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강)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창 14:17-24)
시골에 사는 한 장사꾼이 행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친 몸을 잠깐 쉬어갈 양으로 양지바른 산 중턱 큰 바윗돌 옆에 짐을 풀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면서 바윗돌에 기대어 있다가 유연히 호랑이 꼬리를 발견했습니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호랑이가 큰 바윗돌이 갈라진 틈에 앉아 있었는데 그 장사꾼은 도망가나 그대로 있으나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는 바위 틈새로 나와 있는 호랑이 꼬리를 움켜쥐고 두 발을 바위 돌에 버티어 있는 힘을 다하여 잡아당기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지나자 기운이 빠져 견디기가 어렵게 되자 '사람 살려 달라'는 소리를 쳤으나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진땀을 흘리며 얼마동안의 시간이 흘러갔는데 마침 그 길을 지나는 스님을 발견하고 반가워하며 '이는 하늘이 보내준 은인'이라고 생각하고, 장사꾼은 스님에게 전후 사정을 다 이야기하고는 큰돌을 들어 호랑이 머리를 쳐서 죽여 달라고 부탁을 하자,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장사꾼을 바라보다가 하는 말이 '나는 불도를 닦은 사람인지라, 살생할 수가 없소' 하고는 그냥 지나갑니다.
장사꾼이 생각하니 기가 막힙니다. 그러나 모처럼 만난 사람을 놓치면 안 되겠기에 다시 스님을 불러서 '그러면 이 호랑이 꼬리를 놓으면 호랑이가 나와서 나뿐만 아니라 당신도 물어 죽일 것이 뻔한데 그렇게 되면 되겠소?' 그러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 스님이 반문했습니다.
장사꾼은 '내가 호랑이를 죽일 테니, 스님이 이 꼬리를 잡고 있으면 우리 둘이 살 수 있소?' 그러자 스님은 장사꾼의 말대로 호랑이 꼬리를 붙들었습니다. 임무를 교대한 장사꾼은 여유가 생겼습니다.
땀을 씻고 털썩 주저앉더니 서산에 지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보따리를 챙깁니다. 빨리 호랑이를 죽이라고 스님이 다급해서 외칩니다. 그러자 그 장사꾼은 여유 있게 '스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감동되는 바가 있어 이제부터 나도 불제자가 되고 싶소, 그러니 살생을 할 수가 없지요?'하고 유유히 사라졌답니다. 그 스님은 종교의 율법에 묶여 한 영혼이 귀함을 깨닫지 못하다가 그런 봉변을 당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형식이나 율법에 치우친다면 신앙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답니다. /할/ ◀제목 소개!▶
롬4:12절에 보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언약을 하셨습니다. 창12:2절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큰 민족'은 어떤 민족입니까? 그 '큰 민족'은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을 말합니다. 창17:6-7절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아브라함 이후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겼고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처럼 그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혈통 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어도 상관없었습니다. 오직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을 그들도 믿었을 때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일컬어졌고,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그들도 받았습니다. 그것은 '영생의 복이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이었습니다. /할/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갈3:9절에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믿음으로 사는 자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할/
여러분, 아브라함의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 아브라함의 신앙의 본을 받아야 복을 받습니다. /아멘!/ 오늘도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본문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시간에 상고한 내용을 다시 한 번 간추려서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기름진 땅, 소돔 땅을 택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곳은 영적으로 보면 신앙 밖의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엘람왕 그돌라오멜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소돔과 고모라 왕 및 그곳 작은 부락 5연합군과 일대 격전을 벌여 큰 승리를 얻었습니다.
이로 인해 소돔 땅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그의 가족과 재물과 함께 그돌라오멜의 포로가 되어 붙잡혀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생각해 보면 자기를 배신한 조카였지만 하나님의 사람답게 폭넓은 사랑을 가지고 자기 집에서 훈련시킨 318명의 군대를 이끌고 기습을 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모험입니다. 조카 룻을 구출하기는커녕 자신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조카를 포로로 잡혀간 채 그냥 둘 수는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먼길을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야간 습격작전으로 조카 롯은 물론 약탈당한 모든 재물과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을 구출해냈습니다. /할/
여러분! 어떤 싸움이던지 싸움은 사람을 두렵게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때로 영적인 전투를 벌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위해 우리는 영적인 무장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멘!/
한참 승전보에 들떠 먹고 마시고 자고 있던 그돌라오멜의 군대를 초전박살을 내고 많은 군사 노획물을 얻어 가지고 포로로 잡힌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과 그의 조카 롯과 함께 보모도 당당하게 개선장군이 되어 소돔 땅에 돌아옵니다. 17절은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맞이하는 장면입니다.
