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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위대한 신앙위인 38인의 이야기/클라랜스 라킨-2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9. 9. 08:44

클라랜스 라킨-2
 

B. 2부

6. 악한 현재 세상

7.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적 사역

  1) 개 요

  2) 창조에서 그리스도의 사역

  3) 창조후부터 성육신 때까지의 그리스도의 사역

  4) 성육신후부터 승천 때까지의 그리스도의 사역

  5) 미래의 그리스도의 직분과 사역

8. 성령의 시대적 사역

  1) 성령의 시대적 사역

  2)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

  3) 세상에서의 성령의 사역

9. 유대인들

  1) 유대인들에 관하여

  2) 유대인들의 과거

  3) 유대인들의 현재

  4) 유대인들의 미래

10. 이방인들

  1) 이방인들

  2) 느브갓네살 왕의 꿈

  3) "네 짐승들"에 대한 환상

  4) "숫양"과 "숫염소"에 대한 환상

  5) "북쪽과 남쪽 왕"에 대한 환상

  6) "칠십 주"에 대한 환상

11. 교 회

  1) 교회에 대한 잘못된 개념

  2) 교회란 무엇인가?

  3) 교회의 기원

  4) 교회의 사명

  5) 교회의 미래

12. 왕  (THE KING)

 

 

 

6. 악한 현재 세상 (THE PRESENT EVIL WORLD)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은혜의 경륜"이며,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의 이름을 위할 백성" 즉 "교회"로 불러내시는 것이다. 반면 교회 밖의 세상은 다음과 같이 부르고 있다.

"이 악한 현 시대" 갈1:4

(THE PRESENT EVIL AGE)(R.V.)

이 "시대"가 악하다는 것은 우선 이 시대의 문명의 특징에서 볼 수 있다. 복음이 1900년 동안 전파된 지금의 이 세상은 그리스도께서 오셨던 때보다 더욱 더 어두운 상태에 있으며 어떤 큰 위기로 치닫고 있는 것 같다. 공중의 권세를 잡은 불법의 영은 그 세력을 저지하려는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다루기 힘들며 모든 권세나 법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지배력을 잃으셨는가? 아니면 악의 세력이 제멋대로 활동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현 세상에는

서로 대적하는 "두 영"

이 이 시대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불러내는 일을 하시는 "성령"과 이를 방해하는 "악령"이다. 이 두 영을 고린도전서2:12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 "세상의 영"으로 부르며 요한일서4:5-6절에서는 "진리의 영(Spirit of Truth))"과 "오류의 영(Spirit of Error)"이라고 부르고 있다. 오류의 영은 오늘날 세상에 있는 모든 "강력하게 미혹하는 힘"의 근원이다(살후2:11). "마지막 시대"가 가까와짐에 따라 이러한 오류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으며 그 오류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어야 한다. 성령이 교회 안에 계셔 교회를 인도하시는 것처럼, 세상은 "세상의 영"(고전2:12), 즉 "더러운 영"이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성령"이 한 인격인 것처럼 세상의 영도 하나의 인격이다.

{허물과 죄들로 죽었던 너희를 그가 (성령에 의해) 살리셨으니 전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은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마귀가 사로잡는)하는 "영"(사악한 영)을 따라 행하였으니}(엡2:1-2).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이 세상의 영"이 "사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 대신 바라바를 선택함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결과로 사탄은 "이 세상의 신(god)"의 자리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사탄의 타락한 이유는 하나님 같이 되려는 야망 때문인데(사14:13-14), 그는 아직도 이 야망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적그리스도가 되어 그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예루살렘에 재건되는 유대인의 성전)에 앉으려는 것이 그의 목적이며 계획이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처럼 그를 경배할 것이다(살후2:3-4, 계13:4,11-12).

인간의 날 (Man's Day)

성경에서 오늘날 시대를 "인간의 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그러나 너희에게서나 "인간의 판단"에 의해서 판단받는 것이 나에게는 아주 하찮은 일이라. 실로 나도 나 자신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고전4:3)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간이 판단하는 날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이것은 이것은 인간이 영광을 받는 날이다. 이 날은 인간의 일이 높여지고 존경받는 날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제쳐놓고 과거 100년동안의 엄청난 기술과 지식의 놀라운 발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한가지 우리가 추측해 볼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지식을 주고 기술과 상업 분야의 일들을 주관하는 초인간적인 존재(Superhuman being)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아홍수 이전 시대에 금속가공 기술이 발전되었으며, (쾌락을 위해) 악기를 만들고, 상업 및 그 밖의 목적을 위하여 거대한 도시를 만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건한 셋의 후손들이 아니라, 그 당시 불경건한 카인의 후손이었다는 점은 눈여겨 볼 만하다. 즉 우리는 사탄의 복음은

"진보의 복음"

임을 알 수 있다.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 이브에게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으면 그녀의 눈이 열려져 그녀와 아담이 신들(gods)처럼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면서 이 "복음"을 가르쳤다(창3:5).

지식에 대한 약속이 인간의 멸망을 초래했으며, 아담과 이브가 사탄의 말을 따랐으므로 온 인류는 사탄의 지배력과 계획 안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카인의 후손들에게 인류의 멸망을 가져온, 즉 노아의 홍수의 원인이 되었던 것들을 만들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한 것 같지 않다. 또한 사랑의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쟁에서 사용되는 끔찍한 무기들을 만들 수 있는 지식을 제공했다는 것도 합당치 않은 말이다. 분명히 세상 제도(World System) 우두머리인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인데 그 "존재"가 바로 "사탄"이다. 사탄의 계획은 하나님 없는 거대한 문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즉 "크리스찬 문화"라는 말은 "이 세상의 신"이 창안한 것이다. 그리스도인(Christianity)과 문화는 공통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런 말은 있을 수 조차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크리스찬 문화"란 있을 수 없으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 교만한 이 시대의 문명을 끝내고 사탄이 건드릴수 없는 새로운 문명(New Civilization)을 세우셔야만 할것이다. 이 때 사탄은 끝없는 구렁에 갇힘으로 그 새로운 문명은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는 단지 두 부류의 사람이 소개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드러나느니라.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3:10). 여기서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마귀의 자녀들이다. 에베소서2:2에서는 이들을 "불순종의 자녀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사이에는 연합은 전혀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해하는 무신론자, 기독교, 캐톨릭, 유대교,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유교 등의 모든 종교 단체들과 종파들이 통합하여 "인류는 한 형제"라며, 하나로 연합하려 하지만 있을 수 없다.

"불순종"이란 말은 완고하게 반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순종의 자녀들이 인간을 위해 이땅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든다는 것과 종교 통합체들이 천년왕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 대부분의 인간들은 하나님을 대항하여 완고하게 반역을 꽤할 때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들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그들은 온갖 힘을 다바쳐서 "하나님이 없는 문명"을 발전시키고 사탄의 대표작인 "죄의 사람"이 나타나도록 길을 예비하고 있다.

사탄은 "온 세상을 속이던 자"(계12:9)로 "헛된 소망"을 주며 "재물의 오류"(마13:22)과 "죄의 속임수"(히3:13) "모든 불의의 속임수"(살후2:9-12)에 빠지게 한다. 그는 "상상력" 지배하여 "강한 유혹"과 "오류하는 영들"로 세상을 발전시키려는 자신의 계획이 옳다고 사람들로 믿게 끔 하려 한다. 그에게 속한 사람들은 과학적 지식과 발명품의 증가, 육지, 바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의 엄청난 발전, 노동을 덜어주고 생활의 편리함을 가져다 주는 여러가지의 발명들을 내세우며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대학이나 도서관, 병원, 많은 자선 단체를 세운 사람들의 위대한 박애주의 정신 때문에 세상이 더 나아져 가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것들이 인간에게 물질적인 편리함을 안겨다 줄 뿐 인간의 양심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문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이 세상은 사회적 불안과 부패의 화산 분화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지금 이 "세상 신"은 박해로써 교회를 무력화 할 수 없음을 알고 자신의 전략을 바꾸어 유혹의 미끼로서 교회를 타락시켰다. 이 미끼는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는 교회의 노력을 "사회를 향상" 시켜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자연인은 문명을 통해 구원받을 수 없듯이, "사회 개혁"이란 이름으로 세상을 구제하려는 모든 노력이 헛된 것임을 사람들은 잊고 있다. 즉 교회가 사탄의 이러한 방법을 도입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복음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세상의 사회적, 지적, 물질적인 발전을 위해 엄청난 돈을 쓴다. 또한 가난, 범죄, 무지 등과 같은 사회의 저해 요소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하여 협회를 만들고, 전문가들을 선정해서 그들에게 비싼 급료을 주어가며 모든 범죄, 불행, 사회악의 원인을 조사 발견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헛된 낭비"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미 오랜 전부터 그 원인은 죄성 때문이라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병이 나면 그 원인부터 치료해야 하듯이 교회는 먼저 개개인을 구원해야 한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구원받는다면 사회의 구원은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회의 병패"는 사람들이 처한 환경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그 사람 자체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회를 개선"하기 원한다면 인간의 모든 계획은 그 사람 자신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즉 사람은 먼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모든 사람들의 계획은 세상을 더욱 "살기에" 좋은 곳으로 만들려하지만, 세상은 더욱 죄가 거하기에 좋은 곳으로 만들고 있는데, 왜냐하면 죄를 자극하는 것들이 증가하여 "죄짓기에" 좋은 상태로 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신"은 만일 교회가 열정을 다해 오직 "세계 선교" 사업에만 전념한다면 그가 공들여 세운 거대한 "문명 조직"을 상실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사탄은 마치 파라오 왕이 그의 석조 도시들인 라암세스와 비돔에서 일하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 계속 붙잡아 두려 했었던 것처럼 교회를 손아귀에 넣고 교회의 "이집트롤 탈출하는 시기"를 계속 늦추려 하고 있다(살전4:15-18).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탄은 교회가 "짚 없이 벽돌 굽는 일"에만 급급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주님이 오신다는 전천년교리)의 빛을 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일단 교회가 일단 그 빛을 보게 되면 사탄의 "세상의 개혁"을 촉진하기 위한 일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나라들 통합하려는 것은 바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거스려 사람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탑"을 다시 쌓으려는 사탄의 음모이다(창11:1-9).

"이 악한 시대"에는 독특한 "두 개의 몸"이 형성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1. "그리스도의 몸" -교회

2. "적그리스도의 몸"

첫째 것은 성령에 의해 형성되고 있으며(고전12:3;13), 둘째 것은 악령 곧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에 의해 형성되고 있다. 성령으로 이루어져 가는 몸과 "악령"으로 이루어져 가는 "몸" 사이의 차이점은 앞에 것은 "살아 있는 머리"(그리스도-엡1:20-30)에 연합되어 있는 반면에 후자는 살아 있는 머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유기체"인 반면에 후자는 "조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담이 범죄하고 죽은 후 인류는 내내 머리가 없이 살아왔으나 "악령"(사탄)이 이루어 가는 몸, 즉, 조직이 완성될 때 사탄은 "머리"를 내놓게 되는데 그 머리가 적그리스도이다. 그 과정은 "머리"(그리스도)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몸"(교회)인 하나님의 질서를 뒤바꾸어 놓은 것이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서로 다른 특징의 두개의 체계를 멸망시키실 것이다

1. 하늘에 있는 "높은 자들"의 군대(사24:21).

이들은 사탄과 "공중에 있는 악한 권세자들"이다. (엡6:12).

2. 지상위에 있는 "땅의 왕들"

이들은 적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게 될 반그리스도적인 세력으로써 "연합한 열 왕들"이다(계19:17-21).

그 다음 하늘에 있는 모든 "악한 권세자들"이 사라질 것이다. 그들이 취하여 차지하고 있는 장소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성도들이 차지하게 되며, 사탄과 그의 군대가 현재 이 세상을 통치하였듯이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천년동안 통치하게 될 것이다(계20:4).

 

 

7.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적 사역

  1) 개 요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관한 공부를 그분의 "육신의 날들"로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영원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잊어서는 안된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잘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한 부분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구속사역은 그리스도의 일들 중 한 부분이며 우주가 창조될 때 이미 시작되었고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동안 줄곧 계속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생애와 사역"의 범위는 "영원"이며, 그 중심은 "갈보리"이다.

예수님의 혈통을 추적하면서 마태는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갔고(마1:1-17), 누가는 아담까지(눅3:23-38), 그리고 요한은 하나님까지(요1:1-2)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며, 처음과 마지막이라"(계22:13)고 하셨고, 또 "나는 '알파(ԡ)'와 '오메가(ԟ)'요, '시작'과 '끝'이라. 주, 곧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분이 말하노라."(계1:8,11)고 하셨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 하신 것이다.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요한도 요한복음1:14에서 말하기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우리가 (변화산에서의)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또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기 전 다락방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아버지시여,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으로 친히 나를 영화롭게 하여 주옵소서."(요17:5)라고 기도하셨다. 이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있기 전에 계신 영원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신 생애와 사역을 공부함에 있어 편의상 세 시대, 즉 그분의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보자. "그리스도의 위대하신 생애와 사역"에 관한 도표를 보라.

I. 그리스도의 세가지 사역

그리스도의 "직무"는 "세 가지 면"인데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를 동시에 수행하신 것이 아니라, 차례로 수행하고 계신다. 그분의 "선지자로써의 사역"은 하늘과 땅이 창조된 이후부터 시작하여 하늘로 오르실 때까지이다. "대제사장으로써의 사역"은 승천할 때부터 교회가 들림을 받기 전까지이다. 그리고 "왕으로써의 사역"은 대환난의 마지막에 지상으로 재림하셔서 왕국을 아버지께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만물 안에서 모든 것(all in all)이 되시려 하심이라"(고전15:28)는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이다. 그분의 과거의 생애와 사역은 다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2) 창조에서 그리스도의 사역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창1:1)라는 장엄한 말씀으로 시작된다. 유한한 인간은 하나님만이 홀로 계셨던 시기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성부만 계셨고, 그리고 나서 성령과 성자가 성부로부터 생겨 나와 삼위일체를 이루었다는 주장은 틀린 주장이다. 만약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는 "아버지의 독생자(Only Begotten of the Father)"(요1:14)라는 표현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근본(origin)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와 공존하지 않았다는 것이 되지만, 만약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의 시작, 즉 마리아에게서의 탄생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분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아버지께로부터 태어났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독생자"이다(눅1:30-35). 그러나 또 다른 성경 구절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첫 태생이시니}(골1:14-15)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예수님은 단지 한 "피조물"로써 태초에는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윗 구절에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 즉 만물을 "창조하신 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분의 인간으로 태어나셔 예수님이 되심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딤전3:16). 따라서 그분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고후5:17) 가운데서 "첫 태생(Firstborn)"이 되었으며 "둘째 사람", 즉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으로써 새로운 피조물의 머리가 되셨다(고전15:45). 어째든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은, "성삼위"(Divine Three)께서는 모든 피조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창조의 사역"에 있어서 예수님은 "말씀"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그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느니라. 만물은 그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며, 이미 지음 받은 것 가운데 그가 없이 지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요1:1-3). 이 말씀을 바울은 골로새서1:16-17에서 확증하고 있다.

{이는 만물이 그에 의하여 창조되되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좌들이나 주권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그에 의하여 또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그는 만물 이전에 계시고 또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속하느니라}.

만물이 그리스도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는 성부와 성령의 도움이 있었다. 이것은 창세기1:26에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나님(Divine Three)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아버지의 일은 물질을 창조하는 것이며, 아들의 일은 그 물질을 여러 모양의 형태로 만들며, 또 성령의 일은 모든 생명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일은 이사야40:12절에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누가 손바닥으로 물들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큰 저울로 산들을 달아 보았으며 작은 저울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겠느냐?}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욥기에도 그리스도의 창조 사역을 화려하게 설명하고 있다. 욥기38장과 39장을 보라.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표적에서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창조의 능력을 엿볼 수 있다(요2:1-11). 자연적인 포도나무에서 의하지 않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행하셨는데, 이것은 그분의 창조의 영광을 증명한다.


 

  3) 창조후부터 성육신 때까지의 그리스도의 사역

사람을 창조하신 이후 그리스도의 "창조 사역"은 끝이 났다. 왜냐면 창세기2:2에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하시던 일을 끝내시고, 자신의 하시던 자신의 모든 일로부터 일곱째 날에 쉬시니라." 그 때부터 그분의 일이란 "관리" 및 "구속"이었다. 창세기2:4절에서 하나님이 "주 하나님"으로 바뀐 것을 보게 된다. 왜 그러한가? "창조자(Creator)"로서의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엘로힘(Elohim)이며, "계시자(Revealer)"로서의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여호와(Jehovah)인데 이것을 번역하면 "주 (主: Lord)"이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약 6,000번 이상 언급되고 있다.

창세기의 첫 부분에는 네 가지로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는데 제각기 하나님의 독특한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엘로힘;Elohim) "주(여호와;Jehovah)" "전능하신 하나님(El Shaddai),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엘 엘욘;El Elyon, 창14:22) 이다. 이 이름들이 시편91:1-2절에 모두 사용되고 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이의 그늘 아래 살리로다. 내가 주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시며 나의 요새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신뢰하리라." 하리로다}.

여호와는 사람의 모든 필요를 만족시키는 분으로써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한 심오한 일곱 가지의 이름이 있다.

1. 여호와 이레 (JEHOVAH-JIREH) "주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이라"(창2:14) - 예비하시는 주님.

2. 여호와 라파 (JEHOVAH-RAPHA) "치료하는 주님" (출15:26)

3. 여호와 닛시 (JEHOVAH-NISSI) "주님은 우리의 깃발"(출17:15)

4. 여호와 샬롬 (JEHOVAH-SHALOM) "주님은 우리의 평화"(판6:24)

5. 여호와 라하 (JEHOVAH-RA-AH-) "주님은 나의 목자"(시23:1)

6. 여호와 지드케누 (JEHOVAH-TSIDKENU) "주님은 우리의 의"(렘23:6)

7. 여호와 삼마 (JEHOVAH-SHAMMAH) "주님께서 거기 계시다"(겔48:35)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이름의 의미를 알아야 그 이름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창조자"로서의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엘로힘(ELOHIM)"이며, "계시자와 구속자"로써는 여호와(주; LORD)이다. 창조자(엘로힘)로서 그리스도는 인간과의 언약 관계에 있어서는 "계시자와 구속자"(여호와)이다. 그분은 단지 사랑의 하나님으로 뿐만 아니라 악을 징벌하시는 의와 공의의 하나님으로도 나타나신다. 함께 사용하든 따로 사용하든 제각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약 시대에 그리스도가 "창조자" 혹은 "보존자(Preserver)", 즉 "계시자" 또는 "구속자"를 뜻하느냐에 따라 각각 "엘로힘", "여호와" 또는 "여호와 엘로힘"(주 하나님)으로 불렸다. 이것을 염두해 두고 천지 창조부터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더듬어 보자. 에덴의 동편에 동산을 만드시고 그 곳에 아담과 이브를 살게 하시고 그들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시하신 분은 "주 하나님", 즉 그리스도이셨다. 날이 서늘할 때에 아담과 이브에게 나타나 불순종을 책망하시고 여자의 씨가 사탄의 머리를 부술 것이라고 그들에게 약속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

또한 그들을 동산에서 추방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창3:8-23). 카인에게 그의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을 책망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창4:9). 노아의 홍수를 경고하신 분도 그리스도셨으며, 그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시고 방주의 문을 닫으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창6:1-22). 갈대아 우르에게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그에게 카나안으로 가도록 지시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창12:1-3). 아브라함이 거하는 장막 입구에서 두 천사와 함께 나타나신 분도 그리스도이며, 이삭의 출생을 예언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 평지 도시들인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것을 예언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창32:24-30).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가시덤불 가운데 나온 불꽃 속에서 나타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 모세가 "주의 천사"에게 그의 이름을 물었을 때 그분은 "나는 곧 나니라(I AM THAT I AM)"고 대답하시고 덧붙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같이 말할지니 "나이신 분(I AM)"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말씀하셨다.

가시덤불 불꽃 속에서 "나이신 분(I AM)"이라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나는(I AM)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신약에서의 그리스도이시다. 이집트인들에게 재앙을 내리셔 자신의 예표인 유월절 어린양을 죽게 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출12;1-30).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하여 홍해를 가르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여 살리신 분도 그리스도였고(출16:1-15),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출20:1-26). 솔로몬 성전과 성막 가운데 영광 중에 나타나신 분도 그리스도셨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광야 생활의 마지막까지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출13:21-22).

여호수아가 만난 "주의 군대 대장"도 그리스도였고(수5:13-15), 요단강을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건너게 한 후 여리고를 포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도와 땅을 정복하게 해 주신 분도 그리스도셨으며, 여호수아의 대를 이어 재판관들을 세우고 그들을 명하여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게 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 그리스도는 기드온, 삼손 그리고 사무엘과 함께 계셨다. 사울은 초대 왕으로 택하신 분도 그리스도셨고(삼상9:15-17), 사울의 불순종으로 인해 어쩔수 없이 다윗을 왕으로 택하시기 직전까지 사울을 축복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삼하16:1-13)

선지자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신 분도 물론 그리스도이셨다. 웃시야왕이 죽은 그해에 성전에서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았고 그 분의 영광 앞에서 이사야는 자신이 부정한 입술을 가진자임을 알았다(사6:1-8).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종결시켜 달라는 다니엘의 기도를 들으시고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어 "칠십주"에 관한 환상을 통해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정확한 날짜를 계시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단9:1-27).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살펴보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이후로 육신으로 이땅에 오실 때까지 사람들의 역사를 살피시고 특히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일에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활동적임을 알 수 있다.

모세가 주님께 "주의 영광"을 보여줄 것을 간청했을 때 주께서는 "네가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이는 나를 보고서 살 자가 아무도 없음이니라"(출33:20)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11절에서 "주께서는 사람이 자기 친구와 말하는 것같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두 말씀을 모순되지 않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실 때는 아브라함 때와 같이 변장하여 나타나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몇몇 사람이 추정하는 바와 같이 창조이전에 인간에게 직접 나타나실 필요를 예상하고 한 "형태"로 나타나실 준비를 이미 하고 있었으리라는 가정이다. 그 "형태"란 인간의 형태셨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습"이 반드시 "혈과 육"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러한 만남이 아주 가끔 있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으로 나타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속 사역이 필요하게 되자 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느니라"(빌2:5-8)라는 말씀처럼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

 

  4) 성육신후부터 승천 때까지의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 오시기 전에도 "선지자"로서 많은 일을 예언하셨지만 육신을 입고 이 세상을 오신 후에야 비로서 "선지자"로서의 직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셨다. 주님은 모세가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 가운데로부터 네 형제들 가운데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네게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에게 들을지어다(신18:15)"고 예언한 선지자였다. 베드로는 성전에서 설교하는 중에 그리스도께서 선지자였음을 밝혔다(행3:19-26).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께서는 그 분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다. 주님의 비유들은 예언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올리브산"에서(마24:1-25:36)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재림할 때까지의 사건을 예언하셨다. 그러나 그 분이 육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주된 목적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일을 하시기 위해서는 사람으로 오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죄 없는 사람"인 그 분만이 인간들의 죄를 대속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그 분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다. 속죄의 필요성을 이해하기 위해는 우리는 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죄란 "인간의 피에 독이 있는 것"과 같다.

인간이 선을 행할 때에도 악이 따라다닌다는 것은 성경이나 도덕적 기준이 없어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의 양심과 행동 사이에, 올바른 이성과 육신적인 욕망 사이에 갈등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양심의 가책"이라고 하고, 성경에서는 이것을 "죄"라고 부른다. 우리 몸에 생기는 종기나 피부병은 등등은 우리 몸 속에 불결한 피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우리 안에 죄의 법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죄의 법 안에 있으며 죄성을 유전받았다. 다윗 왕은 "보소서, 내가 죄악 중에서 태어났고, 죄 중에서 내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라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서자 출신이거나 사생아로 태어났다는 말이 아니라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음을 뜻하는 것이다. "원죄", 또는 "죄성"이라는 것은 인간 속에 선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마음의 성향은 죄를 향한다는 것이다. 죄란 단지 환경이나 유혹 때문의 결과가 아니라, 죄성이 나오는 것이다(약1:13-14).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마음이 온갖 죄들이 나오는 온상이라고 말씀하셨다(막7:20-23). 우리는 "죄(Sin)"와 "죄들(Sins)"을 구분해야 한다. "죄"는 아담 안에 있는 죄성을 의미하며 "죄들"은 우리 안에서 죄성으로 인해 범하는 죄의 낱낱의 결과, 즉 범죄를 의미한다.

