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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위대한 신앙위인 38인의 이야기/엔드류 머레이-2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9. 9. 08:49

엔드류 머레이-2

 

십자가에 못 박힘

 


앤드류 머레이 씀 / 정 중은 옮김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기어 있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 6:5)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나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더불어 교제하고 그 죽으심의 모든 축복과 권능에 참여하는 확신을 위와 같이 표현합니다. 이는 참으로 자신이 죽었음을 깨닫는 사도의 진정어린 고백입니다. 사도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라.” 이 같은 주님과의 연합은 얼마나 복된 것인지요! 그분의 죽으심을 진정 나의 죽음으로 여길 수 있음은 곧 하나님께 대한 주님의 온전한 순종, 죄를 이기신 그분의 권세로부터 오는 온전한 구원을 나의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의 권능이 매일 나의 육신을 죽이는 신적인 권능으로 역사하는 것을 믿음으로 깨달으며 예수님의 부활 생명에 합당하도록 나의 모든 삶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새로 태어난 생명이 본성의 죽음을 통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도록 힘씁시다.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라는 암시적인 표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자 안에 거하는 것의 의미를 말해줍니다. 접붙인 가지와 원 가지가 연합할 때 그것들을 단단히 고정하고 묶어서 접붙인 가지가 원 줄기가 잘린 상처 입은 자리에서 자라도록 해주어야 하며, 그래야만 거기에서 새로운 가지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내적 생명 안에 다른 가지를 받아들이도록 몸을 찢고 맨 살을 드러내는 상처가 없이는 접붙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이러한 상처를 통해서만 양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하며, 보다 더 튼튼한 가지로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죄인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에 심겨질 때에야 비로소 그분 안에 있는 생명과 권능에 동참하는 자로서 그 부활의 형상 속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에서 그리스도는 상처를 입었으며 그분의 열려진 상처 안에서 우리가 접붙임을 받을 수 있는 처소가 예비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접붙임을 받는 가지를 그 자리에 고정시키면서 실제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이곳이 앞으로 너를 키워줄 곳이니까 이 상처난 곳에서 살아야 한다.” 주님을 믿는 심령들에게도 이와 동일한 메시지가 전달됩니다. “예수님의 상처에 거하십시오. 그곳은 연합과 생명과 성장의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당신을 받아들이기 위해 주님께서 얼마나 그분의 마을을 열어놓고 계신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그분과 하나로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서 그분의 몸이 찢겨진 것을 보게 되며, 그분의 신적 성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축복을 받을 수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접붙임을 받은 가지가 그 본래 자라던 줄기로부터 다른 가지에 맞도록 잘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믿는 이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데 알맞도록 깎여야만 합니다. 상처가 난 가지들은 서로에게 알맞도록 깎여져 맞추어집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고난과 당신의 고난 사이에도 교제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체험이 당신의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견디시고 또 십자가를 선택하는 데서 드러내신 특성들이 또한 당신의 것이 됩니다. 죄에 대하여 당신은 주님께서 거룩하신 하나님이 내리시는 저주와 의로운 심판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고 순종하신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죄와 저주의 짐을 진 당신의 생명을 주님처럼 죽기까지 포기하여 새 생명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겟세마네와 갈보리의 자기 희생을 통해서만이 주님처럼 부활 생명의 열매를 맺고 기쁨을 얻는 길을 찾게 됩니다. 접붙임을 받는 가지와 상처가 난 원가지 사이에 유사성이 많을수록 서로 상처가 더욱 쉽게, 확실하게, 완전하게 연합하여 자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하나님께 대한 속죄로서 바라볼 뿐 아니라 마귀를 이긴 승리로서 보아야 합니다. 또한 죄책으로부터의 구원뿐 아니라 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으로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나와의 밀접하고 친밀한 연합과 교제를 위하여 그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으신 권능에 동참하는 자가 되도록 십자가의 주님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승리의 새 생명에 참여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간절한 소원을 품고 일편단심으로 자신을 맡기며 그분의 죽으심과 성령 안에서 하나로 일치된 친밀한 교제를 위하여 자신을 주님께 위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십자가가 왜 연합의 장소가 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과의 충만한 연합으로 들어오셨으며, 그리하여 십자가 위에서 저주 아래 있는 족속의 일원이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실을 마음껏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생명의 왕자이신 주님께서 십자가 위의 죽음에서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나누어 주신 생명은 죽음에서 다시 일어난 생명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의 교제를 통하여 그 생명의 권능을 체험합니다. 죽음과 생명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나를 대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자신을 주님의 자리에 내놓고 그곳에 거해야 합니다. 주님과 내가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처소가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 위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스스로 선택하셨지만 나는 죄로 인한 저주를 받아 거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를 찾아 오셨지만 나는 오직 그곳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그곳에 있는 나를 찾아 오셨을 때 그곳은 저주의 장소였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 저주를 체험하셨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을 축복의 장소로 만드셨습니다. 이제 내가 그 축복을 체험하게 되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우리를 저주로부터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셨을 때에도 그분은 여전히 성부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나와 교제하시면서 나의 저주와 나의 죽음에 참여하신 것입니다. 내가 아직 자연 그대로의 모든 악한 본성을 지닌 채 죽어 마땅한 자로서 주님의 자리에 섰을 때, 주님의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하나가 되고자 오셨을 때, 그분은 부득불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주의 최종적인 목적과 결과는 항상 십자가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과 하나가 되고자 할 때 나는 십자가를 피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곳에서는 생명과 구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을 저주 때문에 주님께서는 부득불 나와 온전히 연합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십자가로 향하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축복 또한 주님과 연합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십자가를 통해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나의 십자가를 그분 자신의 것으로 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그분의 십자가를 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즉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내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안에 거하여 그분의 달콤한 사랑의 맛을 보고 그 생명의 권능과 그 구원의 완전하심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같이 깊은 신비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고 거기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주님과 교제하고자 하지 않는 자들은 주님이 그분과 교제하도록 초대하신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합니다. 또 세상의 자녀들과 함께 겪어야 하는 인생의 일상적인 질고를 견디는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닮아가는 것을 의미함을 모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모든 육체의 욕망과 쾌락을 완전히 부인하며 모든 언행심사에서 세상과 완전히 결별하여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고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타인을 위하여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며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자의 특성을 말해주는 표가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하신 그리스도 안에 거합니다.”

 


당신은 모든 행위에 있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주님이 그 은혜로 지키시는 데로 주님과 더불어 친밀한 교제의 삶을 살려고 합니까? 성령님께서 이 비밀스러운 복된 진리 속으로 인도하시도록 기도합시다. 아직 십자가의 걸림돌이 되어 있을 때에도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깨닫고 고백했습니다(마 16:16-17, 21, 23). 우리는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피를 믿는 믿음과 새롭게 하시는 생명을 가지고 십자가 아래 거하면서 주님이 의도하시는 온전한 장성(長成)의 목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 주님과 교제하는 삶 속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구주 예수님!

당신을 믿는 것뿐 아니라

당신 안에 거하는 것도 가르쳐 주옵소서.

그리하여 용서의 근거가 될 뿐 아니라 생명의 법인

주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게 하소서.

주께서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밀접한 교제를 나누며 함께 못 박히도록 한

십자가를 사랑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가르치사 성령 안에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같이

그 성령이 우리를 온전히 소유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십자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축복과 권능에 동참하게 하소서.

 


-앤드류 머레이 씀 「주 안에 거하라」(기독교문서선교회)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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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하지 않는 죄

 


                                                                                                                                                               -앤드류 머레이

 


살아 숨 쉬는 양심과 철저히 회개하는 마음을 지니기 위해서는, 자기 죄를 낱낱이 아뢸 필요가 있습니다. 고백은 철저히 자신과 관련된 것이어야 합니다. 목회자 모임에서 우리 목회자 각자가 부끄럽게, 아니“죄스럽고도 참으로 죄스럽게” 고백해야 할 죄는 아마도 기도하지 않는 죄일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 왜 그토록 큰 죄이겠습니까? 처음에는 기도하지 않는 것이 단지 결점으로만 생각됩니다. 시간이 부족하고 잡다한 일이 산재해 있다고 말할 뿐 기도하지 않는 상황이 심각한 죄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앞으로는 기도하지 않는 죄가 진정 죄로 느껴지기를 바라십시오.