▶17절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개선해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누가 맞이합니까? 소돔 왕이 나와서 환영합니다. 가나안의 다섯 왕들이 이기지 못한 그들을 아브라함이 318명의 군사로 이길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을 물리치고 돌아옵니다. 그 때 아브하함의 개선을 축하하고 환영하기 위해 소돔 왕이 영접을 나왔습니다. 마치 일 국의 왕이 전쟁에 나갔다가 승리하고 돌아올 때 그를 영접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을 맞이했습니다. 사웨 골짜기라고 부르는 왕곡에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 왕곡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상당히 먼 거리까지 아브라함을 맞으러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살던 사람들처럼 첨단의 문화를 누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름도 촌스러운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묻혀 이름 없이 사는 한 촌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전쟁에 나가서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사로잡혔던 사람들과 빼앗겼던 재물을 찾아 돌아오게 되자 이제는 왕이 나와서 환영하며 영접을 하는 것입니다.
왕의 영접은 그가 곧 그 왕과 동등한 위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보다 더 존귀한 신분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소돔 왕은 패배자로서 승리한 아브라함을 영접하기 위해 지금 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야말로 그보다 훨씬 더 큰 지위와 더 높은 신분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할/
아브라함의 승리는 단순한 승리가 아닙니다. 그에게 높은 지위와 권세를 얻게 했고 부귀영화와 명예를 누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가 전쟁에서 얻은 것은 모두 그의 소유가 됩니다. 전쟁은 잔인한 것이 되어서 누구든지 이기면 그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의 손에 모든 포로들의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모든 재산은 승리자의 몫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찾아온 백성들과 재물은 모두 아브라함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전쟁은 침략을 위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찾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서 복음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침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전쟁입니다. 그 때문에 열심히 전도해야 합니다.
16절을 보면 잃어버린 모든 것을 찾았습니다. 잃어버린 재물도, 조카 롯도 그 집에 달린 모든 것을 찾았고, 거기다가 덤으로 세상 죄악으로 파묻히다가 끌려간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까지 찾아왔습니다.
사실 세상전쟁은 어떤 전쟁입니까? 인간의 야심에서 오늘 욕망을 채우려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아브라함의 전쟁은 사랑의 전쟁이요, 의리를 위한 전쟁이요, 회복을 위한 전쟁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전쟁은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남을 괴롭히려고 또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벌리는 전쟁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세상 전쟁의 결과는 파괴가 일어나고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고 재물만 빼앗아서 욕심만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 남녀를 끌어다가 자기들의 노예를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사람들을 잡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쪽 사람들만 데리고 왔습니다. 정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람처럼 멋쟁이였습니다. 이제 승리하고 돌아오는데 소돔 고모라 왕이 그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사웨 골짜기까지 나와서 환영해 주고 있습니다.
▶18절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살렘왕 멜기세덱도 왔습니다. 살렘은 예루살렘의 옛 이름입니다. 살렘은 살롬과 같은 뜻을 가진 '평화'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은 평화의 성입니다.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렘을 예루살렘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살렘에 있었던 멜기세덱이란 신앙이 깊은 제사장이 아브라함을 환영 나왔습니다. 사실 살렘 왕은 이 사건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자기 것 빼앗긴 것도 없고, 찾을 것도 없습니다. 예루살렘과 헤브론은 거리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약 30리쯤 되는 길입니다. 본문의 상황을 보면 먼저 소돔 왕이 아브라함을 환영했고, 그 다음이 멜기세덱입니다.
순서를 보면 아브라함은 소돔 왕의 환영 식에 먼저 참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소돔 왕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멜기세덱에게 깊은 관심이 있습니다.
