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킹 목사 ‘암살’ 충격…‘평화사상’ 연구하고자 조지아대학 선택했다”[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8. 25. 04:20

“킹 목사 ‘암살’ 충격…‘평화사상’ 연구하고자 조지아대학 선택했다”

등록 :2020-08-24 06:08수정 :2020-08-24 07:43

 

1968년 4월4일 미네소타대학 수업중
정치학 교수 펑펑 울며 ‘비보’ 전해

1970년 박사학위 받고 미국 정착 결정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제안’도 거절
“박정희 독재에 ‘학문 자유 억압’ 우려”

토론토·텍사스 대신 애틀랜타로 결정
미네소타대학 지도교수들 ‘남부행’ 만류
“킹 목사 고향·인종차별 뿌리에 관심”

1785년 설립된 최초 공립대학 ‘조지아’
1961년에야 흑인 남녀 2명 입학 허용
“첫 흑인 등교 때 경찰 신변보호하기도”

길을 찾아서-38회 조지아대학 교수가 되다

박한식 교수는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죽음을 계기로 그의 고향이자 흑인 인종차별이 가장 극심했던 미국 동남부의 ‘딥 사우스’ 조지아주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1968년 4월4일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저격을 받아 숨진 킹 목사의 장례식은 4월9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존슨 대통령은 연방정부 건물에 반기 게양을 지시했고 1억2천만명의 미국인이 티브이로 지켜봤다. 사진 마틴루서킹박물관 제공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살다 보면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선택도 있고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 같은 일상의 선택들도 있다. 1970년 여름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중차대한 선택의 순간과 마주하고 있었다. 5년간의 공부를 모두 마치고 박사 학위 취득이 눈앞에 다가오자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미국에 남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하지만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라고 하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선택은 어렵지 않았고 며칠 밤을 새워가며 고심할 필요도 없었다.

 

사실 한국으로 돌아가 교편을 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 사람이 미국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소식은 신문 사회면 한 귀퉁이에 기념사진과 함께 기사로 실릴 정도로 드문 일이었다. 실제로 모교인 서울대에서 교수 임용 제의도 있었다. 서울대 정치학과에 교수로 재직 중이던 구범모 선배와 이홍구 선배가 연락해 한국으로 돌아와 후학을 양성해보라는 제의를 했었다. 서울대 교수 자리가 결코 쉬운 기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이미 미국에 남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기에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나중에 전해 들은 사실이지만, 내가 제의받았던 자리에는 정치학과 후배인 김학준 교수가 임용되었다.

 

사실 내가 미국에 남기로 마음을 정한 시기는 박사 학위 취득 훨씬 전이었다.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학문에 대한 열정과 열망이었다. 지난 연재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미네소타대학 시절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오직 공부에만 몰두했다. 책도 많이 읽고 과학철학, 사회학, 사회심리학 그리고 정치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강의를 닥치는 대로 수강했다. 그러면서 귀국보다는 미국에 남는 것이 나의 공부와 학문을 위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대학에는 한국과 비교해볼 때 학문과 연구에 매진하기에 훨씬 더 자유롭고 창의적인 환경과 풍토가 조성되어 있었다. 그 무렵 한국의 정치 상황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소장이 군복을 벗고 민정에 직접 참여하여 대통령이 되면서 3선 개헌으로 독재와 장기 집권 시나리오를 연출하고 있었다. 학문과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숨막히는 환경에서 연구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아마 그때 귀국했다면 암울한 정치 현실에서 숨죽여 살았든지 아니면 빨갱이니 간첩이니 하는 낙인이 찍혀 투옥과 석방을 반복하는 어려운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에 남기로 한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유년시절부터 앓고 있는 ‘평화병’을 한국에서는 치유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나라 전체를 옥죄고 있는 현실에서 북한을 공부하고 평화와 통일을 연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한국에 살면서 남인지 북인지 선택을 강요받고 싶지 않았고 한반도 밖에서 남북 양쪽을 좀 더 객관적이고 균형있는 안목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또한 필요에 따라 남과 북 모두를 방문하려면 미국에 남는 것이 좋다는 생각도 했다.

