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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존 뉴톤의 어메이징 그레이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9. 11.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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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뉴톤의 생애


찬송 4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사자로 잘 알려진 죤 뉴톤은 1725년 7월 24일 영국 런던에서 선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었고 뉴톤이 어려서부터 그녀의 대부분의 시간을 뉴톤의 교육을 위해 바쳤다. 뉴톤이 세살이 못되었을 때 그녀는 뉴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그런 덕분에 네 살이 되었을 때 평범한 책들은 거의 다 옳게 읽을 수 있었다. 뉴톤은 기억력이 좋아 성경의 귀중한 작은 많은 부분들과 교리 문답, 찬송가와 시(詩)들을 외울 수 있었다. 그는 또래 아이들과 노는 것 보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을 즐거워 했으며 어머니가 가르쳐 주시는 것을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배우려 하였다.

뉴톤은 여섯 살 때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의 어머니는 뉴톤을 목사로 기르려고 처음부터 의도하였으나 그녀는 뉴톤이 일곱 살이 못 되었을 때인 1732년 7월 11일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뉴톤의 생애는 새로운 암흑의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그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앞으로 전개될 많은 도덕적인 타락의 여정 속에서도 넘어지지 아니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어릴 적 어머니의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 때문이었다. 후에 타락의 길을 떠나 회심한 후 그의 간증 속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나는 이러한 초기 인상(印象)들이 희미해졌지만,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어릴 적 어머님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모든 유익들로부터 멀어져 죄를 짓긴 했으나, 그 유익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나에게 죄에 대한 억제가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다시, 또 다시 나에게 돌아왔으며, 그래서 아주 오래가서야 나는 그것들을 전부 떨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내 눈을 열어 주셨을 때, 나는 그것들을 회고하는 데서 큰 유익을 발견하였습니다. 나의 교육 때문에 이처럼 수고하신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는 많은 기도와 눈물로 나를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

바울을 도와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던 디모데에게는 그의 어머니인 믿음의 여인, 유니게가 있었다(딤후1:5). 뉴톤도 어머니가 그렇게 일찍만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뉴톤의 방황도 없었을 것이고 아마 복음의 역사는 바뀌었으리라.
그러나 불행히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는 곧바로 재혼하였고 뉴톤은 부주의하고 천한 아이들과 섞여 그들의 못된 행실을 배우게 되었다. 아버님의 결흔 직후 그는 에?스에 있는 기숙 학교에 보내지게 되었고 거기서 교육을 받다가 11살이 되자 엄격한 규율에서 벗어나 선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어린 소년 뉴톤은 거친 선원들 틈에서 그들의 언어와 행동을 그대로 배우며 부도덕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어머니께서 심어준 신앙의 싹이 여리게 자라고 있었으나, 가시덤불과 같은 환경 속에서 그것은 열매를 맺을 수 없었다.
그는 17살때 까지 일곱번의 항해를 하였고 이 시기에 베넷트의 "기독교 수사서"(Benet's Christian Oratory)를 읽게 되었는데 이 책의 내용을 조금밖에 이해하진 못했지만 이 책에서 추천된 생활 양식은 매우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여 기도와 성경 읽기,그리고 일기 쓰는 것을 시작하게 된다. 이로 인해 뉴톤이 생각할 때에도 약간은 종교적이 되었으나 이러한 외관상의 선(善)은 확고한 기초를 갖지 못한 것으로 아침 안개나 새벽 이슬처럼 사라져 버리게 되었고 그의 생활은 전보다 더 나빠지게 되어 기도하는 대신 저주와 신을 모독하기까지 되었으며 아버님이 안 보실 때에는 극도로 사악한 짓들을 하게 되었다. 그는 지옥을 피할 수단으로 종교의 필요성을 이해하고는 있었으나, 죄를 사랑했고 죄를 버리기를 싫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때로는 상황이 허락하는 한 유혹들을 피할 수 있기 위해 사회를 절연(絶緣)하고자 애쓴 적도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의(義)에는 전혀 무지하며 자신의 의(義)를 세우기 원하는 한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했다.

"나는 매일의 가장 많은 시간을 성경 읽기, 묵상과 기도로 보냈으며 자주 금식했고 3개월 동안 모든 동물성 음식을 끊기도 했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하게 될까봐 누가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았고 이전의 못된 행위를 매우 진지하게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애통해 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이러한 진지한 분위기 안에서 어떤 큰 중단 없이 2년 이상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련한 종교였습니다. 그것은 많은 면에서 나를 죄의 세력 안에 남겨 놓았고 나를 우울하고, 어리석고, 비 사회적이며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드는데 이바지했습니다"라고 당시의 일을 말한다.