오늘 18절에서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이 살렘왕은 좀 특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아브라함을 위해서 보낸 사람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멜기세덱은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멜기'는 '왕', '세덱'은 '의'란 의미로 '의의 왕, 평화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의 왕, 평강의 왕'이심을 마21:5절과 히7: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의 대제사장을 세우실 때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나온 레위 지파 중 아론의 반열에 속한 자를 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민족에서는 반듯이 제사장을 레위 지파에 속해야 하며 대제사장은 반드시 아론의 반차에 속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아론의 반차를 쫓든 대제사장을 세우시기 훨씬 이전 약 430여 년 전에 만민을 위한 제사장을 한 사람 세웠습니다. 그분이 바로 멜기세덱 대제사장입니다. /할/
제사장은 사람들을 대표로 해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속죄 제사를 드리고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직분입니다. 그러니까 아론의 반차를 쫓는 대제사장이 생기기 이전 벌써 450년 전에 하나님은 만민을 위해 대제사장을 세웠는데 그가 바로 멜기세덱입니다. 이는 '의의 왕, 평화의 왕'이요,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후에 바울은 히7:2절 하반절에서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론의 반차란 말은 처음에는 제사장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이었는데 두 아들은 하나님께 다른 불을 드리다가 하나님께 채찍에 맞아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아론이 대제사장에 직분에 있었고, 그의 계보에서 두 사람을 뽑아 제사장을 세웠습니다.
이들이 결혼해서 자식들이 퍼져 가는데 이들이 다 제사장의 가문들입니다. 세월이 가 제사장들이 너무 많으므로 일할 차례를 정했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 이번에는 어느 반차가 들어가라 하면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제사장의 반차를 좇아 기도하려 들어갔다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직분으로 이 땅에 오시는데 누구의 반차로 오시느냐 하면 아론의 반차로 오시지 않고 멜시세덱의 반차로 오시므로, 그러니까 혈통으로서의 제사장이 아닌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실 대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후에 바울은 히6:20절에서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이요 참된 양식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합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오셔서 당신의 살과 피를 모든 믿는 자에게 신령한 양식과 음료로 주실 것을 예표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마지막 만찬 식에서 떡과 포도주로 성찬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성찬의 원래 뜻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 기념이 무엇입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산다는 의미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유대인의 양식입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양식입니다.
주님은 요6장에서 '나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나의 피는 참된 음료'라고 하셨습니다. 나도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았고, 형제도 주의 보혈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함께 나누는 귀한 친교의 시간이 성찬식입니다. /할/
▶19절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칭찬하는 소리가 없습니다. '오! 아브라함, 놀라운 승리였소, 어쩌면 그렇게 용감하시오!' 이런 칭찬도 없습니다. 또는 '당신은 참으로 믿음이 훌륭하오!' 이런 칭찬은 없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나자 말자, 아브라함을 축복해 줍니다.
하나님의 종은 축복 권이 있습니다. /믿/ 여기서 우리는 멜기세댁의 기도를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천지의 주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천지만물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시고 주관하신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천지의 주재라는 말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보존하시고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것을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유명한 신학자 '찰스 하지'박사는 '어떤 일이 하나님이 지배하시기에는 너무 크다든지 너무 작다고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은 오직 한 일에 유의하는 것과 같이 모든 일에 유의하시며 한 장소에 계신 것과 같이 모든 장소에 계신다. 하나님은 풀잎 하나하나에 계시는 동시에 북두칠성의 행정을 인정하시고 별들의 대군을 통치하시는 그 하나하나를 기억하신다.'고 했습니다. /아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여!' 사람이나 만물이나 높은 존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극히 높은 분이시고 최고로 높은 분이시고 절대로 높은 분이시고, 영원히 높은 분이십니다. /믿/
그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 무슨 복을 빌었다는 구체적인 내용은 없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만 하시면 그 복 가운데 없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은혜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건강도, 재물도, 자손도, 신앙도, 능력도, 구원도, 영생도, 나라도, 민족도,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옵소서' 한 것입니다. /믿/아멘!/
▶여기서 우리는 당시 배경을 한번 더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전쟁에서 아브라함이 승리했습니다. 물질도 많이 노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계속 걸아 가는 참 승리의 복을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한마디로 재물을 많이 움켜진 아브라함이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돈을 벌었을 때 그때부터가 문제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그때부터가 문제입니다. 그때부터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더 철저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복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이 능력이 있어서 용감해서 전술이 좋아서 이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려주셨고, 간섭하셨기 때문에 이겼다고 하는 그런 신앙을 가지라는 기도입니다. /아멘!/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추켜세운 것이 아닙니다. 그가 더욱 겸손하도록 하나님의 은혜에 거하도록 그래서 계속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됨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받은바 은혜도 귀하지만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는 복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 더 큰 은혜를 사모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19절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축복기도를 해준 멜리세덱이 20절에는 아브라함에게 신앙의 권면을 주십니다. 먼저 기도해 주고 말씀을 주어야 복을 받아도 됩니다. 여러분 축복의 큰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깨닫는 것이 바로 큰복입니다. /믿/
