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서늘한 가을바람이 반갑기만 하다. 에어컨 바람으로 폭염을 견뎌냈던 일상이 보다 트인 공간으로 변하는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인류 산업발전이 몰고 온 지구 온난화에도 불구하고 계절 변화가 지속되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런 길목에서 최근 접한 2018년 출산율 관련 정보는 세상변화의 세대차를 절감하게 한다. “세계 유일 출산율 0명대”, “아이 낳지 않는 한국인”, “대한민국 출산율', 왜 떨어질까?” 등…. 이런 뉴스들을 보노라면 자연스레 인구재난사태를 상상하게 된다.
동네에서 아이들보다 반려견과 산책하는 사람들을 더 자주 마주치는 일상풍경도 이젠 새삼스럽지 않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는 갑자기 불어닥친 현상도 아니다. 그런데도 지난 8월 28일 발표된 통계청의 2018년 출생통계 확정 자료에 따르면, 합계출산율이 사상최저인 0.98명, 즉 0명대로 2025년 1명대 회복 전망도 불투명하다는 예상은 그간 시행된 인구증가 정책을 돌아보게 만든다. 2007년 이후 어떤 정부에서건 출산장려정책은 130조원에 달하는 예산을 투입해 적극적으로 시행되어 왔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출산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저출산 기록을 갱신하는 모순된 결과를 보여줄 뿐이다. 그런 모순된 상황의 저변에는 농경시대 결혼, 가족제도를 전통으로 고수하는 고정관념과 그에 따른 세대별 인식 차이에 주목하게 된다. 걱정대로 심화되는 ‘저출산 노령화 사회’ 그간 출산장려정책은 출산과 육아 관련 경제 부담을 덜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출산축하금과 양육지원금, 임산부 고용 사업장에 고용안정 및 대체인력 지원제도도 있다. 대부분 지원정책이 결혼을 전제로 한 출산장려정책으로 보인다. 비혼 선호(결혼은 필수 아닌 선택), 동거 찬성 비율 증가, 심지어 연애도 기피하는 2,30대의 젊은 세대 인식변화가 고려되지 않은 고정관념이 드러난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8년 사회지표조사 가운데 '결혼이 필수적인가'란 질문에 대한 반응은 현재 출산율 상황의 잠재적 원인을 보여준다. 젊은 세대에 속하는 비혼자 중에서 남성 36%, 여성 22% 만이 결혼해야 한다고 응답한 점이 그런 점을 보여준다.
결혼에 대한 성별, 세대별 인식 차이는 수많은 영화에서도 드라마 모티브로 작동되어 왔다. 한국 멜로드라마 대표작인 〈미워도 다시 한번>〉시리즈(1968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후 2002까지 지속되다 소멸)에서는 유부남을 사랑한 젊은 여성과 외도로 고뇌하는 남성이 혼외 출산한 남자아이를 취학시키기 위한 법적 신고를 두고 갈등을 벌인다. 한국영화사 수업에서 2000년대 20대 학생들과 이 영화를 다시 보노라면, 악습을 정당화하는 이상한 연애 코미디로 해석하는 반응이 압도적이다. 버림받아도 감수하며 살아가야 하는 의존적인 여성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세대 차이를 보여주는 반응이다. 그들은 도시집중 인구감소와 경제성장 정책에 따라 “둘만 낳아 잘 기르자”를 실행한 586세대, 즉 돈 벌어오는 근면한 아버지, 집안 살림에 헌신하는 어머니를 보며 자라난 세대이기도 하다.
인간의 내면적 삶, 특히 연애와 결혼을 둘러싼 성별, 세대별 차이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안목에서 일가를 이룬 샘 멘데스 감독의 〈레볼루셔너리 로드(Revolutionary Road)〉(2008)는 참조할만한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과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첫눈에 반해 결혼한다. 이들은 뉴욕 맨하탄 중산층 거주지역인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아름다운 집을 장만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회사일로 바쁜 프랭크, 두 아이 양육과 집안 살림에 묻혀 연극배우 경력을 단절당한 경단녀 에이프릴의 결혼생활은 갈등에 빠진다. “변화가 필요해” 에이프릴은 행복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삶의 변화를 위해, 배우로서 경력을 이어가기 위해 당대 상징적인 예술의 도시였던 파리 이민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려고 하지만 프랭크는 승진 권유를 받으며 이민을 포기한다. 그 와중에 벌어지는 격렬한 부부싸움 장면은 〈타이타닉〉에서 로맨스 판타지를 재현했던 두 배우가 반전하듯 갈등을 폭발시키는 열연으로 재현된다. 정신병자지만 현자 같은 명대사를 던지는 기빙스는 “수많은 사람이 공허함 속에 살죠. 하지만 절망을 보려면 진짜 용기가 필요해요.”라며 에이프릴을 자극하기도 하다.
아내로서 생존에 공허함을 느낀 에이프릴은 이렇게 절규한다. “모든 존재는 특별해. … 변화가 필요해, 이렇게 인생을 그냥 보낼 순 없어”라고. 이 영화를 보노라면, 1950년대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허구지만 2019년 인구재난 사태에 직면한 한국 사회 현실에 공명하는 메시지가 감지되기도 한다. 불안한 경제력에 흔들리며 성 평등 의식을 가진 젊은 세대를 포용하며 1인 가구 대세 속에서 “나 혼자 산다”라는 TV 프로그램을 즐기는 욜로(YOLO) 현상을 전통적 가족개념으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