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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거는 한겨레] 좋은 언론의 물질적 토대 / 이봉현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6. 18. 05:10

[말 거는 한겨레] 좋은 언론의 물질적 토대 / 이봉현

등록 :2020-06-16 18:07수정 :2020-06-17 02:41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8일 오전 영장 실질심사를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봉현 ㅣ 한겨레 저널리즘책무실장(언론학 박사)

 

지난주 한 언론단체 행사에서 최근 개정된 한겨레 취재보도준칙을 소개하는 자리가 있었다. 분위기는 진지했고 질문도 많이 나왔다. 그런데 강연 뒤 지역 언론의 기자 몇이 다가오더니 “뜻은 알겠는데 우리에겐 먼 나라 일 같다”고 했다. 그들이 몸담은 곳에서는 언론 윤리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얘기였다. 한 지역신문 기자는 자기 회사는 편집국장이 2명이라고 했다. 저녁 무렵 편집국장이 가편집된 지면을 들고 올라가면, 또 다른 편집국장(사주)은 1면 머리나 사이드 기사에 줄을 긋거나 빼기 일쑤라고 했다. 광고나 협찬에 얽힌 기사들이다. 지역 방송의 한 기자는 자사는 차기 보도국장 후보를 2년 전에 광고 책임자로 발령하는 게 누구나 아는 관행이 됐다 한다. 처음 1년은 종전에 취재하던 안면으로, 나머지 1년은 차기 보도국장에 대한 ‘보험’으로 광고나 협찬을 얻어 오려는 것이다. 매출을 올려주는 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에는 홍보성 기사가 보답으로 따른다.

 

“가난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사랑이 창문으로 나간다”는 말이 있다.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언론 윤리와 취재보도의 원칙이 희미해지는 한국 언론의 현실이 이와 같다. 미디어 환경 변화로 사업모델이 무너진 전통 매체는 생존 위기에 몰려 있다. 지방 언론만의 문제가 아니다. 탄탄하던 서울 지상파 방송사마저 광고매출이 급감해 몇년 앞을 기약하지 못한다. 이런 속에서 언론이 자본에 독립적인 기사를 쓰기는 갈수록 어려워진다. 특히 최대 광고주 삼성과의 올바른 관계 설정은 <한겨레>에도 늘 힘든 도전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 여부 등 삼성 관련 기사가 쏟아져 나왔던 지난주, 언론비평 프로그램인 <한국방송>(KBS) 저널리즘토크쇼 제이(J)는 ‘삼성 앞에서 작아지는’ 언론의 보도 행태를 비판했다. 방송 중간에 한겨레에서 삼성 홍보실로 옮겨간 기자가 언급됐다. 비판적인 언론사 기자마저 홍보맨으로 영입하는 삼성의 ‘치밀한 언론관리’ 사례라며, 지난 2017년 1월 영장이 기각돼 이 부회장이 풀려날 때 구치소 앞에서 해당 홍보임원이 가방을 받아드는 화면을 반복해서 보여줬다. 방송에 앞서 <저널리즘토크쇼 제이>는 이 장면을 ‘구 한겨레 기자가 이재용 가방 셔틀 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짧은 영상으로 만들어 홍보용으로 유포했는데, 유튜브에서 많은 이들이 시청했다.

 

착잡한 일이지만 화면이 보여주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자극적 장면이 감추어 버리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을 저널리즘비평 프로그램이라면 고려했어야 한다. 이 부회장이 불법 로비 혐의 등으로 법정에 서게 된 2016년 최순실-박근혜 게이트 보도를 주도한 뒤 한겨레는 3년 가까이 삼성 광고가 대폭 삭감되는 어려움을 겪어왔다. 2007년 말 김용철 변호사가 이건희 회장 일가 비자금을 폭로한 내용을 한겨레가 특종 보도했을 때도 약 3년간 삼성이 광고를 끊거나 줄여 직원들이 무급휴직을 하며 버텨냈다. 이 방송이 암시한 것처럼 삼성의 ‘치밀한 관리’가 통했고, 한겨레가 삼성의 ‘가방 셔틀’을 했다면 지난 12년 중 6년 가까이 이런 일이 일어났겠는가?

 

이런 질곡에서 벗어나려면 한겨레도 광고나 협찬 외에 후원이나 디지털 구독에 기반을 둔 수익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내야 한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성공 사례가 속속 나온다. 특히 코로나19 위기로 믿을 만한 정보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디지털 유료독자가 늘고 있다. 프랑스의 <르몽드>는 디지털 유료구독자가 지난해 말 23만명에서 올 5월에는 30만명으로 늘었다. 독일의 주간지 <디 차이트>는 지난해보다 구독자 수가 배로 증가했다. 미국 <뉴욕 타임스>는 400만명 이상의 디지털 유료독자를 확보했고, 영국의 진보언론 <가디언>은 100만명 이상의 후원자를 확보해 오랜 적자에서 벗어났다. 한국은 걸음마 단계이다. 포털 중심의 뉴스 소비, 언론에 대한 낮은 신뢰, 뉴스는 무료라는 뿌리 깊은 인식 등 걸림돌이 많다. 하지만 멀어도 꼭 가야 하는 길이다.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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