 

 

 

1.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너무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우리를 초대하시는 지극히 영화로우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초대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필요한 것을 구하고, 하나님과 친교 하는 데 따르는 축복을 맛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자신의 외아들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우리는 최고의 영광과 구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늘의 특권을 얼마나 누립니까? 기도에 겨우 5분을 할애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시간이 없다고, 기도하고픈 마음이 별로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단 30분도 하나님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그들이 전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도 날마다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증거이자 하나님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는 기도에서 기쁨을 얻지 못합니다.

 


친구가 방문했을 때, 그들은 친구와 대화할 시간을 내며, 그 대화를 즐기기 위해 희생을 치르고라도 애써 시간을 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흥미를 가진 일에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친고를 나누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피조물에게는 시간을 내지만, 날이 가고 해가 가면서 점점 하나님과 지낼 시간은 단 한 시간도 내지 못합니다. 하나님과 친고를 나눌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큰 치욕을 안겨드리는 것입니다. 이 죄를 뚜렷이 알게 되면, 우리는 대단히 부끄러워하며 이렇게 외치지 않겠습니까?

 


“화있을진저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오 하나님 자비를 베푸시어, 기도하지 않는 이 끔찍한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2. 기도하지 않는 것은 영적 삶이 병드는 원인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대체로 우리 삶이 여전히 “육체”의 권세 아래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도는 생명의 맥박입니다. 의사는 맥박을 검사함으로써 심장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습니다. 목사나 교인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치명적인 병에 걸렸다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본연의 소명을 잘 수행하지 못한다는 불평이 있습니다. 교인들에게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세상의 권세로부터 교인들을 구하지 못한다는 불평, 또 하나님께 헌신하는 거룩한 삶으로 교인들을 인도하지 못한다는 불평이 많습니다. 믿음 없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을 전하라고 말씀하셨건만, 교회는 수백만의 믿음 없는 자들에게 무관심하다는 비판도 많습니다. 세상에서 일하는 수천의 그리스도인 일꾼들이 더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사역에 기도를 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 다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연구와 교회 일에 쏟는 그들의 열정 한가운데에, 설교와 대화에 임하는 그들의 모든 성실함 한가운데에 끊임없는 기도가 있어야 하건만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의 기도에는 성령의 약속과 하늘의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의 영적 삶에 능력이 없는 이유는 오직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목사가 기도하지 않음으로써 교회는 엄청난 손실을 당한다.

 

신자에게 기도하는 삶을 훈련시키는 것은 목사의 임무입니다. 그러나 목사 자신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일에 거의 무지하고, 날마다 성령으로부터 은혜를 충분히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는 자기 수준 이상으로 교인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목사 자신이 가는 길이 아닌 이상, 열정적으로 어떤 길을 제시하거나 어떤 일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친교인 기도에 대해, 기도의 축복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릅니다. 기도의 축복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더 많이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들은 기도의 축복을 얻을 때까지 계속 기도하라는 자극을 설교에서 지속적으로는 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목사가 능력 있는 기도의 비밀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고, 목회 현장에 기도를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회는 본질적으로 반드시 기도가 필요합니다. 또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죄를 목사가 직시하고 그 죄에서 해방된다면, 우리 교인들에게 얼마나 큰 변화가 있겠습니까!

 

 

 

4. 이죄를 극복하고 버리지 않는 한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을 이룰 수 없다.

 

이죄를 극복하고 버리지 않는 한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은 선교에서 가장 필요한 일이 주님께 헌신하여 영혼 구원을 위해 힘써 기도할 사람들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먼저 목회자들 안에서 완전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교인들이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설교, 심방, 교회업무가 아니라,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여 마침내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는 것입니다, 목사가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교인들이 밤낮으로 기도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생각하고 일하고 바랄 때, 우리는 기도하지 않는 죄를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죄를 뽑아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와 능력을 통해 그 죄에서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기도하지 않는 죄! 이 죄를 지으면, 주님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우리 마음을 누르소서. 예수님의 이름과 능력으로 우리가 이 죄에서 벗어날 때까지, 우리 마음에 평안이 없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기도학교' 중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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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영


앤드류 머레이

 

성경을 필생의 안내자로써 진실로 믿는사람들 중에도 보혈과 성령에 대한
온전한 가르침을 바로 아는 사람이 참으로 드물다는 게 슬픈 사실입니다.

기초가 된 것은 그리스도에게 온 죽음이었고
충만해 지는 것은 우리 안에 나타날 그분의 생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받으셔서 베푸실 수 잇는 것은
그분의 피 흘림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세례는 사역을 위한 능력으로써 특별히 주어지기도 합니다.
이 경우 성령세례가 지속되려면 주님을 증거하라는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과 성령세례는 생명의 순환을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신령으로란 말은 영 안에서란 뜻입니다.
영 안에서란 말은 성령 안에서란 뜻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진리와 능력이 되게 하시는 것은
오직 성령만의 사역인 것입니다.

또 성령 없이 말씀에 정통하면 극히 육신적인 사람이 됩니다.
즉 겸손과 온유에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가라지와 같은
신자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을 정확하고 바르게 이해한다면
자연적으로 말씀이 전해 주고자 하는 축복에 이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착각은 자유입니다
신학박사가 되는 것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옛 성현들이 말한 성경말씀은
같은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영원하신 말씀과 영원하신 성령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오신 성령의 임재가 곧 구원입니다.

우리는 단지 십자가와 죄의 용서를 신뢰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아니 됩니다.
온전한 데 나아가지 않는 신앙은 결국 타락하고야 맙니다.

성령이 주어지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인격이 된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에 참여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안에 계시면서 행하시는 것처럼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대신해 행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진리가 마음 중심에 들어갈 때 그것은 영의 생명이 됩니다.
그럴 때 인간의 영은 하늘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됩니다.
그러나 진리는 영혼의 외적 부분들, 즉 지식과 이성에만 머무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진리가 그 외적 부분 안에 자리잡고 거기서 그 영향력과 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로 우리를 만족하게 해줄 때 그러한 진리란 인간적 주장과
인간적 지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써 영의 참된 생명에는 결코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생명이나 선이 없다는 고백은
우리에게 아무런 지혜가 없다는 고백을 동반하여야 합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보좌에 앉으신 분을 볼 수 없었고
세상에 대하여는 그것이 감추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의 모든 것이 소망이 없고 공허함을 느낄 때
성령께서는 은밀히 하나님이 보증하신 것을 이루시고
영광 받으신 자 곧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그분의 처소를 정하셨음을
경험하게 해 줍니다.

신자는 말없는 경배와 찬미 가운데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알게되고
마음속의 그분의 보좌가 공의 가운데 세워짐으로써
"성령이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는 약속이 이제 성취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위대한 사역 중의 하나는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계시하시되
생각이나 기억 속에 뿐 아니라, 우리 내면의 마음 중심에,
그리고 우리의 생명과 경험 속에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장 큰 죄는 불 신앙, 곧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죄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세상의 영입니다.
본성적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여러분이 드리는 각자의 희생 제물에 죽음이 있어야 하는 데
이는 자아와 그 능력을 죽음에 내어주고 희생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갈보리산 십자가에서 여러분이
그 존귀하신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 안에 있습니다.

거룩한 침묵 가운데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는 것 즉
[올바르게 기도할 지혜도 없으며 올바르게 행할 능력도 없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여러분을 보시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결핍의 표현이고 비어있음의 표현입니다.
기다림은 주와 함께 죽었음의 표현이고 거짓 없는 낮아짐의 표현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가난함과 연약함에 대한 의식과
부러울 것이 없는 부요와 능력의 기쁨은 함께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완성자이시고 율법의 마침이셨던 것처럼
성령은 모든 복음의 완성자이시고 성취자이시며 유효자이시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그 모든 것을 우리의 것으로
해주시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것도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성령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이 택하신 연약한 것들 속에 감추시는데
이는 육체가 그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되신 세계 그것이 신앙인이 가는 목적지입니다
연약한 가운데도 이 한가지 목적에 충실하여 순종과 증거가운데
어떤 희생이라도 무릅쓰고 기꺼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려는 사람은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받을 것입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우는 것]이나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은 우리의 본성적 기대와는
상반되는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연약함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 능력이 우리의 소유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 자신을 소유하고 있을 때만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능력을 발휘하십니다.

신자의 영혼구원에서 시작한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신자의 몸의 구속을 거쳐 만유를 구원하는데 까지 이릅니다.

하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을 다 얻지 못한다는 것은
오늘날 신자들의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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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학교에서

앤드류 머레이

그리스도의 순종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6)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되었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빚진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아담안에서 죄인이 된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인이 된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의를 빚졌다는 뜻이다.