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관계가 있으며 죄들은 그리스도의 보혈과 관련된다. 죄는 사람들을 썩어가는 사과처럼 만들어 버렸다. 아담은 "무죄한 상태"로 태어났으며, 이와 같이 아담은 "무죄함"은 "의로움"과 한발자국이었으며, 또한 "무죄함"은 "죄"와도 한발자국 사이였다. 결국 그는 죄에 발을 내딛었으며, 죄인이 되었다. 만일 그가 의로움에 발을 내딛었다면 "생명 나무"를 먹도록 허락되어 영원히 거룩한 상태에서 살았을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타락하기 전에는 자식이 없었다. 만약 그때 이브가 잉태했었다면 죄 없는 아이를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한 후에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류는 혈통에 의해 죄인이다. {이런 연유로 한 사람(아담)에 의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롬5:12).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로써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증명된다. 지금 아담의 죄의 형별은 두가지, 즉 영적인 죽음과 육체적인 죽음을 가져왔으며, 인류가 영적, 육체적인 죽음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한가지 길은 그들을 위해 누군가가 그 형벌에 대해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바로 이 일을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 때문에 그분은 사람으로 오셔야 했고, 그래서 그 분은 한 처녀에게서 태아날 수 밖에 없었다. 아담의 피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무죄하신 분이다. 즉 육신적 아버지가 없으므로 죄성과 한 방울의 피도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 "거룩하신 분"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성령으로 잉태하여 태어나셨다(눅1:35). 그러므로 죄가 없으신 예수님 만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여기에 "법의 원리가"가 있는데 법을 어기면 법을 어긴 자나 대리자가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법은 법으로써의 영향력이 없다.

그러므로 국가에서는 죄의 댓가를 법으로 정할 수 있으며 그 법에 의하여 공정하게 범법자를 처벌한다.

아담은 법을 어겼고, 범법자에 대한 형벌은 사망이었다. 이는 영과 혼과 육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였다면 법 질서는 깨지고 공의는 사라지고 또한 고귀한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를 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형벌은 아담이나, 혹은 그 대리자가 받아야 한다. 그러나 아담이 대리자를 즉시 발견할 수 없게 되자 사랑과 공의의 양면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즉시 알려 주셨다.

그것은 그 분 자신이 독생자 예수라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대리자가 되신다는 것이다(창3:15).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대리인을 즉각 보내시지 않으셨다. 4천년이 지난 후에 비로서 예수님이 오셔서 아담과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나 이 4천년 동안 인간은 죄를 가리기 위해 흠 없는 소, 염소, 어린 양 등 짐승의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리고 그 몸은 제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드렸다. 이러한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 주셨다.

유월절마다 흘려지는 양의 피는 세상 죄를 없앨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모형이었다. 희생 제물을 드릴 때 갈보리 산 위에는 "공의"와 "사랑"이 함께 있었다. 공의가 사랑에게 "4천년 전에 에덴 동산에서 세상 죄를 없앨 대리자가 되겠다고 하던 분이 어디 계시냐?" 라고 묻자 사랑은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산위로 올라가는 그를 보라"고 대답했다. 그가 갈보리 산 위에 도달했을 때 공의는 오래전에 체결되었던 "법령"를 제시하며 그 댓가를 요구했다. 뒤이어 희생 제물이 준비되자 하나님의 어린양은 십자가의 제단 위에 놓여졌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눈으로 보이지 않는 도말할 "법령"을 손에 가지고 계셨으며 로마 군사가 그 분의 손에 못을 박을 때 골로새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너희가 죄들과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살리셔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셨으니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한 손으로 쓴 법령을 지워 버리고, 또 그것을 그의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셨으며 정사와 권세를 벗겨내어 그것들을 공개적으로 나타내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2:13-15).

"지불 증서"을 없애심으로써 하나님의 법과 공의가 동시에 충족되어졌으며, 이로써 하나님께서도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를 선포하심은 자신도 의롭게 되시고 또한 예수를 믿는 자도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3:26) "영적인 사망"의 형벌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하며 외칠때 갚아졌고 "육적인 사망"의 형벌은 그 분이 "다 이루었다"고 외치시며 숨을 거두실때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하여 속죄의 능력과 "대리자"로서의 자격이 복음서에 잘 묘사되어있다. 바라바는 강도였고 반란과 살인죄로 체포되어 십자가형에 처해져야 했다(요18:39-40, 마27:15-26, 막14:6-15). 유월절이 되면 전통적으로 죄수 한 명을 놓아주기로 되어 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처형할 것을 요구 했을때, 빌라도가 예수님과 바라바 중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그들은 바라바를 택했다.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님은 사형 집행관들에게 넘겨졌고 바라바 대신 죽음으로써 "법"이 요구하는 바를 만족시켰고 바라바는 풀려났다. "대리적 보상"은 성경의 속죄관과 같다. 만일 바라바가 풀려난 후 갈보리 산 위에 올라가 누군가로부터 십자가에 달리신분이 바로 자신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아래의 5가지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1.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다.

2. 예수님은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신 분이다.

3. 내 자리를 대신하여 죄없는 분이 십자가에 죽으셨다.

4. 나는 용서받을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5.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법이 요구하는 것을 만족 시켰다.

만약 바라바가 십자가의 죽음을 목격하기 위해 갈보리 산에 갔을때 누군가가 탈옥수로 오해하고 백부장에게 알리겠다고 그를 위협했다면 바라바는 아마도 이같이 말했을 것이다. "백부장은 나를 체포할 수 없소. 왜냐하면 오늘 그가 나사렛 예수를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고 나를 석방하였기 때문이요. 나는 오늘부터 자유의 몸이라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위치는 법에서 풀려난 바라바의 위치와 똑같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셔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기록되기를 "나무에 매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은 자라"(갈3:13)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달리신 십자가는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우리는 아담으로부터의 죄성을 물려받았고 둘째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제 그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것을 물려 받았다. 이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것을 물려 받았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매장되고, 부활하고 승천한 위치가 되었으므로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으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2:20).

위의 말씀의 바로 윗 구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죽은 것은 하나님께는 살고자 함이라}(갈2:19). 지금 바울은 그가 육신적인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는 법적인 죽음을 뜻한다. 즉 죄의 댓가는 사망인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대신하였으므로 율법은 우리에게는 더 요구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도다. 우리의 화평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 그가 맞은 채찍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도다}. 우리의 모든 죄들을 그 분에게 내려졌으므로 또 다시 우리가 담당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무죄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를 담당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가질수 있다. 그러나 단 하나 가능한 방법이 있다. 무죄한 사람이 죄인과 "연합체"가 되면 그와 함께 동일하게 된다. 한 예로서 가난한 과부의 빚을 이웃에 살고 있는 큰 부자가 합법적으로 지불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부자가 그녀와 결혼하여 "연합체", 즉 부부가 되어 그녀의 빚을 모두 맡는다면 그는 그녀의 빚을 정당하고 합법적으로 책임질 수 있다. 그와 같은 내용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형제들아, 이런 연유로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으로 인하여 율법(처음 남편)에는 죽었나니, 이는 너희로 다른 사람, 즉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지신 그(그리스도)와 혼인하게 하려는 것이요, 그리하여 우리로 하나님께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이니라}(롬7:4).

이와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율법에 대한 우리의 모든 빚을 그 분이 "합법적으로 책임"을 지셨다.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는가를 다시 한번 말씀하신다. {이 어리석은 자들아,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아. 그리스도가 이러한 고난을 당하고서 그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눅24:25-26).

그리스도의 속죄는 단순히 "대속"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로 연합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율법을 어기지 않고 "영적", "육신적" 사망의 형벌을 그의 아들에게 내리신 하나님은 완전하게 정당하시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서 "우리 자신을 율법에게 죽은 것으로 여기라"(갈2:19,롬6:11)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자신이 율법에서 해방된 사람으로 믿고 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죄"의 심판은 지나갔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고 오신 후부터 부활하실 때까지의 사역은 죄에 대한 속죄임을 알게 되었다.

 

  5) 미래의 그리스도의 직분과 사역

그리스도의 미래의 직분은 왕이다.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직무를 마칠 때 아버지의 보좌에서 떠나 공중에서 신부인 교회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살전4:15-18). 그리고 나서 주님은 신부를 하늘로 데려갈 갈 것이며, 그리스도의 심판석에 앉아(롬14:10) 성도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의 행위대로 상을 주실 것이다. 그 후 점이나 주름이 없는 신부인 영광스러운 교회와 신랑인 어린 양과의 혼인 잔치가 있게 된다(계19:6-9).

그 다음 아버지로부터 왕권을 받은 후 아마겟돈의 전쟁에 참여할 것이다. 뒤이어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군대들과 함께 지상에 내려오셔서 아마겟돈의 전쟁에 참여할 것이다. 뒤이어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시는 천년왕국이 시작될 것이다. 천년왕국 기간인 천년이 차면 끝없는 구렁에 갇혔던 사탄이 잠시 풀려나오고 엄청난 배교가 있게 되며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악한 자들을 멸망시킬 것이다. 그후에 하늘과 땅은 불살라지고 새하늘과 새땅이 나타나며 옛땅에서 구원받은 의로운 민족들이 그곳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로서 천년왕국을 통치하신 후에 때가 차면 그 왕국 아버지께 바침으로써 하나님께서 만물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고전15:28).

 

 

8. 성령의 시대적 사역

  1) 성령의 시대적 사역

하나님(Godhead)의 세 번째 인격이신 성령은 영원 전부터 있었기 때문에(히9:14),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인격과 그 하신 것을 살펴 본 것처럼 성령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이야기하고 기록해 나간다면 성령의 인격과 그 하신 일에 관한 많은 오해와 신비가 풀릴 것이다. 이제 각 시대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에 관해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1. 창조시의 성령의 사역

욥기26:13절에 "그는 그의 영으로 하늘들을 단장하셨고.."라는 말씀이 있다. 즉 별들과 태양으로 하늘들을 아름답게 꾸미신 것이다. 창조시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이렇게 묘사된다. 즉 성부께서는 물질을 창조하시고 성자께서는 하늘들과 땅의 보이는 사물에서 알 수 있듯이 물질을 형상화했고 성령께서는 모든 생물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것은 창세기 2:7의 인간 창조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다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삼중적 사역을 알 수 있다. 성부께서는 흙을 만들었고 성자께서는 토기장이처럼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었으며 성령께서는 그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었다.

창세기1:2을 보면 "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의 표면 위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성령)은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시더라."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태초의 땅을 이전 상태로 회복하는 과정에 성령이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창조시에 성령이 하신 일은 생명을 불어넣고 회복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타락에서 노아홍수까지의 성령의 사역

이때는 "양심의 시대"였다. 이 기간은 인간들로 하여금 더욱 선한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하여 성령께서는 인간의 양심을 통하여 "다투어온 기간"이었다. 이것은 창세기6:3에서 "내 영이 항상 사람과 다투지 않으리니, 이는 그도 육체임이라. 그래도 그의 날들이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라는 구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120년 이상 그들에 대해 참아왔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았기 때문에 홍수를 땅에 내리신 것이다.
 

3. 노아홍수 이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의 성령의 사역

이 기간에는 "홍수 이후 시대"와 "족장 시대" 그리고 "율법 시대"가 포함되었다. 이들 기간 중에 성령의 일은 동일한 것 같아 보이지만 지속적이거나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성령은 남녀 각 사람에게 임하여 개인의 성격에는 상관없이 어떤 특별한 일이나 사역을 부여할 때 그들을 충만케 하셨으며 그 예로는 발람(민24:2-9), 삼손(판13:24-25), 사울 왕(삼상10:6-13)등이 있다. 성령께서는 그들이 훌륭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공직에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사역을 맡기 것이었다. 요셉(창41:38-39), 여호수아(민27:18), 다니엘(단4:8,9,18,5:11-14)과 같이 몇몇을 제외하고, 이 시대에는 기간이 경과함에 따라 성령이 사람들과 더 이상 함께 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삼손과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나타심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임했다가 떠나곤 했던 것이다.

성막을 짓고 그 안에 기물들을 배치할 때가 오자 하나님은 특별히 브사렐을 성령으로 충만케 함으로써 그 일들 맡겼다(출31:1-5). 극치에 가까운 정교함과 훌륭한 미가 아낌없이 발휘한 성막은 브사렐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한 결과였다.

"당신의 기술과 솜씨는 정말 훌륭하오"라고 브사렐을 칭찬할 수는 없지만 "브사렐을 통한 하나님의 영의 역사는 얼마는 놀라운가?"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령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같은 방법으로 역사했다.

{예언은 언제나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것이니라}
(벧후1:21).

이 시대의 성령의 사역은 주로 적임자에게 특정한 일을 맡기는 것이다.
 

4. 구약과 신약(그리스도의 죽음)사이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

"공백기간" 중에 행한 성령의 일은 주로 이땅 위에서의 예수님의 생애와 관련을 맺고 있다. 삼위의 하나님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확실한 구분을 보여 주며 아들 하나님 조차도 "성령"의 도움과 상호협력이 없이는 인성을 지닐 수도, 인류를 구원할 수도 없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 안에서 역사한 성령의 일은 신약 성경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1.성령에 의해 잉태되었다(눅1:30-31; 34-35; 마1:18-20).

2.성령에 의해 침례받았다(마3:16).

3.성령에 의해 시험받기 위해 광야로 인도되었다(마4:2;눅4:1-2).

4.성령의 힘으로 능력있는 사역을 행하셨다(행10:38)

5.성령에 위해 복음을 전하기 위한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눅4:18).

6.성령을 통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히9:14).

7.성령에 의해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셨다(벧전3:18).

8.성령을 통해 열두 사도에게 계명들을 주신 후 들려올라 가신 그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게 하셨다(행1:1-2).

5. 오순절이후부터 그리스도의 재림까지의 성령의 사역

이 기간은 특별한 "성령의 시대"이다. 구약 시대는 성부에 의해 천년왕국 기간은 성자에 의해 지금은 성령에 의해 역사가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나 내가 진실을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유익하니라. 만일 내가 가지 아니하면 위로자(성령)가 너희에게 오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내가 떠나가면 내가 그 분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라."(요16:7) 라고 하신 말씀은 성령도 한분의 인격이며 예수님과 성령이 이 땅위에서 함께 거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예이다. 성령은 이 기간 중에 특별한 임무를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에 의한 침례를 통해 교회 안으로 들어온다(고전12:13,27). 성령은 오순절에 이 땅에 내려와서(행2:1-4), 교회가 완성될 때까지 지상에 머물 것이며 휴거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할 때까지 교회를 보호하실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만약에 성령이 이땅에 지금 계시다면 어디서 볼 수가 있습니까? 성지인 이스라엘에 있습니까? 아니면 세계의 다른 곳에 있습니까?" 오순절에 성령께서는 육신적인 몸을 취하시지 않으셨지만 교회 안에 거할 처소로 삼으셨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통해 "또한,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고 했다. 또한 고린도전서3: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성령)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는 그들을 집합적으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의 영"이 그들 안에 계신다고 말했다. 그리고 에베소서2:21-22절에서 바울은 교회를 건물로 비유하고 있다. 돌들이 모여 "성전"을 이루듯이, 교회는 성도들이 서로 연결하여 성전을 이루어 가는 것이며 이 건물의 목적은 이 땅위에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하나님께서 그 안에 성령으로 거하실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14:22-23절에서 예수님은 승천이 가까이 오자 유다의 "주여, 자신을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나타내려 하지 아니하시니 어찌된 일이니이까?"라는 질문에 대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들을 지키리니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며, 또 우리도 그에게 와서 우리(삼위일체 하나님)의 거처를 그와 함께 정하리라."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큰 사명을 맡기신 후 예수님께서는 "보라,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세상의 끝이란 곧 교회시대의 마지막 때까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대제사장의 자리를 떠날 수가 없기 때문에 사람으로 이 기간 동안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없고 오직 성령의 인격으로,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다. 성령께서는 지금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 땅에 계신다.

오늘날 성령은 이 땅 위의 하나님의 모습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의 "나"는 곧 하나님을 일컫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 계셨을 때는 예수님을 통해, 지금은 성령을 통해 나타나시는 것처럼, 삼위 중 어느 분이나 이 땅에 계시면 언제나 그를 통해 나타내 보이신다.

그러므로 모든 믿는자는 "성령의 전"이므로 성령이 이 땅 위해 거하시는 동안 성령을 보기 원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성결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거룩한 행실을 통해 그 분을 보아야 할 것이다.

 

  2)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

교회 안에 존재하는 성령은 교회의 주관자이시다.

골든(A.J.Gordon)박사는 "성령의 사역"에 관하 자신의 저서에서 "성령은 정확하게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불려져 왔다"고 말했다. 교회의 경영은 성령에게 맡겨졌다. 지상에는 오직 하나의 거룩한 보좌가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보좌"일 것이다.

초대 교회의 회의에 관해 사도행전15:13절에서 19절까지 아주 분명하게 설명했는데 28절에서 "성령과 우리에게 좋은 것 같으니"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성령이 그 모임에 참석하시고 공적 지위를 가지고 행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소유를 팔아 그 돈의 얼마를 감추고 거짓말을 하였을때 베드로 아나니아에게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너의 마음을 가득 채워 성령께 거짓말하게 하며, 또 토지 대금 일부를 감추느냐?"(행5:3)고 말했던 것처럼 그 심판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주관하시는 분이 성령이심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택하여 보내신 것처럼 성령도 그의 제자들을 선택하여 보내셨다. 사도행전13:2-4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그들이 주를 섬기며 금식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내게 따로 구별해 놓으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금식하고 기도한 후에 그들에게 안수하여 떠나 보내니라. 그들은 실로 성령께서 보내신 것이라. 셀루키아로 갔다가 거기에서 쿠프로를 향하여 배를 타고 가니라.}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서신에서 "그러므로 너희 자신을 조심하고 모든 양떼에게도 그리하라. 이들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너희를 감독자로 세우셨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게 하셨느니라."(행20:28)라고 말했다. 확실히 사도들의 활동하던 시대의 교회의 집사나 목사는 사람들의 투표로 택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택함을 받았다.

성령에 의하지 않고 교회의 주요한 직분을 세우는 실수를 범한 사례로서는 맛디아의 경우가 있다. 유다의 자살로 사도의 직분에 공백이 생겼다. 120명이 둘러싼 가운데 단 위에 선 베드로는 담대하게 그 자리는 주님이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 그들과 같이 지내온 사람들 중에서 담당하여야 한다고 단언했다. "우리와 더불어 지냈던 사람들 중에서 한 명을 뽑아 우리와 함께 주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리라."(행1:22) 그러나 사도들은 그때까지 사도를 택하는데 발언권이 없었다.

주님 자신이 그 주권을 행사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요6:70,13:18) 주님은 대리자이신 성령이 오실 때까지 아무것도 행하지 말라고 당부한 후 승천하셨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성령이 오시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처리하지 않는 것이 옳았던 것이다(눅24:49). 그러나 주님의 그러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임하여 그들의 행위를 인정한다는 아무런 표시도 없이 선거가 열려 마지막 한 사도가 지명되었다. 반면 그 때에 선출된 맛디아는 이름없는 인사가 되어 그의 이름은 다시 언급된 적이 없다. 몇 년 후 주님은 다마스커스에 가까이 왔을 때 다소의 사울을 성령으로 충만케 함으로써 유다의 직분을 대신하는 사도로서 그를 택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에게서 나지도 않았고 또한 사람에 의해서 되지도 아니하였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 자들로부터 그 분을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에 의하여 사도된 바울"(갈1:1)이라고 자신을 증거하고 있다

사도 요한이 죽음으로써 사도의 직분은 끝이 났다. 왜냐하면 사도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도 그 중의 한사람이다(고전15:3-8). 반면 목자, 장로, 집사, 성도를 가르치는 교사는 반드시 성령이 충만한 선택된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계획이다(행20:28). 교황, 대주교, 추기경 등 그 밖에 교회의 직분을 가진 자들이 중 한 사람이 목사를 세우는 일이 성령에 의한 것인지는 의문이 생긴다. 목자를 세울때 모임을 가지고 다수결로 정하는 것은 쉬운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도 시대의 방법이 아니며 그렇게 함으로써 발생되는 실수와 불합리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실제로 이 때문에 많은 교회 조직이 쇠퇴하고 파괴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령의 뜻"이 확실해 질 때까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며 기도와 금식을 하는 것이 훨씬 좋은 방법이다.

교회는 목자를 택하는데 있어서 성령에 의지해야만 할 뿐 아니라, 목자는 교회를 돌보는 일에 있어서도 성령과 의논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들이 프루기아와 갈라디아 지역을 통과하였을 때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금하셨으며 무시아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려고 하였으나 성령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므로"(행16:6-7)라고 말한 바울과 디모데의 기록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자연히 우리는 왜 그런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되지만 그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그에 대한 해답을 곧 얻을 수 있다. "무시아를 지나서 트로아로 내려왔더라. 그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나타났는데 어떤 마케도니아 사람이 서서 그에게 간청하여 말하기를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고 하니라. 그가 그 환상을 본 뒤에 우리는 즉시 마케도니아로 떠나려고 하였으니, 이는 주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자 우리를 부르셨다고 확신하였음이니라"(행16:8-10). 그리고 그들은 마케도냐로 가서 그들이 하는 일 가운데 축복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목자, 선교사, 그리고 모든 일꾼들은 그들의 일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성령은 절대로 "부적당"하게 행치 않으신다. 아도니람 저드슨, 윌리엄 캐리, 데이비드 리빙스톤이 경험한 경우가 훌륭한 예가 된다. 저드슨은 인도로 가려고 했으나 성령은 그를 버마로 보냈고, 캐리는 태국으로 가려고 했으나 성령은 그를 인도로 보내셨고, 리빙스톤은 중국으로 가려고 했으나 성령은 그를 아프리카를 보냈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다. 십자가에서 못박히시기 전날 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말할 것이 많이 있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진리의 영이신 그 분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에로 인도하시리라. 그 분은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며, 무엇이나 들은 것을 말씀하실 것이요, 또 너희에게 일어날 일들을 알려 주시리라}(요16:12-13)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십자가의 부활의 빛과 승천 후에 공급할 수 있는 빛에 의해 밝혀져야함을 필요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분의 재림의 때에 관해 질문을 받았을 때 그분의 대답은 {그 날과 시간에 관해서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며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13:32)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광된 모습이 되자 곧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승천 하신지 66년 후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에게 그것을 밝히셨다. 요한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라.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것이요, 속히 될 일들을 그의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의 종 요한에게 보내어 표적으로 알게 하신 것이니라(계1:1). 그리고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세계교회의 역사적 시대적 유형을 상징하는 교회인데,(계2:1;3:22) 그곳에 보내는 편지에 일곱 차례나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라는 구절을 볼 수 있다.

성령의 교훈과 교제는 듣고 기록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인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신 그 분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에로 인도하시리라. 그 분은 스스로를 말씀하지 아니하시며, 무엇이나 들은 것을 말씀하실 것이요, 또 너희에게 일어날 일들을 알려 주시리라. 그 분이 나를 영화롭게 하시리니, 이는 그 분이 내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임이라"(요16:13-14). 이 시대의 성령의 사역은 영광을 받은 그리스도의 일들을 교회에게 계시하여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야 한다. 베드로는 이것에 관하여 "이것이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과 더불어 복음을 전한 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이제 전해졌으며"(벧전1:12)라 고 했으며 또한 바울도 "또 내 말과 내 설교를 설득력 있는 인간의 지혜의 말로 하지 않고 성령과 능력을 나타냄으로 하였으니"(고전2:4)라고 고백했다. 가르치는 것으로는 그것을 감당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제자들은 3년동안 가르침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위로부터 능력이 임할 때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막았다(눅4:49;행1:8;2:1-4).

어부였던 베드로는 오순절 날에 성령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그가 했던 설교를 결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설교자는 반드시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야 한다(딤후2:15). 만약 성령이 돕지 않았더라면 베드로는 구약성경에서 그렇게 적절한 구절을 인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령이 사람으로 하여금 양심에 가책을 받게 하고 변화시키는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한 성경에서 비유하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눅8:11). 자연적인 세상에서처럼 살아있는 것만이 싹이 트게 된다. 하지만 씨에 "생명력(Pre-Existing Life)"이 없으면 썩어버리는데, 왜냐면 "우연적인 생명의 발생"은 없기 때문이다.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씨"(하나님의 말씀)는 성령에 의해 생명력을 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전혀 쓸모가 없게 된다.

무신론자인 과학자나, 철학자 등등의 기타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알고 유창하게 인용할 수는 있지만 그 말씀으로 변화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적인 연합"이 없는 사람이 성령을 인용하는 것은 도둑질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인은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일들이 그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이요, 또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 일들이 영적으로만이 분별되기 때문이니라"고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2:14). 자연인이 영적인 계시를 자연적인 이해력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R.A. 토레이 박사는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할 줄 안다고 하여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마치 선을 그릴 줄 안다고 설계도면을 맡기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자연적으로 남녀의 결합이 없으면 자식이 생기지 않는다. 반드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성령이 그의 아버지이고 처녀 마리아가 그의 어머니이다(눅1:30-33). 동정녀 마리아의 태가 "하나님의 자녀"를 잉태하는 곳이듯이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자녀"를 잉태하는 곳이다. 이와 같이 "죄"도 거짓의 아비인 사탄에 의해 인간의 마음속에서 잉태된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기를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너의 마음을 가득 채워 성령께 거짓말하게 하며, 또 토지 대금 일부를 감추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도 네 것이 아니었느냐? 또 팔린 뒤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느냐? 네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였느니라."고 하니}(행5:3-4)라고 베드로는 지적했다.

"새로운 탄생"은 새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에 의해 "새로운 성품"이 심기운 것이다.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던 어거스틴이 뉴미디아의 무화과 나무 밑에 앉아 있을 때 그의 마음 속에 로마서13-14절 말씀이 "씨"가 되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흥청거리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방탕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육신을 위해 계획하지 말라"(롬13:13-14)라는 말씀을 그의 마음에 받아 들였을 때 성령은 그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주고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켜 이제 더 이상 마귀의 자식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 일어서게 했다. 모든 복음 전도자와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 해야할 일은 자신을 성경과 가까이 하여 마음에 성경 말씀으로 충만하게 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성령의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이 공급해 준 도구를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사람에게 양심에 죄의 가책을 느끼게 하여 거듭나게 하는 것이 성경의 올바른 사용이다.

