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5강) 세례요한의 광야의 소리! (마 3:1-12)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6:21

(제5강)      세례요한의 광야의 소리! (마 3:1-12)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400년의 침묵을 깨고 광야에 나타나 외치던 세례 요한에 대한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의 등장은 그 당시에 유대인들에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의 압제 밑에서 자유와 풍요함을 꿈꾸며, 예전 애급에서 종살이하던 자기 조상들을 건져 주신 하나님께서, 바벨론에서 종살이하던 자기 조상들을 건져 주신 하나님께서 이제도 오셔서 힘과 능력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는 이스라엘에게 굉장히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례 요한의 등장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셨고, 그 계획대로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데 하나님의 역사의 계획대로 그가 등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시고, 세계 모든 민족이 복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같은 위대한 임금을 보내주셔서 '그로 하여금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선지자를 세우시고, 그들의 입을 통하여 '장차 다윗과 같은 왕을 보내 줄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 메시야, 그리스도를 보내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4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위대한 임금, 구원자'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임금이 오시는 길을 미리 예비하고, 평탄케 할 준비하는 자가 먼저 올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40:3절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또 4절에서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준비하는 자가 왕보다 먼저 와서 오시는 왕의 길을 닦을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왕이 쉽게 오시도록 낮은 곳은 메우고, 높은 곳은 깍고, 고르지 않는 곳을 평탄케 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세레 요한이 이 일을 위하여 광야에 등장한 것입니다.
  이런 세례 요한을 예수님이 극구 칭찬하셨습니다. 눅7:28절에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이 보다 큰이가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에 선지자로 미리 와서 주님의 길을 예비한 사람이었으나 결코 오래 살지 못하고 불의와 부정에 항거하다가 헤롯의 칼날에 목 베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제목 소개!▶

 