아담의 불순종이 우리를 죄인으로 만든 것처럼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를 의인으로 만든다.

(나는 순종할 능력이 없는것을 하나님이 더잘아시는데

나보고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이루신 예수님의 순종을 믿음으로

그믿음을 의로 여김받아서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아서

우리는 그안에 들어가서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순종에서 온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유업으로 얻은 보화중 가장 보배로운 것은

이것이다.

 

그러나 이 의를 사랑하고 기뻐하고 충만한 복음을 얻도록 연구하는일을

하지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 의의 영광을 드러내심으로 우리가 의의능력에

참예하는 자가 되도록 하시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당신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칭의의 진리를 잘알고 있을 것이다.

로마서3:21-5:11에서 바울은 다음의 여러가지 진리를 가르쳤다.

 

첫째 칭의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다.

둘째 칭의의 방법과 조건은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혜를 믿는 믿음이다.

셋째 칭의의 복된 결과는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것이며 하나님의 보좌앞에

나아갈 수 있는것이며 영광의 소망을 소유할 수 있는것이다.

 

이제 바울은 로마서 5:12절 이후부터 신앙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깊은 진리를 주해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칭의의 근거이며 이 연합이 있어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를 용납하실수 있는것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자들 따라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

그리스도의 의와 생명을 공유하는것이 얼마나 합리적이며 자연스러운 것인가를

입증하기위해  바울은 아담과 우리와의 연합과 그연합으로 말미암은 결과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아담의 불순종 그로 말미암은 정죄와 죽음과

그리스도의 순종,그로 말미암은 의와 생명을 날카롭게 대조시킨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이 차지하는 위치를 연구하여

그순종이 우리의 구원의 뿌리라는 사실을 보게되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삶가운데 순종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할지 알게 될것이다.

 

아담의 후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것같이"(롬5:19)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는가?

 

아담과 그의 후손사이는 이중의 관계 즉 '법정적 관계'와 '생명적 관계'로

맺어져 있다.

 

법정적 관계를 통해 모든 인류는 비록 태어나지 않은 자라 하더라도

죽음의 정죄선고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5:14)

 

이 법정적 관계는 생명적 관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만일 인간이 아담안에 있지 않았다면 정죄의 선언이

그들위에 임할 수 없었을것이다.

 

그러면서도 생명적관계는 법정적 관계의 현시가 된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죄와 사망의 능력안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의 저주아래 있다는 사실과 그본성이 죄의 능력의 영향을 받을수

있다는 사실때문에 한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자들이 죄인이 되는 것이다.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라"여기서 '오실 자'란

두번째 아담 인류의 두번째 조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담의 불순종과 그결과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 순종이 우리에게 미치는

결과를 비슷하게 보여주는 모형이다.

 

한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단번에 법정적인 선언에 의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자로 선포되고 용납된다.

 

번정적 관계는 생명적 관계에 그 뿌리를 두는 것이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만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할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법정적 관계 이전의 생명적 관계를 필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아담의 불순종애 참여하여 사망과 죄악의 성품을 물려받은 것이

실제적인 사실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순종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의와

순종의 삶과 성품을 얻게되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우리가 죄인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 하도록 하자.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요구한 한가지는 순종이었다.

 

피조물이 하나님께 영광돌릴수 있고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향유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순종뿐이다.

 

죄악이 세상에 들어오고 파멸을 가져온 하나의 이유는 불순종이다.

우리에게 온갖 죄의 자주가 임한것은 불순종이 우리에게 전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안에서 역사하는 죄의 능력이란 다름아닌 바로 이것 즉

우리가 아담의 본성을 받고 그의 불순종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불순종의 자식'이라는 사실에 있는것이다.

 

둘째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의 불순종과 그로인한 저주 지배권 악한성격 악한역사를

제거 하셔야만 했다.

 

불순종은 모든 죄와 불행의 뿌리였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첫번째 목표는 악한 불순종의 뿌리를 잘라내고 인간을 원래의 위치

즉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이일을 하셨는가?

우선 둘째 아담으로 오셔서 첫째 아담이 해놓은 결과를 제거 하심으로

이일을 이루셨다.

 

죄는 항상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려는 애쓰는것은

굴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의 고귀성과 측복성과 신성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피조물로 지으셨을 때 우리는 피조물의 아름다움과

순결성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못했다.

 

이에 그리스도께서는 순종의 옷을 입는 입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순종의 옷을 입어야만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불순종을 이기고 제거하신 후에 자신의 순종으로

우리 안에 우리 위에 대치하시기 위해 이땅에 오셨다.

 

아담의 불순종이 보편적이고 포괄적이며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순종의 능력이 더 큰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그리스도의 순종의 삶의 목표는 세가지다.

첫째로는 진정한 순종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본보기가 되시며

둘째로는 그분의 순종으로 우리를 위해 모든 의를 성취하시는 보증이 되시고

셋째로는 우리에게 순종하는 새로운 성품을 부여하시는 머리가 되시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에게 다음의 여러가지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하나님을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는 것

둘째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의 불순종의 죄를 대신 지시고

속죄하신 것을 의미한다는 것

셋째 그리스도의 순종은 사망에 대해서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그분의 순종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터준 것이다.

 

법정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해 의롭게 되었다.

우리가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인이 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순종으로 죄와 사망의 능력으로부터 단번에 완전하게 구출되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즉 우리는 하나님앞에 의인으로 서게 된 것이다.

 

생명적으로-아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법정적관계와 생명적 관계를

분리할수 없기 때문인데-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가운데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게 되었다.

 

결국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생명은 다름아닌 순종의 생명인 것이다.

순종의 삶을 원하는 이들은 이점을 잘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발견하는 의와 구원의 비결은 바로

그리스도의 순종에 있다는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순종은 그리스도의 의의 정수이다.

다시말해 순종이 곧 구원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의 불순종을 덮고 종지부를 찍는것으로 우리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며 신뢰해야 하며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시는 불변의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순종이다.

아담의 불순종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사망의 능력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안의 새로운 본성인 생명의 능력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왜 바울이 이구절에서 의와 생명을 밀접히 관계시키고 있는지

그이유를 알게된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5:17-18)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유사점을 더 세심하게 살펴보고 첫째아담의 경우

사망과 불순종이 그자신은 물론 후손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아담과의

연합으로 인하여 인간이 사망과 불순종의 지배를 받게 된 사실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볼수록 그리스도의 순종도 전가뿐 아니라 개인적 소유 행위로 인해

우리의 것이 된다는 사실이 더욱 큰 확신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리스도와 순종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그분의 생명을

영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의를 받아들이게 되면 의는 단번에 순종을 가리키게 된다.

의는 순종에서 나왔고 순종과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순종안에서만

번성할수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관계는 로마서 6장에서 나타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맺은 생명의 연합에 대해 언급한 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2-13)

 

그런다음 바울은 이것이 바로 순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6:16)

 

실제적 순종

 

우리의 순종과의 관계는 매우 실제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순종(아담=원죄 우리자신의 불순종=자범죄)으로부터 구원을 받았고

이제 순종의 종 즉 '의에 이르는'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의,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의에 이르는 순종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의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순종해야 한다.

 

의에 이른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를 위한 생명의 시작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생명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순종이 필요한 것이다.

 

머리와 지체에는 오직 하나의 법칙만이 있을 뿐이다.

아담과 그 후손의 불순종과 죽음이 분명한 사실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와 그후손의 순종과 생명도 분명한 사실이다.

 

아담과 그 후손사이의 한 연결점 즉 유사성은 불순종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와 그분의 후손사이의 연결점 즉 유사점은 순종인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실수가 있었고 결국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구세주가

될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순종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직 순종이 있어야만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할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구속을 즐거워할 수 있는것이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모든것은 순종을 '의를 온전히 향유할 수 있는길로 인식하고 그렇게 실천했느냐'

의 여부에 달려있는것이다.

 

회심하는 순간에는 의가 단번에 완전하게 신자에게 주어진다.

이때는 순종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못하거나 전혀 알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의를 믿고 복종하게 되고 '의의종'으로서 살아야 겠다고

결심하게 되면 의가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깨닫게 되고 마침내는

의의 신적속성까지도 알게 된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진실하게 붙잡으면 붙잡을 수록

의의 근원인 그리스도의 순종에 동참하고 싶은 열망이 더욱 강렬해 지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의에 이르는 순종의 종으로 살 수 있도록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순종은 '삶의 원리'였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순종은 가끔하는 순종의 한 행동이나 일련의 순종의

행동들이 아니라 그분의 온 삶의 정신이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38-40)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10:9)

 

주님은 한가지 목적으로 세상에 오셨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려는 한가지 목적으로 이땅에서 사셨다.

