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한미 워킹그룹’은 남북 자율협력 가로막는 ‘미국의 덫’이죠”[정세현 회고록]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6. 13. 08:09

“‘한미 워킹그룹’은 남북 자율협력 가로막는 ‘미국의 덫’이죠”

등록 :2020-06-10 21:30수정 :2020-06-11 02:13

 

[짬] 정세현 민주평통 부의장

 

정세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10일 회고록 출판기념 간담회에서 분단사를 관통해 통일의 길을 열어온 40년 세월을 회고했다. 사진 이제훈 기자

 

정세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1945년 6월16일 ‘만주국 싼장성 자무쓰시’(현 중국 헤이룽장성 자무쓰시)에서 태어났다. 세상의 빛을 처음 본 지 두달 만에 광복을 맞아 아버지의 고향 전라북도 장수로 ‘귀향’했다. 일제강점기의 끄트머리에 세상에 나와 한국전쟁과 오랜 분단의 세월을 헤쳐온 그의 삶은 곡절 많은 한국 현대사 그 자체다. 그는 서른셋의 서울대 외교학과 박사학위 과정 학생이던 1977년 11월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공산권연구관실 보좌관(4급)으로 ‘북한’과 인연을 맺었다. “북한 자료도 맘껏 보고 월급도 챙길 수 있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첫 걸음이다. 하지만 그는 그뒤로 40년이 넘도록 “끝도 시작도 없는 통일의 미로”를 헤매고 있다. 운명이다. “북한과 마주한” 그 긴 세월 속에서 가장 슬픈 기억과 기쁜 기억을 물었다. 10일 오전 서울 창비서교빌딩에서 진행된 그의 회고록 <판문점의 협상가-북한과 마주한 40년>(대담자 박인규·창비) 출판기념 기자간담회에서다.

 

‘판문점의 협상가-북한과 마주한 40년’

대담 형식 회고록 펴내고 기자간담회

“끝도 시작도 없는 통일의 미로”

 

1977년 박사과정때 국토통일원 들어가

“남북정상회담 ‘무산-성사’ 가장 기억”

“가장 기대를 거는 것은 국민의 힘”

 

정세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이 10일 창비서교빌딩에서 회고록 출판기념 간담회를 열고 있다. 사진 이제훈 기자

 

“1994년 7월25~27일로 예정된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이 김일성 주석의 사망(1994년 7월8일)으로 무산됐을 때가 가장 실망스러웠다. 우리 민족의 운명이 여기까지인가 하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김영삼 대통령의 통일비서관으로 잠도 자지 않고 회담을 준비하던 때였다.”

 

그때 그는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에서 북쪽의 경제적 어려움을 풀어주며 군사적 도발을 막고 한반도의 평화를 관리할 합의를 이끌어내려 했다. “김영삼 대통령한테 입력한 개념은 분단 한반도에서 군사적으로 조마조마하게 사는 공포에서 해방되려면 북쪽이 군사적으로 대남 적대행위를 하지 못하게 해야 하고, 그러려면 경제가 어려운 북쪽의 상황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000년 6·15 공동선언의 문제의식과 크게 다를 게 없다.”

 

가장 큰 슬픔은 가장 큰 기쁨의 다른 얼굴이다. 삶의 역설이다. 그가 “가장 희망적인 날”로 기억하는 건, 2000년 4월10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6월13~15일 평양) 발표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기회를 잃고 ‘우리한테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나’하고 한탄을 했는데, 만 6년이 지나지 않아 그날이 왔다.” 그는 이 대목에서 환하게 웃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그는 다양한 자리에서 북한을 상대했다. 남북관계가 대결로 점철된 냉전기에서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던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 이후 탈냉전기를 관통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땐 통일부 장관으로 남북을 잇는 길을 맨 앞에서 열어갔다.

 

687쪽에 이르는 ‘벽돌책’인 회고록은 정세현 특유의 입담과 통찰력이 잘 버무려진 생생한 사례와 기록으로 가득하다. 그의 부친은 해방된 조국에서 한의원을 개업했고, 그 덕에 어려서부터 한학에 익숙했다. 70년 분단 사상 최대 인적교류의 장이던 금강산관광사업의 별칭인 “햇볕정책의 옥동자”는 그의 작명이다. 그는 통일부 장·차관 시절 숱한 출입기자들의 아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가까워질수록 미국의 간섭은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지만 강력한 압박으로 다가왔다”고 그는 회고록 서문에 적었다. 한국 외교의 전제처럼 인식되는 ‘한미공조’라는 개념의 탄생과 관련한 그의 전언은 서늘하다. “김영삼 정부 때 핵문제로 미국과 엇박자가 심했다. 그때 미국이 한국을 묶어놓으려고 꺼낸 게 ‘한미공조’라는 말이다. 공조를 이유로 사사건건 쥐어박으니 그 기가 센 김영삼 대통령도 결국 미국 하자는 데로 끌려가더라. 1994년 미국의 영변 핵시설 폭격 계획은 지금도 생각만 하면 끔찍하다. 실행됐으면 한반도가 어찌 됐겠나?”

 

그가 새삼스레 ‘한미공조’라는 개념의 본질을 상기시킨 건, 2018년 9·19 남북군사합의 뒤 미국이 꺼내든 ‘한미 워킹그룹’을 “한국 외교부가 아무 생각 없이 덥석 받아들인” 데 대한 짙은 아쉬움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한미워킹그룹은 제재를 빌미로 남북의 자율적 협력을 가로막는 미국의 덫이다.

 

출판사 창비는 정세현의 회고록을 “학자의 머리, 행정가의 눈, 시민의 가슴으로 북한을 바라본 평생의 기록”이라 표현했다. 과장은 없다. 그는 40년 넘게 북한과 마주한 고위공직자일뿐더러, <모택동의 대외관 전개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중국전문가이자 국제정치학자다. 그는 “기대를 거는 것은 국민의 힘”이라고 강조한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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