1743년 18세 되던 해, 아버지는 그가 해군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셨고 아버지의 추천장이 선장에게 전해짐으로 선장은 그를 해군 소위 후보생의 자리에 배치했다. 그는 외관상으로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존경을 얻을 수도 있었지만 규칙적이고 엄격한 생활에 싫증이 났고 또 못된 친구들을 만나게 되므로 탈영하게 되나 곧 체포되어 옷을 벗겨 매를 맞고 직위도 면직되어 아프리카로 가는 노예상선에 팔리게 된다. 노예생활에서 얻은 격심한 고통은 오랫동안 남아 있어서 그를 괴롭혔으며, 항해에서 겪은 과도한 추위와 비로 그의 몸과 정신은 극도로 상했다. 정신의 상처는 곧 회복되었으나 그때 상한 몸의 후유증은 계속 남아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죄의 수고와 삯을 상기(想起)시켜주는 추억의 재료가 되었다.

1747년 2월의 어느날 오후, 바닷가로 걸어 내려가고 있던 그의 동료가 지나가는 배 한 척을 보고 연기로 신호를 보냄으로 인해, 15개월간의 처절한 노예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뉴톤을 구해준 상선은 금, 상아, 염색용 목재와 밀납을 매입하기 위한 항해를 하던 중이었는데 그 배의 선장이 뉴톤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어 뉴톤은 상선의 선원으로 몇 개월간을 생활하게 된다. 그 기간 동안 많은 위험의 순간들이 지나갔으며 여러 번의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했음에도 그런 은혜의 손길들이 그 당시 그에게는 모두다 잊혀진 바되었고, 양심의 경고마저도 완전히 끊어져 단 한번도 양심의 제지(制止)를 받지도 않은 채 여러 달을 지내기도 하였다. 때로 병에 걸려 스스로도 죽을 것 같았던 때에도 죽음의 결과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1748년 3월 9일 비극이 일어나기 바로 전날 뉴톤은 아무 생각없이 "스탠호프의 토마스 아 캠피스"(Stanhope's Thomas kempis)를 읽던 중 "만일 이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면?"하는 생각이 떠올랐으나 곧 바로 쓸데없는 대화에 끼어 들므로 이런 생각을 잊으려 하였다.

그러나 주님의 때는 오고야 말았고, 그가 그렇게 꺼려했던 죄의 깨달음이 다가왔다. 1748년 3월10일 고향으로 오던 도중 뉴톤은 심한 폭풍우를 만나게 되어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이라고 부르짖었는데 이는 그가 처음으로 입밖에 나타낸 자비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한 자신의 말에 스스로 놀랐다. 이제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고 만일 "내가 오랬동안 대적해 온 성경 말씀이 사실이라면"하는 생각에 마음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런 중에 그는 과거의 신앙 고백, 부르심, 경고, 그가 만났던 구출의 사건들, 방탕한 생활 습관, 특히 복음을 비속한 조롱거리의 대상으로 삼았던, 비할데없는 철면피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성경의 전제(前提)들을 시인해 놓고 볼 때, 자신과 같은 죄인이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자신의 죄는 용서받기에는 너무도 크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제 그는 그가 그렇게도 조롱했던 예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생애와 죽음-자신의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중에 그를 신뢰하게 될 자들을 위하시는 죽음-의 상세한 부분들을 회고하게 되었으나, 예수에 관한 이러한 사실들을 사실로써 믿기보다는 사실이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이 시점에 와서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믿음을 얻느냐?"하는 것으로,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靈感)에 의한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께 신뢰와 소망을 둘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인지에 대한 확신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曆史)를 믿지 않으면서 그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알고 있었는데, 신약 성경을 읽다가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회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는 말씀에서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는 성령은 구하는 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그의 여가 시간을 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주님께 자비와 지도를 간구하는데 보냈으며, 신약 성경을 통독하면서 몇몇 구절들로 인해 충격을 받았다. 특히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그 탕자가 너무나도 자기 자신을 예시(豫示)해 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탕자를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선하심, 그와 같은 아들을 맞으러 달려 나가는 모습은 죄인들을 돌이키시는 주님의 선하심의 충분한 설명이 되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계속하여 많은 기도를 드렸고 자신이 신자(信者)로 죽을 수만 있다면 먹을 것이 없어 죽는 것까지도 만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일랜드에 도착하기 전에 그는 복음의 진리와 그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는 복음의 정확한 적합성에 관하여 만족할 만한 증거를 얻게 되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려고 육체로 나타나셨다"는 지고(至高)한 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전능한 구세주를 필요로 하고 있었으며, 바로 그런 분이 신약 안에 나타나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주님은 한 놀라운 일을 이루셨고 나는 더 이상 불신자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즐거이 과거의 불경(不敬)을 버렸고 진지하고 기꺼운 마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
이제 그는 잘못 보낸 과거의 삶을 뉘우쳤고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가치를 두었으며,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탕자는 아니었으나 그의 생활은 쉽게 변화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나가는 말은 헛되고 어리석은 말이었으며 자주 마음속에서 송사가 있었지만 급히 타락의 길로 떨어져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 외에는 과거와 거의 다름없이 나빠졌다.
런던으로 돌아온 뉴톤은 선원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예선의 선장이 되었으나 거기에는 폭풍과 질병, 선원들의 배신행위, 노예의 반란등 크고 많은 위험이 뒤따랐다. 그러다가 뉴톤은 심한 열병에 걸려 고생하며 영적 고독과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중 자신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졌다. 과거에 닥쳤던 위험들과 구출된 사건들 그리고 주님의 모든 선하심에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배신했던 행위들이 떠올랐다.
그는 후에 이 기간을 이렇게 회고한다.
"주님께서는 내가 수원(水源)으로부터 신선한 능력과 은혜를 계속 공급받지 않는 한, 나 스스로는 한 시간도 서 있을 수 없는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일깨워주셨습니다. "
마침내 그는 비인도적인 노예사업을 포기하고 1750년 2월 어머니의 옛 친구의 딸인 메리 케틀렛과 결혼하게 된다. 그는 이 결혼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합당한 때-주께서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신 후-연결된 것으로 믿었다.