 

그리스도의 삶을 지배하는 한가지 최상의 원동력은 순종이었다.

따라서 주님은 우리가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이같은 사실이 다음의 약속에 들어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마12:50)

 

한 가족을 잇는 고리는 모두가 공동의 삶을 영위한다는 사실과 유사성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와 우리사이의 연결성은 그리스도와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에게서 순종은 '기쁨'이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은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활력을 북돋아 준다.

건강한 사람은 즐거운 마음으로 식사를 한다.

 

그러나 음식은 단지 즐기는 것만은 아니다.

음식은 생명의 필수적 요소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것은 그리스도게서 굶주려 하셨던 음식이었고

그것없이는 살아나가실 수 없던 양식이었으며 그분의 허기를 채운 음식이었고

그분을 새롭게 하고 힘을 북돋아주며 즐겁게 한 양식이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이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한것은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순종이 우리의 일상 음식보다 더 자연스럽고

필요하며 더 활력을 불어놓는 영양분임을 깨닫게 될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뜻을 그리스도에게 단번에 가르쳐 주시지 않고

상황에 따라 매일같이 가르쳐 주셨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삶에는 성장과 진보가 있었다.

따라서 가장 어려운 교훈은 가장 늦게 나타났다.

 

그리스도게서 순종의 행동을 하실때마다 하나님은 또다른 명령을

하나씩 더 열어 보여주셨다.

 

성령에 의해 우리의 귀가 열려져서 성령의 가르치심을 기다리는 정도가 되려면

우리의 삶에 순종의 열기가 가득해야만 하는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만을 최대의 만족을 느끼려면

순종이 우리의 삶의 소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순종은 '죽음에 이르는것'이었다.

주님이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하심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것은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각오가 돠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의도였다.

 

"내 뜻은 전혀 구하지않고 무슨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만 행하리라"

이러한 순종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또한 그렇게 살수 있도록

능력을 베풀어주시는 참된 순종인 것이다.

 

모든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는 이러한 순종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순종인 것이다.

 

이러한 순종만이 우리가 끝까지 순종할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이다.

이것 없이는 우리의 영혼이 진정한 기쁨과 능력을 맛볼 수 없다는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

 

전적인 순종을 의심하게되고 더 나아가 순종을 행할 능력에 자신이 없는 한

승리할수 있다는 확신은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전한 순종을 요구하시고 그 순종을 실천하도록

지시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앞에 드릴것은 온전한 순종밖에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성령을 통해 삶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에

우리자신을 맡길 수 있게된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순종은 '깊은 겸손에서 우러나온것'이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5-11)

 

전적으로 자기를 비우는 사람 종처럼 자기를 낮추는 사람 '순종의 종'

하나님과 인간앞에서 자기를 낮추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예수그리스도의 순종이

그천상의 아름다움과 능력을 드러나게 보여준다.

 

자기자신을 믿고 순종해 보려다가 실패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도 더러있다.

그러나 전적으로 자기를 버리고 전적인 무능력 가운데서 하나님만을 의지할때

그러니까 겸손함과 온유함과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면서

하나님앞에 글복할때만 영광의 하나님께 복종는것이 인간의 의무요

동시에 축복이라는 사실이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순종은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한 데서 이와같은 순종이 나온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5:3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10)

 

성자께서 성부의 뜻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시자 성부께서는 성자안에

그분의 능력을 무한정으로 부어주셨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을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안에 그분의 능력을

부으시는 정도를 축정하는 잣대라는 사실을 배우게되면 온전한 순종이란

하나님이 우리가운데서 역사하실것이라는 온전한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것이다.

 

하나님의 새언약의 모든약속들은 이 위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대적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로 임하게 하시리니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신30:6-8)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7)

 

우리모두 성자처럼 하나님이 우리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도록 하자.

그러면 우리도 무조건적인 순종

죽음을 각오한 순종을 할수있는 용기가 생길 것이다.

 

이같은 순종은 성부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성부의 뜻을 행한

성자와 같아질 수 있는 복된 체험을 경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자.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분의 일을 이루실 것이다.

 

많은이들이 순종은 한분 즉 성자의 순종에 그 뿌리와 생명과 안전이 놓여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순종의 모델로 바라보고 연구하고 믿도록 하자.

 

우리가 영접하고 사랑하고 똑같아 지도록 애써야 할 그리스도를

바로 순종의 그리스도로 삼도록 하자.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희망인 것처럼 그분의 순종을 소원으로 삼도록 하라

순종의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 즉 우리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써 우리가운데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이 역사하신다는 점을

확신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어 당신의 믿음을 증명하도록 하라.

 

앤드류 머레이목사님의

순종의 학교에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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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보혈의 능력

앤드류머레이

피 안에 있는 생명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6:53-5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10:16)

이 말씀들은 주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물이 이중적인 효과를 내듯이 이 거룩한 피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을 세탁하는데 사용하면 그것이 깨끗이 씻어주는 역할을 합니다만
물을 마시면 신선해지고 새로워지는 효과가 납니다.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충만히 알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 피를 마시는 축복이
어떤 것인지를 그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씻는것과  마시는것이 서로 차이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물로 씻는일도 필요하고 기분좋은 일이지만 그보다 물을 마시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하고 또 생명을 유지케 하는 일입니다.

물로 깨끗이 씻지 않으면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만
물을 마시지 않고서는 아예 살지를 못하는것입니다.

오직 물을 마심으로써만 생명을 유지하는 능력의
충만한 혜택을 누릴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 즉 그 피의 효과를 마음을 다하여 누리지않고서는 -
영생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자의 피를 마신다"라는 말에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것 같습니다만
유대인들에게는 그말이 더더욱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피를 마시는일은 모세의 율법으로 엄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를 마시면 극심한 형벌을 받게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의 피를 마시는 일을 거론하셨을 때에
그들로서는 자연히 혐오감을 가질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말은 그들의 종교적 감정을 말할 수 없이 해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피로 말미암는 구원에 관한 지극히 깊고
영광스러운 진리들을 분명히 전할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있으셨다면
아마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의 피를 마시는 자"라는 표현으로 말씀하는 구원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구하는 가운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이해 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1."그피를 마신다"라는 표현은 어떠한 축복을 묘사하는가?
2.이 축복이 어떻게 우리 속에 역사하는가?
3.이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1. 그 피를 마시다는 표현은 어떠한 축복을 묘사하는가

물로 씻는 것보다 물을 마시는 것이 훨씬 더 친밀하고 더강력한 효과를 낸다는
사실을 바로 앞에서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나누는 교제 속에는 깨끗이 씻음이나 
거룩하게 함보다 훨씬 더 깊은 축복이 있습니다.

아니 이 "그피를 마신다"는 표현이 시사하는 축복의 영향력이 얼마나 널리 미치는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피는 우리를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무언가를 행할 뿐아니라 우리 속에서 무언가를 행합니다.

곧 우리의 속을 전연 새롭게 하는것입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라는 주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 사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생명을 두종류로 구분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은 육체와 영혼의 자연적인 생명을 지녔습니다.

그들 가운데 경건하고 선한 뜻을 가진 사람들도 많습니다만 주님은 그들이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는"한 그들 속에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또 다른 생명이 필요했습니다.

새로운 하늘의 생명 그리스도 자신이 소유하셨고 그가 친히 베푸시는 생명이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생명체는 그 외부로 부터 영양분을 받아야만 합니다.
자연의 생명은 빵과 물로써 자연적으로 영양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생명은 예수님 자신이 주시는 하늘의 양식과 음료로
영양분을 받아야 하는것입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생명 바로 그것이 우리의 것이 돠어야 하는 것입니다.
곧 그가 인자로서 이땅에서 사셨던 그 생명 말입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속에서 우리 주님은 그생명의 본질을 설명하시면서
더욱더 강력하게 이 점을 강조하십니다.
"내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임하신 것은 무엇보다도 육체가운데 있는 영생을 드러내며
육체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그것을 전달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영생이 신적인 능력 가운데 거하고 있음을
육체적인 몸 안에 그 생명이 거하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은 자기의 살을 먹고 자기의 피를 마시는 자들은 곧 그의 몸을
그들을 유지하는  능력으로 삼아 거기애 참여하는자들은 그들의 몸안에서도
영생의 능력을 체험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내가 그들을 다시살리리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의 놀라운 점은 그것이 인간의 몸안에 있는
영생이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서 그 몸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때에 비로소 우리의 몸도 그 생명을 소유하게 되고
마지막 날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피는 참된 음료료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참된"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참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내가 참 포도나무"라고 하실때에 사용하셨던 것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주님은 이단어를 사용하심으로써 그저 상징에 불과한 것과
실질적인 실체인 것 사이의 차이를 암시하신 것입니다.

