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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람_칼럼 읽는 남자] 필자님, 옥상에서 만나시죠 / 임인택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8. 21. 04:49

[칼람_칼럼 읽는 남자] 필자님, 옥상에서 만나시죠 / 임인택

등록 :2020-08-19 18:10수정 :2020-08-20 02:41

 

 

임인택 / 여론팀장

 

지난주 금요일을 지나면서 7월 초 개편과 함께 새로 소개된 <한겨레> 칼럼진 모두가 독자청중과 최소 한차례씩 만났다. 유혜영 교수가 시작해, 정희진 여성학자, 문정인 교수, 이진순 대표가 받고, 서명숙 대표가 마무리했다. 무람없겠으나 하루하루 누군가를 선발로 등판시킨 야구 감독이나 그 선수를 응원하는 고독한 팬의 마음으로 칼럼을 받아 감히 무게를 재보고 데스킹이란 것도 하여 발행해온다.

 

글은, 쓰는 자와 읽는 자 사이를 잇는 뉴런 같은 것인지, 적이 오묘하다. 글 좋다 글 나쁘다 느낌이 선명할지언정 그 이유는 정연해지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필자에게 한번은 “글에 물기가 부족하다”고 말했고, 최근엔 (우리 필자는 아니지만) “논리에 물기가 부족하다”고도 한 적이 있다. (중동의 ‘사막일보’ 수습한테 빙의한 거니 ㅠ)

 

그래도 편집국 내 기자들끼린 화법이 간결한 편이다. “이게 기사냐?” 한마디면 된다, 보통은. 좀더 명료한 설명을 필요로 할 땐 “네가 기자냐”고 물어주면 되는 것도 같다. 농을 섞었지만 십수년 기자로 글을 쓰면서 들었던 말이다. 죄다 동의는 못 해도 수용을 못 해본 적은 거의 없다. 박완서 선생조차 “창조에는 숙련이 없다”며 “단 한번도 글쓰기가 쉬웠던 적이 없다”고, “끝도 없이 고쳤다”고 했으니 말이다.

 

가장 간결하지 ‘못한’ 화법은 이런 거였다. 말인지 방귄지 모를 문장을 소리 나는 대로 타이핑 중이던 부서 막내 기자를 데드라인이 삼킬 듯 쫓아오던 때였다. 부장이 더는 못 배기고 일어서더니 옥상으로 올라오란다. 따라나섰는데 웬걸, 9층 개방된 옥상정원이 아니라 통신시설이 설치된, 사원은 갈 일 없는 맨 꼭대기 옥탑이었다. ‘날 밀려고 하나? 아니지, 그럼 지면은 누가 채워?’ 소침해 있을 때 부장이 그랬다. “여기 와봤냐? 좀 눕자!” 둘은 좁다란 시멘트 바닥에 누워 (마감시간을 넘긴) 해거름 하늘을 보았다. ‘마감’이 창끝처럼 스쳐갔던 덜미도 적당히 달궈진 바닥에 이완됐고, 남산일까 한강에설까 불어왔을 그 바람에 거적때기인지 몸뚱인지가 빨래처럼 보송하게 말랐다. 잊지 못하는 9월 그날의 이유를 정연하게 말하자면 그냥 “좋았다”.

 

그 덕에 기사는 잘 마감했냐고? 아니다, 그때 나는 그냥 먼저 뛰어내렸어야 했다.(이후 그 기사를 찾아 읽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매번 좋은 글을 쓰진 못하지만 ‘좋은 글은 무엇인가’를 생각에서 놓아본 적이 없는 최근 몇달이다. 역대급 개편까지 한 터라 더 그랬을 거다. 다행히도 기존 필자에 더해 좋은 필자를 꽤 모신 것 같다. 좋은 필자는 좋은 글로 좋은 글의 공통점을 글재주나 감식이 부족한 ‘사막일보’ 기자에게도 일러주는 미덕을 지닌다.

 

좋은 글은 결코 활자만 오지 않는다. 글쓴이의 태도가, 과거가, 하여 삶이 온다. ‘명징’한 실용서를 써준 정대건 감독의 제 한 생애가 예시로 거짓 없이 오고(‘코로나 우울과 사회안전망’, “몇년 전 나는 삶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끊어진 채 알코올에 의존하고 폭식을 하기도 했다. 그때 읽었던 책들의 제목에는 ‘자살’이라는 단어가 많았다…”), 23차례 이사 뒤 강화 어귀에 무거운 닻을 내린, 그러나 결코 그 무게를 티 내지 않는 김금숙 작가의 표정(‘당신이 꿈꾸는 집’)이 함께 온다.

 

좋은 글은 때로 노래도, 맛도 싣고 온다. 데스킹 내내 그 노래만 듣고 그 입맛만 다신다. 지금 함께 성장하는 과정의 정서는 서한나 대표의 글(“때가 되면 떠나겠다는 생각은 지금 여기 예쁜 것을 사랑하지 못하게 했다”)과 노래에 있고, 이미 꽤 성장한 과정의 기억은 이충걸 작가의 글(“초기의 오해가 없다면 훗날의 키스가 완성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배웠다. 올리브와 홍어는 성숙의 윤리 뒤에서 예상치 못한 탁월함을 맛보여 주었다는 것을”)과 음식에 있었다.

 

칼럼이 용달차라면 또 반가운 화물은 웃음이 아닐까. 메마른 활자만으로 누군가를 웃게 해버리는 순간은 그야말로 활자가 뉴런인 탓이라 믿게 해준다. 짜부라진 투수에게 힘이 되는 코치진의 말을 추적했다며 탐나는 격려는 “어제저녁 뭐 먹었어?” “야수들 뒀다 뭐 해?” “네 공을 누가 쳐?”라고 읊어준 홍인혜 시인의 칼럼을 읽었을 때다.

 

국내 정상급 필력을 갖춘 한 교수가 여론팀장이 힘들 일이 뭐냐고 한 적 있었다. 고정 칼럼니스트의 지위나 수준답게 알아서 완성된 글이 알아서 도착하니 알아서 게재하면 되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교수가 다음 생에 꼭 여론팀장으로 태어나길 바라려다 그해 9월 어느 날 막내 기자를 옥상에 눕게 했던 부장의 고뇌를 헤아려봤다.

 

오직 아쉬운 건 한겨레 칼럼진과 여론팀장 사이에 옥상이 없고, 9월도 아니 왔단 거다. 그러하므로 글의 응원, 글의 보완이 필요할 때 ‘사막일보’ 담당자는 이래 볼까 궁리한다. 칼럼이 식상한 필자에게 “어제 뭐 드셨어요?” 오탈자가 많은 필자에게 “저와 교열부 뒀다 뭐 하게요?” 한없이 착하기만 한 칼럼의 필자에겐 “선생님 칼럼을 누가 까요?”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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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칼람-칼럼 읽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