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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헌 칼럼] 코로나 이후, 감성 회복이 우선이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5. 15. 06:23

[김정헌 칼럼] 코로나 이후, 감성 회복이 우선이다

등록 :2020-05-14 18:07수정 :2020-05-15 02:39

 

진정 더 두려운 것은 재난 뒤에 찾아오는 우리의 삶 자체를 저질로 만들고 파괴할 ‘문화적 진공상태’일 것이다. 이성의 지배 바깥에 있는, 그리고 진리 표현의 가능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 예술을 끌어들여 자연과의 미메시스를, 즉 공감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마스크로 가려진 서로의 얼굴에서 눈빛을 별빛으로 주고받는 감성의 회복이 필요하다.

<희망도 슬프다>(김정현, 2015년)

 

코로나 사태로 온 세상이 뒤집혔다.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이 코로나 앞에서는 더 이상 선진국이 아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무차별 폭격을 당한 나라에선 이를 잘 선방한 대한민국을 부러워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오로지 옆 나라 군국주의 잔재가 남아 있는 일본만 한국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다 그 지도자인 아베 탓이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은 반감금 상태에 놓여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간들이 취한 자의 반 타의 반 행동이다. 거리의 풍경도 삭막해졌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서로가 서로를 ‘타자화’한 결과 인간들끼리의 관계는 더욱 살벌해진 느낌이다. 언론에서는 매일 반복해서 코로나에 감염된 확진자와 이로 인해 죽은 사망자의 숫자만 나열한다. 그동안 우리가 유지했던 일상의 삶은 날아가고 공포의 숫자만 나열될 뿐이다. 삶의 표정과 서사가 실종된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코로나의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지만 ‘감성’은 그야말로 답답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감성은 부자유 속에서는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즉 창조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예술이 꽃피는 이유는 바로 이 감성이 자유스러울 때로 기인한다.

 

이번에 ‘집콕’하며 읽은 책 중에 <오웰의 코>라는 책이 있다. <1984>를 쓴 조지 오웰의 전기다. 그가 그의 코(냄새)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며 글을 썼는지를 그가 맡은 냄새의 지도로 그려낸 책이다. 그는 세상을 코로 경험하기 위해 런던과 파리의 밑바닥 생활과 스페인 내전의 전쟁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특히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역겨운 냄새를 금방 알아차렸다. 총알이 날아오는 스페인 내전의 참호 속에서도 그리고 폐결핵으로 병원에서 죽어 가면서도 그 스스로 (역겨운) 담배 냄새를 맡으면서 죽었다. 그는 인류 최초의 ‘냄새에 살고 냄새로 죽은’ 최초의 작가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는 냄새를 못 맡는다고 한다. 아마 오웰이 이 코로나에 감염됐으면 그 유명한 <동물농장>이나 <1984>를 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하층 계급의 냄새를 부잣집 박 사장의 아들은 역겨워하지 않는가. 그래서 코의 감각은 세상을 판별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어쨌든 인간은 이성에 의지해서 대부분 사회생활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일상은 감성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 특히 예술가들은 이 감성의 지배를 받으며 창작하게 된다. 감성 중에서도 ‘맛과 향기’의 감각은 우리 뇌에 오랫동안 기억된다고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그가 어렸을 때 맛본 차와 마들렌 과자의 기억을 소환해 쓴 대표작이다. 그의 이 작품은 사실 ‘잃어버린 감성을 찾아서’가 맞을 것이다.

 

요즘 나도 코로나를 피할 겸 가평의 내 화실에 들어갈 때가 많았는데 봄이 한창이라 그런지 대지의 냄새는 도시의 지친 내 몸을 씻어 주었다. 곳곳에 보이는 밭이랑은 저 멀리, 아니 그 너머의 아지랑이가 막 올라오기 시작한 둑 너머로 나의 시선을 데려가고 논물을 댄 논에서는 벌써 개구리들의 짝짓기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온갖 생명들이 기지개를 켜는 소리도 들려온다. 코로나와 겨울에 움츠러들었던 나의 감성을 자극하는 봄(자연)의 교향악이다.