  ▶1절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본문은 '그때에'로 시작됩니다. 여기 그때는 어떤 때입니까?
  ①세례 요한이 나타날 때입니다. 당시 로마는 가이사가 지배하고 있었고, 유대는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갈릴리 지방은 분봉 왕 헤롯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또 종교적으로는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었는데 예수님을 오랫동안 대적한 자입니다.
  이러한 때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고, 예언자들의 소리, 즉 하늘의 소리가 끊어진지가 400년이 지났습니다. 유대의 경건한 사람들은 예언자의 소리를 고대하고 고대하다가 지쳐서 이제 체념하고 있을 때, 400년의 침묵을 깨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나타났으니 이것이 세례요한의 출현입니다. 학자들은 이 사이를 구약과 신약의 '중간 사'라고 합니다.
  ②예수님이 나사렛에서 거처를 정하시고 어린 시절을 지나 장성하여 이제 생의 황금기인 30세에 이르러 공생애를 막 시작하려는 때를 가리킨 것입니다.
  먼저 세례요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왕은 어디서나 혼자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수행원이 따릅니다. 그래서 그 길을 예비하는 행렬이 먼저 지나가고 모든 준비가 끝나 가면 팡파르가 울리는 가운데 왕이 등장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만 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등장하실 때에 아무도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홀연히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사는 한 괴상한 사나이가 나타났습니다. 이분이 바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려 나온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세 가지 측면에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탄생이요, 두 번째는 사역이요, 세 번째는 그의 죽음입니다.
  ⑴그의 출생은 누가에 의하면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출생에 있어서도 예수님처럼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경건하고 거룩한 신앙 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은 애를 낳을 수 없는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눅1:7절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이런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눅1:13절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이때 그 남편(사가랴)이 그 말을 믿지 못해 일시적으로 벙어리가   되는 벌을 받기도 했으나 하나님은 엘리사벳을 통하여 세례요한을 잉태케 하셨습니다. 이러한 세례요한의 출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동정녀에게 잉태하여 태어난 것을 미리 보여준 사건입니다.
  눅1:36절에 예수님을 잉태하게 될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네가 이제 성령으로 잉태할 것'이라는 예언을 전하는데 마리아가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자 바로 세례요한의 잉태를 설명해 줍니다. 눅1:36-37절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또 예수님이 자라던 모습과 세례요한의 자라던 모습이 비슷합니다. 눅1:80절에서 요한은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고 했고, 눅2:40절에서 예수님은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할/
  ⑵그의 사역은 무엇인가? 세례요한의 첫 번째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복음의 일 성도 마4:17절에 보면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세례요한이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말은, '복음이 가까이 왔다는 말,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의 사건을 전한 것'입니다. 그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속하여 주시고 구원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가 가까웠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곧 오셔서 구령운동을 일으키신다는 철저히 예수님을 예비한 사역입니다. 또 세례요한은 그 이름처럼 세례를 베푸는 것이 그의 중요한 사역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고,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세례, 불 세례였습니다. 이것까지도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한 것입니다.
  요한의 생활은 '유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약대 털옷과 가죽 띠'를 띤 청결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느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겸손한 삶입니까?
  ⑶그의 죽음을 보자! 그는 자기 명에 죽지 못했습니다. 불의에 대항하고 부정에 항거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결국은 목 베임을 당해 쟁반에 올려 졌습니다.
  당시 갈릴리 분봉 왕으로 헤롯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었고, 그 사람에게 요한은 직언을 한 것입니다. 눅3:19-20절 "분봉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결국 헤롯의 칼날에 목 베임을 당해 쟁반에 그 목을 담겨 헤로디아에게 전해졌지만 그는 진리를 따라 살다가 갔습니다. 예수님도 33세에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처럼 예수님의 탄생과 삶이 비슷했습니다. 또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사람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과 태도는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본문 11절에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또 요1:27절에서도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겸손합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요3:30절에서 "그(예수)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주님을 높였습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의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참 행복한 성도들은 주의 일을 하면서도 주의 종을 높여야 합니다. 권사님, 구역장님, 목사님을 앞서 가서는 안 됩니다. 전도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은 예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요1:19절을 보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세례요한의 능력과 인기와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방불케 함을 느끼고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누구냐?' 그때 세례요한은 큰 소리로 '나는 예수가 아니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고백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가 예수 인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오직 예수님만 높였습니다. /할/
  요한의 설교는 능력 있는 불같은 메시지로 하늘의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숨기지 않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하고 요1:23절에서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능력 받고 은사가 있으면 착각을 합니다. 성령의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교회에 덕을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해야 합니다. /아멘!/
  ▶왜 세례요한이 광야로 나갔을까요? 아버지가 대제사장이었으니 아들도 그 뒤를 이어야 할 터인데 어째서 광야로 나가야만 하였을까요?
  ①영적 연단과 훈련을 위해 광야로 나간 것입니다. 광야는 인간의 정신을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인내심을 길러줍니다. 똑같은 동물이라도 집에서 기르는 가축과 산에서 이슬을 맞으며 살아가는 동물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집안에서 나약한 자로서 험악한 세상을 향하여 외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보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광야가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인가?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기고 승리해야 합니다. /아멘!/
  ②광야생활이란 어떤 것입니까? ⑴나를 포기하는 곳입니다. ⑵욕심을 버려야 하는 곳입니다. 욕심이란 인간을 부끄럽게 하고 죄에 빠지게 합니다. ⑶혼자서 가야 하는 곳입니다. 혼자 있을 때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얍복강가에 야곱도 혼자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2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요한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①회개를 외쳤습니다. 여기 '회개하라'의 회개는 '메타노이아'로 '생각을 다르게 하라, 생각을 고치라'는 뜻입니다. 회개는 성경 전체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회개는 '근본적으로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고쳐서 새 행실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단순히 머리로서만 계획을 수정하고 감정적으로만 후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전인격적인 참회인 동시에 철저한 변화를 가리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상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 마음의 생각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1-23)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엘타윌터'라는 사람은 '생각이 건강하면 행동이 건강하고, 생각이 병이 들면 행동이 병자 된다. 생각이 주고자 하면 언제나 부유하고, 생각이 인색하면 돈 많아도 가난하다. 생각이 깨끗하면 행동이 신사 되고, 생각이 추잡하면 생활이 부패한다. 생각이 예수이면 그리스도인이 되고, 생각이 부정적이면 한숨이 뒤따른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각이 바른 사람은 바른 삶을 살게되고, 생각이 악한 사람은 악한 행동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눅6:45절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참된 회개의 시작은 그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변화는 곧 '생활'의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회개가 중요합니다. /아멘!/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바울도, 베드로도 이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행2:38절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할/ 초대교회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맨 먼저 베드로가 전한 복음도 알고 보면 회개를 외친 것입니다.
  행26:20절에서 사도바울도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고 외쳤습니다.
  ⑴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던 자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맨 먼저 회개의 의미입니다. 호6:1절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⑵죄를 자복하고 통회하는 것입니다. 렘3:13절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⑶죄를 자복했으면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겔18:30절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지니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⑷죄를 떠난 사람은 이제 하나님을 바로 보는 것이 회개의 마무리입니다.
  호12:6절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 /할/
  ▶왜 회개해야 합니까? ⑴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눅15:7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⑵하나님께서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벧후3:9절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⑶회개한 자는 다시 일어납니다. 욥22:23절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아멘!/
  ▶회개는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8절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즉 눈물로 입으로 하는 회개가 아니라 열매 있는 회개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잎만 무성한 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불태우라고 했습니다.
  폼만 좋은 그리스 찬들이 참 많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에게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예수 믿다가 그만 둔 사람입니다. 또 회개하면서도 열매가 없는 사람이라고 하용조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 사람들은 믿는다고 말하지만 전도할 길이 없습니다. 차라리 안 믿는다고 하면 전도나 해서 새롭게 훈련을 시킬 수가 있는데 말입니다.
  진정한 교회 부흥은 양적 부흥이 아닙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부흥된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로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는 생활을 할 때,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부흥은 회개에 있습니다.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회개하고 생활의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일 큰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온 죄요, 그 다음 큰 죄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변화되지 않는 죄입니다. /믿/
  ②'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하라고 외친 세례요한의 메시지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천국 때문입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천국 없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요한의 메시지는 지금 천국의 왕이신 예수께서 바로 지금 여기에 등장하실 것이니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입니다. 곧 천국은 어떤 장소라기보다는 누가 통치하느냐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은 천국이 임했다는 말로 직접 해석했습니다. 천국의 지배자요 통치자인 성자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천지가 진동할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요, 예수님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아멘!/

