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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성적순 의대 진학이 던진 질문 / 황보연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0. 9. 06:31

[편집국에서] 성적순 의대 진학이 던진 질문 / 황보연

등록 :2020-10-07 18:18수정 :2020-10-08 02:39

 

황보연 ㅣ 사회정책부장

 

학부모가 되면 한번쯤 맡게 되는 시험감독을 나간 적이 있다. 중학생들인데도 교실에는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고요함을 깨고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든다. “선생님! 문제가 잘못 출제된 것 같은데요!” 시험지를 받아들자마자 즉석에서 따지는 모습이 생경했다. 감독 교사는 흔한 일이라는 듯, 당황한 기색 없이 담당 과목 교사를 호출한다. 평가 기간마다 교사를 찾아가 언성을 높이는 아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야 들었다. 학교 내신 성적이 반영되는 특목고나 전국 단위 자사고를 지원하는 아이들일수록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직접 출제 오류까지 챙기며 성적 관리를 하는 모습은 고등학교로 올라가면 좀더 살벌해진다. 내신 9등급을 매겨야 하는 교사들이 난이도 조절에 실패해 1등급을 아무도 못 받는 상황이라도 벌어지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지난여름 의대 정원 확대에 반발하며 집단행동에 나선 전공의·의대생들을 보면서, 1등급을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내신 성적과 수능 점수를 기반으로 학벌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있는 ‘젊은 의사’들과 초등학교 때부터 의대 진학에만 매달려온 ‘예비 의사’들이 같은 궤도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들에게 의사란 직업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대한의사협회는 자체 홍보물에서 “매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학창 시절 공부에 매진한 의사”를 실력 있는 의사로 묘사했다. 반면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의대 의사는 “성적이 한참 모자라지만 그래도 의사가 되고 싶어 추천제로 입학한” 사람들로 비하했다. 지나친 ‘성적 지상주의’라는 비판에 홍보물이 다소 수정됐지만, 의사의 등급은 성적순이라는 인식을 자인한 셈이었다.이런 인식은 2000년대 이후 심화된 ‘의대 쏠림’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시작점은 외환위기를 거치며 노동시장에 불안정한 일자리가 늘어나던 무렵과 일치한다. 한해 3천명 정도를 선발하는 의대 입시를 준비하는 연령은 갈수록 어려지고 있다. 의대를 잘 보내는 학교가 명문고가 되고 입시학원은 의대관 실적에 따라 서열이 재편됐다. 최근 한 입시 커뮤니티에서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도 합격했으나 의대 진학을 다시 준비하겠다’는 글에 ‘잘 생각했다’ ‘힘내라’는 응원 댓글이 달렸다.하지만 정작 의사의 자질을 길러내는 데 우리 교육이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의대 입시에 적성 무관은 기본이고, 진로 탐구는 생기부용 스펙으로만 존재한다. 의대 진학 뒤에도 사정은 비슷해 보인다. 이보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는 지난달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매일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의학 지식만 외우다가 금요일 오후에 2시간짜리 의료윤리 수업은 가벼운 마음으로 듣게 된다”고 말했다.전공의 집단행동은 이렇게 길러진 의사들의 우월의식과 보상심리를 그대로 보여줬다. ‘전문가’이자 ‘당사자’인 자신들이 정책 결정 과정에서 배제됐다는 점에 유독 분노를 표출했으나, 정작 정부와 소통하거나 대안을 모색하려는 시도는 전무했다. 정책 추진 ‘중단’으로는 안 되고 ‘철회’를 명시하라는 고압적 태도는 아예 정부는 의료정책에서 손을 떼라는 얘기로 들렸다. 그러는 사이, 필수 진료에 해당하는 응급·중환자실 환자들까지 방치되는 초유의 사태도 벌어졌다.이미 보건의료 연구자들 내에선 전국 상위의 시험성적이 불필요할 뿐 아니라 오히려 문제가 된다는 지적을 내놓은 지 오래다. 공감 가는 대목은 대략 이런 것이다. “성적순으로 의대를 가다 보니 전국적 성적을 받은 학생이 지역 불문하고 의대를 선택하게 된다. 지역 연고가 없는 학생들이 지방 의대에 다수 입학하게 되니, 의대를 졸업하는 순간부터 호시탐탐 수도권 지역이나 원래의 연고 지역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하게 된다. 이는 지역 의사 수급에 중대한 문제를 야기한다.”(‘적정 의사인력 및 전문분야별 전공의 수급추계 연구’, 정형선, 2011)코로나19로 우리 사회는 공공의료 확충의 필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하고 있다. 외려 의료계에선 ‘한국 의학도들은 공공의료의 정의조차 모른다’는 고백이 나왔다. 정부가 의사 양성 정책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봤으면 한다.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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