▶20절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한마디로 '아브라함아! 하나님께서 너에게 은혜를 주셔서 승리하였으니 너는 이제 하나님만 높이는 삶을 살라!' 그래야만 승리가 계속된다는 권면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은혜 받았을 때, 복을 받았을 때, 능력을 받았을 때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만 자랑하고 하나님만 나타내면 더욱 채우시고 더욱 넘치게 해 주십니다. /믿/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뜻까지 속마음까지 감찰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영광이 가리우신 일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려는 삶이라면 얼마든지 30, 60, 100배 하늘보고를 열어 쏟아 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십시다. /아멘!/
20절 하반절에 역시 믿음의 조상다운 아브라함의 모습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인류 최초의 십일조가 여기서 나옵니다. 오늘 14장은 인류 최초의 전쟁이 있었고, 인류 최초의 십일조가 여기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기 전부터 십일조가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창세기에 나타날 십일조의 기원을 보면 창28:20절 이하에서 야곱이 하란 땅에 도피해가면서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듯이 드리겠나이다.' 십일조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헌금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서 말합니다.
⑴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장 기본적인 의무헌금이 있습니다. 이 헌금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말라기에서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말3:8-9절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절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⑵제사제물입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제사를 드릴 때, 제사장 앞에 재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구약시대의 재물을 오늘 신약시대에 와서 예배 헌금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구약의 제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제사에는 비둘기가 숫염소나 양, 소를 잡아서 제물로 바쳤습니다. 절대 빈손으로 제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 물질이 있는 곳에는 마음이 있다고 하셨기에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더 귀하게 보십니다.
⑶감사헌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시간까지 지켜주신 것에 대한 감사요, 앞으로 더더욱 감사의 조건이 넘쳐나게 해달라는 감사헌금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예배든 간에 감사에 인색하지 마십시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시느니라' /할/ 감사하는 자는 더 큰 감사의 조건이 있습니다. /믿/
⑷목적 헌금과 특별헌금입니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건축, 차량, 선교, 구제 등 목적 헌금과 특별 헌금이 있습니다. 국민에게는 여러 가지 의무가 있듯이 신앙 안에서 이런 의무가 있습니다.
십일조는 신앙의 기초요, 축복의 씨앗입니다. 또 십일조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는 하나님을 높이는 자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습니다.
레27:30절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또 신14:22절에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다시 한 번 말3:10절을 보세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할 수가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아멘!/
▶어떤 성경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그곳에 숱하게 많은 과실과 그리고 온갖 생물들을 다 만드신 다음에 특별히 하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을까요? 곧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얼마만큼 인정하고, 순종하며, 믿고 있는가?' 이것을 보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에게 에덴동산에서처럼 이 세상에서 물질을 주었습니다. 또 물질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너희가 모든 것을 다 너희 것으로 하되 특별히 십분의 일만 하나님께 받치라고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고 이것만 따먹지 말고 모든 것을 다 너희들의 것이라고 한 것처럼 한 것입니다. /이해가 되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할/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 일을 준 것이 최초의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거룩한 성별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이 전쟁 중에서 탈취한 노략 물 중에서 십분의 일을 거룩한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드렸다고 하는 것은 그것들을 '거룩히 구별하고 성별 시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십일조는 대표의 의미도 있습니다, 즉 열 개 중에서 하나가 모두를 대표하여 거룩이 성별 되어 하나님께 바쳐짐으로서 나머지 아홉도 거룩한 재물이 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또한 아브라함의 십일조 정신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마음의 감사를 십일조를 바침으로 밖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릴 때 이런 정신으로 드려야 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셨고, 나에게 승리를 주셨고, 나의 생명을 지켜주셨고, 나의 삶에 필요한 것을 베풀어주심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것 가운데서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우리는 잘못하면 십일조를 축복의 수단으로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십일조를 바치면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해서 십일조를 바치면 하나님이 그렇게 넘치는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십일조를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옳지 못한 생각입니다.