 

  ▶3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본문의 말씀은 사40:3절의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하신 이 말씀을 이룬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사명과 사역에 대하여 눅3:5-6절에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세례요한의 사명은 간단합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고,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것입니다. '골짜기가 메워지고'라는 말은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낮은 골짜기를 채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 속에 열등감과 자존심을 치료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열등감과 자존심이 많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어도 기쁨이 없고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메워버려야 합니다.
  '높은 산이 낮아진다.'는 말은 교만함과 우월감을 깎아 내려야 한다는 뜻이고, '굽은 것이 곧아진다.'는 말은 '못된 성격들을 바르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험한 길이 평탄하여진다'는 말은 우리의 부정적인 과거를 깨끗하게 청소하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영적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멘!/

 

  ▶4절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4절은 세례요한의 겸손한 생활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자연스럽게 메뚜기를 잡아먹고 들에 있는 석청(야생풀)을 취하여 먹었습니다.
  '석청'은 꿀을 말하고 '약대 털옷'은 일종의 가죽옷을 말합니다. 자칫 부유한 사람들이 먹고 입는 것 같이 보이지만 당시 광야에는 이런 것들이 흔했습니다. 죽은 낙타의 털로 옷을 해 입고 그 가죽으로 허리띠를 만들었으며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보면 그의 생활이 얼마나 주님 앞에 헌신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약대 털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광야 생활에 잘 적응해 나간 것을 알 수 있으며,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다닌 것으로 보아 '항상 자기 자신을 다스려 주의 말씀으로 무장해 나감으로 안일하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가 이 세상의 부귀 영화, 향락 등에 연연해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이 시대의 우리에게도 요한처럼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의복이나 음식 자체에만 헌신을 담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생활은 '그 밑바탕에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드려진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믿/ 그렇습니다. 그 마음속에 진정 하나님의 일이 크고 귀해서 세상 것들을 포기하는 그 자세가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할/

 

  ▶5-6절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본 절은 요단강가에서 세례를 베푼 세례요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이라고 11절에서 말했습니다.
  세례를 준다는 말은 헬라어로 '밥티조'인데 그 뜻은 '잠근다, 씻는다, 뿌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침례교에서는 잠근다는 의미를 강조해서 침례로 자랑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례의식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옛사람을 장사지내고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신앙고백을 하는 자에게 주는 표입니다.
  유아세례는 그 부모가 그 아이를 주의 뜻대로 바치겠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하겠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물세례는 입교의 형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불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누가 이 불 세례를 줍니까? 예수님이 주십니다. 11절 하반절에서 세례요한이 증거합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우리가 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할/
  성령의 불 세례를 받아야 죄를 태우고 교만을 태우고, 게으름과 나태함을 태우고 새롭게 뜨거워집니다. 불 세례 받는 사람은 능력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묵묵히 믿음의 길을 갑니다. 순종의 길로, 희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능력이요, 희생이 능력이요, 순종이 능력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불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 인격이 바꿔지고, 생활이 바꿔지고 그 모습이 바꿔집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으며 살게 됩니다. /믿/ 우리 모두 이 성령세례를 받으십시다. /할/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눅11: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천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했으므로 그 약속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행2:38절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또 순종하는 자에게 옵니다. 행5:32절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아멘!/