 

미국에 남기로 한 이상 학문도 학문이지만 가장으로서 당장 생계를 위해서는 직장이 있어야 했다. 나는 1969년 겨울부터 미국 여러 대학에 우편으로 취업 지원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운 좋게도 3개 대학에서 임용 제안을 받았다. 미국 남부의 조지아대학과 캐나다 토론토의 요크대학 그리고 텍사스에 위치한 앤젤로주립대학이었다. 특히 요크대학에서는 정치학과가 아닌 사회학과에서 임용 제의가 왔다. 아마도 내가 사회학 과목들을 많이 수강했고 사회학계에서 영향력이 상당했던 돈 마틴데일 교수가 추천서를 써준 덕분에 가능했던 것 같았다.

지난 5월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하면서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갈등이 또다시 폭발했다. 5월29일 애틀랜타의 시엔엔(CNN) 본사 앞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사진 연합뉴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나는 조지아대학으로 가기로 마음의 결정을 하고 있었다. 1785년 미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공립대학인 조지아대학은 외국 학생인 나에게는 과분할 만큼 좋은 대학이었고 특히 마틴 루서 킹 목사의 고향인 애틀랜타에서 아주 가까운 애선스에 캠퍼스가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마음에 흡족했다. 하지만 미네소타대학의 지도 교수들 대부분은 나의 조지아행을 말렸다. 갈 곳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조지아대학이 딥 사우스, 바이블 벨트, 선 벨트, 또는 딕시랜드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남부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명칭들이 암시하듯이, 미네소타대학 교수들 사이에서 남부에 대한 시선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편견이나 고정관념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에게 남부는 여전히 백인 우월주의가 득세하고 인종차별이 만연한 후진적 문화가 지배하는 곳이었다. 자그마한 동양인이 가서 버티기에는 힘들 것이라는 말도 여러차례 해주었다.

박한식 교수가 1970년 미국 정착을 결정하고 부임한 조지아주 애선스의 조지아대학은 1785년 개교해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대학이었으나 1961년에야 법원의 명령에 따라 흑인 학생을 받아들일 정도로 인종차별이 심한 남부 딥사우스의 중심부이기도 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그들의 진심 어린 조언에 감사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미국에 정착하기로 한 만큼 미국 사회를 좀 더 깊이있게 알고 싶었다. 미국은 땅덩어리도 크고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이고 지역마다 독특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내 생각에 굳이 직접 체험하지 않아도 동남부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문화는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동북부 지역인 뉴잉글랜드 지방의 색채는 영국 문화를 그대로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보스턴은 영국의 런던과 흡사하고 영국에서 이주해온 앵글로색슨족이 주류를 이루며 살아온 공동체였다. 영어 발음도 건축 양식도 아이비리그 학교들도 영국 백인 문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문화권이었다.

 

미네소타대학이 위치한 중서부 지역은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등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이주해온 이민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사람들도 체구가 크고 행동이 좀 느린 게 특징이었다. 중서부는 북유럽의 문화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캘리포니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은 동양인도 많고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며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사람들이 동부에서 이주해 살아온 지역이었다. 그리고 텍사스주와 애리조나주로 대표되는 남부 지역은 멕시코 이민자들이 많아 라티노 문화의 영향이 엿보이고 나바호족을 비롯한 많은 원주민들이 사는 지역이다.나는 미국의 문화와 가치관 그리고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행동양식을 아는 데는 역시 사우스이스트, 즉 동남부로 가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했고, 직접 살아보지 않고서는 진정한 미국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특히 인종 간 불평등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노예제도가 성행했고 그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는 동남부에 살면서 미국을 좀 더 면밀히 관찰해보고 싶었다.