그러나 설교처럼 기도할 때에도 성령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기도는 미리 종이에 써서 준비하고 외우고 읽어야 옳은가?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에베소서 6:18절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위해 모든 인내와 간구로 깨어 있으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이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친히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이라.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시나니, 이는 그 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이라."(롬8:26-27)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인용하기 좋아하는 약속이 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무엇이든지 구할 것을 땅에서 동의하면(agree)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라."(마18:19) 이것은 일반적으로 두 사람이 서로 어떤 일을 위하여 기도하기로 동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서 "동의하다(agree)"라는 번역된 말씀은 "화음(Symphony)"에서 나온 헬라어 단어이다. 피아노의 건반을 모두 눌러된다면 결코 좋은 화음을 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기도에 있어서도 기도하는 사람들은 서로 일치해야 할뿐만 아니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성령의 생각"과 일치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 "동의"하여 같은 일에 대해 기도하며 그들이 성령에 의해 자극 받았다면, 그들의 기도는 응답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죄에 서로 합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베드로는 삽비라에게 "어찌하여 너희가 주의 영을 시험하려고 함께 동의(agree together)하였느냐?"(행5:9)고 물었다. 여기서 그들은 서로 "동의" 했지만 성령과는 "불일치"한 경우이다. 두 사람이 서로 일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제삼자 즉, 성령과도 일치해야 한다.

이 시대에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은 이미 상세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서 간단히 정리해 보자.

 

  3) 세상에서의 성령의 사역

세상에서의 성령의 사역은 요한복음 16장 8-11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 분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내 아버지께 가므로 너희가 나를 다시는 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기 때문이라} 세상에 대한 성령 의 사역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이 있다.

1. 세상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한다.

양심이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이방인에게 말한 로마서2:15절 인용한다. {그들의 양심이 증거하고, 그들의 이성이 송사하거나 서로 변명하여 그들의 마음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보여 주느니라}. 그러나 법적인 죄를 깨닫는 것과 영적인 죄를 깨닫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성령께서는 영적인 죄를 깨닫게 하는 반면 양심은 법적인 죄를 깨닫게 한다. 양심은 두려움과 후회를 일으킬 수도 있으나, 힘이 없기 때문에 나쁜 일을 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은 힘이 있고 소망을 간직하게 한다.

성령은 정죄하는 반면 양심은 고소하거나 변명을 하게 한다. 양심은 사람에게 범법에 대한 가책을 느끼게 하는데, 법은 도둑질하거나 탐내거나 간음하거나 죽이지 말라하기 때문이다. 훔치거나, 탐내거나, 간음하거나, 사람을 죽이면 양심은 그런 행위로 인한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깨닫게 하는 죄는 이런 것들이 아니고 불신이라는 특별한 죄이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죄, 즉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은 죄가 생겨나게 되었다.

오순절에 베드로가 청중들에게 지적한 죄는 무엇인가?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씀들을 들으라. 너희 자신도 아는 바와 같이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너희 가운데서 행하신 능력과 이적과 표적으로 너희에게 확증되신 분이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심을 따라 내어주신 그를 너희가 붙잡아 무법자들의 손을 빌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나}(행 2:22-23). 그때 그들의 죄는 불신 때문에 예수를 거절한 것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것이었다. 또한 사도행전 2장 37절에 그들이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씌어 있다. 무엇이 죄를 깨닫게 했는가? 성령은 베드로의 입을 빌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절한 죄, 즉 믿지 않는 무서운 죄를 깨닫게 하셨다.

이 시대에 성령이 지적하는 죄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죄인 것이다. 양심은 살인자, 도둑질, 간통죄 등과 같은 법적인 죄로 인간에게 가책을 느끼게 할 수도 있으나, 오직 성령만이 이 세상의 가장 무섭고 비난받는 믿지 않는 죄에 대해 지적할 수 있다.
 

2. 세상으로 하여금 "의(義)"를 깨닫게 한다.

의가 무엇인가? 이것은 올바르고 공평한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미하는 것은 세상의 의가 아니며 예수님의 의를 뜻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주장했다. 그분은 죄사함을 받으라고 외쳤고 그분 자신은 거룩하고 죄가 없다고 주장했으며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했다.

그분은 선동과 하나님을 모독한 죄목으로 십자가에 달렸으며 사람들은 고통 중에 죽어가는 그에게 도전적인 말를 퍼부었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42). 그분은 십자가에서 내려옴으로써 그분의 주장을 정당화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보통 인간처럼 죽었다. 그분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묻혔고, 그분은 무덤을 로마 군인 지키고 있었다. 자신이 하나님임을 주장했던 그분의 외침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분의 모든 주장들은 끝이 났는가? 그분이 무덤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있다고 가정해 보라. 그분은 그 이전의 많은 선지자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보증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무것도 없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너희의 믿음 또한 헛것이라"(고전15:;14). 만일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다시 살지 못하셨더라면 그것으로 그분의 의는 모두 헛것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살아날 것이라고 세 번씩이나 말했으며, 그 말을 들은 자들은 두려워하여 병사를 세워 사흘동안 무덤을 지키도록 하였다(마27:63-64).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이 사실은 그분의 말씀이 진리였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그분의 의가 성취된 것이다. 또한 그는 "거룩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롬 1:4).

구약 성경의 대표적인 기적은 홍해의 갈라짐이었고, 신약 성경의 대표되는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사실이다(엡 1:19-20). 빌립보서2:8-11절에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지극히 높여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과 "높임"은 그분의 의를 증명함에 논박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세상은 이 사실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것은 성령의 일이다. 그 일이란 오늘 시대에 성령께서 세상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을 말한다. 성령은 어떻게 그 일을 하시는가? 성령께서 오순절날 어떻게 하셨는가? 요한복음14:16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또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겠고, 그 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시리니 그가 너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시리라."

성부께서 예수의 요청에 동의한 것은 누가복음24:49에 명백히 나와 있다. 거기에는 그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노라. 그러나 높은 곳으로부터 능력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 도성에서 기다리라}(눅24:49). {그 후 오순절 날이 되자 그들이 다 하나가 되어 한 장소에 모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친 강풍 같은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우더라. 거기에 불같은 모양으로 갈라진 혀들이 나타나 그들 각 사람 위에 머물더니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즉,성령은 그들 가운데 내주심으로 그들은 "성령의 전"이 되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발설하게 하신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행 2:1-4). 이 소리가 나자 큰 무리가 모여들었다. 베드로가 그들 가운데 일어서서 그들이 못박아 죽인 예수님의 주장하신 것을 증거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높임을 받고, 또 아버지로부터 성령의 약속을 받아서 지금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고 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가 높임을 받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 "증거"란 바로 성령을 가르킨다. 만약에 한 친구가 당신에게 자신이 성지로 여행할 계획이고 자기가 그 곳에 도착하면 "무화과 한 상자"를 보내겠다고 말했다고 하자 비록 당신이 전보나 편지를 받지 못했어도 "무화과 상자"만 받았다면 그것은 그가 그의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충분한 증거인 것이다.

오순절 성령 즉, 약속된 선물을 받았다는 것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해 주었다. 즉, 예수님께서 셋째 하늘에 도착하셨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지상의 일들을 인정하셨다는 것과, 십자가의 희생을 열납하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의 의를 인정하셨기 때문에 그분을 높히셔 보좌 우편에 앉히신 사실이다.

베드로는 {너희가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살리셨느니라. 이 분을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높이셔서 왕과 구주가 되게 하셨으니, 이는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사함을 주시기 위함이라. 우리는 이런 일에 대한 그의 증인들이요, 또 하나님께서 그 분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5:30-32)고 증거하였다.

율법은 두 증인을 요구한다(신17:6).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관해서는 전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이 높임을 받은 사실은 증거할 수가 없었다. 이는 인간적인 이해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령은 천사장과 천사들 그리고 하늘의 장자들 눈앞에서 친히 예수님이 높히 되심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 본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주장한 것이 없었다면 아버지는 돌아온 그를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그를 높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높힘을 받은 사실을 밝히려고 성령을 이 땅에 보내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제 성령은 예수님의 의를 세상에 밝히는 유일한 존재이다.
 

3. 세상으로 하여금 '심판(Judgement)'을 깨닫게 한다.

많은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요16:8)는 내용을 "다가올 심판에 대해"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는 "다가올"이란 단어가 들어 있지 않다. 의와 절제와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는 펠리스 앞에 서 바울이 증거했다. 그 결과로 펠릭스는 두려워 했기는 했지만, 생활 태도는 바꾸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것은 성령의 깨우침이 아니라 양심의 가책에 그쳤다. 그리하여 그는 사도행전24:25절의 말씀대로 바울에게 자신에게서 떠나라고 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다가올 심판에 관하여 설명하자 펠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기를 "이제 그만 가라. 내가 틈이 나면 너를 부르리라"고 하더라}(행24:25).

이런 의미에서 성령이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심판은 미래의 심판이다. 그것은 의인과 악인의 심판이 아니라. "이 세상의 통치자"인 사탄에 대한 심판이다. 그리고 성경은 사탄에 대해 장차 올 심판이 아니라,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언제 사탄이 심판을 받았는가? 첫번째 장소는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선고하셨을 때이다.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의를 두리니, 그녀의 씨는 너의 머리를 부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부술 것이라."(창3:15) 두 번째는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았다. 사탄은 죽음의 창시자이다. 사탄의 시험을 이기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필요했고 죽음을 폐기하시기 위해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딤후1:10).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은 "그러나 이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그것이 드러났으니, 그는 죽음을 폐기하시고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불멸을 밝히셨느니라." 이 세상의 통치자는 심판을 받았고, 천년동안 끝없는 구렁에 갇히고(계20:1-3), 마침내 영원한 불못에 던져진다(계20:10). 사탄에게 내린 선고는 아직 집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탄은 자신이 권세를 뺏앗길 것이라는 사실을 세상이 알기를 원치 않는다.

이 시대의 셩령의 사역은, 사탄은 이미 심판을 받았고 또 그 능력을 상실하였으며 부활로 인하여 사망이 삼킨 바 되리는 것을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다. 만일 무덤이 예수님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면 그 무덤은 우리 역시 붙잡아 둘 수 없다.

그러나 이 시대의 성령이 관여 하시는 일이 더 있다. 그것은 사탄의 걸작품인 "죄의 사람"이 나타나는 것을 막는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제 너희는 무엇이 막고 있는지를 아나니 이는 그('죄의 사람'-적그리스도)살후2:3-가 자기 때에 나타나려는 것이라. 불법의 신비가 이미 활동하고 있나니 현재는 막는 자가 있어 막을 것이나 그가 그 길에서 옮겨질 때까지만 그리하리라. 그리고 나서 그 불법자(적그리스도)가 나타나리니 주께서 그를 자기 입에서 나오는 영으로 소멸하시고 그의 찬란한 오심으로 제거하시리라. 그 불법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역사에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이적과}(살후2:6-9)

위의 구절에서 "막는 자"가 누군지, 또는 무엇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것에 대해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을 너희가 이렇게 알지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모든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모든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그리스도의 영"이니라. 그가 오리라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지금 그것이 이미 세상에 있느니라}(요일4:2-3).

여기에 싸우는 두 영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이며, 다른 하나는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은 사탄이 그의 "불법자"인 적그리스도를 등장시키는 것을 막고 계신다.

이 시대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교회가 완성될 때까지 악이 충만해 지는 것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후 성령이 "떠나버린" 뒤에는 불법의 신비가 일어나는 것을 막는 힘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4. 휴거와 재림 사이(7년 대환난 동안)의 성령의 사역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이 오순절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탄생시키려고 오신 성령은 교회가 완성될 때 신부인 교회를 데리고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그 후 성령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거듭날 수 없으며 (요3:3;5:7),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라 부를 수 없으므로(고전12:3), 이 세상은 참으로 비참한 지경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소금"인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며 이 지상에서의 도적적 부패는 날로 심해져 주님의 재림전에는 절정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계시록7:9-17절에는 휴거와 재림 사이의 기간에 각 나라와 민족들과 백성과 언어들이 셀수 없는 많은 수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약 성령이 더 이상 지상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겠는가?

구약에서 성도들이 구원받았던 것처럼, 휴거와 재림 사이에는 믿음과 행위로 구원을 받을 것이며, 성령의 사역은 오직 개인적이다.
 

5.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부터 땅을 불로 소멸하기까지의 성령의 사역

이 기간을 보통 "천년왕국"이라고 부른다. 이때의 성령의 사역은 요엘서2:28-32절에 예언되어 있다.

{그 후에(이스라엘이 자신의 본토로 돌아온 후, 천년왕국이전)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 위에 부으리라. 그러면 너희(이스라엘) 아들들과 너희 딸들이 예언할 것이요, 너희 노인들은 꿈들을 꿀 것이며, 너희 청년들은 환상을 보리라. 또 그 날들에는 내가 남종들과 여종들 위에도 내 영을 부어 주리라. 내가 하늘들과 땅에 이적들을 보이리니, 피와 불과 연기 기둥들이라. 위대하고 무서운 주의 날이 오기 전에 해가 흑암으로, 달이 피로 변하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해냄을 받으리니, 이는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구해냄이 있을 것이요, 남은 자를 주께서 부르시리라}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이 오순절에 이미 모두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일부분만이 성취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장차 있을 성령에 대한 "첫 열매"일 뿐이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요엘 예언 중 마지막 몇 구절만을 인용했을 뿐, 성령의 부으심에 따른 자연현상은 오순절날에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늘에서나 땅에서 피와 불과 연기 기둥과 같은 이적들은 없었다. 해는 어두워 지지 않았고 달은 핏빛으로 변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것들은 7년 환난 기간동안 즉, 천년왕국 바로 직전에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이는 천년왕국 기간에 대한 예언임이 분명하다.

이런 "성령 침례"가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일어나지 않고 이방인들에게도 부어질 것 것이다. 왜냐면 그 날에는 한 왕(주 예수 그리스도)이 의로 통치하실 것이며 의의 행위는 화평이 될것이다(사32:17-18). 그리고 말들의 방울들 위에 "주께 거룩함"이라 기록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은 사탄이 끝없이 깊은 구렁에 갇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또한 성령은 의심할 것 없이 그 날의 의(義)와 크게 관계가 있을 것이다.

 

 

 

9. 유대인들

  1) 유대인들에 관하여

세계의 모든 문명과 나라들 중에서 온갖 정치 체제하에서도 4000년 이상이나 자신들의 율법과 전통과 관습을 지켜온 특이한 민족이 있다. 이들은 바로 유대인이다. 유대인의 역사는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이야기 같고 인류 역사에서는 일직이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 비록 그들은 억압받고 짓밟히며 다른 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가서 각국에 흩어졌지만 신화 속의 불사조처럼 흩어진 잿더미 가운데서 일어나 지금은 다시 역사의 장을 장식하고 있다.

우선 그들의 과거 역사는 주목할 만하다. 확실히 믿을 만한 역사의 자료로 아무리 찾아 봐도 이 민족의 역사적 자취를 따라올 나라는 없다. 유대 민족에 비하면 오늘의 세계를 이끌어 가는 국가들은 역사가 너무나 짧다.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웠던 "황금 시대"는 그리스나 로마의 전성 시대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철학을 가르치거나 헤로도투스가 역사를 쓰기 훨씬 이전, 호머의 일리아드에 전통과 연대기가 겨우 기록되던 희미한 시대, 즉 다른 모든 믿을 만한 상세한 기록들이 있기 이전에 이스라엘은 잘 정비된 문명화되고 잘 체계화된 한 국가였던 것이다.

성경을 보면 그들은 다른 나라들이 문자를 지니기도 전에, 오늘의 어떤 민족의 문화보다도 더 널리 보급된 문화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앗시리아는 멸망하고 바빌론은 무너졌으며 로마는 기울어져 패망하고 이집트는 "가난한" 국가가 되었으나 파괴의 잿더미에서 영향을 받지 않고, 그들을 짓밟은 다른 모든 정복자들보다 오래 지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세기 동안 모든 나라에 흩어져 국가의 중심지, 정부, 국가, 그리고 종교적이든 비종교적이든 집회의 장소 조차 없었으나 그들은 결코 다른 나라에 흡수되지 않았으며 다른 민족과 동일시되거나 다른 민족의 독특한 속성에 빠져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어떤 나라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그렇게 뚜렷하고 명백한 증거를 지닌 나라는 없었다. 그들을 위해 홍해의 물은 뒤로 물러가고 요단강이 갈라졌다. 그들은 기적적으로 광야에서 삶을 유지했으며 하나님의 도움으로 적군으로부터 보호받았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 받았다. 숫양의 뿔나팔을 불어 포위한 도시의 성벽을 무너뜨려으며, 태양과 달은 그들의 적을 물리치는 시간을 주기 위해 정지했다(수10:13). 하늘의 천사는 그들의 주변에서 보호하였으며 한 천사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185,000명의 앗시리아 군을 죽였다.

어떤 나라도 그렇게 많은 위인을 세상에 배출한 나라는 없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강한 사람, 모세와 같이 훌륭한 지도자이며 입법자, 이집트의 요셉이나 바빌론의 다니엘 같은 정치가, 다윗 같은 왕, 솔로몬 같은 지혜로운 자 등등, 어떤 나라에서도 히브리 예언자인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와 이 모든 사람들 훨씬 뛰어난

"갈릴리 사람"

즉 예수님 같은 분은 일찍이 나온 적이 없었다. 1세기에는 사도 바울의 이름만큼 눈부시게 빛난 이름이 없다. 또 역사에서 주체가 되어 이끌어 가는 것은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이 보존되어 왔다는 것은

"역사의 기적"이다.

프레드릭 대왕은 "성경의 영감에 대해 한 마디로 증명해 보라"고 왕궁의 목사에게 말하자 그는 한마디로 "폐하, '유대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유대인은

"타고 있으나 소멸하지 않는 가시덤불"

로 상징 될 수 있다.

우리는 이 유대인들이 보존되어 온 놀랄 만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나님의 그들에게 중요한 몇 가지 사명을 맡기고, 그 일을 수행하도록 시켰다고 가정한다면 이것을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몇몇 개인들을 세우셔서 특별한 사명을 맡기신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한 민족을 세우신 것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는가?

첫 번째로 우리는 유대인을 세우신 목적은 하나님이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가르치기 위한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 시대에 다른 모든 민족들은 우상 숭배, 자연 숭배와 다신교에 빠져 있었다. 2000년간(B.C.1921-A.D.30) 유대인을 제외한 어떤 민족도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믿고 이것을 가르친 적은 없다. 유대인은 다른 나라에 대해 "유일신교(Monotheism)"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유대인들의 영향을 받지 않은 나라들은 여전히 유일신교가 되지 않았다.

두 번째로 유대인은 성경을 기록하고, 보존하고, 전하도록 세워진 민족이다. 즉 말씀을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다(롬2:1-2).

모든 성경은 유대인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보존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고 또한 소중히 지켜 왔다. 만약 그들이 아니었다면 오래 전에 성경은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세 번째로 유대인은 이 세상을 구할 구주를 보내기 위해 세우셨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유대인이다. 성경에는 그분의 족보가 아담부터 베들레헴에 출생하시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네 번째로 도적적인 타락에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유대 민족을 세우셨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라"

(요4:22)라고 하신 것은 유대인을 통해 세상의 구주인 그리스도가 온다는 단순한 의미인가? 그렇다면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

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유대 민족이 세상의

도덕적인 부패

를 막는 도구가 되어야 하며, 만일 민족들 가운데 유대인들이 사라진다면 또한 마치 노아가 그의 가족들이 방주 안에 있을 때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멸하신 것처럼, 또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피한 후에 하나님이 그 광야의 도시들을 멸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지상에서 멸하실 것이 아닌가?

베드로가 초대 교회 회의에서 말한 내용(행15:13-18)과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서신(롬11:1-5,11,12,15,17,23-27)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후자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각 민족들의 구원과 지구상의 어느 민족의 존재 유무는 도덕적이든 육체적이든 간에

한 민족으로써 유대 민족의 보호와 존속됨

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제 유대 민족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2) 유대인들의 과거

역사 초기인 B.C. 1936년, 대홍수 있은 후 412년이 지났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서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한 새로운 민족이 아비가 되게 했다.

{그때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고향과 네 친족과 네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며 네게 복을 주고 네 이름을 위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되리라. 너를 축복하는 자들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리라. 네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

이것은 조건적인 약속이 아니며 성경의 어느 곳에도 이 말을 번복하는 구절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아브라함은 60세에 부르심을 받았으나, 이교도이며 우상 숭배자였던 그의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15년 동안 하란에 머물렀다. 그 후에야 그는 "약속의 땅"으로 떠나간 것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십여 차례 나타났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현현(Theophanies)"이라고 한다.

갈데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발전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땅"에 관한 것이었고 그의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것이었다(창12:1-2). 세켐에서는 "내가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창12:7)고 하신 약속이 있었으며, 벧엘에서는 모든 땅을 "네 씨"에게 주고 "티끌 같게 하리라"는 것이었다(창13:15-16). 마므레에서는 그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들"처럼 많아지고 그 "땅"은 "이집트 강"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까지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창15:15,18). 그리고 모리아에서도 그의 자손에 관한 약속을 재확인하셨다(창22:16,17).

이 약속은 그의 아들인 이삭(창26:1-4)과 그의 손자 야곱(창28:10-15)에게까지 조건없이 확고히 하셨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약 70명에까지 이르렀을 때 그의 자손들이 이방 나라에서 타국인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집트에서 그 후손들은 400년 동안 괴로움을 당하였다(창15:13-14).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과 혼인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이 단일 민족으로 번성할 시간을 주시기 위해, 그들을 카나안을 떠나도록 길을 마련하셨다. 먼저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시어 땅에서 기근이 시작되었을 때 유대 민족들의 위한 양식을 준비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들은 그곳 고센 땅에서 구분되어 살게 하셨다.

그들의 역사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사건은 이집트를 탈출한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실 때가 되자 노예 생활의 어려움을 더욱 더하여 그들을 이집트를 떠나고 싶도록 하셨으며, 결국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모세를 보내어 구원하도록 하셨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나온 후 일년이 안되어 율법이 주어졌고, 성막이 지어졌으며, 희생 제물을 드리는 제사 의식이 시작되었고, "유대 국가"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 해가 다 지나갈 무렵 카데스 바데아에 도착하자 그들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더 행군해 나아가길 거절했다. 이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토록 하셨다. 그들은 그곳에서 기적적으로 생활을 영위했으며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되었다.

40년의 광야 생활이 끝났을 때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 차지하였다.

이것으로 그들은 역사의 세 번째 시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를 "재판관 시대"라고 한다. 이 재판관 시대는 450년간 지속되었다. 이런 형태의 국가는 신정 통치로서 이후로 장로들과 재판관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그러나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왕의 통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선지자 사무엘을 찾아가 다른 민족들처럼 보이는 왕을 달라고 요구했다. 사무엘은 이들의 요구를 기뻐하자 않았으나, 이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주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백성이 네게 말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들의 음성을 들으라. 그들이 너를 거역함이 아니요, 나를 거역하여 나로 그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삼상8:7).

사무엘은 백성들이 택하는 그 왕이 자신들에게 행할 것들에 관하여 엄중하게 경고했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였으며, 결국 사울이 왕위에 올랐다. 이스라엘 역사의 네 번째 시기의 시작이었다. 사울은 40년간 통치하였고 그 뒤를 다윗이 계승하였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으로서 그 또한 40년간 통치하였으며 다음 40년은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솔로몬의 통치 시대는 최초의 성전이 건축되었으며, 그의 정치는 가장 영광스러웠으나, 많은 첩들과 후궁들을 거느리고 또한 이방 신들을 따라가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의 잘못된 통치로 인하여 유대 왕국은 쇠퇴되기 시작했다.

솔로몬이 죽은 후 B.C. 975년에 왕국이 분열되었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를 거느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차지했다. 그리고 대적자로 나선 여로보암은 남은 열 지파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고 사마리아에 수도를 세웠다. 이스라엘이라고 불린 이 북왕국은 급속히 세력이 기울어 이들 왕국의 열 지파는 B.C. 721년에 앗시리아에 포로가 되었으며 남쪽 유다 왕국은 100년 정도 더 지속되다가 B.C. 597년에 이르러 느브캇네살 왕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되었다. 이것으로 계속적인 위대한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어 왔던 지파간의 싸움은 끝이 나게 되었다.

유다가 포로로 잡혀가고 예루살렘이 멸망함으로써 성경에 예언되 있는 "이방인들의 때"가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이방인들의 때"

에 관해서는 다니엘서에서 전체적인 윤곽을 묘사하고 있다.

유대 역사의 다섯 번째 시기는 예레미야25:11절에 예언된 대로 70년간의 포로 시대가 끝난 B.C. 536년부터 시작되었다. 약 4만명의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수도와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성전은 그 후 20년 지난 후에야 비로소 완성이 되어 바쳐졌다. 외곽 성벽은 70년이 더 지난 B.C.445년이 되어서야 완성되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도록 허락 받았지 자신들의 주권 행사는 여전히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유대 당에 대한 자치 제도는 인정되었지만, 그 땅을 점령한 정복자들의 허락이 있어야만 했다.