후에 그는 리버풀에서 조수(潮水) 측량사 직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측량 기사의 자리는 그가 원하던 자리였고 그것은 그에게 많은 여가와 스스로의 방법대로 살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이 자리를 위해서 그는 아내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그의 아내는 최악의 고통과 병 중에 있었으므로 아내를 떠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심한 갈등을 한 후 모든 것을 주님의 처분에 맡기고 즐거운 심정으로 그녀를 떠나게 된다. 그가 떠난 후 그녀는 병이 점점 완쾌되었고 두 달쯤 후에는 리버풀에 정착해 평안히 살수 있게 되었다.

뉴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가시간을 어떻게 하면 잘 이용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를 작정하곤 이 주목적에 도움이 되는 외에는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이러한 목적에 대한 첫 시도는 신약과 그리이스어 역(譯) 구약성경(SeBt-uagint)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리이스어를 충분히 배우는 것이었다. 여기서 어느 정도 진보를 이룬 후, 다음 해에는 히브리어를 배웠고 2년 후에는 시리아어 공부를 시작하여 성경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 모든 연구들과 더불어 라틴어, 영어, 그리고 배에 있을 때 혼자서 배운 불어로 신학 부분의 최고 서적들을 계속 읽어 나갔다. 2∼3년 후에는 주로 글을 쓰는데 시간을 보냈고 성경 외의 다른 책들을 많이 읽을 시간은 갖지 못했다.

뉴톤은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라는 갈라디아서 1장 23∼24절 말씀을 묵상하던 중에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공중 앞에서 증거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고 이 희망 때문에 성경 원본을 계속적으로 연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좀더 광범위하게 일할 수 있도록 목사의 직에 종사할 것을 희망하는 많은 이들의 요청에 따라 1758년 요크의 대감독에게 안수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한다.

그후 1764년에, 뉴톤은 오올리의 목사로 와달라는 제의를 받고 오올리 교구의 목사가 되어 15년간 목회사역을 감당하였으며,자신의 마지막 일터에 대한 커다란 감회를 이렇게 말한다.
"가장 무지하고 가장 비천하고 가장 무참히 버려진 노예 중의 하나인 내가, 아프리카 연안의 참흑한 생활로부터 건지워져 마침내 세계의 도시 중에서도 으뜸 가는 교구 목사로 지명된 것은 여기서 그러한 은혜를 증거할 뿐만 아니라 그 은혜의 특이한 실증과 기념으로 서기 위함이요, 역사 설교 그리고 저술을 통하여 널리 세계에 그 은혜를 나타내기 위함이다.이것은 결코 내가 자격이 있어서 되었다고는 평가할 수 없는 사건이다. "
실제로 이러한 감회는 그의 생각 가운데 너무도 깊이 들어 있어서 어떤 곳에서든 단 하루도 그 기이한 사건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야기하지 않고 지나는 법이 없었다. 다정하고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성격인 그는, 그의 집을 모든 계층과 교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개방하여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 그의 친구들 특히 젊은 목사들 흑은 목사 지망생들에게 격려와 교훈을 주곤하였다.

1780년 그는 런던의 성 메리울노쓰 교회로 옮겨서 생을 마칠 때까지 28년간을성도들의 신앙성장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목회사역을 하는 동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였는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의 설교는 많은 이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뉴톤이 팔십이 넘자 그의 친구들 중에서는 그가 공중 사역을 너무 오래 계속하는 것이 아닐까 하여 "그만 두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라고 물을 때 그는 음성을 높이며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멈출 수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옛 아프리카의 신성모독자가 말을 할 수 있는데도 입을 다물 수 있다는 말입니까?"

1807년 12월 21일 죽기 한달 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죽는다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그리고 육체와 마음이 쇠할 때 우리 마음의 힘이요, 우리의 기업으로써 영원히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나는 내가 의뢰한 분을 알며 그 분이 내가 그에게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후로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니 그것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께서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입니다. "
또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 "더 밝은 빛, 더 큰 사랑, 더 큰 자유며, 이 후에 내 눈이 이 세상에서 눈 감을 때에, 나는 더 좋은 세상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전능하신 자의 날개 그늘 아래 사는 것은 얼마나 좋습니까?"
그가 운명하기 전 수요일, 그의 마음이 평안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주님의 뜻으로 만족합니다"라고.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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