넣지 말고 우리가 준비한 통에 넣자고 말했다. 일이 끝나면 통에서 돈을 꺼내 평등하게 분배하자고 제안했다. 나의 얘기가 끝나자 마자 모든 아줌마들의 입이 귀에 걸려있었다! 나는 아줌마들 사이에서 인기 최고였다. 주인도 나날이 매상을 올려주는 나를 매우 좋아했다. 나 역시 수입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몹시 행복했다.

하루는 깔끔한 양복을 입은 신사 한 분이 내가 담당하는 테이블에 앉았다. 잠시 그분과 얘기를 나눠보니 한국에서 온 교수 같았다. 그분도 내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와서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분에게 딱하게 보였기 때문일까? 홀에서 일을 하다가 테이블에 와보니 팁 20달러가 접시 밑에 숨겨져 있었다. 대단히 많은 액수였다. 그 당시 제니스의 음식 값은 1~2 달러 정도였다. 팁은 보통 25센트 정도를 준다. 그것도 10%를 넘는 액수이니 많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의 손님은 2달러 짜리 음식을 먹지도 않았는데 20달러 되는 팁을 놓고 나간 것이다. 나는 그 팁을 보는 순간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곧장 팁을 들고서 손님을 뒤쫓아 나갔다. 먼 발치에서 손님이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서 손님을 붙잡았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말했다. 선생님 마음 잘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팁을 너무 과하게 놓으셨더군요. 25센트만 받고 싶습니다. …” 25센트를 손에 쥐고 돌아서는 나의 발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눈 앞에서 20달러가 어른거리는 내 처지가 너무 비참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하루는 젊은 녀석들이 여자 친구들과 함께 왁자지껄 떠들면서 들이닥쳤다. 나의 테이블에 앉자마자 거드름을 피우면서 나에게 차를 따르라고 명령했다. 나는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 녀석들은 음식을 먹고 난 다음 팁을 딱 1센트 놓고 걸어 나갔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나는 곧장 테이블의 1센트를 그 녀석들의 뒤꽁무니에 내던지며 외쳤다. ~ 이 자식들아! 여기에 너희들 전 재산이 있다! 다 가지고 꺼져버려라! …” 그래도 화가 가시지 않았다. 나는 홀 서빙복을 벗어 던지고 집으로 와 버렸다. 그러자 지배인이 집까지 찾아와서 통사정을 했다. 내가 없으면 매상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팁으로 생활하면서 미국의 독특한 팁문화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가 그렇게 많이 돌아다닌 유럽에서는 미국과 같은 팁문화를 볼 수 없었고, 그밖의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오직 식당 종업원과 택시 운전수에게만 팁을 준다. 내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미국의 노예제도에서 팁문화가 유래했다는 것이었다. 노예들은 노예제도에서 해방되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에게 익숙한 식당일, 운전, 농사같은 것뿐이었다. 그런데 노예제도가 있을 때는 주인이 먹여주고 재워줬지만 노예제도에서 해방된 다음에는 스스로 먹고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팁을 주는 문화가 생겼다. 손님이 주인 노릇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박한식 교수는 대형 중국식당의 홀서빙을 맡아 특유의 순발력으로 팁을 독차지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팁’에 배어 있는 미국 특유의 노예문화와 직업귀천 세태를 체감했다. 실제로 미국의 레스토랑 종업원 노동조합(ROC)에서는 ‘팁 폐지 캠페인’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사진 ROCunited.org 갈무리
박한식 교수는 대형 중국식당의 홀서빙을 맡아 특유의 순발력으로 팁을 독차지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에 배어 있는 미국 특유의 노예문화와 직업귀천 세태를 체감했다. 실제로 미국의 레스토랑 종업원 노동조합(ROC)에서는 팁 폐지 캠페인을 벌이고 있기도 하다. 사진 ROCunited.org 갈무리
  
흔히 미국에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팁으로 생활해 본 나는 직업에 귀천이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래서 그 어떤 경우에도 직장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런데 내가 최근 한국에 가서 배운 용어 중 하나로 갑질이 있었다. 그 용어의 뜻은 나에게 너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국문화가 결국 노예문화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러나 내가 미국에서 겪은 좌절은 직업의 귀천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지긋지긋한 국공내전과 한국전쟁 경험을 뒤로 하고 평화를 연구하기 위해서 미국에 왔다. 그런데 미국에서 나를 기다린 것은 베트남전쟁이었다. 또한 나는 서울대에서 해소하지 못한 지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미국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행태주의(Behavioralism)가 지배하는 미국 대학은 나에게 말할 수 없는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내가 서울대 정치학과 강의실에 들어서면서 체험했던 실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앓게 된 평화병과 지적 실망에 관해서는 다음 회에서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구술정리 박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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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907219.html#csidxf0b29493c0f0716809f0533eacd37c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