B.C. 168년에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Antiochus E Piphanes)는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팔레스타인을 빼앗고 두 차례나 예루살렘을 휩쓸었다. 그는 성전을 황폐하게 만들고 제사를 못하게 하고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이러한 악행으로 인하여 마침내 마카비(Macabees)형제의 지휘하에 폭동이 일어나기까지 이르렀다. 이들의 반란은 B.C.166년에서 B.C.40년까지 계속되었다.

B.C. 63년에 유다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 후 60년 동안 로마 제국은 성지 박해를 한 층 더하였다. 이즈음 약 B.C.5년에 예언자들은 다니엘이 예언한 구주의 오실 때가 가까웠음을 알고(단9:25),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성전을 자주 찾아갔다(눅2:25,26).

그 해 9월경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 탄생하시어 목자들이 그를 방문했으며 시몬과 안나에 의해 수 주일이 지난 후에 성전에 알려졌다. 또한 동쪽에서 온 현자들이 경배하기 위해 찾아왔다. 예수님께서는 이집트로 피해 유년, 청년 시절을 보내신 후, 나사렛을 돌아오셨다. 30세에 요단강으로 오셔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시작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분 자신이 메시아라는 가르침을 거절했으며 "영광의 주님"을 이방인들과 합하여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 뒤 A.D. 70년에 로마군이 쳐들어와 예루살렘과 성전을 로마의 타이터스 장군이 파괴했으며 유대인들은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다.

 

  3) 유대인들의 현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더불어 유대 민족의 슬픈 역사는 시작되었다. {모든 백성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마27:25)고 했던 그들의 외침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

A.D.50년 예루살렘은 로마군의 침입으로 3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학살되었고, 그들의 최악의 고난은 유대의 로마 총독인 게시우스 플로러스에 의해 A.D.66년에 시작되었다. 그의 폭정은 각처에서 항거하는 시위를 유발시켰다. 더욱이 폭군 네로는 6만명의 병사를 보내 베스파시안으로 하여금 그의 아들인 타이투스와 함께 예루살렘을 치도록 명령하였다. 그는 갈릴리 북쪽에서 아스모니아인의 유명한 장군이자 역사가인 요세푸스와 접전하게 되었다.

요세푸스는 요타파타에 진을 치고 항거했으나 힘이 부족하여 결국은 40,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고 패하였다. 곧이어 갈릴리는 정복되었고 수천명이 전쟁으로 인하여 죽었다. 그러나 유대와 예루살렘의 함락은 베스파시안이 네로의 죽음을 듣고 철수하는 바람에 일단은 유보가 되었다. 그러나 그후 베스파시안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들인 타이투스를 시켜 성지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도록 했다.

A.D.70년 4월, 10만을 헤아리는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해 왔고 예루살렘은 그 진격을 당해내기에는 너무도 허술했다. 더욱이 성안은 서로 경쟁하는 파벌들 사이에 통수권을 놓은 갈등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로마군의 포위는 4개월이나 계속되었고 성안에는 기근이 돌아 자기 자식을 먹는 참혹한 일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포위된 상황이 더 걷잡을 수 없이 비참해지자 타이투스는 이 상황에 대한 자신의 책임 없음을 하나님 앞에 변명하였다.

예루살렘성은 세겹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90개의 탑으로 방어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A.D.70년 8월 5일, 아토니아 성탑이 점령되었고 로마군들은 성벽으로 몰려들어갔다. 타이투스는 세계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훌륭한 유대 성전의 건물들은 훼손시키지 말라고 명했지만, 병사들에 의해 헤롯 성전은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고 결국은 모두 무너져 허탈하게도 돌무덤만 남기고 말았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전쟁으로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고, 9만 7천명 정도가 살아서 포로가 되었으며, 그 중 건장한 청년들은 로마로 끌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다니엘이 예언한 바가 이루어진 것이다. {또 장차 올 통치자의 백성이 성읍과 성소를 파괴하리니 그 종국은 홍수를 (뒤덮인 것) 같을 것이요 전쟁의 종국에는 황폐함이 결정되느니라}(단9:26).

예루살렘이 타이투스에 의해 멸망되었고 유대인들은 각처로 흩어졌지만 그것이 유대 역사의 끝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65년 후인 A.D.135년, 유대인들은 로마 권력에 대항할 수 있을 만큼 세력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는 3년 반이나 계속되었던 전쟁을 일으켜서 유대인들을 완전히 이산시켜 놓았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휩쓸어 58만명을 죽이고 시온을 마치 쟁기질하듯 파헤쳐 놓음으로 미가서 3:2의 예언을 성취시켰다. 그 후 팔레스타인에는 유대인들이 거의 살지 않게 되었다.

A.D. 362년 배교자 줄리안(Julian)황제는 예루살렘을 재건하여 주의 예언이 거짓임을 보이려고 시도했지만 폐허에서 불이 일어나 그의 군사들을 쫏아내었다.

A.D. 140년 하드리안 황제 시대부터 콘스탄틴 황제까지 유대인들은 추방된 로마 제국 전역에서 상당히 번성하였다. 심지어 그들은 초대 교회 시대의 이교도 박해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콘스탄틴 황제가 A.D. 312년에 기독교로 개종하자 사태는 완전히 달라졌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비난과 박해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던 제국의 호의와 특권을 빼앗기고 가는 곳마다 배척 당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종교를 가질 자유를 누리고 시민으로서 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암흑 시대는 "성전(聖戰)"이라는 "제1차 십자군 전쟁 때인 A.D. 1096년에 이르기까지 더욱 심화되었다. 그들에게 죽음이 장막이 드리워졌으며 이것은 종교 개혁이 지나서야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

영국의 박해

A.D. 1020년 캐뉴트(Canute)왕은 모든 유대인들 영국에서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A.D. 1096년에는 런던의 크라플 케이트 지역만이 유대인에게 묘지로 허락되었다. A.D. 1096년 유럽에서는 침례를 거부하는 모든 유대인들을 학살할 목적으로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다. 헨리 2세는 십자군 전쟁 중에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6만 파운드를 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A.D. 1189년 리차드1세가 즉위하였을 때 유대인들에 대한 살인적인 반란이 일어나 런던에 살던 유대인 가구는 한 집도 남김없이 강탈당하고 살해당했다.

그 다음해 "요크성의 비극"이 발생했는데, 요크성에 랍비를 비롯한 500명의 신도들은 감금되어 살아날 길을 전혀 찾지 못하자 서로 죽이기에 이르렀으며 랍비의 우두머리가 불을 질러 성은 화염에 휩싸였다.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이 성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는 감금되어 있던 유대인들은 모두 한 무더기가 되어 제단에 바쳐진 제물처럼 발견되었다.

A.D.1272년 에드워드1세 때까지 왕들은 스폰지에서 물을 짜내듯 그들을 억압하여 돈을 모으도록 허락하였다. 에드워드1세는 16,500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영국에서 쫓아내었다. 그후 4세기 동안 영국 땅에는 유대인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프랑스의 저주

A.D 1306년 예루살렘 멸망을 기념하여 금식하는 그 날 이른 아침에 프랑스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을 남녀노소 상관없이 십만 명이나 왕실에 그들의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국외로 추방되었다. 10년이 지나면 돌아와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졌으나 광분한 양치기들과 강도들에 의해 그들을 수천 명이나 살해되었다. A.D 1883년에 또 다시 유대인에게 프랑스 식민지에서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며 A.D 1723년에 비로서 루이14세가 유대인들에게 프랑스에서 주택을 소유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것으로 박해의 물결이 그 방향을 달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피로 물든 독일의 손

1348년에 1350년 사이에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어 전 인구의 ¼의 생명을 잃었으나, 유대인들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왜냐면 그들은 생활이 깨끗하고 레위기에서 요구하는 위생적인 생활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으로 인하여 그들만이 흑사병에 제외되었다는 것 때문에 병의 발생에 대한 의심을 받게 되고 급기야 우물이나 샘에 독약을 풀었다는 죄목을 받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독약 제조, 운반, 용기의 색, 취급자 명단을 발표하여 시민에 알려지게 하였다. 그 결과로 그들은 끊는 냄비와 활활 타오르는 불에 손을 넣는 고문을 당했으며, 전 독일을 휩쓸고 다니면서 유대인을 멸종시켜야 한다며 설교하는 광신자들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스트라스버그에서는 그 마을 전체 인구를 차지하는 2천명의 유대인들 모두가 화형대로 끌려가 불살라졌다. 그들은 카톨릭 자녀들을 유괴하여 유월절을 양 대신 사용했다는 혐의와 신성한 성찬식의 빵을 훔쳐 칼로 잘랐다는 혐의였다. 1560년 프라하(체코의 수도)로부터 추방령이 내려졌고 이후 콘스탄티노풀에서는 유대인 구역에 살던 3천여 가구가 불타고 5천만 크라운(영국의 화폐단위)에 해당하는 재산이 몰수되었다.

스페인의 대학살 (Holocausts)

스페인에서는

"종교 재판소"

라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기구가 있었다. 이것은 그들을 위협하고 신앙을 버리고 배교한 유대인으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땅이 갈라져 그들을 삼키듯이 백명의 남녀가 사라졌다. 결코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있었으며, 어떤 이들은 차갑고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 오랫동안 감금되어 창백하고 마른 반미치광이가 되어 돌아오곤 하였다. 가끔 화형장에 이르는 거리로 굽이치는 행렬이 보였고, 재로 변할 제물들은 불 속에 던져지는 순간까지 명령이 철회되기를 바라면서 고문을 당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단 심문소에 끌려나와 통로를 지나

"철 처녀(Iron Maiden)"

의 방이라고 하는 곳에 이른다. 이 곳에는 속이 텅 빈 쇠로 만들어진 여인상인 철 처녀는 스프링을 건드리면 문이 열리고 수많은 제물의 피로 녹슨 쇠못이 박힌 내부 표면을 드러낸다. 사형수가 발을 놓기가 무섭게 못은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함께 몸 속에 파고들어 신체를 갈기갈기 찢어 놓고 희생물의 피가 뿌려지고 곧 아래에 놓인 불타는 화로 속에 던져졌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1492년 페르나드 왕과 이사벨라 왕비는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유대인은 그 칙령을 면해 보려고 60만 크라운을 바쳤다. 왕과 왕비는 망설이며 그 돈을 받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그 때 스페인 종교 재판장 톨쥐마다가 겸연쩍은 그 왕 앞에 서서 십자가에 못박히 예수상을 쳐들고 외쳤다.

"가롯 유다에게 은 삼십에 팔린 이 사람을 보십시요. 이제 왕께서는 그를 더 비싼 값에 하나님 앞에서 이익을 얻으려 하십니까?"

그 왕은 완고한 도미니카 수도사 앞에서 몸을 떨고 유대인들을 내보내야만 했다. 그들에게는 준비 기간으로 4개월이 주어졌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아무데도 정착할 만큼 호의적인 곳이 없었다. 일부는 아프리카 노예로 팔려 갔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그들이 당한 고통은 말로 이루 표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2백년이 지난 1680년에도 스페인의 유대인 확대는 여전했다.

끔찍한 악몽처럼 몇 세기 동안 무시무시한 형벌과 박해의 역사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일어났다.

하지만 이러한 박해의 기나긴 밤도 마침내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영국이

"1753년 귀화령"

을 통과 시켰을 때 박해의 물결이 물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776년 독립 선언"

이 서명되자 찬란한 자유의 아침이 찾아오게 된 것이다. 다만 러시아의 유대인을 제외하고 모든 나라에서 오늘날까지(1920년) 비교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박해의 긴긴 시간 동안에도 유대인이 그 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는 기적 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라는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수많은 고통에 대한 그들의 인내의 비결은 다음의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1. 그들의 율법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했고 감정을 제어하여 안정시켰으며, 유대인들의 충동적인 성격을 제어시켰고 후손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2. 그들의 민족적인 소망이다.

밝게 빛나는 소망은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그들로 하여금 꿈을 가지고 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아가 오리라"

는 소망이었다. 메시아가 오리라는 이 소망은 이스라엘의 기나긴 밤 동안 샛별처럼 더욱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소망은

"의의 태양"

이 떠올라 어둠을 몰아내는 여명의 그 날로 그들의 생각을 이끌어 갔으며 깊은 강을 채우는 물처럼 정의와 평화가 충만한 밝은 천년 왕국을 이 땅에서 꿈꾸었다.

오늘날 유대인에게는 광야에서처럼 낮의 구름 기둥도 밤의 불기둥도 없다. 그들은 옛날처럼 제사장도, 제물도, 제단도 없다. 그들은 아직도 유월절을 지키지만 유월절 어린양을 잡지는 않는다. 모든 제물과 제사는 중지되었다. 그들에게는 왕도, 재판관도, 선지자도, 영감을 받은 기록자들도 없다. 우림과 툼밈(제사장의 가슴에 차던 물건 출28:30)은 아무런 계시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존귀하지만 아무런 밝은 소망도 없다. 그들이 지금까지도 기다리고 있는 마지막 선지자, 즉 메시아는 바로 그들이 배척하고 죽인 "갈릴리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아직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요셉을 은 이십 냥에 팔아 버린 후 이집트의 왕좌에 앉아 있는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던 그들의 선조처럼 그들은 예수를 잡아 은 삼십에 팔아 버렸고 그 예수는 지금 하늘의 왕좌에 앉아 계시지만 그들은 눈이 가려져 알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그들이 처한 상황은 호세아 3:4의 예언, 즉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많은 날들 동안 왕도 없고, 통치자도 없고, 희생제도 없고, 형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트라빔도 없이 거하다가}

는 것이 성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한다. 예루살렘은 반드시

{또 그들은 칼날에 쓰러질 것이며, 모든 민족들에게 사로잡혀 갈 것이요, 또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때가 찰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눅21:24)고 하지 않았던가?

바울은 이것에 대하여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는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11:25-26)

우리는 아직 유대인이 이방 국가나 교회의 자리에 대신 차지하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다시 이 땅 위에 국가들 중에 높임을 받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들이 여태껏 보존되어 온 것이다.

로마서 11장에서 다음과 같이 반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라고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느니라}(2절) 11절에서 바울은 두 번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들이 실족함으로 넘어졌느냐?}, 즉 그들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넘어졌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그들의 실족함으로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이르렀으니 이는 그들을 시기 나게 하였느니라}(롬11:11) 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유대인이 실족하여 넘어짐으로 이방인이 구원받을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방인의 구원이 유대인을 시기 나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버리셨다면 왜 그들이 시기하기를 원하시겠는가?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들의 실족함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그들의 쇠퇴가 이방인들의 부요함이 되었다면, (즉 만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주어져 그들에게 그러한 축복되었다면)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은 어떠하겠느냐?}(롬11:12).

즉 유대인이 하나님께로 회개할 때 그것은 개인이 아니라 "민족적 부활"이 될 것이다. 바로 다음 사도 바울은 이같이 말한다.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해가 된다면 그들을 받아들임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는 생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즉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이것은 개인이 아닌

"민족적인 부활"

로 "부활"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두 올리브 나무"

에 대한 이야기로 바꾼다.(롬11:17-27).

하나는 "참올리브나무"라 부르고 다른 하나는 "돌 올리브나무"라고 부른다. 참 올리브나무 중 일부 가지만 꺽여진 것이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살던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칠 천명이 있었던 것처럼 "은혜의 선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기 때문이다.(5절) 그리고 우리는 참 올리브나무의 좋은 가지가 몇은 잘려 나갔지만 뿌리와 줄기는 아직 살아 있어 거기에 돌 올리브나무가 접붙여져서 참올리브나무의 한 뿌리와 가지가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우리는 참 올리브나무는 뿌리까지 뽑혀 죽은 것이 아니라는 점과 잘려 나간 그 곳에 돌 올리브나무가 접붙임을 당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결국 원 뿌리가 살아 참올리브나무와 돌올리브나무 모두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이방인들을 일깨워 주기 위해 설명했다. 로마에 있는 이방인 신자들은 자신들이 유대인들을 대신한다고 기독교가 유대교를 차지했다는 것을 자랑삼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가 유대교를 차지하고 성경의 유대인들을 향한 모든 약속들이 교회가 차지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 가지들에게 자랑하지 말라. 네가 자랑하여도 네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지탱하는 것이니라.}(롬11:18)

그리고 바울은 그들에게 가지가 잘려진 것은 접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지 않은 것 때문이며 유대인의 불신앙이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유익이 되었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또한 잘려 나간 참올리브나무의 가지들이 회심하여 돌이킨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것이다(롬11:17-26).

우리는 여기서 유대인이 회개하고 불신앙에서 돌이킨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그들의 본토로 회복하실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4) 유대인들의 미래

만약 누가 유대 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의 미래에 대해 토론하라 한다면 우리는 먼저 그러한 시도를 포기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상치 못하는 사태로 인하여 틀려 버릴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상상에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에게는 "성경"에서 기록된 특이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성경은 유대인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에 관해서도 예언하고 있기 그에 관한 모습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회복

1. 이 사실에 관하여

{그러므로, 오 내 종 야곱아, 너는 두려워 말라. 주가 말하노라. 오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 . . 이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할 것이요 내가 너를 흩어 버렸던 모든 민족들의 결말은 있게 할지라도, 내가 너의 결말은 있게 하지 않겠노라. 그러나 내가 너를 공의로 바로잡으리니, 처벌하지 않은 채 그대로 두지는 아니하리라.}(렘30:10-11)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사로잡힌 자를 다시 데려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들을 세워 그 곳에 거주할 것이요, 또 그들이 포도원들을 경작하며 그 포도주를 마시겠고, 그들은 또한 정원들을 만들어 그 열매들을 먹으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다 심으리니, 그들이 다시는 내가 그들에게 주었던 그들의 땅에서 뽑히지 아니하리라. 주 너의 하나님이 말하노라}(암9:14-15).

그러나 위의 말씀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 이미 성취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면 유대인들은 그 이후 다시 그들의 땅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약속은 그들이 다시는 그들의 땅에서 끌려 나오지 않으리라는 말씀은 분명히 미래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것은 처음 회복이지만 성경은 두 번째 회복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 날"(천년왕국의 날)은 주께서 다시 "두 번째"로 손을 펴사 남아 있는 그의 백성의 남은 자들을 회복시켜 앗시리아와 이집트와 파드로스와 쿠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의 섬들로부터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사11:11).

유대인은 결코 한번 밖에 회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빌론에서였다. 이집트에서 카나안으로 간 이집트를 탈출한 것은 회복이 아니었다. 만약 전에 소유한 적이 없었다면 회복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팔레스타인인 여호수아가 정복하기 이전에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손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다시 유대인들은 "바빌론 포로"부터 돌아왔던 때의 "동쪽"이 아닌 "모든 나라들"로부터 "북쪽"에서 되돌아 올 것이다

{주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그 날들이 오나니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한 주의 살아 계심으로는 더이상 말하지 않고 그대신 북쪽 땅과 그들을 쫓아내었던 모든 땅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자손을 인도한 주께서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었던 그들의 땅으로 그들을 다시 데려오리라.}(렘16:14-15)

그리고 그들은 결코 다시는 흩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내가 그들을 좋게 하기 위하여 그들 위에 내 눈을 둘 것이며 내가 그들을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리라. 또 내가 그들을 세우고 넘어뜨리지 아니하며 그들을 심고 뽑아내지 아니하리라}(렘24:6).

이 사실은 예레미야31:35-36절에서 더욱 확실히 말해주고 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주가 해를 낮의 빛으로 주고 달과 별의 법칙들을 밤의 빛으로 주었으며 파도가 소리칠 때 그 바다를 나누었도다. 만군의 주가 그의 이름이라. 만일 그러한 법칙들이 내 앞을 떠난다면 그때는 이스라엘의 자손도 내 앞에서 영원히 나라가 되는데서 끊어지리라}(렘31:35,36).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 자신의 땅으로 다시 회복될 때 모든 "열두 지파"가 돌아올 것이다. 로마서 11:26에 바울이 말하기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하였으며, 에스겔은 그의

"마른 뼈들의 계곡"

의 환상에서 그 뼈들이 "모든 이스라엘의 집"을 예표한다고 들었다(겔37:11).

여기서 의미하는 바를 천년 왕국이 시작하기 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들을 부활시켜 그들을 팔레스타인의 땅에 다시 두신다고 가르치는 몇몇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에스겔 37:12을 근거로 하고 있다.

{보라, 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들을 열어서 너희로 너희의 무덤들로부터 나오게 하여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오리라.}(겔37:12).

그런데 그러한 해석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사실이 될 수 없다. 첫째로, 팔레스타인 땅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수용할 만큼 넓지 않고, 둘째, 이것은 죽은 몸들의 육체적인 부활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민족적 부활"을 묘사했다. 11절에서 "뼈들"의 부르짖음은

{우리의 뼈들은 말랐고 우리의 소망은 사라졌으며 우리의 부분은 완전히 끊어졌도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죽은 이스라엘의 개인적인 부르짓음이 아니라 그의 땅에서 "끊어져" 죽은 민족의 부르짓음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그리고 민족적으로 죽은 백성의 울부짓음이다.

"무덤들"이라는 단어에 있어서 우리는 "문자적인 무덤들"로 이해해서는 안되는데, 이는 뼈들이 무덤들 안에 있지 않고 골짜기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즉 "민족들의 묘지에" 포로의 상태로 묻혀있는 이스라엘을 다시 데려와 그들을 다시 그들 자신의 땅에 둘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 아래 구절로 인해 확실해 진다.

{내가 "민족들 가운데" 있는 너희 무덤들을 열어서 너희로 너희의 무덤들로(민족들 가운데서 불러내어) 부터 나오게 하여 너희를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오리라}(겔37:12).

여기에서 이스라엘 땅 안에 있는 어떤 무덤의 열림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았음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스라엘의 죽은 자들의 일반적인 부활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다른 나라에 살던 이스라엘인들만을 말한다.

그리고 다음 두 구절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는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의 무덤들을 열어서 너희의 무덤들로부터 너희를 나오게 할 때 (즉, 그들 자신의 땅으로 돌아왔을 때), 이것은 너희는 내가 주인줄 알지니, 내 영(성령)을 너희 안에 두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민족적으로) 살리라. 또 내가 너희를 너희의 본토에 두리니 (겔48:1-29절에 지파들의 땅이 묘사되있다.) 그 때에 너희는 나 주가 그것을 말하였고 수행한 줄 알리라. 주가 말하노라.'}(겔37:13,14).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들 자신의 땅에 다시 모여진 후 그곳에서 그들이 먼저 심판을 받고(겔20:34-38, 22:19-22) 그 다음에 회심할 것이다(겔36:24-27).

만일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으로서 다니엘이 언급한 부활을(단12:2) 듣고자 한다면, 천년 왕국 전에 다니엘의 "백성", 즉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육체적 부활이 없다는 것이 더욱 확실해 지는데 이는 단지 얼마 만이 그 때에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그가 분명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모든 열두 지파의

민족적 회복

을 의미함은 "마른 뼈들의 계곡"의 환상에서 명백해 진다(겔37:15-28).

선지자는 막대기를 가져다가 그 위에 쓰라고 하는 말을 듣는다.

{유다와 그의 동반자 이스라엘의 자손을 위하여}

이것은 두 지파, 즉 "유다"로 알려진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의미한다.

그 다음에 그는 또 다른 막대기를 가져다가 그 위에 쓰라는 말을 듣는다.

{요셉, 즉 에브라임의 막대기와 그의 동반자 이스라엘의 온 집을 위하여}

요셉의 아들은 열두 지파 가운데서 요셉을 대표했으며 여로보암의 반란 이후 열 지파는 이따금 그의 이름(에브라임)으로 불렸다(사7:17).

에스겔이 일을 마쳤을 때, 그는 두 막대기를 함께 맞추어서 끝과 끝이 맞도록 하여 한 막대기가 되게 하라고 듣는다. 그가 이 일을 하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백성의 자손들이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당신은 이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에게 보여 주지 아니하겠나이까?"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에프라임의 손에 있는 요셉의 막대기와 그의 동료 이스라엘의 족속들을 취하여 그들을 그와 함께, 즉 유다의 막대기와 함께 놓아 한 막대기가 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라. 네가 쓴 막대기들을 그들의 눈 앞에서 네 손에 쥐고 그들에게 말하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의 자손을 그들이 간 이방 가운데서 빼어 내어 사면에서 그들을 모아서 그들의 본토로 데려와 이스라엘의 산들 위에 있는 땅에서 그들로 한 민족을 만들고 한 왕이 그들 모두에게 왕이 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이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나뉘지 아니하리라}(겔37:21-22).

이 구절에서 우리는 모든 열두 지파인

"모든 이스라엘의 집"

이 그들 자신의 땅에 다시 모여 에스겔 48장에 기술된 방식대로 그 땅을 재분배 받을 것을 보게 된다.

{그날에 "유다의 집"이 "이스라엘의 집"과 함께 동행하리니 그들이 함께 북쪽에서 와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유업으로 주었던 땅에 오리라}(렘3:18).

