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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전 대법관 “민주주의는 모르는 다수가 ‘숙고’로 다스리는 체제죠”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7. 11. 05:23

김영란 전 대법관 “민주주의는 모르는 다수가 ‘숙고’로 다스리는 체제죠”

등록 :2020-07-10 05:59수정 :2020-07-10 10:05

 

김영란 전 대법관, 영·프·미·독·한 헌법 둘러싼 역사의 현장 소개
“다크웹 사건, 형량 너무 낮아 나도 충격…사법 엘리트 ‘경의’ 부족”

김영란의 헌법 이야기: 인간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역사
김영란 지음/풀빛·1만6000원

 

8일 오후 서울 관악구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만난 김영란 전 대법관은 “촛불 이후 직접 민주주의 움직임, 개헌 논의 등을 지켜보며 ‘민주주의는 자격 있는 사람만 하는 것인가’를 오래 고민하고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책 솔직히 어땠어요? 책 내고 만난 첫 독자라서 너무 궁금해요.”

 

8일 오후 서울 관악구 한 카페에 도착한 김영란 전 대법관은 자리에 앉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눈이 반짝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는 10일 출간되는 <김영란의 헌법 이야기>는 그가 지금까지 써온 저서와는 조금 형식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헌법 여행’의 ‘안내자’를 자처한다. “헌법이 만들어지는 역사의 현장으로 여행을 떠나 보는 건 어떨까요? (…) 궁리 끝에, 여행에는 가이드가 있으니 여행 도중 떠오르는 가상의 질문에 가이드가 대답하는 방식으로 책을 엮어 보았습니다.” 머리말에서 이렇게 밝힌 그는 실제 베테랑 여행 가이드처럼 독자가 의문을 품을 만한 지점에서 정확하게 멈추고 담백하게 설명한다. 여행지는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그리고 한국. 책은 각 나라의 헌법이 어떤 상황에서 만들어졌고, 어떤 한계를 지녔으며 우리는 그들의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상세히 보여준다.

본격적인 헌법 여행을 하기 전, 지은이는 독자를 먼저 고대 그리스 극장으로 데려간다. 연극 주제로 자주 다뤄졌던 ‘경의’(reverence)와 ‘숙고’(deliberation)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경의란 인간의 한계를 자각하는 지도자의 덕목이고 (…) 숙고란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좋은 결정을 내리는 능력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경의란 정치인을 포함한 소수 엘리트 전문가가 지녀야 하는 겸손이고, 숙고란 시민이 엘리트의 말을 의심하고 질문하며 바람직한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대중이 숙고를 하려면 그에 앞서 ‘경의’의 감정을 지닌 전문가가 제대로 된 논변을 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엘리트(전문가)보다는 유명인을 정치인으로 뽑는데다 주장으로 점철된 논변을 하는 유튜버들, 가짜 뉴스도 많잖아요. 그러니 시민이 숙고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죠.”그러면서 지난 2018년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위원장을 맡았을 때 경험을 꺼냈다. 당시 김 전 대법관은 성별, 나이, 직업, 지역 등이 고르게 분포된 시민참여단 490명을 선발한 뒤 전문가와 질의·응답하는 과정을 거쳐 4가지 안 중에 바람직한 입시제도 개편 방향을 고르도록 했다. 당시 ‘비전문가’에게 예민한 교육문제를 맡긴다는 비판도 많았다. “무한정 묻고, 무한정 답하게 했어요. 그렇게 ‘숙의’를 거치고 투표했더니 초반과 다른 선택을 하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공론화위원장을 맡기 전에도 대의민주주의가 옳은가를 생각해 왔는데, 이 경험을 하고 난 뒤엔 비록 속도가 좀 느리더라도 국가의 큰 방향은 전문가의 토론을 경청하고 학습한 다수의 시민이 정하는 게 맞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민주주의는 소수 엘리트가 아니라 (사안에 대해) 모르는 사람의 ‘숙고’로 다스리는 정치라는 얘기를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김영란의 헌법 이야기>의 저자 김영란 전 대법관이 8일 오후 서울 동작구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국가의 큰 틀인 헌법을 개보수 하는 작업 역시 소수 엘리트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고 지은이는 보고 있다. 1987년 이후 그대로 굳어 있는 헌법을 개정할 때가 됐다는 요구는 자주 나왔다. 그러나 진단도 대안도 정파에 따라 제각각인데다 ‘개헌’이란 단어에 피로감을 느끼는 국민도 많아 시민의 ‘숙고’가 이뤄지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지은이가 우리 헌법에 영향을 미친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의 헌법 현장을 차례차례 들여다본 이유다.“영국 헌법은 최초로 왕권을 제한하고 법에 의한 과세라는 개념을 만들어 근대 법치주의의 시초가 되었어요. 미국은 127일 동안의 토론 끝에 1787년 9월 헌법 초안을 만들었고요. 반면, 프랑스는 공화정을 이룩하고도 수차례 왕정으로 돌아갔고,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결국 나치로 이어졌죠. 이런 역사의 흐름을 종합했을 때 ‘좋은 논변이 없으면 민주주의 현장은 후퇴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지은이는 책에서 ‘경의’ 없는 엘리트의 왜곡된 논변이 시민의 ‘숙고’를 얼마나 방해하는지 예를 들어 자세히 설명한다. 프랑스 혁명의 경우 특권계급은 특권계급대로, 시민들은 시민들대로 자기 입장에 유리하게 왜곡된 진실만 접할 수 있었고, 이 같은 불완전한 논변에 시민들의 즉흥성이 더해지며 오랜 폭력과 갈등을 낳았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도 비슷한 사례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가짜 뉴스가 널리 퍼짐에 따라 민주주의 자체를 혐오하게 된 사람들에게 민주공화국을 위한 선택을 하게 한 거죠.” 김 전 대법관은 이 책에서 우리 헌법이 개정되어야 할 방향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지 않고, 각 나라의 헌법이 겪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조용히 보여주는 식으로 선을 지키며 역사적 교훈을 일깨운다. ‘경의’의 감정으로 좋은 논변을 선보여 시민의 숙고를 도와야 하는 사람으로 ‘사법 엘리트’도 빼놓을 수 없다. 전직 대법관이자 현직 대법원 양형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에게 법조인의 ‘경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물었다.“판사, 검찰, 사법부에 가장 부족한 게 ‘경의’죠. 우리나라는 공부를 잘해서 엘리트가 되면 여러 네트워크를 통해 모든 걸 얻게 되는 구조잖아요. 노력으로 하나를 얻었는데 그걸 통해 모든 걸 얻게 되면 그건 정의가 아니죠. 바로잡아야 하고, 잡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영란의 헌법 이야기>의 저자 김영란 전 대법관이 8일 오후 서울 동작구의 한 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다크웹’을 이용해 세계 최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누리집을 운영한 손아무개(24)씨에 대한 미국 정부의 범죄인 인도 청구를 기각한 서울고법의 결정에 대해서는 “개별 사안에 대해서 말하는 건 부적절하다”면서도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크웹 사건으로 저도 충격을 받았어요. 다른 나라에 비해 말도 안 되게 (양형이) 낮아서. 그런데 (지난 4월) 법 개정이 이뤄진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통계나 조사 없이 양형위가 양형을 정하기 어렵고, 정하더라도 판사가 따르지 않으면 또 소용이 없잖아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사회 변화를 법원이 수용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양형위가 규범적으로 (양형을) 정할 수 있겠다고 판단하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경기도에서 출발해 50분 동안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에 왔다는 그는 인터뷰를 마친 뒤 지하철 사당역 인파 속에 섞여 사라졌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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