 

나는 시각을 기본으로 하는 그림쟁이지만 시각만으로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시각도 사회적 폐쇄성에 갇혀 있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시각이나 다른 모든 감각, 소위 오감은 그가 속해 있는 사회와 그가 살아온 역사와 살아갈 미래에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와 ‘응시’로 사유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향기도 볼 수 있다는 ‘응시의 대가’ 폴 세잔은 화면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해 입체주의의 길을 열지 않았는가.

 

이제 코로나 사태 이후 세상이 변할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박노자는 <한겨레> 칼럼에서 코로나 사태 이후 세 가지 신화의 몰락을 단언한다. 첫째 선진국 신화, 둘째가 미국 신화, 셋째가 시장 신화다. 나는 전적으로 박노자 교수의 의견에 동감한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고 싶다. 지금껏 근대화 이후 ‘계몽된 이성’으로 쌓아 올린 현대 문명의 신화다. 점점 다가오는 기후위기를 생각하면 전망은 더욱 어둡다.

 

지난 4월에는 총선과 세월호 6주기가 있었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가 저지른 범죄이면서도 아직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여기에 더해 몇몇 정치인들은 막말과 끔찍한 혐오의 발언을 서슴지 않아 왔다. 다행히 국민들은 이번 총선을 통하여 이러한 쓰레기 같은 정치인들을 어느 정도 청소해 주었다. 4·16재단 이사장인 나로서는 고맙기 그지없는 결과다.

 

내가 그날 추모사에서 한 말이 있다. “저는 슬픔에도 ‘반감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월이 가면 아이들이 불어 보낸 바람이 우리들의 슬픔을 조금씩 깎아 반감됩니다. 또 슬픔은 같이 나눌 때 반감됩니다. 더 나아가 영화나 연극, 그림이나 노래 같은 예술을 통해 슬픔을 나누면 또 한 번 반감됩니다.”

 

내가 세월호 참사 이후에 이 비극적인 참사를 여러 점 그렸다. 그중 한 작품의 제목은 ‘희망도 슬프다’다. 검푸른 망망대해에 노란 네모난 창문과 흰 구름이 떠 있는 그림이다. 세월호 참사에 눈물을 질금거리며 그린 그림인데 공감하면 이런 멋진(?) 그림도 나오는 법이다.

 

어쨌든 코로나 사태는 세계적인 재앙이다. 이 계속되는 재앙으로 우리는 얻은 것보다 잃어버린 것이 많을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다른 사람을 보듯, 또 ‘사회적 거리두기’가 상징하듯 인간들의 관계가 또 인간들과 세계의 관계가 파편화될지도 모른다. 진정 더 두려운 것은 이러한 재난 뒤에 찾아오는 우리의 삶 자체를 저질로 만들고 파괴할 ‘문화적 진공상태’일 것이다. 이성의 지배 바깥에 있는, 그리고 진리 표현의 가능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 예술을 끌어들여 자연과의 미메시스를, 즉 공감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마스크로 가려진 서로의 얼굴에서 눈빛을 별빛으로 주고받는 감성의 회복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미 ‘감성혁명’이라 일컫는 ‘68 학생혁명’에서, 또 우리의 광화문 촛불혁명에서 감성이 다시 피어나는 걸 보지 않았는가. 우리는 그러기 위해 감성의 언어와 운율로 빚은 시와 노래 또는 감성의 형상과 색채로 빚은 그림이, 때에 따라서는 온몸의 감각으로 추는 춤이 필요할 것이다. 자 이제 두려워 말고 자유스러운 감성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자. ‘조르바’처럼 춤을 추고, 김민기의 ‘상록수’ 노래를 부르며 말이다.

김정헌 ㅣ 화가, 4·16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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