잃어버린 열 지파

만일 열두 지파 모두가 그 거룩한 땅에 다시 회복될 것이라면, 자연적으로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유대인들도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자손들인데 그러면 남아 있는 "열 지파"는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그들이 동일시 될 수 있는가? 많은 자료들이 영어를 쓰는 종족인 "앵글로색슨들"이 그 잃어버린 열 지파들의 후손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쓰여졌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될 수 없는데 이는 이스라엘에 관하여 말하여지기를 {이 백성이 홀로 거할 것이요 민족들(nations) 가운데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아니하리라}(민23:9). 그러나 "앵글로 색슨족"은 민족들 가운데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스라엘은 많은 날 동안 왕이나 통치자나 성전 없이(호3:4) 있게 될 것이다. 앵글로 색슨족은 왕들과 대통령들(presidents)과 통치자들과 종교적 경배의 핵심 인물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도 그 거룩한 땅 밖에서는 적은 숫자가 될 것이고 민족적인 저주 아래(신4:26,27; 28:62-68)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 중 어느 하나도 "앵글로 색슨족"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무할례"의 형벌은 "끊어지는 것"인데(창17:12-14) "앵글로 색슨들"은 "무할례"이며, 따라서 유대인들의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모든 열두 지파들의 대표자들이다.

1. 이스라엘의 몫은 모든 지파에서 B.C.975년에 솔로몬의 왕국이 나뉠 때에 유다에게도 주어졌다(대하11:5,13-17).

2. 많은 수가 르호보암의 손자, 아사의 때 이스라엘에서 유다로 도망했다(대하15:8,9).

3. 열 지파가 B.C.625년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 96년이 지나서, 히스기야의 후손 요시아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또한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의 남은자"로 참석했다(대하35:17,18).

4. B.C.605-587년에 유다가 바빌론으로 끌려 갔으며 많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와 함께 끌려갔다.

5. B.C.536년에 유대인들이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 바빌론과 앗시리아가 동일시 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유다와 마찬가지로 돌아올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에스라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그가 몇 이스라엘인들을 데려다가(에스라7;28), 성전이 봉헌되었을 때 그들은 모든 열두 지파들을 위하여 희생제물을 드렸다고 했다(에스라6:16,17).

결론적으로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은 모든 열두 지파들을 완전히 대표하고 있다. 이제, 바빌론에서 돌아온 자들의 후손들이 A.D.70년과 A.D.135년에 흩어졌기에 우리는 "그들이 없는 곳이 어디있겠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을 조심스럽게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위의 설명으로 완전하게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에스겔 37:15-25에서 "열두 지파" 그대로 미래에 다시 모일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느 곳인가 있을 것이다.

존 윌킨스 경은 "나의 영광 이스라엘"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잃어진 곳에서 찾으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 그곳은 우상을 섬기는 곳이었다. 그는 히브리인(건너온 사람)으로 불려졌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이 우상에 빠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으로 그들을 돌려보내셨다. 역사에 보면 열 지파가 앗시리아로 잡혀가고 선지자는 그들이 앗시리아로부터 돌아오리라고 예언하고 있다(사11:11,16). 또한 우리는 그들이 아직도 그 곳에 있다고 확실히 추론해 낼 수 있다.

죠세프스는 A. D. 70년경 그들이 그 곳에 살고 있었다고 쓰고 있으며 제롬도 5세기경 그가 쓴 "호세아서 주석'에서 죠세프스와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또 이들이 이주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페르시아의 오루미아 호수 옆, 쿠디스탄 산맥의 정착지에 사는 어떤 민족들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평화의 제물, 첫열매, 십일조 등을 바쳐 모세의 율법이 요구하는 여러 형태의 의식을 지키고 있다(윌킨스).
 

2. 때에 관하여

a. "이방인들의의 때"가 찰 때까지.

{또 그들은 칼날에 쓰러질 것이며, 모든 이방 나라에게 사로잡혀 갈 것이요, 또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때"가 찰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눅21:24).

b.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제부터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있도다.'라고 말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마23:39).
 

3. 방법에 관하여

a. 회개하지 않은 채 다시 모인다.

{내가 너희를 이방 가운데서 빼내고 모든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서 너희의 본토로 데려와서 그 때에 너희 위에 깨끗한 물을 뿌리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깨끗케 되리니 너희 모든 더러움과 너희의 모든 우상들로부터 내가 너희를 깨끗케 하리라. 내가 또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으리라. 내가 너희 육체에서 돌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같은 마음을 주리라. 또 내가 나의 영을 네 안에 두어 너희로 나의 규례대로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의 명령을 준수하고 행하리라}(겔36:24-27). 

b. 회개하기 전에 그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또 내가 능력있는 손과 뻗친 팔과 진노를 부음으로써 백성으로부터 너희를 인도해 낼 것이며 너희가 흩어진 나라들로부터 너희를 모으리라. 내가 너희를 백성의 광야로 데려와서 내가 거기서 얼굴을 마주보고 너희와 더불어 변론하리라. 내가 이집트 땅의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과 더불어 변론한 것같이 내가 너희와 더불어 변론하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또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언약의 속박으로 데려와서 너희 가운데서 나를 거역한 자들과 나를 거스려 범죄한 자들을 제거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이 거하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낼 것이나 그들은 이스라엘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는 내가 주인줄 알리라}(겔20:34-38).

그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분의 "용광로"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모두 찌꺼기가 되니 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예루살렘 가운데로 모으리라. 그들이 은과 놋과 철과 납과 주석을 풀무 가운데로 모아 그 위에 불을 불어 넣어 녹이는 것 같이 내가 너희를 나의 성냄과 분노 속에 모아 너희를 거기에 남겨두고 녹이리라. 그렇다. 내가 너희를 모아 내 진노의 불길로 너희 위에 부으리니 너희는 그 가운데서 녹으리라. 은이 풀무 가운데서 녹는 것같이 너희도 그 가운데서 그렇게 녹으리라. 그리하면 너희는 나 주가 내 분노를 너희 위에 부은 것을 알게 되리라."}(겔22:19-22).

{보라, 내가 내 사자(엘리야 말4:5,6)를 보내노니 그가 내 앞서 길을 예비하리라. 또 너희가 찾고 있는 주께서 갑자기 자기 성전에 오시리니 곧 너희가 기뻐하는 언약의 사자시라. 보라, 그가 오시리니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가 오시는 날 누가 감히 살 수 있으랴? 그가 나타나실때 누가 서리까? 이는 그가 정련하는 자의 불과 같고 표백하는 자의 비누같으리라. 또 그는 은을 연단하고 정화시키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들을 깨끗케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깨끗케하여 그들로 의로운 제물을 주께 드리게 하리라}(말3:1-3).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을 통과하게 해서 세련된 은처럼 그들을 세련할 것이며 연단된 금처럼 그들을 연단하리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백성이라 말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라 할 것이라}(꽺13:9).

유대인들은 아직도 이러한 경험을 겪어보지 못했다. 이것은 예레미아 30:4-7과 다니엘12:1에

"야곱의 환난의 때"

로 언급되었고, 그리스도께서도 이것을

" 대 환 란 "

이라고 부르셨으며, 주님과 스카랴 선지자는 그것을 주의 돌아오심과 연합시키셨다(마24:21-31, 꽺14:1-11).

이 끔찍한 심판들의 결과로 그들은 불행함 속에서 주님을 부를 것이다.

{또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민들 위에 은혜와 간구의 영을 부어주리라.}(스가랴 12:10).

그 후에야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실 것이다.

{그의 발은 그날에 예루살렘 앞 동편에 있는 올리브산 위에 서시리라.}(스가랴 14:4).

{그들은 그들이 찔렀던 나를 쳐다볼 것이며,}(스가랴 12:10)

그리고 유대 민족은 하루 만에 태어나게(회개) 될 것이다.

{누가 그러한 일을 들었으리오? 누가 그러한 일을 보았으리오? 세상이 하루에 생겨날 수 있으며 민족이 순식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자마자 그 자녀들을 낳았도다}(사66:8).

주님의 부활 이후에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대하여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것 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5:8).

바울이 말한 것은 그가 때가 되기 전에 태어났다는 말이며, 그의 탄생은 조산이었고 그의 "새로운 탄생"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탄생"의 상징이 아니라, 주께서 돌아오실 때 유대민족의 탄생을 예표하는 것이다. 바울이 주님의 영광을 보았고 그의 음성을 들었듯이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셔서 올리브산에서 그 자신을 계시하실 때 유대 민족도 예루살렘에 모이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그들이 "이집트인들의 재물들"을 가져왔다(출12:35-36).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그들 자신의 땅으로 돌아올 때, 그들은 "이방인들의 재물"들을 가져올 것이다(사60:9, 61:6).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그들 자신의 땅으로 돌아올 때,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점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땅"(the Royal Grant)

은 이집트의 강에서 "큰 강", 즉 유프라테스 강까지이며(창15:18), 에스겔에 따르면(겔48:1-29) 다메섹의 북동쪽에 있는 하맛(Hamath)에서 남쪽의 카데스(Kadesh)까지이다. 성전은 다시 지어질 것이다. 주의 영광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희생제사도 다시 드려질 것이다. 정부가 다시 세워질 것이며, 땅의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다(스가랴 8:20-23).

유대인들의 미래에 관해 좀더 알고자 한다면 "대환난"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쓴 장을 읽어보고 또한 "유대인"과 "천년왕국"에 관한 도표를 참고하기 바란다.

 

 

10. 이방인들

  1) 이방인들

이 지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교회"가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이방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기 전까지는 지상의 모든 사람은 이방인들이었다. 아브라함은 최초의 히브리인이 되었고, 후에 이스라엘(창32:24-28)로 이름을 바꾼 그의 손자 야곱은 열 두 아들을 낳았다. 그 열 두 아들들은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으며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 불려지게 되었다. 솔로몬 왕이 죽은 후 열두 지파는 분열되었는데 이들 지파 중 열은 이스라엘로, 둘(유다와 베냐민)은 "유다"로 불리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B.C.721년에 앗시리아에 유다는 B.C.606년에 바빌론으로 잡혀갔다. 70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때 유다는 열두 지파의 대표가 되어 그들과 함께 돌아왔다. 그 때부터 그들은 유대인이라고 알려졌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었지만, 우상숭배에 빠져 포로로 잡혀갔을 때는 이방인들이 그들의 땅을 차지했다. 이집트, 앗시리아, 바빌론 같은 왕국들이 항상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그 땅을 차지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보이지 않는 사슬로 묶어 두셨다가 이스라엘이 죄악이 가득찬 후에야 비로소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이방인 느브갓네살 왕에게 주어졌다(렘27:5-7). 이 일은 B.C.606년에 일어났고 이때부터 누가복음21:24에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이방인들의 때"

가 시작되었으며,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정해져 있는 한정된 기간이다. 이것을 로마서11:25에서 바울이 말한 "이방인의 충만함"이 차는 때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방인의 충만함"이라는 말은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불러 낸" 이방인들을 말하며, 이방인의 충만함이 되기까지 유대인들의 "일부가 완고하게 된 상태"는 계속될 것이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교회는 들림을 받고 유대인들은 그들의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방인의 충만함"이 되는 수는 오순절에서 시작되어 최소한 "이방인들의 때"가 끝나기 7년 전에 채워질 것이다.

"이방인들의 때"에 관하여는 다니엘서에 충분히 설명되어 있다.

다니엘서(도표를 보라)에는 느브갓네살 왕이 꾼 꿈과 다니엘이 본 네 가지 환상에서 "이방인들의 때"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다


 

  2) 느브갓네살 왕의 꿈

느브갓네살이 왕이 된 후 2년째에 들어서 꿈을 꾸게 되었다. 잠에서 깨어난 뒤 그는 꿈을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번민하던 느브갓네살은 그가 거느리고 있던 마술사들과 점쟁이들에게 자신이 꾼 꿈을 알아내고 그 꿈을 해석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아무도 왕의 꿈에 대해 입을 열지 못하자 왕은 그들을 죽이라는 칙령을 내렸다. 그 때 다니엘은 자신에게 시간을 구하여 그 칙령은 보류가 되었다. 다니엘은 그의 동료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그리하여 밤에 그 꿈의 내용과 해석이 다니엘에게 계시되었다. 그 꿈에 대한 해석은 분명히 인간의 지혜로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칼데아 왕궁의 현자들과 아첨꾼들은 감히 이방의 최강국의 최후를 두려움 없이 알힐 수 없었을 것이다.

꿈에 보인 거대한 형상은 "세상 왕국들"을 하나로 묶어 역사적인 순서대로 상징화한 것이었다. 그 거대한 "금속" 신상은 이방인의 통치를 나타낸 것이며, 그 형상에 사용된 금속의 질이 점점 떨어지는 것은 세상 왕국의 쇠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은은 금보다 가치가 없고 놋은 은보다, 철은 놋보다, 진흙은 철보다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 형상은 무게도 밑으로 갈수록 점점 떨어진다. 무게를 하나씩 따져보면 금의 비중은 19.5, 철은 5, 진흙은 1,93이다. 그 신상은 머리가 가장 무겁다.

형상을 구성하고 있는 네 종류의 금속은 장차 일어날

네 개의 세계적인 제국을

차례로 나타낸 것이다(단2:37-40). 그리스도의 재림 전까지 느브갓네살 왕, 바빌론, 메디아와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네 대제국이 차례로 등장하게 되어있다. 이 제국들이 몇 개인지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과 계승되는 순서까지 밝혀져 있다. 첫 번째 왕국은 "바빌론"으로서 다니엘이 느브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할 때 "왕은 곧 이 금 머리니이다."(단2:38)란 말로서 가리켜지는 왕국이다. 두 번째 왕국은 "메디아와 페르시아"인데 다니엘이 벨사살 왕의 잔치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한 뒤 "그날 밤 칼데아인들의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고 메디아인 다리오가 그 왕국을 취하니 약 육십이 세였더라."(단5:30)고 기록했던 왕국이다. 세 번째 왕국은 "그리스"이며 다니엘서 8:20-21절에서 "네가 본 두 뿔을 가진 그 숫양은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왕들이요, 그 거친 숫염소는 그리스의 왕이며, 그의 양 눈 사이에 있는 큰 뿔은 그 첫째 왕이라."라고 언급한 왕국이다. 네 번째 왕국은 "로마"이며 다니엘서9:26절에서 "그 통치자의 백성이 도성(예루살렘)과 성소를 파괴하리니"라고 언급하고 있는 백성이 A.D 70년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타이터스 휘하의 로마인들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이 그 형상의 쇠퇴는 그 형상을 이루고 있는 금속의 재질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재질은 차례로 나타날 제국의 특징을 예언한 것이다. 즉 느브갓네살 왕의 권력은 절대적이었다. 그에 관하여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분께서 그에게 주신 그 위엄에 모든 백성과 민족과 언어들이 그의 앞에서 떨고 두려워하였으며, 그가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살리고 싶으면 살리며, 그가 높이고 싶으면 높이고 낮추고 싶으면 낮추었는데,}(단5:19)

두 번째 왕국은 첫 번째보다 못하다. 두 번째 왕국은 고관들인 세습 귀족들에게 의지하는 군주국이었다. 그 왕국의 왕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사자 굴에 다니엘이 던져지는 것을 다리오왕이 막으려고 하였으나 그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단6:12-16)과, 아하수에로왕의 경우(에스더8:3-12)를 보면 알 수 있다. 세 번째 왕국을 나타내는 금속은 놋이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통치하던 그리스 제국은 군부 귀족들의 지원을 받는 군주국이었으며, 군부 지도자들의 야망이 서로 다른 만큼 이 제국도 허약했다.

철의 힘을 지닌 네 번째 왕국은 더욱 더 허약함을 보여주고 있다. 로마 왕들은 명목상 백성이 선출하였고 단지 국가 최고 행정관 장군으로 불릴 뿐이었으며, 오랫동안 그들은 왕관을 쓰지 못하였고 훌륭한 지휘관임을 나타내는 월계관을 썼을 분이다. 왕들은 또한 원로원의 자문을 받거나 제약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은 법의 제정이나 정치에 간섭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지나친 독자노선을 걸으면 곧 쫓겨났다. 이처럼 이 제국은 금속성과 응집성을 지니고 있었다. 철은 놋이나 은과 금보다 더 부서지기 쉽고 부식과 녹이 쉽게 슨다. 그러나 철이 강철의 형태로 바뀌면 다른 어떤 금속보다 단단하여 다른 금속을 자를 수가 있다. 로마가 이와 같이 냉혹한 철의 정치를 하였다.

그러나 신상은 발에 이를수록 점점 약해지면 발가락은 철과 진흙이 혼합되어 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이 왕국들은 통치권은 절대왕권에서 많은 사람들이 발언권을 갖는

민주정치의 정부 형태로,

쇠퇴해가고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신상"은 이방인의 통치가, 여러 몸의 각부분에 명령하는 "머리"에서, 머리의 지시에 따라 몸을 단지 옮기기 위하여 만들어진 발로 점차적으로 옮겨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제국들은 첫 제국은 단일왕국이었으며, 두 번째 제국은 두 부분(메디아와 페르시아)으로, 세 번째는 네 부분(단7:6,8:8)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지막 네 번째 제국은 열 발가락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신상은 "산에서 떨어져 나온 돌"이 발을 쳐서 산산조각을 나서 바람에 날려 사자져 버렸다. 그 "돌"은 점차적으로 온 땅에 가득 차서 "신상"을 점차적으로 떠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단 한순간에 그것을 산산조각으로 부서뜨리는 것이다. 그 "돌"이 신상을 치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심판이다. 그러므로 그 "돌"은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복음전파는 하나의 "진행"인 반면, "돌"이 신상을 친 사건은 갑작스러운 재앙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신상이 파괴되는 때는 발가락이 형성된 이후가 될 것이며, 신상의 "두 다리"는 A.D 364년에 나타났고 "열 발가락"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돌"이 "신상"에 떨어지는 시기는 "이들 왕들의 때"에 라고 말한 다니엘의 해석 속에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왕들의 때"란 "열 발가락"에 해당하는 왕들의 때를 말한다.

신상을 부순 "돌"은 "그리스도"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돌"이라고 불려졌기 때문이다. "또 누구든지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부서질 것이요, 이 돌이 누구에게든지 떨어지면 그 사람을 가루로 만들 것이라."(마21:44)

위 말씀은 "돌"이 신상을 부술 것이라는 다니엘의 예언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모두 부서져서 여름 타작마당의 쭉정이같이 되어 바람에 날려 사라져 간 곳이 없어졌으며 그 형상을 친 돌은 거대한 산을 이루어서 온 세상을 가득 채웠나이다.}(단2:35)

"신상"이 상징하고 있는 네 제국은 문자 그대로 왕국들인 것처럼 "돌의 왕국"도 실제 왕국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돌의 왕국"은 파괴된 제국들(금, 은, 철로 묘사된 4제국)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돌의 왕국"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며 신상이 상징하는

"이방인들의 때"

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비로소 끝날 것이다.

 

 

  3) "네 짐승들"에 대한 환상

이것은 느브갓네살이 꿈을 꾼 후 다니엘이 48세 때 본 환상이며 벨사살 원년 즉 기원전 555년의 일이었다. 환상 중에 다니엘은 큰바다(지중해)에 서있었는데 그곳에서 네 왕국이 일어났다. 그 바다에서 큰 짐승이 넷이 차례로 나왔다. 느브갓네살의 꿈에 보인 신상은 이 네 짐승을 나타내고 있는 네 나라와 동일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첫째는 사자 같고 독수리의 날개가 있는데, 내가 보니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발로 서 있게 되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더라"(단7:4). 다니엘이 본 환상 중 첫째 짐승이 최초의 세계적인 제국인 바빌론과 그 왕 느브갓네살 왕을 나타내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런던에 있는 대영박물관을 찾아가서 1840-1850년 사이에 바빌론과 앗시리아의 유적지에서 헨리 레이아드(Henry Layard)경이 발굴한 "독수리의 날개"와 "사람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돌 사자를 자세히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짐승"의 특징은 그것이 "독수리의 날개"를 가졌다는 것이다. 짐승들의 왕인 사자와 새들의 왕인 독수리를 이렇게 결합시켜 놓은 것은 신상의 금머리의 위품 당당함과 일치하는 것이며, 느브갓네살 왕이 거느린 군대의 "독수리 같은" 빠른 동작을 나타내고 있다. "날개를 뽑히고 있는 모습"은 분명히 느브갓네살 왕의 "짐승 같은 광기"를(단4:20-27) 나타내며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서려고 하는 것"은 왕이 본 정신을 되찾고자 함을 뜻한다.

둘째 짐승은 "곰과 같고 그것이 몸 한쪽 편을 들어 올렸는데, 그 입의 잇사이에 갈비뼈 세 대가 물려 있으며, 그들이 그 짐승에게 이렇게 말하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단7:5)라고 묘사되어 있다. 곰은 사자 다음으로 강한 짐승이며 탐욕이 많기로 유명하나, 사자와 같은 민첩성과 위풍이 없고 비교적 느린 동작과 야수적인 힘으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이것이 바로 메디아 페르시아 제국의 특징이었다. 메디아와 페르시아는 그 움직임이 육중하였으며 용맹이나 전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방대한 수의 군대를 투입하여 적을 압도함으로써 승리하곤 하였다. 크세르크세스왕이 희랍에 원정할 때는 250만 대군이 투입되었는데 비전투 용원까지 합하면 그 수가 500만이나 되었다. 다른 페르시아 장군들은 10만명의 군대로 있었다. 그처럼 거대한 군대들이 이동할 때면 많은 인명 피해가 따르게 마련이다. 적을 공격할 때의 인명 피해 뿐 아니라 질병과 헐벗음으로 수천 명이 죽었을 것이며, 그들이 휩쓸고 지나간 나라들에서도 그들이 뺏아온 식량은 그 같이 많은 군인들을 먹이기에 부족하여 대다수 굶주려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을 공격하기 위해 들려있는 곰의 몸은 페르시아의 특징을 나타낸 것이며, 거기에 막대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어 신상의 오른 쪽 어깨와 오른 팔과 일치한다.

곰의 이빨 사이에 물린 "세 갈빗대"는 리디아, 바빌론 및 이집트의 세 왕국을 나타내는데 이 세 왕국은 메디아 페르시아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3국 동맹"을 맺었으나 모두 메디아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했다.

셋째 짐승은 "표범과 같은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은 머리도 네 개가 있으며 권세를 받았더라"(단7:6)라고 묘사되어 있다. 표범은 동물 중에서 가장 민첩하여 품위가 있는데 여기에선 날개들의 보조를 받아 그 속력이 더욱 빠른 것으로 되어 있다. 체구는 날씬하지만 강하고 빠르며, 사나운 표범의 특성은 알렉산더 대왕이 지휘하는 그리스 군대의 발빠른 정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수는 적으나 무장을 잘 갖춘 아주 용감한 군대를 이끌고 매우 빠른 군대를 이끌고 매우 빠른 속도로 진군하여 10여년만에 힘든 상대인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모든 문명세계를 정복하였다. "새의 날개 넷"이라는 말은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가 새처럼 높이 날지는 못하지만 주로 저지대 전투에 능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표범이 가진 날개의 수와 머리의 수는 일치하지 않는다. 네 개의 머리가 있다면 네 쌍의 날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 네 개의 날개 였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알렉산더왕이 넓히려고 하였던 그의 제국이 4개의 지역으로 분할한 것을 나타내는 것 같다.

단지 네 개의 날개만 가진 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제국을 넓히려고 꾀하였던 세계 4방을 나타낸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표범의 네 머리는 알렉산던 제국이 그의 부하 장군들에 의하여 이집트, 시리아, 트라키아(그리스 마케도니아 북동부의 옛 이름), 마케도니아의 네 왕국으로 분열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메디아 페르시아나 로마제국 중간에 이러한 휴지기간이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세 번째 짐승인 표범은 신상의 배와 넓적 다리에 해당된다.

네 번째 짐승은 다니엘이 보았던 그 어떤 짐승과도 달랐다. {무섭고 무시무시하며, 힘이 매우 세고, 또 철로 된 큰 이빨을 가졌더라. 그 짐승이 먹고 산산이 부수며 그 나머지(다른 짐승들)를 발로 밟더라. 그 짐승은 먼저 있었던 모든 짐승들과 다르며, 또 그 짐승은 "열 뿔"을 가졌더라}(단7:7)라고 묘사하고 있다.

네 번째 짐승이 "철 이빨"을 가지고 있고 머리에 "열 뿔"이 있다는 사실과 그 철은 신상의 철로된 두 다리에 해당하고 열 뿔은 우상의 열 발가락에 해당함을 볼 때 넷째 짐승이 네 번째 체구임을 다니엘은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이 "열 뿔"을 "살펴보았을 때"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오더니 먼저 뿔 중 "셋"이 그 앞에서 뿌리채 뽑혀 깜짝 놀랐으며, 그가 그 작은 뿔을 더 자세히 보니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말하는 사람의 입을 가지고 있었다(단7:7-8). 다니엘은 발가락 중에는 그 작은 뿔에 해당하는 것이 없었던 것을 알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왕 느브갓네살에게 보여 주기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신 또 하나의 새로운 계시임을 의미하여, 다니엘과 그의 백성(유대인)을 위하여 예비하여 놓으신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다니엘서의 마지막 여섯장에 나타나고 있는 다니엘의 환상은 "마지막 날"에 있어서 유대 백성에 관한 하나님의 다루심(단10:14)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 "작은 뿔"의 의미를 묻기 전에 다니엘은 또 하나의 광경, 즉 심판을 받는 광경(단7:9-14)을 보았다. 다니엘이 본 짐승이 죽임을 당하는 환상은(11절) 이 심판이 천년왕국 직전에 있게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다니엘은 또한 "인자(그리스도)"가 그의 왕국(돌의 왕국)을 받게 되는 것을 보았다(15절). 그래서 그는 그 곁에 서 있는 하늘의 천사 중 하나에게 나아가 그 상징을 물었다. 천사는 그에게 그 네 짐승은 세상에서 일어날 네 왕이라고 하였고 그 때 다니엘은 다른 세 짐승과 현저히 다른 넷째 짐승에 관하여 알고자 하였던 것이다. 넷째 짐승의 "작은 뿔"은 다니엘을 심히 번민케 하는 것이었으며 그 작은 뿔이

"지극히 높은 성도들"

과 싸우게 되어 있었다. 이들은 바로 다니엘 자신의 백성, 즉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대인들이며 이들은 "대환난"을 통과하여 "지극히 높으신 분"의 백성(유대인)이 왕국을 차지할 때까지는 작은 뿔이 우세하게 될 것이다.