 

  ▶7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본문을 보면 세례 요한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서 강력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세례 요한은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무시무시한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세상이 잘못할 때, 지도자들이 바로 서지 못할 때 이런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교회가 오히려 사회로부터 이런 욕설을 듣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5: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상황을 보면 믿지 않는 자들이 믿는 자들을 책망하고 질책하는 시대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기독교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소리가 들려오지만 우리는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항상 어떤 큰 사건 뒤에는 크리스천이 들어 있습니다. 좋은 사건에 들어 있으면 감사할 일이지만 그렇지 못한 불경스러운 사건에 더 많이 들어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이 들어 각성하고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할/
  ▶여기서 우리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신앙을 알아봐야 합니다. 당시 몇 가지 종파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바리새인, 사두개파, 에세네파가 가장 큰 세력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정통 유대 종파입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를 뜻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성별된 자로 자처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조상의 전통을 준수하는데 엄격했습니다. 그들의 신학은 육체적 부활과 영혼의 불멸 천사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들은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을 구별하여 자신들은 세속에서 분리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안식일, 십일조, 금식,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들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지배계급에 속하는 사람들로 민중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극단적인 독선과 형식주의, 외식주의에 빠져 위선자들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느나 능력은 없는 자'입니다. 그래서 외식주의자의 별명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두개파는 바리새와는 반대로 현세주의자입니다. 유대사회의 귀족계급에 속한 그들은 모세 오경만 믿었고, 내세도, 영혼불멸도 육체의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현실주의자, 합리주의자, 타협 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속 권력과 타협하여 유대사회의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원 대부분이 이들 사두개파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유대사회의 정치, 종교, 실력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가 중산층이었다면 이들은 상류층입니다.
  그런데 왜 세례요한이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습니까? 이들이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기 위해 왔다면 왜 그런 책망을 했겠습니까? 세례요한이 민중들에게 점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게 되자 자신들에게 '어떤 위험이 오지 않을까?' 하고 그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선지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었고, 신앙의 각성도 아니었습니다. '요한의 정체가 무엇인가? 세례를 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알아보기 위해서 온 자들입니다.
  그들은 종교를 빙자해서 권력을 쥔 자들입니다. 신앙의 생명은 그런 사람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들을 타락한 종교지도자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공격한 것입니다. 계12:9절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신앙은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혈통적 유전이 아닙니다. 다음절을 보세요!

 

  ▶8-9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그들은 구원이 자기들의 전매특허라고 생각합니다. 왜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런 상식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알곡이냐 쭉정이냐?'의 문제입니다.

 

  ▶10절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 복음은 심판을 예고하는 소리이며, 회개하지 아니하면 본 절에서 말하는 '임박한 진노'를 피하지 못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하심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습니다. 열매 없는 나무들은 다 찍혀 불에 던지울 것입니다. 손에 키를 들으시고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시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 넣으실 것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자! 주님이 다시 오시는데 나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살고 있습니까? 나는 쭉정이입니까? 아니면 알곡입니까?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알곡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11절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세례요한은 분명히 말했습니다(요1:23). '나는 소리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있는 말씀이고 자신은 로고스자체가 아니라 깨우쳐주는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는 흥해야하고 나는 쇠하여야한다'고 했습니다. '나 뒤에 오시는 이는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했고 그의 외침의 요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스스로 생각해 보라, 다시 생각해 보라, 되씹어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네 생활을 잘 살펴보아 잘못을 고치라는 말입니다. /할/

 

  ▶12절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내용이 있는 믿음이냐? 형식적인 믿음이냐?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 나무는 형식만 갖추었지 내용이 없는 쭉정이였습니다.
  마25장 열 처녀 비유에서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형식에다 내용을 닮은 사람이고, 등만 가진 다섯 처녀는 내용이 없고 형식만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알곡과 쭉정이를 구분하십니다.
  ⑴알곡은 열매가 있는 자요, 쭉정이는 열매가 없는 자입니다.

  ⑵알곡은 무게가 있는 자요, 쭉정이는 무게가 없는 자입니다.

  ⑶알곡은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지만 쭉정이는 교만한 자입니다.

  ⑷알곡은 세상과 구별되지만 쭉정이는 세상과 짝하는 자입니다.

  ⑸알곡은 환난을 이기지만 쭉정이는 못 견디는 자입니다.

  ⑹알곡은 천국백성이요, 쭉정이는 지옥백성입니다. /믿/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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