그 말씀은 당연히 바쳐야 할 십일조를 바치지 않으니까 십일조를 바치면 이런 복이 임하게 되는데 왜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느냐고 책망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십일조 행위를 통하여 재물의 소유주는 오직 하나님 자신이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물질을 맡은 청지기임을 알려 줍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림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민(聖民)된 고백의 표시를 삼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은 분명히 말라가 선지자에게 약속하신 그 축복이 우리에게 보너스가 되어 넘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21절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소돔 왕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만 인수하고 그리고 다른 재물은 다 아브라함이 가져라'고 했습니다. 소돔 왕으로서 처자식과 백성만 찾아도 대 만족이었습니다.
또 아브라함으로서는 자기가 승전하고 전리품으로 얻은 것이며 더구나 소돔 왕이 허락했으므로 그것을 다 취해도 아무 잘못이 아닙니다. 소돔 성이 재산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여느 사람이라면 아마 얼른 지체 않고 그 제물로 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22절을 보세요!
▶22절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손을 들어 맹세한다는 말은 항복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 굴복하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작정함으로' 이 말씀입니다.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이 말은 아까 멜기세덱에게 배운 말씀입니다. 역시 아브라함은 진리의 말씀을 배운 대로 써먹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배운 대로 따르면 승리할 줄 믿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배우고는 '아이구 성경이야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어떻게 그렇게 다 하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성경대로 순종하면 복은 공식적으로 옵니다. /믿으시면 아멘!/할/
▶23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왜 아브라함은 거절했을까요? 그것은 세속의 재물에 얽매이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받지 않아도 아브라함은 부자였습니다. 모든 부(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아브라함은 알고 있었습니다.
소돔 왕이 주는 상급은 아브라함에게는 뇌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소돔 왕의 뇌물을 거절한 아브라함에게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깨끗한 신앙을 보게 됩니다. '실하나 신들메 한 짝이라도 취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소돔 왕이 아브라함을 부자 만들어 주었다는 소문이 날까싶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싶어서 실 한 오래기라도 가져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신앙의 철학 몇 가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①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셨다는 사실에 감격한 것입니다.
②아브라함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을 상급으로 믿고 살았습니다.
③타인의 불행을 이용하여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④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세상의 모든 재물보다 더 크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⑤아브라함이 싸운 것은 재물 때문이 아니고, 자기 조카 롯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며 물건이나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아멘!/
▶24절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
본문에서는 자기가 받은 것을 거절했으나 자기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으로 그들이 취하도록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이번 싸움에서 공을 세운 장군들입니다. 딤전5:18절에서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일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삵을 주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할/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얻은 재물로 자기를 위해서 쌓아두지는 않았지만 이웃을 위해서는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돈을 얼마나 벌였느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쌓아 두었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돈을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돈을 나누어주었느냐에 있습니다.
미국의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는 훌륭한 사업가이면서 동시에 자선사업가였습니다. '재산을 가지고 죽는 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카네기는 경제의 불황으로 13세 때 미국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그는 학교교육은 초등학교 4년밖에 못 다녔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성공했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벌었고, 가장 가치 있는 일에 썼습니다. 사회에서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한 카네기는 문화, 교육, 예술, 국제평화를 위해 여러 연구소를 설립하고 자선사업에 헌신했습니다.
카네기는 1892년 뉴욕에 유명한 '카네기 홀'을 만들어 예술진흥에 주력하였고, 1902년 '카네기 연구소'를 창설하고, 1904년 카네기 '영웅기금'을 설립하고, 1905년 카네기 '교육진흥재단'을 창건하고, 1910년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을 창립했습니다. 또 1912년에는 '각 지방의 교회에 7천대의 파이프 오르간을 기증하고, 2천8백 개 이상의 도서관에 자금을 제공'했습니다. 그가 일생동안에 사회에 기증한 돈은 모두 3억 5천만 달러가 넘습니다. 지금의 화폐 가치로 따진다면 엄청난 물질을 이웃을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인물이 많이 우리 교회에서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큰 꿈을 가진 인물이 나와야 합니다. 열심히 돈을 벌되 목적 있는 데 쓰기 위해 모으고, 투자하고, 또한 기여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회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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