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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n번방 사건, 아동음란물 아닌 ‘성착취 영상물’ / 윤정숙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3. 27. 04:31

[왜냐면] n번방 사건, 아동음란물 아닌 ‘성착취 영상물’ / 윤정숙

등록 :2020-03-25 12:01수정 :2020-03-26 02:41

 

윤정숙 ㅣ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국제협력실장(연구위원)

 

텔레그램 엔(n)번방 사건으로 아동과 여성이 성착취를 당하는 은밀하고도 잔인한 방식이 우리에게 공개되면서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인터넷 및 통신 기술’(ICT)을 활용한 성범죄가 급속도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우리는 조두순, 김수철과 같은, 아동과의 접촉을 통해 직접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유형들을 목격해왔다. 그러나 최근 아동과의 접촉 없이도 성폭력이 가능한 ‘비접촉’ 성범죄가 증가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터넷·통신 기술의 영향이 크다. 인터넷 특성상 익명성은 보장되면서 정보의 공유성이 증폭되기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순식간에 증대된다. 익명과 공유에 기초한 가해의 행위 양상은 본질적으로 성적 유인을 쉽게 만들고 정보공유로 죄의식을 분담하게 만들며, 희생이 된 피해자 역시 이미 정보화된 피해 사실이 공개될까 봐 그 행위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상이 발생한다.

 

이번 엔번방 사건에서 보듯이 가해자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메신저에서 비슷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단계적으로 가입시켜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었으며, 피해자를 물색하는 단계에서는 성적 그루밍과 유인을, 이후 가해행위를 지속하는 단계에서는 비밀 폭로를 미끼로 한 협박행위를 계속하였다. 성적 영상을 제작하는 방식도 피해 아동이 스스로 생성한 이미지를 활용하였고, 성노예화한 일부 잔인한 영상은 상업적 거래를 하면서 이를 위해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를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모든 행위가 오직 인터넷 공간상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은 아동 성범죄가 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화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물론 사이버 공간상의 성범죄가 절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측면 역시 이번 사건이 보여주고 있는데, 가해자들이 오프라인에서 아동을 직접 만나 성폭행하였고 이 장면 또한 촬영되어 배포·유통되는 등 상업적으로 거래되었다.

 

종래의 성범죄자와 다르게 이러한 온라인 성범죄자는 디지털 기술에 매우 능숙하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20대와 30대의 젊은 남성이 많고 화이트칼라층이라는 차이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사법제도가 이런 새로운 종류의 사이버 성범죄 처벌을 모두 다루고 있는가? 가령 엔번방의 가해자들은 모델 광고나 고수익 데이트 알바와 같은 금전적 이득을 미끼로 접근해 피해 아동과 친숙해지기 위한 대화를 나눴을 것이며 이에 기반해 점점 수위가 높은 이미지들을 요구하였을 것이다. 사이버 공간상에서 벌어진 이러한 일련의 친숙해지기는 ‘성적 그루밍’이라고 불리는데 온라인 공간상에서 친구 만들기에 익숙한 지금의 아동·청소년 세대에게는 단 몇분 만에도 성적 그루밍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행법은 성적 그루밍을 처벌하는 규정이 전혀 없다. 그뿐만 아니라, 성적 의도를 지닌 사이버 공간상의 회유, 협박, 스토킹 등도 처벌하는 규정이 없다. 전세계 70%의 국가가 이를 범죄화하고 있는 것(유엔 보고서)과 매우 대조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법 전문가들은 성적 그루밍은 처벌하기 어려운 성범죄 예비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성적 그루밍이야말로 매우 포식자적인 행동임을 각성해야 한다.

 

앞으로 아동음란물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지양할 것을 제안한다. 아동음란물은 기존의 음란물 표현 대상이 아동으로 전환되어 야동과 같은 이미지로 심각성이 덜 인식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보다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성착취 영상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아동과 청소년(여성도 마찬가지)이 그 용처도 모른 채 협박과 회유에 의해 성적 영상물 제작에 이용되는 것은 명확한 성적 착취이기 때문이다. 성적 착취에 의해 생산된 영상물을 소지하거나 감상하거나 유포·생산한 죄는 무조건 인간의 기본권을 말살하는 행위에 가담한 것이므로 처벌을 지금보다 더 무겁게 해야 할 것이다. 아동 성착취 영상을 소지한 사람이 지금까지 어떠한 처벌을 받았는가? 사법당국은 아동 성범죄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국민의 불신이 생겨난 지점이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인지 세심히 살펴 변화된 제도로 국민의 청원에 응답해야 할 것이다.

 

연재n번방 성착취 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