이땅의 양식은 참된 양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된 생명을 가져다 주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참된 양식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생명을 가져다 주고 유지시켜주며 더구나 그림자처럼이나
그저 상징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그렇게 자주 반복하신다는 것은 곧 주 예수님의 살과 피가
충만 하고도 참된 의미에서 영생이 우리 속에서 영양분을 받고 유지되는
참된 양식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피는 참된 음료료다"
이 양식의 실재와 능력을 지적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은 "내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안에 거하나니"라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로 영양분을 섭취하는 일은 주님과의 지극히 완전한
연합의 효과를 이루어 냅니다.

그이 살과 피가 그런 영생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여기서 그를 믿는자들은 그저 그에게서 마음에 이런 저런
영향을 받는것으로 그치는것이 아니라 그와의 지극히 친말하고 또한 영구히
지속되는 연합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안에 거하나니"

그러므로 인자의 피를 마시는 축복은 바로 이것입니다.
곧 그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요
그와 함께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연합이 얼마나 실제적인 것이냐 하는것을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요6:57)

우리주님과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이외에 그 어떠한 것도
주님과 우리의 연합의 모형이 될수가 없는 것입니다.

절대로 나뉠수 없는 신적인 본성에 있어서 두위격이 참으로 하나이신것처럼
그렇게 사람이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 연합이 두분 하나님 사이의 연합과 마찬가지로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인간의 본성은 몸을 떠나서는 존재힐 수 없기 때문에
이연합에 몸도 포함된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이 인간의 몸을 취하실 그 몸을 스스로 준비하셨습니다.
이 몸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말미암아 영생을 나누는 존재가 되었고
우리 주님 자신의 생명을 나누는 존재가 된것입니다.

이 축복을 충만히 받기를 사모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다"라는
거룩하고도 신비한 표현을 통해서 성경이 베풀어 주는 모든것들을 조심스럽게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음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2. 이 축복이 어떻게 우리 속에서 역사하는가?
혹은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
여기서 나타나는 첫번째 사상은 "마신다"는 것은 그피의 능력에 관하여
우리가 개닫는 모든 것들을 믿음으로 우리의 영으로 깊이
진정으로 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연사의 말에 흠뻑 빠져서 그 말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경우에
그 사람의 말을 "마신다"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피의 보배로움과 능력에 대한 감각으로
가득 채워질 경우 그가 그피에 대한 생각에 완전히 빠져서 기뻐할 경우
그 사람이 전심의 믿음으로 그피를 스스로 취하고 그의 속마음으로
그피의 생명을 주는 능력을 납득하려 힘쓰는 경우에 우리는 그사람이
"예수의 피를 마신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피로 말미암는 구속과 깨끗이 씻음과 거룩하게 함에 대해서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모든 내용을 그의 영혼 깊은 곳으로 흡수해 들이는 것입니다.

이 표현에는 아주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피로 말미암는 충만한 축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이 표현이 아주 영광스럽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표현을 거듭거듭 사용하심으로써
이보다 더한것을 의도하신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그더 깊은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것은 주님이 성찬을 제정하신데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가버나움에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에는
실제로 성찬을 다루고 계셨던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이 훗날
성찬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확증되기 때문입니다.

개혁교회에는 성찬에 대하여 두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개혁자 츠빙글리의 이름을 따라서 불리는 한가지 견해에 따르면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그저 영적진리의 증표 혹은 상징물로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가
우리의 몸에 영양을 주고 새힘을 주는것과 똑같이 그만큼 확실하게
- 오히려 그보다 더 확실하게 -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닫고 우리의 것으로 삼은
주님의 살과 피가 우리의영혼에 영양을 주고 새롭게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이름이 붙어있는 또 다른견해에 다르면 성찬에 참여하는 일에는
이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모종의 감추어진 방식으로 사람이 깨달을 수 없는 빙식으로 그러나 그러면서도
진정으로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계신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부터
영양을 받아서 삼지어 우리의 몸조차도 주님의 몸의 능력을 통하여 영생의 능력에
참여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몸의 부활과 성찬 시에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일과 연관을 짓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성찬이 요구하는 육체적 임재는 여기서(성찬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그것이 우리의 영에게
영생에 대한 의심할바 없는 확신이 될 뿐 아니라 육체의, 불멸까지도 확신하게 해준다.

이것이 어떻게 그럴수 있느냐고 내게 묻는다면 나는 부끄럼없이 그것은 너무나 높은 신비여서
나의 영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고 나의 말로써 표현할수가 없다고 시인할 것이다.
내가 깨달을 수 있는 것 이상을 내가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살이 그렇게도 무한히 먼거리에서 우리에게 도달하여 우라의 양식이 된다는 것이 그야말로 믿기 어려운 이야기 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이 얼마나 우리의 감각을 초원하는 것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해력으로 납득할 수 없는 그것을 믿음으로 포용하여야 한다.

곧 그리스도께서 그의 살과 피를 신성하게 전달하셔서 그의 생명을 우리에게 심어주시며
그것이 마치 우리의 뼈와 골수를 찔러 관통하듯 한다는 사실말이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전달받는 일은
영생을 유업으로 받기를 사모하는 모든이들에게 필수적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엡1:23)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력하고 상합하여 각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몸을 자라게 하느니라"(엡4:15,16)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고전6:15.16)
그리스도께서 몸과 영으로 우리와 연관되지 않는다면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은 우리도 잘아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은 다시 "우리는 그의 몸과 그의 살과 그의 뼈의 지쳬라"는
영광스러운 표현을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다음 그는 "이 비밀이 크도다"라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주님의 살과 피 안에서 하나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것입니다.

사도는 그 하나됨의 역사가 너무나도 높고 귀하여 그것을 해명하기 보다는
그저 그것에 대하여 놀라워하는 것입니다.

성찬에는 그저 신자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누리는것보다
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이델 베르크 요리문답 제76문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가 흘린 피를 마신다는것은
무엇입니까?"그답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으심을 포용하여
죄사함과 영생을 받는다는 뜻임은 물론,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고 또한 동시에
우리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신성한 몸과 점점 더 연합되어 우리가 -
물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위에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의 살중의 살이되며 그의 뼈중의 뼈가 되어 영원토록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배를 받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 가르침에 표현된 사상은 성경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실때에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들과 사람을 구분지어주고
사람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가 흙으로 지음받은 몸으로 영적생명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몸을 통하여 욕심과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몸을 구원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거처로 삼기 위하여
충만한 구속이 계획된 것입니다.

구속이 완전히 이루어질것이며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께서 육체로 임하신 목적이었습니다.

"모든 신성의 충만함이 육체로"주님 안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그가 그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지신것이요,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영은 물론 육체까지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구속의 첫 열매들로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한 몸이며 한 영인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몸에 그의 살에 그의 뼈에 속한자들입니다.

성찬을 지키는 가운데 주께서 몸에도 임하셔서 그것을 소유하시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가 그의 성령으로 우리의 영에게 역사하셔서 우리의 몸으로 부활 시에 있는 구속에
참여하게 하는것은 물론이요 이미 이 땅에서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어서
영혼을 거룩하게하는 역사가 더욱 영광스럽게 진행될 것입니다.

몸을 포함하여 전인격적으로 하나가 되어
거기에 참여하는 정도만큼 그 역사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과
그리스도의 진정한 피"를 의도적으로 먹고 마십니다.

루터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이 떡속에 있기 때문에
불신자가 그 떡을 먹어도 결국 거룩한 몸을 먹는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만
떡을 먹음으로써 믿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방식으로
정말로 하늘로부터 임하는 거룩한 몸과 피의 능력을 양식과 음료로 받아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영혼과 육체가 영생에 참여한 존재가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찬에 대해서 말씀한 모든 내용이
"예수의 피를 마시는 일"에 충만히 적용됩니다.
그 피를 마신다는 것은 과연 지극히 친밀하고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발효되는
그러한 깊고 깊은 영적 신비인 것입니다.

영혼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피의 연합을 충만히 누리고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실 때에 드러내 보이신 바로 그 기질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자가 될때에 그것이 바로 예수의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피는 몸에 생명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 몸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하기를 바라면
거기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초인간적인 강력한 방식으로 그 피가 하늘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강건케 할 것입니다.

