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訴訟]=자유 평등 정의

[편집국에서] 노련한 검찰, 자충수 두는 정부 / 석진환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2. 13. 05:07

[편집국에서] 노련한 검찰, 자충수 두는 정부 / 석진환

등록 :2020-02-12 18:22수정 :2020-02-13 02:38


 

석진환 ㅣ 정치팀장

밥자리 술자리에서 정치 관련 대화가 오갈 때 농담 삼아 후배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정치를 잘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 곧바로 내 맘대로 정해놓은 정답이 이어진다.

“특수통 검사들인 것 같아. 황교안 같은 공안통이 아닌, 윤석열 같은 특수통!!”

이어지는 정답 해설. 1)우선 두뇌 회전 빠른 엘리트 집단이다. 2)강력한 결속력으로 서로 밀고 끄는 힘이 세다. 3)국민적인 주목을 받는 큰 사건을 다루기에 여론의 흐름과 평가에 민감하다. 4)그러다 보니 언론 관리 및 활용 기술이 탁월하다. 5)조중동과 보수기득권은 대체로 검찰 편이다. 6)치고 빠지기를 해야 할 순간 포착을 잘한다. 7)속도전이나 뭉개기를 해야 할 타이밍 조절에도 능하다. 8)교착 국면이나 위기 돌파를 위한 압박·회유·타협의 경험이 많다.

어떤가. 지향하는 가치와 목표가 무엇인가를 제외하고 보면, 이런 항목들은 현실 정치에서 이른바 ‘정치적 감각’으로 통용되는 자질과 조건들이다. 우리가 때때로 ‘검찰 정치’를 경계하는 것도 어쩌면 검찰의 이런 모습을 지켜봐왔기 때문일 수 있다.

검찰이 얼마나 유능한지 장황하게 쓴 이유는 이런 능력자 검찰을 상대하는 정부와 여권 인사들의 미숙한 대처가 못내 안쓰러워서다. 검찰이 뿌려놓은 지뢰가 여기저기서 펑펑 터지는 느낌이랄까.

우선 ‘울산 선거개입 의혹 사건’ 공소장 비공개 논란을 보자.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11일 기자간담회에서 공소장 비공개와 관련해 “단순히 알 권리보다 조금 있다가 알아도 될 권리가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같은 시각 그 사건으로 기소된 한병도 전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과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 등은 “검찰의 공소장은 추측과 예단이 범벅된 주관적 의견서에 불과하다”는 입장문을 냈다.

전직 수석과 실세 비서관, 현직 광역자치단체장 등 13명 기소는 그 자체로 대형 사건이다. 공소장이 추측과 예단으로 범벅됐는지 아닌지는 공소장이 공개돼야 국민도 판단할 수 있다. 국민이 ‘조금 있다가 알아도 되는 권리’의 기준은 무엇인가. 알 권리를 유예하는 결정을 왜 여권 인사들이 기소된 예민한 사건부터 적용하는가. 오해를 살 만한 일을 해놓고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은 첫걸음”이라고 ‘정의롭게’ 설명하는 게 국민에게 어떻게 비칠지 모르는 걸까.

이미 법조계에서도 “공소장이 탄탄하지 않다” “주관적 의견이 너무 많다” 등의 평가가 나오고 있다. 궤변 가득한 공소장이라면 공개해 자연스럽게 평가받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법무부가 자충수를 두는 바람에 상황은 ‘청와대 보호용 공소장 틀어막기’라는 프레임으로 바뀌어버렸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더라도 이미 여론전에서 명분을 잃었다. 실리도 챙기지 못했다.

기소됐지만 현직을 유지하고 있는 최강욱 공직기강비서관 사례도 비슷하다. 최 비서관은 검찰이 자신을 기소한 것을 두고 “반헌법적이고 반민주적인 작태”라고 반발하며 “향후 출범하게 될 공수처의 수사를 통해 저들의 범죄행위가 낱낱이 드러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발끈했다.

그동안 문재인 대통령은 누누이 검찰의 수사권을 존중하고 대신 정당한 인사권을 행사하겠다고 공언했다. 검찰은 수사권을 행사했고, 대통령은 인사권을 행사했다. 변호사인 최 비서관은 검찰의 ‘주관적인 의견서’에 맞서 방어권을 행사하면 된다. 다만 저 정도 수위의 공개 반박을 하려면 대통령 참모가 아니라 직을 던진 자연인 신분이어야 했다. 검찰의 기소를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공수처 수사”를 언급한 순간, 프레임이 다시 바뀌었다. 그는 공수처 업무와 밀접한 청와대 핵심 비서관이다. 오랜 산고를 거친 공수처는 출범도 하기 전에 독립성을 의심받는 처지가 됐다. 공수처가 이 정부에서 어떤 의미인지는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여의도 정치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정부도 명분이나 정당성을 놓치면 그때부터 내리막이다. 권한을 위임한 국민의 처지에선 추미애도 윤석열도 모두 문재인 정부다. 임명한 세력과 임명된 세력이 싸우는 것처럼 비치는 것 자체가 집권 세력의 실패다. 몸에 굵직한 칼자국 좀 나더라도 명분을 쥐어야 앞으로 갈 수 있다.

soulfa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