암살 하루 전인 1968년 4월3일 마틴 루서 킹(오른쪽 둘째) 목사가 재시 잭슨(왼쪽 둘째) 목사 등 인권운동가들과 함께 테네시주 멤피스의 로레인 모텔 306호 발코니에서 군중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마틴루서킹박물관

1968년 4월4일 멤피스의 로레인 모텔 발코니에서 마틴 루서 킹 목사가 갑자기 날아든 암살범의 총탄에 쓰러진 직후의 장면이다. 이미 여러차례 암살 위협을 받았던 킹 목사는 39살 젊은 나이로 끝내 눈을 감았다. 박한식 교수는 이날 미네소타대학 수업중에 ‘비보’를 전해들었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사진 마틴루서킹박물관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암살범 제임스 얼 레이는 도피 두달 만인 1968년 6월8일 영국 런던에서 체포돼 99년형을 받고 복역 중 1998년 옥중 병사했다. 사건 직후 미 연방수사국(FBI)에서 배포한 킹 제임스 얼 레이의 현상수배 포스터. 사진 마틴루서킹박물관

 

동남부 문화에 대한 호기심만큼이나 조지아대학으로 마음이 끌렸던 이유는 바로 마틴 루서 킹 목사의 고향에 있다는 점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간디의 사상에 매혹을 느꼈던 나는 1965년 미국에 온 이후로 킹 목사에 대해서도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가 보여주었던 풍부한 학식과 심오한 사상에 동경과 경외로움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킹 목사의 사상과 정신에 더 몰두하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죽음이었다. 1968년 4월4일 나는 수업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비교 정치를 가르치는 로버트 홀트 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서면서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모든 학생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교수가 수업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펑펑 소리내어 우는 모습은 살면서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홀트 교수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방금 전에 멤피스에서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평생을 인권과 평등 그리고 평화로운 공존을 역설하던 킹 목사였다. 약자와 흑인에 대한 공감이 있었고 인간애를 실천하는 행동하는 양심이었다. 나는 킹 목사의 평화에 대한 사상과 철학에 매료되었고 특히 폭력을 이기는 것은 비폭력이고 사랑이라는 역설 논리가 큰 감명을 주었다. 폭력을 동원한 백인들의 무자비한 탄압에 질적으로 다른 방법인 비폭력으로 맞선다는 사상은 나의 인생과 연구에 영감과 교훈을 주었다. 또한 인류는 한가족이고, 그렇지 않으면 평화롭게 어울려 살 수 없다는 킹 목사의 명언은 내게 평생 마음에 간직할 신념이 되었다. 수많은 명연설을 남기고 떠난 킹 목사를 생각하면 30대의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렇게 심오한 진리와 지혜를 깨달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조지아주 애틀란타의 스위트 오번 일대는 1930년 킹 목사가 태어난 생가(사진)를 중심으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국립사적지가 조성되어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킹 목사는 40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생을 비극적인 죽음으로 마감했지만 그의 업적과 유산은 인류 역사에 길게 남아 있을 것이다. 최근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분출된 미국 사회의 내재적 모순인 인종차별을 볼 때 킹 목사의 사상과 철학이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나는 킹 목사의 모교인 모어하우스대학에서 평화학을 강의했던 것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고, ‘간디·킹·이케다 평화상’을 수상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 킹 목사와 내 이름 석자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의 고향인 조지아에 가서 그의 삶과 사상을 좀 더 깊게 이해하고 싶었던 50년 전 나의 선택은 참으로 옳은 것이었다.