피 속에서 부으바 된 생명이 그 사람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옛사람의 생명이 죽어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는 일이 어떻게 해서 주님의 하늘의 생명에 고귀하게
참여하는 것이 되는자를 깨닫는 데서
믿음의 가장 고상하고 영광된 기능이 있는것입니다.

이제 다음의 내용을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다.

3.피를 마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관한 가장 깊은 신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말을 앞에서 이미 했습니다.

우리로서는 주예수께서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표현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주시기를 구할 때에 깊고 깊은 경외심을 갖고
그에게 나아가야 할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충만한 연합을 사모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올바로 배우게 됩니다.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리라"
그저 죄 용서함으로만 만족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풍성히 마시게 되기를
갈망하지 않는자는 영혼과 육체의 구속의 그충만한 능력을 체험하여
예수님께 있었던 것과 동일한 기질을 그 자신도 진정으로 소유하게 되기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은 이 "피를 마시는 일"에 그저작은 부분만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에수님의 목표와 동일한 목표 -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리라" - 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아서 힘쓰는 사람은
영생의 능력이 자기 몸에서 역사하기를 사모하는 사람은 이 말씀들이 너무 높다거나
너무 비밀스럽다거나 하는 선입관 때문에 두려워하고 뒤로 물로서지 않을것입니다.

그는 하늘의 사고방식을 갖기를 사모합니다.
그가 하늘에 속해있고 또한 그리로 향하여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로서 오는 양식과 음료를 얻기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갈증이 없이는 음료를 마시는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모하고 그와의 완전한 교제를 갈망하는 것이 바로 갈증이요
그것이야말로 피를 마시기 위한 가장 좋은 준비인 것입니다.

갈증 있는 영혼이 이 생명을 주는 음료를 마셔 하늘로부터 말미암아
새로워지게 되는 것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를 마시는 일이 하늘의 신비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만유의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 계시고 새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께서 계신 하늘에는
또한 "뿌린피"도 있습니다.(히12:23,24)
성령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실때에 - 말하자면 손으로 붙잡고 가실때에 - 우리의 인간적인
이해력의 범위 이상의 것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피나 그의 생명에 대하여 그피 가운데 우리의 몫에 대하여 그리고 그 피의
살아잇는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생각들은
그가 - 성령께서 - 예수님과 우리의 연합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실
그 영광스러운 현실의 그저 희미하고 가느다란 빛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피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말 그대로 그피를 마시는 증거를 과연 우리의 몸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몸의 각 지체가 하나씩 정맥을 통해서 심장에서 계속해서 새로이 흘러 나오는
피를 받는 바로 그곳이 아니겠습니까?

건강한 몸은 각 지체마다 끊임없이 풍성하게 피를 받아 마시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예수와 연합시키시는 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께서 이처럼 피를 마시는 역사를 내적 삶의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자기 살을 먹고 자기 피를 마시는 일에 대하여 하신 말씀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어려운 말"이라고 하며 불평하자 주님께서는 "살리는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신적인 신비를 우리속에서 생명과 능력으로 그 신비를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속에 거하시는 참된 살아 있는 체험으로
만드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이 축복이 우리에게 베풀어지리라는 고요하며 강하고 확정된 믿음의 기대가
반드시 우리 편에서 있어야 합니다.

그 보배로운 피가 할수 있고 또한 베풀어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정말로
우리를 위한 것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구주께서 친히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그의 피를 마시고
생명을 얻도록 하시리라는것을 믿읍시다.

이제 우리는 그피의 화목하게 하고 깨끗이 씻고 거룩하게 하는 효과들을
더 잘 깨닫게 되었으니 그피의 그런 효과들을 믿고 마음을다하여 계속 해서
누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극한 확신과 기쁨으로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릴수가 있을것입니다.

"오 주님 주의피가 제게 생명을 주는 음료입니다.저를 그피에 씻으시고
깨끗하게 하신 주께서 날마다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기를"가르치사
제가 주 안에 거하고 주께서 제안에 거하시도록 만드시옵소서."
주께서 반드시 구하는 그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앤드류머레이 목사님의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십자가의 보혈+오순절의  충만한 축복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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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버려야 예수가 산다

 

앤드류 머레이

 

나는 매일 죽고 예수그리스도가 산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이 구절이 흠정역의 개정판에 좀더 정확하게 번역되어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실제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사람의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땅에서 육체로 행하신 사역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주님의 영적 사역의 상징으로 사용할 수 있다.

누가복음 23장 39-43절에서 나오는 회개한 강도의 이야기를 보자.
이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죽음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했다.
또 그는 "내게는 우리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라고 말했다.

우리는 어떻게 자아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라고 진지하게 묻곤한다.
'다른 삶'을 얻으라는 것이 그 대답이 된다.

종종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령이 이기적이고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삶을 몰아내기 위해 오신
하늘의 생명이라는것을 진정 깨달았는가?

당신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식을 온전히 누리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이것을 깨달아라.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죽음의 능력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속에 있는 육신적인 것을 죽이시고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 주님의 삶을 사실때 비로소 우리는 주안에서
안식을 온전히 누릴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십자가로 데려가서 십자가에 대해 두가지를 가르친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그리스도의 속죄로 내가 죽지않고 앞으로도 죽지않게 되었고
죽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주님은 죄를위해 그리고 나를위해 죽으셨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의 죽음이 속죄의 능력을 갖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육신적인 고난이나 육신적 죽음때문에 속죄의 능력이 생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이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적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주님이 죄에대하여 죽으셨다는것이다.
죄는 주님을 시험하고 둘러싸고 "나는 죽을수 없다"라고 말하도록 유혹했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여...이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14:36)
라고 기도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편을 택하셨다.
주님은 죄에 대해 죽으셨고 자신의 죽음을 통해 승리 하셨다.

이제 나는 주님처럼 '죄를위해' 죽을수는 없지만 주님처럼 '죄에 대해'죽을수는 있다.
또 마땅히 죄에 대해 죽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나를위해 죽으셨다.
오직 주님만이 나를위해 죽으실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또한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
이점에서는 내가 주님과 동참해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나는 죽은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리스도와함께 죽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나는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어떻게 하면 내가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와함께 죽을수 있을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장큰 사역이 죽음이라는것을 잘안다.

주님은 이땅에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영원한 세계에서 이땅으로 오셨다.
주님은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심하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다.

주님은 죽음을 선택하시고 이땅에서 죽을 준비를 하시려고 행동하고 사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속의 능력이다.
주님은 죽음으로써 죄를 이기고 승리하고 부활하고 새생명을 얻고 높아지고
영원한 영광을 얻으셨다.

그리스도의 큰 특징은 바로 그분의 죽음이다.
심지어 하늘의 보좌에서도 주님은 '죽임당하신 어린양'으로 계신다.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계5:9)라는
찬양이 주님께 영원히 돌려진다.

사랑하는 형제여~!
당신의 보아스이자 당신의 그리스도 부족함이 전혀 없으신 당신의 구주는
죽음을 큰 특징으로 죽음을 가장 큰 영광으로 삼으신 분이시다.

신부가 남편과 함께 살려면 남편의 상태 남편의 영 남편의 본성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신부는 언제나 주님처럼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위해 이루시는 완전한 능력을 체험하려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것을 배워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것을 배워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 로마서 6장이 말하는 영광스러운 진리이다.

바울은 로마교회 모든 신자들에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라고 편지했다.(롬6:8)
바울이 로마교회의 특별한 신자들이나 성숙한 신자들을 상대로 말한것이 아니라
모든신자들에게 말한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연약한 신자일지라도 말이다.
바울은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진리를 분명히 밝힌다음
그 진리에 근거하여 다시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자요"(롬6:11)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죄에 대하여는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해하기 쉬운 방법은 아담을 생각해보는 것이다.그리스도는 두번째 아담이셨다.
첫번째 아담에게 무슨일이 일어났는가?

나는 첫번째 아담안에서 죽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죽었고 죄안에서 죽었다.