설명을 통해서 다니엘은 넷째 짐승의 열 뿔은 이 나라(네 번째 왕국)에서 일어날 열 왕을 말하며, 작은 뿔은 그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한 왕으로서 그들 중 세 왕을 정복하며 그는 큰 말하는 입을 가지고 있고(8,20절) 뛰어난 지성과 웅변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무엄하고 거만하며 독재적이고 성도를 괴롭힐 것이며 또 "때와 법"을 바꾸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성도들"이 그의 손에 "한 때와 두때와 반때", 즉 3년 반 동안 주어진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작은 뿔"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적그리스도"장을 보라.

네 짐승에 대한 이 환상 속에서 우리는 "신상"에서 보는 바와 똑같은 쇠퇴를 볼 수 있다. 그것을 "짐승의 왕"인 사자에서 퇴보하여 말로 묘사할 수 없는 기괴한 괴물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네 제국이 처음에는 "금머리를 가진 금속 신상"으로 나타나고, 다음에는 이러한 짐승들로 나타나는 이유는 세계 제국들을 보는 인간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인간은 네 제국을 통하여 부와 위엄과 권력의 집중을 보는 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서로가 잡아먹는 탐욕스러운 거친 짐승들로 보시는 것이다.

 


 

  4) "숫양"과 "숫염소"에 대한 환상

 "작은 뿔"이 상징하는 것들에 대한 설명을 듣고 다니엘은 "내 '생각'이 나를 몹시 번민케 하였으며 내 용모가 변하였으나, 내가 그 일을 '내 마음' 속에 간직하였노라."(단7:28)라고 말했다. 2년 후 하나님은 그의 종을 위로하기 위해 환상 중에 다니엘을 페르시아의 수도인 수산궁으로 보냈다. 그가 울래 강가에 있을 때 "두 뿔"을 가진 한 숫양을 보았으며 그것의 한 뿔은 다른 뿔보다 더 길었고 더 긴 뿔은 나중에 난 것이었다. 또 그는 그 숫양이 "서"와 "북"과 "남"을 향하여 받으나 그것을 당할 짐승이 없었고 그것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본다(단8:4). 다니엘이 숫양이 뜻하는 바를 "숙고하고 있을 때" 한 숫염소가 온 지면의 서쪽에서부터 오는 것을 보았다. 그 숫염소의 양 눈 사이에는 "두드러진 뿔"이 있었으며 격분한 힘으로 숫양에게로 달려가서 받아 그의 두뿔을 꺾고 땅에 집어던져서 짓밟는 것을 본다. 그리고 나서 숫염소는 매우 강대해지다가 강하게 되었을 때쯤 그 큰 뿔은 꺾였고 그 자리에 두드러진 뿔 넷이 났으며 그 중 한 뿔에서 또 "작은 뿔" 하나가 나서 "남쪽"과 "동쪽"과 또 "아름다운 땅"(팔레스타인)을 향하여 심히 커졌다(단8:5-9).

다니엘이 이 환상을 알고자 하자 "가브리엘아, 이 사람에게 그 환상을 깨닫게 해주라"라는 음성을 듣는다. 그 다음 가브리엘은, 그 숫양은 다리오왕과 그의 조카 코레스왕(사45:1-4)이 다스리던 메디아와 페르시아 제국을 말하며 숫염소는 그리스 제국이고 두 눈 사이에 있는 큰 뿔은 그 첫째왕(알렉산더 대왕)을 말하고, 큰 뿔 다음에 난 네 뿔은 그리스 제국이 나뉘어 네나라로 됨을 뜻하는 것이라고 다니엘에게 알려 주었다.

이 설명으로 다니엘이 번민했던 내용들은 모두 풀려졌다. 다니엘은 한 뿔이 다른 뿔보다 긴 숫양의 "두 뿔"과, "네 짐승"에 대한 환상 중에 보았던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사자, 즉 메디아와 페르시아는 느브갓네살의 꿈에 나타난 신상의 "두 팔"인 두 개의 왕국을 뜻하는 것이며, 또한 숫염소의 큰 뿔은 곰인 그리스의 알렉산더를 상징하며, "네 뿔"은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인 "네 장군에 의해 나누어지는 표범의 네 머리를 상징한다.

우리는 "신상"과 "네 짐승"에 관한 설명에서 유의해야 할점은 처음에 언급한 것과 같이 다니엘의 계시는 점진적이며, 새로운 계시는 그의 이전 환상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숫양이 서쪽과 남쪽을 향하여 달려가는 모습은 곰이 "세 갈비뼈"를 그의 입에 물고 있는 것, 즉 메디아와 페르시아가 "서쪽"으로 리디아를, "북쪽"으로는 바빌론을, 그리고 "남쪽"으로는 이집트를 정복하는 것과 일치한다.

만일, 숫염소가 "그리스왕"으로 기록되어있지 않더라도 "숫염소"가 누군지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염소는 마케도니아의 국가적 상징이며, 그 나라의 주화에도 염소가 새겨져 있고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에게(Agea)"는 "염소의 도시"라 불려지기 때문이다.

또한 "숫양"을 메디아와 페르시아 왕국으로 보는 경우도 동일하다. 왜냐면 앞면에는 "숫양의 머리"가, 뒷면에는 비스듬히 의지한 숫양이 있는 페르시아의 주화가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페르시아 왕이 왕관 대신 보석으로 장식한 "숫양머리" 모양의 황금 관을 쓰고 그의 군대 앞에서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을 책에서 볼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젠다베스터(Zendavesta)속에서 페르시아의 수호신인 이제드 베흐람(Ized Behram)은 발과 뾰족한 뿔을 가진 숫양으로 언급되어 있다.

숫양의 격분한 힘과 폭력은 알렉산더 대왕의 용맹함과 진취적인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서쪽에서 달려온 알렉산더는 세차례의 큰 전투에서 세계의 대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 "큰 뿔"은 갑자가 꺾여졌는데, 이것은 상상하지 못할 웅대한 계획을 가진 알렉산더가 33세의 나이로 열병으로 죽을 것을 예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예언대로 "큰 뿔"의 자리에는 "네 뿔"이 솟아났던 것이다.

이 네 뿔은 알렉산더의 군대를 지휘하던 네 장군을 나타내며 그들은 알렉산더의 제국을 넷으로 나누어 지배했다. 카산더(Cassander) 장군은 마케도니아를 차지했으며, 리시마쿠스(Lysimachus) 장군은 트리키아의 지역을 손에 넣었다. 셀루쿠스(Seleucus) 장군은 소아시아의 나머지 지방과 시리아와 앗시리아를 포함한 동쪽 지방을 차지하고 프톨레미(Ptolemy) 장군은 이집트를 차지했다. 이 네 나라는 이집트를 마지막으로 B.C 30년에 모두 로마에게 정복당하였다.

숫염소의 머리에서 이 네 뿔이 나타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 중 한 뿔에서 또 작은 뿔 하나가 나는 것을 보았고 천사 가브리엘은 이 작은 뿔에 대해 자세히 다니엘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는 또한 다니엘에게 마지막 때에 나타날 네 번째 왕국의 작은 뿔은 "무서운 용모"를 한 한 왕을 뜻하며 그가 "왕들의 왕"(그리스도)을 대적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단8:23-25). 이 "작은 뿔"에 대한 설명은 네 번째 짐승의 머리에 있는 "열 뿔" 가운데서 솟아난 한 작은 뿔과 설명이 일치하기 때문에 같은 인물 즉, 적그리스도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계시에 다니엘은 기절하여 며칠간 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단8:27).

 

  5) "북쪽과 남쪽 왕"에 대한 환상

다니엘은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이 네 나라로 나누어지고 그 나라 중 하나에서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였지만 그 네 나라 중 어느 나라에서 나올 것인지 그 때에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후 B. C 533년, 그는 두 왕이 전쟁을 하는 또 다른 환상을 본다. 한 왕은 "북쪽 왕"이라고 하며, 한 왕은 "남쪽 왕"이라고 하는 두 왕이었다. 이 장(단11:1-45)은 성경의 어떤 다른 예언들보다 가장 자세히 예언을 기록한 장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350년간에 걸쳐 이집트의 왕과 시리아 왕 사이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5절부터 31절까지는 "북쪽 왕"(시리아)와 "남쪽 왕"(이집트)의 전쟁에 관한 설명이며 이 전쟁은 기원전 164년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통치가 끝남으로 종결된다. 32-35절까지는 B.C 164년부터 "마지막 때"까지의 기간 전체를 다루고 있다. 36절에서는 "자기 뜻대로하는 왕"(적그리스도)이 출현하며 36절에서부터 다니엘서는 "마지막 날들"에 다니엘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북쪽왕(시리아)"과 "남쪽왕(이집트)"의 환상에서 북쪽왕이 우세한데 적그리스도는 알렉산더 제국에서 나누어진 "시리아인"일 것임을 다니엘에게 계시해 준 것이다. 왜냐하면 "북쪽 왕"에 대한 기록은 숫염소의 "네 뿔" 중 하나에서 나오는 "작은 뿔"에 대한 기록과 일치하며, 네 번째 짐승의 머리의 "열 뿔"에 관한 기록과 일치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이방인들의 때"의 전 과정을 계시해 주신 것이다.

 

  6) "칠십 주"에 대한 환상

9장에서 다니엘은 그의 "백성"(유대인)과 거룩한 도성(예루살렘)을 위하여 정한 "70주"에 대한 환상을 보게 되는데 "허물"을 끝내고 "그들의 죄들이 종결되며", "영원한 의"(단9:24)가 드러나는 기간이다.

"70주"

에 관한 환상은 여러 가지 점에서 성경 속의 어떤 다른 환상보다 더 중요한 계시이다. 이 계시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초림 연대가 정해졌고 적그리스도의 통치기간을 알 수 있다.

이 "환상" 속에서의 연대는 매우 중요하다. 9장 첫절의 연대는 메디아 사람 다리오왕의 통치 원년 즉 바빌론이 멸망한 해인 B.C 538년으로 정해놓고 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숙고하는 중에 자기 백성의 포로 생활이 70년만에 마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포로 생활은 B.C 606년부터 시작되었고 그 후 68년이 지났기 때문이다(렘25:11). 이 사실을 발견한 다니엘은 온 마음이 떨렸다. 그는 얼굴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그의 마음을 열어 아주 위대한 기도를 드렸다. 이 기도는 고백과 간구와 중보 기도의 본보기이다(3- 19). 그가 기도하는 중에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났다. 그는 다니엘의 기도가 시작될 즈음에 "그 일에 지혜와 명철" 주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20-23). 다니엘은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난다는 사실이 궁금하였고 가브리엘은 그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그보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더 중요한 계시를 가지고 왔으며 그것은 바로 "70주"의 기간에 관한 것이었다.

가브리엘이 다니엘을 찾아온 목적은, "70년"이 차면 그의 백성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민족적 생명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이 다시 그들의 땅을 지배 할 수 있기까지는 또 다시 "70주"라는 더 긴 시간이 지나야함을 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 기간은 다니엘의 백성과 거룩한 도성 위에 정해졌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점이다. 그것은 "70주"의 기간이 이방인이나 교회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70주, 즉 490년에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그들 자신의 땅에 거주할 수 있는 기간을 뜻하는 또 하나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 기간 속에는 그들이 현재 흩어져 있는 기간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칠십 주

(THE SEVEN WEEKS)

"칠십주"의 표현은 "70주(Week)"로 읽어야 한다 한 주가 7일인지, 7주인지, 7년인지는 문맥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70주의 기간은 "7주", "62주"와 "1주"의 세 기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이 있은 후부터

"메시아 왕"

이 일어나기까지 7+62=69주가 지나야 한다고 되어 있다.

"예루살렘 재건 명령"의 연대는 느헤미야2:1절에 아탁세르세스와 제 이십년 니산 월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은 B.C 445년 3월14일이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한 날은 A.D 30년 4월2일 종려나무 주일 이었다(눅19:37-40). 그러나 B.C 445년 3월14일에서 A.D 30년 4월2일까지의 기간은 문자 그대로 69주(7년x69주=483년),가 아닌, 445+30=475년이다. 우리는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위 깊게 공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성경에는 "시간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것이다. 성경을 읽다보면 "시", "주", "달", "년", "때", 및 "때와 때의 구분" 등과 같이 시간을 나누어 놓은 말들이 나온다. 이러한 말들은 모두 동일한 단위로 해석하는 것이 알기 쉽고 혼돈을 피할 수 있다. 그 단위는 무엇일까? 그것은 민수기 14장34절에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 수를 따라, 곧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하여 사십 년 간 너희가 죄악을 질지니" 라는 말씀과 에스겔 4:6절의 "내가 네게 하루를 일 년으로 정하였느니라."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단위"에서

"하루는 일년을 나타낸다".

이 단위를 "70주"에 적용시켜보자. 이제 우리는 예루살렘을 재건하라는 명령이 있은 후부터 메시야 즉 왕이 일어나기까지의 기간은 69주, 483일이며 1일을 1년으로 환산하여 483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B.C 445년부터 A.D 30년까지의 기간은 475년이며, 483년과 비교해 보면 8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발견된다.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는 일년의 길이가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태음력의 1년은 354일이며 역년의 1년은 360일이고 태양력의 1년은 365일이다. 율리우스력(구태양력)의 1년은 365 1/4일이며 4년마다 달력에 하루를 더해야 한다.

그러면 이들 중 어느 것을 사용하여 계산할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열쇠"를 발견하게 된다. 창세기 7:11-24절 및 8:3-4절의 노아의 홍수에 대한 기록 가운데 2월17일에서 7월17일까지의 5달이 150일로 계산되어 있다. 그렇다면 한달이 30일로, 1년은 360일이 일년인 역년을 사용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보통의 연대를 따르면 B.C 445년부터 A.D 30년까지의 475년은 1년이 각각 365일인 "태양"년이다. 이제 B.C 445년부터 A.D 30년까지의 연수를 모두 (445년과 30년) 합하면 태양력으로 476년이 나온다. 이 476년에다 365(태양력의 1년의 날수)를 곱하면 173,740일이 되고 거기에다 그 사이의 윤년을 고려한 119일을 더하면 173,859일이 된다. 또 여기에다 3월14일에서 4월 2일까지 포함시켜 20일을 더하면 173,879일이 된다. 이제 173,879일을 360일(성경에서의 1년의 날수)로 나누면 하루가 부족한 483년이 되며 이것은 1일이 1년을 나타내는 69주(483년)의 정확한 날 수이다. 다니엘의 69주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한 A.D 30년 4월 2일에 끝난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이보다 더 정확한 증거가 있을까?

"7주"가 "62주"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성경에 아무런 언급이 없으므로 다니엘은 "7주"와" 62주" 사이가 중단없이 계속 진행될 것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음의 "그 거리와 그 성벽이 재건되리니 곧 고난스런 때들이라"라는 말은 틀림없이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도성을 재건하는 일에 소요된 "처음 7주" 즉, 49년의 기간을 언급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리스도의 초림의 날에 대한 예언을 공부하던 사람들이 소흘히 하지 않고, 70주에 대한 다니엘의 예언을 이해했더라면 그들은 그분을 찾아 나섰을 것이며 그분이 메시아인지 아닌지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7주와 62주 사이는 중단이 없으나 "69주"와 "마지막 한주인 70째주" 사이에는 중단이 있으며 그 안에 몇 가지 일들이 일어난다.

첫째 "육십이 주 후에는 메시야(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질 것이나"(단9:25)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가 배척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말하고 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그다음 "장차 올 그 통치자"의 "백성"이 도성과 성소를 파괴할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한 통치자"가 아니라 "통치자의 백성"이 도성과 성소를 파괴할 것이라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A.D 70년에 예루살렘 도성과 그 성전을 파괴한 백성은 로마인들이었고 따라서 그 통치자(적그리스도)는 로마 시민이어야 한다. 이것은 시리아계 유대인이 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닌데, 그 이유는 시리아는 부활한 로마 제국의 한 부분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소 사람 사도 바울도 유대인이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팔레스타인 땅이 "마지막 전쟁"(아마도 아마겟돈)까지 계속 황폐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황폐한 상태"가 지금까지 계속되는 것을 보면 "69주"와 "70주" 사이의 "공백 기간" 속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

그 다음절에서는 "남은 한 주(70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통치자"-적그리스도)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주(70째주) 동안 언약을 확정하고 그 주의 중간(3년반)에 그가(적그리스도) 희생제와 예물을 금지시킬 것이요, 그는 가증함을 확산시킴으로 황폐케 하리니 진멸할 때까지 할 것이며, 정해진 것이 황폐케 한 자에게 쏟아지리라.}

"마지막 한 주"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환난"에 대한 장을 참고하라

이방인들의 때

누가복음21: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때" 차기까지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힐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우리는 "이방인들의 때"가 B.C 606년에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기간이 언제 끝날 것인지 아는 방법은 없겠는가?

예수님이 사용한 "때"라는 단어는 "예언적인 때"를 뜻하며 예언적인 "한 때"는 360일로 되어 있는 1년이고 하루가 1년을 뜻하므로 "한 때"는 "360년"을 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이들은 레위기(레26:18-21;24-28)에서 모세는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그 분은 그들의 죄를 "7배"나 벌하실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예언했으며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때"라고 말씀하셨을 때 7배를 뜻하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주장에 따르면 이방인들의 때가 B.C 606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A.D 1914년에 끝난 것이 된다. 이 주장은 증명될 수 있을까?

요한 계시록에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70주"의 "반" 때가 3가지로 표현된다. 첫번째는 42달(계11:2;13:5)로, 두번째는 1260일(계11:3;12:6)그리고 세번째는 "한 때와 두 때와 반때"로 표현되어 있다. 계시록12:14절의 마지막 표현은 다니엘의 "한 때와 두때와 반 때"와 일치한다(단7:25;12:7). 시기에 대한 이 모든 표현은 동일 시기를 가리키고 있으므로 1260일은 한달(30일)로 나타내 42달이며 42달을 1년(12개월)으로 나타내면 3년 반이다. 즉 한때는 1년이며 두때는 2년 반때는 반년(6개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언적 연대기에서 한때는 360일로 이루어진 1년이지 360년으로 상징되는 1년이 아니다. 그러므로 "때"를 360년으로 볼 성경적인 근거는 전혀 없다.

만약 한 때를 평범하게 360년으로 생각하면 요한계시록12:4절에 나오는 한 때와 두 때와 반때는 360년+720년+180년 즉 1260년이 되어 다니엘서에 나오는 "칠십주"의 "마지막 주"는 2520년이 된다. "칠십주"의 "마지막 주"는 "69주"의 "주"는 이미 역사속에서 증면된 7년 기간으로, 같은 단위로 계산되어야 한다.

만일 "이방인들의 때"가 2520년이라는 주장이 옳다면 그것은 1년을 360일로 간주한 연수 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1년을 360일로 계산하면 2520년은 날수로 907,200일이다. 그러나 B.C 606년부터 현재(1917년)까지 1년을 365.25일로 계산하는 지금의 태양력으로는 2523년(921,516일)이 지나갔으며 이것은 14316일 차이가 있다. 우리가 만약에 1년을 365.25일로 계산한 이 2523년을 1년을 360일로 계산하는 년수로 환산한다면 921,516을 360일로 나누어야 하는 데 그 결과는 2559.75년이 되며 그것은 2520년보다 39,75년이 더 많으며 그래서 이방인들의 때를 뜻하는 2520년을 39.75년 전인 A.D 1877년에 끝이 난 셈이다.

더 나은 증거로써 례위기의 "일곱 때"는 예언적인 "때"가 아니데, 우리는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형벌을 받거나, "노예"와 "포로"였을 시기도 정확하게 일곱때가 아니였다(도표 "예언의 연대기"를 보라). 그들의 현재 "흩어짐"이 "노예"나 "포로"가 아니며, 이 계산은 틀리다..

요한계시록20:2-7절에 나오는 1000년도 70년간의 바벨론 포로생활과 마찬가지로, 이 내용은 문자적이며, 역사적인 연수를 의미한다. 시간을 정하는 "예언의 연대"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혼란이 있기 때문에 시기를 조작하게

레위기에 나오는 "일곱 때"가 예언인 "때"이고 "한 때"가 일년이라면 "일곱 때"는 7년으로써 다니엘에 나오는 "70주"의 마지막 주의 기간이며, 따라서 레위기의 이 말은 유대인들이 그들이 범한 죄들로 인해 그 형벌로써 통과해야 할 "환난 기간"의 길이에 대한 예언적 참고가 될 것이다.

되고, 그 결과 전천년의 진리마저 무시 당하고 있다.

"이방인들의 때"는 다니엘에 나오는 "70주"가 끝날 때 함께 끝날 것이다. 그것이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날는지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 때들나 시기들은"

우리가 알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행1:7).

 

 

 

11. 교 회

  1) 교회에 대한 잘못된 개념

우리는 다음 일곱가지의 내용들로 교회의 개념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I. 교회가 아닌 것

1. "유대인 경륜"을 이름만 바꾸어 지금까지 존속시켜 온 것이 교회가 아니다.

우리가 유대인에 관한 장에서 보아온 것처럼 교회가 길 한복판을 통과하도록 유대인들은 길 옆으로 비켜났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서는 요한 때까지"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성경이 모세의 율법을 한 시대로 보고 예수님의 은혜를 한 시대로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질서를 존중하고 하나님께서 나누신 것을 혼합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어떤 종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란 단지 "유대 교회"의 다른 일면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종교적인 형식"을 고집하고 제단을 만들고 제사장직을 고수하며 목자를 성직자라 부르며, 예배당 건물을 성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교회의 각종 예배 의식을 "성사"라고 부른다. 또한 국교회를 교회의 머리로 생각하고 국교회를 옹호하고 구약에 유대인에게 약속된 복들과 영광이 교회로 옮겨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2. 교회는 "왕국(KIngdom)"이 아니다.

침례인 요한은 "천국"(kingdom of heven)이 가까왔다고 전파했으며 예수님도 12제자와 70명의 보내시며 똑같은 내용을 전하게 했으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왕을 영접하지 않았다. 결국 왕국의 건설은 연기되었으며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에 간 귀인이 돌아올 때까지 왕국은 세워지지 않을 것이다(눅19:11-27).

성경은 교회와 천국을 결코 혼합하지 않고 있다. 교회는 "집"으로 비유되기도 하며(딤전3:15), "성전"으로 비유되기도 하며(고전3:16,17), "몸"으로 비유되지만(고전12:27-31), 천국으로 비유된 적은 없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다(엡1:22,4:15,골1:18). 그러나 그분이 교회의 왕으로 언급된 적은 없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이다(엡5:23-32.계21:2,9,10

 

  2) 교회란 무엇인가?

1. 교회는 "신비(Mistery)" 이다.

왕국은 신비가 아니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왕국을 강력한 어조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신비"로써 알려지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사이에 존재하는 교회인 것이다(벧전1:9-12).

즉 교회는 십자가와 면류관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교회"가 등장할 것을 조용히 말씀하셨으나 그것이 언제 나타날 것인지 또는 어떠한 것인지 말씀하지 않았다(마16:13-20).

"교회의 신비"는 바울에게 처음 계시되었다.

{이런 까닭에 나 바울은. .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진대 이것은 그 분이 계시로 내게

"신비"

를 알게 하신 것이며 (내가 전에 간략하게 쓴 것과 같으니 너희가 읽을 때 거기서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있는 나의 지식을 이해하게 되리라.) 그것이 성령으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지금 계시된 것처럼 다른 시대들에서는 사람들의 아들들에게 알려지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이방인들"

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

이 되며 그의 약속에 동참자가 된다는 것이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계획하신

"영원한 목적"

에 따른 것이니라}(엡3:1-11).

("땅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복적"의 도표를 참조)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가 구약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족장들이나 선지자들에게도 계시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방인들도 구원받는 것은 신비가 아니었다.롬9:24-30. 하나님께서 "교회"라고 불리우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몸"을 형성하고자 하신 것은 "신비"였다.
 

2. 교회는 "불러낸(Call Out)" 한 몸이다.

교회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에클레시아(ecclesia)"에서 온 말로 이것은 "불러낸 무리" 혹은 "모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단어는 교회에만 전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도 하나의 "에클레시아", 즉 여러 민족과 나라에서 불러낸 모임으로 사도행전7:38에서는 "광야 교회"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의 교회로 함께 모인 경배자들의 모임이 "에클레시아(교회)"이다(마18:,고전14:19,35).