 

1970년 봄 나는 설레고 흥분되는 마음으로 캠퍼스 인터뷰를 위해 조지아대학을 방문했다. 미국 대학의 교원 임용 과정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대학이 대동소이하다. 1차는 서류 심사로 진행하고 합격자를 대상으로 2차 전화 면접(요즘은 화상 면접)을 실시한다. 전화 면접이 끝나면 3명 또는 4명의 지원자를 캠퍼스로 초청해서 대면 면접을 한다. 캠퍼스 인터뷰는 지원자에게도 학교와 지역을 둘러보고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중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학연·지연·혈연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캠퍼스 인터뷰는 보통 1박2일 또는 2박3일 일정의 심층면접으로 진행되는데 빡빡한 일정으로 짜인 강행군이라는 점이다. 나도 조지아대학에서 2박3일의 캠퍼스 인터뷰를 했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범강의도 하고 연구 주제발표도 해야 했다. 동료 교수들은 물론 관련 교직원들과의 미팅 일정도 빠듯하게 잡혀 있었다. 정치학과 교수들을 비롯해 학교 관계자들과 함께 한 식사만도 6번이나 되었다.

 

캠퍼스 인터뷰 내내 한가지 내 눈에 띄었던 것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이 백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전해 듣기로는, 그 무렵 조지아대학 교수진 가운데 흑인은 물론 유색인종이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구성도 마찬가지였다. 백인 학생 일색이었다. 조지아대학은 미식축구로 유명한 학교였는데 풋볼팀에도 흑인 선수는 단 한명도 없었다.

1961년 1월9일 조지아대학의 최초 흑인 입학생인 샬린 헌터(가운데)와 해밀턴 홈스(오른쪽)는 경호를 받으며 등교를 해야 할만큼 전국적으로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사진 조지아대학 디지털 아카이브

1961년 1월9일 첫 흑인 학생 샬린 헌터(왼쪽 둘째)가 온통 백인들로 둘러싸인 채 조지아대학 캠퍼스를 처음 걷고 있다. 1970년 박한식 교수 역시 조지아대학의 유일한 아시안 교수였다. 사진 조지아대학 디지털 아카이브

1963년 졸업한 헌터(오른쪽)는 <뉴욕커> 잡지의 첫 흑인 기자를 비롯해 50여년간 저널리스트로 활약했고, 홈스(왼쪽)는 인근 에머리대학 의대의 첫 흑인 학생이 된 뒤 의사로 활동하다 1995년 별세했다. 사진 조지아대학 디지털아카이브

 

그도 그럴 것이 조지아대학이 흑인 학생의 등교를 허용한 것이 1961년이었다. 샬린 헌터와 해밀턴 홈스라는 두 흑인 남녀 학생이 3년간의 법정 싸움 끝에 입학 승소 판결을 받아냄으로써 조지아대학에 등교할 수 있었다. 그해 1월 등교 첫날 만일의 불상사를 대비해 경찰이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등굣길에 동행하는 해프닝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캠퍼스에 흑인 학생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샬린 헌터는 저명한 언론인이자 인권운동가로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나마 보이는 흑인들은 모두가 건물이나 도로 청소를 하는 단순 육체노동자들이었다. 처음 방문한 남부였지만, 내게 남부 흑인들은 순종적이고 복종적인 노예 문화에 여전히 길들여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의 여파로, 케이블 채널 ‘홈박스오피스(HBO) 맥스’는 지난 6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재생 서비스를 중단했다. 1930년대 조지아주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흑인 하녀(오른쪽) 등 인종차별적인 내용이 문제가 됐다. 사진 연합뉴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하녀 역을 맡았던 해티 맥대니얼(사진)은 1958년 흑인 여성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시상식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별실에 혼자 참석해야 했다. 사진 연합뉴스

 

인터뷰 내내 모두가 친절하게 대해주어서 임용되더라도 큰 걱정은 없겠구나라고 안도하긴 했지만 나중에 공립학교에 다닐 자식들을 생각하니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미네소타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지아대학에서 임용 제의를 받았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수락했고 1970년부터 2015년 은퇴할 때까지 45년간 조지아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했다. 다음 연재에서는 교육자로서 또 학자로서 조지아대학에서 보낸 45년의 세월을 반추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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