내가 이세상에 태어날때 내안에는 아담의 생명이 있었다.
이것은 타락이후 아담의 모든 특징이 내게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담은 하나님에 대해 죽었고 죄안에서 죽었으며 나는 아담의 생명을 물려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아담처럼 죄안에서 죽었으며 하나님에 대해 죽은것이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순간 나난 두번째 아담인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었다.
육신의 출생으로 말미암아 내가 첫번째 아담과 연합했듯이 나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한 자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죄에대하여 죽고 다시 부활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너희도 너희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자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은 이것이 참이라고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실로 당신의 새본성은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합을 이루었기 때문에
실제로 완전히 죄에 대해서 죽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주신 그리스도 즉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가운데 모시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위에 굳게 서야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서 6장의 가르침을 이해하지못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죄에대하여 죽었다는것을 알지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함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못하느뇨"라고 묻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죄에 대헤 죽은 우리가 어찌 죄에 대하여 죄안에서 계속 살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생명이 우리안에서 역사하는데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알지못하기 때문에 체험하거나 실행하지 못한다.

따라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게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또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들에게 어떤일이 일어났는지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죄에대하여 죽었다"라고 말해야 한다.
무슨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어도 그렇게 말해야 한다.

"너희도 너희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자로 여길지어다~!"라는 말씀은 명령이다.
당신과 그리스도의 연합을 붙들라.

당신안에 있는 새본성을 믿어라.
당신이 그리스도께 받은 영적생명을 붙들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생명을 붙들라.
(나의 의를위해 부활하신 의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어라)

사람의 행동은 자기를 어떤존재로 믿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왕은 왕처럼 행동한다.
왕이 왕답지않게 행동한다면 "저왕은 자기가 왕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아니면 지식이없어 왕인지를 모른다거나)

그러나 왕이 자기가 왕임을 알고 믿고 의식한다면 그는 왕처럼 행동할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참된 신자의 삶을 살수 없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라.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죽은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리스도는 죄에 대해 죽으셨고 나는 주님과 연합되었다.
그리스도가 내안에 사시며 나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

그리스도께서 내안에서 사시는 삶은 어떤삶인가?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아담이 내안에서 사는 삶은 어떤 삶인가?
그것은 사망의 삶이요 죄와 사망의 권세아래 놓인 삶이요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삶이다.

아담은 회심하지못한 사람의 본성에따라 내안에서 산다.
그러나 두분째 아담 그리스도는 새생명을 가지고 내게 오셨다.
이제 나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삶을 그분의
새생명안에서 살아간다.

만일 내가 이진리를 의식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주님의 생명이 내안에 있다 해도
나는 이진리에 따라 행동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이진리를 깨닫고 이진리에 따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할것이다.나는죽었다 나는 내가 죽었다고 믿는다"
라고 고백한다면 새로운 삶이 시작될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 당신과 그리스도의 연합
그리고 갈보리 십자가의 은혜에 근거하여 믿어라.
당신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것을 알아라.
이진리를 깨닫는 것이 첫걸음이다.

그다음은 우리가 믿음으로 이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일이 벌어질까?
이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갈등이 시작된다.
이로써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데 우리의 믿음이 아직 연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가?내가 죄에 대하여 죽었는데 이토록 많은죄를 짓는가?"하고
묻기 시작한다.
이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것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능력을 사용하시도록
네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하늘로부터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으로부터 내려오신 목적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생명을 주시기 위함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생명은 서로 분리되지않고 연결되어 있다.

에수님은 죄에 대해 죽으셨고 하나님에 대해 살아계신다.
예수님 안에서 죽음과 생명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서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생명'과
'좌를 향한 죽음'은 서로 분리 될 수 없다.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요 또 우리안에서 이루실것이다.
내가 성령에 의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그리스도께 복종했다면 주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의 죽음과 생명에 동참하는것이 얼마나 큰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지
주님이 내속에서 밝히 드러내 주실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지극히 큰 능력과 축복의 순간에 단번에 찾아 올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갑자기 깨달음을 얻고 받아들여 복된 상태로 들어간다.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은 거룩한 경험이다.
그렇다고 악으로 기우는 성향이 근절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의 능력에 힘입어
우리는 죄를 멀리하고 죄의 능력을 멸할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능력은 성령께서 육체의 행위들을 끊임없이 억제하시는
사역에서 드러난다.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혹자는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더이상 필요 없는 것인가?"
라고 물을른지 모르겠다.
물론 필요하다!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가운데 살면서
더욱 성숙해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성령충만 하더라도 우리에게 불완전한 것이 있을 수 있다.
왜 그런가?
죄를 온전히 깨달아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준비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깨닫지못한 교만 과도한 체면 의식 참을성 없음 또는 다른 문제들이 있을수 있다.
성령께서 언제나 이런것들을 즉시 제거해 주시는것은 아니다.

복된 삶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신자들마다 다를수 있다.
어떤 사람은 섬김의 능력을 깨닫고 복된 삶으로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근심걱정에서
벗어나는길을 깨닫고 복된 삶으로 들어간다.
또 어떤 사람은 죄에서 건짐받는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복된 삶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복된 삶에 한번 들어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것인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능력을 알게 된 신자라면 자기를 부인하며 끊임없이
"주 예수님 주님의 죽음의 능력이 제존재의 모든부분에서 온전히 역사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자신의 모든것을 드릴때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의 특징이 나타날 것이다.
사도바울은 진정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처럼 살았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의 특징

그렇다면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깊고도 절대적인 겸손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죄에 대한 죽음'이 강력하게 역사하기 시작할때 나타나는 지극히 복된 증거가 겸손이다.
겸손은 사람을 부숴버린다.
이렇게 깨어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더높이 나타내도록 내가 하나님앞에서
더 겸손해지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받아야 마땅한 것은 저주받은 십자가뿐이다.
나는 나자신을 십자가에 념겨준다"라고 말하게 된다.

둘째 무력함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전적으로 무력해지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강하고 일을 하거나 분투할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복된 삶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다.나는 전적으로 무력하다.
모든생명의 호흡과 힘이 내주 예수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라고 말할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무능력을 철저히 깨닫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것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세째 안식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무덤에 장사되셨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장사되었다.
무덤은 최고의 안식처이다.무덤에 누운 자는 아무것도 할수없다.
다윗은 내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시16:9)라고 말했다.

예수님과 함께 무덤속으로 내려간 사람은
"내게는 오직 하나님만 계시니 나는 주님을 의지한다.
나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내육체는 주안에서 안식한다.
내가 모든것을 포기한것은 주님이 내안에서 이루실 일을 기다리며
안식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하게 된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 죽음 무덤에 장사되는것
이세가지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임을 기억하라.
"내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는
주님의 고귀한 말씀도 기억하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나사로의 무덤옆에서 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분명히 볼 수 있는곳이 어디인가?바로 무덤옆이다.
믿는중에 죽음 속으로 내려가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당신의 마음에 충만하게 임할것이다.

사랑하는 친구여! 우리는 죽기를 원한다.
당신은 우리의 위대한 보아스이신 그리스도의 안식과 평안과 복 안에서 살려고 하는가?
기쁘고 풍성한 열매를 맺고 능력과 승리의 삶을 살기원하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무덤으로 내려가라.
그리고 "나는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다.비록 내안에는 죄밖에 없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사신 그리스도께서 내영혼의 생명이시다.하나님을 찬양하라!"라고 말하라.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에 동참할 수 있는가?
십자가에서 회개한 강도를 보면 된다.
그리스도게서 돌아가시기전에 도마는
"우리도 주와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실패했다.
그래서 우리주님은 인간 쓰레기같은 사람을 택하셔서 자기옆에서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셨는데 이속에는 "나와 함께 죽는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겠다"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물론 이메시지는 도마와 베드로를 위한것이었으며 또한모든사람을 위한 것이다.

오늘날 주님은 지극히 연약한 사람들과 지극히 겸손한 사람들에게 이메시지를
들려주기 원하신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면 십자가의 강도를 보라.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마음

십자가의 강도에게서 무엇이 보이는가?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준비가 된 마음이 보인다.

강도는 겸손히 자기의 죄를 인정했다.
그는 저주받은 나무에 달려 있었고 구경꾼들은 그옆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욕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도는 부끄러움을 개의치않고 사람들앞에서
"나는 죽어도 마땅한 사람이다.내가 고통당하는것은 정당하다.
나는 십자가형을 당해야 마땅한 사람이다."라고 고백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일이 주님의 교회에서 별로 일어나지 않는
이유중 하나를 보게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않은 것들이 우리속에 남아 있다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데
우리는 이사실을 믿으려고 하지않는다.

우리는 죄의 저주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만 우리의 본성전체가 죄에 감염되어
모든것 위에 저주가 임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의 지성이 죄로 인하여 더러워졌는가?

끔찍하게도 죄의 저주가 우리의 지성에도 임했다.
따라서 우리의 지성은 죽어야 한다.
내가 볼때에 교회에 가장 큰 고통을 안겨주는 것은
지성과 육적 지혜와 문화와 세련된 정신을 의지하는것이다.