이 교회 시대의 목적은 사도 야고보가 초대교회의 모임에서 "하나님의 계획"에 관한 설교 가운데 언급되어 있다(행15:13-18).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들 가운데서 한 '백성'을 취하시려 하신다"

는 것을 선포했다. 그런데 현 교회시대의 목적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 불러모으는 것이다.

이스라엘도 "불러낸 몸"이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구성된 "민족의 몸"이다. 그러나 교회는 어떤 한 나라의 백성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민족의 몸"이 아니라,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으로부터 개개인을 불러 모아 이루어진 "몸"이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서로 별개이고 연합될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을 택하신 시간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 창조된 후 아브라함 때에 와서 선택되었지만(마255:34), 교회는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택하셨기 때문이다(엡1:4-6).
 

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에베소서 1:22-23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어 볼 수 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시고 그를 만물 위에 머리가 되게 하셔서 교회에게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 모든 것들을 채우시는 분의 충만이니라}

에베소서 1:20절을 읽어보면 이 "머리되심"은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게 될 때 비로소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머리가 있기 전까지는 존재할 수가 없었는데,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머리없는 상태로 만드시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머리되시는 몸이다.

고리도전서 12:12-13절에서 우리는 "몸"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한 몸에 지체는 많아도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시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 또 모두가 한 성령 안으로 마시게 되었느니라.}

여기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연합시키는 것이

"성령 침례"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교회는 "오순절 날" 비로소 생겨나게 되었다(행1:4-5; 2:1-4).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주로 교회에 관해 언급했는데 특히, 이 성령 침례를 강조하고 있다.

{너희가 너희를 부르시는 한 소망 안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한 몸(교회)과 한 분 성령이 계시니 한 분 주(예수)요, 한 믿음이며, 한 (성령)침례이고 모든 것의 한 분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시니 그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며 모든 것을 통하여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엡4:4-6).

바울은 고린도전서12:13에서 "한 몸" 27절에서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로마서12:5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다시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각 사람이 서로의 지체가 되었느니라}.

교회가 "살아 있는 지체들"로 이루어진 "몸"이라고 할 때 그것은 "조직"이 아니라 "유기체"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조직"이란 한 건물의 문이나 창문, 지붕, 마루등과 같이 여러 가지 객체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고서도 새것으로 바꾸어 교체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유기체이다. 우리의 눈이나, 귀, 팔, 발, 아니면 손가락이나 그 어떤 것 하나라도 자른다면 불구자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몸의 지체 하나를 잃는다는 것은 그분의 몸(교회)을 자르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결코 죽을 수 없다. 살아있는 머리에 죽은 몸이 붙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며, 다시 죽을 수 없다. 주님은 우리에게 계시록1:18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살아 있는 자며, 죽은 자였으나 보라, 영원 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이런 까닭에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것이라."(골3:4).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셨다.

그런데 교회를 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는가? 무엇 때문에 몸이 필요한가?

한 인격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혼은 육신이 없어도 존재하는 것처럼 인격도 육신없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인격을 눈으로는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금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이다.

세상 사람들이 오늘날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이다. 이것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빌1:21)

즉, 그리스도께서 바울 안에 다시므로 세상은 바울을 통해 나타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완전한 사람(Perfect Man)

그리스도가 머리되시고 교회가 몸이라면 그 둘은 완전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같은 완전한 머리에 불완전한 몸이 붙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울의 생각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들을 온전케 하며

섬기는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

을 세우게 하여 우리 모두가 믿음의 하나됨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의 하나됨에 도달하게 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엡4:11-13).

고린도전서 3:9-17절에서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께서 모퉁이의 머릿돌(Chief Corner Stone)이 되신 건물 혹은 성전으로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그 분 안에서 건물 전체가 함께 맞추어져 주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가며 또한 그 분 안에서 너희도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니라."(엡2:21-22).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 즉 하나님께서 지성소에 "영광 가운데 임재하심"과 같이 비록 우리 시대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단절되어 예루살렘 성전에는 임재하시지 않지만 교회는 오순절 이후 지금까지 지상에서 "하나님의 거처"가 되어 이 곳에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나타내고 계신다.

사도 요한은 "말씀"(요1:14)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라고(요2:19-21) 말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성전에서 "영광 중에 임재"하셨고 현재는 교회 안의 성령을 통하여 나타나시지만 이 땅에 계실 때에는 예수라는 "인격"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요한은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변화산상에서 예수님의 인격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였다(요1:14).
 

4.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

현재 교회는 약혼한 처녀에 해당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내가 경건한 질투로 너희에게 질투를 느낌이라. 내가 너희를 한 남편에게 정혼시키나니, 이는 한 순결한 처녀로 너희를 그리스도께 바치려는 것이라}(고후11:2).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당시 약혼은 결혼만큼 신성했다.

처음 아담은 그의 아내를 맞이했듯이 마지막 아담도 그의 신부를 맞아야만 한다. 창세기2:18; 21-24절을 보면 아담이 그의 아내를 어떻게 얻었는지를 알 수 있다.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시니 그가 잠드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갈비뼈 중에서 하나를 취하시고 살로 대신 거기를 채우시더라.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했던 갈비뼈로 여자를 지으셔서 그녀를 그 남자에게로 데려 오시니 아담이 말하기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니, 그녀를 여자라 부르리라. 이는 그녀가 남자에게 나와 취해졌음이라." 하니라.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자기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결합하리니, 그들이 한 몸이 될 것임이니라.}

예수님은 사람으로 이 땅에 사시는 동안은 홀로 계셨다. 그러나 그분은 깊은 잠, 즉 죽음의 잠에 들어 그분의 찔린 옆구리에서 교회가 탄생했으며, 오순절 날 성령은 그 교회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으셨다. 그래서 아담이 이브에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니"(창2:23)라고 말한 것처럼 교회에 대해서 "우리가 그 몸과 그의 살과 그의 뼈의 지체들"(엡5:29-33)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담에게 여자를 주셨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교회에게 주셨다(엡5:31). 이브와 아담의 결혼은 창세기2:24절에 묘사되어 있다. 또 마태복음19:4-5절과 비교하라.

우리는 이삭이 신부를 맞아들이는 내용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부인 교회를 불러내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성경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예표이고

사라는 이스라엘의 예표이며

이삭은 예수님의 예표이며

엘리에셀(아브라함의 종)은 성령의 예표이며

리브카는 교회의 예표이며

크투라는 회복된 이스라엘의 예표이다.

이삭이 혼기가 차 아내를 맞이할 때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그가 카나안 여인과 결혼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의 종 엘리에셀을 밧단아람에 보내 아브라함의 친족 가운데서 그를 위해 한 사람을 데려오도록 했다. 엘리에셀이 밧단아람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아브라함의 조카 아들인 라반의 집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라반의 누이동생 리브카를 이삭의 아내로 선정하셨다(창24:12-14). 리브가는 엘리에셀의 설명만 듣고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의 아내가 되기로 작정하였다. 그녀는 친척들을 고향에 남겨두고 엘리에셀과 함께 출발했다. 이삭은 "저녁 무렵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그의 일행들과 아버지의 낙타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엘리에셀은 리브카를 이삭에게 소개하였고 그 후 리브카는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 이 시대에서 그의 아들 예수를 위하여 한 신부를 얻도록 이 세상 안으로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의 수가 완전히 찰 때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집으로 자신과 함께 그녀를 데리고 가실 것이다. 예수님과 그녀의 신부는 이 시대의 저녁 무녑에 공중에서 만날 것이다(살전4:15-17).

어떤 이들은 이삭이 아내를 그의 친족 가운데 구했기 때문에 그 모형의 참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신부도 이방인을 구성된 교회가 아니라 그의 친족인 이스라엘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첫 번째 유대인이었던 반면 그의 친족은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한다. 엄밀히 따져보면 아브라함은 유대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즉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브카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였으며 집안이 좋은 이방인이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에는 "두 신부"가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구약에, 다른 하나는 신약에 언급되어 있다. 구약에서 말하는 신부는 여호와의 신부인 이스라엘이요, 신약의 신부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말한다. 이스라엘에 관해서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니"(사54:5-8). 그녀의 창녀짓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내(이스라엘)를 버렸만 그녀가 죄악들이 그칠 때 다시 데려오시기로 약속하고 있다.(렘3:1-18; 겔16:1-63; 호2:1-23,3:1-5), 사라는 타락하기 전의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이스라엘인 크투라는 처녀로서가 아니라 아내로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린양(그리스도)의 결혼 상태는 순결한 처녀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소개되고 있는 "아내"(이스라엘)는 신약의 "신부"(교회)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아내"(이스라엘)는 천년 왕국 기간동안 지상의 예루살렘에서 살게 될 것이나 반면에 "신부"(교회)는 새 예루살렘에서 살 것이다. 이로써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자 "신부"라는 점에서는 이브가 아담의 "신부"가 되기 전에 아담의 "몸"이었던 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3) 교회의 기원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가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

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셨으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야 비로소 교회가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신 3년째 되던 해 여름, 이스라엘이 실제로 그분을 배척하고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실 날이 가까와짐에 따라 예수님은 왕국의 건설 요청이 곧 바로 철회되고 교회가 세워지게 될 것을 아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앞으로 닥칠 일을 대비하라고 부탁하시면서 그들과 같이 카이사랴 빌리보 지방으로 오셨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람들은 인자인 나를 누구라 말하느냐?"고 물으셨다(마16:13-20). 제자들이 예수님께 따른 사람들이 말하는 바를 말씀드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말하느냐?"고 다시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는 베드로라. 그리고 이 반석(THE ROCK)위에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우리니,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서 주의할 점은 베드로라는 단어의 어원은 "페트로스(petros)"라는 헬라어에서 나온것인데, "페트로스(pertros)"는 작은 조약돌을 뜻하는 반면에, "반석"이라는 헬라어 단어인 "페트라(petra)"는 큰 돌을 의미한다. 헬라어에서 "페트로스(petraos)"는 남성명사이며 "페트라[베드로(petra)]는 여성 명사이다. 이 성의 차이와 크기는 의미 없이 된 것이 아니다. 즉 여기서 "인간 베드로"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 즉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다 그 분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서로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반석"이 그리스도를 뜻한다는 것은 주님을 "반석"으로 표현하는 다른 성경구절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도 그리스도께서 "반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사도행전4:5-12절의 설교 속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스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분은 너희 건축자들이 쓸 데 없다고 제쳐 놓은 "돌"이었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즉, 건물의 머릿돌이시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그의 첫 서신(벧전2:3-8)에서 다시 증거하고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자신을 "반석"으로 지칭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사도 바울 역시 이 "반석"은 그리스도임을 말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닦아 놓은 기초 외에 아무도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나니, 이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시라.}(고전3:11)

에베소서2:20-22절에서 바울은 교회에 대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졌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귀중한 모퉁잇돌(Chief Coner Stone)이 되셨고, 그 분 안에서 건물 전체가 함께 맞추어져 주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가며, 또한 그 분 안에서 너희도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처

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 하늘로 올라가시기까지 교회의 기초는 마련될 수가 없었다. 그 후 그리스도께서 반석이 되셨으며, 그 위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신약의 선지자들)이 기초를 놓았고, 오순절날 3000개의 "살아있는 돌"로 첫층이 쌓여졌으며(행2:41), 며칠 뒤에는 5000개의 돌로 두 번째 층이 쌓아졌다(행4:4). 그리고 수세기를 걸쳐 내려오면서 교회는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한 "성전"으로 계속 지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이 교회는 오순절 날부터 시작된 것이다. 만일 베드로가 "반석"이 되어 그 위에 교회가 되었다면 "교회의 신비"는 당연히 바울이 아닌 베드로에게 계시되어야 했을 것이다(엡3:5).

"지옥의 문들"이란 헬라어로 "하데스(hades)의 문들"이다. "지하세계(음부)"는 건너갈 수 없는 "끝없는 구렁"을 사이에 두고 "지하 낙원"과 "지옥"으로 나누어져 있다(눅16:19-31).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회개한 강도를 "낙원"에서 만났으며 죽어서 지하 낙원에 있던 사람들을 "사로잡아" 부활하여 세째하늘로 옳기셨다. 그리고 지하 세계의 문들을 닫았다. 따라서 그분은 지금 "사망과 지옥(hades)"의 열쇠들을 가지고 계시며, 이때 문에 "지옥의 문"이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베드로가 바로 교회의 "반석"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약속한 "천국의 열쇠"는 교황과 그 계승자들에게 이어졌으므로 그들이 "연옥의 문"을 열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베드로는 "지옥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가질 수도 없다. "지옥의 열쇠들"은 베드로의 주님(Master)의 손에 있는데 그분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밧모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과 마지막이요 나는 살아 있는 자며, 죽은 자였으나 보라, 영원 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한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졌노라}(계1:17-18).

이 말씀은 로마 캐톨릭 교회의 주장을 완전히 뒤엎고 있다.

교회가 왕국(kingdom)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므로 "천국(kingdom of heaven)의 열쇠"가 교회의 열쇠가 될 수가 없다. "천국"은 왕이 없는 동안 "신비의 모습의 왕국"으로 감추어져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 13장의 "천국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다. 베드로에게 약속된 천국의 열쇠는 그가 오순절날 유대인들에게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 주었던 열쇠였고(행2:14-40), 그 후에는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에게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었던 "열쇠"였던 것이다(행10:24-48).

누가 교회에 속하는가?

만일 교회가 오순절에서 시작되어 "휴거"때에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으로 끝이 난다면 누가 교회에 속한 신부가 될 것인가? 반드시 이 두 사건 사이에 구원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교회의 일원이 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아직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혼인식에는 언제나 여러 축하객들이 신랑, 신부 옆에 있기 마련이다. 신부들러리, 안내하는 꽃나르는 소녀, 친척들, 그리고 초대받은 사람들 등등. . . .

요한 계시록19:9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된 그들은 복이 있다고 기록하라}.

그런데 "신부"는 초청을 받은 것이 아니고 당연히 참석되어야 할 사람이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모두 손님들이다.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마22:1-4)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손님들"이지 "신부"가 아니다. 오직 구약의 유대인 시대를 대표하는 침례인 요한만이 "신랑의 친구"임을 밝혔다(요3:29).

휴거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이 일어날 것이며, "구약시대의 모든 성도들"과 "대환난" 때 구원받은 "피로 씻은 무리"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들은 모두 복 받은 자들이지만 신부는 되지 못한다. 천사들도 이 장면을 구경할 것이나 초대받은 손님은 아니며, 어린양의 피로 속죄함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그 영광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4) 교회의 사명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는 어떤 "조직"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란 회원들의 권익을 위하는 사회단체도 아니며 인간의 육신을 만족시키는 "사교장"도 아니다. 교회는 불신자들의 돈을 모아 가난한 회원들의 희생을 다소 덜기 위해 "면죄부"나, 어떤 상품을 파는 "상점"이 아니다. 그리고 교회는 사람들의 타락한 육신을 구원하기 위한 "사회 복지원"도 아니다. 온갖 "사회 사업"으로 사람을 돕는 것도 갸륵한 일이지만, 그것이 교회의 임무나 사명이 아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서 이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 찼었다. 그렇다고 주님이나 사도들이 "사회 복지원" 같은 것을 만들지는 않았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범죄의 근원을 죄이며, 바로 이 죄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의 영을 거듭나게 하는 것임"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주님은 이 세상에 복음을 주셨고 교회의 사명이란 바로 이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막16:12). 복음이란 "윤리"나 "도덕 규범"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선포인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이 복음이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이방인)에게로다.

로마서1:16

우리 시대에 있어서 복음이 의도하는 목적은 사회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구성하기 위해 각각의 개인을 구령하는 것이다.

교회의 가장 큰 실수는 천년왕국시대의 이스라엘에 관한 지상 정복과 영광에 대한 약속을 현 시대의 교회에게 적용하는 점에 있다. 교회가 "세상과 타협"을 시작하고 대부분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닌 이들로 구성되어 있는 국회, 의회, 정부, 사회 개선 단체등의 요구에 동조하게 되면서 성령의 능력을 상실하고 구원의 능력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5) 교회의 미래

교회는 하늘로 끌려 올라가게 된다. 여기에 두 가지 대상이 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2. 살아있는 성도를

그들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해 공중으로 끌려올라 갈 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미카엘)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고 나서

'살아 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올라 가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노아 홍수 이전에 에녹이 "들림을 받은 것"(창5:24)과 이스라엘 왕들이 있던 시대에 엘리야가 "들림을 받은 것"(왕하2:11)은 성도들의 변화의 모습을 나타낸다.

변화산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은(눅9:28-31)

"교회의 휴거"의 모형이다.

그것은 또한 공중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가 만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모세는 부활하는 성도들을 상징하며, 엘리야는 죽지않고 변화되는 성도들을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일으키시기 전에 마르다에게 첫번 부활 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를 알려주셨다. 주님은 마르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첫 부활) 또 살아서(예수님이 다시 올때 살아있는 성도들)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11:25-26).

이 말씀과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4:16-17절에서 설명한 말씀과 얼마나 조화를 잘 이루는지 살펴보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그분은 "주 안에서 죽은자들"에게는 "부활"이 되실 것이고 "살아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되실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15:1-58절에서 부활의 "차례"를 설명한 후(22-24) "살아있는 성도"들에게 일어날 일들을 이어서 설명하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마지막 나팔에 눈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리하여 이 썩을 몸(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이 죽을 몸(살아있는 성도들)이 반드시 죽지 아니할 몸을 입으리라. 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또 이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되면 "사망이 승리 속에 삼킨 바 되었느니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grave)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고전15:51-55)

마지막 말씀은 "죽임을 당히지 않고 변화된" 성도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다음과 같이 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위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4:16-17절의 말씀과도 일치하며, 성도들의 "변화"와 "부활"은 동시에 그리고 눈깜짝할 순간에 일어날 것임을 선언하고 있으며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도 일치한다. "마치 번개가 동편에서 치면 서편에까지 비치는 것같이 인자의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마24:27)

고린도후서5:1-4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바램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몸)이 무너지면(죽으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큰 집, 즉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영적인 몸)이 있다는 것이라. 정녕 우리가 여기에서 신음하며 하늘에서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입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나 만일 우리가 옷입고 있다면 벗은 채로 발견되지 아니하리라. 이 장막 집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지고 신음하는 것은 벗으려는 것이 아니라(죽을려는 것) 옷입혀 지고자(변화되고자) 함이니, 이는 죽을 것이 생명에 의해서 삼켜지는 것이라.}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은 소망이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들의 부활에 이르려는 것이라.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그 표적을 향해 좇아갈 뿐이라.}

즉, 바울은 첫 부활인 "죽은 자들로 부터의 일으켜지는 것"은 위대한 일로 평가했지만 우리가 만일 죽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오실때까지 살아 있는다면 변화되어 휴거되는 것은 상급으로 여겼다.

휴거의 시기

어떤 사람들은 "모든" 교회가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교회는 환난 이전에 들림을 받게 된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깨어있는" 성도들만 환난 전에 올라가고, 남은 자들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의 주장은 "두번째는 자기를 바라는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죄 없이 나타나시리라,"(히9:28)는 말씀을 근거로 한다. 이 두번째 나타나시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지 죽은 자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 천년왕국 이전에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들어본적도 없고 그 뜻도 모르면서 그리스도안에서 자고 있는 자들이 수천만이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재림을 "보거나", "기다리거나", "찾아본적"이 결코 없었다. 그렇지만 분명히 그들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휴거 때에 부활할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4:16-17절에서 "들림을 받게" 될 사람은 주님의 재림을 보려고 살아서 "깨어 있었거나". "기다렸거나", "찾았던"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과 살아 남아 있는 우리"라고 말하고 있다.

부활의 순서는 "그리스도가 '첫 열매들'이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분께 속한 사람들'이라" 바울은 말하기를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고전15:51) 그리고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연합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한 몸에 지체는 많아도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시니라. 한 성령에 의하여 우리 모두가 한 몸 안으로 침례를 받았으며}(고전12:12,13).

"거듭난"(요3:3-7)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나누어져서 한 부분은 무덤속에서 '잠자는' 상태로 남아 있고 다른 한 지체는 '영광' 중에 들려 올라가고 또 다른 지체는 이 세상에서 환난을 겪고, 나머지 한 지체만 '변화'되어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들려 돌라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환난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야곱의 환난" 때이고(렘30:7) "이스라엘의 심판"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환난에서 교회를 구출하시는 것이다.(계2:10). 계시록은 연대 순으로 쓰여져 있다 교회가 신랑과 함께 하늘에 있기 때문에 요한 계시록4장부터 19장까지 전혀 찾아 볼수가 없다. 4장과 19장 사이에 있는 기간은 "땅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 위에 내려질 끔찍한 재앙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이 기간 중에 교회는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보좌에 함께 앉아 있게 된다.(엡2:6). 즉 이때 교회는 이 땅에 "거주하는 이들"과 같이 이 땅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휴거와 재림

(Rapture And Revelation)

예언의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성도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과 성도들과 "함께" 오시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혼란이 생기고 있다. 전자는 "휴거"라 부르며 후자는 "재림"이라 부른다. 그 둘 사이에는 적어도 7년이란 간격이 있다. 이 기간 동안 교회는 "심판"을 받고 이어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하늘 나라에서 거행될 것이며, 지구상에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예언된 대환난이 진행될 것이다.

성경의 수 많은 구절들이 그리스도께서 성도들과 함께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꽺14:5골3:4살전3:13;4:14). 그러나 만일 성도들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먼저 들림을 받지 않는다면 성도들이 주님과 같이 올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이치이다. 이들 모든 구절들은 재림에 관하여 언급한 것이지 휴거에 관하여 언급한 것이 아니다.

성경의 대표적인 가르침은 교회가 환난 "전에" 들려 올라간다는 것이다. 요셉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는 자신의 "형제들의 배척"을 받은 "후에" 이집트에 있는 동안 환난을 상징하는 기근이 닥치기 "전에" 이방인 신부인 아스낫과 결혼하였다. 왜냐하면 기근은 "그의 형제들"이 심판을 받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형제들인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받았으며, 대환난 이전에 신부인 교회를 데려가셔야만 한다.

모세 역시 그리스도의 한 모형으로 그의 형제들에게 배척을 받은 "후에" 그리고 그들이 파라오 왕의 통치하에서 환난을 겪기 "전에" 신부를 맞이했으며 그 신부도 이방인이었다(출2:23-25)

에녹은 변화된 성도들의 예표인데 노아 홍수 "전에" 들려 올라갔다. 또한 홍수는 환난의 예표이며 노아와 그의 가족은 "유대의 남은 자들" 즉 계시록7:1-8절의 인침을 받은 환난 기간동안 남아있을 144,000명의 유대인을 예표한다.

휴 거 (Rapture)

"휴거"는 현시대에 있어서 가장 놀랄만한 사건이 될 것이다. 그 사건은 "눈 깜짝할 순간"에 온 세상에서 동시에 일어날 것이며 깨어있는 지역의 사람들은 그 사건을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주님의 호령", "천사장의 소리" 그리고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살아있는 성도"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 외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 음성을 듣고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한 음성으로 그리스도께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알아 들었으나 주님 옆에 있던 사람들은 "천둥소리" 처럼 들렸다(요12:28,29).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 다소 사람 사울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을때 그와 같이 가던 사람들은 음성을 들었으나 모습은 볼수가 없었고, 들리는 음성도 이해하지 못해 조용히 서 있었다.(행99:3-7).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그 음성을 알아들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왜냐하면 그 음성이 성도들의 마음을 관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음성이 닿지 못할 만큼 깊거나 두터운 무덤은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자들은 다음과 같이 외치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일어나라. 너희 잠자는 성도들아 깨어서 죽운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아침이다. 첫부활의 아침이다."

천사장의 소리

미카엘(위대한 통치자)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때 다니엘의 백성(유대인)을 도와 일어날 것이고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다니엘12:1-2절에 기록되어 있다. 유다서 9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천사장인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논쟁했다는 사실은 천사장 미가엘이 휴거때에 죽은 자들의 부활과 관련하여 한 몫을 담당할 것이 분명하다. 천사장의 "음성"은 미카엘의 "음성"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에서 언급하는 유일한 천사장이기 때문이다.

사탄이 모세의 몸이 부활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했고 또한 첫째 부활 "이후"에야 둘째 하늘에서 쫓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사탄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을 방해할 것이다. "하늘의 군대들"의 대장인 미가엘이 그와 싸울 것이며 "천사장의 소리"는 천사장이 천상의 군대에 대한 명령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팔

"하나님의 나팔"이 무엇을 뜻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첫째" 부활에 울린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15:52절에서 바울이 부활에 관하여 설명하면서 나팔을 언급했고 그것을 "마지막 나팔"이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언급한 나팔이 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나팔" 가운데 마지막 나팔을 지칭하고 있으며(계8:1-2;6;10:7), 그 나팔 소리가 이 주(Week)의 가운데에 들리므로 교회도 "주(Week)의 중간"에 들려 올라 갈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교회는 주(Week)의 "시작"에 들려 올라가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사실일 수 없다. 그러면 "마지막 나팔"는 무엇을 뜻하는가?

나팔은 군대의 악기이다. 그 악기는 이스라엘 진영에서 총회를 소집할 때 사용되었다. 첫 번째 나팔은 일어나서 출발 준비를 하도록 하며, 두 번째(마지막) 나팔은 행군의 시작을 뜻하는 신호였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강림하실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팔소리"를 듣고 모여 들었다.(출19:11,16:20).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려고 할 때 두 번째 나팔소리가 들린다(19절). 여기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신 것은 주님이 공중에서 그의 교회를 맞이하는 것을 상징한다. 첫 번째 나팔소리가 들릴 때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날 것이며 두 번째(마지막) 나팔소리가 들릴 때 살아 있는 성도들이 변화되어 그들과 함께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다(고전15:51-52).

