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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교회와 하나님의 거리두기 / 전정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9. 9. 05:05

[편집국에서] 교회와 하나님의 거리두기 / 전정윤

등록 :2020-09-02 17:55수정 :2020-09-03 02:41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인한 대면예배 금지 행정명령에도 일부 교회들이 대면 예배를 강행해 물의를 빚고 있는 가운데, 2일 오전 광주 북구 충광교회 앞에 “교회가 진심으로 미안합니다”라고 적힌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광주/연합뉴스

 

2천년 전 로마제국 변방에서 태동한 미약하기 그지없던 예수 운동이 제국을―전문용어로―‘복음화’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미국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는 <기독교의 발흥>(좋은 씨앗)에서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동원해 40년 1천명(인구 중 0.0017%)이었던 로마 기독교 인구가 250년 117만1356명(1.9%)에서 300년 629만9832명(10.5%), 350년 3388만2008명(56.5%)으로 매 10년간 40% 성장했으리라 추정했다. 스타크가 재구성한 초기 기독교의 발흥 배경을 뒤집어보면, 주요 기독교 국가에서 코로나19 사태는 훗날 사회학자들이 기독교 쇠락의 원인으로 언급할 만한 ‘중대한 사건’이라는 통찰을 얻게 된다.

 

165년부터 로마에 천연두로 추정되는 치명적 역병이 돌았다. 인구 4분의 1 내지 3분의 1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251년 또다시 비슷한 치사율을 가진, 홍역 추정 역병이 로마를 휩쓸었다. 속수무책 재앙 속에서 기독교 교리는 기성 종교에 없던 두가지를 제공했다. 급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인생에 의미를 부여했고, 무엇보다 ‘행동을 위한 처방’을 제공했다. 스타크는 비기독교인의 눈에 “기독교인의 방식이 효과가 있어 보였다”고 설명했다.로마의 다른 신들은 제물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여겨졌지만, 죽음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하거나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내세와 천국, 사랑이라는 교리가 없었던 비기독교도에겐 죽음을 무릅쓰고 타인을 치료할 이유가 없었다. 역병이 돌자 병자를 내다버렸고, 매장하지 않은 주검이 쌓여갔다. 천국을 믿고,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교리로 삼은 기독교는 달랐다. 기독교 공동체는 목숨 걸고 병자를 간호했고, 남의 주검을 매장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교리의 차이는 현격한 사망률 격차로 나타났다. 스타크는 “약물을 쓰지 않고도 성실한 간호만으로 사망률을 3분의 2 이하로 낮출 수 있다”는 의학적 설명을 동원한다. 가령 물과 음식만 제공해도 쇠약한 환자들이 사망하는 대신 회복하도록 도울 수 있다. 비기독교도의 사망률이 30%로 추산될 때, 기독교인 사망률을 10%로 가정한 이유다. 병자 간호에 적극적인 기독교인은 초기 발병에서 회복돼 면역력을 보유했을 개연성이 높다. 당시엔 죽음을 불사하는 방역 역량을 발휘하고, 사망률도 낮은 기독교인들이 ‘기적’으로 보였고 개종의 큰 원인이 됐을 것이다.

 

외신을 읽다 보면, 미국에서‘도’ 교회가 방역 걸림돌 중 하나다. 백인 기독교인 상당수가 현재 600여만명 감염으로 실패를 입증한 트럼프의 방역 정책을 지지한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주정부가 마스크 착용 의무화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자, 예배에 ‘예외’를 적용하지 않는 것은 ‘종교 탄압’이라며 소송을 건 교회도 있다.사실 감염병 이외에 스타크가 분석한 기독교 발흥의 다른 이유도 하나같이 주요 기독교 국가 교회의 현재 모습과 대척점에 있다. 교회가 감염병을 확산시키는 ‘잠재적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고, 사실은 팬데믹 전부터 사회 정의를 가로막는 ‘이익 집단’으로 치부돼온 현실이 심상치 않은 기독교 쇠락의 징후로 읽히는 이유다.

 

나도 교회에 다닌다. 교리가 바뀐 적이 없건만, 교회가 더 이상 ‘기적’이 아니라 공공의 ‘적’이 된 건 교리 탓이 아니라 사람 탓이다. 물론 미국에도 “‘가장 작은 자’를 박해하고 마스크도 안 쓰는 극단주의 교인과 우리는 다르다”고 말하는, 실제로 다른 교인이 있다. 한국 교인들이 “‘하나님 까불면 죽어’라는, 방역을 망친 전광훈과 우리는 다르다”고 여기는 것처럼. 안타깝게도 세상은 더 이상 기독교인의 그런 항변에 귀 기울일 마음이 없다. 교회가 이토록 처참하게 (이제야 이단으로 거리를 두려는) 이단 같은 종교 집단과의 차별화에 실패한 것은, 이단 탓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기독교인 탓이다. 사랑의 교리를 실천한 부흥기 기독교인의 삶이 기적이었다면, 교리라도 되는 것처럼 ‘하나님’과 거리두기를 실천해온 현재 기독교인의 사랑 없는 삶은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마태복음 5:13)인 짠맛을 잃은 소금일 뿐이다.

전정윤 ㅣ 국제부장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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