세상의 영들이 교회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신자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지식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겠다고 나선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오히려 복음에서 십자가의 흔적을 제거하는 결과를 낳을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세상으로 가서 십자가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지
지혜의 말로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지 않으셨다.

죄의 저주는 우리의 본성 전체에 침투해 버렸다.
예를 들어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기뻐하는 목사가 있다고 해보자.
이사람은 있는 힘껏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자기의 재능과 생각에 따라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이런목사가 나에게 "내재능과 생각이 다 죽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형제여 그렇소. 우리의 모든것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 마음의 애정도 죽어야 한다.
어머니를 향한 자식의 사랑은 지극히 아름답지만 이런 본능적 사랑은 성화되지못한
사랑이다.
이런사랑도 죽음에 넘겨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시 살리셔서 성화된 사랑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산사랑으로 되돌려 주실 것이다.

종종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아름답게 지으셨는데 우리가 그것들을 즐기는것이
옳지않습니까?"라고 내게 묻는다.
그럴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습니다.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과기도로 거룩해질때 좋은 것이 됩니다."
(그래서 늘 잊지말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해야함)

죄의 저주가 모든 것에 임한 것이 사실이다.
죄의 어두운 그림자가 모든것들위에 드리워져 있다.
지극히 아름다운 것들 위에도 말이다.
그것들이 거룩해 지려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져야 한다.
물론 어떤 것을 죽음에 넘기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며 우리의 생명을
죽음에 넘기는 일은 더 어렵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모든것에 죄의 도장이 찍혔다는 것을 알게 될때야
비로소 우리의 생명을 죽음에 넘길수 있게 된다.

우리의 생명을 죽음에 넘기는 것이 생명을 다시살려
거룩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믿음

십자가의 강도는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전능한 능력을 믿었다.
정말로 놀라운 믿음이 아닐수 없다.
저주스러운 행악자인 그는 나사렛 예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렸다.
하지만 결국 그는 "우리는 우리의 행한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것이 없느니라"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담대히 말했다.

오~우리도 그처럼 그리스도의 전능한 능력을 믿을수 있어야 한다.
십자가 강도는 예수께서 왕이신 것과 그분의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었다.
강도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주님의 팔안에 주님의 가슴안에 품으시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때 자기를 기억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믿으면서 죽었다.

형제여~당신과 나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더 크고 더깊게 하기 위해 시간을 내야 한다.
전능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팔로 우리를 붙잡으시어 사망으로 가득한 이삶을
무사히 통과하여 천국에 이르게 하시고 주님의 죽음의 능력을
날마다 우리안에서 나타내실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나는 매일매시간마다 주남과 교제하지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주님은 내가 그렇게 하도록 도우실 수 있고 또 도우셔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여,오라! 와서 이렇게 고백하라.
"그리스도는 전능한 분이시다.주님은 하나님보좌로부터 오셔서
그분의 전능한 능력을 증명해 보이셨다.아버지께서도 그리스도가 부활할때
그리스도의 전능한 능력을 증명해 주셨다."

주님이 보좌에 앉아계심을 알면서도 십자가 강도처럼 믿음을 고백하기가 두려운가?
당신 자신을 주께 온전히 맡겨라.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자로 살아갈수 있을것이다.
주님은 자신이 지나온 과정을 당신도 통과할수 있도록 당신을 붙들어 주실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죽음이 날마다 당신안에서 역사하도록 도우실것이다.

십자가에서 회개한 강도에게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그가 한 기도이다.
강도는 자기죄를 깨닫고 한걸음 더 나아가 기도로 자신의 믿음을 표현했다.
그는 예수께로 향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날 마리아를 비롯한 몇몇 여인들을 제외한다면
온세상이 주님을 대적했다.
그날 십자가 강도는 주님을 위해 기도했다.

당신은 주께 기도하기를 망설이는가?
다른사람이 기도하면 그제야 따라 기도하려는가?
그렇게 하지말라.
내가 사랑으로 간곡히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교회안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않다.

주저하지말고 주께 나아가 "주예수님 주님의 죽음의 능력이 내게 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라.이 기도를 반복해서 드려라.반드시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의 삶을 살려면 주님의 능력 안에서 죄에 대해 죽어야 한다.
주님이 죄에 대하여 죽으셨으므로 당신의 영혼이 주님의 즉음에 동참해야 한다.
주님이 이놀라운 일을 이루시도록 주님을 영접해야 한다,

주님과 교제하는 특권

우리는 십자가 강도가 어떻게 죽음을 준비했는지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어떻게대하셨는지 실펴보자.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약속하셨다.
이약속의 말씀에서 우리는 세가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주님과 교제하는 약속이다.
둘째.죄때문에 인간이 쫓겨난 낙원에서 영원히 안식할 수있다는 약속이다.
셋째,즉각적인 축복의 약속이다.
예수님은 이세가지 의미가 담긴 축복을 가지고 당신과 나에게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신자야 너는 날마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수 있는 낙원에 살기를 갈망하느냐?
너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과 온전히 교제하며 누린 삶을 살기 바라느냐?
너는 나와 온전히 교제하며 살기를 원하느냐?

아버지의 사랑안에 내가 사는곳에서 함께 살기를 간절히 원하느냐?
성령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바로 오늘 말이다!
너는 나를 간절히 원하느냐? 나는 너를 더욱 간절히 원한다.
너는 교제를 갈망하느냐?나는 늘 너와 교제하기를 원한다.
네사랑이 내 마음에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내 교제 안으로 끌어들이는것을 막을수있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대제사장으로서 너를 위해 천국을 얻었으니 이는 네가 천국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며 또 네가 지성소로 들어가 언제까지나 그곳에 거하도록 하기
위함이다.오늘 네가 간절히 원한다면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라! 십자가 강도의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감사할것은 회개한 강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주님과 지극히 깊은 교제를 나누려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백해야한다.
주께서 이땅에 거하신 33년동안 십자가 강도만큼 깊은 교제를 주님과 나눈
사람이 없었다.

그는 주님과 함께 영광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다른사람과 이강도의 차이가 무엇인가? 강도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가
주님과 함께 낙원으로 들어갔다.따라서 만일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산다면
우리는 날마다 낙원의 삶을 살게 될것이다.

만일 주님이 강도에게하신 약속을 우리에게도 해주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손으로 붙잡고 있는 것을 놓아버리면 돤다!
예를 들어보자.출항준비를 마친 증기선이 부두에 정박해있다.
마지막 벨이 울리고 줄을 놓으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그러면 마지막 밧줄이 풀리고 증기선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같이 우리를 땅에 육신적 삶에 자아중심적 삶에 얽어매는것들이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들려오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라.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면 네손이 붙잡고 있는것들을 놓아버려라"고
소리친다.
당신이 다 깨닫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완벽하지않아도 괜찮다.
모호한것이 있어도 좋다. 걱정하지 말라 .
예수님은 십자가 강도를 데리고 죽음을 통과하여 생명에 이르셨다.
강도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자기에게 무슨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다만 승리자 예수께서 그를 팔에안고 (그가 알지못하는 중에)낙원으로 들어가셨을뿐이다,
종종나는 나자신에게 "십자가 강도의 무지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외친다.
그는 자기에게 무슨일이 일어날지 알지못하고 단지 주님을 의지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는것 죄에 대하여 죽는것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것 우리의 마음속에 찾아오는 영광
이런것들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걱정하지말라!
다만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라!
나는 무력하기 짝이없는 내모습 이대로 주님의 품에 안긴다.
나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않고 그대로 매달려 있다.

주님과 함께 죽기위해 나를 주께 의탁했으므로 나는 주님이 나를
끝까지 책임지신다고 믿는다.
우리는 룻처럼 복된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
룻이 누구인가?그녀는 시어머니의 충고에 순종하여 '기업무를자'보아스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겼기 때문에 큰복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께 직접 나아가 온세상이 들을수 있는 큰소리로 이렇게 기도하자
"주님 이것이 제삶입니다.제 삶 속에는 여전히 자아와 죄의 본성과 완고함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주예수께 나왔습니다.
저는 주님의 죽음에 완전히 동참하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완전히 알기 원합니다.
저는 날마다 주님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런다음 또 이렇게 기도하자.
"주 예수님 저는 주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보았습니다.
제게도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주님,주님의 품에 안깁니다."


- 앤드류 머레이의
나를 버려야 예수가 산다중에서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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