선택받은 백성인 이스라엘은 "큰 나팔소리"와 함께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마24:30-31). 이 일은 환난의 마지막 때인 나팔절은 매년 가을에 있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오순절에 성령이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예수님은 장막절(천년왕국에서의 이스라엘의 안식을 나타냄)에 형제들인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고 선민 이스라엘을 불러모으기 7년 전에 나팔절의 나팔소리와 함께 그의 교회를 불러내실 것이다.

만일 죽은 성도들이, 마치 예수님께서 무덤의 문이 깨뜨리지 않으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무덤을 헤치지 앉은 체로 그곳을 빠져 나온다면 첫째 부활은 은밀한 것이 될 것이다. (천사가 무덤 입구들 막은 돌을 굴린 것은 단순히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보여 준 것뿐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성도들의 변화는 결코 비밀스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의 반대쪽이 밤일때 휴거가 일어난다면 그곳 지역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밤중에 사라져 버린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이 사실이며, 천년왕국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불러모으리라는 성경 말씀이 영적이거나 황당한 소리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그 밤에는 두 사람(한남자는 남는다)이 한 침상에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 두 여인(한여인은 남는다)이 함께 맷돌을 갈고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또 두 사람이 들에 있는데 한 사람은 데려가게 되고 한 사람은 남게 되리라."고하시니라.} (눅17:34-36)

여기서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이 콜럼부스에 의해 입증되기 이전에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미 증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 침상에서 자는 두 사람은 시간이 밤이며, 맷돌을 갈고 있는 두 사람은 해 뜨는 때와 해지는 때는 식사 준비하는 시간을 의미하고 들에 있는 두 사람은 한 낮을 의미한다.

만일 휴거가 일어날 때가 낮이라면 그것은 노아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마24:36-39) "충격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팔고, 사고, 심고 집을 지을 것이다. 만일 그때가 즐거운 공휴일이었다고 생각해 보자. 유람선이나 자동차나 공원들은 사람들로 가득할 것이고 상점이나 가게나 백화점에도 직원이나 물건을 사려온 손님들로 가득할 것이다. 거리는 휴일을 즐기는 남녀들과 어린 아이들로 가득할 것이다.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깜짝 놀라게 하는 소리에 불과하겠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님의 음성"

으로 들릴 것이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보면 많은 사람들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또 그 없어진 사람들이 자신의 동네에서 가장 좋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한 동안 세상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신실했던 종업원들이 사라져 버림으로 인해 상가, 은행, 공장, 그리고 그 밖의 직장에서 산업활동이 마비될 것이다. 사람들이 부족해서 전철이나 다른 교통 수단도 마비될 것이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신비스러운 것으로 보지만 "휴거"에 관한 교리를 들었던 사람들이 이 상황을 설명할 것이다. 놀라운 일은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던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고, 그들 가운데 특히 복음을 설교하던 목사들도 많이 남아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도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사라져 버리기도 할 것이다.

며칠동안 흥분이 고조될 것이며, 그 이후에는 어쩔 수 없이 흥분이 가라앉게 될 것이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몇 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사람들이 더욱 완악해지고 사악해질 것이다. 성령은 "휴거된 성도들"과 함께 올라가고 세상의 "소금"이었던 성도들도 올라가 버렸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도덕적 타락과 부패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죄와 불법과 온갖 범죄와 더러운 마음이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가속화 시킬것이며, 그의 통치 아래서 온 세상은 심판을 향하여 빠르게 달려갈 것이다.
 

VI. 교회에 대한 "심판"

교회가 세상에서 들림을 받은 후 그리스도인들은 죄 때문이 아니라 행한 행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 "심판"에 관한 장과 "부활과 심판"에 관한 장을 참고하라.
 

VII. 교회의 "혼인식"

교회의 "혼인식"은 주님께서 "왕의 아들의 혼인식"의 비유(마22:1-5)를 통하여 말씀하셨고 계시록19:7-9절에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 분께 영광을 돌리세. 이는

"어린 양의 혼인식"

이 다가왔고 그의 아내도 자신을 예비하였음이라. 이제 그녀에게 허락하사 정결하고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라."고 하더라. 그때 그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된 그들은 복이 있다고 기록하라." 하고 또 내게 말하기를 "이것들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들이라."고 하더라}.

주목할 것은 "신부의 혼인"이라 하지 않고 "어린 양의 혼인"이라고 한 것을 유의하라. 이 엄청난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신부의 소망이 달성되었다기 보다는,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위하여 예비하셨던 계획이 성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엡1:4). 사람(Man)로서의 그리스도의 기쁨이 이 "어린 양의 혼인식"에서 극에 달할 것이다. 이것은 육신으로 태어나시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부"는 "인간의 혈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인성"을 가지시고 하늘에 올라가셨으며, 지금도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하늘에 계신다(딤전2:5).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신부"가 선택되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가 인간 그리스도 예수로 승천하실 때까지 "약혼식"은 거행될 수 없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약혼이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약혼 만큼 긴 것은 없었다. 주님께서는 1900여년이나 자신의 신부를 기다리고 계신다. 곧 하늘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가 외쳐질 것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 분께 영광을 돌리세. 이는 어린 양의 혼인식이 다가왔고 그의 아내도 자신을 예비하였음이라}(계19:7).

지금까지 수많은 왕족들의 결혼식이 국제적인 관심을 끌어왔다. 결혼식에 초대된 손님들과 구경꾼들은 화려하고 장엄한 예식 광경을 보며 찬사를 보내고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양과 그의 신부인 교회의 혼인 잔치는 그 모든 결혼식을 능가할 것이다. 이는 하늘과 땅이 하나로 결합되는 것이며, 또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하나님(아버지)께서 결합시켜 놓으셨으므로 어느 누구도 결코 떼어놓지 못하며 이혼이라도 이 결합을 깨뜨릴 수 없는 것이다.

신부는 "이제 그녀에게 허락하사 정결하고 흰 세마포를 입게 하셨으니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라."(계19:7-8) "성도들의 의"이라는 단어는 복수이며 따라서 "의들"로 읽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행위에 대한 심판"인 "불의 시험"을 통과한 후, 성도들 자신의 "의로운 행위와 일"을 말한다(고전3:11-15). 자주색과 주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장식하고 손에 금잔을 가진 적그리스도의 "음녀"(계17:3-4)와 점이나 주름진 것이 없는 깨끗한 흰 세마포를 입은 어린 양의 신부와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루고 있는가!

혼인식이 끝난 후에, 하늘의 신랑은 그의 왕국를 받아, 자신이 피흘려 죽으셨던 곳이며, 자신의 신부를 얻었던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다윗의 보좌"를 그분에게 주시고 "천년" 동안 이 땅을 다스리게 하실 것이다. "신혼 여행"은 얼마나 즐겁고 재미있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옴으로 신랑과 신부를 위해서가 아닌 이 땅을 위해서 끝나게 될 것이다. 그 다음 지구가 "불침례"를 받은 후 거룩한 도성이 내려올 때 그들도 함께 내려와 새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교회"에 관한 도표를 보라.

 

 

 

12. 왕  (THE KING)

만일 하나님의 목적이 이 땅 위에 하나의 왕국(Kingdom)을 세우려는 것이면 누가 이 왕국의 왕(King)이 될 것인가? 그렇다면 성경에는 이에 관한 어떤 내용이 있는가? 우리는 구약에서 이 왕에 대한 "예언적인 초상화를 볼 수 있고, 신약에서는 "역사적인 초상화"를 볼 수 있다.

이 두 초상화는 복사본처럼 서로 잘 들어맞는다. 화가가 먼저 그림의 밑그림을 그린 후 자세한 부분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시 방법도 밑그림부터 시작해서 차차 세밀하게 그려감으로써 마침내 완성된 그림을 볼 수 있게 하신다.

"예언적 초상화"의 첫 밑그림은 창세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주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의를 두리니, 그녀의 씨는 너의 머리를 부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부술 것이라}(창3:15).

여기에서 뱀을 물리칠 미래의 "여자의 씨"가 언급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신약에서 사탄을 이기신 예수님의 마지막 승리를 놓고 볼 때 얼마나 확실한지 알 수 있다.

두 번째 "예언적 초상화"의 밑그림은 홍수가 있은 후 1700여년이 지나서 나타나는데 이는 창세기 9:26-27절에 약속된 여자의 씨가 "셈의 혈통"에서 나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세번째 밑그림은 400년 후 하나님께서 왕이 나올 한 민족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 나타난다. 그 당시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고, 육신적으로 볼 때도 자식을 얻기는 전혀 불가능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자기 집 청지기인 엘리에셀로 하여금 자기의 상속자가 되게 해 달라고 바랬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은 너의 상속자가 되지 않을 것이니, 네 자신의 몸에서 나올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신다(창15:4). 그러나 잉태할 나이가 훨씬 지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브라함이 그녀의 여종인 이집트 여인 하갈을 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했고 이에 아브라함은 동의하여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난다(창16:1-16).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말씀드리기를 "이스마엘이나 주 앞에서 살게 해 주소서!" 하더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 사라가 참으로 네게 한 아들을 낳을 것이라. 너는 그의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그의 씨에게 내 언약을 세우리니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스마엘에 대해서도 내가 너를 들었나니, 보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었으니 내가 그를 다산케 하며 크게 번성케 하리라. 그가 열두 통치자들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그러나 나는 나의 언약을 사라가 내년 이맘 때 네게 낳아줄 이삭과 더불어 세우리라." 하시더라}(창17:18-21).

여기서 우리는 다시 선택과 제한의 원칙을 볼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신 당시에 어느 이스마엘의 자손이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이므로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했다면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사이의 아들인 이삭을 통해 나오기로 언약 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이삭은 결혼을 했고, 리브가 사이에서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여기서 또 하나님의 선택이 이루어지는데 하나님께서는 벧엘에서 야곱에게 자신이 선택받은 자임을 알게 하셨다(창28:10-15).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언약이 장자인 에서를 지나쳐 버리고 야곱에게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에서의 후손 중에서는 누구도 메시아라고 주장할 수 없다.

야곱에게 열 두 아들이 태어났다. 그런데 과연 어느 아들에게 언약이 이어질 것인가? 놀랍게도 장자 르우벤이나 야곱이 총애하는 요셉이 아니라, 주님은 레아의 넷째 아들 유다를 선택하셨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들이 찬양할 자라. 네 손이 네 원수들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서 절하리라. 유다는 사자의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네가 먹이를 놓고 올라갔구나. 그는 몸을 구부리고 웅크림이 사자 같고 늙은 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성나게 하리요? 홀이 유다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며

실로가 올 때까지

입법자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니 그에게 백성의 모임이 있을지어다.} (창49:8-10).

여기서 그 언약은 확실해진다. 메시아는 대대로 제사장직을 이어 갈 레위 지파를 통해서가 아니라, 유다 지파를 통해서 오셔야 한다는 것이다. "홀"은 왕권을 의미하고, "실로"는 메시아의 이름이다.

이 약속은 475년을 지나 다윗의 시대로 넘어오는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말씀하셨다.

{네 집과 네 왕국이 네 앞에서 영원히 서리라. 네 보좌가 영원히 서리라}(삼하7:16).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신 후 이 언약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나의 택한 자와 한 언약을 맺었으며, 내가 나의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씨를 영원히 견고하게 세울 것이요, 네 보좌를 모든 세대에 세우리라." 하였노라. * * * 내가 나의 거룩함으로 한번 맹세한 것은 다윗에게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리라는 것이라. 그의 씨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요, 그의 보좌는 내 앞에 태양 같으리니. 그것이 달과 같이, 하늘에 있는 신실한 증인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서리라." 하셨나이다. 셀라}(시89:3-4;35-37).

이 언약은 무조건적인 것이었다. 다윗이 죽은 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먼저의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확인 시켜주셨다. 다윗 이후에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에 빠져고(렘33:17-26), 그 언약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는 영원히 그의 보좌에 앉을 사람이 한 사람(아들)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약속은 우리가 지금 아는 것처럼 다윗의 보좌의 계승자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한데, 솔로몬이 죽은 후 왕국이 양분되어 B.C.587년에 유다의 마지막 왕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의 보좌"에 앉을 "미래"의 왕에 대해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예언한다.

{주가 말하노라. 보라, 그 날들이 오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키리니 한 왕이 치리하고 번성하여 지상에서 심판과 정의를 실행하리라. 그의 날들에 유다는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은 안전하게 거하리라. 이것이 그의 이름이니 그는 '주 우리의 의'라 불리리라} (렘23:5-6).

이 예언을 이사야서 11:1-2절과 비교해 보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의 뿌리들에서 한 가지가 자랄 것이라. 주의 영이 그의 위에 머물리니, 지혜와 명철의 영이요, 계획과 능력의 영이며, 지식과 주를 두려워하는 영이라}.

여기서 두 예언에 공통으로 쓰이고 있는 "가지"란 단어를 주목해 보자. 그리고 이사야의 예언 중 마지막 부분인 "주의 영이 그의 위에 머물리니"와 누가복음의 어린 예수를 설명한 부분을 비교해 보자 "아기가 자라매 영 안에서 강건해지고 지혜로 충만하며 또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눅2:40) 우리는 어렵지 않게 누구를 예언한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구약 성경에 언급한 메시아가 나올 분명한 계보가 있었으며, 그분은

하나님의 혈통에서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이 신비가 어떻게 가능한가는 선지자 이사야의 다음과 같은 기록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한 표적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보라, 한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7:44).

예레미야는 31:32의 "여자가 남자를 두르리라"라고 한 것은 한 여자가 육신적인 아버지 없이 "남자 아이"를 자궁에 담을 곳이라는 의미이다.

후에 이사야는 말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으니, 정부가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놀라운 분이라, 상담자라, 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원하신 아버지라, 화평의 통치자라 불리리라. 그의 정부와 화평의 증가함이

다윗의 보좌

와 그의 왕국 위에 바르게 세워지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공의와 정의로 그것을 굳게 세우는데 끝이 없으리라. 만군의 주의 열성이 이것을 실행하시리라}(사9:6-7).

이 구절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열쇠는 어디에 있을까?

{그 후 여섯째 달에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나사렛이라고 하는 갈릴리의 한 마을에 보내시어

다윗의 가문

에 요셉이라고 하는 남자와 정혼한 한 처녀에게로 가게 하시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더라. 그 천사가 그녀에게 와서 말하기를 "기뻐하라. 은총을 받은 자여,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니 너는 여자 중에서 복 받은 자로다."라고 하니 그녀가 천사를 보고 그가 전하는 말에 몹시 당황하여 이런 인사가 어떻게 된 것인가 생각하고 있을 때에 그 천사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마리아야, 두려워 말라. 이는 네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음이니라. 보라, 네가 너의 태 안에 임신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는 위대하게 될 것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리울 것이요, 또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보좌

를 주실 것이며 그는 야곱의 집안(이스라엘)을 영원히 통치할 것이요 그의 왕국은 무궁하리라."고 하니라}(눅1:26-33).

예수님은, 마리아가 요셉과 혼인한 후 생긴 자연스런 출생이 아니라는 것은, 요셉이 약혼한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고 조용히 파혼하려 했으나, 천사 가브리엘에 의해 마리아의 임신한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므로 거절하지 말도록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보면 확실해 진다(마1:18-20). 이것은 가브리엘이 직접 마리아에게 한 말에서 확실해진다.

{성령께서 너에게 임하실 것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덮으리니, 그러므로 너에게서 탄생하실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우리라}(눅1:35).

선지자 이사야가 "보라, 한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라고 예언한 것은 당대의 어떤 처녀에 관해 예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다음과 같이 이를 반박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해석하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마1:22-23).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마리아가 아들을 낳기까지 요셉이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았다는 마태의 기록에서도 분명해진다(마1:24-25).

창세기3:15의 언약은 "여자의 씨"를 통해서 성취되기로 되어 있었다. 성경에서 "씨"라는 단어는 언제나 남자나, 짐승의 수컷에만 적용되는 단어이므로 "여자의 씨"란 특별한 예외이다. 이것은 성령에 의해 잉태한 마리아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었으며 또한 "씨들"이 아닌 "씨"로써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갈3:16).

예수님의 계보는 다음과 같은 두개의 계보를 통해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첫번째 것은 마태복음에서 요셉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두번째는 누가복음에서 마리아에서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왕"에 대한 도표를 보라. 이 계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얼마나 완벽한 보호조치를 취하셨으며, 예수님을 통해 성경이 문자적으로 성취되도록 얼마나 유념하셨는가를 알 수 있다.

마태는 예수님의 계보를 솔로몬에서 다윗왕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누가는 나단을 통해 다윗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두 족보에는 비슷한 이름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족보가 긴 집안을 살펴보면 흔히 있는 일이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마1:16)과 "요셉은 헬리의 아들이요"(눅3:23)은 쉽게 풀린다. 왜냐하면 요셉이 야곱과 헬리 두 사람의 아들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은 "아들(son)"을 이탤릭체로 썼는데 원본에는 없으나 뜻을 맞추기 위해 쓰여졌다.) 그 단어는 바로 "아들(son)"라는 단어인데, 이 의미는 "헬리의 사위요"라는 뜻이다. 왜냐면 분명히 요셉은 야곱과 헬리, 둘 모두의 아들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의 계보는 마리아의 계보이다.

그러면 왜 한 계보는 나단을 통해서 또 다른 하나는 솔로몬을 통해 기록하였을까? 왜 마리아의 계보로 충분하지 않았는가? 다윗이 헤브론에 거하고 있을 때, 그는 아직 유다의 왕에 지나지 않았다. 다윗은 여섯명의 아들들 두었는데 이들 중에 세명은 유아기에 죽은 것 같다. 세 아들 중에 암논은 살해되고 압살롬은 아버지를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다 죽었으며, 아도니야는 왕위를 탈취하려다 결국 솔로몬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왕위 계승권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다스린 후에 태어난 아들들에게 물려졌다.

다윗이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그에게 생긴 아들들의 수는 상당히 많은데(대상3:1-9) 이들 중에서 나단과 솔로몬 두 사람만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솔로몬은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나단은 솔로몬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솔로몬의 왕위 계승권을 두고 경합을 벌였을지도 모른다. 솔로몬의 왕권에 나단이 권리를 주장한 흔적이 있지만 예수님이 다윗의 왕권을 타고 났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왕권의 법적 상속자인 나단을 통해서 다윗 왕의 직계 자손이 되도록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해서는 다윗의 보좌를 계승할 권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마리아는 솔로몬을 통한 "왕의 직계 자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다윗의 왕권을 계승할 권리는 어떻게 얻어질 수 있는가? 오직 결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의 놀라운 방법으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의 길을 마련하셨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조상의 죄 때문에 예수님의 "육신적인" 아버지가 될 수 없는 남자와 마리아가(잉태한 후)와 결혼하도록 하셨다.

요셉은 솔로몬 "왕의 혈통"을 잇는 다윗의 직계 자손이었다. 그러나 이 계보는 여코냐(마1:22,12), 즉 코니아에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22:24-3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는 그의 씨에서는 아무도 번성치 못하며 "다윗의 보좌"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자가 더 이상 없을 것임이라}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예수님의 "육신적인" 아버지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씨에서는 누구도 다윗의 보좌에 앉아 유다를 다스리지 못한다고 기록되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셉이 예수님의 친아버지라는 주장이 완전히 거짓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확고하게 예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셉과 마리아의 결혼으로 예수님은 요셉의 양자가 됐고, "법적인 상속자(legar heir)"가 됐다. 그래서 코니아에게 내려진 저주(렘22:24-30)와 관계없이 왕권은 예수님에게 옮겨졌는데, 즉 예수님께 나단과 솔로몬을 통한 "다윗의 왕좌"를 이을 완전한 권리가 주어진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의 조상들에 대해 의심이 생기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카이사 아우구스토의 마음을 움직여 예수님의 탄생할 시기에 조세등록을 하게 하여 모든 유대인들 등록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게 했다.(눅2:1-5) 여기서 마리아도 같은 집안이었기 때문에 동행한 것이다. 만일 그들의 이름이 호적의 계보에 없으면 등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당시에 다윗왕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들의 계보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아마도 마태와 누가는 이 호적으로부터 계보를 얻었을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다윗의 보좌"에 앉으실 분이라는 주장이 흠없이 완전한 것이라고 예루살렘에 알려지지 않았다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환호를 받았을 때(마21:9-11), 그분을 사기꾼과 위선자라고 반박했을 것이다. 그 당시 모든 족보는 성전에 보존되어 있었으므로 누구나 쉽게 족보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타이터스가 A.D. 70년에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괴시킴으로 이 기록들은 모두 소실되었다. 그 이후로는 마태와 누가의 족보만이 보존되어 다윗왕으로부터 예수님에게 이르는 계보를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윗왕으로부터 직접 이어지고 손상되지 않은 계보를 오늘날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하게 살아계신 분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셨으며(마2:2), "유대인의 왕"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요19:19), "유대인의 왕"으로 다시 오실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신 것이다(딤전2:5).

어떤이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틀린 말이다. 그는 "우물가의 여인"에게 바로 자신이 메시야임을 밝히셨고(요4:25-26), 빌라도에게도 그러하셨다(요18:33-37).

또한 구약에는 메시야의 조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출생의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구약의 예언과 같이 그의 출생의 시기를 알아낸다면 그분이 메시야라는 강력한 증거를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의 메시야가 나타나실 여러 가지 증거들 예수님을 증거한다면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다니엘서9:25에는 예루살렘을 복원하여 건축하라는 명령부터 "메시야 통치자"까지 "69주(Week)"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여기 "69주(483년)" 확실한 기간이 있고, 이 기간은 예루살렘을 회복하여 다시 재건될 것이라는 약속이 날 때부터 날짜가 계산된 것이다. 이 성전이 건축되어지기 시작하는 날은 느헤미아2:1 "아탁세르세스왕 제 이십년 니산 월의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B.C.445년 3월14일을 말한 것이다. 우리는 "1년을 날로 계산하는 법"을 쓰는 "예언의 연대기"란 제목에서 "이방인"에 관해 쓰인 장에서 69주가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위엄있게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A.D. 30년 4월2일 하루로써 그 기간이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예수님의 날에 대한 예언을 주의 깊게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이 메시야인지 아닌지를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B.C.445년 3월14일로 날짜가 찍힌 아탁세르세스왕의 유명한 칙령의 사본이 보관되어 있어 다니엘의 예언으로부터 "메시야 통치자"가 언제 올것인가에 대해 날짜는 몰랐더라도 연도는 계산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성경 말씀에 대한 예언을 소흘이 여기는 교사들과 설교자들에게 얼마나 큰 경고가 되는가? 초림하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의 재림도 이런이들에게는 갑작스러운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메시야가 나타날 시기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태어날 장소에 대해서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러나 베들레헴 에프라타야, 네가 비록 유다의 수천 가운데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통치할 자가 너로부터 내게로 나오리라. 그의 나오심은 옛부터요, 영원부터였느니라} (미5:2).

우리가 아는 것은 이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됐다. 메시야의 탄생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던 몇가지 예언이 있었다. 그들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것, 처녀에게서 나신다는 것, 그리고 이집트에서 나오신다는 것과 나사렛 사람이라 불려진다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사실 그대로 이 모든 예언은 문자 그대로 예수님께서 성취하셨다.

그런데 "메시야 통치자"가 오시는 "때"를 알려주고 있는 다니엘의 예언에서 거의 동시에 "육십이 주 후에는 메시야가 끊어질 것이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며"라고 말하고 있다(단9:26). 그렇다면 그가 "다윗의 보좌"를 물려받고, "야곱의 집"을 영원히 통치할 것이며, 그의 끝이 없으리라는 예언은 어떻게 성취되는 것인가? 대답은 한가지 밖에 없다. 그분은 두번 오심으로 해결된다. 그는 먼저 "고난 받는 구주"로써 오신 후 다시 "왕"으로 오시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성경을 오해했던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그들은 메시야의 고난과 그의 영광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벧전1:11). 그들은 메시야가 어떻게 전능한 왕도 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백성의 죄와 허물 때문에 죽을 것인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도 오직 한가지 대답밖에 없는데 그것은" 부활에 의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시편16장을 구주와 관련한 내용으로 이해는 했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하신 이'로 썩어짐을 보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시16:10).

베드로는 오순절 날에 설교들 통해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선지자 다윗 시편16:10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했다. 베드로는 다시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셨으니, 우리 모두가 그 일에 관한 증인이라."(행2:25-32)라고 덧붙였다.

"나사렛 예수"가 언약된 "다윗의 아들"이였고 그가 다윗의 왕위를 받아 통치하실 분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분은 배척 당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셔 지금은 왕국을 통치할 때까지 아버지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다윗의 보좌"는 이 땅에 있었지 다른 어느 곳에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보좌에서 통치할 것이며 그의 왕국은 "영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구약에 있는 모든 예언들을 거짓말로 만드는 것이 된다. "다윗의 보좌"는 2600년간 비워져 있다. 그러나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무너졌던(행15:13-18), "다윗의 성전"이 재건할 시기가 오면 "다윗의 보좌"는 다시 회복되어 그리스도께 주어질 것이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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